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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최병심(崔秉心) 절제사최공모자충렬기적비명(節制使崔公母子忠烈記蹟碑銘)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崇禎紀元後五周歲在著雍涒灘暮春上澣 秉心 崇禎紀元後五周歲在著雍涒灘暮春上澣 崔秉心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08년 최병심이 지은 절제사 최공모자 충렬기적비명 등을 합철한 것 전주의 학자 최병심(崔秉心)이 1908년에 지은 절제사최공모자충렬기적비명(節制使崔公母子忠烈記蹟碑銘) 등을 합철(合綴)한 것이다. 최두홍(崔斗洪)과 이희진(李喜璡) 그리고 최전구(崔銓九) 등이 지은 많은 글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본 자료는 문집 발간을 위하여 정서해 둔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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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유석승(柳石承) 죽촌최공묘표(竹村崔公墓表) 고문서-시문류-묘문 개인-전기-묘문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歲丁酉仲秋日 柳石承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57년에 유석승이 작성한 죽촌 최병기의 묘표. 1957년에 유석승(柳石承)이 작성한 죽촌(竹村) 최병기(崔秉璣, 1901-1949)의 묘표(墓表)이다. 죽촌은 월당(月塘) 최담(崔霮), 옹암(甕菴) 최생명(崔生明),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 처사(處士) 최필성(崔弼成) 등 도학과 문장, 그리고 충효와 절행 및 열행으로 이름난 인물들을 배출한 동방대성(東方大姓) 전주최씨(全州崔氏)의 후손이다. 고조는 만흥(萬興), 증조는 명익(命翼), 조부는 기채(其彩)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죽촌은 일찍부터 자질이 뛰어나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누가 과제를 내어 독촉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독서의 방법을 터득하여 문구 하나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정독하여 그 뜻을 끝내 알아내었다. 소년의 공부가 이처럼 진지하여 일취월장하자 그를 가르치는 선생도 그가 크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때는 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무너지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뒤섞여 있는 시기였다. 죽촌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새로운 책(新書)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모든 내용을 통달하자 마을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18세 때 박상기(朴象基), 김봉섭(金琫燮)과 함께 주산학교(舟山學校)를 설립하여 영재를 교육하는 것을 필생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배우는 학생들이 내는 월봉(月捧)으로 가까스로 생활을 유지하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배우는 생도의 수는 때로 수천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죽촌은 가난하게 생활하였지만, 결코 이를 걱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권을 가지고 그를 부추겼지만, 그는 결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도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 저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지고 사는 것이야 부득이한 일이지만, 부귀(富貴)하게 사는 일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치(國恥)를 회복할 수 없다면 내가 어찌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민을 가르쳐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묘표를 지은 유석승은 1961년에 ?호남모의록(湖南募義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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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유록 頭流山遊錄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智異山)의 다른 명칭이니, 백두산(白頭山)에서 흘러온 맥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높고 크게 되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산은 남방의 호남과 영남 사이에 웅거(雄據)하여 우뚝이 높고 휑하게 깊어 전국에 있는 여러 산 중에 견줄 만한 것이 드무니, 중국의 형산(衡山)이 멀리 남쪽에 있지만 오악(五嶽)192) 중에서 가장 큰 경우와 비슷하다.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전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설명하는 자들이 우리나라의 금강산(金剛山)은 봉래산(蓬萊山), 한라산(漢挐山)은 영주산(瀛洲山), 두류산은 방장산(方丈山)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방외(方外)193)의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무리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고 유가(儒家)의 청아한 선비나 달통한 사람들까지도 한 번 지리산을 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지난 갑진년(1904)에 선사(先師)194)를 모시고 남원에 도착하여 열흘 동안 머물렀는데 이 산의 입구와의 거리는 100리여서 가까웠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195) 어른이 산행(山行)을 가면서 나에게 따라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선사가 만류하며 말하기를,"이번 산행은 나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이 있네. 다만 국상(國喪)을 당하여 상복을 입은 몸으로 산을 유람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훗날에 도모하세. 그대는 그때에 나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으니 지금 객지 여관에서 그대를 놓치면 좌우 손을 잃는 것과 같기에 이렇게 만류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대저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려워 이듬해에 오적(五賊)196)이 나라를 팔아먹은 변고가 있었고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며 선사가 이미 섬에 들어가 자정(自靖)197)하여 임술년(1922)에 세상을 떠날 줄을. 지난 세월을 돌아보매 서글픈 마음이 끝이 없는데 이 산에 가자고 약속했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갑술년(1934) 봄에 궁하게 살며 무료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옛사람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198)던 생각이 떠올랐으며 지리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은 참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마침 아우 조자정(趙子貞 조제원(趙濟元))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청하여 3월 19일 그와 함께 출발하였다.20일. 저녁에 순창(淳昌) 적곡(赤谷)에 도착하여 방조(傍祖)인 농암(礱巖)199)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바위에 새겨진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글씨 '마롱암관수당(磨礱巖觀水堂)' 여섯 글자를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취봉은 우뚝하고 백산은 푸른데 鷲峯矗矗柏山蒼사척 높이에 만고토록 감추었네 四尺之高萬古藏감나무 밤나무는 당시에 손수 심었고 柿栗當年皆手種숲 속의 고택에는 끼친 향기가 있네 林泉故宅有遺芳선생의 도학이 이렇게 높지 않았다면 不因道學高如許어찌 선비들이 오래도록 잊지 않겠나 那得衿紳久未忘농암의 바위에 새긴 글자 진중하나니 珍重礱巖巖刻字연원이 화양에서 왔음을 증명하도다 淵源足證自華陽밤에 산 아래의 친척의 집에서 잤다.21일. 남산대(南山臺)를 지나 귀래정(歸來亭)에 올랐는데, 귀래정은 신말주(申末舟)200) 공이 지은 것이다. 신공(申公)은 광묘(光廟 세조)의 훈신(勳臣)인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데, 그의 형이 중대한 권력을 잡던 때를 당하여 무엇인들 구하면 얻지 못했을까마는 마침내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오직 의리만을 보고서 이곳으로 돌아와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고상하게 된 까닭이다. 광세지감(曠世之感)201)을 견디지 못하고 현판에 있는 송운(松雲) 강희맹(姜希孟) 공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정자를 짓고 돌아가 늙으려는 뜻은 作亭歸老意전원이 거칠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네 不爲田園荒누추한 시골은 참으로 편안한 땅이요 陋巷眞安土고관대작은 분수에 지나친 것이었네 萬鍾是濫觴옥천의 물고기는 낚시질할 만하고 玉川魚可釣아곡의 고사리는 얼마나 향기롭던가 峨谷蕨何香광세지감이 오늘날에 많으니 曠感多今日올라가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네 登臨整我裳밤에 신씨(申氏)의 집에서 잤다.22일. 남원 유천(楡川)의 방진(房珍)의 집에 이르렀으니, 작고한 방복지 환영(房福之煥永)의 조카이다. 방복지가 죽었을 때 만사(輓詞)만 보내고 직접 찾아가서 곡(哭)하지는 못하였기에 지금 비록 3년이나 지났지만 지나던 길에 방문한 것인데, 방복지의 열 살 남짓한 아들도 죽어 후사가 끊어졌으니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23일. 방씨 집안의 노소(老少)가 나를 위하여 술을 사와 사계정사(沙溪精舍)202)에 놀러 가자고 청하였다. 정사는 방씨의 선조가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400년 동안 대대로 지켜오고 있다. 판상(板上)의 제영(題詠)은 일재(一齋 이항(李恒))ㆍ남명(南冥 조식(曺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ㆍ상촌(象村 신흠(申欽)) 이하 명현들의 문장으로, 무려 100여 명의 작품이었다. 내가 남의 집안의 정자와 정사를 본 것이 많지만 대개 이처럼 성대한 경우는 없었으니, 또한 자손들이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한 수 지었다.오백년간 세업 이은 건 동방에 드문데 半千世業罕吾東문헌을 정사 안에서 징험할 수 있겠네 文獻足徵精舍中현판에는 선배들의 필적이 많이 있고 板上曾多先輩筆창문 앞에는 열 아름 소나무가 늙었네 牕前已老十圍松공명일랑 당시에 뜬구름처럼 경시하였고 鼎鍾當日浮雲薄강학은 서로 전해 다듬은 옥처럼 영롱했네 講學相傳琢玉瓏시험삼아 끝없이 흘러가는 사계를 보게나 試看沙溪流不盡덕 있는 집안에 남긴 음덕도 무궁하다네 德門遺蔭也無窮오후에 여러 벗과 용두정(龍頭亭)에 나가 놀았다. 용두정은 지당(池堂) 좌측 일대의 산등성이로,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아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데, 옛날에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나의 방계 9대조인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과 당촌(堂村) 황위(黃暐)203) 공이 이 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모두 문과 장원이 되었으며 동시대에 남원 부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204) 공도 일찍이 장원급제를 하여, 세 분이 함께 이 정자에 모여 성대한 놀이를 하였다. 그 뒤에 민공의 손자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도 대과에 급제하여 남원 부사가 되었는데,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서 일찍이 대과에 급제한 사람 2명과 잇달아 이 정자에 모여 그 선조의 성대한 자취를 추모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전한다. 단암이 이른바 "용두정 위에 용머리가 모였으니, 육십 년 사이에 두 번의 멋진 놀이였네.[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라고 한 곳이 이곳이다. 땅이 이미 용머리의 모양과 비슷하고 사람이 또 용머리를 차지한 사람이 모여 사람과 땅이 서로 부합하였으니 일이 매우 기이하다. 마침내 단암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포의들이 영락한 채로 용두정에 모여 布衣零落會龍頭용두의 예전 놀이를 추억하며 말하네 追說龍頭昔日遊안개 낀 경치는 저무는 삼월에 어여쁜데 煙景堪憐三月暮세상 바뀌어 온갖 인연 끝난 걸 어찌할까 滄桑其柰萬緣休쌓인 회포는 정히 교산과 함께 우뚝하고 積懷定與蛟山屹깊은 한은 요수에 흘려보내기도 어렵네 深恨難將蓼水流만년에 한 말 술 따라주는 친구 있으니 晩有故人斟斗酒세속먼지 씻기에는 옥경루보다 나으리라 滌塵勝似玉京樓돌아오는 길에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생각건대 예전에 좌망공의 조부인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은 진씨(晉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계공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고, 좌망공은 장원급제를 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며, 그분의 아우인 김호(金灝)도 진사가 되었으니, 그 또한 성대한 일이었다. 서계공의 아들인 김이길(金履吉)이 또 이언촌(伊彦村)의 동대(東臺)에 살았으므로 호를 동대라 하였다. 대개 이언과 지당 두 마을은 세상에서 일컫는 남원의 으뜸가는 터로서 각 성씨들이 함께 발원하였으며 명성이 다른 고을에까지 알려졌으니, 만약 서계공과 좌망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머물러 살았다면 그 복이 지금까지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여기에 나오지 않아 중엽에 쇠퇴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기에 다시 찾을 길이 없고 다만 노인들이 아무개 집안[某家]의 옛터라는 말만 서로 전하고 있으니, 방계 후손으로서의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서계공은 할아버지요 좌망공은 손자인데 西溪之祖坐忘孫이곳에서 살던 당시엔 또한 번성하였네 宅此當年亦盛繁진씨의 집안에서는 사위205)가 되었고 晉氏舘中爲玉潤용두 뽑는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네 龍頭科第占魁元이름난 터전은 이미 남의 물건 되었고 名基已作他人物남긴 자취는 노인들의 말에서 전해지네 遺蹟相傳故老言해질녘에 배회하며 세 번 탄식하는 것은 薄暮徊徨三歎息같은 뿌리인 선대에 감회가 일어서라네 有懷先世棣同根이날 밤에 유천에서 잤다.24일. 벗 방관(房琯)이 산에 들어가는 노정(路程)을 기록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운봉(雲峯)으로 나가는 길을 잡은 것은 내가 가장 높은 천왕봉(天王峯)에 먼저 오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여원치(女院峙) 아래에 이르러 우리 종족(宗族)이 사는 목동(木洞)과 내기(內基) 두 마을을 지나게 되었기에 먼저 내기에 사는 친척인 김성헌 영우(金惺軒榮禹)를 찾아가서 묵었다. 다음날 목동에 이르러 친척 어른인 김회산 양식(金晦山亮植)을 찾아가 뵈었는데 비 때문에 이틀을 묵었다.27일. 하늘이 비로소 갰다. 풍곡(風谷)에 들어가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ㆍ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ㆍ도촌(陶村 김연(金沇))의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친척인 김영회(金榮會)가 앞에서 인도하였다. 묘소의 국세(局勢)는 빙 둘러싸고, 중건한 재실(齋室)은 굉장(宏壯)하여 사대부 집안의 선산(先山)이라고 할 만하였다. 대개 내가 30년 전에 잠시 이곳을 지났었는데 지금 다시 지나니 거의 새로운 모습 같았다.석양녘에 내기로 돌아와 묵었다. 내기라는 마을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맺힌 형국[結局]은 또한 이름난 터전이니, 김성헌의 선조 중에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에 급제한 분이 이 마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다.28일. 떠나려고 할 때에 김성헌이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오로지 산을 구경하기 위한 것인데 집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으나 아직 산 아래에도 도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래 머물 수 있겠는가. 애써 사양하고 나오자 김성헌과 그의 아우 및 김영회가 5리쯤까지 전송하고 작별한 뒤에 10리쯤 가서 여원치(女院峙) 위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이 두류산으로 들어가는 주맥(主脈)이다. 그 서쪽에 봉우리 하나가 빼어나게 솟았고 위에 주지암(住智菴)이 있는데 초절(超絶)하여 구경할 만했으나 미처 보지는 못했다. 고개 이름을 '여원'이라 한 것은, 태조[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정벌할 때 이 고개를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 도사가 대승을 거둘 날짜를 알려주었으므로 태조가 그 기이함에 감동하여 석벽에 여자 도사의 모습을 새기라고 명하고 그 위에 원옥(院屋)을 지어 수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운봉 현감이 돌에 새긴 기실문(紀實文)이 있다.운봉의 옛 읍을 지나 화수산(花水山) 아래에 이르러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206)를 보았다. 비석은 태조가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활로 쏘아 죽여서 왜구를 소탕한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비석은 높고 크며 비각은 굉장하였으니, 지금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오히려 새로 단장하였다. 비각의 서쪽 석벽에는 태조가 당시에 써 놓은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또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옛일에 감동하고 오늘날의 일을 슬퍼하여 장편 고시(古詩) 한 수를 지었는데 글자 수가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비각에서 시내를 따라 내려가서 황산의 왜적을 평정했던 곳에 이르니, 아지발도의 핏자국이 바위에 스며들어 아직도 붉고 돌 위에는 말발굽이 밟은 흔적이 뚜렷하다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인월(引月) 시장을 거쳐 산내방(山內坊)에 들어갔다가 함양(咸陽)의 마천(馬川)에 이르러서 묵었다.여원치부터 이후로는 물길 따라 서쪽의 산이 모두 두류산인데, 비록 차례대로 올라가지는 못하였지만 산이 높고 물이 맑음을 알겠다. 하루 내내 푸른 절벽과 하얀 폭포 사이를 뚫고 가니 심신이 갑절이나 상쾌하였다.29일. 이른 아침에 곧장 천왕봉에 오르려고 할 때 도촌(島村)의 강주원(姜周元)을 찾아가 산으로 올라가는 노정을 물으니 천왕봉과의 거리가 40리라고 하였다. 안내자 1명을 사고 점심을 마련하여 싸서 몸을 떨쳐 일어나 힘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올라갔으니, 산 위에는 묵을 만한 집이 없다고 하기에 당일에 돌아올 계획이었다.10리를 가니 '하동암(河東巖)' 세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는데, 옛적에 하동 군수가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다가 떨어져 상처를 입고는 이 바위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두려워서 수당(垂堂)의 경계207)를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제석당(帝釋堂)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통천문(通天門)의 잔도(棧道)를 지나 미시(未時) 초에 비로소 천왕봉 꼭대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천왕봉의 높이가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인데도 나뭇잎이 펴지지 않고 철쭉도 피지 않은 것은 아마도 높고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호남과 영남에는 대개 큰 산이 많지만 굽어보니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자그만하였다. 날씨가 맑을 때는 서쪽ㆍ남쪽ㆍ동쪽 삼면의 바다가 멀리 하나의 띠처럼 보이고, 일본의 대마도를 어렴풋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구름이 하늘과 잇닿아 혼연히 끝이 없어 안타까웠다.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산은 선산(仙山)이라 신선과 인연이 없는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기도 전에 비와 안개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다. 나의 오늘 산행은 마침 그믐이어서 어둡고 비가 많은 것이 상례인데도 다행히 비는 맞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인연이 있었던 것인가. 또한 우습기만 하다.예전에 내가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峯)에 올랐고 오늘은 또 이 봉우리에 올라 보니, 이 봉우리가 비로봉보다 높음을 알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비로봉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이라고 하지만 천왕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듣지를 못하였으니, 아마도 비로봉은 동북쪽의 위에 있고 천왕봉은 서남쪽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전후에 유람한 사람들의 제명(題名)208)이 많이 있다. 혹은 부자(父子)가 함께 제명하고 4대(代)가 나란히 이름을 써서 족보와 똑같은 경우도 있으니, 이것은 일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친 것이다.아,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공자(孔子)는 태산(泰山)에서 천하를 작게 여겼으며,209) 주자(朱子)는 축융봉(祝融峯)에서 호탕한 기상을 드러내었으나,210) 지금 나는 뜻은 있어도 주견(主見)이 없으므로 얻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주의(周顗)는 신정(新亭)에서 산하에 느낌이 있었고,211) 〈위시(衛詩)〉에 "서방에 있는 미인을 바라본다.[望美人於西方]"212)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날 당한 처지이다. 공자와 주자가 얻은 것은 바름[正]이고, 〈위시〉에서와 주의가 느낀 것은 변화[變]이다. 그 바름을 얻으면 변화를 만나더라도 그 중도(中道)를 잃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대의 변화를 슬퍼하여 혹 상심하는 데 이를 것이니, 이 또한 내가 힘써야 할 부분이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높구나 이 산의 꼭대기여 高哉此絶頂한 번 올라서 무엇을 하려는가 一陟欲何爲말하면 하늘 놀래킬까 걱정되고 語恐驚天上눈은 응당 땅 끝까지 다 보리라 眼應極地涯공자가 태산에 오른 날과 같고 宣尼泰嶽日주자가 축융봉에 오른 때와 같네 晦老祝峯時하지만 천추에 대한 나의 생각을 而我千秋想곁에 있는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傍人那得知조자정이 말하기를,"옛적에 병암(炳菴) 어른이 이 산의 반야봉(般若峯)에 올라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기분이 좋다고 외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나 또한 성인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옛사람이 산꼭대기에 오른 것으로써 도(道)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데에 비유하였는데, 병암 어른은 도에 대한 조예가 지극한 것으로써 산꼭대기에 오른 것에 비유하여 자신이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을 마쳤음을 말한 것이니, 피차 바꾸어 말하는 사이에 자신이 힘쓰면서 타인을 권면하는 뜻을 볼 수 있네."라고 하였다.아,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咸陽)의 개평(介坪)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진주의 덕산(德山)이 모두 지척간에 있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상한 풍모를 움켜쥘 수 있으니, 아마도 이 산이 신령한 기운을 모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남쪽을 바라보면 남강(南江) 일대가 흰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데, 김 문열공(金文烈公 김천일(金千鎰))ㆍ황 무민공(黃武愍公 황진(黃進))ㆍ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삼장사(三壯士)가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곳에는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이 천고에 길이 남아 있으니, 명현(名賢)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죽은 것은 또한 산의 신령함이 시킨 것이리라. 여러 현인이 모두 재주와 뜻을 품고서 덕업을 닦고 쌓아 크게 등용되어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일이 어그러져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남명은 은둔하여 화를 면하였으나 일두는 사화(士禍)에 죽고 삼장사는 병난(兵難)에 죽었으니, 요컨대 모두 시변(時變)의 불행이다. 고금 천하에 변고가 이렇게 많았으니 나는 변고에 어떻게 할 것인가? 다만 뜻을 편안히 하여 대처할 뿐이다.배회하면서 두루 보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이날은 또 삼춘(三春)이 다하는 날이었다. 봄을 보내는 사람은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오르는데 마침 이날에 이렇게 아주 높은 곳에 올랐으니 이번에는 매우 아름다운 곳에서 봄을 보냈다고 할 만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천왕봉 위에서 청황213)을 전송하는데 天王峯上餞靑皇일월대 앞에는 또 석양이 지는구나 日月臺前又夕陽오는 길에서는 봄바람과 짝이 되었으나 來路東風同作伴봄은 가고 나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네 春歸我獨未歸鄕돌아가는 길이 금방 어두워질까 걱정되어 급히 하산하였으니, 침구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여기에서 묵어보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여기에는 집 모양 같은 돌담장과 시우(柴宇)214)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밤을 지낼 계획을 세워 밤에는 노인성(老人星)을 보고 새벽에는 일출(日出)을 보는데 날씨가 쾌청하고 따뜻한 추분(秋分)을 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미처 그것을 몰라 이런 실책을 저질렀다. 서둘러 내려와 백무촌점(白武村店)에 이르니 저녁밥을 내왔다. 식사를 마치고 쓰러져 누웠는데 너무 피곤하여 온몸이 매를 맞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마침내 스스로 웃으며 말하기를,"심하구나, 너의 산수를 좋아함이여! 누가 너에게 이렇게 하도록 하였는가? 번거로운 일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누가 장엄한 경관 좋다고 했던가 誰言壯觀好몸 고생이야 다시 비할 곳 없네 身苦更無比우습구나 영대의 주인215)이여 堪笑靈臺主스스로 한때의 상쾌함 구했구나 自求快一時이 시는 몸이 마음을 책망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한때의 상쾌함을 구한 것이 아니라 非求快一時지자와 인자의 마음을 보려 하였네216) 要見智仁術내 진실로 사욕과 먼지 씻어냈으니 我苟淨私塵이에 너 또한 없어진 것을 알겠네 從知你亦逸이 시는 마음이 몸에 대답한 것이다.4월 1일. 백무(白武)를 떠나 직치(直峙)를 넘어가려고 덕평(德坪)을 찾아갔다. 지나는 곳을 보건대 조금 넓고 평평한 곳에는 비록 지대가 매우 높거나 골짜기가 아주 깊숙하더라도 더러 인가가 있었다. 대개 지금은 오랑캐가 정권을 장악하여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에 들어와 산을 개간하고 감자를 먹고 살며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의 법령은 깊은 골짜기에도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니, 산은 국유(國有)라고 하며 숲을 양성함이 매우 엄하여 숲을 태워 밭은 만드는 것도 금지하여 할 수가 없다. 깊은 산에서 얻는 것이 이것뿐인데도 오히려 구금(拘禁)을 당하니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비록 그렇지만 간혹 잡은 터가 온난(穩暖)하고 개간한 땅이 비옥한 경우도 있으니, 감자와 보리가 모두 풍성하고 약초밭도 좋으며 시장이 3, 40리에 불과하여 교역할 수 있기에 한 해를 마치도록 굶주림과 추위에 대한 근심이 없고, 아울러 저들의 사역(使役)과 조사를 당하지 않는다. 이것을 어찌 평지와 들판에서 저들의 농지를 소작하고 저들이 시키는 일을 하여 노예가 되고서도 오히려 죽음을 구제하기도 부족한 경우와 같은 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가령 내가 만난 밀양에서 온 민씨(閔氏) 4형제는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낙토(樂土)로 여기니, 아마도 산이 지극히 넓고 골짜기가 지극히 깊기 때문에 혹 이러한 곳이 있는가 보다. 나처럼 세상과 맞지 않은 사람은 정히 이곳에 들어와 요행으로 안온한 곳을 얻어 여생을 마칠 수 있겠으나, 다만 근력이 이미 노쇠하여 농사짓는 수고로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직치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길을 잃어 진퇴유곡(進退維谷)이었다. 반나절 동안 암석과 가시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가서야 겨우 화를 면하니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되었다. 정오가 지나서 이른바 덕평(德坪)에 당도하였다. 이곳은 하동(河東) 땅인데 지대가 너무 높고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처음 오는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이곳에서는 오곡(五穀)이 나지 않고 다만 청저(靑藷)만 생산되는데, 처음에는 청저가 매우 풍족하여 먹는 데에 여유가 있었으나 근년에는 바람이 많고 추위가 심하여 청저의 수확량이 줄어 양식 대기가 어렵게 되자 대부분 이사를 가서 20호나 되던 마을에 지금은 6, 7호만 남았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진퇴양난이지만 형편상 어찌할 수가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먹을 수 있는 뒤에야 외딴 지역에서 살 수 있는데 이 지역은 이미 먹을 것이 없으니 살 만한 땅이 아니다.이밖에 또 이른바 상세석평(上細石坪)과 하세석평(下細石坪)이 있는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로, 여기에서 30리 거리이다. 상세석평은 어제 천왕봉 정상에서 이미 바라보았는데, 산 위에 열린 국면이 덕평보다 지대가 높다. 그러나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였으며 좌우로 안온하게 감싸고 있어 바람을 가두는 것 같으며 국면의 안쪽은 매우 넓고 크며 순대(脣臺)를 이루고 있어 형세가 매우 오묘하였다. 하세석평 또한 그렇다고 한다. 예전에는 수많은 노송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으나 근래에 모두 말라죽어 풀이 자라나는 곳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운수가 돌아왔다고 여겨 사람들이 간혹 들어와 살았지만 끝내 다시 되돌아간 것은 지대가 높고 추워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형이 이미 오묘한데다가 최고운(崔孤雲)의 유적이 있으니 한번 구경하는 것은 괜찮으나 길이 험하고 피로가 심하여 그만두었다. 이날 밤에 삼정리점(三井里店)에서 묵었다.2일. 당현(堂峴)을 넘어 칠불암(七佛菴)에 당도하였다. 암자는 매우 그윽하고 외진 곳에 있는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왕자 7명이 이곳에서 성불(成佛)하였으므로 암자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수로왕은 중국 연대로 따진다면 서한(西漢) 시대에 해당되는데, 그의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보다 앞섰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 유점사(楡岾寺)를 기록하면서 이에 대해 이미 상세하게 논하였다.암자에는 아자방(亞字房)이 있으니, 하나의 큰 방 안에 높고 낮게 구획을 하고 아(亞) 자 모양과 같게 하였는데 하나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모두 따뜻하며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담공선사(曇空禪師)가 만든 것인데, 이것이 비록 선가(禪家)의 작은 기술이지만 또한 매우 특이하다.도중에 삼신동(三神洞)의 서숙(書塾)을 지나게 되었는데, 숙사(塾師 훈장)인 박정규(朴貞圭) 씨는 정민화(鄭閩華) 아내의 아우로서 초면인데도 옛 친구와 같아 은근히 만류하였다. 백주(白酒)ㆍ황반(黃飯)ㆍ산나물ㆍ민물고기 등은 향긋하고 정갈하여 입맛에 맞아 며칠 계속된 피로가 감소하였으며, 나그네의 고달픔이 가지가지였으나 우연히 좋은 주인을 만나 하룻밤을 묵으니 그 안온하고 편안함은 문득 집으로 돌아간 것과 같았다.3일. 시내를 따라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이르렀다. 이곳은 고운(孤雲)이 유람하던 곳으로 수석(水石)이 매우 기이하고 제명(題名)이 많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고인은 귀뿌리를 씻고도 남겠지만 高人洗得耳根餘속인의 공명심은 씻어낼 수가 없네 俗子名心洗未除고운이 노닐던 곳이라 하는 곳에는 云是孤雲遊賞地돌에 새긴 이름들 어지럽기만 하네 刻題石面紛紛如여기에서 20리를 가서 쌍계사(雙磎寺)에 들어갔다. 절이 두 계곡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의 안쪽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얻었을 것이다. 동구(洞口)의 좌우에 있는 석벽에는 '쌍계석문(雙磎石門)' 네 글자가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쇠지팡이[鐵杖]로 돌에 쓴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러했을까? 절은 겨우 중간 규모의 사찰인데 전각은 매우 화려하다. 문루(門樓)에 '청학루(靑鶴樓)' 세 글자가 걸려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고운이 이곳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생황을 불자 청학이 날아 왔기에 후세 사람들이 이 때문에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침내 판상(板上)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청학을 맞이하려고 누대를 세웠나니 爲迎靑鶴起樓臺세속 밖 신선이 몇 번이나 찾아왔나 物外仙人幾度來신선 떠나고 학도 돌아간 천 년 뒤에 仙去鶴歸千年後내가 여기서 배회할 줄 어찌 알았으리 豈知滄老此徘徊세상에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十勝)의 하나로서 만 명이 살 수 있고 삼재(三災)217)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산꼭대기나 깊은 계곡을 샅샅이 찾아보고서 어떤 사람은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나 천여 년 전에 청학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청학루가 만들어지게 된 줄은 전혀 모르니, 청학루가 있는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대개 화개(花開) 시장 위로부터 벽소령(碧霄嶺) 아래까지 상하로 4, 50리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이 온화하며 토질이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곡식과 과일이 모두 구비되었고 담배가 많이 생산되기에 온 산 가운데 가장 낙지(樂地)로서 만 명이 생활할 수 있고 삼재가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이곳이 아마도 청학동이 아닐까?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두류산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218)에서 '그대는 이제 청학동 사람이네.[君今靑鶴洞中人]'라고 한 것도 이 골짜기를 가리키니, 당시에 어찌 세석평전이나 덕평 등지와 같이 궁벽지고 매우 험하여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가리켜 운운하였겠는가.절 마당에는 옛 비석이 하나 있는데 고운이 지은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다. 그 내용 중에,"여산(廬山)의 혜원(惠遠)은 논(論)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周公)ㆍ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비록 다르지만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심약(沈約)219)은 '공자는 그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했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체(大體)를 알았다고 이를 만한 자라야 비로소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부분을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논평하였다.유학에는 대본과 달도220)가 있으며 儒有大本與達道허무적멸은 불가에서 보배로 여기네 虛無寂滅佛所寶동정과 체용은 본디 절로 다르기에 動靜體用本自殊섞어서 구분하지 않으면 모호해지네 混而無分已糊塗공자가 단초 열고 석가가 극치 다했다니 무슨 말인가 孔發釋窮是何言유학을 인용해 불교에 들여 불교가 도리어 높아졌네 援儒入佛佛反尊고운이 아마도 유가의 자식이 아니어서 孤雲豈非儒家子이름과 실상이 같지 않은 것은 아닐까 無乃名實不相似퇴계 이후로 연재와 간재에 이르기까지 退溪而後逮淵艮참으로 전해오는 천추의 의론이 있다네 良有以來千秋論여기에서 화개 시장을 거쳐 섬진강가에 이르렀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배들이 오르내려 가슴이 확 트이니, 산속의 유람과 비교해봄에 또 별다른 취미(趣味)였다. 그래서 일두(一蠹) 시의 "바람결에 부들은 가벼이 흔들거리고 사월의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 두류산 천만 겹을 다 구경하고 조각배 타고 또 큰 강물로 내려가네.[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라는 구절을 읊고서 조자정에게 웃으며 말하기를,"우리들은 겨우 산 하나만을 다 보았지 배를 타고 큰 강으로 내려가지는 못했으니 일두 노인의 풍류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겠네."라고 하였다. 일두의 시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안개 빛이 흥취를 도와 붓에 들어왔나니 煙光助興入毫柔푸른 나무 그늘 짙고 보리는 익지 않았네 綠樹陰濃麥未秋섬진강 물이 넘실넘실 만 장이나 솟으니 蟾水滔滔萬丈屹일두 옹의 높은 노래에 풍류를 상상하네 蠹翁高詠想風流강을 거슬러 올라 20리를 가서 송정점(松汀店)에서 묵었다.4일. 구례(求禮) 토지면(土旨面)을 지나며 이른바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이라는 새로운 명당을 살펴보았다. 각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집터를 잡았으나 대부분 실패하여 떠났고 오는 사람들이 또 이어져 마을과 집들이 별처럼 널려 있고 바둑알처럼 놓여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모른다고 하니 도리어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컨대 산과 물이 둘러 감싸고 사방의 들판이 광활하여 천 명이 살 만한 곳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여기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20리를 가서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갔다. 화엄사는 큰 사찰이며 2층 각황전(覺皇殿)은 매우 높다. 이는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자식을 위하여 복을 구하려고 사람을 시켜 짓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은 매우 정묘(精妙)하였으며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였다. 마당에 있는 〈벽암선사비명(碧巖禪師碑銘)〉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221)이 지었다. 비문 안에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로가 있음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그가 비록 승려이지만 임금을 위한 충성을 알았으니 가상한 일이다.또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수월치(水越峙)를 넘어 미국인의 피서실(避暑室)에 당도하였다. 집이 50여 곳이나 되고 돌로 지어서 외부는 견고하고 내부는 화려한데, 높고 크며 매우 험한 곳에 이처럼 집을 지었으니 많은 돈이 들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말로는 미국은 돈이 많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듯하다. 산 위의 형국은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시야가 확 트였으며 돌 사이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저울로 달아보면 그 무게가 다른 물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한다. 대저 누가 이곳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또한 미국인들에게도 감여술(堪輿術 풍수지리술)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매우 더울 때에 왔다가 더위가 물러가면 떠나는데, 여름철에는 문득 번화한 곳이 되며 골짜기에 사는 곤궁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용이 되어 작은 돈이라도 받게 됨을 기뻐한다고 하니, 우리 망국 백성들의 가련함이 슬프다. 이곳은 반야봉과의 거리가 이미 중반이 되는데, 바라보면 한 번 뛰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20리나 된다. 사람들은 흔히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최고봉이지만 반야봉이 조금 낮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 높은 곳에 올라보았으니 낮은 곳을 포기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5일. 여기에서 하산하여 구산령(九山嶺)을 넘어 구례 당곡(堂谷)을 거쳐 원우점(院右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또 둔산령(屯山嶺)을 넘어 남원 포암(包巖)의 정자경(鄭子敬 정영식(鄭泳寔))의 집에 이르러서 묵었다. 비록 두루 찾아보고 세세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이에 안팎의 전체 산을 대략 보았다.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백두산에서 흘러온 맥이 남도를 진압하니 白頭流脉鎭南州중국에 있는 형산과 더불어 짝할 만하네 中國衡山可與儔일만 골짝에는 은하수 같은 폭포가 걸렸고 萬壑皆懸銀漢瀑일천 봉우리는 높이 옥경루에 닿을 듯하네 千峯高逼玉京樓신의 정령은 현인들을 얼마나 길러 내었나 精靈幾毓群賢出골짝은 깊고 넓어 오곡을 지을 논밭이 많네 深廣多治五穀疇등람할 때는 인자 지자의 마음 알아야 하니 登覽要知仁智術보고도 안 본 것과 같으면 부끄러운 일이네 看如不看也堪羞대개 내가 전에 보았던 금강산을 이 산과 비교해 보면, 금강산은 맑고 뾰족하며 우뚝 솟아 있고 지리산은 웅장하고 높으며 깊어서 광대한 점이 금강산보다 낫다. 금강산은 청명(淸明)한 군자가 세속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사람으로 하여금 속된 생각을 저절로 없애게 하는 것 같고 지리산은 장중(莊重)한 군자가 덕이 두텁고 학식이 넓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속마음을 추측하기 어렵게 하는 것 같으니, 요컨대 학자들이 모두 취하여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다만 세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설을 가지고 논하자면, 기이한 형상과 빼어난 모습은 당연히 금강산이 제일 앞을 차지하고 두류산이 그 아래에 해당된다.또 듣건대 영남과 호남 사람들이 서로 이 산을 자기의 도에 소속시키려고 하여 아직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차지하는 면적의 넓이와 앞뒤의 방향으로 본다면 마땅히 영남에 속해야 하고, 국가의 전례(典禮)인 남악묘제(南嶽廟祭)를 호남에서 지내는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호남에 속해야 하니, 아마도 이 산의 주맥(主脈)이 이미 호남에서 반야봉으로 들어가 먼저 주봉(主峯)을 일으키고 또한 호남 땅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조가 천명(天命)에 응하여 날마다 명산(名山)에 기도하였는데 여러 산의 신령은 모두 응답하였으나 유독 이 산의 신령만 응답하지 않았기에 호남에 폄적(貶謫)되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말에 해당된다.그렇지만 나는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이 산은 한결같이 모두 중후하여 어긋난 기운이 없다. 그 가운데서 비교해서 논한다면 반야봉은 흙이 많고 돌이 적어 한결같이 수려하며, 천왕봉은 돌이 많고 흙이 적어 조금 가파른 바위가 많으니, 이 때문에 호남 사람의 마음은 유순하고 영남 사람의 마음은 굳세고 사나울 것이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6일. 포암을 떠났다.7일. 해질 무렵에 비로소 귀가하였다. 총 19일이 걸렸다. 頭流山卽智異山別名, 白頭之流脈, 至此而益高大, 故其得名以是焉. 此山雄據南服湖、嶺間, 巍然而高, 洞然而深, 在全國諸山, 罕與比倫者, 有似乎中州之衡山, 遠在南土, 爲五嶽中最鉅焉. 且三神山之說, 雖不可盡信, 古傳在東海中, 而說者以我國之金剛當蓬萊, 漢挐當瀛洲, 頭流當方丈. 故方外仙子道禪之流固無倫, 以至儒家之淸士達人, 未嘗不以一見爲快焉. 往在甲辰陪先師, 到南原地, 留止旬日, 距此山初頭百里而近. 炳菴金丈【駿榮】作此山行, 要余隨之, 先師止之曰: "此行, 吾亦有意. 但以國恤受衰之身, 遊山未安, 待後圖之. 君可於其時同余, 今於旅次舍君, 則如失左右手, 以此止之. " 夫孰知世事難測, 翌年有五賊賣國之變, 至於庚戌宗社永覆, 先師則早已入島自靖而考終於壬戌之歲乎? 俯仰今昔, 感愴罔涯, 而此山之約, 言猶在耳. 甲戌之春, 窮居無聊, 忽然動得古人沂、雩之想, 而頭流一遊, 固嘗所願者. 適趙弟子貞請余伴行, 乃以三月十九日, 與之登程. 二十日. 暮至淳昌赤谷, 拜傍祖礱巖先生墓, 觀巖刻尤翁筆"磨礱巖觀水堂"六字. 有詩曰: "鷲峯矗矗柏山蒼, 四尺之高萬古藏. 柿栗當年皆手種, 林泉故宅有遺芳. 不因道學高如許, 那得衿紳久未忘? 珍重礱巖巖刻字, 淵源足證自華陽. " 夜宿山下族人家. 二十一日. 過南山臺, 登歸來亭, 亭是申公末舟築. 申公是光廟勳臣叔舟弟, 當其兄手握重權之日, 何求不得? 而乃浮雲富貴, 惟義是視, 歸遯于此, 此其所以爲高也. 不勝曠世之感, 次板上松雲姜公【希孟】詩曰: "作亭歸老意, 不爲田園荒. 陋巷眞安土, 萬鍾是濫觴. 玉川魚可釣, 峨谷蕨何香? 曠感多今日, 登臨整我裳. " 夜宿申氏家. 二十二日. 至南原楡川房珍家, 故人福之【煥永】之姪. 福之沒, 但致緘辭, 未得親哭, 故今雖三年過久, 而歷路爲訪, 則福之子十餘歲者亦死, 後事落莫, 不忍言. 二十三日. 房氏老少, 爲余沽酒, 請遊沙溪精舍. 精舍, 房氏先祖所築, 而至今四百年世守. 板上題詠, 自一齋、南冥、蘇齋、月沙、象村以下名賢文章, 無慮百餘家. 余見人家亭舍多矣, 蓋未有若此之盛者, 亦足以見子孫之世其家矣. 遂次韻題一詩曰: "半千世業罕吾東, 文獻足徵精舍中. 板上曾多先輩筆, 牕前已老十圍松. 鼎鍾當日浮雲薄, 講學相傳琢玉瓏. 試看沙溪流不盡, 德門遺蔭也無窮. " 午後, 與諸友出遊龍頭亭. 龍頭亭卽池堂左一岡, 形如龍頭故名, 而舊有亭, 今廢. 余之傍九世祖坐忘公諱灦、堂村黃公暐同居此里, 俱登文科壯元, 同時南原府使閔公光勳亦嘗魁科者, 三人共會此亭, 作盛遊. 其後閔公之孫丹巖鎭遠亦登魁科而爲本府使, 與近邑守寄之曾爲魁科者二人, 繼會此亭, 追其祖盛蹟, 至今鄕人傳以爲美事. 丹巖所謂"龍頭亭上會龍頭, 六十年間再勝遊"者此也. 地旣似龍頭之形, 人又會龍頭之占, 人地相符, 事甚奇哉. 乃次丹巖韻, 題詩曰: "布衣零落會龍頭, 追說龍頭昔日遊. 煙景堪憐三月暮, 滄桑其柰萬緣休? 積懷定與蛟山屹, 深恨難將蓼水流. 晩有故人斟斗酒, 滌塵勝似玉京樓. " 歸路, 有所感于心者. 念昔坐忘公之祖西溪公諱鋏始居此里, 爲晉氏館甥故也. 西溪公登進士, 坐忘占魁科, 歷敭淸顯, 其弟諱灝亦爲進士, 其亦盛矣. 西溪公子諱履吉又居伊彦村東臺, 故號以東臺. 蓋伊彦、池堂兩村, 世所稱南原首基, 各姓俱發, 名聞他郡, 如得西、坐子孫世世奠居, 則其福, 至于今未艾也. 而事不出此, 中葉衰替, 蕩析離居, 無復可尋, 只有故老相傳某家舊址之言, 其在傍裔之感, 寧不悲哉? 有詩云: "西溪之祖坐忘孫, 宅此當年亦盛繁. 晉氏館中爲玉潤, 龍頭科第占魁元. 名基已作他人物, 遺蹟相傳故老言. 薄暮徊徨三歎息, 有懷先世棣同根. " 是夜宿楡川. 二十四日. 房友琯爲錄入山路程甚詳. 當路出雲峯, 以余欲先上最高天王峯也. 至女院峙下, 吾宗族所居木洞、內基兩村爲歷路, 先訪內基族人惺軒【榮禹】而宿. 翌日, 至木洞, 訪見族丈晦山【亮植】, 因雨信宿. 二十七日. 天始晴. 入風谷, 拜忠景公、在澗堂、陶村墓, 族人榮會前導. 墓所局勢之環抱, 重建齋舍之宏壯, 可稱士夫先山. 蓋余三十年前, 暫經此地, 至今再過, 殆若新面目矣. 夕陽, 還內基而宿. 內基爲里雖小, 結局亦名基, 惺軒之先, 大小科甲, 多出此里云. 二十八日. 將發, 惺軒挽止甚勤. 然今行耑爲觀山, 而離家一旬, 尙未到山下, 豈容久留? 苦辭而出, 惺軒與其弟及榮會送至五里許, 作別後, 行十里許, 到女院峙上, 此是頭流山入去主脈. 其西一峯秀出, 上有一菴名住智, 超絶可觀, 而未及見. 峙云女院者, 太祖征倭荒山時, 過此峙, 有一道姑告以大捷日時, 故太祖感其異, 命刻道姑像貌于石壁, 作院屋其上而守護之. 有雲峯縣監石刻紀實文. 歷雲峯舊邑, 至花水山下, 見荒山大捷碑. 碑是太祖射殺阿只拔都蕩平倭寇紀實, 而大提學金貴榮撰也. 碑高大, 閣宇宏壯, 今雖屋社, 尙爾一新. 碑閣西石壁太祖當日題名尙在, 亦閣而庇之. 感古悲今, 賦長篇古詩一首, 字多不錄. 自碑閣沿溪而下, 至荒山平賊處, 拔都血痕入石尙赤, 石上馬蹄踏痕宛然, 居人指示云然. 經引月市, 入山內坊, 至咸陽馬川而宿. 自女院峙以後, 隨水以西之山, 皆是頭流, 雖不能次第登臨, 已覺山高而水淸. 終日行穿蒼壁素瀑之間, 心神一倍爽快. 二十九日. 早朝, 將直上天王峯, 訪島村姜周元, 問山上路程, 距峯上四十里云. 買得案內者一人, 備裏午料, 奮身出力, 忙步以上, 山上無屋可宿云, 故當日回來計也. 行十餘里, 有巨巖刻"河東巖"三字, 昔河東郡守乘轎上山, 墮落見傷, 至此巖而死, 故名云. 聞此瞿然, 益謹垂堂之戒矣. 點心于帝釋堂, 經通天門棧道, 未時初, 始至絶頂. 儘覺高則高矣, 當此春夏之交, 木葉不敷, 躑躅未放, 豈非高寒所致乎? 湖、嶺兩省, 蓋多鉅山, 而俯視之, 藐然若丈人之於兒少矣. 天氣淸明時, 西南東三面之海, 遠見若一帶, 日本之對馬島, 隱隱可見云, 而是日雲靄接天, 渾無際涯可恨. 然而人言"此山仙山, 無仙緣者, 未到絶頂, 多爲雨霧所困". 余之今行, 適値晦日, 晦而多雨例也, 而幸不値焉, 豈其得於天而有緣者耶? 亦可笑也. 昔余上金剛之毘盧峯, 今又陟此峯, 覺得此峯之高於毘盧矣. 然而人稱毘盧爲我國第二高處, 天王則未聞焉, 豈以毘盧在東北上游, 天王在西南低下處故耶? 巖上刻"日月臺"三字, 多有前後遊覽人題名. 或父子同題, 至有四世聯書, 便同世譜者, 此好事之過也. 嗚呼! 登高者, 必有所懷, 古今所同. 尼聖小天下於泰山, 晦父發豪氣於祝融, 今余則有其志而無其見, 不足以道所得者. 周顗感山河於新亭, 《衛詩》望美人於西方, 此正余今日之所遭也. 尼、晦之所得者正也, 《衛》、周之所感者變也. 得其正, 則遭變而不失其中, 不然, 則哀於時變而或至於傷, 此又吾之所當勉者. 因有詩曰: "高哉此絶頂, 一陟欲何爲? 語恐驚天上, 眼應極地涯. 宣尼泰嶽日, 晦老祝峯時. 而我千秋想, 傍人那得知?" 子貞曰: "昔炳菴登此山般若峯上, 以杖拍地, 叫快曰'今日, 吾亦爲聖人', 此言何謂也?" 余曰: "古人以登山絶巓, 譬造道之極, 炳菴則以造道之極, 譬登山絶巓而言己登高之畢功也, 彼此交言之間, 足以見自勉勉人之意也. " 噫! 北望則咸陽之介坪, 東望則晉州之德山, 皆在咫尺, 一蠹、南冥之高風可挹, 豈非此山之鍾靈? 南望則南江一帶, 若鋪白練, 金文烈、黃武愍、崔忠毅4)三壯士投水殉節處, 忠魂毅魄, 千古長在, 非惟名賢之生乎此, 其死乎此者, 亦山靈之使歟! 諸賢皆抱負才志, 修蓄德業, 將大用而匡世, 而事謬不然. 南冥以隱遯得免, 一蠹死於士禍, 三壯沒於兵難, 要皆時變之不幸也. 古今天下, 變若是多, 吾於變, 何哉? 只得安意而處之而已. 徘徊周覽, 不覺日已晡矣, 而此日又三春終盡也. 餞春之人, 例必登高, 而適以是日, 登此極高, 今番可謂絶勝餞春. 有詩曰: "天王峯上餞靑皇, 日月臺前又夕陽. 來路東風同作伴, 春歸我獨未歸鄕. " 恐歸路迫昏, 速速下山, 甚恨不持寢具食物而來宿一宵於此也. 此有石墻柴宇如屋樣者. 故登此者, 例多爲經夜計, 夜見老人星, 曉見日出, 而要取秋分節天淸候暖云, 而余不及知, 致此遺算也. 催趲下來, 至白武村店, 夕飯進矣. 飯畢頹臥, 憊困殊甚, 渾身如經亂打, 不覺有痛聲. 乃自笑曰: "甚哉! 儞之癖於山水也. 孰使儞如此? 累自己作, 復誰怨尤?" 因題一詩曰: "誰言壯觀好? 身苦更無比. 堪笑靈臺主, 自求快一時. " 此身責心也. 又題曰: "非求快一時, 要見智仁術. 我苟淨私塵, 從知儞亦逸. " 此心答身也. 四月初一日. 離白武, 將越直峙, 訪德坪. 見所經, 稍寬平處, 則雖絶高極深, 往往有人家. 蓋今夷人執命, 民不聊生. 故流轉入此, 墾山食藷, 形若鳥獸, 苟延性命, 而彼之法令, 無深不入, 山稱國有, 養林至嚴, 禁不得焚林作田. 所取乎深山, 徒以此也, 猶見拘禁, 亦何能爲? 雖然, 間亦有占基穩暖墾土肥沃者, 藷麥幷豐, 藥圃亦佳, 市不過三四十里, 可以交易, 終歲無飢寒之憂, 幷不見彼之使役調査. 此豈可與平地通野, 佃彼田, 服彼役, 爲奴隸, 而猶救死不贍者, 同日語也? 若余所遇自密陽來者閔氏四兄弟養老敎子, 自以爲樂土, 蓋山至廣, 谷至深, 故容亦有如此處. 如余之與世氷炭者, 正可入此幸得穩處而終餘年, 但恨筋力已衰, 難堪鎌鍬之勞也. 至直峙下, 忽然失路, 進退維谷. 半日披穿乎巖石荊棘間, 幾殆僅免, 頭須爲白. 日過午, 抵所謂德坪. 此河東地, 地太高, 風太寒, 初來人不可久留. 問於居人, 則此地不生五穀, 只産靑藷, 其始藷甚豐, 食有餘, 比年風多寒甚, 藷少食艱, 率皆移去, 二十戶里, 今存六七, 所餘進退兩難, 勢無柰何者. 余惟食其地所産物, 然後可居乎絶地, 此地旣無其食, 則非可居之地. 此外又有所稱上下細石坪, 爲避亂吉地, 此去三十里. 上細石, 昨於天王峯頭, 已望見之, 山上開局, 地高於德坪, 然背北向南, 左右穩抱, 似得藏風, 局內甚廣大, 成脣臺, 形勢甚妙. 下細石亦然云. 舊有萬檜簇立, 近皆枯死, 爲草生地. 以故意其回運, 人或入居, 終復還去, 以高寒無食也. 但地形旣妙, 且有崔孤雲遺蹟, 一觀則可矣, 而路險憊甚已之. 是夜, 宿于三井里店. 初二日. 踰堂峴, 抵七佛菴. 菴甚幽僻, 駕洛國首露王子七人成佛於此, 故菴以是名. 首露王在中國年代, 爲西漢時, 而其子成佛, 則佛法之入東國, 先於東漢明帝時, 亦可知也. 余於金剛遊, 記楡岾寺, 論此已詳矣. 菴有亞字房, 一巨房內, 用高低作畫如亞字形, 一竈燃火, 高低幷溫, 歷數百年不變云. 是曇空禪師所造, 此雖禪家小術, 亦甚異也. 路過三神洞書塾, 塾師朴氏貞圭是鄭閩華妻弟, 初面如舊, 挽止殷勤. 白酒、黃飯、山菜、川魚, 香潔可口, 連日憊損, 旅瑣百端, 偶得賢主, 經宿一宵, 其爲穩便, 便同還家. 初三日. 沿溪而下, 至洗耳巖. 云是孤雲遊地, 水石甚奇, 多有題名. 有詩曰: "高人洗得耳根餘, 俗子名心洗未除. 云是孤雲遊賞地, 刻題石面紛紛如. " 自此行二十里, 入雙磎寺. 寺在雙磎合流之內, 故得是名歟. 洞口左右石壁, 分刻"雙磎石門"四字, 傳謂孤雲以鐵杖書石, 是果然否? 寺僅爲中刹, 而殿閣則甚華麗. 門樓揭"靑鶴樓"三字, 傳謂孤雲彈琴吹笙於此, 靑鶴飛來, 故後人因以名樓. 乃次板上韻, 題詩曰: "爲迎靑鶴起樓臺, 物外仙人幾度來? 仙去鶴歸千年後, 豈知滄老此徘徊?" 世稱智異山中, 有靑鶴洞, 爲十勝之一, 萬人可活, 三災不入. 窮搜深覓於絶頂邃谷, 或以細石、德坪等地當之. 然殊不知千餘年前, 靑鶴早已來此, 至作靑鶴之樓, 樓之所在, 卽爲靑鶴洞也. 蓋自花開市以上, 至碧霄嶺底, 上下四五十里, 山高谷深, 背北向南, 風氣溫和, 土沃水豐, 穀果俱備, 煙草多産, 可謂一山中最樂地, 萬人可活, 三災不入, 豈非此耶? 栗谷送人頭流山中詩云"君今靑鶴洞中人", 亦指此洞也, 當時豈指窮荒絶險人跡不到若細石、德坪等處而云云乎? 寺庭有古碑一座, 孤雲所撰《眞鑑禪師碑銘》也. 其中有曰: "廬峯惠5)遠著論, 以爲'如來之於周、孔, 發端6)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沈約有云, '孔發其端7), 釋窮其致', 眞可謂識8)其大者, 始可與語道9)矣. " 余讀此, 作詩論之曰: "儒有大本與達道, 虛無寂滅佛所寶. 動靜體用本自殊, 混而無分已糊塗. 孔發釋窮是何言? 援儒入佛佛反尊. 孤雲豈非儒家子, 無乃名實不相似? 退溪而後逮淵、艮, 良有以來千秋論. " 自此歷花開市, 至蟾津江上. 碧波洋洋, 舟楫下上, 胸次豁然, 視諸山中之遊, 又是別樣趣味. 因詠一蠹詩"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流"之句, 笑謂子貞曰: "吾輩僅得看盡一山, 未能舟下大江, 覺不及蠹老風流矣. " 用其韻, 題一詩曰: "煙光助興入毫柔, 綠樹陰濃麥未秋. 蟾水滔滔萬丈屹, 蠹翁高詠想風流. " 溯江而上, 行二十里, 宿松汀店. 初四日. 過求禮土旨面, 觀所謂金環落地形新名基. 各處人爭來占宅, 多見敗而去, 來者又續, 村村家家, 星布碁置, 未知何處眞的, 還是虛名無實. 然要之山水回抱, 四野廣闊, 爲千人可居地則足. 自此北向, 行二十里, 入華嚴寺. 寺是巨刹, 二層覺皇殿甚高, 云是隋煬帝爲子求福, 使人建築, 未知信然. 如來舍利塔甚精妙, 位置絶勝. 庭有《碧巖禪師碑銘》, 李白軒景奭撰. 碑中記壬亂有功國家甚詳, 彼雖緇徒, 知爲君之忠可尙也. 又北行二十里, 踰水越峙, 抵美國人避暑室. 室爲五十餘所, 築之用石, 外固內麗, 而高大絶險處, 築室如此, 可想費得許多金. 人道美國多金, 信然矣. 山上開局, 岡巒秀麗, 眼界通豁, 泉出石間, 權之以稱, 其重非比他水, 服之消百病云. 夫孰知此地有此好基址? 亦可見美人之有堪輿術也. 來以極暑, 暑退則去, 夏節便作繁華地, 峽中窮民, 爲其雇傭, 喜得些金, 哀我亡國遺黎之可憐也. 此去般若峯, 已到中半, 望之若一躍可到, 而尙爲二十里. 人多謂般若、天王爲智異最高, 而般若差低. 然則旣登其高, 何害舍低? 初五日. 自此下山, 踰九山嶺, 經求禮堂谷, 點心于院右店. 又踰屯山嶺, 至南原包巖鄭子敬【泳寔】家宿. 雖不能旁搜細探, 於是乎內外全山, 槪覽矣. 有詩曰: "白頭流脉鎭南州, 中國衡山可與儔. 萬壑皆懸銀漢瀑, 千峯高逼玉京樓. 精靈幾毓群賢出? 深廣多治五穀疇. 登覽要知仁智術, 看如不看也堪羞. " 蓋以余所曾見之金剛, 較量於此山, 金剛淸峭聳拔, 此山雄高深邃而廣大過之. 金剛有似乎淸明君子脫出俗累, 使人塵想自消; 此山有似乎莊重君子德厚識博, 使人難測底蘊, 要之學者皆可取而作師也. 但以世所稱三神之說論之, 奇形勝狀, 當首擅金剛, 而頭流居其下. 抑又聞兩南人互以此山, 屬之本省, 迄未論定. 蓋觀以據盤之廣狹、向背之方面, 則當屬之嶺, 觀以國典南嶽廟祭自湖致之, 當屬之湖, 豈以此山主脈, 旣自湖入般若, 爲先起主峯, 而亦在湖地故耶? 人言"太祖應天, 日祈禱名山, 諸山靈皆應, 獨此山靈不應, 故貶謫湖南", 此則當屬之齊東也. 抑余又有一說. 此山一皆厚重, 無乖戾氣. 就其中較論, 則般若峯多土少石, 一味秀麗, 天王峯多石少土, 稍巉巖磅礡, 此所以湖南人心柔順, 嶺南人心剛厲也歟. 欲以問于知者. 初六日. 離包巖. 初七日. 迫昏始歸. 首尾凡旬九日. 오악(五嶽) 중국 사람들이 신성시했던 다섯 개의 산으로, 동악 태산(泰山)ㆍ서악(西嶽) 화산(華山)ㆍ남악(南嶽) 형산(衡山)ㆍ북악(北嶽) 항산(恒山)ㆍ중악(中嶽) 숭산(嵩山)을 말한다. 방외(方外) 속세의 예의와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는 세상으로, 주로 유가에서 불가나 도가를 이른다.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으로, 여기서는 저자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지칭한다.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경(德卿)이다. 임헌회(任憲晦)ㆍ신응조(申應朝)ㆍ송병선(宋秉璿)ㆍ박운창(朴芸牕)ㆍ김계운(金溪雲) 등 당시 학자들에게 모두 허통(許通) 받았으며, 성리학을 더욱 공부하기 위하여 한 살 연상인 전우에게 세 번 찾아가 사제(師弟) 관계를 맺었다. 오적(五賊)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이지용(李址鎔)ㆍ이근택(李根澤)ㆍ박제순(朴齊純)ㆍ이완용(李完用)ㆍ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자정(自靖) 스스로 의리와 지조를 지키며 편안히 처신하는 것으로, 《서경》 〈미자(微子)〉에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뜻을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가 은둔함을 돌아보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보인다. 기수(沂水)에서……돌아오겠다 도(道)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논어》 〈선진(先進)〉에 보인다.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며, 무우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농암(礱巖)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계용(季用)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우암의 〈주자차의(朱子箚疑)〉를 교정하였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도 절친하였다. 저서에 《농암유고》가 있다.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 되었다. 신말주(申末舟) 1429~1503.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며,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이다. 대사간ㆍ형조 참의ㆍ전주 부윤ㆍ진주 목사ㆍ창원 부사ㆍ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첨지중추부사ㆍ전라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세조(世祖) 즉위 이후에 순창에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광세지감(曠世之感)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감회를 이르는 말이다. 사계정사(沙溪精舍)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에 있는 정자로,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4~1589)이 조선 중기에 처음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여러 번 다시 지었다. 황위(黃暐) 1605~1654.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이다. 1638년(인조16)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이 되었고, 함경도 도사ㆍ평양 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역대 충절들의 사실을 모은 《정충록(旌忠錄)》이 있다. 민광훈(閔光勳) 1595~1659.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집(仲集)이다. 1616년(광해군8) 진사시에 급제하고, 1628년(인조6)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정언과 지평 등을 거쳐 남원 부사ㆍ안변 부사ㆍ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하여 호조 참의가 되었다. 사위 원문의 '옥윤(玉潤)'은 남의 사위에 대한 미칭이다. 진(晉)나라 위개(衛玠)가 악광(樂廣)의 딸에게 장가들자, 배숙도(裴叔道)가 "장인은 얼음처럼 맑고, 사위는 옥돌처럼 윤기가 난다.〔婦公氷淸, 女婿玉潤.〕"라고 찬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36 衛瓘列傳 衛玠》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1380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물리치고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은 전북 남원 운봉현(雲峯縣) 동쪽 16리 황산에 있었으며,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지었다. 《東園集 卷3 荒山大捷之碑》 수당(垂堂)의 경계 안전에 유의하여 위험한 곳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패릉(覇陵)에 올라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말을 타고서 질주해 내려오려 하자, 원앙(爰盎)이 "천금을 가진 집안의 자식은 마루 끝에 앉지 않는다.〔千金之子坐不垂堂.〕"라는 말을 인용하며 만류하였다. 《史記 袁盎列傳》 제명(題名) 명승지에 온 것을 기념하여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는……여겼으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주자(朱子)는……드러내었으나 주희(朱熹)가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남악 형산(衡山)에 올라 지은 〈취하여 축융봉에서 내려오며 짓다[醉下祝融峯作]〉에 "내가 만 리 먼 곳에 와서 큰 바람을 타니 깊은 계곡과 층층 구름이 가슴을 씻어 주네. 석 잔 술에 호기가 일어 낭랑히 시 읊조리며 날듯이 축융봉에서 내려오네.〔我來萬里駕長風, 絶壑層雲許盪胸. 濁酒三杯豪氣發, 朗吟飛下祝融峯.〕"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의(周顗)는……있었고 망한 나라의 풍경을 대하고 눈물을 흘린 것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여러 명사(名士)들이 신정(新亭)에 모여 술을 마시는데, 주의(周顗)가 탄식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는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山河)가 다르다.〔風景不殊, 擧目有江河之異.〕"라고 하니, 왕도(王導)가 얼굴빛을 변하며 "함께 나랏일에 힘을 바쳐 신주(神州)를 회복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초수(楚囚)처럼 맞대고 울기만 하는가?〔當共戮力王室, 克復神州, 何至作楚囚相對?〕"라고 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서방에……바라본다 쇠퇴한 세상의 현자(賢者)가 흥성했을 때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시경》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에는 감초로다. 누구를 그리 생각하시는가, 서방의 고운 님이로다. 저 고운 우리 님은, 서방의 사람이시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청황(靑皇) 봄을 주재하는 신(神)이라는 뜻의 시적인 표현이다. 봄은 동방(東方)과 청색(靑色)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동제(東帝)ㆍ동황(東皇)ㆍ청제(靑帝) 등으로 불렸다. 시우(柴宇) 땔나무로 얽어서 지은 집을 말한다. 영대(靈臺)의 주인 마음을 이른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곽상(郭象)의 주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지자(智者)와……하였네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이 산수(山水)를 즐기는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라고 하였다. 삼재(三災) 불교 용어로, 겁말(劫末)에 일어난다는 세 가지의 재난을 말한다. 도병재(刀兵災)ㆍ역병재(疫病災)ㆍ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ㆍ수재(水災)ㆍ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율곡(栗谷)이……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의 〈송이가겸유두류산(送李可謙遊頭流山)〉 시를 말한다. 심약(沈約)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으며, 학문에 널리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대본(大本)과 달도(達道) '대본'은 큰 근본이라는 뜻으로 성(性)을 가리키고, '달도'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행하는 도로,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보인다.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이괄의 난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 때 예문관 제학으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인조 후반 영의정에 올랐으나 효종 즉위 후 청나라의 견제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기도 하였다. 저서에 《백헌집》 등이 있다. 忠毅 底本에는 "□□". 《朝鮮王朝實錄》 英祖 29年 4月 23日에 근거하여 보충. 惠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慧". 端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致". 端 底本에는 없음.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 근거하여 보충. 識 上同. 道 《孤雲集》 卷2 〈眞監和尙碑銘〉에는 "至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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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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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18 卷之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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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만은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晩隱黃公墓碣銘【幷序】 옛날 원릉(元陵, 영조) 시대에 미호 김원행(金元行) 선생은 덕이 높고 학문이 정대(正大)하여 사문의 종주가 되었다. 일찍이 그를 종유하는 만은처사 평해 황공 휘 전(壥) 자 사후(士垕)에 대해서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송하였으니, 이는 정자(程子)가 여진백을 칭송하였던 말이다.38) 지금 선생이 공을 칭송했던 말로 공의 평생을 추적해보면 또한 그 말이 마땅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또한 자신이 좋아한 바를 미루어 그 아들 이재(頣齋) 선생39)을 명유(名儒)로 만들었으니, 그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다.공은 자질이 매우 영민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숙부인 구암공 재중(載重)에게 학문을 배워 문한(文翰)을 일찍 성취하였다. 그러나 일곱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떨어져 마침내 포기하고 진실된 학문에 종사하였다. 당시 나이가 노년이었는데도 경전과 주자의 책을 철저하게 읽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깨달은 뒤에 그만두었다.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표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나이가 부족한 지도 모르는 자'40)에 해당한다. 이에 조예가 깊이 확충되고 두텁게 양성되었으니, 보고 감화를 받은 이들이 믿게 되고 명성이 일어나게 되어 선비들의 많은 기대를 받게 되었다. 두호 조정(趙晸) 공이 고암서원의 강회를 주관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병계 윤봉구(尹鳳九)와 백수 양응수(楊應秀) 등 제현들도 또한 모두 공을 인정하였다.일찍이 "상수도 비록 성인의 학문 중의 일이지만, 군자는 마땅히 경전을 위주로 삼고 이것을 그 곁에 두고 참고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논어》 한 권은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자》로 사람들에게 작문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바로 말하기를 "《맹자》 일곱 편은 사람은 고무시키는 변화가 다채로워 사람으로 하여금 발을 구르며 뛰게 만드니, 이 또한 문장을 배우기에 충분한데 하필이면 《장자》이겠는가. 율곡의 《격몽요결》은 사람을 만드는 책이며, 우암은 주자의 정맥(正脈)이다."41)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식견의 올바름이요 학문의 힘이다.어버이를 섬길 때는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예로써 섬겼으며, 멀리 지내던 두 누이를 맞이하여 재산을 함께 공유하였다. 흉년에는 고을에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자가 많았다. 과거를 보러갈 때 분경(奔競)42)을 끊어버리면서 "출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어찌 임금을 섬기겠는가."라 하였다. 조정에서 갑오 이후의 배향하는 사원에 대해 훼철하라고 명령하자 구암사도 또한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임(祠任)이 연수(年數)를 고쳐서 서원을 유지하려고 하자, "임금을 속이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젊었을 때의 올바른 행실로 본래 자질의 돈후하고 질박함이 이와 같았다.신묘년(1771)에 돌아가시게 되자 조동 앞 산기슭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 68세였다. 시조는 고려 참찬 휘 숙경(淑卿)이다. 부호군 뉴(紐)가 춘천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흥덕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6대조이다. 고조는 안촌 이후(以厚)로, 갑정(甲丁)의 두 난리43)에 의병을 모집했던 일이 《모의록(募義錄)》에 실려 있다. 조부는 취은(醉隱) 세기(世基)로, 기개와 절조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부친은 산촌(山村) 재만(載萬)으로, 사부를 잘 지었다. 19살에 소장을 올려 우암을 구원하려 하였으니, 공의 어짊은 또한 출신 가문과 연계되어 있다. 산촌공의 처음 부인은 울산 김씨 태하(泰夏)의 따님으로 하서 선생의 5대손이다. 계비(繼妃)는 강진 김씨 복초(復初)의 따님으로 공을 낳았다. 공의 부인은 강진 김씨로, 통덕랑 백형(伯衡)의 따님이다. 익찬 윤석(胤錫)은 장남으로 곧 이재(頣齋)이다. 주석(冑錫)은 형과 함께 미호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으니, 바로 차남이다. 풍천 노엽(盧燁)은 옥계(玉溪)의 후손이며, 참봉 울산 김익휴(金益休)는 하서(河西)의 후손인데, 이들은 사위들이다.오호라! 공의 학문으로 벼슬로 현달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으니 비록 아쉬울 것 같지만, 그러나 큰 스승이 높이 평가하고 어진 아들이 몸을 세워 이름을 드날렸으니 절로 영원히 빛 날 것이다. 어찌 다만 한 시절 높은 벼슬44)에 비교하겠는가. 또한 일찍이 도에서 추천하여 능관(陵官)에 의망되었으며, 이재가 입대(入對)하던 날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라는 임금의 칭송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세상과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8대 사손(嗣孫) 서구(瑞九)가 비로소 묘소의 빗돌을 장만하고서 나에게 글을 요청하였다. 나는 공이 위를 잇고 아래로 전하여 가학을 창대하게 만들었으니 타인의 가문에서는 보기 힘든 어짊에 대해 감탄하였기에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글이 졸렬하여 다 갖춰 서술하기는 어려워 그 요점을 대략 서술하니, 공의 덕과 학문을 상세히 살펴보고 싶은 이들은 어찌 족보와 행장, 유집에 나아가 고찰하지 않겠는가. 이에 명을 짓는다.은거하며 뜻을 구하니 隱求志이런 경우 보기 비록 드물지만, 見雖鮮선비는 학문에 대해 士於學마땅히 노력해야 하도다. 宜可勉좋아하여 멈추지 않으며 好無已종신토록 은거하였도다. 隱終身아들이 선(善)을 본받게 하여45) 式穀子훌륭한 인물46)로 만들었나니, 作席珍이것을 공이 구하였으니 是公求구하매 이르렀도다. 求而至만은이라 편액하니 晩隱扁비로소 부끄러움이 없어라. 始無愧빗돌에 새겨서 鑱之石영원히 밝게 보이노라. 永昭示 昔在元陵之世, 渼湖金先生, 德尊學正, 宗主斯文.嘗稱其從遊, 晩隱處士, 平海黃公, 諱壥字士垕, 爲老而好學, 此程夫子稱呂進伯語也.今以先生稱公者, 迹公平生, 則亦知斯語之爲得當.公又推己所好, 及其子頣齋先生, 俾成名儒, 其實驗可見矣.公天禀穎悟, 少孤, 學于叔父龜巖公載重, 文翰夙就. 然七擧而不中, 遂棄之, 從事實學.時年且老大, 經傳朱書, 劇讀精思, 體認心悟而後已.闇然自修, 不尙標榜, 庶所謂俛焉孜孜, 不知年數之不足者.於是造詣, 深充養厚, 觀感所孚, 風聲所興, 蔚爲儒望.杜湖趙公晸請主考巖講會, 尹屛溪、楊白水諸賢, 亦皆獎許.嘗曰 : "象數雖亦聖學中事, 君子宜主經傳, 而以此旁參." 又曰 : "《論語》一部最要." 聞人以《莊子》敎人作文, 則曰 : "《孟子》七篇, 鼓舞變化, 令人踊躍, 此亦足學文章, 何必《莊子》.栗翁《要訣》, 做人樣子, 尢翁, 朱子正脈." 此識之正, 學之力也.事親, 生死以禮, 邀致二姊, 共厥有無.荒年, 鄕里賴活者衆.赴擧時, 絶奔競曰 : "出身不正, 何以事君." 朝令撤甲午以後享祠, 龜巖祠亦在中, 祠任欲改年限圖存, 則曰 : "勿欺君也." 是皆少日行誼, 而素質敦實又如此.卒于辛卯, 葬于槽洞前麓負■原, 壽六十八.始祖高麗參贊諱淑卿.副護軍紐自春川南居興德, 是爲六世.高祖, 安村以厚, 甲、丁二亂, 募義兵事, 載《募義錄》.祖, 醉隱世基, 以氣節名世.考, 山村載萬, 長詞賦.年十九上疏, 救尢菴, 公之賢, 亦繫世類.山村公初配, 蔚山金氏泰夏女, 河西先生五世孫.繼, 康津金氏復初女, 生公.公之齊, 康津金氏, 通德郞伯衡女.翊贊胤錫其長男, 卽頣齋.冑錫與兄, 同師渼湖, 有文行, 次男也.豊川盧燁, 玉溪后 ; 參奉蔚山金益休, 河西后, 其婿也.嗚呼! 以公之學, 不得仕顯而聞世, 雖若可恨, 然宗師推重, 賢子立揚, 自耀久遠, 豈但一時靑紫比.且曾被道薦擬陵官, 而蒙'是父是子'之聖褒於頣齋入對日, 是可以有辭矣.八世嗣孫瑞九, 始具墓碣, 請余文之.余竊感嘆公上紹下傳, 昌大家學, 爲人門罕覯之賢, 故不能終辭.然文拙難於備述, 畧敘其大致, 欲詳究德學者, 盍就譜狀遺集而考焉.銘曰 : "隱求志, 見雖鮮.士於學, 宜可勉.好無已, 隱終身.式穀子, 作席珍.是公求, 求而至.晩隱扁, 始無愧.鑱之石, 永昭示." 정자가……말이다 진백(進伯)은 여대충(呂大忠)의 자이다. "여진백은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숙이 말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더욱 사랑스럽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원래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의지와 근력이 쇠해지게 마련인 데다 배워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고 배울 햇수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얼마 배우지 못하고 햇수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呂進伯老而好學 理會直是到底 正叔謂老喜學者尤可愛 人少壯則自當勉 至於老矣 志力須倦 又慮學之不能及 又年數之不多 不曰朝聞道夕死可矣乎 學不多 年數之不足 不猶愈於終不聞乎〕"라는 말이 주희(朱熹)가 편찬한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0 낙양의론(洛陽議論)에 나온다. 이재 선생 황윤석(黃胤錫)의 호이다. 그도 또한 미호의 제자이다. 쉬지 않고……모르는 자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의 "높은 산은 누구나 우러러보게 마련이고, 큰길은 누구나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는 구절에 대해서, 공자가 "시에서 인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큰길을 걸어가다가 힘이 다해서 계속 걸을 수 없을 때에야 중도에 그만둔다. 마찬가지로 몸이 이미 늙은 것도 잊고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한다.[詩之好仁也如此 鄕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라고 평한 말이 《예기》 〈표기(表記)〉에 나온다. 《맹자》……정맥이다 글로 보면 《맹자》 부분과 율곡, 우암에 대한 논의가 동시에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아마 서로 다른 시기에 한 말로 보인다. 분경(奔競) 벼슬을 청탁하기 위하여 세력 있는 집에 분주히 찾아다니며 엽관 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일. 갑정(甲丁)의 두 난리 갑자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년에 후금이 침입한 호란(胡亂)을 가리킨다. 높은 벼슬 '청자(靑紫)'는 푸른 인끈[青綬]과 자주색 인끈[紫綬]을 가리키는 것으로, 옛날 구경(九卿)은 푸른 인끈을,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사용하였는데 전하여 고관대작의 뜻으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75 〈하후승전(夏侯勝傳)〉에 "선비가 경술에 밝지 못한 것이 흠이지, 만약 경술에 밝기만 하다면 고관대작을 얻는 것은 마치 몸을 숙여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士病不明經術, 經術苟明, 其取青紫如俯拾地芥耳.]"라고 하였다. 아들을……하여 《시경》 〈소완(小宛)〉에서 "너의 아들을 가르쳐서 선(善)을 하는 것을 본받게 하라.〔教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 훌륭한 인물 '석진(席珍)'은 재덕(才德)을 갖춘 선비를 의미한다. 《예기》 〈유행(儒行)〉에서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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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 강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止堂姜公墓碣銘【幷序】 옛날 장릉(長陵, 인조)의 병자호란 때 청계 강순(姜恂) 공이 의기를 떨쳐 병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의 방비를 도왔다. 성하(城下)의 맹세47)가 있게 되자, 곧 남쪽 고창의 운곡으로 내려와 주자의 유상(遺像)을 받들고 강학하면서 의를 행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지당공 애(隘)는 자가 여정(汝貞)인데, 시와 예를 이어받고 가업을 계승하였으니48) 잘 계술(繼述)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양에서 벼슬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떠돌다가 타향에 거처하게 되었으니 농사가 아니면 녹봉을 대신할 것이 없다. 어버이는 연로하신데 한갓 문사만 일삼는다면 자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비루한 일을 감당하였는데, 낮에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밤에는 곧 쉬지 않고 책을 열심히 읽었다. 제생들이 모여 강론하는 날에는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서 참석하여 경전과 예에 대해 변석하였다. 이윽고 살림살이가 펴져서 맛있는 음식도 풍부해졌는데, 부모를 봉양하고 남은 힘으로 하는 공부도 또한 공부에만 매진하는 자들이 미치지 못하였다.청계공이 비록 세상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나라의 근심거리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들으면 안색과 말투에 이따금 어두운 근심을 드러낼 때가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피고 뜻을 받들어 극진한 위안의 말로 풀어드렸으며, 술을 마련하고 손님을 초대하여 답답함을 풀어드리기까지 하였다. 청계공이 붕우들을 대할 때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막내를 사랑하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자 근심에 젖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며, 대변을 맛보고 북극성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를 모두 극진히 하였다. 삼년이 지나 부친의 상을 당하자 모친상 때처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거상(居喪)을 잘한다고 칭송하였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때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부친을 섬기는 예와 같이 하였으며, 정성과 신의로 사람을 상대하였으며, 은혜와 위엄으로 아래 사람을 부렸으니, 이것이 대략적인 공의 행실이다.강씨는 진주에서 나와 나라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고려 공목왕 때 대제학 회중(淮仲)이 이름을 드날렸고, 조선에는 참판 징(澂)과 한림 억(億)이 현달한 분이다. 사은당 명서(命瑞)와 성재 홍제(弘胤)는 모두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렸으니, 이 분들이 공의 증조와 조부이다. 유인 밀양 박씨가 모친이다. 공은 영릉(寧陵, 효종) 갑오년(1654)에 태어나 명릉(明陵, 숙종) 계해년(1683)에 돌아가셨으니 나이가 겨우 서른이다. 본현(本縣)의 오서방 사거리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대구 배씨 문표(文豹)의 따님으로, 공보다 31년 뒤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부하였는데, 봉분은 따로 썼다. 아들은 재상(再尙)이며, 딸은 심봉거(沈鳳擧)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석일(錫一), 준일(俊一), 수일(秀一) 등이며, 손녀는 고일문(高一文), 고천묵(高天默)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의 효도와 공손, 은택과 신의의 덕을 총괄하여 말하자면 인(仁)이다. 어진 자는 반드시 수를 누리는데 도리어 그렇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고 장성하여 힘써 행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감[謹愼]' 두 글자를 외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평소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확충하여 나아간다면 큰 성취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인데 명수(命數)의 한계가 가로막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후손이 번창하여 문행(文行)을 지닌 이들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당대에 누리지 못한 보답이 반드시 후손에 돌아왔으니,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공의 7대손 경흠(冏欽)이 가장(家狀)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가장은 바로 공의 아들 위촌거사가 지은 것이니, 근거로 삼아서 쓸 수 있다. 이에 명을 짓는다.행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배우라는 건 行餘學文성인이 말씀하신 것이라.49) 稱自聖人꽃은 피었지만 열매 맺지 못하니 秀而不實또한 그것이 애석하도다. 亦厥攸惜다만 애석함과 칭송을 惟惜與稱공이 실로 겸하였으니, 公實得幷천백 년 이후로 千百其來어찌 떳떳하게 할 말이 없겠는가. 曷不有辭 粤昔長陵丙子之難, 淸溪姜公恂, 奮義募兵, 助守南漢.及其有城下之盟, 則遂南下高敞之雲谷, 奉朱子像, 講學行義.其第三子止堂公隘汝貞, 襲詩禮業箕裘, 可謂善繼述之肖子也.其言曰 : " 吾家世仕于京, 一朝漂寓, 非耕無以代祿.親老而徒事文墨, 子職闕." 乃躬執稼穡, 幷能鄙事, 日以爲常, 夜輒劇讀不已.諸生會講日, 撥冗參席, 辨釋經禮.旣而調度紓而甘旨豊, 餘力之學, 亦有專門者所不及.淸溪公, 雖無意乎世, 聞國憂民瘼, 往往發幽憂於色辭間, 公察意順旨, 極其慰釋, 至爲之置酒招賓, 以泄壹鬱.淸溪公對朋舊稱善曰 : "吾非愛季之私也." 母癠, 憂不遑食, 嘗糞祈辰, 丁憂, 哀禮俱盡, 越三年, 遭外艱, 亦如之, 人以善居喪稱之.奉先致如在之誠, 敬兄如事父之禮, 待人以誠信, 御下以恩威, 此公之行治大畧也.姜出晉陽, 爲國著姓.高麗恭穆公, 著大提學淮仲, 本朝參判澂、翰林億, 皆其顯者.思恩堂命瑞、惺齋弘胤, 俱以學行著, 是爲公曾祖祖.孺人密陽朴氏, 其妣也.公生于寧陵甲午, 卒于明陵癸亥, 年僅三十, 葬本縣五西坊四巨里負癸原.配, 大丘裵氏文豹女, 後公三十一年而卒.墓附以雙封.男再尙, 女適沈鳳擧.孫男, 錫一、俊一、秀一. 女高一文、高天默.嗚呼! 公孝悌恩信之德, 總言之則仁也.仁者必壽, 而反不然, 天固難諶.幼而嗜學, 長而力行, 常誦謹愼二字, 以自省.雃言 : "知而不行, 是爲未知." 充此而進, 大就可期, 而命限尼之, 此尢可憾也.然後承蕃碩, 文行相繼, 不食之報, 必返之, 天其在斯歟.七世孫冏欽, 示以家狀, 屬余銘墓.狀, 乃公之子渭村居士撰, 可據而書.銘曰 : "行餘學文, 稱自聖人.秀而不實, 亦厥攸惜.惟惜與稱, 公實得幷.千百其來, 曷不有辭." 성하(城下)의 맹세 적군이 성 아래에 임하였을 때 압박을 받아 항복한 굴욕적인 맹약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桓公) 12년조에 "초(楚)나라가 교(絞)를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성하지맹을 체결한 뒤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에 "성하맹(城下盟)은 제후가 매우 수치스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청에게 굴욕적인 맹약을 체결한 것을 말한다. 가업을 계승하였으니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하고……것이라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제자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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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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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교관에 추증된 경재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童蒙敎官敬齋李公墓碣銘【幷序】 동몽교관에 추증되고 효자로 정려(旌閭)된 경재 이공은 휘가 필(苾) 자는 덕형(德馨)으로, 조선 명릉(明陵, 숙종) 시기에 태어나 원릉(元陵, 영조) 병인년(1746)에 돌아가셨다. 흥덕현 편월리 오른쪽 산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 지낸 지가 223년이 되는데, 묘지에는 행적을 드러내 새긴 비석이 없다. 7대손 주범(周範)이 장차 비석을 세워 행적을 새기려고 하면서 공의 친족 후손인 종택(鍾宅)이 지은 가장으로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공의 문집 가운데 공에 대해 말하면서 "어질면서도 의롭다."라고 한 말을 읽었는데, 지금 가장의 글을 얻어 보매 더욱 자세하니 다행이다. 비록 내가 미천하고 글이 졸렬하여도 존모하는 마음은 깊으니, 어찌 사양하겠는가.공은 어려서 영민하고 장중하였으며, 성장하여 부모를 섬김에 뜻을 잘 받들고 존체를 잘 봉양하였다. 열여덟 살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곡하면서 우는 슬픔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초상과 장례의 예절은 주자를 따랐다. 때때로 모친을 뵙고서 잘 위로하여 마음을 편히 해 드렸다. 모친의 상을 당하여 이전 부친의 상 때처럼 하였다. 부모의 제삿날에는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성묘하여 추위나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아우가 세 명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함께 하니, 여러 아우와 제부(弟婦)들이 감화하여 또한 개인적으로 감춰두지 않았다. 둘째와 막내 아우가 일찍 죽자, 여러 조카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신이 낳은 아이들처럼 대하였다. 크고 작은 집안일은 셋째 아우에게 맡겼다. 자식과 조카들을 타일러 과부인 숙모를 섬기기를 최효분(崔孝芬)이 이씨를 받드는 것50)처럼 하였다. 종족(宗族)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 대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얼굴에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않고 의리로 차분차분 깨우치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계사년(1713)에 많은 선비들과 동산서원(東山書院)을 창건하여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와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두 현인의 영위(靈位)를 모셨는데, 간사한 무리들이 훼철하려고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헐뜯고 욕을 하였지만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신축년(1721)에 소장을 올려 소재(疎齋) 충문(忠文)51) 이이명(李頤命), 몽와(夢窩) 충문(忠獻)52) 김창집(金昌集), 한포(寒圃) 충민(忠愍)53) 이건명(李健命) 등을 늘려서 배향하기를 요청하니, 모두 남쪽 고을에서 제일 강직한 선비라고 칭송하면서 또한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추천되어 능관(陵官)으로 의망되었다. 임인년(1722)에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이 화를 당하자, 천 리를 찾아가 위로하고 해를 넘기면서 함께 거처하니, 조야(朝野)가 칭송하였다.공의 선조는 함평 사람이다. 명종과 선조 시기에 대사간 죽곡 선생 휘 장영(長榮)이 세상에 현달하였는데, 둘째 아들 통덕랑 도곡 휘 유(瑜)가 다섯 번째 형 생원 낭곡 휘 억영(億榮)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부안에서 순절하였으니, 이 분이 고조가 된다. 증조는 통덕랑 회당 휘 홍의(弘誼)이다. 조부는 미산 휘 시(時)로,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다. 부친은 월촌 휘 익방(益芳)으로, 효성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으며 명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모친은 여산 송씨 지빈(之彬)의 따님으로 부덕이 높았으니, 대개 공의 어짊은 가문에서 기인한 것이다. 부인은 죽산 박씨 후증(後曾)의 따님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은 사호(師灝)로, 부친의 뜻을 능히 계승하여 소장을 올려 동산서원에 배향된 인물을 복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두 딸은 진주 정수탁(鄭守鐸), 수원 백상렴(白尙廉)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진규(震圭)이다.오호라! 공이 행한 일은 비록 당시에 선비들이 도에 천거하고 본읍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여, 순찰사 권혁(權爀) 공이 장계로 조정에 올렸으나 미처 포장(襃獎)까지는 받지 못하였지만, 고종 계사년(1893)이 되어서 그 선고(先考)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추증되고 정려가 세워졌으니, 어찌 공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서 전대 사람보다 더욱 빛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죽곡과 도곡의 후손으로 竹桃雲仍증자와 민자건54)의 생각과 마음을 지녔네. 曾閔思情체(體)가 서서 용(用)이 행해지니 體立用行동산서원이 완성되었도다. 東山祠成이름난 공들이 모두 칭송하고 名公咸稱선유는 좋은 평을 하였어라. 先儒有評성대하도다 추증과 정려 赫赫贈旌임금의 은혜 더욱 영광이니, 聖恩尢榮편월리 산기슭의 묘소는 月麓之塋영원토록 밝게 빛나리라. 永世光明 贈童蒙敎官, 旌閭孝子, 敬齋李公諱苾字德馨, 生于大韓明陵, 卒于元陵丙寅, 而葬于興德縣片月里右麓甲坐之原, 爲二百二十有三年, 而墓闕顯刻, 七世孫周範, 將樹石, 以銘行治, 以公族後孫鍾宅狀, 求文於余.余嘗讀頣齋黃公集中語及公, 謂賢而義, 而今得狀文而益詳, 幸矣.顧雖人微辭拙, 慕之則深, 豈敢辭諸.公幼而穎悟簡重, 長而事親極志體.十八遭外艱, 哭泣之哀, 動傍人, 喪葬之禮, 遵朱子.時見于母.善於慰悅.及丁憂, 一如前喪.考妣夫日, 終身不肉, 朔望展省, 寒暑不廢.有弟三人, 友愛尢篤, 有無共之, 諸弟與婦, 感化亦無私藏.仲季二弟俱夭, 撫育諸姪, 同己出.大小家政, 屬叔弟.詔子姪事募叔母, 若崔孝芬之奉李氏.於宗族鄕黨, 一以誠信.有不可意者, 不顯斥, 以義理諄諄開陳, 人皆服從.癸巳, 與多士創建東山書院, 妥白江、西河兩賢之靈, 奸人輩欲扌+毁撤, 詬罵萬方, 終不動.辛丑, 上疏延額疎齋李忠■公、夢窩金忠文公、寒圃李忠■公, 咸稱南州第一剛直之士, 且曰 : "忠臣求於孝子之門." 於是薦于朝, 擬陵官.壬寅, 屛山李公之被禍也, 千里致慰, 同處經年, 朝野稱之.公之先, 咸平人.明、宣之際, 有大司諫竹谷先生諱長榮, 顯于世, 以仲子通德郞桃谷諱瑜, 繼第五兄生員浪谷諱億榮后, 丁酉亂殉節于扶安, 是爲高祖.曾祖, 通德郞悔堂諱弘誼.祖薇山諱時, 有文行.考, 月村諱益芳, 以孝贈童蒙敎官, 命旌.妣, 礪山宋氏之彬女, 甚有婦道.蓋公之賢, 實世類之自也.配, 竹山朴氏後曾女, 墓祔.一男師灝, 克繼先志, 上疏請復東山院額.二女適晉州鄭守鐸、水原白尙廉.孫震圭.嗚呼! 公之事行, 雖在當日, 章甫道薦, 本倅營報, 巡使權公爀啓聞, 而未及蒙褒, 至于高宗癸巳, 贈官旌閭, 一如其先考, 豈非公論之久而益彰, 有光前人也歟.銘曰 : "竹桃雲仍, 曾、閔思情.體立用行, 東山祠成.名公咸稱, 先儒有評.赫赫贈旌, 聖恩尢榮.月麓之塋, 永世光明." 최효분이 이씨를 받드는 것 최효분에 대해서는 《소학》 〈선행〉에 그 내용이 나온다. 즉 "효분의 숙부 진(振)이 죽고 난 뒤에 효분 등이 숙모 이씨를 받들기를, 낳아주신 어버이 섬기듯이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따뜻함과 서늘함을 살피며 집을 나감에 아뢰고 들어옴에 뵈었으며, 집안의 세세한 일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결정하였다. 형제가 출행하여 얻은 것이 있으면, 항상 아주 조금의 물건이라도 모두 이씨의 창고에 넣고, 사 계절마다 나누어 줄 때도 숙모 이씨가 결정하도록 하였다."라 하였다. 충문 원문에 '문(文)'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충헌 원문에 '헌(獻)'은 '문(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류로 바로잡았다. 충민 원문에 '민(愍)'자가 없는데, 보충하였다. 증자와 민자건 '증민(曾閔)'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효행이 지극하였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孟子)는 증자에 대해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섬겼다고 할 수 있으니, 부모님을 섬길 때는 증자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可也]"라는 말을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는 민자건에 대해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의 칭찬하는 말에 트집을 잡지 못하는구나.[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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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헌 조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竹軒趙公墓碣銘【幷序】 죽헌 조공의 묘에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는데, 종족의 후손인 한규(澣奎)가 공의 사손(嗣孫) 아무개의 명으로 유사(遺事)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유사를 살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조씨는 함안에 본관을 두었다. 고려 원윤 휘 정(鼎)이 시조가 된다. 고려가 망할 때 공조전서 금은(琴隱) 선생 휘 열(悅)이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절개를 지켰다. 2대가 지나 어계(漁溪) 선생 휘 려(旅)는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분으로 대총재55)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두 세대의 정충(精忠) 이후로 충효와 행의(行義)로서 대를 이어 명가(名家)가 되었다. 공은 금은의 9대손이며 어계의 7대손으로, 휘는 시전(時琠) 자는 윤보(潤甫)이며 죽헌은 자호이다. 5대조 내헌공(耐軒公)은 휘가 연의(淵義)로, 의금부 경력을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고조는 휘 정언(庭彦)으로 부사직을 지냈으며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율헌공(栗軒公)은 휘가 택(澤)으로, 사재감정에 추증되었다. 조부 송재공(松齋公)은 휘가 면도(勉道)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한강(寒岡) 문목공 정구(鄭逑)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부친의 휘는 함번(咸蕃) 호는 월창(月牕)으로, 종숙부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에게 학문을 배워 학문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모친은 인천 이씨 세(歲)의 따님과 전주 이씨 영철(英哲)의 따님이다.공은 효종 정유년(1657)에 태어났으니, 몸가짐이 남달랐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학문을 배울 때가 되자 독실한 뜻으로 학업에 부지런하여 경사(經史)에 깊게 통달하였으며 문사가 정밀한 경지에 이르렀다. 족조(族祖)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선생을 위하여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시호를 요청하였다. 선비들의 의견은 공으로 주필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시호56)를 청하는 법은 참으로 정한 법식이 있는데, 또한 소장의 글이 명백하고 적절했기 때문이다.공의 효애(孝愛)는 하늘로부터 받아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예로써 섬겼으며 병을 간호할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선공(先公)의 병이 위태로울 때 죽순을 찾았는데 당시 너무 때가 일러서 죽순을 찾아 올릴 수가 없었다. 이것을 한으로 여겨 평생 죽순을 먹지 않았으며, 일찍 올라오는 대를 집에 심고서 제삿날에 반드시 올렸다. 상을 당해 병에 걸려 예를 다하지 못하자 다시 3년을 더하여 죽을 먹고 여묘살이를 하니, 사림들이 공의 행의(行誼)로 여러 차례 관찰사에게 추천하였다. 영조 병오년(1726) 2월 9일 돌아가시니, 향년 일흔이었다. 진주성 태동 안산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진양 유씨 만희(萬熙)의 따님이다. 후비(后妃)는 경주 이씨 후도(後道)의 따님이다. 묘는 세 분을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항(杭)은 백부(伯父)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차남은 노(櫓)이다. 손자는 영대(榮大), 영윤(榮潤), 영룡(榮龍)이 있다. 딸은 노제광(盧梯光), 이몽상(李夢相)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이 효성과 학문으로 명성과 실상이 드러나서 좌해 명가의 명성을 능히 지켰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사는 마을에는 정려로 표창도 없었고 자신에게는 작록도 이르지 않았지만, 당시 유사가 밝지 못한 것이 공에게 어찌 손상이 되겠는가."이에 명을 짓는다.금은과 어계의 선덕 琴漁先德한강과 간송당의 연원으로, 寒松淵源효성과 학문은 惟孝惟學진실되면서도 순수하였어라. 旣實且純조상들의 영광이 있었으며 父祖有光현철들과 함께 돌아가리라. 賢哲同歸내가 빗돌에 새기노니 我鑱于石세상의 법도에 도움이 있으리. 世程可裨 竹軒趙公之墓, 將樹碣也, 族後孫瀚奎將公嗣孫■■之命, 齎遺事一通而來, 屬余銘之.辭不獲, 按而叙之曰 : "趙氏, 籍咸安.高麗元尹諱鼎, 爲上祖.麗之亡也, 工曹典書琴隱先生諱悅, 守罔僕之節.再傳而漁溪先生諱旅, 本朝端廟生六臣之一, 贈大冡宰謚貞節.兩世精忠之後, 連世以忠孝行義爲名家.公, 琴隱九世, 漁溪七世, 諱時琠字潤甫, 竹軒自號也.五世祖耐軒公, 諱淵義, 義禁府經歷贈戶曹參判.高祖諱庭彦, 副司直贈刑曹參判.曾祖栗軒公, 諱澤, 贈司宰監正.祖松齋公, 諱勉道, 同知中樞府事, 師事寒岡鄭文穆公.考, 諱咸蕃號月牕, 受業于從叔父澗松堂, 以學行著.妣, 仁川李氏歲女、全州李氏英哲女.公, 以孝廟丁酉生, 儀表異凡, 才思聰穎.及就學, 篤志勤業, 淹貫經史, 精臻辭筆, 爲族祖大笑軒先生, 倡多士請謚也.士論, 以公主筆, 竟得蒙允, 節惠之法, 固有定式, 而亦因疏辭之明白精當也.公孝愛天植, 生事以禮, 養病盡誠.先公疾劇, 思芛菜, 時早甚, 未得求進, 以是爲恨, 平生不食芛, 種早竹於家, 必薦忌辰.丁憂嬰疾, 不能盡禮, 更加三年, 歠粥居廬, 士林以公行誼, 累薦于方伯.以英廟丙午二月九日卒, 享年七十, 葬晉州省台洞案山負酉原.配, 晉陽柳氏萬熙女.后配, 慶州李氏後道女.墓皆祔.擧二男, 長杭, 糸世父后.次櫓.孫男, 榮大、榮潤、榮龍.女, 盧梯光、李夢相.嗚呼! 公以孝以學, 名與實彰, 克守左海名家之稱, 詎不盛哉.至於宅里闕旌表, 身不及爵祿, 當時有司者之不明, 於公何損哉." 銘曰 : "琴、漁先德, 寒、松淵源.惟孝惟學, 旣實且純.父祖有光, 賢哲同歸.我鑱于石, 世程可裨." 대총재 이조 판서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시호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하였다. 이는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려우므로 가장 큰 것으로 요약함을 이른다. 이 때문에 시호를 절혜(節惠)라고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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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金公墓碣銘【幷序】 부풍의 치소(治所)에서 5리 떨어진 망기산(望氣山) 동명당(東明堂)의 왼쪽 기슭 진좌(辰坐)의 언덕에 있는 봉분은 바로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고(故) 부녕 김공 휘 시련(始鍊)을 모신 곳이다. 5대손 낙준(洛俊), 낙춘(洛春)이 여러 친족들과 함께 장차 묘갈을 다시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요청하였다. 나는 이미 중공(仲公) 운암처사(雲菴處士)의 묘갈을 지었기에 굳게 사양하였는데, 그럴수록 요청함이 더욱 정성스러워 비록 늙고 병들어 위태로운 상태에 있지만 한 집안의 정의(情誼)로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오호라! 공은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는데 죽계 선생이 자손에게 남긴 은택은 5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으니,57)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효제를 두터이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공의 언행과 덕업을 기록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족보에 보이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가. 다만 이것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자와 호, 돌아가신 해까지 누락되었으며 다만 원릉(元陵, 영조) 임자년(1732)에 태어났다는 기록만 있으니, 옛사람이 질박함을 숭상하는 풍조를 더욱 살펴볼 수 있는데, 지나치게 소략하니 탄식을 견딜 수 있으랴.홍릉(洪陵, 고종) 병자년(1876)에 자손이 귀하게 되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선대의 계보와 대대로 쌓은 덕은 모두 같은 능성의 운암공(雲菴公) 묘비에 갖춰져 있으니 이에 기록하지 않는다. 부인은 숙부인에 추증된 전주 이씨로, 춘항(春恒)이 부친이다. 묘는 같은 등성이의 청룡등 묘좌(卯坐)에 있다. 아들은 셋으로, 안택(安澤)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진택(鎭澤)과 경택(慶澤)이 있다. 조양 임의배는 사위이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데 다만 세상에 드러난 자를 기록한다. 서각(瑞珏)은 호가 송은(松隱)으로,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고을과 도에서 서로 추천하였으며 수를 누려 통정대부에 올랐다가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기에 삼대를 추증하니, 안택의 아들이다. 지금 공의 자손은 대단히 번창 하였는데, 대부분 순박하고 삼가며 우아하고 조심스러움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또한 공이 당대에 누리지 못한 것이 후손에게 보답되는 것을 증험할 수 있다. 이에 명을 붙인다.이름난 조상의 후예로 名祖之裔시와 예를 업으로 물려받았네. 詩禮之業샘이 깊으면 멀리 흘러가나니 源深流長후손이 번창하였도다. 後承蕃碩명당의 산등성이는 明堂之岡만 년토록 이어질 무덤인지라, 萬年攸宅묘갈을 삼가 마련하니 香大虔供영원토록 다함이 없으리라. 永世無斁 維扶風治五里, 望氣山東明堂之左麓負辰而封者, 卽故贈承政院左承旨扶寧金公諱始鍊之藏也.五世孫洛俊、洛春與諸族, 將改豎墓碣, 請余以銘.余已忝仲公雲菴處士墓, 固辭, 而其求也愈勤, 則雖老病濱危, 在一室之誼, 不敢終辭.嗚呼! 公早襲家庭之訓, 而竹溪先生遺謨之澤, 五世未斬, 則繼述先懿, 敦行孝悌, 乃其常事, 宜其有言行德業之可書者, 而譜無見焉, 何哉.不惟是已, 至於字號卒年之漏錄, 而只存元陵壬子之生, 則尢可以見古人尙質之風, 而太涉疎畧也, 可勝歎哉. 洪陵丙子, 以孫貴,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筳參贊官.先系世德, 具在同岡雲菴公碑陰, 玆不書.配, 贈淑夫人全州李氏, 春恒其父.墓同岡靑龍嶝卯坐.三子, 安澤贈戶叅, 鎭澤、慶澤.兆陽林義倍, 女也.孫曾以下, 繁不盡錄, 而只錄其著者, 瑞珏號松隱, 孝學卓異, 鄕道交薦, 壽階通政, 陞崇政同中樞, 追贈三世, 安澤男也.今公之子姓振振, 多以淳謹雅飭, 見稱於人, 亦可以驗公不食之報也.系之以銘曰 : "名祖之裔, 詩禮之業.源深流長, 後承蕃碩.明堂之岡, 萬年攸宅.香大虔供, 永世無斁." 자손에게……않았으니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君子之澤, 五世而斬〕"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죽계의 은택이 커서 여전이 남아 전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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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창유재 소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昌裕齋蘇公墓碣銘【幷序】 옛날 간재 선사께서 완산에서 도를 강학하실 때 만재(晩齋) 소휘식(蘇輝植) 공이 있었는데, 선사께서 매우 즐겁게 그와 벗할 때 그 아들 열재(悅齋) 학규(學奎)가 따라왔었다. 만재공은 일찍이 진사에 장원하였으며 문장과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열재도 또한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지만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명성이 드높았다. 후에 다시 간옹을 스승으로 정하여 우리 유림의 큰 기대를 받았다. 내가 생각건대, 아들이 부친의 덕을 이어받아58) 남쪽 지방의 명문가가 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아마도 그 선대에 은덕과 인을 쌓아서 그 토대가 되는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근래 열재의 조부인 창유재 공의 가장을 얻어서 읽은 뒤에 감탄하면서 "그 원인이 있었도다! 이 분이 그것을 열어주었구나."라고 하였다.공의 휘는 성술(星述) 자는 군삼(君三)으로, 순조 갑자년(1804) 7월 14일이 태어난 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충후(忠厚)하여 순수한 덕과 훌륭한 행실은 천성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살펴보면, 어려서부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병이 나면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을 당하면 예절에 맞게 슬퍼하였다. 기일에는 스스로 희생과 반찬을 장만하면서 좋은 제수를 바쳐59) 제사를 돕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선조를 받든 것을 살펴보면, 고조 이하의 제전(祭田)과 묘소의 의물(儀物) 등을 홀로 수고하여60) 마련하였으며, 친척들의 힘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애하는 것을 보면, 담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거처하면서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나눴다. 과부가 된 누이를 위하여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고 그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으로 대하였다.친족 간에 화목한 것을 보면, 나이가 장성하여 가난한 자를 시집보내고 장가들였으며, 곤궁하여 재산이 없는 자에게는 밭을 나눠주면서 살게 하였다. 흉년에 종친을 위한 진대(賑貸)를 만들어서 널리 진휼하였다. 벗을 대하는 것을 살펴보면, 베풀기를 좋아하여 인색하지 않았으며, 초상과 장례에 반드시 두텁게 부의하였다. 좋은 때 화창한 날이 되면 술을 차려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온화한 기운이 넘쳐났다. 후진을 가르친 것을 살펴보면, 집의 살림을 다스릴 때부터 좋은 밭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경적(經籍)을 구해 보관하여 자손들의 학업에 대비하였다. 마을의 자제 가운데 가르칠 만한 자가 있으면 학비를 도와주고 권장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일흔여섯의 수를 누리다가 기묘년(1879) 8월 2일 돌아가시니, 전주 봉서산 아래 용흥리 북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오호라! 여러 가지 선이 공에게 갖추어졌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효도이다. 사림들은 공이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61)을 지녔다고 하여 그 내용을 지방의 감영과 부(府)에 올렸으며, 상국 정범조(鄭範朝)가 도백으로 있을 때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고 행실이 삼가고 조심스럽다고 특별히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공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대저 효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근원이 있으면 흐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것 이외에 선조를 받들고 우애하고 화목한 것에서 벗을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까지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서 재물을 즐겨 사용하였으니, 요컨대 이러한 것은 모두 인후(仁厚)의 실제로 귀결되게 한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대개 공은 충효로 바탕을 삼았으니, 그러므로 실용에 드러난 것도 또한 두텁다.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두터우니, 그러므로 미루어서 행하는 것이 두텁지 않은 것이 없다. 《주역》에서 "곤의 두터움이 만물을 실음은 건의 끝없는 덕에 합한다."62)라 하였는데, 다만 땅이 두텁기 때문에 만물을 실으니, 사람이 두터우면 그 후손이 번창한 것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자손이 양 대에 걸쳐 지금과 후대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는 것은 마땅하며, 공의 어짊도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개 당시의 여론은 공이 능히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고63) 후손들에게 넉넉한 덕을 끼쳤다64)고 하였으니, 이에 자신의 집을 창유(昌裕)라고 호칭하는 것은 또한 공자가 말한 '기리는 바가 있으면 일찍이 시험하여 보았기 때문이다.'65)는 뜻을 얻은 것이다.소씨는 진주에서 나왔다. 고려 상호군 희철(希哲)이 시조가 된다. 소윤 천(遷)은 포은 정몽주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만육(晩六) 최양(崔瀁)과 더불어 전주에서 자정(自靖)하였다. 대사간 곤암(困菴) 세량(世良)과 대제학 문정공(文靖公) 양곡(陽谷) 세양(世讓) 형제는 조선에서 현달하였다. 군수 련(連)은 을사사화 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주부 호선(好善), 도사 여형(汝衡)은 광해조 때 쫓겨났다. 이분들이 곤암의 아들, 손자, 증손이며, 공의 7대조 윗분들이다. 증조 덕소(德邵)는 효도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부 원대(元大)는 학문이 뛰어났다. 부친 수광(洙廣)는 호가 담묵재(淡默齋)인데, 경학으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전주 이씨 경삼(景三)의 따님이다. 공의 어짊은 또한 먼 조상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있고 가까운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교육 받은 것이 있으니 영지는 참으로 뿌리가 있는 것과 같다.부인은 문화 유씨 기원(基源)의 따님으로, 단정하며 온순하고 매우 부지런하여 능히 남편을 도왔다. 무덤은 공의 묘소 서쪽 산록 골짜기 뒤에 있다. 아들로 장남은 휘식(輝植), 차남과 셋째는 휘정(輝楨), 휘백(輝栢)이다. 딸은 전의 이석관과 전주 최광욱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로 학규(學奎), 명규(命奎), 상규(祥奎), 승규(承奎), 장규(章奎)가 있는데, 명규는 출계(出系)하였다. 차남의 아들로 택규(宅奎)가 있다. 셋째의 아들로 명규가 후사로 들어왔다. 손녀와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나는 공에 대해 선대 인척(姻戚)의 정의(情誼)가 있다. 열재가 이 때문에 '일이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사람에게서 글을 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서 나에게 공의 묘소의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그 요구는 문장으로서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서 한 것이기에 감히 사양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능히 창대한다는 것은 《시경》의 말이고 克昌云詩후손에게 덕을 드리운 다는 건 《서경》의 말이네 垂裕稱書옛날 은나라와 주나라는 在昔殷周선이 쌓여 경사가 후손에 전해졌도다 善積慶餘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받아 公得美質행실에 뭇 선을 갖추었으니 行備衆善정성으로 효도와 우애하여 孝友以誠억지로 힘쓰지 않았어라 不待强勉친척에게 화목하고 구휼하며 睦恤宗黨후진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니 獎學後輩그 전체를 총괄하자면 總厥全體오직 두터움[厚] 한 글자로다 惟厚一字이로써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함에 用此修齊옛날부터 이것을 법으로 삼았으니 古先是法집과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家國雖殊한 이치로 부합하기에 一理符合그 창성하고 넉넉함이 마땅하니 宜其昌裕《시경》, 《서경》의 말과 같도다 若詩書言만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如謂不信자손의 어짊을 보시라 視子孫賢아 세상 사람들아 嗟世之人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으랴 胡不鑑玆빗돌에 새겨서 刻之貞珉후손에게 알리노라 庸詔有來 昔我艮翁先師, 講道完山也, 有晩齋蘇公輝植, 先師與之友甚歡, 曁其子悅齋學奎, 從焉.晩齋公, 曾魁進士, 以文章學識著當世.悅齋, 亦早年上庠而學益勤, 蔚有聲譽.後復定師艮翁, 爲吾林碩望.余惟父子濟美, 爲南服名家者, 夫豈偶然.意其先有積功累仁, 以爲基本者, 比得悅齋祖考昌裕齋公家狀讀之, 嘆曰 : "有以哉, 此其啓之." 公諱星述字君三, 純祖甲子七月十四日, 其生也.生而禀質忠厚, 淳德懿行, 蓋出天性.孝親, 則自幼愛敬, 長而忠養.有癠, 嘗糞祝天.遭艱, 哀毁如制.夫日, 自備牲羞, 獻賢助祭, 以爲常.奉先, 則高祖以下, 祭田墓儀, 獨賢勞營備, 不待族親之力.友于, 則隔墻聯居, 與同飢飽.爲寡姊築室居之, 撫其子如己出.睦族, 則年壯而貧者, 嫁娶之, 窮無資者, 分田爲其生.歉歲, 設宗賑而廣賙.待知舊, 則喜施不吝, 喪葬必厚賻.良辰佳日, 置酒會集, 和氣藹然.敎後進, 則自治家時, 不謀良田, 先求經籍藏之, 備子孫學業.鄕黨子弟可敎者, 亦資學費獎勸, 多成就者.壽七十六而卒于己卯八月二日, 葬于全州鳳棲山下龍興里北麓壬坐原.嗚呼! 衆善備於公, 而大焉者孝也.士林以公有終身慕, 幷呈于營府, 鄭相國範朝, 道伯時, 以孝友卓異, 操行謹飭, 別薦于朝, 益信公之行之孚人深也.夫孝, 爲百行之源.有源則有流, 固也.孝親以外, 如奉先友睦, 以至待友敎人, 盡己之心, 而樂用物力, 要皆歸於仁厚之實而後已.蓋公以忠孝爲質, 故其見諸用者, 亦厚也.事親者厚, 故推而無所不厚也.《易》曰 : "坤厚載物, 德合旡疆." 惟地厚焉, 故萬物載, 人之厚者, 其後昌, 亦類是爾, 宜乎公之子孫, 兩世幷著令聞於今與後, 而公之賢愈顯也.蓋當時輿論, 以公克昌門戶, 垂裕後昆, 號其齋以昌裕者, 其亦得聖人所譽有試之意矣.蘇氏, 出晉州.高麗上護軍希哲, 爲始祖.少尹遷, 師事圃隱鄭先生, 與晩六崔公瀁, 自靖于全州.至大司諫困菴世良、大提學文靖公陽谷世讓兄弟, 顯于本朝.郡守連, 乙巳禍罷退.主簿好善、都事汝衡, 光海朝見黜, 困菴子孫曾, 而公之七世以上也.曾祖德邵, 以孝著.祖元大, 有文學.考洙廣, 號淡默齋, 以經學聞.妣, 全州李氏景三女.公之賢, 又遠有所自, 近有擩染, 靈芝信有根矣.配, 文化柳氏基源女, 端順克勤, 克助君子, 葬在公墓西鹿洞後.男, 長輝植, 次輝楨、輝栢.女, 適全義李錫寬、全州崔光旭.長房男, 學奎、命奎出, 祥奎、承奎、章奎.次房男, 宅奎.三房系男, 命奎.孫女及曾玄以下, 不盡錄.余於公, 有先戚誼.悅齋以是, 謂'事同一家, 不必求他人文.' 俾余銘公墓.其求也, 不以文而以誼, 不敢辭.銘曰 : "克昌云詩, 垂裕稱書.在昔殷、周, 善積慶餘.公得美質, 行備衆善.孝友以誠, 不待强勉.睦恤宗黨, 獎學後輩.總厥全體, 惟厚一字.用此修齊, 古先是法.家國雖殊, 一理符合.宜其昌裕, 若詩書言.如謂不信, 視子孫賢.嗟世之人, 胡不鑑玆.刻之貞珉, 庸詔有來." 아들이……이어받아 '제미(世濟美)'는 원래 후손이 전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조에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다.〔世濟其美 不隕其名〕" 한 데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아들인 열재가 부친인 만재의 덕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좋은 제수를 바쳐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홀로 수고하여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홀로 제전과 묘의를 담당하였다는 의미이다.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 《맹자》 〈만장상(萬章上)〉에서 맹자는 "진정한 효자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는 법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도 사모했던 경우를 나는 위대한 순 임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 하였다. 《주역》에서……합한다 〈곤괘(坤卦) 단전(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능히…… 만들고 《시경(詩經)》 〈주송(周頌) 옹(雝)〉에서 "위로는 하늘을 편안케 하시고, 아래로는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셨다.〔燕及皇天, 克昌厥後〕"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후손을 가문으로 바꿔 사용하였다. 후손들에게……끼쳤다 후손에게 덕행을 많이 남겨 준다는 뜻으로,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 일을 바로잡고 예로 마음을 바로잡아 후세에 덕행을 남겨 주소서.〔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한 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보았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내가 남에 대해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송하겠는가. 만약 칭송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어서이다. 이 백성들은 삼대 시대에 정직한 도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吾之於人也 誰毁誰譽 如有所譽者 其有所試矣 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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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松隱金公墓碣銘【幷序】 지난 80년 전 을축년(1865)에 부안 유생 백홍진(白洪鎭) 등 39명의 사람들이 현감에게 효자 김공 휘 서각(瑞珏)의 행실을 기록하여 추천하였다. 그 글에서 "이와 같은 지극한 행실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을해년(1965)에 전라도 유생 권우헌(權宇憲) 등 44명의 사람들이 또다시 도순사에게 천거하면서 '대단히 가상(嘉尙)하다'는 말을 하였다. 당시는 홍릉(洪陵, 고종)이 막 즉위하던 때라 공의(公議)가 아직까지는 존재하였으니, 유생들이 추천했던 문서와 글은 충분히 그 내용을 믿을 수 있다. 대개 공자가 대효(大孝)를 칭할 때 반드시 '덕은 성인'이라는 말66)로 본다면 이보다 아래인 효를 논할 때는 또한 마땅히 그 덕의 성취한 바를 따라 고하(高下)를 정하게 된다. 문서에서 기록한 바 '부모의 뜻과 존체를 봉양하고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지냈다.'는 것 이외에 또한 '《소학》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사물(四勿)과 삼성(三省)67)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는 말에 의거하여 그가 성취한 것을 따져보면, 어찌 충분히 학문을 한 군자가 되지 않겠는가. 이로서 논하자면, 공은 한 가지 선에만 치우친 효가 아니라 이에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68)라고 하겠다.공의 자는 인서(寅瑞) 호는 송은(松隱)으로, 계보는 고려 평장사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선생 휘 구(坵)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고려 말 충신 고부군사 휘 광서(光敘)의 13대손이며, 조선 유일(遺逸)로 참봉에 뽑힌 죽계(竹溪) 선생 휘 굉(鋐)의 7대손이다.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된 휘 참(墋)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휘 시련(始鍊)과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휘 안택(安澤)이 그의 바로 위 삼대(三代)이다. 모친은 정부인에 추증된 동래 정씨 상철(相喆)의 따님이다.공은 정조 경신년(1800) 8월 5일에 태어나 여든의 수를 누려 통정의 직급이 더해졌으며 후에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승급되었으며 위로 삼대에 벼슬이 추증되었다. 홍릉(洪陵, 고종) 정축년(1877) 10월 17일에 돌아가셔서 명당리 왼쪽 산기슭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내는 정부인으로, 덕수 이씨 노직(魯直)의 따님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태석(泰錫)은 수를 누려 통정대부가 되었다. 홍석(泓錫)은 호가 송암(松菴)으로, 수를 누려 통정대부 좌승지가 되었다. 막내는 용석(庸錫)이다. 딸은 세 명인데, 해주 오윤방과 청주 한광섭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네 명으로, 영기(永基)는 큰 아들에서 나왔고, 영철(永喆)은 둘째 아들에서 나왔으며, 영규(永奎)와 영풍(永豊)은 셋째 아들에서 나왔다. 외손은 여섯 명으로, 종노(鐘魯), 화녀(和汝), 영숙(和淑), 종손(鐘遜)은 오 서방에서 나왔고, 규석(圭錫)과 규룡(圭龍)은 한 서방에서 나왔다. 증손을 들어보면, 낙요(洛堯), 낙순(洛舜), 낙우(洛禹)는 영기에서 나왔다. 낙종(洛鍾), 낙성(洛成), 낙호(洛鎬), 낙준(洛俊), 낙진(洛辰)은 영철에서 나왔다. 낙춘(洛春), 낙무(洛武), 낙상(洛祥)은 영규에서 나왔다. 낙인(洛仁), 낙철(洛哲), 낙근(洛根)은 영풍에서 나왔다.낙성과 낙춘이 나에게 비석에 새겨서 드러낼 묘도 문자를 부탁하였다. 공은 나의 고조와는 6촌 아우가 된다. 이미 공에 대해 익히 들었으며, 정의(情誼)상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하기에 마침내 명을 짓는다.태어나 남다른 자질을 지녔으니 生有異質참된 효가 하늘에서 내려졌구나 誠孝根天《소학》 한 책으로 小學一書평생 몸가짐을 하였으며 生平律身사물과 삼성으로 四勿三省증자와 안자를 자나 깨나 잊지 않고서 寤寐曾顔살아계시거나 돌아가시거나 부모를 섬길 때 事親生死오직 예를 따랐도다 惟禮是循집안에 아름다운 범절이 전해지니 家垂懿範조심하여 선조를 욕보이지 말라 戒勿辱先목이 마르듯 곤궁한 이를 구휼하니 周窮如渴인을 넓혀 타인에게 미쳤으며 推仁及人우아한 행동은 세상에 뛰어나 行誼超世사람들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누나 人無間言이에 많은 선비들이 是爲多士공정하게 글을 지어 올렸으니 公正狀文빗돌에 옮겨 새겨서 移鑱于石천년토록 길이 고하노라 用詔千春 往在八十年前乙丑, 扶安儒生白洪鎭等三十九人, 狀薦孝子金公諱瑞珏于縣監.其題曰 : "似此至行, 可謂出類拔萃." 後十年乙亥, 全羅道儒生權宇憲等四十四人, 又薦于都巡使, 亦得極爲嘉尙之題.時在洪陵初服, 公議猶在, 是狀是題, 足爲信筆.蓋觀乎孔子稱大孝, 必以德爲聖人, 則下此而論孝, 亦當隨其德之所就而定高下也.據狀所書, '志體之養, 葬祭以禮'之外, 有'《小學》律己四勿三省爲己任'之語, 究其所就, 豈不足爲學問中君子人乎.以是論之, 公非一善之偏孝, 乃成身之全孝也.公字寅瑞號松隱, 系出高麗平章事文貞公止浦先生諱坵之後, 麗末忠臣古阜郡事諱光敘之十三世孫, 本朝逸選叅奉竹溪先生諱鋐之七世孫.贈通訓大夫司僕寺正諱墋,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諱始鍊, 贈嘉善大夫戶曹參判諱安澤, 其三世也.妣, 贈貞夫人, 東萊鄭氏相喆女.公, 生以正廟庚申八月五日, 壽八十, 加通政階, 後陞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追贈三世, 卒于洪陵丁丑十月十七日, 葬于明堂里左麓卯坐原.配, 貞夫人, 德水李氏魯直女.男三人, 泰錫壽通政.泓錫號松菴壽通政左承旨.庸錫.女三人, 海州吳潤邦、淸州韓光變.孫四人, 永基長房出, 永喆次房出, 永奎、永豊三房出.外孫六人, 鐘魯、和汝、和淑、鐘遜, 吳出.圭錫、圭龍, 韓出.曾孫, 洛堯、洛舜、洛禹, 永基出.洛鍾、洛成、洛鎬、洛俊、洛辰, 永喆出.洛春、洛武、洛祥, 永奎出.洛仁、洛哲、洛根, 永豊出.洛成、洛春, 屬澤述以墓道顯刻之文.公於我高祖, 爲六從弟行, 旣稔聞, 誼當爲役, 遂爲之銘曰 : "生有異質, 誠孝根天.《小學》一書, 生平律身.四勿三省, 寤寐曾顔.事親生死, 惟禮是循.家垂懿範, 戒勿辱先.周窮如渴, 推仁及人.行誼超世, 人無間言.是爲多士, 公正狀文.移鑱于石, 用詔千春." 공자가……말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7장에 공자가 이르기를 "순은 위대한 효자이셨도다. 덕은 성인이시고, 존귀함은 천자이시고, 부유하기로는 사해 안을 다 소유하시어, 오래도록 종묘의 향사를 받으시고, 자손이 오래도록 보호를 받게 되었느니라.[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 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라 하였다. 사물(四勿)과 삼성(三省) 사물(四勿)은 안자(顔子)의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지 말라는 것을 가리키고, 삼성(三省)은 증자가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도모하는 데 진실되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벗과 사귀는데 믿음이 없지는 않았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등을 가리킨다. 자신을 성취한 완전한 효 《공자가어》에서 공자가 애공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인인(仁人)은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고 효자는 사물의 이치에 지나치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인인이 어버이를 섬기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게 하며 하늘을 섬기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게 합니다. 이 때문에 효자는 자기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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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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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성(性)은 서로 비슷하다[性相近]'고 한 말에서의 성은 기질지성(氣質之性)입니다. 기질지성이 비록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 것은 바로 그 기질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따라 그러한 것이니 이 또한 기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장의 주(註)에서는 단지 기질만을 말하고 '성(性)' 자는 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80)고 한 것입니다.율곡(栗谷)이 만약 당초에 품수한 기질만 말했을 뿐이라면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지금 기질지성이 발용(發用)하는 데 나타난 것을 가지고 품수할 때를 기준으로 앞서 말한다면 진실로 처리할 수 없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아마도 율옹(栗翁)의 뜻은 각기 다른 성은 본래 발용한 뒤의 일이고 각기 다르게 된 까닭은 당초에 이러한 기질을 품수하였으므로 발용함에 미쳐서 이러한 기질지성이 된 때문인 것인 듯합니다. 이는 '당초에 품수한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이 된다'라고 할 때의 성과 같고, 당초에 하늘에서 품수한 기질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품수한 것은 단지 기질일 뿐이라는 뜻이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약 이처럼 융통성 있게 보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기품(氣稟)이 달라 서로 다른 성을 품수하였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사람과 동물이 품수하여 성이 된 것은 바로 하늘의 명(命)이고 천명(天命)은 하나의 근본인데 지금 사람마다 다른 성을 받고, 동물마다 다른 성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천명이라는 것은 장차 본령(本領)이 천만 개로 나뉘어 자잘하기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태극(太極)의 용(用)은 원래 다름이 있어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서로 다르게 되는 근본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즉 태극이라는 것은 본래 진실(眞實)하여 거짓이 없고 체(體)와 용(用)이 하나의 근원인지라 만물의 뿌리가 되는 것인데 지금 그 용(用)이 갖가지로 달라 기질지성이 다르게 되는 근본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하늘에 이미 치우친 태극(偏太極)과 온전한 태극(全太極), 아름다운 태극(美太極)과 추악한 태극(惡太極)이 있는 것이니 이러한 태극이 어찌 족히 만물의 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性相近之性, 是氣質性. 氣質性雖曰不外乎本然性, 然其人人而自爲一性者, 乃隨其氣質之剛柔緩急而然也, 是亦氣質而已. 故下章註, 只言氣質而不著'性'字, 此正張子所謂'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也.栗谷若只言當初禀受氣質而已, 則夫孰敢疑之? 今以氣質性之見於發用者, 早言於禀受時, 誠有區處不得之慮矣. 然竊恐栗翁之意, 以各異之性, 固發用以後事, 而其所以各異者, 以其當初稟如此之氣質, 故及其發用而爲如此之氣質性也. 此如曰隨當初稟受氣質, 而自爲一性之性也, 非謂氣質之性, 當初禀受於天也. 然則其當初禀受者, 只氣質而已之意, 瞭然在其中矣.若不如此活絡看, 而以爲人物異氣稟, 受異性, 則人物之所受而爲性者, 卽在天之命也. 天命者一本也, 今曰人人而受異性, 物物而受異性, 所謂天命者, 將千萬本領, 而不勝細碎矣. 又以爲太極之用, 元自有殊而爲人物氣質性異之本, 則太極者, 眞實無妄而體用一源, 所以爲萬物之根柢也, 今曰其用萬殊, 而爲氣質性異之本, 是在天已有偏太極全太極美太極惡太極, 烏足爲萬物之根柢乎? 장자(張子)가……있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가 있게 된 뒤에 기질지성이 있으니, 이를 잘 돌이키면 천지지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지성은 군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形而後, 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2 〈위학(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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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선비(先妣)의 가장(家狀)에 제발(題跋)을 지어 주신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제 목숨을 다하여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선비(先妣)의 아름다운 행실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선생님의 성대한 덕이 남의 선행을 즐겨 말하셔서일 것입니다. 아! 저의 어버이는 효경(孝敬)과 인선(仁善)의 덕이 있으셨지만 불행히도 장수와 복록(福祿)을 누리지 못하고 궁핍한 삶에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말씀과 아름다운 행적이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의 글을 얻어 영원토록 불후하게 되었으니 비록 한이 없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이 있고 없는 사이에서 저는 장차 어떤 마음을 품어야겠는지요? 오직 도를 밝히고 몸을 깨끗이 하여, 안으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실질을 갖추고 밖으로는 성현(聖賢)의 학문을 계승한다면 어찌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이제 이후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더욱 궁구하고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더욱 힘써서 도가 밝아지고 몸이 깨끗해지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감히 태만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이 때문에 근년 들어 추위와 굶주림이 몸에 사무칠수록 구렁에 시체로 뒹굴겠다는 조수(操守)는 더욱 굳건해지고 분서갱유(焚書坑儒) 같은 재앙이 박두할수록 머리를 잃겠다는 지조(志操)는 더욱 굳세집니다.81) 이는 감히 말만 잘하여 선생님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차마 더없이 소중한 유체(遺體 어버이가 남긴 몸)를 더럽고 욕된 지경에 빠뜨리지 못해서입니다. 이런 의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만날 일을 기다렸다가 대처할 뿐입니다. 다만 일상에서 말하고 행할 때에 마땅히 강구(講究)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눈만 뜨면 바로 잘못 보고 걸음만 옮기면 번번이 발을 헛디뎌서 심중(心中)에 위태롭고 불안한 생각이 많고 안정되고 여유로운 의취(意趣)가 적음을 느낍니다. 무릇 이렇게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의 엉성한 일들조차도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천하의 위대한 사업(事業)을 세우겠습니까?아! 만약 이 일에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더욱 마음을 기울이려고 하면서도 더욱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심력(心力)을 열심히 써서 분비(憤悱)82)를 이기지 못하는데 끝내 스승을 받들고 어버이를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스승님께 숨기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로 여겨 살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긴요하지 않은 외람된 말로 여겨 버리시겠습니까? 선비(先妣)의 행록에 '집안의 부녀(婦女)를 가르친다[敎內眷]'는 교훈이 있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감격스럽습니다. 이에 언해(諺解)를 올립니다만, 말이 비속(卑俗)하고 전아(典雅)하지 않아 부끄럽고 송구할 뿐입니다. 先妣家狀蒙賜題跋, 恩出不圖, 隕首莫報. 此蓋先妣之懿行, 有以感夫人心, 而先生之盛德, 有以樂道人善也. 鳴呼! 小子之二親有孝敬仁善之德, 不幸而不壽祿, 窮約困瘁而終, 此固可恨矣. 然嘉言美蹟, 幸而得先生筆, 而不朽千載, 雖謂之無恨, 可也. 然則有恨無恨之間, 小子將何以爲心? 惟有明道淑身, 內有立揚之實, 外紹賢聖之學, 豈非少報師親之恩者乎? 從玆以往, 益究其所未知, 益勉其所未能, 誓到明淑之地, 而不敢怠也. 是故比年來凍餓切膚, 而溝壑之操愈堅, 焚坑迫頭而喪元之志愈勵, 非敢能言以欺先生. 實不忍以莫重之遺體, 置諸汙辱之地也. 此箇義諦, 旣已知之, 第俟前頭所值而處之. 但日間云爲之際, 所當講究而踐行者, 開眼便錯見, 擧步輒失足, 覺得心中杌楻不安之意多, 妥帖自在之趣少. 凡此日用粗跡易知易行者, 尙如此, 將何以窮天下之至理, 建天下之大業乎? 噫! 苟無志於此事則已, 其欲益加意, 而益不能者, 何也? 小子以此, 煞用心力, 而不勝憤悱, 懼終無以承師而顯親, 敢以不隱乎皐比之下, 不審先生以爲由中之出而察之乎? 抑以爲不緊猥言而棄之乎? 先妣行錄, 至有'敎內眷'之訓, 尤切感激, 茲諺翻呈上, 而但詞語俚俗不雅是爲愧悚. 추위와……굳세집니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자가 이르기를 '의지가 굳은 선비는 곤궁하여 자기 시체가 구렁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언제라도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분비(憤悱) 분(憤)은 마음속으로 뭔가를 통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고, 비(悱)는 입으로 말을 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논어(論語)》〈술이(述而)〉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고, 입으로 말해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거니와,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로써 세 귀퉁이를 유추해서 알지 못하면 다시 더 말해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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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정사년(1917) 上艮齋先生 丁巳 요즘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근래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바다 가운데는 추위가 더욱 심한데 잠자리와 음식 및 제반의 일들은 손실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집 뒤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서 계화도를 바라 볼 때 마다 마치 책상을 대하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종기로 인한 고통과 저의 혹독한 재앙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립니다. 진흙을 바른 조그만 여막집에 칩거하면서 하는 일은 없는데 다만 몸이 상중에 있어 실상이 없을까 두려워 항상 마음속으로 반성하면서 "네가 슬픔이 마르고 격식이 모자라서 예(禮)가 부족한 것인가? 이것은 부친을 생각하는 마음에 태만한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큰 것에 해당합니다. 네가 진정을 숨기고 형식을 갖추어 명예를 구하는가? 이것은 부친을 속이는 것이니, 진실하지 못한 죄 중에서 더욱 큰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니, 다소 득력처(得力處)가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거상(居喪)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 마음을 보존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분을 따르고 욕심에 이끌려서 의리를 따르지 않는 것을 위천(違天)이라 부르고, 구차하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여 명예를 구하는 것은 기천(欺天)이라고 부르니, 위천과 기천의 죄는 모두 이 몸을 성실히 하지 않는데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단지 하나의 성(誠)을 세울 수 있다면, 어렵지 않고 우활(迂闊)하지 않은 길이 눈앞에 있어 따라갈 수 있고, 마음 편히 날마다 쉴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대학》에서 말한 성의(誠意)이고,《맹자》가 말한 사성(思誠)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익혀서 암송한 것이지만, 일찍이 하루도 여기에 대해 실제로 힘을 쓴 적이 없어서 구체적인 일로써 행동하는 공력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후로는 성(誠)이라는 한 글자를 공부하는 칼자루로 삼고서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에 따라서 노력한다면 거의 위천과 기천으로 귀착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가 선생께서 제가 마음을 보존하고 행실을 다스리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 어긋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통렬하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근래에 《주례(周禮)》한 부(部)를 읽다가 그 육관(六官)의 소속 직책들이 〈주관(周官)〉의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83)의 관장(管掌)으로 기준해 보면 대부분 혼란스러워 차서(次序)를 잃어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선유(先儒)들이 혹 주공(周公)의 경(經)이 아니라고 의심하거나 혹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책이라고 여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손지(方遜志)가 이른바 제후들이 자신들에게 해가 됨을 미워하여 그 전적을 없애버리고 난 나머지에서 나와 한대(漢代)의 유자(儒者)가 보충한 데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의론인 듯합니다. 그가 편차(編次)를 고증한 목록은〈주관(周官)〉에 증험해 보면 딱딱 맞아서 믿을 만합니다. 다만 서문(序文)에서 그 대략만 논했을 뿐 미처 모든 직책을 다 열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분직(分職)하고 분류한 것에도 간혹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간에 제가 그 범례를 신중히 따라 육관(六官)의 모든 직책을 다 들어 다시 편차를 고증하여 한 두 가지 의심스러운 것을 고쳐 이미 편목(篇目)을 완성하였기에 고친 차례의 편목에 의거하여 한 본을 필사하고 다시 그 뒤에 논설(論說)을 붙여 동지들에게 질정(質正)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천박한 견해와 망령된 의론이 한갓 경서를 어지럽혔다는 비난만 받을까 두려운 데다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比天大雪, 近年所無. 海中寒冱益劇, 不審寢膳諸節無或見損否. 每陟廬後小堆, 遙望華嶹, 若對案然. 念先生之癃疾, 痛小子之酷禍, 時有泣下而不覺也. 蟄伏堊廬, 無所猷業, 但身在執喪, 懼其無實, 常自省于中曰: "爾有歇哀缺文, 以闕禮矣乎? 是則怠親也, 不誠之大者也爾. 有矯情飾文, 以要名矣乎? 是則欺親也, 不誠之尤者也." 以此二者自勉, 庶求無愧於心, 覺有多少得力處. 因思非但居憂一事爲然也, 凡吾人之日間, 存心處事, 任氣牽欲, 不循義理者, 其名曰違天, 苟難悅人, 以干名譽者, 其名曰欺天, 違天欺天之罪, 均在不誠其身. 但能立得一箇誠, 則自有不艱不迂之途在前可由, 而見心逸日休之效, 此則大學之誠意, 孟子之思誠是也. 是固前日之所講誦, 而未嘗一日實用力於此者, 以未曾有因事省發之功也. 竊欲從茲以往, 將一誠字作用工之欛柄, 若其識所未逮者, 固無如之何, 而但於已知處, 隨事努力, 庶免違天欺天之歸也. 伏乞先生細察於宅心制行之間, 指摘其慝, 而痛加糾正也.近讀《周禮》一部, 而見其六官諸屬之職, 凖之以〈周官〉治敎禮政禁土之掌, 多紛紜失序. 先儒之或疑非周公之經, 或以爲未成之書, 良以是也. 而方遜志所謂'出於諸侯惡去之餘, 而成於漢儒之所補'者, 恐確論也. 其所考次目錄, 證之〈周官〉, 鑿鑿可信. 但論其大略於序文, 而未及悉擧諸職. 且分職從類之閒, 猶或有可疑者. 故間嘗謹遵其例, 悉擧六官諸職, 更爲考次, 而改動其一二可疑者, 已成篇目, 欲依更次篇目, 寫去一本, 復着論說於其後, 以質同志. 但恐陋見妄論, 徒取亂經之譏, 且非目下之急務, 故不敢率爾耳. 치(治)·교(敎)·예(禮)·정(政)·금(禁)·토(土) 《주례(周禮)》의 여러 주석서를 보면 '금(禁)·토(土)'는 '형(刑)·사(事)'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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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보낸 편지에서 성은 기의 성이요, 기는 성의 기라는 두 구절에 대해서 저는 아마 선생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이라는 것은 기질이 갖추고 있는 성리이고, 기라는 것은 성리를 싣고 있는 기질입니다. 이와 같다면 리에 장애가 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리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도 말이 더욱 절실할 것이니, 어찌 감히 이전의 현인이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천(정이)의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한 구를 전적으로 성의 기를 말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아마도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다만 사람이 품부받는 것을 풀이한 것이다'라는 것은 바로 생지위성을 풀이한 것입니다. 생지위성과 천명지위성을 대비해보면 생지위성은 기질지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품부 받았다는 것은 또 아래 문장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을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성의 기라고 운운하였으니, 이는 다만 아직 병통에 이르지 않은 이 성이 실려 있는 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병통이 없는 성의 기로써 가지런하지 않은 품수를 해석한다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사람의 성(性)은 순수(純粹)하고 지선(至善)하여 애초에 한 점의 하자도 없습니다. 기질(氣質)이 구속하고 물욕이 가리우게 되면 이 성은 이로 인하여 함몰되고 손상됩니다. 그러나 그 함몰되고 손상된 것은 기욕(氣欲)이지 성이 아닙니다. 다만 기욕에 가로막혀 순선한 본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함몰되고 손상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지극히 밝은 해와 지극히 맑은 물이 구름과 안개에 가리고 모래와 진흙에 뒤섞여 밝고 맑은 체(體)가 이 때문에 혼탁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혼탁해진 것은 구름과 진흙이지 해와 물이 아닙니다. 다만 구름과 진흙에 구애되어 밝고 맑은 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탁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54) 함몰되고 손상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선한 리는 끝내 기욕이 더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함몰되고 손상된다고 하더라도 그 본체(本體)는 본래 그대로 있습니다. 下示性者, 氣之性, 氣者, 性之氣二句, 竊恐先生之意. 蓋曰性者, 氣質所具之性理也, 氣者, 性理所載之氣質也. 如此則不惟無礙於理也, 其於理氣不相離之妙, 說得尤切, 豈敢以前賢之不言有所疑貳也. 但以伊川止訓所禀受一句, 專說性之氣, 則恐合更商. 蓋止訓所禀受, 是正釋生之謂性者. 而生之謂性與天命之性對擧, 則其以氣質性言者, 可知也. 然則其所禀受者, 又非下文剛柔緩急之謂乎? 今此性之氣之云, 是但謂此性所載之氣未及乎病痛者也. 以無病之性之氣, 釋不齊之所禀受, 似不相稱, 未知如何?人之性, 純粹至善, 初無一點之疵. 及其氣質拘之, 物欲蔽之, 此性以之汨亂鑿喪矣. 然其所汨鑿者, 氣欲也, 非性也. 特爲氣欲之障, 而不見純善之體. 故謂之汨鑿也. 譬如至明之日, 至淸之水, 爲雲霧之掩, 沙泥之混, 明淸之體, 以之昏濁矣. 然其所昏濁者, 雲泥也, 非日水也. 特爲雲泥之礙, 而不見明淸之體, 故謂之昏濁也. 蓋性不能制氣欲, 而使之聽命. 故有汨鑿之累. 然其純善之理, 終非氣欲之所可汙衊者. 故雖曰汨鑿, 而其本體固自若也. 성은……때문에 주자의 성리학에서 性과 理는 철저하게 無爲의 실체이며 원리이다. 간재는 주자의 이러한 성리의 특성을 계승하여 리는 無爲하고 기는 有爲하다고 한다. 주자와 간재에 있어 성과 리는 역동성과 활동성이 없는 원리와 실체일 뿐이다. 性과 理는 心이라는 지각작용과 格物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성은 기욕을 제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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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병진년(1916) 上艮齋先生 丙辰 저는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길을 힘들게 걸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옛 병이 아직 사라지지 않던 차에 새로운 근심이 함께 일어납니다. 노인은 병상에 누워 있고 어린 자식들은 괴로이 울어대어 온 집안에 근심이 밀려들어 아득히 끝이 없습니다. 이에 더하여 사나운 호랑이는 밖에서 잡아먹으려 하고, 궁핍한 귀신은 안에서 멋대로 구니, 우환(憂患)이 극에 달해 유소(有所)의 병55)이 날 지경입니다. 늘 기쁜 정신을 기르고 즐거운 곳을 홀로 찾는다는 말[常養喜神, 獨尋樂處]56)을 외울 때마다 기를 만한 때가 없고, 찾을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그저 스스로 마음속으로 번뇌하였습니다. 이에 한 걸음 내딛어 천천히 생각하고서야 비로소 명수(命數)는 피할 수 없고 겪는 일을 편안히 여길 것과 밖에서 온 것이 매우 가볍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심지(心地)가 청정해지고 일이 없어 유소의 병이 족히 근심거리가 되지 않아서 기쁜 정신을 비로소 기를 수 있고, 즐거운 곳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요사이 힘쓰면서 터득한 것이기 때문에 공손히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찌 제가 스스로 이룩한 것이겠습니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예전부터 줄곧 문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니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율곡(이이) 선생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중에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57)이라는 두 구절의 말은 정확한 의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암선생의 사단칠정(四端七情說) 논변은 의심이 드는 곳이 있어 논해보았지만, 진실로 깨우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사람의 기품에는 비록 청탁의 같지 않음이 있지만, 그 근본은 본래 맑았습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천지는 음양이라는 두 기의 순환이니, 처음에는 약간의 혼탁함도 있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기가 분란해지자 어둠과 밝음이 일정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이 이 떠도는 기(氣)를 받아서 태어났기 때문에 품수 받은 기도 청탁이 같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떠도는 기의 본원은 음양이라는 두 기의 지극히 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기의 처음엔 맑은 것만 있고 흐린 것은 없다는 질문을 인정했습니다.《맹자혹문》에서 또 "사람이 저녁에 휴식을 하면 그 기가 다시 청명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추론해보면, 사람의 기질은 본디 맑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맑았다고 할지라도 구르고 막히며 뒤집어지게 되어 운행이 뒤섞여 버리면 청탁이 발하는 것이 각각 다르게 되어 선과 악의 구분이 생기게 됩니다.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리(理)를 따라서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리(理)를 따르지 않고 발한 것입니다. 성인의 기(氣)는 지극히 맑아 탁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발한 것이 모두 선하여 처음부터 한 터럭의 악한 것도 없습니다. 중인(中人) 이상의 기(氣)는 맑은 것이 많고 탁한 것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많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적습니다. 중인 이하의 기는 탁기가 많고 청기가 적습니다. 그러므로 청기(淸氣)로부터 발한 선정(善情)이 항상 적고, 탁기(濁氣)로부터 발한 악정(惡情)이 항상 많습니다. 매우 완고한 자는 간혹 한 점의 선정을 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지극히 탁한 기운도 삽시간에 맑아져서 본원을 회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58)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은 저 탁한 것을 바꾸어 저 맑은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을 한결같이 선에 두고서 악함을 없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곡의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보통사람이라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없으니, 청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천리(天理)가 성(性)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느낌에 따라 바로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완고한 사람이라도 남이 자기 아버지를 해치는 것을 보면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데, 이때 탁기가 가득 차게 되지만 이는 천성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이 발출되면, 탁기가 발한 것이라도 또한 선정이 있다고 말합니다.59) 그렇다면 비록 발한 기가 탁하다고 할지라도 타고 있는 리는 곧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걸어가고 있는 말이 갑자기 달린다고 하더라도 타고 있는 사람은 홀로 편안하게 앉자 있을 수 있습니다. 천하(天下)의 리(理)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건대, 농암은 다만 선악의 정을 모두 기에 돌리고서 리의 실체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리가 공허히 주재함이 없는 적이 없고, 기(氣) 또한 리(理)에게 명을 듣는다는 등의 설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혹 확대되어 크게 잘못된 학설이 후대에 한 번 전해져 리가 참으로 주재할 수 있고 리가 그 기를 관섭(管攝 관할하고 통섭함) 할 수 있다는 설이 있게 되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60) 율옹(이이)은 "정(情)의 선한 것은 청명의 기를 타서 천리를 따라 곧바로 나왔고, 정(情)의 악한 것은 비록 또한 리에 근본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럽고 혼탁한 기에 가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농암처럼 악의 정을 리에 두지 않고 모두 기에 돌리는 것입니까?농암(農巖)은 북계(北溪) 진순(陳淳)의 능연(能然), 필연(必然), 당연(當然), 자연(自然)의 말을 인용하여 리(理)가 주재(主宰)함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61) 그러나 '필(必)' 자, '당(當)' 자, '자(自)' 자에는 애초에 주재한다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능(能)' 자가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데, 그 본문에 '안에 이 리(理)가 있은 뒤에 밖으로 드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다'62)는 말을 살펴보면 '능' 자는 마땅히 구체적인 일에 소속시켜야 할 듯합니다.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각각 하나의 성을 갖는다[各一其性]'는 말은 다만 천지의 조화(造化)가 만물을 생육(生育)하는 도구와 오행(五行)의 순선(純善)한 성(性)을 말한 것일 뿐이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자는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答徐子融書]〉에서 도리어 이 설을 인용하여 사람과 동물은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을 이루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정씨(鄭氏 정세영)와 박씨(朴氏 박창현) 등의 사람들이 인용하여 그들의 증거로 삼는 일을 초래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삼가 제가 〈서자융에게 답한 편지〉의 본뜻을 살펴보니, 서자융은 동물에는 단지 기질지성만 있고 본연지성은 없다고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사람과 동물의 기질지성이 비록 같지 않은 점이 있지만 이렇게 같지 않은 점은 바로 본연지성이 그 기질에 따라 자체로 하나의 성(性)이 된 것이지 본연지성 밖에 별도로 기질지성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대개 이 기질지성은 아마도 물은 차갑고 불은 뜨거우며,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부드러우며, 말은 달리고 소는 밭을 가는 것이 본연(本然)을 해치지 않음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지 돌연히 사람의 혼명(昏明)과 동물의 순악(馴惡)을 언급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주자(周子)의 이 설을 인용하여 단지 '각일(各一)'의 뜻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읽는 자들은 글을 가지고 본뜻을 곡해(曲解)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小子風天雪程, 閒關歸家, 而舊患未消, 新憂幷興. 老人委牀, 稚子呌苦, 滿室澒洞, 渺無際涯. 加之以猛虎食其外, 窮鬼肆乎內, 憂患之極, 幾成有所之病. 每誦'常養喜神, 獨尋樂處'之語, 歎其無時可養, 無處可尋, 徒自懊惱乎方寸也. 於是放下一步, 緩緩地思量, 乃知命數之莫逃, 而所過之可安, 外至者之甚輕, 而固有者之甚重, 便覺心地淸淨無事, 有所之病, 不足爲慮, 而喜神於是乎可養, 樂處於是乎可尋矣. 此小子近日用力而有得者, 故拜上逹. 然此豈小子之所自致者哉? 原其所自, 莫非向來親炙門下之力也, 何感何幸?栗谷先生, 人心道心說中, 善者淸氣之發, 惡者濁氣之發二句, 竊以爲的確之論. 農嚴四七辨, 不免疑而論之, 誠所未喻也. 人之氣禀, 雖有淸濁之不一, 卽其本淸而已. 何以知其然也? 天地二氣之循環, 初未嘗有一半分濁. 及其游氣之紛擾也, 乃有晦明之不常, 而人得是游氣而生, 故所禀之氣, 亦有淸濁之不齊. 然游氣之本, 又是二氣之至淸者也. 故朱子旣許氣之始有淸無濁之問. 孟子或問, 又曰: "人暮夜休息, 則其氣復淸明." 以此推之, 人之氣質, 本淸可知也. 雖然滾汨騰倒, 運行交錯, 則淸濁之發, 各殊而善惡之分生焉. 善者淸氣之循理而發者也, 惡者濁氣之不循理而發者也. 聖人之氣, 至淸無濁, 故其發皆善, 而初無一毫之惡. 中人以上之氣, 多淸少濁.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多,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少. 中人以下之氣, 多濁少淸. 故善情之發乎淸氣者常少, 而惡情之發乎濁氣者常多. 至於冥頑之甚者, 或有一點善情之發者. 其至濁之氣, 亦霎時淸而復其本也. 是故人之爲學, 所以易其濁而反其淸. 使吾心之發一於善而無惡. 是所謂變化氣質也. 此乃栗翁之意然也. 若曰常人之見孺子入井, 無不惻隱之際, 不待淸氣, 而天理根性者, 隨感辄發. 冥頑之人見人害其親, 思欲仇之之時, 濁氣充塞而天性最重故. 眞心發出則是濁氣之發, 亦有善情之謂也. 然則雖謂之所發之氣, 雖濁而所乗之理, 直出可也. 雖謂之所行之馬雖逸, 而所乗之人, 獨安亦可也. 天下之理, 安有如此哉? 竊念農巖之意, 直恐以善惡之情, 一歸之氣, 而無以見理之實體. 故乃以理未嘗漫無主宰, 氣亦聽命於理等說, 到底發明. 然若或推之, 大過一傳, 而有理能眞有主宰, 理能管攝其氣之說, 則如之奈何? 且栗翁固亦曰: "情之善者, 乘淸明之氣, 循天理而直出, 情之惡者雖亦本乎理, 而爲汙濁之氣所掩." 此何嘗以善惡之情, 不本之理, 而一歸之氣, 如農巖之所慮乎?農巖引陳北溪能然必然當然自然之語, 爲理有主宰之語. 然'必'字'當'字'自'字, 初未見有主宰底意. 惟'能'字最難區處, 而詳其本文'中有是理然後, 能形諸外, 爲是事'之語, 則'能'字似當屬事上看.周子'各一其性', 只言造化發育之具五行純善之性, 未及乎人物氣質之性. 朱子〈答徐子融書〉, 乃引此說, 以爲人物隨氣質而自爲一性之證. 此所以來鄭朴諸人之引爲渠援也. 然竊詳徐書本意, 子融方以物只有氣質性, 而無本然性爲疑. 故朱子答謂人物氣質之性, 雖有不同, 然此不同者, 卽本然性之隨其氣質, 而自爲一性者, 非外本然之性而別爲氣質之性也. 蓋此氣質性, 恐只指如水寒火熱․男剛女柔․馬馳牛耕之不害本然者言, 不遽及於人之昏明․物之馴惡也. 故借引周子此說, 只證其各一之義也. 讀者不以辭害意可也. 未知如何? 유소(有所)의 병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7장에 "마음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마음에 분치(忿懥), 공구(恐懼), 호요(好樂), 우환(憂患)이 있어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늘……말 《명유학안(明儒學案)》 권61 〈동림학안(東林學案)4〉에서 명나라 말엽 오종만(吳鍾巒)이 망국의 선비가 지닐 처세에 대해 답하면서 한 말이다. 율곡……발한 것 이이는 "선한 것은 청기(淸氣)가 발한 것이고 악한 것은 탁기(濁氣)가 발한 것이나 그 근본은 다만 천리일 뿐이다〔善者, 淸氣之發也, 惡者, 濁氣之發也, 其本則只天理而已〕"라고 말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4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지극히……있습니다 기질이 아무리 탁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념 간에 경책하면 선한 기질의 본원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비록 완고한……있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타인에게 해를 입을 때 부모를 위하여 복수심이 드는데, 이때 비록 그 기는 매우 탁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善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가 참으로……이를 어찌하겠습나까 율곡의 기호학에서는 理無爲(性無爲)를 주장하기 때문에 理(性)의 능동성을 긍정할 수 없다. 북계(北溪)……했습니다 《농암속집(農巖續集)》 권하(卷下)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나온다. 안에……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57 〈답진안경(答陳安卿)〉에서 북계 진순이 주자에게 올린 문목(問目)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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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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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已未 기미년(1919)삼가 선생께서 창암(蒼巖, 김낙규)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난 뒤, 〈면암연보(勉菴年譜)〉중에서 면암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께 편지를 보내 일을 함께하자 했는데 선생께서 응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직한 기풍을 지닌 면옹(勉翁)이 죽은 지 10년이 채 안 되어 실상과 어긋나는 문장이 돌연 그의 문하에서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면암 어른이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당시에 임씨가 그것을 막고 좨주(祭酒)를 도모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상래(李相來)가 직접 들은 것과 송정용(宋楨鏞), 김교윤(金教潤)이 전한 말이 뚜렷하여 차이가 없으니 참으로 창암이 편지에서 한 말과 같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전일건(田鎰健)과 저(김택술(金澤述)를 보내 진중(陣中)에 있는 면암 어른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했던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 중에 "면암 대감이 나이 80세에 군대를 이끌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죽으려고 하니, 내가 비록 그 일을 함께할 재주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머문 것을 보고도 편지 한 장 써서 위문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대단히 편치 못할 것입니다."1)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요. 창의소(倡義所)에 갔는데 만약 《명의록(名義錄)》에 이름을 올린다면, 저는 조부모님도 살아 계시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전일건은 허락하지 않았겠습니까.정말로 면암 어른이 먼저 편지를 보냈다면 선생의 답서에서 어찌 한 글자도 물음에 답하는 말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손자로 하여금 《명의록》에 이름을 올리게 하였다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한 얼마나 깊을까요. 면암 편지의 존재 여부와 선생의 마음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께서 실제로 면암의 편지를 보고도 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응하지 않은 것은 또한 재주와 형세를 헤아렸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지키는 의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2)이 전적으로 그른 것이 아닙니다.처음부터 자신에 호응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지적하여 나의 스승만이 홀로 어진 것을 드러낸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애당초 선생에게 일을 함께 하자는 편지도 보낸 적이 없으니, 어찌 응답한 여부에 대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인데 반드시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하며 거짓된 것을 사실이라고 우겨서 후대에 공적으로 전하려고 한다면 매우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伏見先生抵蒼巖書, 知〈勉菴年譜〉中, 有起義時, 貽書先生共事不應之語.不圖斯翁忠直之風, 不待身後十年而爽實之文, 遽出於其門下也.當日勉丈之欲作書也, 林氏之沮之以方圖祭酒之說, 李相來之親聞, 宋楨鏞金教潤之所傳, 歷歷不差, 信有如蒼書中所云者.且先生不記送鎰健與澤述致書勉丈陣中時訓辭乎? 豈不曰"勉台八耋, 從戎以死報國, 吾雖才之不能共事, 見留近地, 拜闕一書相問, 心甚未安"? 往至義所, 若使參名義錄, 則澤述有重堂在, 不可擅爲, 鎰健則許之也乎? 果勉丈有先施者, 書中胡無一句辭答之語乎? 而必令愛孫而參名, 則其欽祝冀成之意, 又何如也? 勉書有無先生心事, 此可知矣.借使先生實見勉書而不應, 其不應者, 亦各有所度之材勢, 又不無所守之義理, 未必舉義之專美, 守義之全非.初不宜表出別人之不應, 用彰吾師之獨賢, 况於先生初無共事之書, 又何應不應之可論也? 乃必欲以無有爲, 馮虛作實, 公傳道之於後世, 不亦異乎? 면암 대감이……것입니다 《추담별집(秋潭別集)》 권1 〈여최면암(與崔勉菴)〉의 편지를 요약한 내용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守義] 여기서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과 상대되는 의미로 거병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리를 지킨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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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 최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德溪崔公墓碣銘【幷序】 옛날 나는 덕계(德溪) 최공의 문집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증손 규정(圭貞)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공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다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하네. 스스로 생각하건대, 글을 잘 짓지 못하니 존선(尊先)의 실덕을 드러내지 못한다. 한 차례도 오히려 두려운데 하물며 두 번이나 글을 지으랴."라 하니, 최군이 말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글을 잘한다는 자들은 타인의 묘도 문자에 실상과 판이하게 기술한 경우가 많으니 제 마음에 매우 들지 않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의 실덕을 꼭 맞게 그려낼 사람으로 끝내 문하만한 이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거듭 요청하는 것이니, 글을 잘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또한 어찌 감당하리오. 그러나 이미 글을 잘해서만 맡긴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구함과 다르다69)는 것이니, 어찌 끝내 사양하리오."라 하였다.공은 우리 고을에서 백 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로 최효자라고 일컬어지는 분으로, 휘는 찬수(燦秀) 자는 내겸(乃兼) 본관은 전주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란 분이 시조이다. 조선에 들어와 판관으로 병조참판에 추증된 휘 희정(希汀)은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공의 10대조이다. 조부의 휘는 응성(應性), 부친의 휘는 영운(永雲)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 종찬(鍾燦)의 따님이다.공은 순조 신사년(1821)에 고부 두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본성이 지극하여 밤에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새벽에 문안드리면서 따뜻하고 시원한가를 살폈으니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였다. 부드러운 낯빛으로 뜻을 받들고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할 것 같았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다. 종일토록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명을 받아야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수고로운 일을 부모 대신 맡아 봉양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빠트리지 않고 올렸다. 이렇게 행하고 남은 힘으로 책에 힘써서 그 뜻을 길렀다. 부모님의 훈계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품속에 적어 놓았다. 부모가 병이 나면 온 마음으로 약을 조제하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상을 당해 곡하면 가슴을 치다가 자주 기절하였으며, 장례와 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예절을 모두 지극히 하였다. 묘소 곁에 집을 지어놓고 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70) 이외에는 한 번도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무릎이 닿은 곳은 움푹 파였으며, 눈물이 닿은 풀은 시들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워하는 슬픔에 듣는 이들은 눈물을 뿌렸다. 남쪽으로 온 벼슬아치들은 여막을 지나면서 공경을 표하였고, 마을의 선비들이 관찰사71)나 현의 관리에게 서로 추천하니, 공이 듣고 만류하기를 "나의 불효를 덧보태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상이 대략적인 공의 행적이다.대개 후대에서 효도를 칭할 때는 반드시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거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 일72)이 있어야 기이한 일이라고 놀란 이후에 이에 세상에 널리 전한다. 지금 공의 효도는 〈곡례〉와 《소학》을 넘지 않고서 일반적인 도리와 소략한 예절을 다하였는데도 여론은 공을 칭송하였다. 공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붙이지 않고 단지 "효자"라고 하였으며, 공이 마을을 일컬을 때에는 마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향, 효자리"라고 하였으며, 공이 친척을 일컬을 때는 성명을 부르지 않고 다만 "효자의 아무개 친척"이라고 하였으니,73) 이는 어째서 그런 것인가.공자가 말하기를 "살아계실 때나 죽어서 장사지낼 때나 제사 지낼 때 예로써 하면, 효이다."74)라 하였으며, 증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또한 그 뜻과 존체를 봉양하면서 기이한 일이 없었다. 대저 효도를 공자와 증자 같이 한다면 지극하다고 이를 수 있다.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75)고 하였는데, 공의 효도는 또한 공자와 증자를 뒤따랐으니, 신명은 비록 통할 것을 기필하기 어렵지만, 어찌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통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여론이 공을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니, 어찌 반드시 죽순이나 잉어의 기이한 일처럼 한 때 우연한 일 들을 말해야 하는가. 대저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대성인에게 '효성스럽구나.'라는 칭송을 받았으니,76)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이 말하는 것에 남들이 딴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공은 고종 정해년(1887) 6월 21일에 돌아가셔서 두지리 뒤쪽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안동 권씨 석영의 따님으로, 시부모를 효도로 모셨고 남편을 공경으로 대하였으니, 또한 공이 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77)을 볼 수 있다. 아들은 병식(秉湜)이며, 딸은 김요경(金堯儆)에게 시집갔다. 손자로 첫째 경열(暻烈)은 남의 후사로 출계하였으며, 둘째는 인열(寅烈)이다. 사위 김 서방의 아들은 영중(靈中)이다. 증손으로 규원(圭元)은 일찍 죽었는데, 아내 김씨가 수절하면서 시아버지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다. 그 외 규형(圭享), 규리(圭利), 규정(圭貞)이 있다.오호라! 공은 참으로 지극히 효성스러운 사람이다. 효성이 이미 원천이 되었으니,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다 갖추었다. 덕스런 기운은 안색과 말에 드러나고 위의는 행동거지에 나타났다.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 충효와 자상(慈祥)을 힘썼으며, 자신을 수양함에 인의와 예양(禮讓)을 따랐다. 저술한 글은 대부분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의미78)를 담은 것과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의리를 독실하게 하는 말로 사람의 선함을 감발시키고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될 만 하였으니, 효 한 가지로만 명성을 이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에 명을 짓는다.저 두지의 서쪽 산기슭을 바라보니 睠彼斗池西麓이는 지극한 효자의 무덤이로다 是爲純孝眞宅살아서 은혜로운 명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生無恩命자신에게 양귀와 천작이 있나니79) 自有良貴天爵정려와 포양이 모두 빠졌다고 말하지 마라 莫曰幷闕旌褒많은 사람들이 풍비80)에 비각을 세웠으니 萬口豊碑綽楔천추 만년의 뒷날에 有來千秋萬齡과객이 몸을 굽혀 절을 올리리라 過者其躬必鞠 昔余序德溪崔公遺文矣, 今其曾孫圭貞, 示以松沙奇公宇萬所撰狀文, 復請余墓銘.余曰 : "辭.自惟不文, 無以闡尊先實德.一之猶懼, 矧再之." 崔君曰 : "竊觀今世能文者, 多浮實於人家牲石, 甚不滿人意.念可以得中於吾祖實德, 竟無如門下者, 此所以重求之, 非以文也." 余曰 : "是又何敢當.然旣不以文, 是所謂'異乎人之求'者, 其何能終辭." 公, 吾鄕百年以來, 一辭所稱崔孝子也, 諱燦秀, 字乃兼, 貫全州.高麗文成公諱阿, 其始祖.本朝判官贈兵曹參判諱希汀, 學受靜菴, 忠在國朝, 其十世也.祖諱應性, 考諱永雲, 幷有行誼.妣, 礪山宋氏鍾燦女.以純廟辛巳, 生於古阜斗池里.幼有至性, 定省溫凊, 不敎而能.愉婉洞屬, 言若不出, 身若不勝.終日親側, 進退惟命.服勞奉養, 甘旨無闕.餘力劬書, 以養其志.父母有訓, 終身不忘, 爲懷中簡.親癠, 合藥禱天乞代之外, 無他事.丁憂, 哭擗屢絶, 初終葬祭, 情文俱至.築室墓側, 朔望祭奠之外, 一不下山.當膝成坎, 淚著草枯.朝夕哀慕, 聞者揮涕.搢紳之南來者, 過廬而致敬.鄕人士, 交薦于道繡縣官, 公聞而止之曰 : "毋重吾不孝." 此公之大致也.蓋後世之稱孝, 必有雪笋氷鯉, 可驚奇事而後, 乃喧傳于世.今公之孝, 則不踰乎〈曲禮〉《小學》, 常道疏節之是盡, 而輿論公誦之.稱公, 不以姓名而曰孝子 ; 稱公之鄕里, 不以名號而曰孝子鄕孝子里 ; 稱公族黨, 不以姓名而曰孝子某親, 此何以也.孔子有言曰 : "生死葬祭以禮, 孝矣." 曾子之事親也, 亦養志體而無異事.夫孝如孔、曾, 可謂至矣.孝悌通於神明, 公之孝, 亦惟孔、曾是追, 則神雖難必, 豈不可以感通於人乎.宜乎得夫人之輿誦也.奚必笋鯉奇事, 一時適然者之是道哉.夫以不間於父母昆弟之言, 得孝哉之稱於大聖, 則人不間於公共僉同之言者, 何獨不然也.公卒以高宗丁亥六月二十一日, 葬斗池後酉原.夫人, 安東權氏錫榮女, 孝舅姑敬君子, 亦見刑于攸及也.男秉湜, 女適金堯儆.孫長暻烈出后, 次寅烈.金壻男靈中.曾孫圭元早歿, 妻金氏守義, 孝養其舅.圭享、圭利、圭貞.嗚乎! 公, 固純孝人也.孝旣爲源, 衆善畢備.德氣達於色辭, 威儀著乎動止.與人言, 忠孝慈祥是勉 ; 行於己, 仁義禮讓是遵.所著文字, 又多蓼莪風樹之意, 正倫篤義之語, 足以感發人善, 補益世敎者, 其不可斷以一孝成名也, 又審矣.是不可以不知也.爲之銘曰 : "睠彼斗池西麓, 是爲純孝眞宅.莫曰生無恩命, 自有良貴天爵.莫曰幷闕旌褒, 萬口豊碑綽楔.有來千秋萬齡, 過者其躬必鞠." 다른……다르다 《논어》 〈학이(學而)〉의 "부자는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여 얻는 것이니, 부자가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공자의 구함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상대방의 부탁이 여타 다른 사람의 그것과 차원이 다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초하루나 보름의 제전(祭奠) 삭망전(朔望奠)을 가리킨다. 상중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관찰사 '도수(道繡)'는 원래 암행어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암행어사에게 추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여기서는 도백(道伯), 즉 관찰사로 보인다. 눈 속에서……일 맹종(孟宗)은 병이 위중한 어머니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대숲에 들어가 슬피 울었는데 죽순이 돋아났다고 하며, 왕상(王祥)은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얼음이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뛰어올랐다고 하니, 모두 효성이 지극함을 말한다. 《五倫行實圖 孝子》 공을 일컬을……하였으니 이 구절은 《소학》 권6 〈선행(善行)〉에 보이는 호원(胡瑗의 내용을 변용하였다. 호원이 호주(湖州)의 교수(敎授)로 있을 때,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학생들의 행동거지도 반듯하여 "묻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며, 배우는 자들이 이야기하며 선생이라고 말하면 묻지 않아도 호공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不問可知爲先生弟子, 其學者相語稱先生, 不問可知爲胡公也.]"라고 하였다. 공자가……효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공자가 효(孝)에 대해 대답하면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섬기기를 예로써 하고, 돌아가시면 장사 지내기를 예로써 하고, 제사 지낼 때에도 예로써 하는 것이다.〔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축약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효제는 신명과 통한다 정이(程頤)가 찬술한 정호(程顥)의 행장에서 "충성은 금석을 꿸 만하였고 효제는 신명에 통할 만하였다.〔忠誠貫於金石 孝悌通於神明〕"라 하였다. 《二程文集 卷12 明道先生行狀》 그의……받았으니 《논어》 〈선진(先進)〉에서 "에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남들이 딴말을 하지 못하도다.[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고 하였다. 아내에게 모범이 된 것 《시경》 〈사제(思齊)〉에서 "나의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까지 그 덕이 미쳐서,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린다.〔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라고 하였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잘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를 말한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효자가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을 읊은 시이며, 풍수는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신에게……있나니 《맹자》 〈고자 상〉에 "귀하고자 함은 사람의 똑같은 마음이니,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함이 있건마는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다.[欲貴者, 人之同心也. 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人之所貴者, 非良貴也.]" 그 주에서 주자는 "나에게 있는 귀함은 천작이다.[貴於己者天爵]"라 하였다. '천작(天爵)'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 하였다. 풍비(豊碑) 공적을 기록한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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