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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재 유계원 기사비 慕賢齋儒契員紀事碑 영주(瀛州)의 우일(雨日)506)은 남쪽 지방의 명승지로, 산수가 영기(靈氣)를 모아 충신과 효자, 그리고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으니, 택당(澤堂) 문정공 이식(李植) 같은 명현도 또한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 대개 정릉(靖陵, 중종) 연간부터 장릉(長陵, 인조) 연간까지 모두 150여 년 사이에 마을에는 계(契)가 있었고 계에는 문서가 있었는데, 각(閣)에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에 학문을 강론하며 닦고 이에 시를 읊조리면서 연치(年齒)를 존중하되 벼슬은 존중하지 않았으니, 그 맑은 풍치가 목연(穆然)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규약을 따라 오래되어도 폐하지 않았는데, 각(閣)은 점점 낡아 오래된 각이 없느니만 못한 것이 또한 백여 년이었다.인릉(仁陵, 순조) 신유년(1811)에 이르러 각의 터에 나아가 재(齋)를 짓고 모현(慕賢)으로 편액 하였으며, 예릉(睿陵, 철종) 신유년(1861)에 중수하여 우일서당(雨日書堂)이라 편액 하였다. 어진 이를 존모하는 자는 반드시 책을 읽고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어진 이를 존모하니, 그 실상은 같다. 그 후로 훼손될 때마다 곧바로 수리하여 유지하면서 지켜온 것이 12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마을 계는 폐지되어 강론하지 않으니, 이는 전현의 유허지를 드러내는 것은 성공하였지만, 전현의 규약을 지키는 것은 그러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오호라! 이것이 옳은가.이에 임오년(1942) 가을에 우일의 선비들이 개탄하면서 감회를 일으켜 이전 행적을 뒤따라 계회를 열어, 덕을 권하고 과오를 규간(規諫)하며 예로 사귀고 어려운 이를 구휼함을 여씨 향약에 온전히 의거하여 택당 등 제현들이 했던 그 당시와 같게 하니, 대단히 성대한 일이었다. 돌아보건대 상전벽해가 된 나머지 재(齋)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 삼십 년이다. 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은 말로 발의하여 "이 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기꺼이 부조를 하였다. 썩은 것을 바꾸고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며 기와를 뒤집고 섬돌을 쌓아 이전 크고 화려한 모습을 전부 회복하였으며, 남은 돈은 보관하여 오래토록 유지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 때가 광복한 뒤 기축년(1949)년이다. 나라의 운이 새로워지는데 이 재를 마침 보수하니, 하늘이 유풍을 부흥하려고 그 조짐으로 삼은 것인가.그 다음해 경인년(1950)에 전체 회원들의 자질(子姪)들이 서로 도모하기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작정하면 아들은 기꺼이 집을 짓고,507) 아버지가 장작을 쪼갰는데 아들이 등에 지는 것508)은 옛날의 법도이다. 우리 후손들이 이 재에 대해 잘 유지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빗돌을 잘라와 쓰기를 "모현재유계원기사비(慕賢齋儒契員紀事碑)"라고 하였다. 비석이 이윽고 완성되자,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여러 회원들의 선현을 존모하는 정성509)은 참으로 훌륭하다. 제군들이 이렇게 후손들이 계속해서 수리해나갈 것을 권한 것은 또한 효성스런 생각에서 나왔다. 효성스런 생각이란 유학의 근본이니, 나는 유학이 장차 흥성할 조짐이 될 뿐만 아니라 두승산(斗升山)이 무너지지 않고 초강(楚江)이 길게 흘러 이 재, 이 비석과 함께 영원히 이름을 남길 것을 의심할 것 없다는 것을 알겠다.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지역에 강과 산의 승경의 실상이 있으면 이에 명승지가 되고 사람이 문행(文行)과 아름다운 덕의 실상이 있으면 이에 명현이 된다. 원컨대 여러 어진 이들과 제군들은 한갓 재(齋)와 비석을 준공한 것으로 능사를 삼지 말고 모름지기 선한 이를 가까이하여 자신의 인을 돕는다는 계를 만든 본래의 뜻을 위주로 하여 종신토록 서로 힘쓰라. 그리고 종국에는 택당과 제현들의 의리와 문학으로 목표를 삼아 자신을 수양하여 실제 덕으로 만들며 후손에 전해주어 아름다운 이름이 되게 한다면 참으로 전현을 존모한다고 할 것이니, 장차 영원히 도를 전하며 유허지를 지키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瀛州之雨日, 南服名區, 山水之所鍾靈, 多毓忠孝鴻碩, 有若澤堂李文靖公之名賢, 亦出其中.蓋自靖陵至長陵凡百五十年間事, 洞有契, 契有案, 藏案於閣.於此焉講修, 於此焉風咏, 尙齒而不尙官, 其淸風穆然.洞之人遵其規, 久而不廢, 然寖不如舊閣之不存, 亦百餘祀.至仁陵辛未, 就閣之址, 築齋而扁以慕賢, 睿陵辛酉, 重修而扁以雨日書堂.慕賢者必讀書 ; 讀書者必慕賢, 其實一也.自是厥後, 隨毁隨補, 維持保護者, 再周甲有餘.然昔之洞契, 廢而不講, 是謂表前賢墟則得矣, 守前賢規則未也.烏乎! 可哉.於是壬午之秋, 雨之儒士, 慨然興感, 追前蹟而設契會, 勸德規過, 交禮恤難, 悉依呂氏鄕約, 一如澤堂諸賢當日之爲, 甚盛擧也.顧玆滄桑之餘, 齋幾乎不保者, 三紀.契中僉員, 一辭發議曰 : "是齋之至此, 吾儕責也." 乃銳然樂助.朽者易之 ; 欹者正之, 飜其瓦而築其砌, 盡復輪奐之舊, 留其餘金, 爲久遠之圖, 是則復國後己丑春也.邦運維新, 而是齋適修, 天其欲使儒風復興而爲之兆歟.粤明年庚寅, 僉員子姪, 相與謀曰 : "考作室而子構 ; 父析薪而子荷, 古之道也.吾後承輩, 於此獨無所事乎." 乃伐石而書之曰 : "慕賢齋儒契員紀事碑." 碑旣成, 請余文之.辭不獲, 則爲之言曰 : "僉員高景之誠, 固盛矣.諸君之爲此勸後之嗣葺也, 然亦出於孝思.孝思者, 儒學之本, 吾知其儒之將興, 非但爲兆, 斗山不崩, 楚水長流, 斯齋斯碑, 與之永名也, 無疑矣.抑有一焉, 地有流峙勝狀之實, 乃爲名區 ; 人有文行懿德之實, 乃爲名賢.願僉賢與諸君, 勿徒以竣功齋碑爲能事, 須以親善輔仁之設契本意爲主, 終身交勖, 究竟以澤翁諸賢之義理文學爲的, 修諸身而爲實德 ; 傳諸後而爲令名, 是可謂眞慕賢, 將傳其道於無窮, 其於保守遺墟也, 何有焉." 영주의 우일 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이다. 아버지가……짓고 《서경》 〈대고(大誥)〉에서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대목에서 온 말이다. 아버지가……지는 것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의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선현을 존모하는 정성 '고경(高景)'은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之,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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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정 기적비 怡心亭紀蹟碑 마음은 한 몸의 주인이 되며, 흡족함[怡]은 편안하여 만족스러운 것을 이른다. 사람이 그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우면 이에 건강을 기를 수 있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한다면 이에 부모에 효도함이 된다. 그러나 세상에 이에 능한 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부친을 위해 지은 나씨의 이심정(怡心亭)이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정자는 정읍군 소성방 공평리에 있는데, 나제봉(羅濟奉), 제윤(濟潤) 군이 자신의 아버지 직재(直齋)가 만년에 휴양하는 장소인 소년봉(少年峰) 아래 초강(楚江)의 위에 지은 것으로, 옛날 시인 상관소용(上官昭容)의 '올라 바라보니 마음이 즐거워졌네.'510)라는 말을 취하여 이름을 지었다.정자의 자리를 보면, 뒤 처마는 푸른 절벽을 어루만지고 앞 다리는 백 척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에 꽂혀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두 간(間)인데, 남북 간은 8척이고 동서간은 7척으로 합하여 당(堂)이 되는데 사방이 확 뚫렸다. 돌기둥으로 튼튼하게 하였으며, 철 난간으로 위험을 방비하였으니, 자못 웅장한 건물이다. 정서(正西)쪽으로 별도로 건물을 세웠는데 방과 회랑이 갖춰져 있으니, 완전하고도 아름답다고 하겠다. 대개 정자의 위치는 이전 살던 곳과 매우 떨어져 있어서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승경인데,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초강 일대로 파릉의 동정호와 같아서 올라가 바라보면 주인의 마음은 드넓어지고 정신은 흡족하니, 또한 악양루의 범중엄511)과 비슷하다.이에 옹(翁)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이 흡족하며, 아들에게 있어서는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한 가지 일을 하여 사람에게 어려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었으니, 어찌 글로 기록하지 않으랴.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직재는 어려서 가난하였지만 부모님을 모시면서 뜻을 따랐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선비를 공경하고 예를 좋아하였다. 비록 아들이 멀리 나가 학문을 배웠지만 만년이 되어서야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문을 높게 만들어 손님을 맞아들이고 여비를 마련하여 산수를 유람하면서 집안일은 모두 아들에게 맡겼다. 세상에서 백 가지 일을 하면서 천 가지를 생각하고 천 가지 일을 하면서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자와 비교할 수 없으니, 어째서 그런가? 만족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세상의 풍조가 새롭게 변하여 이익의 문이 열리고 의의 근원이 막혀 보통 집안의 자제들은 구시대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부형을 기롱하지 않은 자가 드물다. 지금 두 군(君)은 이런 것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자를 짓는 일에 먼저 뜻을 가지고 그 힘을 다하였으니, 비록 '독서가 바탕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에 글로 남겨야 할 것을 보태어 이 정자를 보는 이들에게 고한다.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옛날에 별장을 만들고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훼손하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자512)가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별장을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경계하거나 맹서함에 달려 있지 않다. 만약 건물을 지은 자가 그 덕을 잘 마무리 짓지 못하고서 허물을 쌓으며 계승한 자가 선조의 덕을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행한다면, 별장이 비록 보존되어도 숭상할 것이 못되는데, 더구나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음에랴! 나는 이 정자를 보고서 또한 이 정자에 대해 지금과 후대 사람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덕을 지킬 것을 항상 생각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이심정을 지키는데 절실한 것이다. 이에 이름과 실제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정자를 영원히 지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빼버리지 말고 더욱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제봉이 장차 비석을 세워서 그 자취를 기록하려 할 때, 내가 같은 고을 사람이라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자주 찾아와서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그 자취를 갖춰 기록하는데, 이 세 번째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마지막에 실어 강조하였으니, 정자의 자취가 오래 가는 것은 실로 이것에 달려 있지 비석을 세우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한다. 직재의 이름은 광용(光鏞)이며, 순공(舜功)은 그 자이다. 心, 爲一身之主, 怡, 是安適之謂.人而安適其心, 斯爲養身, 子而安適親心, 斯爲孝親.然而世之能此者, 百不一焉, 此羅氏怡心亭之所以爲難也.亭在井邑郡所聲坊公坪之里, 羅君濟奉、濟潤營築其大人直齋晩暮休養所于少年峰下楚江之上, 取古詩人上官氏'登臨怡心'語而錫名者也.亭之爲處, 後榮摩蒼壁, 前脚揷百尺斷崖, 四周視之皆二間, 而南北間八尺, 東西間七尺, 合之爲堂, 而四通豁如也.石柱以爲固, 鐵欄以防危, 頗傑構爾.直其西別起屋, 房室廊序具焉, 完且美矣.蓋其所處, 逈絶故所, 觀者多勝狀, 而最是楚江一帶, 若巴陵之洞庭, 登臨之際, 主人之心曠神怡, 又彷彿乎嶽樓之笵公.於是乎在翁而爲怡其心, 在子而爲怡親心, 一擧而幷得人二難, 是烏可以不書也.雖然此非一朝而驀取者, 蓋有由焉.直齋少貧事親順, 勤儉治家, 敬士愛禮.縱子遊學, 晩而得稍裕, 則高門閭延賓客, 贏資斧遊山水, 幷家事聽子, 不與視世之百思千千思萬不充不饜者, 何如也.庶可謂知足者矣.自風潮之變新, 利竇濶, 義源塞, 人家子弟, 不以舊之人無聞知譏父兄者, 鮮矣.今二君, 不惟免夫於是, 又能先意乎此擧而盡其力, 雖曰 : "非讀書根基." 吾不信也.是皆重可書以告觀斯亭者.抑有一焉, 昔有置別庄而遺戒者曰 : "毁一草一木, 非吾子孫." 余謂保庄在德, 不在戒誓.若作之者, 鮮終其德而取累, 述之者, 罔念先德而取愆, 庄雖保, 不足爲尙, 况有未可知者乎.余有觀乎此, 亦願斯亭, 今與後之人, 常思保怡心之德, 切於保怡心之亭也.是乃知重輕於名實, 而所以永保其亭者, 尢爲可書而不但已也.濟奉將立碑, 以紀其蹟, 謂余爲同郡人知其事, 累至而求文.爲之悉書, 此三可書者, 而歸重於末, 俾知亭蹟久遠, 實在此而無待於碑爲.直齋, 名光鏞, 舜功其字. 상관소용의……즐거워졌네 당대 초기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아 재상에 오른 여류 문학가이다. 그녀의 〈유장녕공주유배지(遊長寧公主流杯池)〉에서 "바위 골짜기에 마음대로 올라 임하니, 눈이 맑아지고 다시 마음이 즐거워졌네."라고 하였다. 악양루의 범중엄 범중엄은 북송 때의 정치가이며 문학가로 사대부의 모범적 인물로 꼽힌다. 그가 등주를 다스릴 때 벗인 등종량(騰宗諒)이 좌천되어 악주(岳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악양루를 중수하고서 범중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친구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아 써 준 글이 〈악양루기(岳陽樓記)이다. 별장을……자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상(名相)인 이덕유(李德裕)는 평천장(平泉莊)이라는 별장을 지었는데, 대사(臺榭)가 100여 곳이나 되는 데다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이 다 모여 마치 선경(仙境)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덕유는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이것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뒤에 그곳은 권력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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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3 卷之二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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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명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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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대부 동복현감 최공 묘지명【서문을 함께 싣다】 朝散大夫同福縣監崔公墓碣銘【幷序】 최씨는 중국의 대성(大姓)으로 동쪽으로 와서 팔도에 널리 퍼져 그 관향이 수십 개인데 전주로 관향을 삼은 씨족이 가장 번성하여 그들이 자리 잡은 곳에서는 모두 명망이 있는 종족(宗族)이 되었다. 고려 시중 문성공 휘 아(阿)를 계보의 시조로 삼은 자들은 영호남에 거주하였는데, 문성공의 네 번째 아들 중랑장 용봉(龍鳳)의 후손은 호중(湖中)에서 명망이 있었다. 중랑장의 증손인 전농소윤 휘 득지(得之)의 후손은 다시 호남의 고부에서 명망이 있었다. 소윤의 장남 휘 자목(自穆)이 고부의 장순리에 처음 거주하였다가 돌아가신 뒤에 분토동의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자손이 그대로 대대로 거처하여 지금은 그 수가 수 천이 되며 벼슬아치와 어진 덕을 지닌 인물들이 간간이 배출되어 끊어지지 않으니, 오호라 성대하도다.공은 조선의 집현전 제학 휘 담(霮)의 손자이며 중랑장 여산 송지손(宋智孫)의 외손으로, 진사로 벼슬에 나아가 조산대부 동복현감이 되었다. 일찍이 사헌부의 주방(主房)으로 있을 때 이전 사헌부 감찰로 있었던 소윤공을 잘 계승하였다고 칭송을 받았다. 승총(乘驄, 어사)으로 3년 주방으로 4달을 지냈는데 대궐의 호걸들이 엄숙하게 대하며 경외(敬畏)하였으니, 공이 또한 감찰이 되어 부친의 풍치(風致)를 잘 계승하였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영인(令人) 고부 이씨는 현감 운정(芸亭)의 따님으로 묘를 공과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분(汾)은 사직으로, 상장군에 추증되었다. 약(瀹)은 무과에 합격하였다. 운(沄)은 참판을 지냈다. 이외 정(淨)과 항(港)이 있다. 딸은 박적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분의 아들인 명손(命孫)은 선천군수를 지냈다. 이외 명동이 있다. 약과 운과 정은 모두 아들이 없다. 항의 아들은 세택(世澤)이다. 명손의 아들 희윤(希潤)은 진사이다. 희정(希汀)은 판관을 지냈으며 호는 덕촌으로, 공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학행으로 서산사(書山祠)에서 배향되었다. 희숙(希淑)은 통덕랑으로 둘째 형을 따라 난리에 달려갔다가 순절하였다. 세택의 아들 한우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드러난 자만 기록하니, 직장 모암(慕菴) 안(安), 참봉 이순당(二順堂) 경행(敬行), 진사 국헌(菊軒) 덕일(德一), 찰방 송계(松溪) 천벽(天璧), 감찰 농은(農隱) 체(體) 등이 바로 이들이다.오호라! 공은 일찍이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계부(季父)인 연촌(烟村) 선생은 국조의 명현이니, 그가 배운 것은 마땅히 정밀하고 드넓어서 언행과 덕업으로 발한 것은 반드시 세상의 모범이 되었을 것인데 족보를 보아도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사헌부 주방은 잘 계승하였다.'는 한 마디 밖에 없으니 어찌 세대가 멀어졌다고 해서 전한 것이 없단 말인가. 아니면 전배들은 질박함을 숭상하여 문장으로 꾸미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기록하여 싣지 않은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상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한 것은 주공과 무왕의 달효(達孝)1)로 천하를 다스린 바탕이며, 선을 드러내고 악을 징계한 것은 필공(畢公)의 선정으로 명성을 세워준 원인2)이니, 사헌부의 주방으로 선조를 잘 계승한 것을 보면 어떤 행업(行業)이 이것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하늘이 그 덕에 보답하여 후손이 창대할 것이다.지금 묘갈을 세우는 날에 내가 공의 외손이 된다고 하여 명(銘)을 짓게 하는데, 나 자신을 돌아보면 비루한 식견에 문재(文才)도 없으니 어찌 사백 년 뒤에 이 일을 잘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직분상 책무를 맡으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고부 동쪽의 분토동은 洞維粉土阜之東만세에 동복공을 모시기 좋아라. 萬歲好藏同福公두승산은 우뚝우뚝 저처럼 깎아지른 듯 드높으니 斗嶽巖巖節彼崇완연히 승총(어사)의 기상을 보는 것 같구나. 宛然氣像見乘驄빗돌에 시를 새겨 무궁한 세월에 보이노니 刻詩于石詔無窮한 집안의 뭇 자손들은 경건하게 제사를 지낼지어다. 闔境羣孫虔祀同 崔氏以中國大姓, 東來布濩八域, 其貫數十, 而貫全州者最盛, 所在皆爲望族.若其以高麗侍中文成公諱阿, 爲始譜之祖者, 居兩南, 而文成公第四子中郞將龍鳳之後, 則望于湖中.郞將曾孫典農少尹諱得之之後, 又望于湖之古阜.蓋少尹公長子諱自睦, 始居阜之長順里, 卒而葬于粉土洞向酉原, 子孫仍世居, 至今其麗數千, 簪組賢德, 間出不絶, 於乎休哉.公本朝集賢殿提學諱霮之孫, 中郞將礪山宋智孫之外孫, 以進士筮仕, 爲朝散大夫同福縣監.嘗主臺房時, 稱善繼少尹公之曾爲司憲府監察也.乘驄三年, 主房四月, 殿中豪傑, 肅然敬憚, 公亦爲監察能繼父風故云然也.令人古阜李氏, 縣監芸亭女, 墓祔公雙兆.子汾司直, 贈上將軍.瀹武科.沄參判.淨、港.女適朴迪.孫, 汾子命孫宣川郡守.命同.瀹、沄、淨俱無子.港子世澤.命孫子希潤進士.希汀判官號德村, 以功贈兵判, 以學行享書山祠.希淑通德郞, 隨仲氏赴亂殉節.世澤子漢佑以下不錄, 只錄其著者, 直長慕菴安、參奉二順堂敬行、進士對菊軒德一、察訪松溪天璧、監察農隱體, 是也.嗚呼! 公早襲父祖之訓, 而季父烟村先生, 國朝名賢, 宜其所學之精博, 而發爲言行德業者, 必多柯則于世, 而觀其譜乘, 無所見焉, 只有臺房善繼一語, 豈以世遠而無傳歟.抑以前輩尙質而不文, 故無事乎記載歟.是不可知.然善繼志事, 周、武達孝, 所以治天下; 彰善癉惡, 畢公善政, 所以樹風聲, 則臺房善繼之爲, 行業也孰大於是.宜天報其德而昌大後承也.今於樹碣之日, 以余爲公之外裔, 俾銘之, 顧以陋識無文, 何能爲役於四百年之後哉.但以職分見責, 其義有不敢辭者.銘曰 : "洞維粉土阜之東, 萬歲好藏同福公.斗嶽巖巖節彼崇, 宛然氣像見乘驄.刻詩于石詔無窮, 闔境羣孫虔祀同." 조상의……달효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달효(達孝)'라고 규정하고 그 효를 말하면서 "무왕과 주공은 누구나 칭찬하는 효자이시다. 효는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선을……원인 《서경(書經)》 〈필명(畢命)〉에 나오는 말로, 주(周)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게 선을 표창하고 악을 구별할 것을 권하면서 명한 말이다. 즉 "선과 악을 구별하여 드러내고 선한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을 정표하며, 선을 표창하고 악을 징치하여 선한 사람의 명성을 세워주어라.〔旌別淑慝, 表厥宅里, 彰善癉惡, 樹之風聲.〕"라고 하였다. 원래 명성을 세운다는 것은 선한 사람의 명성을 널리 알린다는 의미였는데, 이 글에서는 앞의 달효가 주공과 무왕이 천하를 다스린 근본이 된 것처럼 필공의 명성이 널리 전하게 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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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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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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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통훈대부 홍주목사 율정 김공 묘갈명 【서문을 함께 싣다】 通訓大夫洪州牧使栗亭金公墓碣銘【幷序】 옛날 명종과 선조 시기에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호남에는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일재 이항(李恒)이 있었고 영남에는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이 있었다. 여러 선생의 문하에는 또한 많은 선비들이 무리로 나와 추의 맹자와 노의 공자의 유풍이 빛났다. 당시에 통훈대부 홍주목사 율정 김복억(金福億) 공은 자가 백선(伯善)인데, 그도 이들을 스승을 삼아 그 사이에서 널리 배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일재에 대해서는 같은 고을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장 오래 섬겼는데, 공이 돌아가신 뒤 327년 정묘년에 사림들이 함께 의논하여 일재를 모신 남고서원(南皐書院)에 배향하니, 논하는 자들이 잘한 일이라 칭송하였다.김씨는 신라 왕실의 성에서 계출(系出)하였는데, 신라의 운명이 극에 달하자 여러 왕자들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 중 도강백(道康伯)으로 봉해진 자가 있었으니, 강진 김씨는 이 사람에게서 시작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한성좌윤 휘 회련(懷鍊)은 개국공신에 참여하였으며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3대가 지나서 휘 윤손(潤孫)은 벼슬이 사정에 그쳤다. 증조 휘 희석(希奭)은 참봉으로 좌랑에 추증되었는데, 행동이 조심스럽고 성실하여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다. 부친은 휘가 약묵(若默) 호는 성재(誠齋)로, 젊어서 둘째 외숙 눌암(訥菴) 송세림(宋世琳)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윽고 자라서 면앙(俛仰) 송순(宋純), 하서(河西)와 벗이 되었는데 하서는 더욱 진심을 다하여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돌아가시게 되자 그 무덤에 묘지명3)을 지었다.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은 집의에 이르렀다. 그가 한양(韓陽, 양주)를 다스릴 때 두 차례에 걸쳐 옷감4)을 하사 받았으며,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선비(先妣)는 여주 윤씨로, 현감 임형(任衡)의 따님이다.공은 가정 갑신년(1524)에 태어났다. 자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능히 집안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조금 장성하여 일재 이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당시의 제현들 예를 들면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신암 이준민 등을 모두 따르며 배웠다. 독실하게 공부하며 힘써 행하였으며, 학문의 경지가 매우 드넓었다. 을사년(1545) 윤 숙인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예를 따라 거행하였다. 무오년(1558)에 집의공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생활을 하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아우, 여동생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고 그들에게는 후하게 하였다. 기사년(1569)에 효성과 우애로 천거되어 목청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곧이어 경기전 참봉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유년(157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병자년(1576)에 돈녕부 봉사가 되었다. 일재의 상을 당하여 세 달 가마복(加麻服)을 입었다. 신사년(1581)에 회덕 현감이 되어 치적이 매우 높아서 백성들이 빗돌을 깎아 송축하였다. 임기가 차자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보고하자 임기를 1년 늘려주니 백성들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정해년(1587)에 사옹원 판관이 되었다. 무자년(1588)에 창평 현령이 되었는데, 그 치적이 회덕에 있을 때와 같았다. 그밖에 한가로울 때는 지팡이와 나막신을 신고 산수 사이를 유람하였으니, 이웃 고을 수령인 최경회(崔慶會), 김부륜(金富倫), 오운(吳澐) 공 등과 함께 인근 고을의 명승지를 두루 미쳤으며, 예닐곱 사람이 〈성산계류탁열도〉를 만들어 인물을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신묘년(1591)에 다스린 성적이 일등이 되어 김제 군수로 승진하였다.임진년(1592)에 조정의 의논이 남쪽 지방은 적에게 요충지가 된다고 하여 무장으로 공과 교체하였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오면서 '군부(君父)가 몽진을 떠났는데 신자(臣子)가 한가롭게 물러나 힘을 바치지 않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고서 이에 아우 주부공 경억(慶億), 친척 조카인 별제 대립(大立) 및 동향의 여러 공과 함께 의곡(義穀)을 모아 군중(軍中)으로 보냈으며, 솜옷을 많이 장만하여 동상에 걸린 명나라 군사를 구원하였다. 계사년(1593)에 또 다시 홍주목사로 승진하였다. 군사에 관한 일과 백성의 실정을 상황에 맞게 조치하였다. 학사를 중건하여 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였으며, 월급을 덜어서 학생들의 식량을 돕게 하였다. 홍주는 좌윤공이 일찍이 다스리던 곳이다. 부친이 남긴 법도를 차례대로 거둬들여 폐하거나 실추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건립하여 사모하니, 공이 백성들에게 사랑을 끼쳐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다. 늙고 병들었다고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다시 이천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이보다 전인 기축년(1589)에 정여립이 역모로 주살되자, 금구는 그의 고향이라고 하여 현이 폐지되었다. 갑오년(1594)에 옛 명칭을 되찾았으나, 또다시 전쟁의 병화를 겪은 데다가 거듭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대단히 잘 다스리는 자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군자감정에 있다가 이 선발에 뽑혔다. 금구는 공이 거처하는 태산(태인의 고호)의 인근 고을이다. 개인적인 일로 해를 끼칠까 두려워하여 공은 식솔을 거느리고 가지 않았으며,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편안하게 살게 하니, 일 년도 못돼서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행장은 텅 비어 물로 씻은 듯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길을 에워싸고 노래를 불러 기렸으며, 비석을 세워 기록하였다. 이 해에 나이가 70을 넘겨 더 이상 세상에 이바지할 뜻이 없었으며, 다만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를 즐길 뿐이었다.만력 경자년(1600) 11월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태인 수천동의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전 부인은 청주 한씨로 일찍 타계하여 자식이 없으며, 태인 동지에 있는 부친 현감 석년(錫年)의 묘 아래에 따로 장사지냈다. 계비(繼妃)인 전의 이씨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공량(公亮)의 따님으로 공의 묘에 합부(合祔)하였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응진(應辰)으로 자손이 없다. 그 다음은 응빈(應贇)으로 호는 오무재(悟無齋)이며 제용감 봉사를 지냈다. 광해군의 어두운 세상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자취를 감췄다. 후에 송산사(松山祠)에 배향되었다. 그 다음은 응현(應賢)과 응질(應質)로 모두 예빈시 참봉을 지냈다. 딸은 지평을 지낸 안동 김정일(金鼎一)에게 시집갔다. 또다시 네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응린(應麟)은 제용감 봉사를 지냈다. 응실(應實)은 첨지를 지냈다. 응빈(應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응상(應賞)은 주부를 지냈다. 딸들은 이기신, 무과에 합격한 조응남, 충의위 홍태길, 정옥 등에게 시집갔다.오호라! 공은 자질이 빼어나고 뛰어난데다 사우들과 학문으로 승화시켜서 지니고 있는 것은 깊고 무거웠지만, 평생 펼친 것은 겨우 작은 고을의 낮은 관료로 드러낸 것뿐이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사우(四憂)'로 그 실(室)을 편액 하였는데, 그 기문을 쓴 자가 그 뜻을 평하기를 "죽을 때까지의 근심은 맹자가 근심하였던 것5)으로 자신과 도에 관한 것이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근심은 범공이 근심하였던 것6)으로 임금과 백성에 관한 것이다. 이 공을 보면 참으로 뜻을 숭상하는 선비로 죽을 때까지 근심을 지녔던 군자이다. 이 때문에 자신에 있어서는 학문을 자신에 이루었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효과를 드러내었으니, 이른바 어디에 간들 성공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에 해당한다. 군자는 근심을 풀어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밖에서 이르는 것의 크고 작음, 두터움과 얇음이 어찌 공에게 손해나 이로움이 되겠는가."라 하였다.옛날에 비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읽을 수가 없다. 10대손 영채(永采)가 노사 기정진이 지은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새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조인 죽계 부군은 공과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한 우의가 있으니 감히 그 일을 사양할 수 없다. 어진 후손으로 수고로이 이 일을 감독한 이는 종술, 환길, 준기 등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집안의 명성을 능히 이었으니 克家繼聲명문의 효자이며, 名門孝子도 있는 이에게 올바름을 배웠으니 就正有道사문(斯文)의 고사이며, 斯文高士선정으로 백성에게 은택을 끼쳤으니 善政澤民성조의 어진 신하로다. 聖朝良臣이 세 가지 정절을 갖췄으니 備三大節이에 완벽한 사람이라 이를지어다. 是謂完人 粤昔明、宣之世, 名賢幷作, 湖有河西、一齋, 嶺有退溪、南冥, 諸先生之門, 亦羣儒蔚興, 彬彬鄒、魯風.時則有若通訓大夫洪州牧使栗亭金公諱福億字伯善, 無不從師, 博學於其間.然惟於一齋, 同鄕密邇, 而事之最久, 公歿後三百二十七年丁卯, 士林同議, 配享於一齋南皐書院, 論者稱善.金氏, 糸出新羅宗姓, 羅命之革, 諸公子作賓于麗, 有封道康伯者, 康津之金始此.入我朝, 有漢城左尹諱懷鍊, 參開國勳謚忠敏.三世而諱潤孫, 官止司正.曾祖諱希奭參奉, 贈佐郞, 謹慤稱于鄕.考諱若默號誠齋, 少從仲舅宋訥菴世琳學.旣長友宋俛仰純及河西, 河西尢眷眷以道義相交, 沒爲銘其壙.登別試文科, 官至執義.其宰韓楊, 再承表裏之賜, 享武城書院.妣, 驪州尹氏, 縣監任衡女.公以嘉靖甲申生, 天資孝友, 克承庭訓.稍長師事一齋李先生, 一時諸賢, 如奇高峰大升、鄭松江澈、李新菴俊民, 皆從遊也, 篤學力行, 造詣溥博.乙巳, 丁尹淑人憂, 一遵成禮.戊午, 執義公下世, 廬墓三年, 一不到家.與弟妹析産, 薄己而厚彼.己巳, 孝友薦除穆淸殿參奉, 旋移慶基殿.癸酉, 中司馬.丙子, 敦寧府奉事.遭一齋喪, 加麻三月.辛巳, 監懷德縣, 治效茂著, 民磨崖以頌之, 官滿, 方伯啓聞, 加一年, 從民望也.丁亥, 爲司饔院判官.戊子, 昌平縣令, 其治如懷, 而暇日笻屐, 徜徉山水, 與隣宰崔公慶會、金公富倫、吳公澐, 曁隣邑名勝, 六七人作爲〈星山溪柳濯熱圖〉繪像題名.辛卯, 以治行第一, 陞金堤郡守.壬辰, 朝議以南方爲賊要衝, 替以武弁.公罷歸, 以爲君父蒙塵, 臣子不可以閒退不致力, 乃與弟主簿慶億族子別提大立及同鄕諸公, 募義穀輸送軍中, 多辦衣絮, 以救天兵之凍瘃.癸巳, 又陞洪州牧使, 軍務民情, 隨方措置, 重建學舍, 勸課儒生, 割月廩以助學糧.洪, 卽左尹公舊莅也, 遺規次第修擧, 無廢墜者.民建銕碑思之, 其遺愛之八人深如此.以老病辭歸, 除利川府使, 辭不赴.先是己丑汝立逆誅, 金溝以本鄕見廢.甲午, 復舊號, 新經兵燹, 重以歉凶, 朝廷選能治劇者, 公以軍資監正, 膺是選.金, 於公所居泰山比壤也, 恐以私累害, 公不以家眷自隨, 盡心民隱撫綏安輯, 未朞民獲蘇醒.翌年, 辭歸, 裝槖如洗, 民咸擁道歌頌, 碑以記之.是年, 年踰七十, 無復供世意, 只以琴書自娛.萬曆庚子十一月, 考終于家, 葬于泰仁水川洞負子原.夫人, 淸州韓氏, 早沒無育, 別葬泰仁東池其父縣監錫年墓下也.全義李氏, 贈吏判公亮女, 祔公墓.四男, 長應辰無后.次應贇號悟無齋濟用監奉事, 昏朝政亂, 棄官晦跡, 後享松山祠.次應賢、應質俱禮賓寺參奉.女適持平安東金鼎一.又有四男四女, 應麟濟用監奉事.應實僉知.應賓武科早沒.應賞主簿.李奇臣、趙應男武科、洪泰吉忠義、鄭玊.嗚乎! 公生禀秀異, 濟以師友文學, 抱負深重, 而平生展布, 僅見於下邑散僚, 惜哉.雖然公嘗以四憂扁其室, 記之者評其義曰 : "終身之憂, 鄒聖所憂, 在於身與道也 ; 進退之憂, 范公所憂, 在於君與民也.觀此公, 眞尙志之士, 而有終身憂之君子也.是以在己而學成於己 ; 出仕而效著於國, 所謂無入而不自得者.君子貴乎解憂而酬志而己, 外至者之大小厚薄, 何足爲公損益哉." 舊有碣, 今不可讀.十世孫永釆示以奇蘆沙正鎭所撰行狀, 請余以新碣之銘.竊念吾祖竹溪府君, 與公有同年之誼, 不敢辭相役.其後孫之賢勞董役者, 淙述、煥吉、俊基云.銘曰 : "克家繼聲, 名門孝子.就正有道, 斯文高士.善政澤民, 聖朝良臣.備三大節, 是謂完人." 무덤에 묘지명을 지었다 《하서선생집》 권12에 있는 〈통훈대부양주목사금공묘명(通訓大夫楊州牧使金公墓銘)〉이다. 옷감 '표리(表裏)'는 옷 한 벌을 지을 수 있는 겉감과 안감을 말한다. 죽을……근심하였던 것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종신토록 근심하는 것이 있고, 일시적인 걱정은 없다. 종신토록 근심할 것은 있으니,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순 임금은 천하에 법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향인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곧 근심스러운 것이다. 근심스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 임금과 같이 할 뿐이다.[君子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也 乃若所憂則有之 舜人也 我亦人也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 憂之如何 如舜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벼슬에……근심하였던 것 범공은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범공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하면 그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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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행조산대부 내자시 직장 은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嘉善大夫戶曹參判行朝散大夫內資寺直長隱菴李公墓碣銘【幷序】 옛날 목릉(穆陵, 선조) 임진왜란 때 도성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어 거의 나라가 멸망 상태까지 가는 두려운 상황이었는데, 끝내 강토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사직을 편안히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가 원조한 공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병을 일으킨 여러 공이 그 토대가 됨에 힘입은 것이다. 호남에 있어서는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이외에도 또한 순국하거나 공을 세워 우뚝히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 내자시 직장으로 호조참판 지의금부사에 추증된 은암 이공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공의 휘는 수일(守一) 자는 경중(敬仲)이며, 은암은 자호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날뛰자 의기를 떨쳐 장성의 남문 밖에 이르러 김경수(金景壽), 김홍우(金弘宇), 윤진(尹軫) 공 등과 의병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발하여 도청(都廳)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문하여 전략을 세웠다. 집안 하인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군량과 병서를 가지고서 곧바로 남문으로 가서 의곡(義穀)을 거둬 법성포로 나가 기효증(奇孝曾)에게 맡겨 조운(漕運)으로 행재소에 바치게 하였다. 또한 스스로 곡식을 마련하여 좌의장 임계영(任啓英), 우의장 최경회(崔慶會) 공에게 보냈다. 이윽고 김제민(金齊閔), 유희진(柳希津), 윤횡(尹趪) 공 등과 함께 직산으로 내달려 왜적을 공격하여 수십 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방향을 바꿔 진위로 향하여 정탐꾼 15명을 사로잡았다. 용인에 이르렀을 때 경략 송응창(宋應昌)7)이 강화의 논의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 여산을 지키면서 적의 길을 막았다. 당시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화의를 주장하여 대군을 철수하자, 공도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와 세상의 일에 관심을 끊고 고향에서 학도들을 가르쳤다.공은 문경공 일재 이항(李恒) 선생의 아들이다. 집안의 가르침에 무젖어서 학문이 고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널리 알려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조정에서 추천하여 내자시 직장과 경양도 찰방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의거를 이끈 것은 원래 근본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일시적인 기절(氣節)을 떨쳐 일어난 것이 아니다.성산 이씨는 고려 성산부원군 휘 장경(長庚)의 후손이다. 성산군에서 4대가 지나 병조판서 평간공 휘 발(潑)이 나왔으니, 바로 문경공의 고조이다. 문경공은 영월 신씨 백수(伯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 갑오년(1534)에 공을 낳았는데, 계부(季父)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장원서 별제 휘 상(常)과 (令人) 광주 이씨, 광산 김씨가 바로 출계한 부모이다. 공은 향년 아흔셋으로 만력 병진년(1616)에 돌아가셨다. 참판으로 추증된 것은 의병을 일으킨 공 때문인데, 남문창의비와 《오산창의록》에 그 기록이 실려 있으며 오산사(鰲山祠)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언양 김씨로, 광국(匡國)의 따님이다. 묘소는 태인 남촌면 대산동 해좌에 합부(合祔)하였다. 아들은 철(澈), 열(洌), 식(湜), 약(瀹) 택(澤)이며, 딸은 조용창에게 시집갔다. 철의 아들은 비응(匪鷹)이다. 열의 아들은 비린(匪麟)과 비해(匪獬)이다. 식의 아들은 비호(匪虎), 비웅(匪熊), 비룡(匪龍), 비표(匪彪)인데 비룡은 출계하였다. 약의 양자는 비룡이다. 택의 아들은 지간(之幹)이다. 비룡의 현손인 성익星益)과 성열(星說)은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둘 다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났으며 문집이 간행되었다.오호라! 공은 집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계승한 효자가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의병으로 임금에게 달려간 충신이 되며, 고을에 있어서는 세속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있었으며, 후생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진 가르침이 있었으며, 또한 끝내는 편안하게 물러나 맑은 기풍으로 사람을 감동시켰으니 여러 선을 두루 갖춰 그에 필적한 만한 이를 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삼백 년이 흘렀지만 비석에 드러내 새길 글도 마련하지 못하였는데, 10대손 쾌열이 이를 두려워하여 여러 친족들과 상의하여 비석을 만들어 무덤에 세우면서 아들 희삼을 보내 나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의 덕행을 존모하는 생각8)을 이루 금할 수가 없어서 나의 미천함을 잊고서 삼가 글을 서술하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인생의 큰 이치는 人生大致다만 충성과 의리로다. 惟忠與義의리는 능히 왜적을 토벌하고 義能討賊충성은 능히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忠能報國남문에 비석이 있으며 南門有碑오산에 사당이 있어라. 鰲山有祠많은 사람이 공을 칭송하니 萬口公誦백 대에도 경건히 제사하누나. 百世虔供다만 이 대산동에 惟此大山네 척의 봉분이 있는데, 四尺之墳바람이 감추고 물이 둘러 흘러 風藏水抱체백이 영원히 보존되리라. 體魄永保문경공의 묘소가 文敬大隧아주 가까운 근처에 있는데, 隣近尺地아버지가 짓고 아들이 계승하니 父作子述다만 주나라 왕실만이 그러한 건 아니도다.9) 匪獨周室누가 이 산기슭을 지나면서 孰過玆麓공경하는 마음 가지지 않으리오. 有不屬屬 昔在穆陵龍蛇之亂, 都城傾覆, 萬民魚肉, 懍懍然幾乎無國, 而卒乃保全疆土, 奠安宗社者, 人皆稱明朝援助之力.然實藉本國倡義諸公, 以爲根地.在湖南, 則金文烈、高忠烈以外, 亦多以殉以功, 卓然可稱者, 若內資寺直長贈戶曹參判知義禁府事隱菴李公, 其一也.公諱守一字敬仲, 隱菴自號也.壬辰, 倭寇陸梁, 奮義馳到長城南門外, 與金公景壽、金公弘宇、尹公軫, 倡發擧義之論, 以書往復都廳, 咨訪規畵.率家僮義士, 持軍糧兵書, 直赴南門, 收集義穀出法聖浦, 屬奇公孝曾, 漕納行在所.又自辦糧穀, 送乎左義將任公啓英、右義將崔公慶會.乃與金公齊閔、柳公希津、尹公趪, 馳進稷山, 攻倭敵斬數十級.移向振威, 捕得偵探者十五名.及至龍仁, 聞宋經畧應昌主和議, 還守礪山, 以遏賊路.時李提督如松, 議撤大軍, 公亦罷歸, 絶意世事, 訓誨鄕里.公, 文敬公一齋先生之子也.擩染庭訓, 學問高明, 孝友著聞, 模範鄕黨.朝廷薦授內資寺直長、景陽道察訪, 皆不就.義擧之倡, 蓋有所本, 非一時氣節之奮也.李氏, 星州人, 高麗星山府院君諱長庚后.星山君四世, 至兵曹判書平簡公諱潑, 則文敬公高祖也.文敬公聘寧越辛氏伯粹女, 生公於嘉靖甲午, 令出爲季父後, 掌苑署別提諱常, 令人廣州李氏、光山金氏, 其所後考妣也.公享年九十三, 而卒于萬曆丙辰.其贈參判, 以倡義功也, 有南門倡義碑、《鰲山倡義錄》, 享鰲山祠.配, 贈貞夫人彦陽金氏, 匡國女.墓, 泰仁南村面大山洞亥坐合封.男, 澈、洌、湜、瀹、澤, 女適趙用昌.澈男, 匪鷹.洌男, 匪麟、匪獬.湜男, 匪虎、匪熊、匪龍出系、匪彪.瀹系男匪龍.澤男之幹.匪龍玄孫星益、星說, 司馬聯璧, 俱以文行著, 有集刋行.於戲! 公在家而爲繩父之孝子 ; 在國而爲勤王之忠臣 ; 在鄕而有範俗之行 ; 在後生而有嘉惠之敎, 而又終始恬退淸風動人, 可謂衆善畢備而罕見其儔矣.顧其歲經三百, 不遑顯刻之文, 十世孫快烈爲是之懼, 議與諸族, 治碣樹阡, 遣其子喜三, 徵銘于余.不勝高山景行之思, 忘其輕微, 謹爲之敘而銘之曰 : "人生大致, 惟忠與義.義能討賊, 忠能報國.南門有碑, 鰲山有祠.萬口公誦, 百世虔供.惟此大山, 四尺之墳.風藏水抱, 體魄永保.文敬大隧, 隣近尺地.父作子述, 匪獨周室.孰過玆麓, 有不屬屬." 송응창(宋應昌) 명나라의 관료로, 자는 사문(思文), 호는 동강(桐崗)이다. 임진왜란 때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어 제독 이여송(李如 松)과 함께 48,000명 병력의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였고, 보급 등의 군무를 총괄했다.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대패한 이후 교전을 자제하면서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하였다. 덕행을 존모하는 생각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之, 景行行止.〕"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고인의 큰 덕행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다만……아니도다 《중용》에서 공자는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이 선업을 잘 계승하였기에 그 효를 '달효(達孝)'라고 하면서 "무왕과 주공은 누구나 칭찬하는 효자이시다. 효는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中庸章句 第19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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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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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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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진사 구암 이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成均進士龜菴李公墓碣銘【幷序】 옛날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의 은택도 5대가 지나면 사라진다."라고 하면서 공자에게 사숙한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다.10) 그런데 문경공 일재 이항(李恒) 선생은 5대가 지나 구암공 휘 성익(星益) 자가 익지(益之)인 분을 얻었는데, 역대 조상의 풍치가 남아 있고 어진 자손이 계승하는 성대함이 있으니, 어찌 선철이 이성(異姓)에게 학문을 전한 것보다 더욱 귀하지 않겠는가.대개 공은 순수(純粹)한 자질과 통달한 재주로 성현의 학문에 전력을 다해 깊이 생각하여 크게 발전하여 원대한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면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에 우암 송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바로잡아 성과 도의 근원에 대해 들었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선생과 막역지우가 되어 학문의 도움을 주며11) 서로 발전하였다. 이에 덕과 학문이 고명해지고 명성이 드높았다. 태학의 장의는 유림 가운데 정밀하게 가려 뽑는 자리인데 추천12)을 받아 올라갔으며, 문곡 김수항 공은 어진 재상인데 공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니, 이를 통해 공을 알 수 있다.장차 사문(斯文)의 종장과 조정의 재상이 될 날이 있을 것인데, 하늘이 더 이상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이에 원릉(元陵, 영조) 임자년(1732) 12월 25일에 홍양의 장인 집에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태인 남촌면 대산동 문경공의 묘소 옆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태어난 명릉(明陵, 숙종) 기묘년(1699) 정월 5일부터 향년 겨우 34세이다.공의 선조는 성산 사람이다. 5대 이상의 계보는 문경공의 묘갈에 실려 있다. 호조참의에 추증된 직장 수일(守一)은 문경공의 둘째 아들인데, 계부(季父) 별제 상(常)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식(湜)이며, 조부는 비룡(匪龍)이며, 부친은 통덕랑 효민(孝閔)이다. 모친은 여산 송씨로, 대징(大徵)의 따님이며 교리 세림(世琳)의 현손이다.계묘년(1723)에 공은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아우인 칠봉공 성열(星說)도 나란히 합격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목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칠봉공이 돌아가시자, 공은 천륜의 지극한 정으로 그 뛰어난 재주를 매우 애석하게 여기면서 지나치게 슬퍼하고 애통하여 자신도 모르게 절도를 넘어 세상에 더 이상 뜻을 두지 않았다. 노친을 모시고 광주 용산동 선영 아래에서 거처하면서 자호를 구암이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교유를 끊고서 오로지 수양에만 집중하였다.기유년(1729)13) 봄에 모부인께서 유행병을 앓으니, 공은 대변(大便)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주었으며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초상이 나자 홀로 산의 빈소(殯所)를 지키며 마음을 다해 곡벽(哭擗)14)하였으며, 자신의 몸을 흙이나 나무처럼 여기며 모두 일곱 달이 지나고 나서야 장사를 지냈다. 공이 효성과 우애에 돈독한 것은 천성적으로 그러하였는데, 질병이 찾아온 것은 실로 운명이다.부인은 평산 신씨로, 생원 명성(命晟)의 따님이다. 아들을 보면, 장남은 대령(大齡)이다. 차남은 대춘(大春)으로 칠봉공의 후사가 되었다. 큰 딸은 윤탁(尹倬)에게 시집갔다. 작은 딸은 찰방 김시서(金時瑞)에게 시집갔으니, 하서 선생의 현손이다. 대령의 아들은 적(迪), 규(逵), 섬(暹), 원(遠)이다. 대춘의 아들은 운(運), 손(遜), 수(邃), 준(遵) 구(逑)이다.오호라! 만약 공이 수를 누려 그 재주와 뜻을 채워서 마침내 성취하였다면, 다만 가학을 더욱 빛내고 세업(世業)을 드높여서 수암(遂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울러 스승의 학통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록 대인(大人)에서 현성(賢聖)에 이르는 것15)도 사람들이 기이한 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거늘, 기수가 어긋난 것이 애석하니 사람들이 더욱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공이 경전을 궁구하여 도를 본 것은 〈동정책(動靜策)〉과 〈심경찬(心經贊)〉에 나타나고, 윤리를 바르게 하고 정의(情誼)를 돈독히 한 것은 부모를 섬기고 형제자매를 사랑한 것에 있으며, 엄밀하게 자신을 살펴 사사로움을 이긴 것은 술을 미워하고 색을 멀리함에서 증험하며,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한 것은 신해년 소장(疏章)에서 따져볼 수 있다. 공처럼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고 치우치지 않게 덕을 이룬 자는 또한 매우 적으니, 어찌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것을 안타깝게 여기랴. 공자는 "꽃이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해설하는 자들이 안연을 위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 죽는다고 하여 삼천 제자 가운데 덕행을 으뜸으로 칭찬하는 것에 무슨 해로움이 되겠는가. 이에 떳떳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공의 후손인 희전(喜鈿)과 재석(在錫)이 나에게 묘갈명을 요구하였다. 마음으로 간절히 존모하여 고사할 수 없었는데, 옛날에 행장을 짓지 않았기에 이에 본집에 실려 있는 행록의 초고와 서발 등에 의거하여 글을 짓는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자손이 조상의 업을 계승하는 것은 孫承祖緖술성공16)과 비슷하며, 似述聖公나이는 짧으나 덕이 높은 것은 年短德崇안연과 같아라. 顔淵是同한미하거나 현달하거나 마찬가지이니 微顯一致같은 부류가 아닌 것을 비교함이 잘못됐지. 擬匪匪倫크게 써서 빗돌에 새기면서 大書鑱石삼가 평론을 덧붙이네. 竊附尙論 昔鄒孟氏言, "君子之澤, 五世而斬."而自幸私淑於孔子.若文敬公一齋李先生, 五世而得龜菴公諱星益字益之, 則列祖風韻之存, 賢孫繼述之盛, 豈不尢貴於先哲之異姓相傳也哉.蓋公以純粹之資, 通達之才, 刻意覃思于聖賢之學, 期以大進遠到, 而不安於小成, 乃就正于尢庵宋先生之門, 得聞性道之源.與遂菴權先生, 爲莫逆交, 麗澤相長, 於是德學高明, 聲望藹蔚.太學掌議, 儒林極選也, 而登其薦剡 ; 文谷金公, 賢相也, 而勸之仕, 是可以知公也.斯文宗匠, 朝家碩輔, 將有其日, 而天不假年, 乃以元陵壬子十二月二十五日, 遽沒於洪陽聘家, 返葬于泰仁南村面大山洞文敬公墓側壬坐原, 距其生明陵己卯正月五日年, 僅三十四.公之先, 星山人.五世以上糸, 在文敬公墓碣.直長贈戶參守一, 以文敬公次子, 爲季父別提常后, 是爲高祖.曾祖湜, 祖匪龍, 考通德郞孝閔.妣, 礪山宋氏, 大徵女, 校理世琳玄孫也.以癸卯歲, 中司馬, 弟七峯公星說聯榜, 人皆聳瞻, 無何七峯公不淑, 公以天倫至情, 重惜其奇才, 哀傷慘慟, 不覺過節, 而無意於人世.奉老寓居于廣州龍山洞先壟下, 自號龜菴, 杜門息交, 專意進修.乙酉春, 母夫人患癘, 公嘗糞割指, 祈天願代.及喪, 獨守山殯, 盡情哭擗, 視身如土木, 凡七閱月而葬, 公之篤於孝友, 天性則然, 而疾病之來, 實命也.配, 平山申氏, 生員命晟女.男, 長曰大齡.次曰大春, 爲七峯公後.女長適尹倬.次適察訪金時瑞, 河西先生玄孫.大齡男, 迪、逵、暹、遠.大春男運、遜、邃、遵、逑.嗚呼! 使公享壽充其才志, 而卒其成就, 不惟增光家學, 隆其世業, 比肩遂翁, 幷接師統, 雖大而至於賢聖, 人不是異事, 惜其氣數之差, 人猶有所憾也.雖然公之窮經見道, 著於〈動靜策〉、〈心經贊〉 ; 正倫篤誼, 在於事父母愛弟妹 ; 省克嚴密, 驗於惡酒遠色 ; 好惡公正, 質於辛亥一疏.歷觀今古, 成德不偏, 如公者, 亦絶少矣, 何憾於早世不顯也.孔子曰 : "秀而不實." 說者謂爲顔淵而發.然顧何傷於首稱德行於三千乎.是可以有辭也.公之後孫喜鈿、在錫, 徵余銘墓, 心切景慕, 不能固辭, 而舊無狀文, 乃據本集所載行錄草及序跋而敘之.銘曰 : "孫承祖緖, 似述聖公.年短德崇, 顔淵是同.微顯一致, 擬匪匪倫.大書鑱石, 竊附尙論." 맹자가……여겼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군자가 끼친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기고, 소인이 남긴 은택도 5대가 지나면 끊긴다. 내가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분의 정신을 여러 사람에게서 사숙했다.〔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이라 하였다. 학문의 도움을 주며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추천 '천섬(薦剡)'은 추천장을 가리킨다. 섬계(剡溪)는 중국의 지명인데, 그곳에서 생산된 종이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다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섬이 사람을 추천하는 문서의 대명사가 되었다. 기유년 본문에는 을유(乙酉)로 되어 있는데, 성익의 생몰 연대를 본다면 1705년 을유년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용과 맞지 않는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을(乙)이 들어가는 해는 을사년으로 1725년이며, 유(酉)가 들어가는 기유년은 1729년이다. 몰년이 1732년이라면 기유년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곡벽(哭擗) 곡을 하면서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대인에서 현성에 이르는 것 《맹자》 〈진심하(盡心下)〉에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선인이라 하고, 자기 몸에 선을 소유한 것을 신인이라 하고, 선을 충실히 보유한 것을 미인이라 하고, 충실하여 빛남이 있는 것을 대인이라 하고,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한 것을 성인이라 하고, 성인이어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신인이라 한다.〔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술성공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리킨다. 원나라 때 기국(沂國)의 술성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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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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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墓碣銘【幷序】 우리나라는 과거로 사람을 취하는데 그러나 그 사람을 신중하게 발탁하고 또 중용한다. 장차 중용하려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발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신중하게 발탁하였기에 중용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 선생이 "비록 하늘을 통할 학문이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과거를 통한 이후에야 도를 행할 지위에 나아간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보면 국조 이래의 옛 일을 알 수 있다. 황감과(黃柑科)17)의 경우는 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한 번의 과거에 단 한 사람을 발탁하였는데 반드시 지식이 넓고 학문이 정수하며 정치의 계책이 다른 많은 선비들보다 뛰어난 연후에 취하였으니, 빈례(賓禮)로 다음 과거에 올려 보내는 예우의 절차18)가 매우 성대하였다. 대체로 이는 높은 명망에 걸맞게 정밀하게 인재를 선발한 것이다. 통정대부 중추부사 운파 김공 휘 운(氵運), 자 구이(久而)는 영조 을묘년(1775)에 전사마로 황감과에 합격하여 이름이 소장의 추천에 들어갔으니, 그의 문장과 경술이 당시에 뛰어난 것을 지금 상상할 수 있다.부녕 김씨는 계보가 신라 경순왕의 태자인 휘 일(鎰)에서 나왔으며, 고려 이부상서 휘 경수(景修)가 중시조이다. 그의 아들 휘 춘(春)은 부녕부원군으로 봉해졌다. 2대가 지나 휘 작신(作辛)은 부녕군에 연이어 봉해지니,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관향으로 삼았다. 휘 구(坵)는 문장과 도학이 한 시대의 으뜸으로 보문각태학사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휘 여우(汝盂)는 문한학사로 시호는 충선이다. 원(元)에 들어가 성묘(聖廟)의 제도를 모사하여 아우인 승인(承印)에게 강릉에 서원을 만들게 하였다.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고려 말에 휘 광서(光敘)는 지고부군사를 지냈는데,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정(自靖)하였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직손(直孫)은 한림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휘 석홍(錫弘)은 군수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지금까지가 공의 7대 이상이다.증조는 휘가 희수(希壽)로 선무랑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가 진창(震昌)이며, 부친의 휘는 세재(世載)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로 진사 석하(錫夏)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계유년(1693) 3월 9일 부안 월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절륜한 재주를 지녀 능히 문장을 엮고 시를 지었으니, 당시에 신동이라 일컬어졌다. 장성하게 되자 스스로 경전을 가져다 읽으며 널리 배우고 밝게 분별하였다. 종숙(從叔) 양덕공이 벼슬을 하라고 권하였지만 따르지 않고 한묵(翰墨) 사이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입을 열면 수천 마디의 말을 외웠고 붓을 들면 수만 마디의 말을 지었으니, 경향(京鄕)에서 모두 문원(文苑)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평양에서 유람할 때 지은 〈초운사(楚雲詞)〉는 노랫가락에 들어가서 지금도 전하고 있다. 공은 문장이 덕행과 경학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연마해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닫고서 오직 경(敬)을 유지하고 성(性)을 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한 시대의 명유들과 즐겨 사귀며 학문을 강마하여 갈고 닦아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하였으며 식견이 명확하여 사람들의 생각 너머까지 간파하였다.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 공과 건암(健菴) 김양택(金陽澤) 공은 항상 추켜올려 칭송하며 자신들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리로 문답을 계속하였지만 그러나 벼슬아치들의 문에 급급하지 않은 채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뜻이 있었다. 화순(和順)한 자태는 덕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고 등에 가득하며 정대한 기운은 마음에 근본을 두고 말로 드러나니,19) 대개 그가 확충하여 양성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그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실로 제공들이 그와 함께 무리지어 나아가려고 하여 깊이 권하였기 때문이다.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경신년(1740)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에 이르러 그 슬픔이 극에 이르렀다. 널리 제가의 상례에 대해 논한 학설을 구하여 정선하고서 손수 베껴 《상례편람》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집안에 전하고 있다. 계해년(1743)에 상국 정우량(鄭羽良)과 상국 송인명(宋寅明)이 추천하여 동부주부로 승진하였으며 이조, 예조, 호조, 공조의 좌랑으로 옮겼다가 호조, 공조,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칠원, 연천, 지평, 대흥의 수령으로 나갔다.일찍이 "선비가 나아가 벼슬하는 것은 도를 위함이지 먹기 위함이 아니며, 임금을 위함이지 자신을 위함이 아니며, 나라를 위함이지 집안을 위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염치, 어짊, 공정함, 부지런함[廉仁公勤]' 네 글자를 좌우에 써서 걸어놓고 일에 임하여 공평하게 중심을 잡았다. 위로 대신(大臣)의 추향(趨向)을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았으며, 아래로 아전의 뜬소문에 미혹되어 그 마음을 흔들리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스림이 치우치지 않아 일은 실제 이치에 부합하였으며, 아전이 간사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서 백성들이 실제 혜택을 받았으니, 다스림과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 대개 관직에 있은 이후로 재물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은 것은 본성이 원래 맑고 검소하였으며 또한 가법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을해년(1755)에 조정에 들어와 사헌부 장령, 집의와 이조와 예조의 정랑이 되었다. 명석하고 영민하며 너그럽고 중후하여 동료들에게 성실하게 대하니, 묘당에서 서로 추천하여 장차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소장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대신에게 요청하여 주연에서 7대조 옹천공의 일을 아뢰어 달라고 하여 이조참의에 추증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미년(1763)에 임금이 특별히 통정대부 중추부사의 직함을 더하여 주었다. 경인년(1770) 11월 30일에 돌아가셔서 월천면 서쪽 산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아내 숙부인 덕수 이씨는 선비 성(田成)의 따님으로, 동악 안눌(安訥)의 후손이다. 묘는 합부(合祔)하였다. 외아들 설(楔)은 진사이며, 딸은 전주 최파에게 시집갔다. 설의 아들 대회(大灰)는 문장으로 세상이 이름이 났다. 재회(再恢), 익회(益恢), 규회(奎恢), 제회(濟恢)는 모두 글을 잘 짓고 순수하며 조심스럽다. 파의 아들 희연(禧延)은 문과에 합격하여 지평을 지냈으며, 갑연(甲延)은 진사이다. 규회의 아들 봉효(鳳孝)는 진사인데, 또한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오호라! 공은 경학을 단련하였고 문장이 넉넉하였으며 정치는 민첩하여 통달하였으니 나라의 재상에 오를 것으로 중망(衆望)을 받았는데, 소장을 올려 병을 고하면서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이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남긴 글이 상자에 가득하여 은택을 베푼 도리와 치국평천하의 방법이 모두 이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가난한데다가 여러 차례 화재20)를 겪어서 잔편(殘編)으로 빠졌던 글들이 겨우 남아 별로 없으니 거듭 안타까운 일이다. 7대손 응봉(應鳳)이 이에 매우 애통해하며 좀먹고 타버린 나머지에서 수습하여 비로소 이백 년 뒤에 가장(家狀)을 완성하니, 아! 대단히 소략하도다.이 가장으로 나에게 비석으로 드러내 새길 글을 요청하였는데, 보잘 것 없는 내가 못나서 공의 바다와 같은 학문을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감히 공의 돌아가신 뒤의 큰일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간신히 가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금석에 새기지 않는다면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손실되는 것이 더욱 많을까 두렵다. 그러므로 걱정을 함께 나누는 한 가문의 정의(情誼)로 보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선비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士之出仕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하기 때문이지 爲國爲君녹봉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非爲祿食공은 한 마디로 말하였네 公之一言이치는 밝고 의리는 올바르니 理明義正하늘의 해나 달과 같도다 日月于天충분히 후대에 전할 만하여 自足傳後천만년 이어가리니 於千萬年공이 행한 다른 모든 업적을 凡厥事行어찌 묘갈로 드러낼 필요 있으랴 何待銘阡 我國以科擧取人, 然惟其人, 愼擢而又重用焉.將重用也, 故不得不愼擢 ; 旣愼擢矣, 不可不重用.栗谷先生曰 : "雖有通天之學, 絶人之行, 必由科擧而後進於行道之位." 觀此, 國朝以來之故事, 可知矣.至若黃柑之科, 則尢加愼焉.一番場圍, 只擢一人, 而必其識博學精, 政術治策, 獨冠多士, 然後取之, 賓興禮待之節, 甚盛, 蓋極選隆望也.通政大夫中樞府事雲坡金公諱[氵運]字久而, 英廟乙卯, 以前司馬登柑科, 名八章薦, 其文章經術, 卓冠當時, 今可想矣.扶寧金氏, 糸出新羅敬順王太子諱鎰, 高麗吏部尙書諱景修, 爲中祖.子諱春, 封扶寧府院君.再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子孫因以爲貫.有諱坵, 文章道學冠一世, 寶文閣太學士中書侍郞平章事, 謚文貞, 祠道東.諱汝盂, 文翰學士, 謚忠宣, 入元摹聖廟制度, 使弟承印創設於江陵, 享道東祠.麗末諱光敘, 知古阜郡事, 志懷罔僕, 歸鄕獻靖.入本朝, 諱直孫, 翰林贈都承旨.諱錫弘, 郡守贈吏曹參議, 是爲己卯名賢, 享道東祠.公七世以上也.曾祖諱希壽宣務郞, 祖諱震昌, 考諱世載, 妣, 南陽洪氏進士錫夏女.公以肅廟癸酉三月九日, 生于扶安月川里第.自幼有絶倫奇才, 能屬文著詩, 時稱神童.及長, 自取經傳, 博學明辨.從叔陽德公, 勸求仕不從, 自適於翰墨間.開口誦數千言 ; 下筆著數萬語, 京鄕俱稱文苑碩匠.遊平壤時, 有〈楚雲詞〉, 登於絃歌, 至今傳之.公悟文章無益於德行經學, 不可以修道, 惟以持敬養性爲本.樂交一時名儒, 講磨切磋, 析分毫釐, 識見明確, 出人意表.雷淵南公有容、健菴金公陽澤, 每推詡以爲不及.性理問答相續, 然而不汲汲於搢紳之門, 超然有脫俗之意, 和順之熊, 睟面盎背 ; 正大之氣, 根心發言, 蓋其充養者如此, 應擧登科, 實因諸公欲其彙征而深勸之也.拜成均館典籍, 庚申, 丁內憂遞歸.以早孤爲恨, 至是極其哀毁, 廣求諸家喪禮集說, 精選手抄, 名曰《喪禮便覽》, 傳于家.癸亥鄭相國羽良、宋相國寅明, 薦陞東部主簿, 轉吏、禮、戶、工四曹佐郞, 戶、工、刑三曹正郞, 出宰漆原、漣川、砥平、大興.常曰 : "士之出仕, 爲道非爲食 ; 爲君非爲己 ; 爲國非爲家也." 以廉仁公勤四字, 揭銘左右, 臨事公平中立.上不慕大僚之趨向而輕重其手 ; 下不惑吏胥之浮言而二三其心, 由是政體不偏, 而事合實理 ; 吏莫售奸, 而民蒙實惠, 治化大行.秩滿而歸, 民如失父母, 立碑頌德.蓋自居官以來, 不以貨帛自私者, 性固淸儉, 而亦家法然也.乙亥, 入拜司憲府掌令、執義、吏禮正郞, 明敏寬重, 克允同僚, 廟堂交口相薦, 將有碩輔之望.居無何有疾, 上章致事, 請于大臣, 得筵奏七世祖甕泉公事, 行贈吏曹參議而歸.癸未, 自上特加通政大夫中樞府事, 卒于庚寅十一月三十日, 葬于月川西麓壬坐原.配, 淑夫人德水李氏, 士人[田+成]女, 東岳安訥孫, 墓合窆.一男楔進士, 女適全州崔[山+怕].楔男大恢, 以文聞世.再恢、益恢、奎恢、濟恢, 皆能文醇謹.[山+怕]男禧延文科持平, 甲延進士.奎恢男鳳孝進士, 亦以文聞.嗚呼! 公經學鍛鍊, 文章贍給, 政術敏達, 國之碩輔, 輿望所存, 而上章告疾, 遽爾致事, 是可恨也.然遺文盈箱, 致澤之道, 治平之具, 俱在於此, 而後承貧窶, 累經鬱攸, 殘編齾墨, 僅存無幾, 重可恨也.七世孫應鳳, 深痛乎斯, 收拾於蠹燼之餘, 始成家狀於二百年後, 噫! 其疎畧矣.以是狀求余顯刻之文, 余之無狀, 無以測公淵海之學, 豈敢病公身後大事.特念僅僅成狀者, 今不刻之金石, 恐逾遠而愈失, 故在一室同憂之誼, 有不敢辭者.銘曰 : "士之出仕, 爲國爲君.非爲祿食, 公之一言.理明義正, 日月于天.自足傳後, 於千萬年.凡厥事行, 何待銘阡." 황감과(黃柑科) 조선시대 관학(館學, 성균관과 四學) 유생의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그들만을 응시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1564년(명종 19) 처음 시행된 것으로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되어올 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에 관학유생들을 모아놓고 감귤을 나누어준 뒤 시제(試題)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이 때 시험과목은 시(詩)·부(賦)·표(表)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였으며, 시험시간은 매우 짧았고, 합격자 역시 당일에 결정되었다. 합격자수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1인을, 영조 이후에는 대체로 2인을 뽑아 직부전시(直赴殿試) 혹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였다. 빈례로……절차 빈흥(賓興)은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주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에서 현능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여, 향시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례》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정시(庭試) 아래 단계인 황감을 의미한다. 화순한……드러나니 '수면앙매(睟面盎背)'는 윤기가 도는 얼굴과 밝은 기가 넘치는 등의 모습을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마음속에 뿌리하여, 그 얼굴빛에 나타남이 수연히 얼굴에 나타나며, 등에 가득하며 사체에 베풀어져서 사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하여진다.[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其生色也睟然, 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라고 하였으니, 수양을 통하여 화평하고 밝은 기운이 겉으로 드러남을 형용하는 말이다. 화재 울유(鬱攸)는 화재를 맡은 신의 이름으로, 화기(火氣), 즉 화마(火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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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에 추증된 임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林公墓碣銘【幷序】 부풍(扶風, 부안)은 옛날부터 문사가 많기로 나라 안에 알려졌는데, 조선 건릉(健陵, 정조)가 우문 정책을 펼친 이후로 더욱 빛이 났다. 평택 임씨 가운데 부풍 남쪽 진동21)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능히 학문을 쌓고 행실을 가다듬어 널리 명성을 드러내었다. 학사의 경적(經籍), 식량과 땔감과 기름 등 공부하는 일체의 도구를 다 갖추어놓고서 자제들을 권장하였으며, 겸하여 사방의 선비들에게 도움을 주어 해마다 항상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학문에 전념케 하였으니, 학문이 뛰어나 조정에 현달한 자가 또한 그 가운데서 나오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문향(文鄕)이라는 이름을 드날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처음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가선대부 한상부좌윤에 추증된 오위도총부 부총관 휘 도석(道晳) 자 자백(子白)에게서 나왔으니, 그 공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공의 시조는 당나라 학사 충절공 팔급(八及)이며 고려 시중 충정공 언수(彦修)가 중시조이다. 6대조는 조선의 직제학 맹의(孟義)의 연산군의 재앙을 만나 옥구로 숨어들어왔으며, 아들 만희(萬熙)가 부풍으로 이주하였다. 3대가 지나 득춘(得春)은 병자호란 때 나랏일로 죽음을 당하여 군자감정에 추증되었으니, 이 분이 조부이다. 부친은 여(汝)이며, 모친은 문과에 합격하여 판결사에 추증된 평산 신씨 백서(百瑞)의 따님으로, 공은 효종 신묘년(1651)에 태어나 숙종 을묘년(1675)에 돌아가셔서 시어산22) 서쪽 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여양 진씨로, 군자감정 극성(克誠)의 따님이다. 묘는 같은 언덕에 봉분은 따로 썼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유곤(有崑)으로 행실이 바르고 점잖았다. 둘째가 유준(有峻)으로 수를 누려 동중추가 되었다. 셋째는 유우(有嵎)이며, 넷째는 유헌(有巘)이다. 막내는 유륜(有崙)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다섯 아들에게서 난 자손은 지금 4백여 명이나 된다.대개 공의 어버이 섬김은 대단히 효성스럽고 자신을 의로서 바로잡았으며 벗을 사귐에는 공손하면서 신의가 있었고 아래 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선조를 정성으로 받들어 제사를 영원히 지내는 근본을 세웠고 집안을 예로 다스려 자손들에게 아름답고 넉넉한 계책을 남긴 것은 행장의 글과 같으니 참으로 선을 쌓으면 자손에게 경사가 생기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들으니 옛 사람의 말에 "천 사람의 눈을 열어준 자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학사를 세운 한 가지 일은 이미 중대한 일과 관계가 있으며 또한 대중과 공적으로 함께 나눈 것은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니, 하늘이 후진을 열어준 덕에 보답하여 이처럼 후손을 창대하게 한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7대손 양호, 명록, 백록 8대손 낙중 등이 나에게 이르기를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공의 일을 잘 알 것이다."라고 하여 묘지의 비명(碑銘)을 요구하니, 그 요구가 글을 잘해서가 아니기에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명을 짓는다.희문의 뜻이며23) 希文之志공택의 일이로다.24) 公擇之事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曠千百年누가 공과 같으랴. 疇若公焉이산은 울창하고 梨山蒼蒼봉해는 아득하여라. 蓬海茫茫풍치는 오히려 멀리 가니 風韻猶長어찌 그를 잊을 수 있으리오. 其何能忘 扶風, 自古以多文士, 稱於國中, 而逮夫有韓健陵右文以後, 益彬彬.平澤林氏之居治南眞洞者, 能績學礪行, 以著聞望, 有齋黌經籍, 糧饋柴油, 一應攻業之具, 無不畢備, 旣以獎勸子弟, 兼資四方之士, 歲常藏修以致學, 優而顯於朝者, 亦出其中, 而與有助於文鄕之擅名.其初設置規模, 出於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五衛都摠府副摠管諱道晳字子白, 厥功, 詎不偉哉.公以唐學士忠節公八及爲鼻祖, 麗侍中忠貞公彦修爲中祖.六世祖, 本朝直提學孟義, 遭燕山禍, 遯沃溝.子萬熙轉徙于扶.三世而至得春, 丙子亂死王事, 贈軍資監正, 是爲祖考.考汝, 妃, 贈判決事妣平山申氏文科百瑞女, 生以孝宗辛卯, 卒以肅宗乙亥, 葬于侍御山西麓子坐原.配, 贈貞夫人驪陽陳氏, 軍資監正克誠女.墓同原各兆.有五男, 長有崑, 有行誼.次有峻, 壽同中樞.次有嵎、次有巘.次有崙, 以孝載《三綱錄》.五房之孫, 今爲四百餘人.蓋公之事親克孝, 正己以義, 交友敬而信, 御下寬而嚴.奉先以誠而立享祀永遠之本 ; 治家以禮而貽子孫嘉裕之謨者, 有如狀文, 而固有積善餘慶之理.抑又嘗聞古人之言曰 : "開千人眼者, 必有後." 惟公興學一款, 旣繫大事, 而又與衆公共者, 尢爲難能, 天所以報開牖後進之德者, 宜昌後之若是也.七世孫讓鎬、命錄、百錄、八世孫洛中謂余, "居近而聆公之事." 俾銘于墓.其求也, 不以文, 無可辭.乃爲之銘曰 : "希文之志, 公擇之事.曠千百年, 疇若公焉.梨山蒼蒼, 蓬海茫茫.風韻猶長, 其何能忘." 진동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 시어산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와 부안읍 경계에 있는 산. 희문의 뜻이며 희문(希文)은 송대 범중엄(范仲淹)의 자이다. 인종 때 재상 안수(晏殊)는 각 주(州)와 현(縣)에 학교를 세우면서 범중엄을 그 책임자로 선발하였다. 공택의 일이로다 공택(公擇)은 송대 이상(李常)의 자이다. 어려서 여산(廬山) 백석승사(白石僧舍)에서 글을 읽었고, 과거에 급제한 후로는 소장했던 장서(藏書) 1만여 권을 보관하여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이름을 짓고 그 책을 많은 학자들과 함께 보았다. 《송사(宋史)》 권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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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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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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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황공 묘갈명【서문을 함께 싣다】 龜巖黃公墓碣銘【幷序】 국조의 유현 가운데 성리에 대해 말을 잘하고 은미한 것을 밝혀 드러낸 분으로 율곡 이외에 농암 김 선생이 그에 해당한다. 그 문하에서 공부한 자로 구암 선생 평해 황공이 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리(理)에는 악이 있지 않다. 기(氣)를 탈 때 리가 들쭉날쭉하여 나란하지 않으니, 과와 불급을 리의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하에 어찌 리(理)밖의 사물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강후 호안국(胡安國)은 성(性)에 대해 선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25)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미 어긋났으니 그 사람도 또한 어긋난 것을 알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이것으로 스승26)에게 질문하여도 반드시 큰 차이27)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만일 공이 병과 가난에 얽매이지 않고 오랫동안 종유하며 깊이 강마하였다면 높고 드넓은 학문의 경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서로 얻은 것이 더욱 성대했을 것이니, 어찌 다만 '학문을 강마하고 덕을 떨친 것을 그대가 얻었다.'고 칭송한 것만 같았으랴.공의 휘는 재중(載重), 자는 원숙(元叔)이다. 먼 조상으로 고려 평해군 숙경(淑卿)이 있으며, 계속해서 벼슬아치들이 나왔다. 이후(以厚), 종혁(宗爀), 세기(世基)가 바로 위 삼대로, 세상에 높은 행실로 이름이 났다. 모친은 경주 김씨이다. 현종 갑진년(1664)에 공은 태어났다. 시와 예를 배울 때 훌륭한 자질을 받았기에 참으로 남다름이 있었는데, 뜻을 세우고 몸을 검속할 때 전적으로 실질을 숭상하였다. 젊었을 때 과거에 합격한 뒤에 학문을 다스리면 이름이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듣고서 귀를 더럽힌 듯하였으니 이미 근본을 갖추었다. 학문을 할 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진행하여 경(敬)으로 그 바탕을 삼았는데, 심성을 함양하고 학문에 나아가는 이천의 가르침28)을 목표로 삼았으며, 네 글자29)를 나눠 써서 각각 잠(箴)을 지었으니 이것에 치중하다가 저것에 소홀하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안팎의 동정(動靜)을 모두 평정하고 적확하여 이치를 따르는 것에 귀결되기를 힘썼으며, 또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분발하여 스스로 게으르지 않고 노력하였다.집안에서의 행실을 말하자면, 모친을 효성으로 섬겼으며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조의 제사에 좋은 제수를 써서30) 정성을 다하였다. 사당을 보면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 큰 형을 엄한 부친처럼 모셨으며, 아내를 공경하게 대하고 자식을 의리로 가르쳐서 가정이 엄숙하였다. 어사가 행의(行誼)로 천거하여 침릉에 의망(擬望)된 것이 두 번이다. 몸을 다스림에 대해 말한다면, 해뜨기 전에 일어나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높은 관과 넓은 띠로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모습은 장엄하고 말은 엄하였으니, 바라보면 위엄이 있었지만 마주하면 온화하였다. 자신의 수양에 대해 말하자면, 일찍이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보러 갔었는데,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이익과 욕심이 모두 모인 곳이니 다시 올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부친이 옛날 은거하던 곳에 집을 지었다. 거북을 닮은 바위를 취하여 자호(自號)하고서 은둔하려는 뜻31)을 부쳤다. 살림살이가 휑하여도 여유롭게 거처하였다. 금천 나중기(羅重器) 등 여러 공들과 강호의 사귐을 맺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리면서 삶을 즐겼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정성을 다해 부드럽게 타일러 가르쳐서 스스로 그만두지 않게 하였다. 가르치는 조목은 자신이 배운 것으로 베풀었으니, 항상 선을 밝히고 자신을 성실하게 하여 밤낮으로 항상 깨어있으라고 권면하였다. 세상을 경영하는 식견에 대해서는 타인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매번 나라에 근심스런 일이 생기면 재야에 있다고 하여 무심하지 않았다. 숙종 경인년(1710)에 순무사가 백성을 잘못 위무(慰撫)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연병책(練兵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평소 제갈량과 중봉 조헌을 존모하였는데, 꿈속에서 나타나 시문을 지을 정도이니, 이러한 가운데서 은연중에 그의 경세술을 대략 볼 수 있다.삼가 일찍이 논하건대, 공은 옛날 이른바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는 자이다. 그가 기록한 것은 모두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요, 구이(口耳)의 학문32)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앞에서 거론했던 핵심[源頭]의 논의가 바로 그 한 가지 예이다. 대개 공은 송암 기정익(奇挻翼) 공에게서 학문을 시작하였고 우암을 사숙하였으며 마침내는 농암의 문하에서 학문을 바로잡았으니,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고 하지만 시작한 연원은 속일 수가 없다.오호라! 공은 이미 곤궁하여 하나도 세상에 펼쳐보지 못하였는데 게다가 수명(壽命)도 마흔다섯 살에 그쳤다. 고부군 남도리소 오좌(午坐)이 언덕이 공의 묘소이다. 부인은 진천 송씨로 아들 증현(增賢)을 낳았는데, 증현은 문장이 뛰었지만 20살에 공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딸은 나정태(羅廷泰)에게 시집갔지만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다. 그 밑은 비녀를 올릴 때 쯤 요절하였다. 계비(繼妃) 이씨는 아들 균(均)을 낳았는데, 균도 열 살에 요절하였다. 안팎의 혈육이 이에 모두 사라졌다. 보답함이 어긋나니 하늘은 어찌하여 그러한가. 그러나 공이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존귀하였고 명성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살아서 즐거웠으며 제자들이 이르렀고 죽어서 존모를 받아 사원에 배향되었다. 사원이 비록 훼철되었지만33) 장형(長兄)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공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지내면서 은혜를 받은 것처럼 똑같이 여기니, 이것은 공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지금 종9세손 서구가 또 비석에 드러내 새길 글에 홀로 담당하니34) 세상에 더욱 보기 드문 경우이다. 행장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지만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이니, 공을 위해 허드렛일35)이라도 하길 간절히 원하기에 삼가 행장을 살펴서 글을 서술하면서 계보를 논하여 명을 짓는다.옛날 선각자를 보건대 相古先覺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는데, 爲己而學지금의 선비들은 今之冠紳그 학문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네. 其學爲人자신을 위하면 참되어 爲己則眞이치를 궁구하며 몸을 닦고, 窮理修身남에게 보이기 위함이면 거짓되어 爲人則僞명성을 요구하지만 의리는 잃어버린다네. 要名喪義도도한 말세의 세속은 滔滔末俗저 돌이요 옥이 아니며,36) 伊石匪玊가파른 구암은 巖巖龜巖평범한 가운데 우뚝 솟았어라. 卓出陋凡저 따위 밖에서 이른 것은 彼哉外至내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匪我聽視전일하다 그 정성이여 斷斷其誠부지런하다 그 과정이여. 孶孶其程오직 옳은 것만 추구하니 惟是是求신명과 짝이 되도다. 神明與儔세상의 눈이 지혜롭지 못하니 世眼不慧누가 실제를 알리오. 誰識實際어두운 가운데서도 드러나니 而闇然章밝지 아니한가 그 빛이여. 不顯其光낙척하다가 말하지 말라 罔曰落拓공은 하늘의 벼슬37)을 누렸어라. 公有天爵후손이 다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罔曰嗣替공의 제사는 영원히 지내리니. 公祀永世묘소 아래에 크게 써서 大書墓下몽매한 자들에게 밝게 고하노라. 明告昧者 國朝儒賢, 善言性理, 發微闡幽者, 栗翁以外, 農巖金先生, 其人也.遊其門者, 有龜巖先生平海黃公.其言有曰 : "理非有惡, 及其乘氣, 參差不一, 以過不及, 謂非理本然可, 謂之非理, 則天下豈有理外物哉." 又曰 : "胡康侯謂'性不可以善言.' 頭腦旣差, 知人亦差.竊以爲以是質之皐比, 必不逕庭." 如使不困以病窮, 久從而熟講焉, 則其高廣著顯, 相得益章, 豈但如講磨振德得之足下之獎己哉.公諱載重, 字元叔.遠祖, 高麗平海君淑卿, 繼有簪纓.曰以厚、曰宗爀、世基, 其三世, 世著高行.妣, 慶州金氏. 顯宗甲辰, 公之生也.承詩禮, 禀美質, 固自有異, 而立志撿身, 專在實地.少日, 人有勸以決科治學名益顯者, 則聽之若浼, 旣本之則有.其爲學也, 知行幷進, 敬以貫之, 準的乎伊川涵養進學之訓, 分書四字而各有箴, 恐其偏重於此而致疎於彼也.故凡內外動靜, 務皆平正的確, 歸於循理, 而又警惕策勵, 自强靡懈.以言乎內行, 則事母以孝, 喪而廬墓.先祀獻賢克誠.望祠堂雖遠必下馬.事長公如嚴父, 對妻敬訓子義, 閨庭肅肅, 御史擧行誼, 薦之擬寢陵者再.以言乎律身, 則未明而起, 盥濯潔淨, 高冠博帶, 端坐終日, 貌莊而言厲, 望儼而卽溫.以言乎自修, 則嘗以親命一赴擧, 退而曰 : "利欲都會, 不可再至." 遂築室先公舊遯, 取巖有肖龜者自號, 寓藏六之意.生計蕭然, 處之裕如.與羅金川重器諸公, 爲江湖交, 觴咏而樂.以言乎敎人, 則諄諄懇懇, 使自不已.其科條, 則以所學者施之, 常以明善誠身日夕惺惺勉之.至於經世之蘊, 則非人所測然, 每國有可憂, 不以草莽而恝然.肅宗庚寅見巡撫使撫馭失方, 至有私議鍊兵策.雅慕武侯重峰, 發夢寐而著詩章, 其中亦隱約可見矣.窃嘗論之, 公, 古所謂爲己之學者.其所記箚, 皆由心得, 非出口耳, 向所擧源頭之論, 其一也.蓋公發端於松巖奇公, 私淑乎尢翁, 終焉就正農門, 雖其學成之自力, 淵源所自, 不可誣也.嗚呼! 公旣窮不一試, 又壽止中身有五, 古阜郡南桃李所午原, 其藏也.配, 鎭川宋氏, 生子增賢, 有文, 年二十, 先公夭.女適羅廷泰, 早歿無育.次將笄而夭.繼配李氏生均, 亦十歲而夭.內外血遺, 于是盡矣.報施之錯, 天曷故焉.雖然公之所存, 自足尊貴, 聲望孚人, 生而悅而及門 ; 沒而慕而祭祠, 祠雖禁撤, 長公子姓, 寔繁有昌, 斧堂護享, 一視所蒙, 是可以有辭矣.今從九世孫瑞九, 又獨賢於顯刻之役, 尢罕覯也.示以行狀, 屬余以銘之.余匪其人, 亦志學而未成者, 追切執鞭之願, 謹按狀而叙, 論系以銘曰 : "相古先覺, 爲己而學.今之冠紳, 其學爲人.爲己則眞, 窮理修身.爲人則僞, 要名喪義.滔滔末俗, 伊石匪玊.巖巖龜巖, 卓出陋凡.彼哉外至, 匪我聽視.斷斷其誠, 孶孶其程.惟是是求, 神明與儔.世眼不慧, 誰識實際.而闇然章, 不顯其光.罔曰落拓, 公有天爵.罔曰嗣替, 公祀永世.大書墓下, 明告昧者." 강후……하였는데 호안국은 《지언(知言)》에서 "성은 선악으로 말할 수 없다."라 하였는데, 이 말은 고자(告子)의 견해와 같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 《대산집(大山集)·답김도언(答金道彦)》 스승 고비(皐比)는 호랑이 가죽을 이르는데, 북송(北宋)의 학자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을 강론하였으므로, 스승이 강학(講學)하는 자리를 이르게 되었다. 큰 차이 '경정(逕庭)'의 경(逕)은 문밖의 길이요, 정(庭)은 방 아래의 뜰로서 그 거리가 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너무나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상식에 가깝지 않다.[大有逕庭, 不近人情.]"라고 하였다. 심성을……가르침 이천이 "함양에는 모름지기 경으로써 해야 하고 배움을 진전시키는 것은 치지에 달려 있다.〔涵養須用敬 進學在致知〕"라고 하였다. 네 글자 이 글에서는 적시하지 않았는데, 내용상으로 보면 지(知), 행(行), 경(敬), 관(貫)으로 보인다. 좋은 제수를 써서 '헌현(獻賢)'은 좋은 제수를 쓴다는 말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8 〈한여석에게 답함〔答韓汝碩〕〉에서 "고례(古禮)에 '헌현(獻賢)'이란 문구가 있다. 대체로 지자(支子)에게 두 희생(犧牲)이 있을 경우에 그중 좋은 희생을 종자(宗子)에게 드려서 제수(祭需)에 쓰도록 하는 것인데 정자(程子)께서 말한 '물질로써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희생을 드려서 돕는다면 그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은둔하려는 뜻 장육(藏六)은 귀장륙(龜藏六)의 준말로, 거북이가 위험한 상황을 만나면 머리, 꼬리, 네 발 등 여섯 곳을 두꺼운 갑각(甲殼) 안에 감추는 것처럼, 수행자도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잘 단속해야 한다는 불교의 교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雜阿含經 卷43》 구이의 학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사원이 비록 훼철되었지만 고창의 구동서원(龜東書院)은 평해 황씨 사우로, 황이후, 황세기, 황재중, 황윤석, 황수경 등을 제향 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8년에 중건되었다. 홀로 담당하니 '독현(獨賢)'은 원래 혼자서 나랏일을 위해 고생하며 동분서주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너른 하늘 아래 어떤 곳도 왕의 땅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땅 물가의 사람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는데, 대부들을 공평하게 쓰지 않고서, 나만 부려먹으며 홀로 어질다 하는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비석 만드는 일을 홀로 맡았다는 의미로 쓰였다. 허드렛일 '집편(執鞭)'은 말채찍을 잡는 하찮은 일을 가리킨다. 《논어》 〈술이(述而)〉에 "부가 만약 인위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내가 또한 하겠다마는, 만약 인위적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종사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는 공자의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황공을 위해 비명을 짓겠다는 말이다. 도도한……아니며 《포박자》에서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보옥과 막돌이 뒤섞였다. 그래서 이 점을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벼슬 '천작(天爵)'은 사람이 주는 작위(爵位)라는 뜻의 인작(人爵)과 상대되는 말로, 아름다운 덕행과 같은 천연(天然)의 작위라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의충신과 선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천작이요, 공경대부 같은 종류는 인작일 뿐이다.〔仁義忠信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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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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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보내주신 편지를 가을에 받아보았는데, 심과 성의 선함을 따로 논한다면 손님과 주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맹자》의 '풍년 든 해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게으르다.[富歲子弟多賴]'는 장10)을 근거로 보면, 본지(本旨)는 성선(性善)을 주로 논하고 그것을 심선(心善)으로 증명하고자 한 것인데, 거기에서 '심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성선(性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 수 있을까요. 즉 제3절의《맹자집주》에 나오는 "사람의 성(性)이 선한 것은 성인과 같다."11)는 한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맹자》 〈고자편(告子篇)〉의 '기류단수(杞柳湍水)'로부터 이 장(章)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선(性善)을 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장에서 논하지 않고, 심과 성의 선함을 따로 떼어 논한다면 참으로 손님과 주인으로 나누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또 이 장에서 성선(性善)을 위주로 논한 것을 근거로 마음이 선하다 하여 후대에 끼친 맹자의 큰 공효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 또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일찍이 공자의 초상화를 보니, 그 원본은 대부분 서로 달랐습니다. 이것이 진짜이면 저것은 반드시 진짜가 아니고 저것이 진짜면 이것은 반드시 진짜가 아닌데도, 모두 똑같이 공경을 표하고 있으니 아마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려서 취사선택하려 한다면, 2천 년 전 성인의 모습을 무엇을 근거로 알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초상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순과 기자로부터 안자, 증자, 자사, 맹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아있는 초상화가 있지만, 그 그림이 하나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하고 질박한 상고(上古) 시대에는 이처럼 꾸며서 그린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ㆍ은ㆍ주 이전의 경전(經傳)과 사책(史策)에서도 일찍이 후세의 화상찬(畵像賛)ㆍ사조명(寫照銘)과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령 참 모습을 그리는 풍속이 옛날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 화가마다 취향이 같지 않고 장단점이 또한 달라 묘사할 것을 묘사하지 않거나 묘사하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후대에 그림에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발생하여 이미 참 모습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켜 보호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영(眞影)을 그리는 풍속이 우리나라에서도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퇴계(이황), 율곡(이이), 사계(김장생), 우암(송시열)과 기타 제현들의 초상이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며 전해지기도 하고 유실되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순 이하의 여러 성현들은 화가의 취향이나 장단점에 따라 다르게 그린 초상이 한 점도 없고 아울러 후대에 초상에 사고도 나지 않고서 수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그 초상을 보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상고 성현의 초상은 대부분이 후대의 호사가의 손에서 나왔으며 당시의 진짜 초상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만약에 참 모습의 초상이 아닌데 공경을 표한다면 성현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秋聞下誨, 各論心性之善, 不須分賓主, 謹聞命矣.但據《孟子》富歲子弟多賴章, 本旨是主論性善, 而證之以心善.其言心善者, 乃所以明性善也.何以知其然也? 觀於第三節《集註》"人性之善, 與聖人同一"句, 已可知矣.又以《孟子》此篇自杞柳湍水以至此章, 皆主言性善故也.若不就論於此章, 而各論心性之善, 則固當不分賓主矣.若又必以此章之主性善, 禁不言孟子心善大功, 則大不然矣.嘗見孔聖畵像, 其本多各異.此眞則必彼非, 彼眞則必此非, 而均爲致敬, 恐爲未安.欲揀別取舍, 則二千年前聖人狀貌, 何從而知之? 非惟孔聖之像爲然, 自堯舜箕子, 以及顏曾思孟, 皆有遺像, 而亦各非一本.蓋上古淳質之時, 未必其有此等彌飾之事, 且於三代前經傳史策, 未見有如後世畵像賛寫照銘之類矣.借令寫眞之俗, 從古有之, 或人之趣味不同, 修短亦異, 可寫而不寫, 欲寫而未暇者有之, 或事故莫測, 已寫而未克保守者有之.故摹影之俗, 在我東不爲不盛, 而如退栗沙尤其他諸賢之肖像, 或有或無, 或傳或佚, 夫何堯舜以下諸聖賢, 一無趣味修短之不同, 幷無後世之事故, 而保其遺像於數千載之久乎? 故妄意以爲上古聖賢之像, 多出於後世好事者之手, 而非當日之眞像也.如果致敬於非眞之像, 則不幾乎慢聖賢之歸乎? 《맹자(孟子)》……장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 7장을 말한다. 맹자는 "풍년에는 자제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모맥을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발연히 싹이 나와서 일지의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이 않음이 있지만 이것은 땅에 비옥함과 척박함의 차이가 있으며, 우로의 배양과 사람이 경작하는 일에 똑같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사람에 이르러서만 의심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 그러므로 용자는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내가 그 삼태기를 만들지 않을 줄은 안다고 하였으니, 신이 서로 비슷함은 천하의 발이 같기 때문이다. 입이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으니, 역아는 먼저 우리 입이 즐기는 것을 안 자이다. 가령 입이 맛에 있어서 그 성이 남과 다름이 마치 개와 말이 우리와 동류가 아닌 것처럼 다르다면, 천하가 어찌 맛을 즐기기를 모두 역아가 조리한 맛을 따르듯이 하겠는가? 맛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역아가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입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귀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소리에 있어서는 천하가 사광이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귀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눈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자도에 있어서 천하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자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 성인은 우리 마음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리와 의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이 우리 입에 좋은 것과 같다.〔孟子曰,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 與我同類者. 故龍子曰, '不知足而爲屨, 我知其不爲簣也.' 屨之相似, 天下之足同也. 口之於味, 有同耆也, 易牙先得我口之所耆者也. 如使口之於味也, 其性與人殊,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 則天下何耆皆從易牙之於味也. 至於味, 天下期於易牙, 是天下之口相似也. 惟耳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是天下之耳相似也. 惟目亦然. 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 不知子都之姣者, 無目者也.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 했다. 사람의……같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의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聖人, 與我同類者.〕"에 대해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성인 또한 사람이니, 그 성의 선함이 같지 않음이 없다.〔聖人亦人耳, 其性之善, 無不同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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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노사(蘆沙)가 명덕(明德)을 논하면서 본심으로 그 이름을 정하고, 물을 담는 소반과 음식을 담는 그릇을 비유12)로 삼고서 "기의 정상(精爽)이다."라 말했고, "분명 이것은 기로서 말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덕을 기의 범주(氣分)에 소속시킨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데, (노사는) 명덕은 기이므로 기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배척한 것은 어째서입니까?13) 이는 아마도 단기지설(單氣之說)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기지설 역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호흡의 출입과 기혈의 승강을 명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감로(甘露)가 보리(來牟-來麰)이다'14)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비난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만약 주장하는 바의 명덕의 명목을 다만 심의 기에 소속시킬 수 있어도 성의 리에 소속시킬 수 없다고 하는 자에 대해 단기(單氣)의 죄를 억지로 가하여 배척한다면, 노사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제 《노사연보(蘆沙年譜)》를 보니 "박영수에게 답한 편지에서 '명덕을 단기로 보는 설을 반박한다.'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본래 편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배척한 것은 저곳에 있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명덕을 곧바로 리라고 하거나 리기의 합이라 하여,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노사도 심히 배척한 것이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헐뜯은 것입니다. 노사가 세상의 도를 걱정한 것은 오로지 저기에만 있고 여기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은 《연보》중에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거늘 선사(先師)의 공정한 혜안으로도 끝내 편견을 지닌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나 《연보》의 실수가 다만 하나는 들고 하나는 버린 것이니 오히려 크게 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묘지명에 이르러서 기의 정묘함과 거침(精粗)을 구분하지 않고, 곧바로 '명덕은 기이다'라고 생각한 것은 쇠를 은이라 부르는 것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그 《전집》중에 "기의 정상은 분명히 기이다" 등의 구절은 어떻게 구분하여 처리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문인과 자손들의 마음을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蘆沙之論明德, 以本心定其名, 以儲水之盤載食之鉢取譬, 而曰"氣之精爽," 曰"分明是以氣言者." 其屬明德於氣分也, 不啻明白, 而其斥明德是氣, 爲明氣之學者, 何也? 此則蓋斥單氣之說也.然單氣之說, 亦有兩般.其以噓吸之出入榮衛之升降爲明德, 如甘露來牟之說者, 其見斥也, 固宜矣.若以其所主之名目, 但可屬心之氣, 而不宜幷屬性之理者, 勒加單氣之罪而斥之, 蘆沙之所必不爲也.今見〈蘆沙年譜〉, 云答朴瑩壽書, "驳明德單氣之說." 此則按其本書而可知.其所斥者在彼而不在此也.但以明德爲直是理爲理氣合, 卽心指性, 亦蘆沙之所深斥, 而一邊之所喙喙者也.蘆沙之爲世道憂不獨在彼而不在此.此則年譜中, 一不槩及, 使其先師之公眼, 終歸於偏見, 何也? 然年譜之失, 但在於一舉而一遺, 猶爲無傷也.至其墓銘, 則不分氣之精粗, 直以爲明德是氣, 喚鐵作銀.未知其《全集》中, "氣之精爽分明是氣"等句, 將何以區處耶.其門人子孫之心, 誠莫之知也. 물을……비유 기정진은 "'명덕은 단지 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겠는가?' 말하였다. '기물(器物)로서 비유하면 기(氣) 자는 단지 그릇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명덕은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가리키는 것이다.'〔明德單屬氣分乎? 曰 : '以器物譬之,則氣字單指盤盂,明德指儲水之盤盂.'〕"ㆍ"생각건대 본심은 이름하면 명덕이니, 이것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 내가 일찍이 밥그릇으로 비유하였는데, 둥근 주발에 쌀밥이 가득 담긴 것이 명덕이다.〔惟人之本心,乃名明德,是必有其故矣. 愚嘗譬之食器,一圓鉢盂滿載玉食者,是明德也.〕" 《답문류편(答問類編)》 권6 대학삼지이(大學三之二)〉 명덕은……어째서입니까? 기정진은 "명덕은 오직 기를 가리킨다'는 설이 요즘 세상에 파다하지만 내 귀에는 거슬리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내 견해로 배척하면서 "명덕이 기라면 명명덕은 기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明德單氣"之說,近日頗行於世,而礙於淺者之耳,卽嘗妄闢之曰:"明德是氣,則明明德是明氣也.〕"라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 호흡의 보리이다 기정진은 "이제 한 가지 비근한 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감로는 술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술은 누룩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누룩은 보리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이제 어떤 사람이 '감로가 보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명덕이 기이다'라는 설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今請以一淺事喩之. 甘露不生於酒耶?酒不生於麴糱耶?麴糱不生於來麰耶?今有言者曰:"甘露來麰也",則人必以爲不成說話. "明德是氣"之說,何以異此?〕"라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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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리통기국(理通氣局)은 모름지기 본체(本體) 상에서 말해야 하니, 이 본체는 기의 당체(當體)로 보아야 한다."고 권순명은 주장하였는데, 권순명(權純命)의 주장과 같은 경우는 음양당체(陰陽當體)로 국(局)을 삼은 것이니, 참으로 리를 해치지 않으면서 유행(流行)의 어느 한쪽에도 떨어지지 않는 정안(正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문세(文勢)와 합쳐서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 주장과 같다면 리통기국은 본체 상에서 말을 할 수 있는데 그 본체를 버리고 유행에서만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자(要自)', '설출(說出)', '리료(離了)' 등 한 절을 전환시키는 글자를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그 아래에서 또 마땅히 음양(陰陽) 안에서 당체(當體)와 유행(流行)으로 나누어 두 갈래로 문장을 써내려가야 하는데, 리기를 함께 거론하여 이처럼 우활하게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구절마다 논리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끝내는 리통(理通)을 버려버리고 기국(氣局)에 대해 전적으로 언급한 연후에 그의 학설이 통하게 되니,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을 따르기 어렵습니다.오진영(吴震泳)의 학설을 들어보면, 이 본체를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기로 여겼는데, 그것을 국(局)이라고 하면 리를 해치게 되고, 그것을 국(局)이 아니라고 하면 한편으로 치우치는 말로 전락함을 구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담일청허한 기는 본체상에 갖추고 있는 유행(流行)의 기를 가리킨다."라 하였으니, 그의 견해는 참으로 정밀한 것 같으며, '요자(要自)', '설출(說出)' 등의 어세도 또한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그러나 그것을 이치에 비추어 궁구해보면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담일청허(湛一淸虛)와 청탁수박(清濁粹駁)은 비록 본말의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똑같이 기로써 한 물건이니, 후자가 전자와 같지 않은 것을 담청의 말류라고 한다면 괜찮지만 후자가 전자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담청이 갖추어져 있는데 피차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한다면 옳지 않습니다.또한 만약 "담청기(湛清氣) 중에 서로 같지 않은 기가 갖추어져 있고, 서로 같지 않은 기 중에 담청(湛清)의 기가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면, 어찌 권순명처럼 하나의 기(氣) 자를 크게 보고서 리통(理通)을 버린 혐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본체와 유행을 비록 모두 기에 소속시키고 싶겠지만, 본문의 인성(人性)과 물성(物性), 인리(人理)와 물리(物理), 기수(器水)와 공병(空甁), 일본(一本)과 만수(萬殊) 등의 설에서 이미 리기를 둘로 나누고 본체와 유행으로 구분하여 소속시켰는데, 어찌 그것이 문세에 순하고 이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선생님의 〈태극본체설〉처럼 통창하여 완비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리통기국과 본체유행의 뜻에 대해서는 나도 사실 자신할 수가 없다. 이견(而見, 오진영)과 고경(顧卿, 권순명의 자)의 설은 모두 나와는 같지 않은데, 어찌 감히 나의 견해에 근거하여 질정하는가? 오직 내 설을 삼가 보존하여 본지를 터득해야 하는데, 이제 그대가 또한 그들처럼 하면서 저 두 사람의 설을 아울러 지적하면서 온당치 못하다고 하는구나. 나는 나의 학설을 자신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세 벗과 함께 논의하여 지극히 정밀한 뜻을 얻어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理通氣局, 要自本體上說出, 此本體做氣之當體看.如權純命說, 則其以陰陽當體爲局者, 固不害理, 而爲不落流行一邊之正案.然合下文勢, 恐不如此.若如其說, 則理通氣局, 亦可言於本體上, 不可棄其本體而但求於流行也, 不當下'要自''說出''離了'等, 轉一節底字, 令人看出不易也.其下又當只就陰陽內, 分當體流行, 而兩下立文, 不當幷舉理氣若是之闊也.節節推去, 畢竟掉了理通單說氣局然後, 其說乃通, 此其所以難從也.吳震泳說, 則以此本體爲湛一淸虛之氣, 而謂之局則害理, 謂之不局則不能求落在一邊之語.故乃曰指本體上所具流行之氣, 其見果似精密.而於要自字說出字等語勢, 亦自不礙.然究之理致, 又有難通者.湛一清虛清濁粹駁, 雖有本末之分, 均是氣而一物也, 謂不齊爲湛清之末流則可, 謂不齊爲湛清之所具, 而存彼此之形, 則未可.且若曰湛清氣之中, 不齊之氣具焉, 不齊氣之中, 湛清之氣存焉, 豈不多了一氣字, 而有掉了理通之嫌, 亦如權說者乎? 蓋本體流行, 雖欲俱屬氣上, 其於本文人性物性人理物理器水空瓶一本萬殊等說, 已自兩分理氣, 區屬本體流行, 何順乎文勢, 得乎理致? 總不如先生太極本體之說之爲通鬯完備也.○ 先生答書曰 : "理通氣局, 本體流行一義, 愚實未能自信.而而見顧卿, 皆莫與同, 尤何敢據已見, 以質言也.惟敬存以鄙說, 爲得本指, 今高明亦然, 而幷指彼二說爲未穩.區區姑可以自信矣.然欲望與三友同共商量, 期得至精之義而示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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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正月 신유년 정월(1921)전옹(임헌회)의 비(碑)와 작(爵), 그리고 시호(謚號)의 일에 대하여 지령(志令)이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선생의 편지를 근거로 모르고 있던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는 증거로 삼고서 "듣기에 오 모씨가 최근에 작과 시호에 관한 편지를 써서 다시 변론하였으며, 스승이 이미 견해를 바꾸었거늘 제자가 다른 견해를 펼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 하였습니다.선생의 그 편지는 단지 두 공께서 자신을 사랑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뜻이거늘, 누가 견해를 바꾼 단안(斷案)으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편지 중에 '나를 부추겨 세워주고 나를 시원하게 해주었다'는 등의 구절은 아마도 지나치게 중시하고 기분 좋아한 실수가 있으니, 오로지 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타인을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김제환(金濟煥)이 삭직을 당한 후에 즉시 자결하지 않고 수개월 늦춰 죽은 것은 너무 부끄러움을 모르는 짓입니다. 그러나 지령(志令)은 비록 삭직을 당하여 시간을 끌었더라도 끝내는 자결하였으니 의사(義士)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여기고서 신후문자(身後文字)를 써주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또 나에게 "간옹이 '삭직을 당한 후 자결했다고 하여 절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라 말한 것을 들었는데 너무 심한 처사인 듯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삭출되는 욕됨을 당하여 자결한 열부에 관한 글이 《약재집》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이런 의리를 주장함에 매우 힘썼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끊임없이 배반하는 맹달(孟逹)15)과 달리, 일찍이 안록산(安祿山)이 안고경(顏杲卿)을 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끝내 절개를 세워16) 주자로부터 칭송을 받은 일을 기록했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또 삭직을 당하고 스스로 자결한 자가 군자에게 칭송을 받지 못한 것은 삭직을 당하고 죽지 않은 자와 똑같이 절개를 잃어 군자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아무런 이로움이 없는데 자신의 몸을 죽이겠습니까? 장차 머리를 깎은 학자가 뻔뻔한 낯빛으로 정좌하여 성인의 경전을 담론하는 자가 세상에 즐비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혹 저 사람(김제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누가 기꺼이 의리로 대항하여 굽히지 않아서 머리를 억지로 깎는 치욕을 취하겠습니까? 장차 의리를 잊고 욕됨을 참아서 구차하게 몸뚱이를 보호하려 하는 무리가 천하에 흘러넘침을 보게 될 것이니, 저 쇠한 세상에서도 해가 됨이 도리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마음속에 의심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대가 나를 위하여 스승에게 질문할 수 있는가.'라고 운운한 것은 이미 지령에게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여기에서 모두 아룁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나는 매번 선비가 삭직을 당하여 죽지 않은 것과 부인이 강제로 욕을 당했는데 죽지 않는 것은 본래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부끄러움을 알고 분함을 품어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자결하는 자는 그 선비의 생도들이 사숙에서 제사지내고, 부인의 자손들이 별실에다 제사를 지내되【이렇게 하면 대접하는 것이 박하지 않고 후하다 말할 수 있다】 성묘(聖廟)와 현원(賢院)의 제향에서 합독(合櫝),17) 부조(祔祖)18)의 예에는 참가할 수 없으니, 이렇게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정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내가 일찍이 내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경우를 설정하여 생각을 해봤는데, 당시의 잘못된 행위가 비록 본심에서 나온 것은 아닐지라도 몸을 훼손한 것은 훼손한 것이고, 몸을 더럽힌 것은 더럽힌 것이다. 어찌 천지 사이에 올바르게 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후인들이 비록 내치지 않으려 하더라도 그 귀신이 스스로 감히 버젓이 성현의 반열과 조상의 제향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이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적용했을 따름이니, 일부러 이것 때문에 각박하게 의론을 전개하여 인의의 성(性)을 손상시키려 한 것은 아니다.지산이 이미 '어찌 이익이 없는데 몸을 죽이겠는가.'라고 말하고, 다시 어찌 '의리로 대항하여 굽히지 않고 욕됨을 취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진실로 이와 같다면 저 사람의 자결은 부끄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로지 포상을 받고 싶은 생각에서 나왔을 따름이니 또한 어찌 숭상하겠는가." 全翁碑爵謚事, 志令據先生答徐柄甲書, 爲幡然改悟之證, 而曰 : "聞吳某近以爵謚當書, 復有所辨, 師既改見, 而弟子異論, 何也?" 蓋先生此書, 只謝二公相愛之意, 孰謂其幷作改見之案也? 然書中扶竪我, 灑濯我等句, 恐或失之太重太快, 不可專以不悉書責人也.金濟煥見削後, 不即自裁, 遲緩數月而死之者, 已極無恥.而志令以為雖則見削, 竟至自裁, 則不失爲義士, 既許其身後文字.且謂小子曰 : "聞艮翁謂'見削自死, 不成爲節義,' 似涉已甚." 而以刪出見辱自裁之烈婦文字, 於《約齊集》觀之, 其主此義也更力矣.然反覆無狀之孟逹, 嘗著祿山帶之顏杲卿, 以終能立節, 見褒於朱子, 則此合有更商者矣.且見削自死者, 不見褒於君子, 則與見削不死者, 均之爲失節, 而見棄於君子一也.孰肯無所益而殺其身哉? 將見髠薙學子, 靦然危坐談聖經者, 比肩於世矣.其或與彼人相關.又孰肯抗義不屈, 取勒削之辱哉? 將見忘義忍恥, 茍容保軀之徒, 滔滔天下矣, 其爲衰世之害也, 反或不少矣.此尋常蓄疑于中者, 君可爲我稟質于臯比云云, 既有所聞于志令者, 故敢此具白.○ 先生答書曰 : "愚每謂士之被削婦之強辱而不死者, 本不足言矣.唯其知恥懷憤, 而不淹晷刻, 即地自裁者, 其士之生徒, 祀之私塾, 婦之子孫, 祭之別室【如此則其待之, 亦可謂不薄而厚矣】, 而不得與於聖廟賢院之享, 合櫝祔祖之禮, 是其裁量不可謂不精矣.愚嘗設以身處其地而思之, 當時之失, 雖非本心, 毀形則毀形, 汙身則汙身矣.柰何立於天地之聞乎? 故不得以不死矣.後人雖欲勿降, 然其鬼自不敢偃然入於聖賢之列, 祖考之享矣.自己之心如此.故推之以施於人爾, 非故爲是刻核之論, 以自傷其仁義之性也.志山既謂孰肯無所益而殺身, 再謂孰肯抗義不屈而取辱, 信如此, 言彼之自裁, 非發於羞恥之心, 乃專出於褒賞之意爾, 亦何足尚哉? 맹달(孟達 ?~228) 자는 자경(子敬)이다.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로, 부풍군 사람이다. 관우(關羽)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여 관우가 죽자, 위나라에 항복해서 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촉을 배반한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오(吳)와 연결하고 촉과 굳게 맺고서 중국(中國)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면 내응하기로 한 밀약이 탄로 나자,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였고, 후에 사마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안고경(顔杲卿, 692~756)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상산군(常山郡)의 태수(太守)로 있을 때 종제(從弟)인 안진경(顔眞卿)과 함께 안녹산(安祿山)의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안녹산에게 붙잡혔고, 그를 크게 꾸짖고 낙양(洛陽)으로 압송된 뒤 죽임을 당했다. 합독(合櫝) 부부의 신주를 나무로 짠 궤에 함께 넣어두는 것을 뜻한다. 부조(祔祖) 죽은 자의 신주를 선조의 신주 곁에 합사하는 것, 또 합사하고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합사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에 맞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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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손우집(遜愚集)》19) 중에 후사를 세우는 설은 율곡(이이)의 주장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반편(半篇)이 비록 황찬규(黃瓚奎)에 의한 삭제를 면하지 못했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에 대해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설이 만약 친자를 적자로 삼고 계자(繼子)를 중자(衆子)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는 진실로 따를 수 없지만, 친자가 제사를 받들고 계자(繼子)는 파양되어 본종(本宗)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이 어찌 의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다만 이미 인종 때에 계자가 적자가 된다는 정해진 제도가 있었으니, 또한 감히 멋대로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리에 비춰 규명해보고 인정을 참조해보면 논의할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대개 남의 자식을 빼앗아서 자기 뒤를 잇게 하는 것이 어찌 부득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중대한 종사를 위하여 한 것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응당 조금이나마 편안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부친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삼는 것은 자식으로서 큰 변고입니다. 비록 임금의 명령을 중시하여 그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찌 잠깐이라도 편하겠습니까? 만약 양자를 입적한 아버지가 다행히 아들을 두게 되면, 종사에 부탁은 바로 그 아들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편하기 어려움을 미루어 남의 자식의 편하지 못함을 체득한 뒤에 그로 하여금 원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하면 그 아버지는 아마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왕에게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정해준 인간관계를 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 관계를 정해주는 것도 멋대로 하더라도, 임금이 양자를 들인 뒤에 친 아들을 본다면 사람이 정한 인간관계를 버리고 다시 천속(天屬)의 친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에 대해 어찌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계축년에 하교를 받은 것에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고, 인종이 정한 제도 또한 만세의 법전으로는 흠결이 있습니다. 만약 나라에 계자(繼子)로 후사를 세운 이후에 자식을 낳으면 계자를 돌려보낸다는 제도가 있다면, 이런 경우를 당한 자는 자초지종을 갖춰 임금에게 고하고 파양시켜 돌아가게 한다면 마음에 편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 문장에는 이에 관한 한 구절의 말이 없으니 명확하지도 않고 갖추어지지도 않은 것20)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윤리의 큰 핵심이니 끝까지 강론해야 하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람되게 이렇게 의심나는 것을 질의하니 삼가 바라건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잠깐 《문헌비고》를 보다가 철종 기유년의 예의조(禮儀條)를 보니, 매산(홍직필)의 전후 두 개 상소를 다 실었고, 또 좌상 김흥근과 우상 박영원 등 여러 공들의 의론과 후소(後疏)를 기록하였으며, 태묘에 부묘하는 것을 모두 바르게 고쳤습니다. 이 일은 바로 선생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멀지 않아 회복된다"21)는 것입니다. 저는 비평가22)들이 종신(終身)의 허물을 많이 지은 것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이제 이 책에서 기록한 것을 보고 당시에 개정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것처럼 상쾌하고, 또 조정의 문헌이 자못 공체(公體)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종신토록 허물을 많이 지은 많은 사람들이 어찌 퇴옹(이황)이 잘못을 했다가 다시 고친 것을 듣지 못했겠는가?" 《遜愚集》中, 立後說, 與栗谷議不同.故下半篇, 雖不免黃瓚奎刪籖, 然淺見不無商量者存.此說若謂以親子爲嫡, 繼子爲衆, 則固不可從, 乃謂以親子奉祀, 繼子則罷歸本宗也, 是何嘗悖義乎? 但既有仁廟繼子爲嫡之定制, 則又有不敢擅行者也.然究之天理, 參之人情, 終有可議者.蓋奪人子而繼己後, 豈非不得已之事乎? 雖則爲宗事之重而爲之, 其心應有些難安者矣.捨其父而父他人, 人之子大變.雖則重君命而聽之, 其心何嘗須臾寧乎? 使其所後父, 幸而有子, 則宗事之託, 在是矣.推己心之難安, 體人子之不寧, 使之歸父, 其父恐爲得當也.至於王者, 則有代天理物之道.故割天定之倫, 移定他人, 亦且任爲, 則其於罷人定之倫, 而復續天屬之親, 何憚而不爲乎? 然則癸丑受教, 誠有所失, 而仁廟定制, 亦欠萬世之典也.若使國家有立後後生子, 還歸繼子之定制, 則遭其事者, 具由告君而罷遣, 似無未安.而本文中, 少此一節, 是爲不明不備處耳.此係倫紀大綱, 恐宜講到極致, 而不容放過者.故猥此質疑, 伏乞垂察.俄閱文獻備考, 見哲宗已酉禮儀條, 備載梅山前後二疏, 又錄左相金興根右相朴永元諸公議與後疏, 同改正於祔太廟時, 蓋先生此事正所謂不遠而復者.竊怪夫月朝家之多作終身之累也, 今見此書所錄, 益知當日改正之實, 既喜披雲覩青之快.又以見朝家文獻之自不失公軆也○ 先生答書曰 : "諸家多作終身之累者, 豈不聞退翁既誤又改之蹟歟?" 《손우집(遜愚集)》 조선 후기 홍석(洪錫, 1604~1680)의 시문집이다. 홍석의 자는 공서(公敍)이고, 호는 만오(晩悟)·손우(遜愚)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부친은 홍경소(洪敬昭)이고 모친은 한완(韓浣)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이 문집은 3책 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석의 아들 홍사효(洪思孝)가 편집하여 1933년에 간행하였다. 명확하지도……않은 것 정자가 "성만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을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가 않다. 이것을 둘로 하면 옳지 않다〔程子曰: "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 二之則不是.〕"고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 권2 〈전습록 중(傳習錄中)〉 멀지 않아 회복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서는 "초구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후회에 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初九, 不遠復, 无祗悔, 元吉.〕"라 했다. "멀지 않아 회복된다〔不遠而復〕."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며, 인종 때의 잘못된 일을 철종 때 바로잡았음을 의미한다. 비평가 월조가는 월단평(月旦評)을 잘하는 사람으로, 곧 인물을 잘 품평하는 사람을 이른다. 월단(月旦)은 매월 초하루로, 후한(後漢) 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許劭)는 그의 형 정(靖)과 함께 당시에 명사로 이름이 났는데, 그 지방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하여 매월 초하루마다 품제(品題)를 바꾸었기에 여남 풍속에 월단평(月旦評)이 있게 되었다. 월단(月旦)을 월조(月朝)로 바꾼 것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이 단(旦)이므로 이를 휘(諱)하여 단(旦)을 조(早) 또는 조(朝)로 바꾸어 쓴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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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丑 신유년(1921)부친이 살아계실 때 처의 상을 당하면 지팡이를 잡는 기년상(杖期)23)으로 해야 할지, 지팡이를 잡지 않는 기년상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보내주신 편지로 말미암아 대략 고증하고, 거기다가 저의 의견을 첨가하여 질문을 하지만 어찌 감히 스승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대개 《의례(儀禮)》의 〈장기장(杖期章)〉에서 '처를 위한다'24)는 것은 처복(妻服)의 상례(常例)를 말한 것이고, 〈불장기장〉에서 '대부(大夫)의 적자가 처를 위한다'25)는 것은 처복의 변례(變例)를 말한 것인데, 이는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죽은 뒤에 처가 죽은 것은 일반적인 세대의 순서[世序]이지만, 처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것은 세서의 변고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의 장기(杖期)는 처를 위한 것이라 범범하게 말한다면, 진실로 의심할 것도 없이 귀천과 상하를 통괄하여 말한 것입니다. 변례의 부장기(不杖期)는 다만 대부의 적자만 말했으니, 사(士)와 백성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이 처를 위하는데도 감히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상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맏며느리상[適婦喪]을 주관함에 있어 어찌 일찍이 대부와 사(士)·백성의 구별이 있었겠습니까?그런데 이곳에서 유독 대부만을 말한 것은 대부를 강복(降服)26)하는 시작으로 삼은 것으로, 그 맏며느리[適婦]에 대하여 강복하여 그 아들 또한 그 처에 대해 강복할 것을 혐의했기 때문에 특별히 거론하여 밝힌 것입니다. 대부이면서도 강복하지 않으면, 천자와 제후는 그 지위가 높을지라도 강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사(士)와 백성은 애초부터 강복의 혐의가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천과 상하를 불문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처를 위해서 장기하고 아버지가 계시면 불장기를 하는 것은 실로《예경(禮經)》의 본뜻인데, 오직 주희의 《가례》에서는 이에 대하여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장기라고 정한 것은 참으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신재(양복)는 선생의 문인인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27)는 한 구절을 부주(附註)에 첨가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아마 그가 직접 배울 때 들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사계의 《비요안설(備要按說)》에는 '아버지가 상을 주관하면 처의 남편은 지팡이를 짚지 않고, 아버지가 상을 주관하지 않으면 남편은 지팡이를 짚는데 대부만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사(士)와 백성도 같다.'28)는 설이 있으니, 후인들은 이에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구분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가례편람》에서 인용한 우암(송시열)의 연장상담(練杖祥禫)에 관한 일련의 설입니다. 단지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면 정말로 담제29)를 할 수 없고, 담제를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삼년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꼭 정해져 바꿀 수 없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삼가 깨우쳐주시길 바랍니다.《예경》에서는 비록 적자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니, 〈분상(奔喪)〉에서 또한 "범상(凡喪)에선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아버지가 주관한다."30)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중자(衆子)가 처상을 당한 자라면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주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비록 중자일지라도 그 처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을 수 없습니다. 이를 아울러 선생님께 여쭙니다. 父在妻喪, 杖期不杖期, 前此未曾致思.今因下示, 畧畧考據, 參以淺見而質之, 安敢望有槩乎尊意也? 蓋儀禮杖期章爲妻, 是言妻服之常例也, 不杖期章, 大夫之嫡子爲妻, 是言妻服之變例也, 何以言之? 父殁而後妻死, 世序之常也, 妻之先父而歿, 世序之變也.常例之杖期, 既泛言爲妻, 則固無疑乎通貴賤上下而言.變例之不杖期, 獨言大夫之嫡子者, 疑若士庶之不與焉.然此有不然者.夫爲妻而不敢杖者, 以父爲主之故也.父主適婦之喪, 何嘗有大夫士庶之別.而此獨言大夫者, 蓋以大夫爲降服之始, 嫌於降其適婦, 而其子亦降其妻也, 故特舉而明之.大夫而不降, 則天子諸侯, 雖尊不降, 可推而知也.至於士庶, 初無降服之嫌者, 則又無待乎言矣.然則無論貴賤上下, 父沒則爲妻杖期, 父在則不杖期, 實禮經之本意, 而惟朱先生家禮無所區別.但定杖期者, 誠所難違也.然楊信齊以先生門人, 既添父在不杖一節於附註, 則意其或有所聞於親炙之際者.沙溪《備要按說》 亦有父主喪則夫不杖, 父不主喪則夫杖, 不惟大夫爲然, 士庶人亦同之說, 則後人於此, 可以知所從矣.第難區處者, 便覽所引尤菴練杖祥禫一串之說也.但未知不杖, 則果不得禫, 不禫則果不得爲三年之禮, 定定不易者乎? 伏乞開誨.《經》雖但以適子言, 奔喪又言'凡喪父在父爲主,' 今有衆子與父同居而有妻喪者, 其父不得不爲主矣.若此者雖衆子, 恐亦不得爲其妻杖也.幷此仰質. 장기(杖期) 상례(喪禮)에서 상장(喪杖)을 짚고 자최(齊衰)를 1년 동안 입는 거상(居喪)을 말한다. 처를 위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장기(齊衰杖期)에서는 "처를 위해 착용한다(妻)."라 되어 있고, "전에서 말하길, 처를 위해 왜 기년으로 복을 하는가? 처는 지극히 가까운 자이기 때문이다〔傳曰, 爲妻何以期也? 妻至親也.〕"라 하였다. 대부의 적작 처를 위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期)에서는 "대부의 적자가 처를 위해 착용한다(大夫之適子爲妻.)"라 했고, "전에서 말하길, 왜 기년으로 복을 하는가? 부친이 강복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자식도 감히 강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부친이 생존해 계시면 처를 위해 상복을 착용할 때 지팡이를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傳曰, 何以期也? 父之所不降, 子亦不敢降也. 何以不杖也? 父在則爲妻不杖.〕"라고 하였다. 강복(降服) '강복'은 상(喪)의 수위를 본래의 등급보다 한 등급 낮추는 일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자식은 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러야 하지만, 다른 집의 양자로 간 경우라면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르지 않고, 한 등급 낮춰서 1년만 치르게 된다. 이것은 상(喪)의 기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복(喪服) 및 상(喪)을 치르며 부수적으로 갖추게 되는 기물(器物)들에도 적용된다. 아버지가……않는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期)에서 "왜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부친이 생존해 계시면 처를 위해 상복을 착용할 때 지팡이를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何以不杖也? 父在則爲妻不杖.)"라 한 말을 가리킨다. 아버지가……같다 《사례비요(四禮備要)》 〈보복(補服)〉에서는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소에서 '천자 이하로 사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모두 서자의 처를 위해 상주(喪主)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모두 처를 위해 지팡이를 짚는 것은 슬픔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에 근거한다면 아버지가 상주면 지팡이를 짚지 않고, 아버지가 상주가 아니라면 남편이 지팡이를 짚는다. 대부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와 서인도 마찬가지이다.〔疏 '天子以下至士庶人, 父皆不爲庶子之妻爲主喪, 故夫皆爲妻杖, 得伸也.' 據此, 父主喪, 則不杖, 父不主喪, 則夫杖. 不惟大夫爲然, 士庶人亦同.〕"라고 했다. 담제(禫祭) 담(禫)은 담담하니 편안하다는 뜻인데, 초상으로부터 27개월째 되는 달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이며, 상제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범상(凡喪)……주관한다 《예기(禮記)》 〈분상(奔喪)〉편에서는 "상이 발생했을 때, 부친이 생존해 계시다면 부친이 주관한다. 부친이 돌아가셨고 형제가 같은 집에 거주한다면, 형제들은 각각 자신에게 발생한 상을 주관한다. 부모가 같을 경우, 부모의 상을 치를 때에는 장자가 주관한다. 부모가 다르고 그 상을 주관할 자식이 없다면, 죽은 자와 관계가 가까운 자가 주관한다〔凡喪, 父在, 父爲主. 父沒, 兄弟同居, 各主其喪. 親同, 長者主之; 不同, 親者主之.〕"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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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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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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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기비(箕碑)와 임갈(林碣)의 변고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들었지만, 그 일이 어찌 선생을 이처럼 극도로 침범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문자로 말미암은 경계(警戒)를 일으켜서 앞으로 행할 일에 조심한다고 하시니 제가 감히 종신토록 가슴에 담아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전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사람을 위한 글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대상의 행적에) 거짓이 구름처럼 많고 속임이 산처럼 쌓여 살아서는 도척처럼 행동했는데 죽어서는 순임금처럼 만들어 바꾸려고 하는 자의 요구에 어떻게 응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위로는 대인(大人)의 순덕(純德)과 위업(偉業), 아래로는 필부의 기행과 고절(奇行苦節)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장을 지어주면서 허실을 따지지 않고 묘에 아부하거나 글을 부탁한 사람에게 아첨하면서 금과 비단을 요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거니와 혹 이를 징계하여 일절 물리쳐서 훌륭한 실적(實蹟)마저 아울러 사라지게 한다면 또한 정도(正道)에 지나칠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글을 짓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율곡선생이 김노천(김식)31)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하고, 지을만한 대상의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양할 필요 없이 사리에 맞게 칭찬해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될 것입니다.32)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시호(諡號)에는 아름다운 시호가 있고 추악한 시호가 있습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해 같은 날에 시호를 의논하는 것이 군자에게는 꺼려야 할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꺼려야 하는 것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좋은 시호를 함께 뒤섞어 베푸는 것이니,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론이 공정하지 않은 까닭은 악인이 나쁜 시호를 면하는 것이지 군자가 좋은 시호를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저쪽에서는 진실로 불공정하다지만, 이쪽에서는 공정함을 해치지 않으니 무슨 꺼릴만한 것이 있겠습니까?만약 시호에 대한 의론이 스스로 적배(賊輩)들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면,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따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 의론이 공정함을 얻었기 때문에 한나라 헌제와 명나라 의종의 시호가 조조란 도둑놈과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후세에 그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도적에게 아부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나라 신하'라고 말하니, 그 의론의 판단이 깊은 진심에서 나와 결정된 것이겠습니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정미년(丁未年)의 일33)을 모 어른처럼 선위(禪位)가 아니라고 한다면 구설(口舌)로 다투기 어렵습니다. 다만 전옹(임헌회)은 성덕(盛德)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시호가 있고 없음 때문에 덕에 증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그 자손이 공도(公道)가 없을 때 구차하게 시호를 청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뿐입니다.맹자는 "이곳에 해자를 파고, 이곳에 성을 쌓아서 백성들과 지키다가 죽더라도 떠나지 말라."34)고 말하였고, 또한 "진실로 선을 한다면 후세자손에 반드시 왕자가 나올 것이다."35)라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유자들이 지금 시대에 의로움을 행할 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건히 뜻과 절개를 세우는 것으로 성을 쌓고 의리를 깊게 만드는 것으로 해자를 삼으며 선성(先聖)의 도를 받드는 것으로 사직을 삼아 이 시대의 동지들과 함께 힘을 다해 지키다가 죽은 이후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맥(脈)이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성인이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 외에는 결코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장성(長城)에 사는 김 모씨의 처는 정씨인데, 송강(정철)의 후손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밖에 나가 삭발했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하녀로 하여금 삭발여부를 살펴보게 하니, 하녀가 돌아와 "삭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정씨는 이를 믿지 않고 남편이 외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다른 하녀에게 가서 보게 하니 정말로 삭발하지 않았다. 이에 반찬과 밥을 성대하게 준비하여 남편이 내실로 들어오기를 청하여 친히 밥상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니 남편이 "어찌하여 이처럼 반찬이 성대하오."라고 물었다. 이에 정씨가 "우선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밥을 다 먹은 이후에 (정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금방 전 성대한 음식을 드린 것은 저를 살려준 은혜에 감사드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라고 하니 정씨가 종이로 싼 물건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독약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삭발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면, 저는 차마 삭발한 남편을 섬길 수 없으니 이것을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삭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를 살린 것입니다. 감히 은혜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편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하였다고 한다.을미사변 때에 삭발한 자의 처가 간혹 자결했다고 들었지만, 수십 년 이래로 삭발하는 풍속이 이미 성대해져 부녀들이 삭발한 남편이나 스님 같은 사내를 익숙히 듣고 보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현부에게 이런 고견(高見)이 있어 자처한 의리가 바르고 다른 사람을 더욱 깊이 감동시키니 어찌 무성한 풀 속에 홀로 향기를 풍기며 많은 닭 속에서 한 마리 학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 훌륭하기에 감히 알려드립니다. 箕碑林碣之變, 曾雖聞之, 豈意其侵及先生而極也.枉作文字之戒, 懲諸身歴, 出自心愛, 敢不服膺而終身? 竊嘗思之, 人家文字, 以爲當作, 則虛僞雲興, 溢誣山積, 生爲蹠行, 而死欲舜賛者, 其何以應之? 以爲不當作, 則上而大人之純德偉業, 下而匹夫之奇行苦節, 不有以記之, 孰得以知之? 故妄意以爲廣開文路, 不問虛實, 謏墓媚人, 討金索縑者, 固不足道, 其或懲此而一切辭絕, 并與實蹟之善而沒焉, 則恐亦過中也.然則惡乎而可? 其不可作者, 則却之之嚴, 當如栗谷之於金老泉, 可作之文, 則不必終辭, 稱揚停當, 當如蔡邕之於郭有道, 則斯可矣.未審先生以爲如何.謚有美謚惡謚.君子與小人, 同日議謚, 固無嫌於君子, 而所可嫌者, 不分善惡, 而混施美謚者, 爲不公之論也.然其論之所以不公者, 在乎惡人之免惡謚, 不在乎君子之受美謚也.在彼固爲不公, 在此自不害爲公, 又何嫌之有? 如以謚議之出, 自附賊輩爲說, 則又有可解者.苟其議之得公, 以漢獻明毅之出自曹賊清盧, 後世未聞有嫌之者.而况雖曰附賊尚是韓臣, 而其議之取裁, 自睿衷而決定者乎? 其不容有說於其閒也, 審矣.若以丁未之事, 謂非禪位, 如某丈之言, 則有難以口舌爭也.但在全翁盛德, 豈以節惠有無爲增損.其子孫之區區請求於無公道之時, 正不滿人意耳.孟子曰 :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效死而勿去." 又曰 : "茍爲善, 後世子孫, 必有王者矣." 竊以為吾儒今日處義, 亦當如此也.堅立志節以爲城, 深造義理以爲池, 奉先聖之道以為社稷, 與并世同志者, 盡力而守之, 斃而後已.茍一脈之有傳, 安知後世聖人之必不作耶? 如此之外, 了無可爲者耳.長城金某妻鄭氏, 松江後.聞其夫出外削髪, 俟其回, 使婢出觀其削否, 婢奔告曰 : "不削".鄭氏未信, 俟入外堂, 又使他婢往見, 果不削.乃盛饌備飯, 請夫入內, 親舉案進前.夫曰 : "胡爲饌盛若是." 鄭氏曰 : "第飯之." 飯后乃進而言曰 : "俄供盛餅謝活我恩也." 夫曰 : "何謂?" 鄭氏以紙裹一物示夫, 曰 : "此毒藥也.夫子果不免削髪, 則吾不忍事削髪之夫, 將服而死矣.今幸不削, 是活我也, 敢不謝恩." 其夫聞之感服云.在昔乙未之變, 聞遭剃者之妻, 或有自死者矣.數十年來 剃風已盛, 人家婦女習聞慣見髠夫僧郎, 曾不爲恥, 何幸賢婦有此高見, 自處之義既貞, 感人之術尤妙, 豈不是衆蕪孤芳羣鷄一鶴事? 甚奇絕, 敢以上聞. 김식(金湜, 1482~1520)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다.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는 동천(東泉)·사서(沙西)·정우당(淨友堂)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부친은 김숙필(金叔弼)이고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目氏)이다. 채옹……것입니다 후한(後漢)때의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그 덕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太列傳)〉 정미년(丁未年)의 일 1727년(영조 3년),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영조(英祖)는 당파심이 매우 강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少論)은 실각하지만, 또 다른 서인인 노론(老論)은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이 각주가 아니라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간재가 살았던 정미년의 일을 찾아볼 것. 아마도 순종 이후에 시호가 내려졌는데, 순종이 선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 어른일 것이며..여기에서 시호 문제는 전제의 시호 문제인 듯. 이곳에……말라 맹자는 "이 계책은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못을 깊이 파며 성을 높이 쌓아 백성과 더불어 지켜서 백성들이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해볼 만한 일입니다〔是謀非吾所能及也. 無已, 則有一焉,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 效死而民弗去, 則是可爲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진실로……것이다 맹자는 "만일 선행을 하면 후세의 자손 중에 반드시 왕노릇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속할 수 있게 할뿐입니다. 성공으로 말하면 천운이니, 군주께서 저들에게 어찌하시겠습니까? 선행을 하기를 힘쓸 뿐입니다〔苟爲善, 後世子孫必有王者矣.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 則天也. 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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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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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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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한간(김한록)이 편찬한 《남당행장(南塘行狀)》을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남당을) 지극히 추존하여 공자, 주자, 한유와 병칭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포중(浦中)의 제공(諸公)이 2백 년 동안 함께 전하는 말이니, 지산(김복한)이 이 문장을 작성하면서 어찌 반드시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진 후에 완성을 했겠습니까? 또한 어찌 타인이 지적했다고 해서 견해를 바꾸었겠습니까? 다만 선생께서 이 사람에 대해서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도의(道義)로 교류하면서 격려하였으니, 침묵만 하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침묵하고 계시니) 충고의 도를 잃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견해를 바꾸는 것을 비록 기필할 수는 없지만, 그 심사가 솔직하고 담백하니 분명 이것 때문에 옛 정의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는 않을 것인데, 마음이 험악한 자가 옆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어찌 걱정거리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이 사람과 이제까지 좋은 교분을 오래도록 쌓아서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 옆 사람들의 험한 입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훗날에 공의(公議)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울러 다른 사람의 구설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아니 차라리 험한 구설을 받을지언정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견해를 진술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믿지 않는다면, 또한 그 자체로 자주 충고를 하면 이에 사이가 소원해진다는 경계36)가 있을 따름입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견해는 이와 같으니,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한간(寒澗)의 문장은 공론이 될 수 없고, 성구(김노동-김복한의 아들)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고문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부친에게 나아가 간해야 합니다. 그들 부자간처럼 자애와 효도로 서로 믿고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 발전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입니다. 부자끼리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도 오히려 잘 듣지 않고 문장을 만들어 세상에 드러내었으니, 그 견고한 견해는 다른 사람이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자치강목(自治綱目)》의 서례(書例)를 조감하지는 못했지만, '관우(關羽)를 맞이하여 그를 목 베었다.'는 내용은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단 맹달(孟逹)의 죽음37)이 반드시 포상해야 할 것은 아니니, 그 책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수정한다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재차 항복하고 싶었지만 위나라가 목을 벨까 두려워서 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것에 대하여 그 정황을 상세하게 살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맹달이 정말로 이런 마음이 있었다면, 당초 위나라에 항복을 했을 때 조비(曹丕)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비와 함께 있을 때 위나라는 강하고 촉나라는 약하였는데 만약 한 마음으로 위나라를 섬겼다면 장차 부귀와 안락이 종신토록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연고로 마음이 편치 않아 제갈량과 편지를 주고받고서 강한 위나라를 버리고 약한 촉나라로 돌아오기를 도모하여【마음이 스스로 불안하여 제갈량과 편지를 주고받아서 촉나라에 돌아오길 도모했다는 것은 자치강목의 본문이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취했겠습니까? 단지 그 양심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절조를 잃은 것을 후회하고 바른 길로 돌아가서 그 죄를 속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이 함락되던 날에 죽어 절개를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주자가 이 점에 대하여 어찌 고려하지 않고 걸핏하면 함부로 칭송했겠습니까? 《자치강목》의 서법과 발명(發明)은 모두 바름으로 돌아온 것을 찬미하면서 절개를 위해 죽었다는 것으로 단정을 하였지만, 이전 사람의 논의를 또한 어찌 확인한 바가 없겠습니까? 외람되게 이러한 말까지 하게 되었으니 황송하고 황송합니다.체두(剃頭)에 얽매이지 않는 자를 기상이 큰 장자(長子)라고 한다면 죽음을 맹세하여 머리카락을 지키겠다는 자는 마땅히 그릇이 작은 비루한 선비가 됩니다. 제가 이에 한마디 올린다면, "나는 차라리 머리카락을 지키는 비루한 선비가 될지언정 머리를 깎은 장자는 되지 않겠습니다."라 하겠습니다. 寒澗所撰《南塘行狀》, 曾得一見, 極其推重, 至以孔朱韓并稱矣.此是浦中諸公二百年來共傳道之者, 志山之爲此文也, 豈必待講確而後成? 亦豈因人規改定見也? 但先生之於此令, 聲氣相求, 道義交勉, 其不可黙無一言, 有失忠告之道則明矣.此令改見, 雖不可必, 其心事坦直, 必不因此而少替舊誼, 至於心險者之從傍惹閙, 安保其無虞也? 先生與此令, 今雅契已久, 魚雁相屬, 獨於此事, 畏傍人險口而不言, 則後之公議, 又似難免, 等不免人言, 無寧冒險口而畏公議耳.陳我所見, 人不見信, 則又自有數斯疏之戒在焉爾.淺見若此, 伏惟取裁.澗文之不得爲公論, 聖九之意亦然.告文之作也, 必進諫於其親矣.以其慈孝交孚, 講學相長, 世所罕有之.父子宐其言之易入也, 而猶不見聽, 成文出世, 其見之確, 非他人之所能回也.綱目書例, 未及照動者, 如邀關羽斬之之類, 誠如下喻.但謂孟逹之死, 非所當褒, 而其曰'死之'者, 恐合修改, 則不能無疑.而其云欲再降, 而恐魏斬之, 不得以不死者, 未知深得其情否也.使逹果有此心, 則當初之降魏也, 爲曹丕所寵, 至於同輦且魏強而蜀弱, 若一心事魏, 將富貴安樂而終身.何苦而心不自安, 與亮通書, 舍強魏而謀歸其弱蜀【心不自安 與亮通書 謀歸蜀 綱目本文】,自取死亾之道哉? 惟其良心未死, 悔其失身, 欲反之正而贖其罪焉.故城陷之日, 能殞身而立節也.朱子於此豈無所聪, 動而濫褒之? 綱目書法與發明, 俱以美反正, 予死節斷之, 前人之論, 亦豈無所見哉? 僣易及此, 主臣主臣.不拘剃頭者, 爲闊大長者, 則誓死保髪者, 當爲隘小陋儒矣.小子於是有一言, 曰 : "吾則寧爲保髪之陋儒, 不願爲剃頭之長者也." 자주……경계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붕우(朋友) 간에 자주 충고하면 소원해진다.〔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라고 하였다. 맹달의 죽음 관우(關羽)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여 관우가 죽자, 위나라에 항복해서 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맹달은 촉을 배반한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오(吳)와 연결하고 촉과 굳게 맺고서 중국(中國)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면 내응하기로 한 밀약이 탄로 나자,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였고, 후에 사마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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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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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제 생각으로는 변발(辮髮)과 지금의 머리를 깎은 모습이 비록 같지 않을지라도 오랑캐의 풍속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두 개를 구분하여 좌우로 나눌 수 없습니다. 또 《고려사강목》과 《문헌비고》를 조사해보니, 모두 '충렬왕 4년 무인년에 모든 관리와 학생들로 하여금 머리를 깎게 했다.'38)고 하였고, '공민왕 23년 갑인년에 이마를 깎는 것을 금지했다.39)'고 하였습니다. 대개 고려의 풍속에 비록 변발이 있었지만 또한 이마까지 깎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40) 이는 포은(圃隱)선생이 태어나기 60년 전의 일입니다. 나라에는 이미 제도로 정해졌고 백성들에게는 풍속으로 굳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포은이 오랑캐의 풍속을 깊이 부끄러워했을지라도 어찌 홀로 옛 도로 되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애초부터 변란을 당하여 온통 도도하게 흘러간 것과는 매우 다르니, 그것을 허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랑캐 풍속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중화의 풍속은 마땅히 존중해야 함을 그는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원나라를 끊고 명나라를 섬기는 의리를 세워서 오랑캐 의복을 혁신하여 중화의 복제를 따를 것을 요청했으니, 《춘추》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공에 어떠합니까. 어찌 그가 만세에 세운 존왕양이의 공은 버리고 단지 초년에 옛 제도를 따른 것을 가지고서, 오늘날 머리를 깎는 것이 아무런 해가 없다고 둘러댑니까. 미혹된 견해를 버리고 변발과 체두의 변론에 대하여 이러한 관점으로써 수정한다면 아마도 온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태백(泰伯)이 머리를 깎은 것은 자신 스스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것일 뿐 오랑캐 풍속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니니, 모 씨가 (태백의 단발을) 인용할 것은 아닙니다. 그 편지에서 말한 "우중(虞仲)이 처음으로 단발한 사람이다."는 말도 반드시 그렇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41) 태백이 이윽고 관면(冠冕)42)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었으니, 이것은 중화의 풍속을 사용하여 오랑캐 풍속을 바꾼 것입니다. 우중은 단발을 하고 문신을 했는데, 이는 오랑캐 풍속에 물든 것입니다. 형이 선군(先君)을 위해서 여러 해 동안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예스럽게 만들었는데, 그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자 하루아침에 그와 반대로 하여 몸소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다시 오랑캐로 돌아가니, 그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서 이치를 훼손하며 전례(典禮)를 경솔하게 바꾸어서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을 크게도 파괴시켰습니다. 공자의 《춘추》 의리에 비춰보면 마땅히 엄히 배척해야 함에도 부족하거늘 어찌 청성(清聖)43)인 백이, 숙제와 나란히 일민(逸民)44)으로 나열할 수 있겠습니까?제가 망령되이 태백과 우중의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그들은 왕위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하게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서 이제 자신들을 등용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니,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단발을 하고 문신을 하였습니다. 계력(季歴)이 이윽고 왕위에 오르자 다시 염려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오(句吳)45)의 임금이 되어서는 머리 자르고 문신하는 것을 버리고 관면을 썼으며 아울러 그 백성들의 풍속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력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백과 우중은 반드시 모두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관면을 쓰고 오랑캐 풍속을 바꿨을 때는 우중에게도 그런 공이 있었다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竊意辮與剃形雖不同, 其爲夷狄之俗一也, 不可區分於二者, 而左右之也.且按《麗史提綱》《文獻備考》, 皆云'忠烈王四年戊寅, 令百官學生皆剃頭', '恭愍王二十三年甲寅, 禁剃額,' 蓋麗俗雖則辮髪, 亦未嘗不剃其額也, 此在圃隱之生六十年前.國有定制, 民有成俗者已久, 圃隱雖深恥胡俗, 安得獨反古道乎? 此與始初當變, 一轍滔滔者大異, 不足為累也, 惟其深知胡之可恥華之當尊也.故建絕元事明之義, 請革胡服襲華制, 其春秋尊攘之功, 顧如何哉? 烏可舍却萬世尊攘之功, 只將初年之因仍舊制者, 誠成今日剃髮之無傷也乎? 迷見且置, 辮剃之辨, 添入此意, 修潤恐穩, 未知若何?泰伯之斷髪, 爲其示不可用, 非爲從蠻俗也, 則固非某人之所當引用者.至於它書所謂虞仲始斷髪者, 未信其必然.泰伯既以冠冕, 易荊蠻, 則是用夏變夷也.虞仲乃斷髪文身, 則是變於夷也.兄爲先君, 積年盡心, 化民禮俗, 其弟嗣王, 一朝反之, 身率其民, 復歸於蠻, 則其忍心害理, 輕改典禮, 有壞華夷之分也, 大矣! 在孔子春秋之義, 宐其嚴斥之不暇, 何得與夷齊之清聖, 并列爲逸民乎? 區區妄測泰虞之心, 爲其避位也.故不得已逃荊蠻, 爲其示不可用也.故不得已斷髪文身.至於季歴既即其位, 則無復可慮矣.故爲句吳之君, 棄斷文而服冠冕, 幷易其民俗也.然則季歴即位之前, 泰虞必俱爲斷文矣, 冠冕易蠻之時, 虞仲必與有其功矣. 충렬왕……했다 충렬왕 4년(1278)에 나라 안에 영을 내려 머리를 깎고 원나라 의관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왕이 세자로 있을 때 변발(辮髮)에 호복(胡服) 차림을 하고 원나라에서 오자 국인(國人)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려사(高麗史)》 권28 〈충렬왕세가(忠烈王世家)〉 공민왕……금지했다 공민왕은 이연종의 말을 듣고 변발을 풀고 호복을 벗었으며, 이후 이를 금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6 〈공민왕(恭愍王)〉 대개……아니었으니 원의 개체변발(開剃辮髮)의 영향으로 고려도 이러한 변발을 하였고, 청대에는 전체후변(前薙後辮)의 양식. 후창은 원래 변발이란 이마를 깎지 않는 것인데, 고려시대 변발은 이마까지 깎은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우중이……없습니다 태백(泰伯)은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의 장남이다. 우중(=仲雍)은 태백의 동생이다. 고공단보는 셋째 계력(季歷)과 그의 아들 희창(姬昌)을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다. 태백은 부친의 생각을 알고 동생인 우중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쳐서 몸에 문신을 하고 단발을 했다. 관면(冠冕) 옛날 임금이나 관리가 쓰던 모자인데, 이곳에서는 모자를 쓰는 관습으로 사용되었다. 청성(淸聖)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다.〔伯夷聖之淸者也〕"라는 말이 있다. 일민(逸民)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일민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유하혜(柳下惠), 소련(少連)이다." 하였으니, 학문과 덕행을 지니고서도 초야에 묻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오(句吳)의 임금 태왕(太王)의 맏아들인 태백이 세운 나라이다.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에게 나라를 사양하기 위하여 피(避)하여 형만(荊蠻)에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구오(句吳)라 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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