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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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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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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전사견에게 보냄 을해년(1935) 10월 與田士狷 乙亥 十月 일전에 희숙(希淑)64)을 석동(席洞) 묘제에서 만났습니다. 희숙이 말하기를, "현암(玄巖)으로 가서 김상(金庠)65)을 만나 그에게 문장을 다시 고쳐 사죄하라고 고한즉, 김씨가 말하기를 '일을 하고 싶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오늘날 오진영이가 나의 동정을 엿보아서 장차 어찌하려고 하니, 내가 경솔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상사의 이 말은 다 칭탁(稱托)66)하는 말입니다. 단지 고치지 않을까를 근심할 뿐이지, 만일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오진영이도 간재가 스승이므로 장차 무슨 말로 죄를 짓겠습니까?희숙이 또 말하기를, "박인규(朴仁圭)가 나의 책상에서 형님께서 김상사를 언급한 편지를 보고 낯빛을 바꾸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후창이 어찌하여 우옹(尢翁)67)을 폄하한 전일중(田鎰中)과 더불어 친후하단 말인가요?'였습니다"라고 희숙이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온 조선을 움직여서 대사(大事)를 거행하여 평일에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어이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두렵고 두렵습니다.또 책상 위에 있던 편지글에서는 다만 그 고친 것이 명백한 것을 보고서 대응한다고 말했는즉, 본래 가히 노할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더욱 두려워할만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우옹을 폄하했다면 어찌 그 사람을 직접 성토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과 친한 자가 김씨를 논하기를 기다려서 아울러 성토하겠습니까? 그러니 실제로 그런 일이 없고 단지 불과 우옹을 머리에 이고서 김씨를 보호하는 패자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옹을 모독하고 희롱하는 죄를 어디에다 귀결시켜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고, 실제로 통분할 일입니다.희숙이 또 말하기를, "현암에 가서 들어본즉, 형님께서 박진호(朴震鎬)에게 김씨의 문장을 받지 말라는 말을 권해서 윗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아! 우리들이 당일에 신중히 고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고 또 심지어는 그 말이 쓰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도리어 조소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행했던 것은 진실로 창암 선생을 위한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생각했던 대로 명월주(明月珠)68)를 암실에 던졌다면 누가 그 보배로움을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만 번 남에게 비웃음을 받더라도 부끄러운 바가 없고, 도리어 비웃은 자들의 식견이 없음을 제가 비웃었습니다. 양가의 교분이라든지 유명간의 믿음이라든지 사실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사람을 기극(忌克)69) 할 지경으로 귀결시키니 어찌 이런 자는 운수를 모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희숙이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희숙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진호(震鎬)70)에게 인척의 교분은 그만두더라도, 교학의 의리가 창장에게 있다고 칭한 즉, 간재의 문하에 출입한 지 30년에 도의로써 서로 믿는 것이 늙거나 젊다고 하여 차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스승의 일로 인하여 창장과 함께 음적의 화를 입은 즉, 실로 생사에 있기 어려운 연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대신 창암의 집안 행장을 초안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진호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나에게서 구하여 이미 집안 행장문을 유실하고 다시 저에게 청해서 제가 그를 위해서 다시 행장문을 본초가 없어진 이후에 완성해주어서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서로 관련됨이 이와 같아서 이로 인해 문장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논급했습니다. 또 연전에 오진호가 그 조부의 문자를 모씨의 집안에서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안은 간옹의 일에 불만이라는 것을 말해서 만류시켜 그친 일이 남아있습니다. (희숙에게 일러 말한 끝부분에 " 표시를 해야하는데 차직 힘듭니다)지금 정성으로 간옹을 섬기는 것이, 문인과 다름없던 창암이었습니다. 그 사후의 문자를 간옹 생전에는 스승으로 섬기다가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홀연히 배신하고 떠난 여흥 김씨에게 문자를 청하니, 어찌 모른 척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을 보듯이, 냉담하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오진호 조부의 원고 일은 저에게 방문하여 질의한 즈음에 있었습니다! 김씨의 집안은 높고 문장도 아름답습니다. 오진호가 이를 사모하여 그리했겠지만 그러나 유독 삼세(三世)의 교분과 우의, 장초가 관련된 정리는 김씨가 능히 먼저 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는지요.71)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만이지, 아울러 가히 말할 수 있는 정리까지 생각지 아니하고 비웃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비록 오진호가 여전히 나이가 적어서 깊이 말할 것이 없지만, 모든 이러한 말들은 어찌 일어나야 할 때에서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다시 희숙이 말하기를, "내 또한 처음에 듣고서 형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였을까? 하고 의심을 하였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 보니 진실로 옳고 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오형께서는 박인규(朴仁圭) 등이 연명하여 편지하는 것에는 일종의 의사(意思)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또 선사의 문인인 김진식(金璡植)의 이름이 끼어있는 것이 뜻밖의 변고라 여겼기 때문에 다소의 개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나, 예로부터 국가의 변란은 항상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왕실의 관채(管蔡)72)의 일부터도 그러했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뿐이겠습니까?금일 오진영과 김용숙의 변란이 나온 것은 선사의 가까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김진숙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이 일 때문에 즐거움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위정척사의 기가 꺾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락자저'는 전사견이 보낸 편지의 말입니다. 유경조(柳景肇)가 말하기를, "김중옥(金仲玉)이 김종현(金鐘賢)이가 논한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73)을 보고 말하기를 '독서 삼십년에 다만 취모(吹毛) 몇 자74) 만을 보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75) 이것은 자정(子貞)이 친히 묶어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중옥이 과연 이런 말을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군자가 치지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정밀히 살펴 밝게 구별하여 겉과 안을 통관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밖에서부터 두루 뭉실하게 본다면 양묵(楊墨)의 인의(仁義)가 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한자(韓子)의 박애(博愛)가 인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맹자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배척했고, 주자는 논하여 한유를 도를 알지 못한다고 논했습니다. 그러니 사람 말에 조금 허물이 있는 것을 밖으로 터럭으로 덮어 능히 볼 수 없다고 하면, 어찌 독서가 귀할 것이 있겠습니까?76) 단지 억지로 끝을 두어 억지로 허물을 찾는다면, 심술(心術)에 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행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컨대 제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이 정도까진 이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서 수십 년에 터럭 이면의 허물을 살피지 못한 자와 그 허물이 있는 것을 알고도 터럭을 취해서 억지로 돕는 자를 싫어합니다. 또 천하가 중화(中華)인데도 유자들이 능히 천하를 중화로 만들지 못하고 이적(夷狄)으로 가게 했다는 오진영의 설은 그 허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가히 엄폐할 터럭도 없음에도 엄폐만을 일삼으니 또한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日前過希淑於席洞墓祀.希言往見金庠於玄巖, 勸其改告由謝罪, 則曰此非不欲爲, 但今吳震泳伺我動靜, 將欲如何. 吾不敢率爾.希言止此此是稱托之辭.只患不改苟能改之吳將何辭而罪之.希又言朴仁圭於獘案,見兄主語及金庠之書, 變色大怒曰, 後滄何以與貶尢翁之田鎰中親厚.希言止此 此非欲動全鮮擧大事. 期遂平日之未遂耶. 可怕可怕.且鄙書只言觀其改之明白而應之, 則元非可怒者, 而猶如此尢可怕也.雖然有人而實貶尢翁, 則何不直討其人. 而待其所親者論金事而幷討耶.可知其無實事,而不過戴尢翁爲護金之干牌也.然則侮弄尢翁之罪,何所歸乎.非可怕而實可痛也.希又言往玄巖聞之, 則兄主勸朴震鎬勿受金文之言, 爲衆笑囮.噫吾輩當日守告而不憚煩, 至慮其言不見用反見嘲笑, 而猶且爲之者, 亶出於爲蒼巖一念矣.果然如其所料, 投明月於暗室, 孰知其爲寶今雖萬被人笑.實無所愧, 反笑笑之者之無見也.不思兩家之契分, 幽明之相信, 及事實關係之如何, 而遽歸人於忌克之科, 豈非不知數者耶.余謂希曰, 吾於震鎬, 戚分姑舍, 而稱有敎學之誼於蒼丈, 則出入艮門三十年, 道義相信, 不以老少而有間.以至於因師事而同受陰禍, 實有死生難忘之故.故代草家狀之文.震不於他而求吾, 旣又遺失狀文, 再請於吾, 吾乃爲之再成狀文於無本草之候, 而不憚勞.相關如此, 因而論及受文, 在所當然.且年前震欲受其祖文字於某家.吾爲言其家不滿艮翁事而止之, 己事在焉.今以誠事艮翁, 無異門人之蒼巖.身後文字,請於師事艮翁生前,而忽然倍去山頹後之驪金也, 豈容越秦視而不爲之一言乎.况在震以祖稿事,訪余質疑之際乎.金之地閥高矣, 文章美矣.震雖慕此而然, 然獨不念三世契誼, 狀草關係之情理.非金之所能先乎.不用忠告則不用已矣,幷不思可言之情而笑之者何哉.雖震尙年淺不足深言, 几此云云, 豈非起於起處乎.希曰吾亦始聞而疑兄主胡至如是, 今承所喩誠然誠然.嗚呼吾兄以朴仁圭等聯書, 有含一種意思,而先師門人金璡植之參名.爲意外之變故.致多少慨歎.此非不然.然從古以來家國之變.常起於肘腋之下.自周室管蔡事而已然.何獨今日乎.今日吳金之變出, 已出於先師之肘腋, 何論金璡植乎.皆不足以此無樂而自沮於衛闢.無樂自沮來書語.柳景肇言金仲玉見金鐘賢所論陰作鄭節士傳曰, 讀書三十年, 只學得吹毛覓疵.此子貞親聞而傳者也.弟謂子貞曰, 吾雖未知仲玉果有此言, 然君子之致知窮理, 貴在精察明辨, 通貫表裡.若自外泛觀, 則楊墨之仁義, 非不爲德, 韓子之博愛非不爲仁, 而孟子斥之以爲異端, 朱子論之以爲不知道.若人言之有疵者, 外爲毛掩而不能見, 則烏足貴乎讀書哉.但有意吹覓,則有害心術.故君子不爲也.吾自信汙不至此矣.吾則又惡夫讀書數十年, 不能察毛裡之疵者, 與夫知其有疵而取毛强掩者也.且此天下華而儒不能華天下卽夷之說, 其疵易見, 幷無可掩之毛者,而專事掩覆, 則其心術又當如何哉. 희숙(希淑) 후창의 족제이다. 김상(金庠) 김씨 성을 가진 성균관 유학생으로 김용숙을 말한다. 칭탁(稱托) '핑계'를 이르는 말이다. 우옹(尢翁) 우암 송시열을 말한다. 명월주(明月珠) 《사기》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은 좋은 보배를 몰래 길 가는 사람에게 던지면 칼자루를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그 까닭은 이유 없이 자기 앞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기극(忌克) 다른 사람의 재능(才能)을 시기하여 꺼리고 능멸하는 것이다. 진호(震鎬) 오진영의 아우인 오진호인 것 같다. 오진호가……않았는지요 창암이 죽은 후 간재를 비판했던 김씨의 글을 받았다면 죽은 창암이 받아들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관채(管蔡)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다. 주공의 동생들로서 중앙 정부에 반감을 품고 마침내 은(殷)의 반경(盤庚)과 더불어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켰다. 음작정절사전(陰作鄭節士傳) 음인이 지은 정절사전이다. 취모(吹毛) 몇 자 남의 허물을 억지로 찾아내는 것을 이른다. 아마 남을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유경조……했습니다 오진영이가 쓴 《정절사전》이 있고, 오진영이가 쓴 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였다, 즉 오진영이가 쓴 책을 김종현이가 논하고, 김중옥이가 김종현이 논한 글을 보았다. 그러니……있겠습니까 이 말은 김중옥의 말을 찬성한 것으로, 김중옥은 오진영을 비판한 사람이다. 남의 허물 있는 말을 터럭으로 덮어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독서가 귀할 것이 없다. 독서가 귀한 것은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허물을 지적해 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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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여우 석하에게 답함 신유년(1921) 答李汝禹 碩夏 ㅇ辛酉 택술(澤述)은 품격이 저열하고 학문이 거칠어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찌 오형께서 지금 시대의 현인과 호걸의 높은 덕과 넓은 학업을 나에게 장려하시면서 정함(庭函)81)의 아래에서 들었다고 한 것을 어찌 뜻했겠습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 장차 어떤 말로 사례해야 하겠는지요. 형이 잘못이라고 여긴다면, 그 선생 장자의 가르침은 어찌 잘못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사람이 아님을 어찌하겠는지요. 이는 아마도 제가 내면의 덕을 버리고 겉만을 꾸미며 실질을 제거하고 화려한 것에만 나아갔기 때문에, 선생 장자께서 그것에 속임을 받아서 우연히 소시(所試)의 칭찬82)을 두어서 그 장래를 기약한 것뿐입니다.83)형께서 미처 말의 뜻을 잘 살피지 못하고, 현재 성취된 실제적인 미덕으로 오인하였습니다. 이는 저의 입장에서 진실로 스승과 부친을 속이는 것이 되거니와, 형의 입장에서도 또한 소홀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남몰래 스스로를 닦아서 소박하고 진실한 덕을 짊어질 것을 제가 마땅히 힘쓸 터이니, 정밀하게 살피고 밝게 살펴서 사람 칭찬을 구차하지 않는 것은 형도 가히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구하는 은근한 뜻은 당신의 깊은 마음에서 나와서, 요컨대 겉으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형에게 만일 가히 규간할 허물이 있거나, 가히 보완할만한 흠궐이 있다면 어찌 감히 침묵하여 취용(取容)하여 스스로 선유(善柔)84)의 죄에 빠지겠습니까? 다만 제가 형을 보건대 덕의 모습이 화락하고 뜻과 행동이 돈실하고 언론은 상세합니다. 저처럼 노둔한 재주로 쫓아갈 바가 아니거늘85) 또 어찌 감히 억지로 드러나지 않은 허물과 흠결을 찾아서 구차히 꾸짖는다는 비판을 취하겠습니까? 굳이 저에게 말을 구하신다면, 또한 정밀하게 살피고 사람을 구차히 칭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불과 단지 이 사람을 잘못 칭찬한 것으로 인하여 당신께 개진할 따름입니다, 이 일 이후로도 또 어찌 알겠습니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있어서 가히 옥(玉)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고, 반딧불같이 작은 불빛이 햇빛을 도울 일이 없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편지에서 "자기를 버리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기 바랍니다."86)라는 훈계를 주셨는데, 진실로 증세를 진단하여 약제를 투여하고 굶주림을 가련히 여겨서 식량을 진휼한 것과 같으니, 우리 형의 진실된 마음이 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은 충고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벗이 있으니, 어찌 은혜를 새기고 의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형 또한 어찌 저의 병폐를 모두 알아서, 작은 악과 숨겨진 사특함까지 한 번 쓸어서 없애겠습니까? 오로지 훗날 더 자세히 살펴서 더 맹렬하게 다스려 줄 것을 바랍니다.대저 우리들이 서로 닦고 서로 힘쓰게 해서 세한(歲寒)을 기약해야지, 어찌 갑자기 짧게 편지를 오고가는 사이에 효과를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붕우지간의 도리가 상실된 지가 오래입니다. 저 아침에는 금란지교(金蘭之交)87)와 같다가 저녁에 풍파(風波)를 일으킨 자들은, 진실로 친구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명색이 유문의 도의로써 교유한다고 이름 하는 자들도 책선(責善)88)하고 잘못을 보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더 나아가서는 칭찬하여 그 장점을 치켜세우다가, 물러나서는 비난하면서 단점을 드러내는 자는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잔인하고 이치를 해치는 것이 또한 매우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는 혹 의론이 합치되지 않는 점으로 인하여 서로 병장기를 쓰는 일까지 이르게 되니, 풍속을 해치고 세상에 화를 끼치는 것이 더욱 참혹합니다.저는 비록 불초하지만 이러한 무리들을 보기를 기슬(蟣蝨)89)보다도 더 천하게 여기고 치아(鴟鴉)90)보다 더 미워합니다. 제 마음으로 이미 미워하니, 어찌 차마 제 자신이 친히 이러한 일을 범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세풍(世風)에 구속되고 습속에 익숙해져서91) 혹 그렇지 않기를 기약하지만 그럴 경우도 있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형과 더불어 따로 맹세와 훈계를 세워서 혹여라도 끝내 소인의 교유로 귀결되지 않기를 생각합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저와 같은 마음이라 즐겨 들을 것이라 여깁니다.본심(本心)이란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過不及)이 없다는 명칭입니다. 다 이치에 합치되지 않아서 과불급이 있다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비록 도심(道心)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되지 못하고, 모두 이치에 합치되어서 과불급이 없다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심이라 할지라도 본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용(中庸)》 서문에서는 본심을 인심과 도심을 공통하여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혹 그대의 견해와 합치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澤述品劣學踈, 最出人下者也.何圖吾兄以當世賢豪德崇業廣, 見獎謂是聞諸庭函之下.弟於此將下辭以謝之.謂兄之誤也, 其於先生長者之敎,何不誤也.則弟非其人何.此殆弟遺內飾外, 去實就華, 先生長者爲其所欺, 偶有所試之譽, 而期其將來.兄未及諦察語意, 認以爲見成之實美也.是則在弟固爲誣罔, 而在兄亦不免踈忽也, 要之闇然自修, 朴實負荷, 弟當勉勵, 精審明察, 譽人不苟, 兄可留意歟.求敎之勤, 認出肝膈赤衷, 要非皮面白談.兄苟有過可規闕可補者, 安敢噤默取容, 自䧟於善柔.但以弟見兄, 德容之和睟, 操履之敦實, 言論之詳覈.有非弟十駕之追者, 又何敢强覓過闕於未形, 以取苟訾之譏哉.無已則亦惟曰精審明察, 譽人不苟, 不過因誤獎此漢而陳之己矣.繼此以往, 又安知不有他山之石.可資攻玉, 螢火之爝, 倘助日光乎.蒙惠舍已愼獨之戒, 誠診證投藥, 憫飢賑粮, 不有吾兄實心, 惡能忠告乃爾.有友若此, 寧不鏤恩服義.雖然兄亦安得盡知弟病, 纖惡隱慝, 一刷刷下.專仰異日察地細而洽之猛耳.大抵吾輩交修胥勖,歲寒以之,何可遽責效於造次往復之間耶.噫友道之哭久矣.彼朝金蘭而夕風波者,固不足道也.名爲儒門之道義交者, 不惟不責善補過而已, 乃有進而潝潝然推其長, 退而訿訿然揚其短者, 比比焉.其忍心害理, 亦已極矣.甚或至於因議論之不合, 成戈戟之相尋, 傷風禍世, 尢其慘矣.弟雖無似, 視此輩不啻賤之若蟣蝨,惡之若鴟鴉.心旣惡之,豈忍身親犯之.雖然世風之囿, 俗習之憤, 或不免不期然而然者, 故思欲與吾兄另立誓戒, 毋或終歸小人之交也.仰想同情而樂聞也.本心者,合於理而無過不及之名也.以其未盡合理而有過不及者言,則雖道心不得爲本心,以其盡合於理而無過不及者言,則雖人心亦得爲本心.故曰庸序本心通人道心而言.未知此或合於盛見否. 정함(庭函) 정은 부친을 말하고 함은 스승을 이른다. 즉 부친과 스승이다. 《논어》 〈위령공〉에 "만약 칭예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은 시험해 봄이 있는 것이다.〔如有所譽者,其有所試之矣.〕"라고 하였다. 이는……것 뿐입니다 이 말은 '선생 장자께서 나의 겉모습만 보고 한번 칭찬한 말을 두어서 앞으로 현호(賢豪)가 될 것이라고 기약만 둘 뿐'이라는 것이다 선유(善柔) 《논어》〈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세 가지이며, 해로운 벗이 세 가지이니, 곧고 진실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며, 편벽되고 아첨을 잘하고 말만 잘하면 손해가 된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라고 하였다. 저처럼……아니거늘 본문의 십가(十駕)는《순자》〈수신(修身)〉에 "천리마가 하루에 천 리를 달리지만,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 자기를 버리고……바랍니다 근독(謹獨)은 홀로를 삼가는 것으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남이 보지 않는 유독(幽獨)의 곳에서 조심하는 것과 남이 모르고 자신만이 아는 은미(隱微)한 마음을 삼가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세미한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라고 하였다. 금란지교(金蘭之交)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하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 상(繫辭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예리함이 쇠를 끊는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 단금지교와 지란지교를 합한 말이다. 책선(責善) 상대방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책선은 붕우 사이에 적용되는 도리이다. 부자가 책선하는 것은 은의(恩義)를 해치는 것 가운데 큰 것이다.〔責善, 朋友之道也. 父子責善, 賊恩之大者也.〕"라고 하였다. 기슬(蟣蝨) 사람에 기생하는 이[虱]로서 옷엣니와 머릿니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와 서캐이다. 치아(鴟鴉) 솔개와 갈까마귀이다.《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사람은 가축을 잡아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까마귀는 쥐를 좋아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인가?〔民食芻豢, 麋鹿食薦, 蝍蛆甘帶, 鴟鴉嗜鼠, 四者孰知正味?〕"라고 하였다. 본문의 분(憤)은 관(慣)의 오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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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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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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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우에게 보냄 임술년(1922) 與李汝禹 壬戌 적막한 물가92)에 가히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고, 단지 밭 사이에 늙은 농부를 따라서 날마다 농사일을 하니, 도리어 학도들을 모아놓고 허튼 변론을 일삼은 자보다 진실함이 있다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해가 저물고 나면 호미를 메고 돌아오면서93) 말하기를, "오늘도 가히 공짜 밥을 먹지 않았다고 이를만하다"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삼연옹(三淵翁)94)이 "세간만사는 모두 허위요, 오직 봄날에 소를 끌고 가는 소리만 약간이나마 사람의 뜻을 굳건하게 한다"는 말을 읊으며 내 자신을 견주곤 합니다.백수(白水)에 사는 양공(楊公)은 그 학문은 논의가 독실하고 행동은 더욱 진실하며, 문사에 통달했으며 이치가 더욱 수승(殊勝)95)합니다. 참으로 천상(泉上)의 덕망과 지혜가 높은 제자요, 남녘의 으뜸가는 학자입니다. 학업을 마치고 남긴 문집이 나를 일깨움이 매우 많습니다. 저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에 이르러서는 후학의 의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일찍이 듣건대 교감자의 안목이 문집을 짓는 이보다 높은 연후에 교감의 일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교감하는 일은 천루(淺陋)한 제가 전혀 감당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미 무릅쓰고 맡았으니, 의심나는 대목에 산정(刪定)할 곳을 띠지로 표시하여 본가의 재결을 기다리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본 문장 가운데 큰 논의로써, 편(篇)마다 문장마다 대부분 이런 뜻96)이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면 크게 작자의 본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듣건대, 남의 문집을 교감하는 자는 임의대로 산정하고 제거하여 본래의 면목을 허물어뜨려선 안 됩니다. 만일 이를 멋대로 산정하고 범하여 본래 면목을 없애면, 이는 교정자의 문집이지 작자의 문집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 또한 이치가 있습니다. 제가 이 문집에 대해 감히 첨삭하지 못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입니다. 그러니 그대의 고견으로는 어떻게 여기시는지 모르겠습니다.암경(巖卿)97)이 갑자기 고인이 되셨다는데 이 어찌된 일일까요? 그 외의 학문에 정미한 곳은 비록 내가 깊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우리 당의 빼어난 선비이거늘, 오늘 이 지경이 되었다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만시(挽詩) 한 편을 보냈으니 조만간 혹 당신께서도 볼 수 있겠습니다. 寂寞之濱, 無人可與語者, 惟逐田間老農, 曰有所事, 覺得反有實於聚徒浮辯者.日旣暮, 荷鍤而歸曰, 今日可謂不素食矣.時誦三淵翁世間萬事, 都是虛僞, 惟春日野中叱牛聲, 差强人意之語, 以自况耳.白水楊公, 其學也論篤而行益實, 辭達而理尢勝.信乎其爲泉上高足, 南中巨擘.卒業遺集, 警發弘多.至如太極兼氣, 神爲太極, 天有三氣, 心合理氣, 知覺智用諸說, 則不無後學之疑矣.嘗聞校讐者眼目, 高於作者然後.乃可濟事, 是役也萬非淺陋之可堪者.然旣已冒當, 則籖刪疑案, 俟本家裁決, 似無不可.但此爲本集中大議論, 篇篇章章多, 是此義, 此而剛却, 大非作者本旨.抑又聞之, 校人文集者, 不可任意剛抹, 壞却本來面目.如其犯此, 是校正者之集, 非作者之集, 此言有理.弟於是集, 不敢籤剛者, 亦此意也.未知高見以爲如何.巖卿遽作古人, 此何事耶.他精微去處, 雖不可深悉, 大抵是吾黨秀女, 令焉至此, 安得不悼惜也.曾有挽詩一篇送往, 早晩或及雅覽也. 적막한 물가 본문의 '寂寞之濱'은 보통 자기가 사는 곳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해가……돌아오면서 《시경(詩經)》〈채미(采薇)〉에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해 또한 저물리로다.〔曰歸曰歸, 歲亦莫止.〕"라는 구절과, "옛날에 내가 길을 떠날 때에는,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졌는데, 지금 내가 돌아올 때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도다.〔昔我往矣, 楊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라는 구절이 나온다. 삼연옹(三淵翁) 조선 숙종 때의 시인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을 가리킨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하였다. 수승(殊勝) 뛰어나고 훌륭함을 이른다. 가장 빼어난 일로 세상에 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이다. 이러한 뜻 태극(太極)은 기(氣)를 겸하고 신(神)은 태극이고, 하늘에는 세 가지 기가 있으며, 또는 마음은 이기(理氣)를 합친 것이라든지, 지각(知覺)과 지용(智用)의 여러 학설을 말한다. 암경(巖卿) 허업(許業, 1883~1922)이다. 기우만, 곽종석, 전우를 금세의 장덕으로 여겨 알현하였다. 1922년(임술년) 2월 24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선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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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7 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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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조(租)의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癸卯 十月十五日 山直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장부 1902년 산지기 등의 조(租)의 수량을 적은 문서이다. 산지기와 준룡(俊龍), 복남(卜南)의 조를 각각 기록하였다. 조 아래에는 비용 내역을 적었다. 끝에는 이듬해 10월 15일의 산지기의 구조(舊租)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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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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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장부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李鐺 李鐺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 이당(李鐺)의 소유토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이다. 가지번(假地番)과 면적으로 구분하여 다섯 곳의 현황을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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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사문계(私門稧)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甲申四月 甲申四月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 1884년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문중 계원들에게 분배한 계문서이다. 이때 도조로 받은 곡식이 모두 17석 18두이다. 이를 석당 9냥씩으로 몇 사람에게 분배해 주니 모두 150냥2전이다. 이중 백 냥은 4월 21일에 큰댁으로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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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영회운(耆英會韻)이라는 시제의 시문(詩文) 고문서-시문류-시 李冕容 李冕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기영회운(耆英會韻)이라는 시제의 시문 2수 기영회운(耆英會韻)이라는 시제의 2수이다. 이면용(李冕容)과 양우(梁瑀)가 각각 지은 7언시이다. 각 시는 수정된 부분이 있다. 기영회는 70세 이상 노인이 모인 경로회이다. 문서의 상태가 손상된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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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모음 고문서-시문류-시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모음 영보재(永報齋) 관련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회산(晦山), 해사(海史), 초산(楚山), 석오(石梧), 석성(石醒) 등 5명의 시이다. 영보재(永報齋)는 송간(宋侃, 1417~14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800년(정조 24)에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1920년과 1979년에 중수하였다. 송간은 호가 서재(西齋), 시호가 충강(忠剛), 본관이 여산(礪山)이다.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관직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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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윤재진(尹在晉)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乙榴夏二日 尹在晉 可川伊彦宅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40_001 1905년 5월 2일에 윤재진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간찰 1905년 5월[榴夏] 2일에 윤재진(尹在晉)이 아무개에게 집안의 근심 때문에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고, 대나무를 보낸다는 추신이 있는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날마다 집안의 근심이 생기고 사업을 억지로 일으켜보지만 잘 되지 않아 이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면목(面目)을 대신할 자료로 삼는다. 노인 봉양하는 일은 배나 고민이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부탁한 크고 작은 대나무를 바꾸어 보내는데 쓰기에 합당한지 모르겠다고 하며 가격은 6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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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3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壬八念五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이 사위에게 풍두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간찰 1902년 8월 25일에 윤기섭(尹璂燮)이 사위[東床]에게 풍두(豐頭)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보낸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부모님 모시고 공부하느라 고달프리라 생각하는데, 자신은 머리가 계속 흔들리는 풍두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어 스스로 서글퍼진다고 하며,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돌아봐 주기를 원하는 자신의 바람에 부응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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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이지용(李志容)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辛亥九月十九日 李志容 可川李 辛亥九月十九日 李志容 可川李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911년 9월 19일에 시하생 이지용이 객사에서 묵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고충을 전한 간찰 1911년 9월 19일에 시하생 이지용(李志容)이 객사에서 묵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고충을 말한 편지이다. 피봉이 있다. 객사(客舍)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미천한 몸으로 공의 문하에 어울리지 않지만 평소에 정성스럽게 보호해주는 것을 함부로 믿어서 백리도 멀다 하지 않고 왔는데, 진실로 한 푼도 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이와 같을 수 없다. 이에 회정(回程)한 후에 어찌 만나서 토론할 때가 없겠느냐는 내용이다. 추기가 있는데 황향(黃香) 13매(枚)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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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重陽前二日 尹璂燮 東床 重陽前二日 1902 尹璂燮 東床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6_001 모년 8월 29일에 윤기섭이 사위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은 신병으로 가을철에 매우 괴롭다고 하며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란다는 간찰 모년 8월 29일에 윤기섭(尹璂燮)이 사위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은 신병(身病)으로 가을에 매우 괴롭다고 하며 한 번 돌아봐주기를 바란다는 편지이다. 부모님 모시는 나머지에 학업을 계속해서 긴절하게 힘쓰고 있는지 물었다. 자신은 신병으로 가을이 되어 매우 괴로웠으나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학업하는 중에 겨를이 있으면 한 번 돌아봐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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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윤기섭(尹璂燮)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乙七月十七日 尹璂燮 乙七月十七日 尹璂燮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35_001 1905년 7월 17일에 사제 윤기섭이 장곡 사돈에게 여름 장마와 자신의 더위로 인한 설사와 며느리의 유종에 대한 걱정을 말한 간찰 1905년 7월 17일에 사제(査弟) 윤기섭(尹璂燮)이 장곡(長谷) 사돈에게 여름 장마와 자신의 더위로 인한 설사와 며느리의 유종(乳腫)에 대한 걱정을 말한 편지이다. 올해 여름 장마는 예년보다 배로 심해 모든 것이 막히고 끊어져서 인사가 많이 원망스러운 가운데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어버이는 큰 탈 없으시고, 자신은 더위로 인한 설사로 건강하지 못하다. 며느리는 유종을 다섯 달이나 앓았으나 아직 완쾌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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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안겸수(安謙洙)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七年十月卄九日 安謙洙 同治七年十月卄九日 安謙洙 전라남도 보성군 증인 3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8년 10월 29일에 안겸수(安謙洙)가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68년 10월 29일에 안겸수(安謙洙)가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자기가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갈아먹다가 아우의 부채를 갚고자 문전면 덕봉촌 전평 등자(登字) 논 4두락지 부수(負數) 10복(卜)4속(束)을 전문(錢文) 160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답주와 증필(證筆), 증인이 기재되어 있는데, 답주는 안겸수이며, 증필은 박한표, 증인은 이군서와 김처용이다. 답주 이하 모두의 이름 아래에는 수결이 있는데, 답주는 상중이라 착명하지 않았다. 중간 이하에는 행간에 작은 글씨로 환퇴(還退) 관련 내용을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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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문전면 소재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전라남도 보성군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모년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모년 논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전래해온 논을 여러 해 동안 벼를 받다가 상채(喪債)를 갚을 길이 없어 문전면 덕봉촌 전평 등자(登字) 논 4두락지 부수(負數) 10복(卜)4속(束)을 전문(錢文) 160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환퇴(還退) 관련 내용이 추기되어 있다. 명문의 기재형식에서 앞의 문서명과 뒤의 답주·증인 등에 대한 기록들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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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박역굴(朴汝ㄱ屈) 등의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二月卄三日 朴{汝/ㄱ}屈 光緖三年二月卄三日 朴{汝/ㄱ}屈 전라남도 보성군 朴{汝/ㄱ}屈 외 3인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77년 2월 23일에 박역굴(朴汝ㄱ屈) 등 4인이 선산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 1877년 2월 23일에 박역굴(朴汝ㄱ屈) 등 4인이 선산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임야매매명문(林野買賣明文)이다. 변고가 있는 해를 당해 모든 자손이 살아나갈 길이 없어 종회 의논에 의거해 본군 문전면 가천촌 가력동 선산 금양국내(禁養局內)를 전문 11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산주(山主)의 기록이 있는데, 한량 박역굴과 약수, 득추, 순철 등이다. 이름 아래에 수결이 있다. 매득자의 직역과 성명은 기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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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선영준(宣永準)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同治八年正月十三日 宣永準 同治八年正月十三日 宣永準 전라남도 보성군 宣永準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1869년 정월 13일에 선영준(宣永準)이 대송(大松)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 1869년 정월 13일에 선영준(宣永準)이 대송(大松)을 매매하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土地買賣明文)이다. 유래해 온 대밭을 여러 해 동안 집안에서 이용하다가 이사하게 되어 문전면 가천촌에 있는 논밭의 큰 소나무 1주를 전문 7냥에 영영 방매하면서 발급한 증서이다. 전주는 선영준이며 자필(自筆)하였다. 이름 아래에 수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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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기두(李箕斗)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유학은 학교에 적을 둔 양반유생을 가리킨다. 임명된 관직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당상관의 무관 품계이다. 행(行)은 행수법(行守法)이라는 인사 규정의 하나로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이 글자를 붙인다. 용양위부호군은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된 종4품의 무관직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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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이기두(李箕斗) 통정대부(通政大夫)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통정대부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통정대부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을 취득하였다. 그 직후에 또 임명된 관품이 통정대부이다. 통정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3품의 상계(上階)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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