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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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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86년 이기두(李箕斗)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 교지(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李箕斗 光緖十二年 十二月 日 高宗 李箕斗 서울특별시 종로구 施命之寶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914_001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 1886년 12월에 이기두를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에 임명한다는 일종의 사령장이다. 이기두는 직역이 유학(幼學)이었다가 이때 아마도 납속(納粟) 등의 방법으로 관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을 취득하였다. 그 직후에 또 임명된 관직이 통정대부이다. 가선대부는 문관의 품계로서 종2품의 하계(下階)이다. 행(行)은 행수법(行守法)이라는 인사 규정의 하나로서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관직 앞에 이 글자를 붙인다. 용양위호군은 중앙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된 정4품의 무관직이다. 끝에는 날짜를 기재하였는데, 직인을 찍은 부분을 종이를 붙여 가렸다. 광서는 중국 청나라 광서제의 연호이며, 이는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직인은 연호년 위에다 찍었는데, 흐려서 글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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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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住所同一證明願變更前住所 富川郡 蘇萊面 茂芝洞 參統九戶變更後住所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右ハ 同一ノ住所ニシテ 茂芝洞ト 茂芝里ト 大正四年四月一日 行政區域實施ノ結果ニ因リ 且參統九戶ト 貳百七拾參番地ト 大正五年 九月 一日 蘇萊面告示第一號ニ 因リ 變更シタル事 御證明相成度候也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 願人 李宜容 (印)蘇萊面長 殿右相違ナキコトテ證明ス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長 南吉祐 (印)<피봉>宜容住所同一證明 李宜容 殿蘇萊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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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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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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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鑑證明願大正年月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七三番地(印)(印) 印鑑 李宜容開國四百八拾貳年 拾貳月 拾貳日生右ハ 拙者使用ノ印鑑ニ相違無之旨 御證明相成度奉願候也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 茂芝里 貳百七拾參番地 右願人 李宜容 (印)蘇萊面長 南吉祐 殿面第貳參參號印鑑臺帳ニ照シ 右印鑑ト 相違ナキコトテ證明ス大正五年 拾貳月 九日 富川郡 蘇萊面長 南吉祐 (印)<피봉>茂芝里 李宜容 處 宜容印鑑證蘇萊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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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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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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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주백에게 보냄 경인년(1950) 與金周伯 庚寅 형이 권순명을 데리고 나에게 와서 그와 화해시키려는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先師)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권순명에게 "만약에 간옹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면 어찌 간옹선생이 되셨겠습니까?"라고 하니, 권순명이 내 무릎을 어루만지며 온화하게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온당치 않습니다. 이제 그만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우리들이 맹자가 공자를 존중하듯이 간옹을 존중한다면 무슨 온당치 않음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공자가 위나라에서 옹저(癰疽)를 주인 삼았다면48) 어떻게 공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자, 권순명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후에 다시 편지로 질문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 계속 음성의 오진영을 존경하며 믿었습니다. 근래에 친구 정교원(鄭喬源)이 '은행나무 밑 대나무 평상에서 말한 것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애매하게 대답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필 나한테 묻습니까?"라고 말하고, 바쁜 일이 있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나가버렸습니다. 그의 뜻을 살펴보건대, 선사께서 인가받으라는 뜻을 지니셨다는 그의 말이 뚜렷하니, 이는 어찌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내가 저들과 30년 동안 절교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절교된 것은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고, 저들이 사람을 보내와 화해를 청한 것이 한 번이 아닌데 끝내 응하지 않은 것도 단지 이 하나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70이 되어 죽게 된 때에 갑자기 이 일을 잊고 스승을 무함한 자들과 함께 화해를 한다면 어찌 똑같이 스승을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만약 이전의 견해를 통렬히 고쳐서 반기를 들어 오씨를 성토하고 선사의 묘소에 달려가 고하고서 동문의 여러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사과한다면 내가 장차 가서 만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들이 비록 나를 찾아온다 하더라도 어찌 얻는 것이 있겠습니까?형은 이 일에 대하여 이전에 있었던 양쪽의 시비에 대하여 다소간 말한 것이 있는데, 지금 화해시키려 하는 것은 그들이 잘못을 고쳤는가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나 일처리 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그 마음의 변화를 완전히 알기 전에는 절대로 가볍게 허락할 수 있는 이치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형은 이미 저 사람과 인친관계를 맺어 친밀함이 더욱 절실하니, 반드시 성심으로 그들을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선뜻 뉘우치고 깨달아 끝내 사문(師門)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한다면 나도 그들과 화해할 날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兄之欲携權就我, 與之和解者, 意亦善矣. 但此事非關吾身, 關乎先師. 吾嘗語權曰: "若有認意, 何以爲艮翁?" 權按吾膝而溫言曰: "如此則未安, 已之已之." 吾曰: "吾輩之尊艮翁, 若孟子之尊孔子, 有何未安? 孟子豈不曰: '孔子主癰疽, 何以爲孔子乎?'" 權無言. 後又書質, 亦無答, 而一向尊信陰吳. 近於鄭友喬源杏下竹床說有無之問, 模糊不對而曰"如此說, 何必問我?", 方傯忙當去即出. 觀其意, 其謂先師有認意者躍如, 則是豈不爲誣師乎?吾之與彼三十年不絕而自絕者, 只爲此關, 自彼遣人請和者非一, 而終不應者, 只爲此關. 今於七旬將死之日, 忽然打破此關, 與誣師者共和, 則豈不同爲誣師乎? 彼若痛改前見, 反旗討吳, 走告先師之墓, 輪謝同門諸人, 吾將往見, 亦無不可. 不然, 彼雖就我, 安所得乎?兄於此事, 從前之兩邊是非, 有多少云云之說, 今之欲和解者, 亦非謂不問其改革與否而爲之? 然處事之義, 未悉其心面變化之前, 萬無輕許之理矣. 雖然, 兄既與其人通家而親益切, 必將誠心喻之, 使之幡然悔悟, 不終爲師門罪人, 則吾之和解亦有其日, 惟是之望焉爾. 맹자가……삼았다면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만장이 물었다. '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위나라에서는 옹저를 주인으로 섬겼고, 제나라에서는 내시인 척환을 주인으로 섬겼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萬章問曰 : 或謂孔子於衛, 主癰疽, 於齊主侍人瘠環, 有諸乎? 孟子曰 : 否. 不然也. 好事者爲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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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주백에게 답함 신묘년(1951) 答金周伯 辛卯 어제 편지에서 권씨가 저를 보러온다고 하였다가, 잠시 후에 다시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따지는 말을 야기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만둔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가소롭습니다. 맹자께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49)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자께서도 "학문을 하는 것은 단지 잘못을 없애고 옳은 것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50) 하셨으니, 옳은 것과 잘못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더라도 시비를 가릴 수 있는데, 하물며 저에게 있는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부모나 스승과 관계된 일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제가 기꺼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51)이 되어서 학문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죄를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순명은 30년 동안 오진영을 존경하고 믿으면서 나를 배척하여 "오진영에게 스승을 무함한 죄를 억지로 더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화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종전에 저지른 큰 잘못이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어찌 입을 열어서 목구멍을 보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어제가 그르고 오늘이 맞다고 말하지는 않고, 반대로 시비를 서로 질문함에 밑바탕이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독을 남긴 채 봉투를 봉함하는 것처럼 가리고 막아 원한을 숨기고 타인을 벗하는52) 데에 귀착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찌 선비의 마음 씀씀이이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분별하면 분명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53)고 하였습니다. 지금 기왕에 오고자 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니, 피차간에 할 말을 다하고 논의를 다하여 의리를 끝까지 완벽하게 규명하고서 깨끗한 곳에 몸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기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아! 오늘날 학문을 익히는 것이 참으로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이상할 따름입니다. 어제 만났을 때 자리가 좀 멀었고, 말하기는 병중이라 더욱 어려워 자세하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편지를 보내오니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昨枉喻以權欲來見我, 而旋復曰"恐其惹出湖嶺是非說, 則沒滋味, 故罷之", 其言極可笑. 孟子不云乎? "無是非之心, 非人也." 朱子不云乎? "爲學只要去非求是." 是與非在人, 猶當是之非之, 况當於我者乎? 凡事猶然, 况事關父師者乎? 使我甘作非人而不欲爲學則已, 不然, 安得不討吳誣師之罪乎? 權則三十年來尊信吳也, 斥我謂"勒加吳以誣師之罪矣." 今欲來我而親和者, 何意? 如云覺其從前鑄錯之非也, 則何不分明說昨非今是, 若開口而見咽, 反慮是非相質, 底蘊畢露, 欲掩覆遮攔, 若留毒而封皮, 不憚爲匿怨友人之歸? 是豈士子之用心乎? 孔子曰: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 今既欲來則正好, 彼此極言竭論, 以究義理十分到頭, 立身於潔凈之地. 不此之爲, 坐失悔心已萌之機, 更待何時? 鳴呼! 今之講學, 固如是歟? 可異也已. 昨唔時, 坐次稍遠, 語音病中益艱, 未由詳達. 茲復書申, 伏惟諒察. 시비를……아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학문을……것이다 주희는 "학문하는 것은 다만 정성을 다하고 오래도록 견디면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굳이 딴 생각하여 앞뒤를 잴 필요가 없다〔爲學只要致誠耐久, 無有不得, 不須別生計較, 思前算後也〕"라고 하였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60 〈답임숙공(答林叔恭)〉. 사람답지 않은 사람 앞에서 말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원망을……벗하는 공자는 "말을 잘하고 낯빛을 좋게 꾸미며 지나치게 공손하게 함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감추고서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 했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분별하지……않는다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제20장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면 능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분변하지 않을지언정 분변하면 분명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못하거든 그대로 버려두지 말아서,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有不學 學之 不能不措也 有不問 問之 不知不措也 有不思 思之 不得不措也 有不辨 辨之 不明不措也 有不行 行之 不篤不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剛〕"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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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병수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吳極卿秉壽 ○丁丑 근래에 나아가 배알했는데, 자취는 우연인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모색한 것입니다. 받들어 대면함에 있어 꾸밈없이 정성껏 맞아 주시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니 안색은 오랜 친구와 같고 마음은 전일했습니다. 한 마디 말로 일생의 사귐을 정하고 세 잔의 술로 세 희생의 피를 대신하니, 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고 바람이 성취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궁핍한 인생에서 즐거운 일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년에 익우(益友)를 얻은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니, 복분(福分)이 적지 않습니다.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흡족했는데 우러러 두터이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먼저 보내주신 편지를 또 받았습니다. 비할 데 없는 한때의 거친 논설을 인자(仁者)가 정중히 말해주는 예로 간주해주시고, 심지어 '하늘이 우리 노형을 사랑하여 다시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는 말씀을 하시니, 베풀어준 것은 없는데 보답만 받는 것 같아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산에 있는 돌이 비록 거칠지라도 옥을 가는 데에는 유용하고54), 초나라 수도 영에서 보낸 편지가 비록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연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니55), 형 같은 사람은 취하여 미루어나가는 것56)을 잘하여 인을 실천하는데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아!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선비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편지로 교류한다고 명분을 삼고는 더러 자신의 학문을 믿고 잘난 체 하여 정성껏 접대하려 하지 않기도 하고, 더러 단점과 졸렬함을 감춘 채 물어서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죽을 때까지 추종하면서도 끝내 겉으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가까이 지내지만 속으로는 연나라와 월나라의 거리만큼 먼 것을 면하지 못하는 자들은 역시 도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저는 평소에 이런 무리들이 하는 짓을 부끄럽게 여기고 항상 옛사람 대장부의 심사(心事)를 사랑하여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는 사람마다 볼 수 있다'57)는 말씀과 같은 내용을 삼가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우리 형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주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만사는 순식간에 변하고 사라지니 모두 마음속에 담아둘 만한 것은 없고, 오직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58)이야말로 구경법(究竟法)59) 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늙었고 세상과는 어긋났습니다. 푸른 등불 아래 누런 책을 보면서 옛 철인이 남긴 단서를 찾고, 차가운 물과 가을의 밝은 달에서 이 마음이 철저히 밝은 것을 보아서 이른바 구경법이라는 것을 구하니, 우리 형과 함께 서로 권면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책은 다만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이치는 다만 궁구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니, 요컨대 마땅히 스스로 터득한 지취(志趣)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보내준 편지에서 말씀하신, 기쁨을 얻은 것도 많고 의심나는 것도 많다는 것이니, 생각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무릇 기쁨과 의심이 절반인 경우가 자득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됩니다. 모두 의심만 하고 즐거워할만한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의심일 뿐입니다. 모두 기쁘기만 하고 의심나는 것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참된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의심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에 투영시켜서 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참으로 기뻐하면서 자득할 수 있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내온 편지에서는 어찌 기뻐할 것과 의심나는 것을 한두 가지 언급하여 강론하면서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으십니까? 이후에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頃者造拜, 跡若偶緣, 心則積營. 及其承接也, 則削邊之欵, 由中之辭, 面如舊而心惟一, 一言以定一生之交, 三杯以替三物之血, 願始遂而望不負矣. 自以爲竆生快事, 無過於此. 而晚得益友, 私幸, 福分不淺. 歸猶充然, 仰謝厚賜之不暇, 乃承先書. 將一時荒蕪無倫之說, 看作仁者鄭重贈言之例, 至有天惠我老兄, 更起精神之喻, 無施受報, 愧不敢當. 然他山之石雖麁, 而功於攻玉; 郢都之書雖誤, 而資於治燕, 若兄者可謂善取譬而巧爲仁也. 嗟呼! 人之相知, 貴相通心, 士子爲尢甚. 彼名爲文字之交, 而或恃學自高, 不肯欵接, 或護短藏拙, 恥於問學, 終身追逐, 而卒不免靣魯衛而心燕越者, 亦獨何心? 區區平生羞作此輩之為, 常愛古人大丈夫心事, 如青天白日, 人得見之之語, 竊願學之. 而今始遇於吾兄, 何幸何幸? 朱夫子不云乎? '世間萬事, 須叟變滅, 舉無足置胷中, 惟有讀書竆理, 爲究竟法,' 吾儕俱老矣, 且世與違矣. 青燈黃卷, 尋曩哲之遺緒; 寒水秋月, 見此心之照徹, 以求所謂究竟法者, 願與吾兄交勖焉. 雖然, 書不可以徒讀, 理不可以徒竆, 要當有自得之趣. 此則來書所謂得喜處多, 得疑處亦多者, 已思過半矣. 盖喜疑相半, 自得之機關, 皆疑而不知有可喜, 固是疑也. 皆喜而不知有可疑者, 亦未爲真喜. 若能將可疑者反映於可喜者而通之, 則是可謂真喜而爲自得也. 今於來書, 胡不以可喜可疑者一二示及, 而作講明相長之資也? 後勿復然是望. 다른……유용하고 《시경(詩經)》에서는 "학이 구고에서 울거든 소리가 들에 들리니라. 고기가 잠겨 깊은 못 속에 있고 혹은 물가에도 있도다. 즐거운 저 동산에 심어놓은 박달나무여, 그 아래 낙엽이 떨어지는구나. 타산의 돌은 숫돌이 될 수 있느니라.〔鶴鳴于九皐, 聲聞于野. 魚潛在淵, 或在于渚. 樂彼之園, 爰有樹檀, 其下維蘀. 它山之石, 可以爲錯〕"라 했다. 《시경(詩經)》 〈소아·학명(小雅·鶴鳴)〉 초나라……되었으니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와전(訛傳)하는 것을 이른다. 옛날 중국의 영(郢) 지방 사람으로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쓴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어둡자 옆 사람에게 촛불을 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편지에 '촛불을 들라'고 썼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는 기뻐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현자를 천거하여 쓰라는 말일 것이다." 하고는 곧 임금에게 아뢰어 그대로 실천하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 취하여……것 공자가 "무릇 인자(仁者)는 자기가 서고자 할 때 남을 세우며,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하게 한다. 가까운 자신에게서 취하여 먼 곳의 남에게 미루어 간다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하였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푸른……있다 숨김없이 솔직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안동의 늙은 아전 권후중(權後重)이 상납색(上納色)으로 서울에 올라와 송시열을 만나고는 송시열의 거취(去就)에 대해 말하였다. 그 뒤에도 가끔 왕래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손수 "청천백일 인득이견지(靑天白日人得而見之)" 여덟 자를 대자(大字)로 써 주었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8 책을……것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에는 '이치를 궁구하고 자신을 수양함〔窮理修身〕'이라고 되어 있다. 구경법(究竟法)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로, 최고 경지의 원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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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極卿 戊寅 《역》의 상수(象數)에 대해 의문난 점을 하문하시니, 삼가 학문이 부족한 사람에게 묻는 훌륭한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역》 중에 온축된 의리의 대원천에 대하여 옛날의 학자가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면서 버려두지 않은 것은 이것을 밝히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금세의 학자는 모두 반쯤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끝까지 궁구하지 못하는데 오직 우리 형만이 이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어서 근원까지 궁구하려고 하니 역학에 대하여 평생 동안 축적된 학문이 존경스럽습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정밀히 연구한 공은 보통사람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입니까. 저 같은 사람은 소질이 우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가깝고 작은 것을 먼저 연구한 이후에 원대한 것을 탐구하려고 하여 매번 스스로 마음속으로 "주역이라는 책은 공자 같은 대성인도 말년에 이르러서야 좋아했고 주자 같은 대현인도 읽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였으니, 우리 같은 몽매한 학자가 어찌 감히 쉽게 말하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선례에 따라 읽어보긴 하였지만 하도(河圖) 낙서(洛書)와 상수의 변화가 정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찍이 하루의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훌륭한 질문을 하셨는데 억지 변론으로 받들어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이유로 끝까지 침묵한다면 강론하여 도움을 받는 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이렇게 답장을 하니, 부디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른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답장하지 않은 이전의 여러 사람의 편지와 똑같이 여겨 일례로 보지 마시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미달한 점을 깨우쳐주시면 어떻겠습니까?생성설에 대한 저의 견해는 오행의 생성은 부드러운 것으로부터 강한 것이 되었다는 생각합니다. 물이 가장 부드럽고 불이 조금 강하여 금, 목, 토에 이르렀으니 점점 단단해지고 강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순서는 어쩔 수 없이 "1이 수를 낳고, 2가 화를 낳으며, 3이 목을 낳고, 4가 금을 낳으며, 5가 토를 낳았다"60)고 한 것입니다. 탄생의 순서가 이미 이와 같으니 완성의 순서는 또한 어쩔 수 없이 '6이 수를 이루고, 7이 화를 이루며, 8이 목을 이루고, 9가 금을 이루며, 10이 토를 이룬다'61)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별도의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답장하여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俯詢大易象數之疑, 謹悉問寡之盛意. 盖《易》中所蘊義理大源頭處, 古之學者審問慎思而不措者, 所以明此也. 今世之學, 舉皆半上落下, 不克究竟, 惟吾兄有見於此, 而欲究源頭, 平生積累, 在於易學, 可仰. 竆索精研之功, 匪夷所及, 何幸何幸? 如弟者, 非惟素質鈍根, 亦竊欲先近少而後遠大, 每自語于心曰'大易之書, 以孔子之大聖, 至晚年而喜; 朱子之大賢, 有難讀之訓, 我輩蒙學, 何敢易言'? 以是雖曾隨例讀過, 而圖書象數之變精微去處, 未嘗有一日之功. 今盛問之下, 固無以強說奉對者. 但因此而終於含嘿, 則無以開講論受益之路. 故謹此有覆, 幸勿以來書所謂無著落, 同不答之前日諸人書, 一例看過, 因以喩其未達, 如何? 生成說, 淺見以爲五行之生, 自柔而成剛, 水最柔火差剛, 至木至金至土, 則浸堅剛. 故其序不得不曰: "一生水, 二生火, 三生木, 四生金, 五生土矣." 生之序既如此, 則成之序又不得不曰'六成水, 七成火, 八成木, 九成金, 十成土矣.' 恐非有別指也, 幸有以覆教之也. 1이……낳았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에 의하면, 하늘은 홀수이고 땅은 짝수이다. 주희가 오행(五行) 생성의 이치를 말하면서 "하늘은 일(一)로서 수(水)를 낳고, 땅은 이(二)로서 화(火)를 낳고, 하늘은 삼(三)으로서 목(木)을 낳고, 땅은 사(四)로서 금(金)을 낳고, 하늘은 오(五)로서 토(土)를 낳는다.〔天一生水, 地二生火, 天三生木, 地四生金, 天五生土〕"라고 하였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 〈태극도설주(太極圖說註)〉 6이……이룬다 성수는 오행상성(五行相成)의 수로 6, 7, 8, 9, 10이다. 《주역정강성주(周易鄭康成注)》에 "양과 음은 각각 짝이 없으면 서로 이루지 못하므로 땅의 6이 북쪽에서 수를 이루어 하늘의 1과 어우르고, 하늘의 7이 남쪽에서 화를 이루어 땅의 2와 어우르고, 땅의 8이 동쪽에서 목을 이루어 하늘의 3과 어우르고, 하늘의 9가 서쪽에서 금을 이루어 땅의 4와 어우르고, 땅의 10이 가운데에서 토를 이루어 하늘의 5와 어우른다.〔天一生水於北 地二生火於南 天三生木於東 地四生金於西 天五生土於中 陽無耦陰無配 未得相成 地六成水於北 與天一幷 天七成火於南 與地二幷 地八成木於東 與天三幷 天九成金於西 與地四幷 地十成土於中 與天五幷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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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極卿 戊寅 오행생성설(五行生成說)에 관해서는 제가 잠실 진씨(진식)의 설을 보니 부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그것에 근거하여 논했으니, 근거가 없다고 하여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형이 이른바 '수(水)가 비록 부드러우나 화(火)보다 더 허한 것은 없고, 토(土)가 비록 강할지라도 금(金)보다 더 단단한 것은 있지 않으니, 어찌 강유로써 선후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드럽고 빈 것 사이에도 말할 만한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이 없지 않고, 강하고 단단한 것 속에 또한 볼만한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면, 선후의 구분에 어찌 이치가 없겠습니까? 생(生)과 성(成)을 범범하게 설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1이 낳고 6이 완성한 까닭을 말했다면 처음에 낳았기 때문에 1이 낳았다고 말하고 5를 사이에 두고 이루기 때문에 6이 완성했다고 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와 비슷하니 또한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정밀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면재 황씨(황간)의 의론에는 '처음엔 단지 하나의 수(水)였는데 수가 따뜻해진 후에 화(火)가 되었으니, 이것들이 어머니이다. 목(木)은 수(水)의 자식이고, 금(金)은 화(火)의 자식인데, 이것이 바로 네 개의 순서이니, 일찍이 이런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62)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견은 어떠하십니까? 저의 견해가 진씨의 설명만큼 명백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오행의 순서는 채구봉(채침)이 〈홍범〉주에서 논한 것이 잠실 진씨의 설과 부합하니 참고할 만하다. ○경진년 5월 5일에 추기하였다.】 五行生成說, 弟見潛室陳氏之說, 而有契焉. 故敢據以為論, 恐不可以無根據而棄之也. 兄所謂水雖柔而莫虛於火, 土雖剛而莫堅於金, 豈可以剛柔分先後者, 非曰不然. 但柔虛之1)間, 不無微著之可言; 剛堅之中, 亦有大小之可見, 則先後之分, 豈無其理? 不曰泛說生成, 而必曰一生六成之故, 則始生故曰一生, 隔五而成故六成, 餘皆倣此, 亦豈有別般精蘊於其間耶? 勉齊黃氏之論, 則有曰初只是一箇水, 水暖後便是火, 此箇是母, 木是水之子, 金是火之子, 是四者之序, 亦未嘗無此. 於高見又如何? 鄙見恐不如陳說之明白耳.【五行次序, 蔡九峯〈洪範〉註所論, 與陳潛室說相符, 當參考 ○庚辰五月追識】 면재……없습니다 아마도 김택술은 이항로의 〈태극도설소주기의(太極圖說小註記疑)〉를 보고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문은 《화서집(華西集)》 〈태극도설소주기의太極圖說小註記疑〉에 보인다. 之 원문은 '之之'인데, 의미상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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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답함 갑술년(1934) 答族弟希淑 甲戌 편지를 보고 매우 기뻐한 것은 기꺼이 서로 강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만 첫 번째 의제에서 말하기를 "정견(定見)은 구차하게 동일할 수 없고, 소집(素執 평소의 뜻)은 구차하게 추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을 지금의 강명(講明)하는 일에 일컫는다면 나로 하여금 끝내 장차 소망이 없게 만들 것이다. '의아심을 갖고[藏其疑訝]'부터 아래로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有所難辭]'에 이르기까지의 한 대목의 말과 뜻은 완연히 삼연(三淵 김창흡)이 지은 〈의상중구서(擬上仲舅書)〉의 기미(氣味)이다. 진실로 그대의 정견과 소집이 이와 같으니, 차라리 우선 느슨하게 시일을 기다리는 것을 마치 새가 알을 품어 천천히 기혈을 감동시켜 들이는 것처럼 해서 중도(中道)의 오묘함을 성취하는 것이 십분 합당한 도리가 될 것이다. 내가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양증(太陽證)이 발작하고 또 지의(遲疑)의 습관을 이루면 그대로 태타(怠惰)하고 위미(委靡)한 지경에 함몰되어서, 도리어 한 건의 큰 그릇된 일을 초래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끝내 다시 논하는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성토할 때는 그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옳다. 오진영은 진실로 심복(心腹)의 질병이요 소장(䔥墻 : 내부)의 적이다. 김용승도 어찌 다르겠는가. 오진영은 '스승에게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하였고 김용승 또한 '선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오진영은 스승의 절의를 무함하여 깨트렸고, 김용승 또한 선사(先師)의 학술을 고문으로 배척하였다. 이 밖에 피차의 어지러운 일들을 거의 모두 거론하여 비교하긴 어려우나, 단지 한 가지 일이라도 경중을 따져 그 성토를 완급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김용승이 소장(䔥墻)에서 화를 일으킨 것도 오진영과 동일하거늘 어찌 사문(師門) 밖의 졸개라고 하는가. 그가 사문 밖에서 자립한 것은 화를 끼친 이후의 일이니 이는 사문 밖에 서서 화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오진영은 사문 내에 서서 화(禍)를 끊임없이 짓는 자이다. 비록 사문 내외(內外)라는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소장(䔥墻)의 변란에 관계되어 화가 그치지 않는 점은 동일하다. 하물며 오진영의 인무(認誣)는 변론이 쉽지만, 김용승이 학술을 배척한 것은 밝히기가 어렵다. 비록 우리 아우처럼 밝은 자도 또한 '완급경중(緩急輕重)'이라는 말을 두어 속임 당함을 면치 못한 것을 더욱 볼 수가 있다. 김용승이 스승을 배반하고 모독하는 고문(告文)을 지은 것은 과연 진실로 자기의 유감을 풀려고 하는데서 나온즉, 그의 죄는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지은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단지 문도가 아니라고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선사의 학술을 배척함에 여지가 없었거늘, 우리 아우는 작은 질병으로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문밖의 졸개를 억지로 맞아 읍을 했다.'고 말했는데, (김용승의 잘못을) 변척(辨斥)한 것을 '읍을 해서 맞이했다.'고 한 것은 천하에 있지도 않고 고금에 처음 듣는 것이다. 이 일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다른 일은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백세(百世)의 공론은 비록 세상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간여하지 않으면 그 공정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는 것은 사사로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 점차 행해지면 백세의 공정도 장차 기댈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옛날부터 '의(義)를 듣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23)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우의 신상에 이르러서 이미 '공(公)'자가 없으니, 오히려 어느 겨를에 백세(百世) 후에 김용승의 죄를 논할 것을 바라겠는가. 양묵(楊墨)의 말도 애초에는 또한 어지러운 사설(辭說)에 불과했으나 끝내 천하에 가득 찼다. 하물며 김용승이 설한 바는 또 한때의 어지러운 사설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선사의 학술을 배척하여 다시 세상에 밝혀지지 않게 하였고 사문의 쇠잔한 명맥을 박상(剝喪)하였으니 '사람의 불인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는 전날 그대의 유시와 진실로 같다. 사문난적 오진영이 단지 자신만을 해치는 것과 비교해보면 서로 큰 차이가 난다. 우리 아우는 경중의 권도(權道)를 잃은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성토하고 혹자는 성토하지 않으니 어찌 모순이 아니겠는가. '오진영을 성토한 일을 김용승에게 시행하라고 한 것은 있고, 김용승을 용서하라는 것으로써 오진영에게도 은혜를 베풀라고 하면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찬진진(杜撰陳瑧)24)'의 인용은 온당하지 않다. 정자(程子)가 위에 있으면서 따지지 않은 것은 제자가 아래에 있는데 더불어 변론함은 이것이 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전(生前)과 사후(死後)도 또한 저절로 분별이 있으니 변무(辨誣)를 가히 그칠 것인가? 예전에 만일 정자의 신후(身後)에 문인의 변론이 없었다면 정자가 지금처럼 정자로 추앙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맹자(孟子)가 양묵에 대한 변척에서 유독 불공대천의 원수와 같이 여겼다는 것은 있었지만 다른 것은 듣지 못했다. 어찌 그 충역(忠逆)과 부자(父子)의 분수로써 변척에 힘을 더하였으랴. 가령 김용승이 기극(忮克)하는 마음을 내서 선사를 생전에 흥분하여 매도했더라면 당시엔 절로 선사가 계셔서 높이는 듯하지만, 선사를 모독하는 고문이 금일에 있게 된 것은 마땅히 변명해야 한다. 우리 아우는 한유(韓愈)의 문장을 숙독한 사람이다. 한유의 글 중에 이르기를 "면면히 이어지다, 점차 약해져서 사라지게 되었거늘 이러한 때 그 사설(邪說)을 고무하여 틈을 타니, 오호라 그 불인(不仁)이 심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미 불인하다고 하고 또 심하다고 하였으니, 즉 곧바로 위급한 지경에 있어서 오악(惡惡)의 정(情)이 또한 더욱 절실하였던 것이다. 우리 아우 또한 이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거늘, 이제 '오악의 정이 또한 다시 절실한 것은 형세이지 의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사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부사(父師)가 무함(誣陷)(誣告)를 입은 것을 보고도 변명하고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칼로 갈라도 아픔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미워한다는 말씀이다. 일이 부사(父師)에 관계되면 매우 미워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에 맞고, 다른 일 없이 미워하기를 심하게 하면 난(亂)을 일으키는 법이다. 인용한 한씨와 구씨, 진씨와 유씨의 일은 잘못이다. 저들은 의론으로 대대(對待)한 것이고 김용승은 침범하고 배척하여 윗사람을 범한 것이니 어찌 나란히 견주어 동일시하는가. 만일 구양수가 〈계사(繫辭)〉를 의심하여 아울러 공자까지 의심하고, 유씨가 《중용》 주(註)를 의심하면서 아울러 주자(朱子)까지 병통으로 여겨서, 한결같이 배척하기를 김용승이 선사에게 한 것처럼 했다면 한씨와 진씨가 어찌 성문(聖門)의 적이요 사문의 적이라고 성토하지 않고 아무 일 없이 그쳤겠는가. 우리 아우는 한・구・진・류가 소집(素執)을 구차히 같게 하지 않았고, 같지 않더라도 똑같이 현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김용승에 대한 일에 견주었다. 그리고 탄식하며 "그만이로구나! 다시는 이 사람을 볼 수 없다." 하는 것에 자신을 해당시켰다. 우리 아우는 진실로 현명하거니와 김용승 또한 진실로 현인이 되어, 다시 분붕(分崩)하고 괴란(壞亂)한 검극(劍戟 다툼)의 장이 없게 돼서 참극의 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대 쪽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다만 흠모하고 찬탄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만약 김용승의 모독하는 고문이 선사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선사가 어찌 가평 김평묵의 전옹에 대한 제문을 배척하여 물리쳤겠는가. '독고(瀆告)'의 독(瀆)이라는 글자에서 누를 끼쳤다는 것을 저절로 볼 수 있다. 전서(前書)에서 이르기를 "수립(修立: 몸을 닦아 세움하고 이름을 드날려 천하 후세에 아무개의 말이 가히 믿을만하다는 것을 알게 할 뿐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비록 말이 많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는 분명 마땅히 말을 적게 하고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서 곧 우리가 수립(修立)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전서로 보건대, 수립은 근본이고 변무(辨誣)는 지말(枝末)이라고 하였거늘 이제는 변무가 근본이고 수립이 지말이라고 하여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나의 말을 살펴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부끄러워서 땀이 난다. 선사가 가평 김평묵의 〈제매산문(祭梅山文)〉을 보고서, 곧바로 변척하기를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여력을 남기지 않은 것이 어찌 일을 벌이기를 좋아해서 그랬겠는가. 또한 반드시 심히 부득이한 점이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군자는 대개 변척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이어서 변명까지 하니 그 또한 아마도 전배(前輩)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우리 아우도 이러한 곳으로 침침히 달려 들어가니 나의 마음에 안타깝게 여긴다. 내가 감히 한씨와 진씨가 구씨와 유씨에게 대처한 것과 동일하게 하지 못한 것은, 나의 경우가 단지 의론의 작은 일이 아니라 실로 사문의 도적을 방과하는 것에 관련 된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돌이켜 생각할 바탕이 될 수 있겠는가. 見書甚喜, 以其肯相講論也.但初題謂定見不可以苟同, 素執不可以苟求, 此非不然, 謂之於今所講之事, 則使我殆將無望.藏其疑訝以下 至有所難辭一節, 語意宛然是三淵擬上仲舅書氣味.信乎其有定見素執也, 如此則無寧姑且緩之以待時日, 如鳥抱卵, 徐使氣血感入以成中字之妙, 是爲十分恰好道理.非不知此, 不免而我太陽證發, 又恐遲疑成習, 仍䧟怠惰委靡之科, 反得一件大差事來, 是以卒復論之.討賊審其輕重緩急之說當矣.吳固心腹之疾也, 䔥墻之賊也.金何異也? 吳言師有認敎, 金亦言先生可易.吳則誣破師義, 金易告斥學術.餘外彼此之紛紜, 殆難悉擧而比較, 只有一事容有輕重而緩急其討者乎.金之起於䔥墻, 亦與吳同也, 何以云門外卒乎? 若其自立於門外, 則貽禍以後事.是立於門外而作禍不已者也, 吳則立於門內而作禍不已者也.雖有門內外, 而俱係䔥墻之變, 禍之不已則同也.何況吳之認誣易辨 而金之斥學難明.雖明如吾弟者, 亦不免有緩急輕重之說, 而爲所瞞過, 尤可見矣.金之倍師瀆告, 果然亶由逞憾而發, 則其爲可罪, 更有甚於無知而妄作矣.非但自處以非門徒而已.斥其學術, 無復餘地, 吾弟以爲疥癬之疾何也? 門外之卒强之迎揖之云, 以辨斥爲迎揖, 天下所未有, 古今所初聞.此猶如此, 他尙何望? 百世之公雖自世, 而吾不與焉, 則公不在吾而, 在吾者私而已.一人之私漸行, 而百世之公, 亦將無賴, 所以古有無勇之譏者也.到吾弟身上, 已無公字, 尙奚暇望百歲之後論其罪乎? 楊墨之言, 初亦不過胡辭亂說, 而竟至盈天下.况金所說, 又非一時胡亂之比.排斥先師學術, 不復明於世, 剝喪斯文殘脈, 人之不仁, 胡至此極, 誠如前日所喩矣.較諸震賊只好自賊, 相萬萬也.吾弟失輕重之權也審矣.或討或否, 豈非矛盾乎? 胡不以討震者, 施之於金則有之, 不以宥金者惠之於震則莫是, 杜撰陳瑧之引不當矣.程子在上而不與之較者, 弟子在下而乃與之辨, 是不成道理.生前死後, 又自有別辨, 其可已乎? 向使程子身後, 無門人之辨, 程子之爲程子, 未可知也.孟子於楊墨之辨, 獨有如不共戴天之讎, 其他未聞也.豈以其忠逆父子之分而辨之加力哉.使金出忮克而奮罵於先師生前, 則自有先師在似推詡, 瀆告之文在於今日, 則在所當辨明矣.吾弟熟讀韓文者.有曰綿綿延延, 浸以微滅, 於其時也, 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旣曰不仁, 而又謂之甚, 則以其正在危急之地, 而惡惡之情, 亦復轉切也.吾弟非不知有此, 而今曰惡惡之情, 亦復轉切勢也, 非義理何也? 先師嘗曰目見父師被誣, 而不知辨討者, 是刀截而不知痛, 此疾之已甚之辭也.事關父師則疾之已甚, 乃爲中道無他而以甚則亂也, 所引韓歐眞劉事誤矣, 彼以議論對待, 此以侵斥犯上, 安可比而同之? 使歐而疑繫辭, 幷疑孔子, 使劉而疑中庸註, 而幷病朱子, 一於排斥如金容承之於先師, 則韓眞豈不以聖門之賊師門之賊討之.而但於無事而己乎? 吾弟謂韓歐眞劉素執不可苟同, 而不同者亦不害爲同爲賢人, 比於對金之事.嗟歎以已矣乎, 不復見斯人以自當之.吾弟固賢矣, 金亦同爲賢人, 無復分崩壞亂劍戟之場, 免夫慘極之禍, 因風想望, 只切歆嘆.金之瀆告, 不爲先師之累, 則先師何以斥退嘉金祭全翁文乎? 於瀆告之瀆字, 累自可見矣.前書云修立揚名, 使天下後世知某之言爲可信者耳.若不如是, 則雖多亦奚益哉? 此分明宜寡無多之謂, 正以吾輩無所修立故也.以前書觀之, 則修立爲本, 辨誣爲末, 今曰辨誣爲本, 修立爲末, 至謂不見察乃至於此, 甚庸愧汗.先師於嘉金祭梅山文, 見卽輒辨, 不淹晷刻, 不遺餘力, 豈好多事而然哉? 亦必有甚不得已者, 存乎其間耳.今之君子, 槩以不辨爲是, 從以爲之,.其亦優勝於前輩而然歟? 吾弟亦欲駸駸於此科, 心竊悶之.不敢自同於韓眞之處, 歐劉所遭, 不但議論之小事, 實關放過師門之賊之爲大故故也.此亦可以爲反隅之資歟? 의(義)를……것이다 《논어》 〈위정(爲政)〉에 "제사 지낼 만한 귀신이 아닌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찬진진(杜撰陳瑧) 뜻이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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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찬구 우진에게 답함 계해년(1923) 答明粲九 宇鎭 癸亥 스승이 서거한 후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요. 공산에 풀이 우거지고 가을 곡식이 익어 가는데, 어느덧 연사[練事 소상(小祥)]가 지나니 일신의 애통과 천추의 한이 확연(廓然)하여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천리 먼 곳의 편지를 받으니 어찌 편지를 읽고 눈물을 뿌리며 바람을 맞아 정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스승을 그리는 애통한 정은 천성이니 천성은 내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각각 자신의 몸을 공경히 하고 상호 면려하여 선사의 학문을 지키고 반드시 돌아오는 태평시대를 기다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근일 제공의 행위를 보건대 혹 이를 도모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의견 차이를 인하여 끝내는 만촉(蠻觸)25)의 대립을 초래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기(運氣)에 관계되고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지요. 일찍이 그 병통의 근원을 궁구해보니 기를 검속하여 이치를 좇지 못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여 공정함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 공정한 이치가 천하에 행하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고명께서 스스로 근심하여 천루한 저에게 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닙니까. 요컨대 공정과 이치란 다만 일개 선(善)을 말할 뿐입니다. 마음을 비워 천하의 선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넓혀 천하의 선을 도우며, 마음을 고르게 하여 천하의 선을 보고 마음을 세밀하게 하여 천하의 선을 살피며 마음을 착실하게 하여 천하의 선을 실천하는 것이 기와 사사로움을 검속하고 제거하여 이치와 공정을 좇고 따르는 공부입니다. 진실로 능히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덕이 나아가지 못할까를 근심하고, 제공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사도(師道)가 밝지 못할까를 근심하며, 천하 사람들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찌 위육(位育)26)을 이루지 못할까를 근심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운기의 관섭(關涉)과 뭇 성품의 고르지 못함을 한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단지 가만히 자신을 닦아 나의 선을 다하고 나의 덕을 높일 뿐입니다.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는 기초는 나로 말미암아 세워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내가 뜻만 두고 이루지 못한 것을 들어 그대에게 드려서 과문(寡聞)한 나에게 묻는 뜻에 부응하니, 즐겨 듣고 깊이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山哭樑哀, 日月幾何? 空山草宿, 秋天穀升, 奄見練事之已過, 一體之痛, 千載之, 廓乎其罔涯也.乃於此時獲承千里書, 如之何不攬牋揮淚嚮風馳情也.嗚呼安仰之慟天也, 天吾無如之何矣.將恐將懼, 各敬爾身, 互相勉勵, 守先師之學, 待必返之天, 是爲盡在人之道也.竊觀近日諸公之爲, 乃或此之不圖.始因意見之參差, 終致蠻蜀之角立, 是亦運氣攸關, 非人力之致耶.蓋嘗究其病源, 由於不能撿氣而從理, 祛私而徇公也.噫公理之不行於天下也久矣.高明之所自憂而求之淺陋者, 亦非爲是耶? 要之曰公曰理, 只消道一善字是已.虛其心有以受天下之善, 廣其心有以與天下之善, 平其心有以觀天下之善, 細其心有以審天下之善, 實其心有以踐天下之, 是乃檢祛從循之功也.苟能爾也, 何憂乎德之不進, 諸公之能爾也, 何憂乎師道之不明天下, 人人而能爾也, 何憂乎位育之不遂也.雖然運氣之關, 衆性之不齊, 又非一人之所可如何? 只得闇然自修, 有以盡吾善而崇吾德焉.萬物一春之基, 未始不由我而立矣.區區有志而未能者, 擧而呈似, 以副問寡之盛, 想樂聆而深會也. 만촉(蠻觸) 장자(莊子)가 가상한 작은 두 나라 만(蠻)과 촉(觸)을 가리킨다. 장자의 설명에 따르면,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는데, 서로 땅을 다투며 싸우다가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해서, 이후로 작은 이익이나 일을 가지고 부질없이 다투는 것을 풍자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칙양(則陽)〉 위육(位育)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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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찬구에게 답함 병인년(1926) 答明粲九 丙寅 저옹에 궁검을 통곡하고27) 세월이 얼마 되지 않아 또 용어(龍馭)가 승천하니28) 태평의 소망이 영원이 끊어졌고 어육(魚肉)의 참화가 장차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르신 "만산 가운데서 통곡해도 오히려 부족하니 요컨대 구천(九泉) 아래 몸을 묻어야 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바람이나 쉽지 않은즉 오직 3년간 공경히 복상하며 망극한 애통을 풀어낼 뿐입니다. 한 쪽 의론에서 마땅히 복상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은 아마도 정미(1907년)에 선양을 받은 것이 따질 만하고 경술(1910년)에 나라를 잃은 것이 폄하할 만 하다고 여겨서 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절로 후세의 사가(史家)가 여하히 평가하는 일이지, 본국의 신민(臣民)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송나라 휘종(徽宗)은 오국의 포로였으나 사마 박주변은 제복(制服)을 요청하였고, 남송의 고종(高宗)은 금나라의 신하이자 조카였지만 주자는 세실(世室)을 청하게 되었으며, 우리 인조(仁祖)는 성하(城下)의 치욕을 면치 못했지만 우암(尤庵)과 동춘당(同春堂) 제현이 조의 칭호에 이설이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복상반대의 설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미년의 선양(禪讓) 일은 내부의 적과 외부의 원수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상황(上皇 고종)의 강제명령에 핍박되어 사면할 수 없는 것으로, 일찍이 (황제를) 엿보거나 외람되게 도모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경술년의 일은 패망의 조짐이 점차 쌓여 이에 이르러 결과를 이룬 것으로, (고종) 자신이 초래한 것이 아닌즉 그 이른바 따질 만하고 폄하할 만 하다는 말은 감히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산양과 안락29)의 일을 인용하여 복상이 없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산양은 땅을 별도로 분봉(分封)받은 것이 15년이고 안락은 온 집안이 낙양으로 옮긴지가 8년이라, 그 구신(舊臣)과 유민이 멀리 떨어져 소식이 통하지 않아 생사의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군주가 도성에서 거주하고 궁궐에 납시며 종묘의 향사(享祀)를 폐하지 않고 시종과 신료들도 의구한 것과는 다릅니다. 산양과 안락 두 분의 죽음엔 일체의 신민이 제복하고자 하여도 그 형세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위주(魏主) 조예(曺睿)는 오히려 산양을 위하여 소복을 입고 발상(發喪)하고 시호를 '효헌황제(孝獻皇帝)'라고 하였으니, 흉보(凶報)가 도착했다면 어찌 구신과 유민이 제복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사(先師)의 경우 금일의 의론을 기다리지 않고 금일의 인심을 보지 않고도, 일찍이 3년 복을 마땅히 입어야 한다고 단정하셨으니 군자의 고견(高見)은 원래부터 스스로 정해졌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서 이르기를 "옛 임금이 이미 훙(薨)하고 새 임금이 이어 조(殂)했다."고 하였는데, 훙조(薨殂) 두 글자는 일시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두 황제를 폄강(貶降)하는 실수30)를 느끼지 못한 것이니 급히 고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著雍之哭弓劒, 日月幾何, 又遭龍馭遽賓, 庶幾之望, 其永絶矣, 魚肉之慘, 其將至矣.來書所喩, 痛哭萬山中, 猶爲未足, 要之埋身九泉下者, 正吾人之願而未易, 則惟有虔服三年, 以洩罔極之痛而已.一種議論之謂不當服者, 似以丁未受禪之可議, 庚戌失國之可貶.然此則自有後世秉筆之權衡如何, 非本國臣民之所敢道也, 是故宋徽宗五國之俘虜, 而司馬朴朱弁卽議制服, 高宗金人之臣姪, 而朱子至請世室, 我仁祖不免城下之恥, 而尤春諸賢, 無異議於祖稱.此可以破其說矣.且也丁未事出於內賊外讐之脅迫, 上皇之强命而辭免不獲者, 非曾有覬覦冒圖之心.庚戌事, 由於積漸之敗亡, 至是結局, 而非自已以致之者, 則其所謂可議可貶者, 非惟不敢道, 亦不忍道也.或者至引山陽安樂事而證其無服, 則有大不然.山陽分地別封者十五年, 安樂擧家遷浴者八年, 其舊臣遺民, 落落隔遠, 聲息之莫通, 存沒之難的.有異乎今日, 吾君之居我都城, 御我宮闕, 而宗廟享祀之不替也, 侍從臣僚之依舊也.則其於山安二公之卒也, 雖欲一切制服, 其勢難也.然魏主叡猶且爲山陽素服發喪, 謚曰孝獻皇帝, 則凶報所到, 安有舊臣遺民終不制服之理乎? 至若先師, 則不待今日之商確, 不見今日之人心, 而早以當服三年爲斷, 可見君子高見元自前定也.來喩云舊君旣薨, 新主繼殂, 薨殂二字, 出於一時之未思, 而不覺貶降二帝之失, 亟改之如何? 저옹에……통곡하고 저옹은 십간 가운데 무(戊)를 가리킨다. 무오년(1918년) 고종의 서거를 의미한다. 용어가 승천하니 순종의 죽음인 듯하다. 산양과 안락 후한 헌제와 유비의 아들 유선이다. 폄강하는 실수 고종과 순종은 황제인데, 훙과 조는 제후의 죽음에 쓰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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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 희숙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族弟希淑 甲戌 우리 아우는 근일에 학문사변의 공부가 다시 어떠한가? 여기 상황은 근래에 내 일신(一身)과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짐을 느낀다. 세밀하게 이 증세를 살펴보니 바로 도의(道義)에 대한 생각이 장차 가볍게 된다는 조짐이다. 대개 이는 방촌(方寸) 내에 본래 두 주인을 두고 두 가지 일을 아울러 주재함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증후(證候)를 마땅히 일찍 이겨내고 제거하여 부지불각 중에 가만히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을 일러 "이것을 밝히는 것을 강이라고 한다[明此之謂剛]"라는 것이다. 만약 천천히 기다려 천취(遷就)하여 다스리고자 한다면 주기(主氣)는 약하고 객세(客勢)는 이미 강해져서 다스릴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우리 아우는 본디 묻기를 좋아하고 또한 변론하기를 즐기니 혹 생각이 여기에 미쳤는가? (도의가) 그 행사(行事)에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의 스승을 높이고 무함(誣陷)를 변론하는 일이다. 지난번에 그대가 '우선 서서히 하자'고 말한 것들은 이제 모두 다시 변론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애초 반드시 이렇게 되기를 바라진 않았거늘, 끝내 이와 같이 된 것은 주객(主客)의 기세(氣勢)와 강약(强弱)의 분수를 일찍 변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우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김용승(金容承)의 고문(告文)이 나온 지 지금 이미 많은 해가 흘렀다. 비록 한둘의 곧바로 변론한 자가 있었지만, 우리 아우도 반드시 한마디의 표명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 고문의 변괴는 가평의 김평묵이 지은 전옹(全翁 : 임헌회)의 제문(祭文)보다 못하지가 않다. 우리 아우는 이전에 이미 오진영을 성토했고 후일에 또 그 당여(黨與)까지 성토해서 사방에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다. 이렇게 그대의 이름을 모두가 아는데, 빠트리고 그 사이에 한마디 말이 없다면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말하겠는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지 그만 둘 수가 없다. 대략 이렇게 언급하고 또한 근일에 스스로 깨달은 것을 개진하여 우리 아우가 더욱 힘쓰는 보탬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니 부디 살펴보고 아울러 회신을 바라노라. 吾弟近日問辨之工, 更復如何? 此狀比來覺得身家之念轉切.細察此候, 乃是道義之思將輕之漸.蓋方寸之內, 元不容有兩主而幷宰也.今此證候, 宜早克去, 不使潛滋暗長於不知不覺之中, 此之謂明此之謂剛也.若欲徐待遷就而治之, 則主氣弱而客勢已强, 無得治之日矣.吾弟固嘗好問, 而亦且樂辨, 或慮及此否? 其見於行事, 則今日吾輩尊師辨誣是也.往者其言姑徐徐者, 今皆不能復辨而止.其初未必欲其如此而終至如此者, 不能早辨主客氣勢强弱之分故也.未知吾弟以爲如何? 金容承告文之出, 今已許多年矣.縱有一二立辨者, 然竊以爲吾弟必不可無一言之表明.蓋此告文之變, 不下於嘉金祭全翁文.吾弟前旣討吳, 後又討其黨, 四方無不知名.以無不知名 而闕焉無復一言於其間, 則人將謂何? 於公於私, 俱不可但已.略爲及之, 且陳近日所自覺得者, 以爲吾弟有加無勉之助.幸爲察之, 幷望回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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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김공 행장 경인년(1950) 華巖金公行狀【庚寅】 족제 기술(箕述)이 그 조부 화암공(華巖公)의 가장(家狀)을 안고 나를 찾아와 행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가장은 공의 조카인 경재(敬齋) 낙승(洛昇)이 찬술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행장을 짓는다.공의 휘는 기현(璣炫), 자는 성우(聖佑)로 화암은 그 호이다. 김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이부상서 휘 경수(景修)가 휘 춘(春)을 낳으니 춘은 부령 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다. 2대를 지나 휘 작신(作辛)이 부령군을 이어받아 봉해지니 부령으로 관향을 삼았다. 다시 2대를 지나 휘 구(坵)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으로 문장과 도의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들 휘 여우(汝盂)는 문한학사(文翰學士)로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인데, 원(元)에 들어가 성묘(聖廟)의 제도를 모사하여 강릉(江陵)에 서원을 만들었다. 5대를 지나 군사 휘 광서(光叙)는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지니고 고향으로 완전히 물러났으니, 《충렬록(忠烈錄)》에 실려 있다. 3대를 지나 휘 직손(直孫)은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신도비를 지었다. 그의 아들 휘 석옥(錫沃)은 호가 매죽헌(梅竹軒)으로 진사가 되었으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는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이 묘갈명을 지었다. 그의 아들 휘 점(坫)은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의 문인으로 호가 매당(梅堂)이다. 진사가 되었으며 유일(遺逸)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아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만사에서 "한 치의 철심(鐵心)이며 열 개의 향을 피운 듯."이라고 하였다. 8대를 지나 휘 영수(英洙)는 호가 성재(誠齋)로, 신재(新齋) 이도중(李度中)이 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으니, 공의 조부이다.부친의 휘는 문성(文性)이며, 모친은 고흥 유씨(高興柳氏) 영노(永老)의 따님과 의성 김씨(義城金氏) 관운(寬運)의 따님이다. 의성 김씨가 공을 12달 뱃속에 지니다가 순조 경인년(1830년) 5월 11일에 낳았다. 공은 골격이 준수하고 기상이 위엄이 있었으며 본성은 순후하고 추향은 올발랐다. 이를 갈 예닐곱 살 때부터 일을 처리함이 하늘이 낸 것처럼 자연스러웠으며, 세 형 두 누이 두 아우와 공손하고 우애함이 지극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나이 겨우 10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슬퍼하였으며,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여 부친상처럼 슬퍼하니 사람들이 대련, 소련36)이라 칭하였다. 불행하게도 세 형이 차례대로 먼저 타계하자 부모상 때와 다름이 없이 애통해 하였으며, 여러 조카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가르치고 양육하였다.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봉렴(鳳濂)의 따님으로 난치병을 앓아 사람들이 부인 역할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불쌍하게 여겨 밤낮으로 정성으로 간호하여 정기를 회복하기를 기다리면서 끝내 버리지 않고 인하여 두 아들을 낳아 키우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선을 쌓아서 생긴 경사라고 하였다. 부인이 죽자, 우연히 두 아우들도 모두 홀아비가 되었는데 겨우 한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세 집이 재산을 합쳐 같은 상에서 식사하고 같은 이불에서 자면서 경전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혹은 바둑과 술을 즐기면서 매우 화기애애하게 지냈으며, 또한 온화한 기운으로 집안의 여러 조카들을 대하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시비를 분별하고 의리를 지킬 때는 명백하고 곧으며 엄정하여 비록 맹분과 하육37)이라도 앗을 수 없었다. 공이 후진을 가르칠 때는 차근차근 정성을 다하여서 학문을 싫어하지 않게 하였으며 날마다 선으로 옮겨가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게 하였으니, 문하에 찾아와서 성취한 자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공의 평생 행적으로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를 돈독하게 한 대략이다.공은 홍릉(洪陵)38) 무자년(1888년) 12월 16일 타계하였으니, 정읍군 이평면(梨坪面) 궁동(弓洞) 선영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묘는 영원면(永元面) 탑촌(塔村) 남쪽 산기슭 묘좌의 언덕에 있다. 큰 아들 낙환(洛恒)은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덕을 이어받고 집안을 잘 다스렸다. 둘째 낙회(洛回)는 공의 아우 석현(奭炫)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낙환은 전주(全州) 이병규(李炳奎)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경술(慶述)과 판술(判述) 두 아들을 낳았는데, 판술은 공의 세 번째 형의 아들 재덕(在德)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형재(炯才), 형렬(炯烈), 형규(炯奎)는 경술의 아들들이다.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39)라고 했으니 대저 선비가 학문을 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려는 것이니, 성인이 성인이 된 까닭은 인륜을 다했기 때문이다. 공이 인륜과 의리에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신실한 마음으로 성인을 공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사(子思)는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한다."40)라고 했는데, 공은 인륜에 독실함이 더욱 부부 사이에 있으니, 도한 성인의 요도(要道)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의 시문을 보면 분명하게 이치가 순하고 환하게 빛이 나니, 생각하건대 공자가 가르친 문과 행 두 가지에 수레바퀴나 날개처럼 공부를 한 것을 미뤄볼 수 있다. 이는 글로 써서 행장으로 기록할 만하다. 族弟箕述, 抱其王考華巖公家狀, 請狀行文於余.家狀, 公之從子敬齋洛昇撰也, 乃據而爲文曰: "公諱璣炫字聖佑, 華巖其號也.金氏, 新羅敬順王之後, 高麗吏部尙書諱景修, 生諱春, 封扶寧府院君.再傳而諱作辛, 襲封扶寧君, 以扶寧爲貫.再傳而諱坵, 平章事, 文貞公文章道義聞天下.子諱汝盂, 文翰學士忠宣公, 入元摹聖廟制度, 創立江陵.五傳而至郡事諱光叙, 麗亡, 志存罔僕, 大歸貫鄕, 載《忠烈錄》.三傳而諱直孫, 僉正贈都承旨, 栗谷李先生撰神道碑.子諱錫沃號梅竹軒, 進士贈參判, 高峰奇先生撰碣銘.子諱坫, 一齋李先生門人, 號梅堂, 進士逸參奉, 砥礪名節, 不樂仕進, 重峯趙先生挽曰: "一寸鐵十炷香." 八傳而諱英洙號誠齋, 李新齋度中稱以一國善士, 公之祖考也.考諱文性, 妣高興柳氏永老女, 義城金氏寬運女, 孕脤公十二朔而生於純廟庚寅五月十一日.骨格俊秀, 氣像嚴威, 性度純厚, 趨向正直.自齠齔處事天成, 與三兄二姊二弟, 恭友俱至, 見稱於長老.年甫十歲, 遭外艱, 哀毁如成人, 連丁內憂, 一如前喪, 人稱大小連.不幸三兄, 次第先歿, 痛悼無異親喪, 誨育諸姪, 一如己出.夫人, 全州李鳳濂之女, 有貞疾, 人皆謂難宜其室, 公矜憐之, 晝宵曲護, 待其回精復氣而終不去, 因育二子, 鄕黨咸稱積善餘慶.及其喪, 偶與二弟俱鰥居, 僅娶一子, 三家合産, 食同案寢共被, 間談經義, 或對棋酒, 有大和之氣, 處群從接賓客, 亦一以和氣.至於辨是非守義理, 白直森嚴, 雖賁育不能奪.其訓後進, 諄諄懇懇, 使之不厭, 日遷善而不知其由, 及門而成就者不少, 此公生平行治正倫理篤恩義之大槩也.考終于洪陵戊子十二月十六日, 葬于本郡梨坪面弓洞先塋艮坐原.夫人墓, 在永元面塔村南麓卯坐原.長子洛恒, 承襲庭訓, 肖德克家.次子洛回, 出爲公弟奭炫後.洛恒, 娶全州李炳奎女, 生二男慶述·判述, 判述出爲公第三兄子在德後.炯才·炯烈·炯奎, 慶述男也.孟子曰: "聖人, 人倫之至也." 夫士之爲學, 欲學聖人, 聖之所以爲聖, 以其盡倫也.公之敦於倫義, 旣如此, 則可謂實心學聖矣.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公之敦倫, 尤在夫婦, 則亦可謂得學聖之要道矣.且觀公之詩文, 犂然理順, 燁然有光, 想見其於孔子所敎之文行二者, 輪翼用功矣, 是可具書而以爲狀也." 대련, 소련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서 "소련과 대련이 거상(居喪)을 잘하여 3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3개월을 해이하게 하지 않고, 1년을 슬퍼하고, 3년을 근심하였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맹분과 하육 맹분과 하육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장사인데, 맹분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다고 하고 하육(夏育)은 1000균(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後漢書 卷28 桓譚列傳》 홍능 고종의 능으로 여기서는 고종을 가리킨다. 성인은 인륜의 지극함이다 《맹자》 〈이루상(離婁上)〉에 보인다. 군자의……시작한다 《중용장구》 제12장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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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천 김공 행장 을축년(1925) 鶴川金公行狀【乙丑】 대한 광무(光武) 경자년(1900년), 신축년(1901년) 즈음에 간재(艮齋) 전우(田愚)41) 선생이 호남에서 도를 강론할 때 학천(鶴川) 김공은 당시 흰머리 노인으로 힘든 길을 걸어 월명(月明)과 봉서(鳳棲) 사이에서 종유하다가 마침내 종이와 폐백을 갖춰 스승의 예로 뵈었다. 공의 나이 당시 59세로 선생보다 2살 아래였는데, 선생이 그 도를 믿음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함을 가상하게 여겨 이윽고 진심으로 좋아하여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식자들은 말하기를 이십 년 이래로 많은 호남 학자들이 선생을 찾아와 배운 것은 공이 그 시작을 열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공의 타계하였을 때 선생이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내가 예전에 남주에 이르렀을 때 而余昔日到南州문득 처음으로 정자 스승 삼던 원명을 만났어라.42) 忽遇原明首事涪80년 동안 순수한 기운 八十年來純氣味백천재에서 좋은 벗과 노닐었지. 百千齋裡好朋遊이는 대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공의 아들인 진하(鎭夏)가 사실을 기록한 작은 책자 한 두루마리, 유고 세 책, 세계(世系) 한 책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불초는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선인의 행장을 초를 잡지 못하니, 비록 대단히 한스럽지만 다행히도 그 누구보다 선인을 잘 아는 어른이 있으니 원컨대 행장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공은 나와 동문이 된 지 20년이 되었으며, 또한 선친께서 칭송하신 덕성과 언동과 조예와 행업이 상세하지 않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중년 이전의 뜻과 행실은 고향 장로들의 견문과 유고의 수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충분히 실제 기록의 미비함을 보충할 수 있다. 돌아보건대 비록 내가 글을 잘 짓지 못하여 제대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공을 삶을 형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공의 휘는 형재(衡載), 자는 권중(權), 호는 학천이다.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羅敬順)의 왕자인 의성군 석(錫)에서 나왔다. 고려 태자첨사(太子詹事) 의성군(義城君) 용비(龍庇)는 백성들에게 큰 공덕을 세워 의성에 사당을 세워 제향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거익(居翼)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는데, 조선에 들어와 누차 우의정으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미(湄)는 직제학(直提學)으로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뒤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운추(運秋)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교리의 아들 전현(傳顯)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이다. 부인 최씨가 세 아들 영(穎), 호(顥), 이(頣)를 거느려 호서의 문의(文義)에서 남쪽인 고부(古阜)로 와서 거주하였다.호(顥)는 부호군(副護軍)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참판 김석옥(金錫沃)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제민(齊閔)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 정(軍器寺正)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강(忠剛), 호는 오봉(鰲峰)이다. 제안(齊顔)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문인으로 효행과 학문, 덕행이 사림의 모범이 되었으니 호는 죽헌(竹軒)이다. 셋째는 제삼(齊參)이다. 제맹(齊孟)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막내는 제남(齊南)이다. 각 형제의 자질(子姪)은 번창하여 호남의 명문가가 되었다. 죽헌은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죽헌의 아들 성(晟)은 진사로 효행이 있었으며, 갑자년(1624년)43)에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인 지서(地西)는 또한 효성과 학문이 있었는데, 갑자년과 병자년의 난리에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 제운(濟運)과 창좌(昌佐)는 공의 조부와 증조로 또한 효성으로 알려졌다.부친은 인규(麟奎)이며, 모친은 남양 홍씨(南陽洪氏) 경철(景喆)의 따님으로 헌종 계묘년(1843년) 3월 28일에 우덕면(優德面) 학전리(田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대개 그 선대에 뛰어난 덕과 굳센 절조가 쌓였다가 공에게 전해졌으니, 영지(靈芝)는 참으로 그 뿌리가 있는 법이다. 사실의 기록에 "여러 곳의 선영을 세력가에게 빼앗겨 통곡하여 송사를 벌였으나 결국 돌려주게 되었으니, 집안 살림이 이로 인해 탕진되었다. 손수 농사짓고 나무를 하면서 간간이 경전을 읽었으며, 짚신을 짜서 어버이 음식과 제수를 마련하였다."라 하였으니, 사물은 정해진 운수가 있으므로 요컨대 계속해서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한 것이다. 항상 자손들을 훈계하기를 "음해하는 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악보다 크다. 선인도 간혹 후손이 없는데 이는 선대에 음해한 죄가 미쳤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또한 '빈부는 하늘이 정한 것이니, 하고픈 것이 결백하지 않으면 도리의 재앙의 해를 당하니, 마땅히 분수를 지키고 부지런하며 미리한다.[守分勤豫] 네 글자를 항상 마음에 담아둔다면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 아! 자질이 곧은 사람이 세상에 드물구나."라고 하였으니, 이런 말들을 본다면 그의 인물됨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공이 젊었을 때 과거공부를 익혔으나 곧바로 그만두고서 도학을 뜻을 두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44) 공을 찾아뵙고서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어 가문을 드날려라.'는 말을 들었다. 얼마 지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45) 선생이 덕이 높고 학문이 올발라서 세상의 유종(儒宗)이라는 것을 들었으나 그의 문하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에 그의 문인 미재(薇齋) 정재필(鄭在弼), 춘산(春山) 정학원(鄭學源), 직헌(直軒) 김종순(金鍾順), 경당(敬堂) 유상준(柳相浚) 등과 학문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봄가을로 부풍(扶風)과 영주(瀛洲)46) 사이에서 강회를 열어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일찍이 이상한 병에 걸려 4~5년을 치료하였으나, 이에 마음을 편히하고 분수를 지키며 진기를 조섭하여 기르니 두어 해 지나 병이 절로 나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예에 맞게 장사를 치렀으며 장서(葬書)를 보고서 마침내 손수 부모의 묘를 정하니 사람들이 그 지성에 감복하였다.내가 삼가 보아서 분명히 아는 것을 말하면, 공은 입지(立志)가 견고하여 가난과 질병, 어려운 일을 실컷 겪으면서도 줄곧 마음씀씀이를 변하지 않았다. 진실된 마음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었으니, 타인과 상대할 때 서로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은 어눌하고 더듬거려서 잘 못하는 것 같았으나, 요컨대 자신이 경험하거나 연구한 것에서 꺼내어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가짐은 단정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늙어갈수록 더욱 정력이 굳건하여 옥 같은 광채가 청랑(淸郞)하였으며 앉거나 설 때 똑바르고 곧았다. 자신의 몸에 들이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여 거처와 복식은 대략만 갖추어 변변치 않았으나 또한 재물을 조금 남겨서 대비하기를 요하였다. 오호라! 이것은 모두 군자가 독실하며 청진(淸眞)한 덕이라 하겠다.그의 학문에 대해 말하자면, 한결같이 성실과 근면을 위주로 하며 경전 이외에 성리의 중요한 책을 모두 손수 베껴서 매우 많이 읽어 줄줄 외웠다. 경전의 의미가 의심스럽거나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없으면 깊이 사색하여 깨닫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으니, 요컨대 돈독하게 스승의 말을 믿어서 어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근사록(近思錄)》의 편목을 모방하여 고금의 격언과 선행을 모아서 《근행록(近行錄)》이라고 하였으며, 중간 중간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으니 모두 학자에게 절실하고 타당한 것이다. 자신이 쓴 서문에서 "옛날 성현의 행실은 모두 경에 기본 하였으니, 경은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다. 어찌 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으랴."라고 하였다. 또한 많은 선비를 거느려서 영주강계(瀛洲講契)를 만들었으니, 그 규례가 엄격하여 자못 실제 효과가 있었다. 그가 지은 계안(契案)의 발문에서 "경으로 근본을 삼아서 엄숙하고 정제(整齊)한 상태에 몸을 두며 허명(虛明)하고 정일(精一)한 경지에 마음을 머무르며 경전을 궁구하고 의리를 강론함으로 보태서 그 앎을 지극히 하며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성을 높여서 그 실제를 실천함으로 마쳐야 하니, 이 네 가지는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다."라고 하였으니, 오호라! 경에 거하고 이치를 궁리하며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성학의 요점이다. 공이 말한 천고에 전해 내려온 지결이란 것이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경은 또한 성학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위와 아래를 관통하니 공이 말한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강령이라고 한 것이 더욱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이에서 공의 학문이 요점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바른 죽음' 한 구절에 대해서 더욱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대저 증자의 역책은 오히려 촛불은 잡은 동자가 대자리가 화려하고 깨끗하니 바꾸라는 청을 기다렸는데,47) 공이 이에 병이 위독한 지 오래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직접 일어나 목욕하고서 "죽은 뒤에 더러움으로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종이와 붓을 찾아 유언을 써서 둘째 손자인 용락(庸洛)에게 주었으니, 그 대략을 들어보면 "인심은 다만 위태롭고 도심은 다만 은미하니, 스승을 택하고 벗에게 물으면서 의리를 강론하고 변론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기를 깊이 바란다."라고 하였다. 붓을 놓고서 자리에 누워 돌아가셨으니, 실로 임술년(1922년) 3월 13일로 80여 살의 수를 누렸다. 공은 비록 받은 기운이 강명(剛明)하여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지만 올바르게 수양한 것이 이에 드러났다.모월 모일 임시로 우덕면 상학리(上鶴里) 서쪽 산기슭 모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흥성 장씨(興城張氏) 정휴(鼎休)의 따님이고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진하(鎭夏)의 따님이다. 전주(全州) 최병귀(崔秉龜)는 장씨 소생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진렬(鎭烈)과 연안(延安) 이돈녕(李敦寧)에게 시집간 딸은 유씨 소생이다. 장남의 아들은 철락(喆洛), 용락(庸洛)이며 딸은 노진기(魯鎭)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근락(近洛), 상락(相洛), 재호(在浩)이다. 사위 최병귀의 아들은 직렬(直烈)이며, 사위 이돈녕의 아들은 의길(儀吉)이다.《서경》에서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둔다."48)라고 하였으며, 주자는 "한번 숨 쉬는 사이라도 오히려 이 뜻을 두고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다."49)라고 하였으니, 대개 공의 평생의 뜻을 적시한 말로,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날 이천(伊川)이 소강절(邵康節)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안락하게 거처하면서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한 마디 말로 핵심을 드러내었으니, 나는 《서경》과 주자의 두 마디 말로 또한 핵심을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오호라! 공이 돌아가신 지 네 달이 되었으니, 태산이 무너진 듯하다. 태산이 무너진 뒤에 음기가 하늘에 뻗쳐 도가 곧 망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공은 겸손하여 인화한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굳센 절조와 강인한 의리를 지녔으며 우뚝한 치덕으로 동문들의 존망을 받았으니 만약 공이 오늘날 계셨더라면 반드시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듯이 정론을 주장할 것이며50), 사특한 무리들을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꼼짝 못하듯이 내쫓았을 것이니 스승의 문을 빛내고 세도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에서 일어날 수 없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공의 풍운은 사라지지 않아서 장남 효근(孝謹)에게 그 전형이 남아 있으며, 용락(庸洛)이 또한 젊은 나이에 학문에 열중하면서 조상의 한 일을 계승하는데 뜻을 두었기에 연관해서 기록하여 공의 의방(義方)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아울러 드러내어 세상의 붓을 잡은 대가에게 고한다. 大韓光武之庚辛年間, 艮齋田先生講道于湖南, 鶴川金公, 時以老白首, 間關從月明鳳棲之間, 卒具書贄, 以師禮見.公之年, 蓋五十有九, 而少先生二歲, 先生嘉其信道之老彌篤, 旣心好而終身矣.識者謂'二十年來, 湖南學者之輻進先生, 未始非公之啓之也.' 公之沒也, 先生有誄曰: "而余昔日到南州, 忽遇原明首事涪.八十年來純氣味, 百千齋裡好朋遊." 蓋記實也.公之嗣子鎭夏, 以事實小錄一紙遺稿三冊世系一冊, 示澤述曰: "不肖無文, 不能草先人全狀, 雖甚恨, 幸有知先人深者莫如子, 願有以狀之也." 竊惟公爲余同門二十年, 而又先君之所善其德性言動造詣行業, 謂之不詳則未也.中年以前志行, 鄕長老見聞遺稿之手記在, 足以補實錄之未備, 顧雖人文之非堪, 庶可以狀公也.公諱衡載字權中, 鶴川號也.義城氏, 出新羅敬順王子義城君錫.高麗太子詹事義城君龍庇, 有大功德於民, 立祠義城而祀之.玄孫居翼, 政堂文學, 本朝累以右議政徵之, 不起.子湄, 直提學, 端廟遜位後不仕.子運秋, 文科校理, 文行藉甚.校理子傳顯, 司醞署直長, 夫人崔氏, 率三子穎·顥·頣, 自湖西之文義, 南來居古阜.顥, 副護軍, 贈刑曹判書, 娶叅判金公錫沃之女, 生五子.齊閔, 文科軍器寺正, 壬亂倡義, 贈吏判, 謚忠剛號鰲峰.齊顔, 河西金先生門人, 孝學德行, 模楷士林, 號竹軒.齊參.齊孟, 兵判.齊南.各房子姪蕃衍, 爲湖之望.竹軒於公, 十世祖也.竹軒子晟, 進士, 有孝行, 甲子倡義.孫地西, 亦有孝學, 甲丙之亂, 俱擧義.曰濟運, 曰昌佐, 公之祖曾, 亦以孝聞.考麟奎, 妣南陽洪氏景喆女, 以憲廟癸卯三月二十八日生公于優德面鶴田里第.蓋其先世偉德茂節之積, 而傳至于公, 靈芝信有根矣.實錄曰: "數處先隴, 見奪於勢家, 痛泣訟還, 而産業因此蕩殘.手自耘樵, 間讀經傳, 織屨以供親饌祭需." 物有定數, 要繼續適用.常訓子孫曰: "陰害之罪, 大於人知之惡.善人間或無後, 先世陰害之罪延及也, 可不愼哉." 又曰: "貧富天定, 所欲不明, 反爲禍害, 當以守分勤豫四字, 恒存胸中, 則可得保家矣.噫, 寂寥矣質直矣." 觀此, 可以三隅也.公之少也, 治擧文而旋卽棄之, 有志於道學, 拜蘆沙奇公正鎭, 聞'杜門讀書以揚門戶'之語.旣而聞全齋任先生德尊學正, 爲世儒宗, 而未及詣門, 乃從其門人鄭薇齋在弼·鄭春山學源·金直軒鍾順·柳敬堂相浚, 麗澤相資, 春秋會講于扶風瀛洲之間, 課年以爲常.嘗嬰奇疾, 刀圭四五載, 乃安心守分, 調養眞氣, 數年疾自瘳.其遭內外艱, 執喪如禮, 觀葬書, 竟手占二親墓, 人服其至誠.若乃澤述之所竊觀而心識者, 則其立志也, 堅確, 歷盡貧病憂難, 而終始不渝用心也.眞實無表裡, 與人袪畛域邊幅.發言也, 訥吃若不能, 要出經歷硏究而不可易.律身也, 整整自持, 老益精剛, 符彩淸朗, 坐立端直.自奉也, 儉約, 居處服食, 苟完無長物, 然亦要稍贏有備也.於乎, 旣皆君子篤實淸眞之德也.至言其爲學也, 則一以誠勤爲主, 經傳以外, 性理要書, 皆手自鈔, 劇讀熟誦.凡有經疑理晦, 極意思索, 不得不措, 俛焉日有孜孜, 不知年數之不足, 而要歸篤信師說而不違也.公嘗倣《近思錄》篇目, 輯古今格言善行, 名曰《謹行錄》, 間附己說, 皆切近的當.其自序有曰: "古之聖賢之行, 無一不在於敬.敬, 是一心之主宰, 萬事之綱領也, 盍於此盡意." 又倡率多士, 設瀛洲講契, 規例嚴密, 頗有實效.其所作契案跋曰: "以敬爲本, 置身於嚴肅整齊之地, 留心於虛明靜一之域, 輔之以窮經講義以致其知, 究竟于克己尊性以踐其實, 四者, 千古相傳之旨訣也." 嗚呼, 居敬窮理踐履, 固聖學之要.公所謂千古相傳之旨, 其不信然乎.敬, 又聖學之成始終徹上下, 公所謂一心主宰, 萬事綱領者, 尤不信然乎.於此, 可見公之學得其要矣. 至於'正終'一節, 尤有大焉.夫以曾子之易簀, 猶待乎執燭者華晥之請, 而公乃於寖革之久, 垂盡之際, 親起沐浴曰: "不以死後, 垢穢勞人." 又索紙筆書遺戒, 與次孫庸洛, 畧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擇師問友, 講義辨論, 不墜家聲, 是所深望." 釋筆就臥而逝, 實壬戌三月十三日也.壽八十雖.其禀氣剛明, 有大過人者, 而所養之正, 於是乎著矣.以某月日, 權葬于優德面上鶴里西麓某坐原, 配興城張氏鼎休女, 繼配高興柳氏子鎭夏女.全州崔秉龜妻張氏出, 鎭烈, 李敦寧妻柳氏出.長房男喆洛·庸洛, 女魯鎭基.次房男近洛·相洛·在浩.崔壻男直烈, 李壻男儀吉.傳說曰: "念終始, 典于學." 朱子曰: "一息尙存此志, 不容少懈." 蓋迹公生平之志, 斯其人也歟.昔伊川之狀康節也, '得安且成'一語而成之, 余於傳朱二語之得, 亦敢云爾也.嗚呼, 公沒四朔, 泰山頹矣.山頹之後, 陰沴漲天, 而道將亡矣.念公謙謙仁和之中, 有介然之操, 毅然之義, 不可奪者, 巋然齒德, 又居同門尊望, 使公而在今日者, 必能主張正論, 若鳳鳴朝陽, 屛伏邪徒, 如虎豹在山, 于光師門, 有裨世道也, 而九原不可作, 悲夫.雖然公之風韻不斬, 嗣子孝謹, 典型有在, 庸洛又妙年向學, 志存繼述, 牽連書之, 幷見公義方之及, 以告世之秉筆大人. 간재 전우 1841~1922.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이다. 재야에서 학문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정자……만났어라 원문의 '부(涪)'는 송(宋)나라의 대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권세가의 눈에 거슬려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다. 원명은 여희철(呂希哲)의 자로, 정이(程頤)와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지만, 정이의 학문을 깊이 존경하여 나중에는 스승으로 섬겼다. 갑자년 인조 1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가리킨다. 노사 기정진 1798 ~ 1879. 본관 행주(幸州), 자 대중(大中), 호 노사(蘆沙) 시호 문간(文簡)이다. 1842년 관직에 잠깐 나아갔으나 일주일만에 사직하였다. 40세 이후 그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살았던 전라도를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그의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46세에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저술하였으며 이후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전재 임헌회 1811~1876. 본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기(理氣)이원론(二元論)을 배격,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부풍과 영주 부풍은 부안의 옛 이름이고 영주는 정읍의 옛 이름이다. 증자의……기다렸는데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병으로 누웠는데, 증원(曾元)이 발치에 앉아 있었다. 동자가 촛불을 잡고 구석에 앉으면서 말하기를, '화려하고 깨끗합니다. 대부(大夫)의 자리입니까?' 하니, 증자가 놀라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계손씨(季孫氏)가 나에게 준 것인데, 내가 미처 바꾸지 못하였다. 원(元)아, 일어나 자리를 바꿔라.' 하니, 증원이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병이 위중하니 바꿀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아침이 되면 삼가 바꾸겠습니다.'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함이 저 동자만 못하구나. 군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으로써 하고, 소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장에 탈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할 뿐이다. 내가 무엇을 구하겠느냐? 나는 바른 것을 얻고 죽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吾得正而斃焉 斯已矣]' 하였다 생각을……둔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니, 생각을 시종(始終) 학문에 두게 되면 자신의 덕이 닦아짐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惟斅學半, 念終始, 典于學, 厥德修罔覺.]"라고 하였다. 한번……않는다 《논어》 〈태백(泰伯)〉의 "죽은 뒤에 그만둔다.[死而後已]"라는 구절에 대해 주자의 해석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봉황이……것이며 '조양(朝陽)'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산의 동쪽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재덕이 출중한 인재가 조정에서 직간(直諫)하는 것을 비유하는 '조양봉명(朝陽鳳鳴)'의 뜻으로 쓰였다. 당나라 때 한원(韓瑗)과 저수량(褚遂良)이 무고(誣告)를 입어 억울하게 죽은 뒤로는 두려워서 감히 과감하게 간언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고종(高宗)이 봉천궁(奉天宮)을 짓는 것을 가지고 어사 이선감(李善感)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극언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기뻐하여 이를 "봉황이 조양에서 운다.〔鳳鳴朝陽.〕"라고 하며 칭탄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이는 원래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뫼에서 우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도다.〔鳳皇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舊唐書 卷80 韓瑗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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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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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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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정의재 이공 행장 경오년(1930) 精毅齋李公行狀【庚午】 공의 휘는 기노(驥魯), 자는 덕부(德夫)이다. 이씨는 계통이 영주(瀛洲)51)에서 나왔으니, 고려 문헌공 휘 경조(敬祖)가 시조가 된다. 조선에 들어와 집의(執義)로 장릉(莊陵, 단종)을 위해 자정(自靖)한 분은 휘 백첨(伯瞻)으로 중시조가 된다. 집의의 아들인 석지(錫祉)는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강직함으로 세상에 존중을 받았다. 사직의 아들 장손(長孫)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군수의 아들 일(壹)은 진사(進士)였다. 이 분이 운령(雲齡)을 나으니, 운령은 재주와 행실로 추천되어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다. 이 분이 첨지(僉知) 승종(承宗)을 낳았으니, 또한 행실과 의리로 칭송을 받았다. 3대가 지나 소심재(小心齋) 극수(克守)가 나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이 그 실학을 자주 칭송하였다. 이 분이 바로 공의 6대조이다. 장춘(長春)과 숭(崇)과 진엽(鎭燁)은 소심재의 아들, 손자, 증손으로 대를 이어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만록(萬綠)으로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부친의 휘는 동익(東益) 호는 직재(直齋)로 근검하며 효우가 있었다. 모친은 부령 김씨(扶寧金氏) 봉각(奉珏)의 따님이다.공은 철종 신묘년(1831년) 5월 3일 태어났는데, 어려서 단정하고 엄숙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조금 자라 침중하고 과묵하였으며 서적 이외에는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 삼종숙 산오공(山塢公) 동현(東顯)에게 배웠다가 다시 그의 아들 남강공(南岡公) 태로(泰魯)를 종유하며 학문을 강마하여 약관 전에 이미 근기(根基)를 세웠다.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을 봉양함을 위주로 하였으며 두 형을 섬김에 화락하였다. 병인년(186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정과 예를 지극히 하였으나 무자년(188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집이 가난하고 흉년이 들어 장사를 검소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이를 죽을 때까지 한스럽게 여겼다. 하루를 격하여 양친의 묘소에 참배하여 늙었다고 해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친족의 자제와 고을의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총명하거나 둔한 것을 따지지 않고 성심으로 지도하여 자신의 책무로 여겨 수고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본성이 진솔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평소 거처할 때 빨리 말하거나 황급한 기색을 띠지 않았으며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따지지 않고 모두 온화한 안색으로 대하였다. 그러나 바르지 않은 자가 있으면 마음 속 깊이 미워하여 멀리하였다. 사람들이 시정의 득실이나 인물의 장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곧 침묵하고서 대답하지 않았다. 가난이 심하여 자주 밥을 굶었으나 똑바로 앉아 책을 보았으며, 집안사람들이 재물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이르기를 "남의 재물을 갚지 않고 불의한 삶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본분을 지키다가 죽겠다."라고 하였다.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사람이 집에 거처할 때 절로 무한히 좋은 도리가 있어야 하니, 모름지기 이것은 부지런함과 삼감52) 가운데서부터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세도가 크게 무너지게 되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사특한 말들이 더욱 심해지자 '한후(寒後)' 두 글자로 자신의 당에 편액 하였으니, 대개 날이 추워진 뒤의 송백53)으로 스스로 기약한 것이다.을사년(1905년)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남쪽으로 오자 폐백을 바치고 제자의 예를 행하여 선생에게 나아가 배움을 바르게 하니, 선생이 정의재(精毅齋)란 호를 주었다. 이에 노성(老成)한 덕망은 동문들의 추존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인에 대한 학설이 중구난방이어서 선생이 항상 깊이 걱정하였다. 이에 공이 공자, 맹자가 인에 대해 언급한 여러 가지 말을 모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한 권으로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탐구할 바를 알게 하여 분쟁하지 않게 하니, 대개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편찬한 바를 모방하여 그 옛 이름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이다.54) 앉은 자리에 절실하고 중요한 글귀를 걸어놓고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뜰에 여러 화초를 심어 놓고 마음을 길렀으니, 모두 옛날 현인이 정완(訂頑)의 명55)을 짓고 뜰의 화초를 살핀 뜻56)과 같다. 속인들이 극심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였고 고단한 백성들이 어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항상 사람을 대할 때 인의도덕의 말로 반복하여 깨우쳐주었으니, 이는 또한 어진 군자가 순박함으로 되돌리려는 뜻이었다. 공의 학문은 전적으로 내면의 마음공부에 힘을 쏟았기에 문사로 드러난 것은 적지만 5언과 7언으로 영탄하여 읊조린 것은 비교적 많은데, 요컨대 모두 나라를 사랑하고 도를 걱정하는 충분(忠憤)과 염려하는 말이니 또한 변아(變雅)가 남긴 가락인가.병인년(1926년) 섣달부터 병으로 누웠다가 다음 해 정월 보름 즈음에 상구(喪具)를 장만하라 명하였다. 25일이 되자 아들에게 "오늘은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고는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새 옷을 입고서 염습과 장사할 때의 절차에 대해 다시 명하였는데, 과연 이날 돌아가셨으니 향년 74살이었다. 부안군(扶安郡) 하서면(下西面) 서당동(書堂洞) 정좌(丁坐)의 언덕 선영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 영황(永璜)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었다. 계비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환규(煥奎)의 따님으로 부덕을 갖춰 군자의 짝이 충분하였다. 세 아들은 시택(時澤), 시관(時寬), 시헌(時?)으로, 시헌은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세 딸은 의성(義城) 김용채(金鏞采), 순창(淳昌) 설인호(薜仁鎬), 연안(延安) 이동녕(李東寧) 등에게 시집갔다. 시택은 부령(扶寧) 김연술(金淵述)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진(鍾珍), 종희(鍾熺) 두 아들을 두었다. 시관은 전주(全州) 이용복(李容馥)의 딸에게 장가들어 종규(鍾奎), 종소(鍾韶) 두 아들을 두었다. 사위 김용채는 정락(鼎洛), 진락(臻洛), 원락(元洛) 세 아들을 두었다. 사위 설인호는 아들 영태(永泰)를 두었다. 사위 이용복은 아들 ■■을 두었다.오호라! 공의 마음과 행실을 살펴보면 참으로 순고(淳古)하고 청후(淸厚)하며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사람이다. 대개 공은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훌륭한 선조의 덕을 이어받았으니 참으로 공력은 반이지만 효과는 배가 되듯 쉽게 학문을 성취하였는데, 그러나 보이지 않게 노력하여 늙도록 독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두터운 선은 넘치지만 명강(明剛)이 부족하다고 이르는 것은 바로 엄한 스승이 제자를 경계하려고 하여 지나치게 염려한 말인데, 어떤 이들이 실제 부족함을 지적한 정론이라고 여기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목상리의 집으로 공을 찾아뵈니, 공이 기뻐하면서 "그대가 나를 방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네. 나는 학문이 없기 때문에 선비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가고 들어오지 않는데, 그대는 학문을 갖추었는데 도리어 나를 찾아주는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비록 겸손한 말씀이지만 실로 세인들이 문장으로 사람을 취하는 풍조를 마음 아프게 여긴 것이다. 아! 이에서 또한 공이 숭상하는 것을 알 수 있다.시택(時澤)이 공의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는 우리 친족 종곤(鍾坤)이 지은 것인데 지나치게 소략한 실수가 있으니, 그대가 내용을 갖춰 거듭 찬술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내 생각건대 공과 동문이 된 지 20년이니 공을 참으로 잘 안다고 하겠다. 게다가 일찍이 공을 위해 〈한후당기(寒後堂記)〉를 지으면서 그 절조에 대해 탄복하였으니, 지금 덕을 드러내는 일에 어찌 감히 고사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주는 것'57)은 옛날의 도이다. 그러므로 공의 내강(內剛)을 드러내는 것은 전 선생이 정의재라고 호를 준 것에 어긋나지 않으니, 이로써 세상의 공을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公諱驥魯字德夫.李氏, 系出瀛洲, 以高麗文憲公諱敬祖爲始祖.以本朝執義, 爲莊陵自靖者, 諱伯瞻, 爲中祖.執義子錫祉, 司直, 以剛直見重於世.司直子長孫, 郡守.郡守子壹, 進士.生雲齡, 才行薦授叅奉.生僉知承宗, 亦以行義稱. 三傳而至小心齋克守, 師事尤菴宋先生, 先生亟稱其實學, 是爲公六世.曰長春曰崇曰鎭燁, 小心子孫曾, 連世文行.祖萬祿, 孝聞表宅.考東益, 號直齋, 勤儉孝友, 妣扶寧金氏奉珏女.以哲廟辛亥五月三日生, 幼而端莊, 異凡兒.稍長, 沈重寡默, 書籍之外, 無他好.始學於三從叔東顯, 復從其子南岡公泰魯講磨.弱冠前, 記2)立根基矣.事親以養志爲主, 奉二兄怡怡如也.丙寅丁母憂, 情禮俱盡, 戊子丁外艱, 家貧年凶, 送終儉薄, 以此爲終身恨.間一日拜兩親墓, 不以老而少弛.敎誨族子鄕少, 不問聰鈍, 誠心導率, 視爲己任 不憚勞.性眞率不飾邊幅, 平居無疾言遽色, 無親疎貴賤, 皆接以和顔.然有不正者, 則心惡而疎之.見人語及時政得失, 人物長短, 則嘿不酬答.貧益甚屢至絶火, 堅坐看書, 幷不許家人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寧守吾本分而死." 常戒其子曰: "人之居家,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及世道一敗, 宗國幾危, 邪說愈恣, 以'寒後'二字, 扁其堂, 蓋以歲寒松柏自期也.乙巳歲, 艮齋田先生之南駕也, 納贄行弟子禮, 就正所學, 先生以精毅齋錫號.於是老成德望, 爲同門所推.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公集合孔孟言仁諸說, 幷作一篇, 名曰《洙泗言仁錄》, 使讀者, 知所自究, 而不使紛爭, 蓋倣南軒所編, 而因其舊名也.座揭切要之言, 爲警省之資, 庭列群芳之物, 爲養心之需, 皆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嫉俗輩媒利之酷, 憫殘民保生之艱, 每對人以仁義道德之說, 反覆曉告, 此又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公之爲學,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少, 其發爲五七言咏歎者較多, 而要皆愛國憂道忠憤惻怛之辭, 其亦變雅之遺調歟.自丙寅臘月寢疾, 翌年正月望間, 令辦喪具, 至二十五日, 謂其子曰: "今日吾符到期也." 屛婦女著新衣, 更命以斂襲營葬之節, 果以是日卒, 享年七十四, 葬于扶安郡下西面書堂洞丁坐原從先兆也.配義城金氏永璜女, 無育, 繼配高興柳氏煥奎女, 有婦德, 克配君子. 三男, 時澤·時寬·時?出系仲父, 三女, 適義城金鏞采·淳昌薜仁鎬·延安李東寧.時澤娶扶寧金淵述女, 二男鍾珍·鍾熺.時寬娶全州李容馥女, 二男鍾奎·鍾韶.金壻男鼎洛·臻洛·元洛.薜壻男永泰.李壻男■■.嗚呼, 跡公心行, 洵淳古淸厚, 外柔內剛人也.蓋公得姿質之美, 先德之懿, 固有事半功倍之易, 然非有闇然自修, 到老冞篤之功, 何以至此.謂公厚善有餘明剛不足者, 乃嚴師戒人之過慮.或者認爲實際定論, 則失之矣.余嘗謁公於木上里庄也, 公喜曰: "不意子之訪我.我無文, 故士多過而不入, 子有文而顧訪我耶." 此雖自謙語, 實病世之以文取人也.噫, 是亦可以見公之所尙也.時澤, 以公家狀一通來示余曰: "此吾族鍾坤撰也, 而有失於太略, 子其重爲備述也." 余惟爲公同門二十年, 知公固悉矣.且曾爲公作〈寒後堂記〉, 贊服其所操, 今於狀德之役, 何敢固辭而不卒誠也.顧'微顯闡幽', 古之道也, 故表章公之內剛, 有不負田先生精毅之錫者, 用告夫世之淺知公者云爾. 영주 정읍 고부로 고부 이씨를 가리킨다. 부지런함과 삼감 《주자대전속집》 권8 〈큰아들 수지에게 주다.〔與長子受之〕〉에 "'부지런하고 삼간다[勤謹]'는 이 두 글자를 좇아서 올라간다면 좋은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가만히 너를 위하여 이렇게 하기를 원하며, 두 글자를 등지고 내려간다면 좋지 못한 일이 무한히 있을 것이니, 내가 비록 말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지만 너를 위하여 이를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날이……송백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남헌……것이다 장식이 《논어》와 《맹자》에서 인(仁)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뽑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지었던 것을 말한다. 《南軒集 卷14 洙泗言仁序》 정완의 명 장재(張載)가 지은 글이다. 당초에 장재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폄우(砭愚)와 정완(訂頑) 두 개의 명(銘)을 걸어 놓고서 제생(諸生)을 경계시켰는데, 뒤에 논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 정자(程子)의 말에 따라 폄우를 동명으로, 정완을 서명(西銘)으로 개칭하였다. 《伊洛淵源錄》 뜰의……뜻 《근사록(近思錄)》 〈도체류(道體類)〉에 "천지가 만물을 내놓는 기상을 관찰한다.[觀天地生物氣象]"라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말이 실려 있는데, 그 주(註)에 "주렴계(周濂溪)가 창 앞의 풀이 무성해도 베지 않으면서, 저 풀 역시 내 속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라고 하였다. 은미한……것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오는 말로 "역은 지난 것을 드러내고 올 것을 보여 주며,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준다.〔夫易 彰往而察來 而微顯闡幽〕"라고 하였다. 記는 旣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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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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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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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가헌 박공 행장 을해년(1935) 可軒朴公行狀【乙亥】 가헌 처사(可軒處士) 박공의 아들 봉규(鳳圭)가 공의 행록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선부군께서 경술년의 변고 때 순국하였는데, 지금 2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덕을 형상하는 글이 없습니다. 선부군의 동문 가운데 선부군의 행적을 잘 아는 분을 찾아보아도 그대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그 일을 맡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공의 큰 절개는 충분히 오당(吾黨)을 빛낼 수 있다. 그 행장에 내 이름을 의탁하는 것은 영광이니 감히 사양하겠는가. 마침내 공을 위해 행장을 짓는다.공의 휘는 병하(炳夏) 자는 문혁(文爀)이다. 호는 가헌(可軒)이며 다른 호는 신암(愼菴)이다. 밀성 박씨(密城朴氏)는 계통이 신라 시조 왕에서 나왔다. 고려에 들어와 휘 현(鉉)은 3품의 규정(糾正) 벼슬을 지냈으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니 중시조가 된다. 조선에 들어와 휘 충원(忠元)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조상이다. 4대를 지나 교리 자응(自凝)이 나왔는데, 이 분이 공의 9대조이다. 고조는 기번(基蕃)이며, 증조는 양휘(揚輝)이다. 조부 준민(準珉)은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명수(明秀)이며, 모친은 김해(金海) 김씨 응휘(膺輝)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정미년(1847년) 2월 18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겨우 6~7세에 잡된 말과 잡스런 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항상 어른의 곁에서 공손하게 응대하니 부로(父老)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9살에 모친께서 오래 병을 앓자 쌀을 빻아 죽을 끓여 올리고 열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으니 보는 이들이 놀라며 그 천부적인 효성에 감탄하였다. 상을 당하자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였다. 11살에 승지공(承旨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재주가 약간 둔하여 그 형에 미치지 못하니, 부친께서 "큰 아이는 가르칠 만하지만, 작은 아이는 가르칠 수 없다."라 하였다. 이에 승지공이 "사람의 성취는 덕으로써 하는 것이지 재주로써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개는 덕이 있으니, 우리 가문을 창성시킬 자는 바로 이 손자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몸이 손상되어 거의 죽을 뻔하니, 집안사람들이 놀라 급히 구황을 써서 소생하였다.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사람들과 말하다가 그 부친에 말이 미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리니, 사림에서 효행으로 천거하여 영읍(營邑)에 추천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이 극력 만류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그 호세(戶稅)을 면해주었다.갑오년(1894년) 동학이 일어났을 때,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서 강학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당시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었는데, 동학교도 사람이 곡식을 보내주니 공이 의리를 들어 책망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두려워 물러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곤궁할수록 더욱 가난함을 지켜 남의 재물을 취하지 않는 것을 내 비로소 아무개 공에서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 해 겨울에 왕의 군대가 동학교도를 토벌하기 위해 공의 마을을 지나다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서 문에 들어왔다가, 공이 의관을 바르게 하고 책상을 마주하고 똑바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옷깃을 여미고 공손한 마음을 일으켜 "이는 군자의 집이다."라고 하였다.경자년(1900년)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58) 선생을 고암(考巖) 강당에서 찾아뵈어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여하였다. 임인년(1902년)에 고부(古阜)의 석천(石泉) 서재에 머물러 있었는데, 주인 김 아무개가 공의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모두 올바름에서 나온 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내가 오늘에야 참 군자를 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계묘년(1903년)에 공주(公州)의 신전(薪田)에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뵈고서 스승과 제자의 예를 정하였다. 선생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59)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취하여 그의 거처를 '가헌(可軒)'이라 명하였다.부모의 묘소가 흥덕(興德) 사자봉(獅子峰) 아래에 있었는데 그 곁에 여막을 짓고서 몸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에 아우가 늙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렵다고 힘써 간하고 벗들이 또한 만류하매, 이에 묘 아래 마을에 수년 간 머물렀으니, 성묘하기 가깝기 때문이었다. 제사는 반드시 예로써 지냈으며, 비록 매우 가난하더라도 사 계절 정제(正祭)를 거행하니, 사우들이 모두 그 정성에 감복하였다. 갑진년(1904년)에 두승산(斗升山)60) 남쪽 안영리(安永里)로 이사하였는데, 마침 전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와 천암(天巖)과 예천(禮川) 사이에서 도를 강하니, 공이 스승의 자리가 가까이 있는 것을 기뻐하여 왕래하면서 학문을 질정하면서 3일이 지나면 멀게 여기고 넘지 않았다.경술년(1905년) 7월에 나라의 상황이 위급하게 되어 합방한다는 말이 떠도니, 이에 고군산도(古君山島)의 전 선생을 찾아뵙고서 선생과 함께 자정(自靖)의 의리를 지키고 변고가 심해지면 죽으리라 하였다. 8월 11일 글을 써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내가 배운 것은 예와 의이다. 저들이 말하는 합방이란 것은 우리 백성의 강토를 빼앗고 우리 임금의 지위와 칭호를 없애서 방자하게 높게 되려는 것이니 대단히 예와 의가 없는 것이다.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모시는 나의 몸으로 어찌 저들의 노예가 되어 복종하며 섬기겠는가. 치욕을 받으며 사는 것이 어찌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깨끗이 하고서 예의의 귀신이 되는 것과 같으랴."라고 하였다.13일 집에 돌아와 합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15일 전 선생이 왕등도(旺登島)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는 왕등도로 가겠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천천히 배편을 기다려보지요."라고 하였다. 공이 또다시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서울로 가야하니 속히 여장을 꾸려주오. 가면 다시 집에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소."라고 하니, 부인이 "집안이 가난한데 그대 홀로 어찌 이렇게 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공이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그날로 편지를 써서 동지들과 영결하였다. 음식을 며칠 간 드시지 않고서 허리띠를 묶고 용모를 단정히 하여 말과 행동이 전과 다름이 없이 차분하였는데, 때때로 '경전을 안고서 통곡하며 산에 들어가 말라 죽는다.'는 등의 말을 외웠다. 이에 목욕한 뒤 머리를 빗으며 손톱을 깎고서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가 19일 사시가 되자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흥덕 오호리(五湖里) 앞 산록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함풍 이씨(咸豊李氏) 왈담(曰淡)의 따님으로 덕성이 단정하고 한결같았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일남 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즉 봉규(鳳圭)이며 큰 딸은 광산(光山) 김덕준(金德俊)에게 시집갔으나 자식이 없어 남편이 죽은 뒤에 후사를 세워 며느리를 본 뒤에 남편을 따라갔다. 둘째는 서산(瑞山) 유학근(柳學根), 셋째는 전주(全州) 이홍열(李弘烈)에게 시집갔다. 종태(鍾泰)와 종호(鍾浩)는 손자이다.처음 내가 공을 알 때는 그 온화하고 우아한 용모를 보니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고 겸손한 말은 입에서 잘 내지 못할 것 같았으며 그를 종유하며 배우는 여러 제자들은 또한 모두 품위가 고상하고 단정하여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공의 제자일 줄 알 수 있었다. 대개 오래 지나도 다만 줄곧 온화하고 겸손함만 보았고 일찍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말한 의연한 기색이나 늠름한 말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변란을 만나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곰과 물고기를 구별하고61) 취하고 버릴 것을 정하였으니, 의리를 고담준론하며 스스로 기절(氣節)을 갖추었다고 하는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대개 공의 학문은 안에 힘쓰고 밖에서 구하지 않았기에 수양이 두텁고 밖으로 맹렬하게 발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렇다면 공은 강개하여 자결한 부류가 아니라, 차분하게 수양한 자라 하겠다.그러나 어떤 이는 포의로 순국한 것에 대해 중도(中道)에 지나친 것이라고 의심한다. 대저 위나라 임금이 진나라를 황제로 섬기게 하려고 하니 노중련(魯仲連)이 말하기를 "저 진나라가 천하의 황제가 된다면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요 그 백성이 되지 않을 것이다."62)라고 하였다. 만약 이 당시에 진나라가 과연 황제가 되었다면 노중련이 어찌 헛된 말을 하였으랴. 또한 참으로 바다에 빠졌을 것이다. 노중련도 또한 선비로 벼슬을 하지 않던 자인데, 고금에 논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공이 스스로 맹세한 글을 읽으니, 노중련이 신원연(新垣衍)에게 해주었던 말투와 비슷한데 비록 규모와 풍도(風度)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이 한 가지 의리의 관점에서는 공을 지금의 노중련이라 일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전 선생이 공을 위해 지은 만사를 보니 대단히 찬양하면서 "중도를 넘어 명성을 가까이 하였다고 부질없이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그 진심을 알 수 있다. 아! 공의 효성과 학문은 독실하여 참으로 사람들이 공송(公誦)하였으니 특별히 찬양하는 말이 필요 없는데, 다만 의리를 지켜 순국했던 일은 공이 이룬 큰일이거늘 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쓸데없는 말들을 하기에 특별히 자세하게 논하여 드러내어 입언하는 군자들에게 질정한다. 可軒處士朴公之子鳳圭, 以公行錄示余曰: "先子殉義于庚戌之變, 今爲二十有六年, 尙無狀德之文.求之先子同門而可徵者, 無如子, 子其圖之." 余惟公之大節, 足以有光吾黨, 託名爲榮, 其敢辭諸.遂爲之狀曰: "公諱炳夏字文爀, 可軒號也, 又號愼菴.密城之朴, 系出新羅始祖王.在麗, 有諱鉉, 官三品糾正, 謚武烈, 爲中祖.我朝, 有諱忠元, 官吏判, 謚文景, 爲顯祖.歷四世, 有校理自凝, 是爲公九世祖.高祖基蕃, 曾祖揚輝.祖準珉, 孝旌贈左承旨.考明秀, 妣金海金氏膺輝女.以憲宗丁未十二月二十八日生公, 甫六七歲, 無雜言雜戱, 常在長者側, 應對惟恭, 父老異之.九歲, 慈闈久病, 磨米煮粥, 十指出血, 見者驚之, 歎其孝愛天植.及丁憂, 哀戚盡情.十一歲, 受學于承旨公, 才稍鈍, 不及其兄, 其大人曰: "長兒可敎, 次兒不可敎." 承旨公曰: "人之成就, 以德不可以才.某也有德, 昌吾門者, 此孫也." 丙子丁外憂, 毁幾滅性, 家人驚惶, 急用狗膏得回甦.啜粥三年, 與人語及其親, 必潛然淚下, 士林擧孝行, 欲薦營邑, 公力止之, 里人感服, 共免其戶.甲午東亂, 閉戶歛跡, 講學益勤.時値乏食, 有匪人饋之以穀, 公據義責之, 其人惶蹙, 退語人曰: "窮益堅貧不取, 始見於某公." 是年冬, 王師討匪, 過公里, 聞讀書聲, 入門而見公衣冠整飾, 對案正坐, 歛袵起敬曰: "此君子家也." 庚子, 謁淵齋宋先生于考巖講堂, 叅鄕飮禮.壬寅, 留古阜之石泉書齋, 主人金某, 見動靜語默, 一出於正, 歎曰: "吾今日得見眞君子." 癸卯, 謁艮齋田先生于公州薪田, 定師生禮.先生取朝聞夕可之訓, 名其居曰, '可軒'.親墓在興德獅子峰, 欲廬側而終身, 其弟固諫以衰年難堪, 親友亦多止之, 乃留於墓下村數年, 爲其省瞻之近也.祭必以禮, 雖貧甚行四時正祭, 士友咸服其誠.甲辰移于斗升山南安永里, 田先生適南下, 講道於天巖禮川間, 公喜近師席, 往來就正, 三日爲踈.庚戌七月, 國勢危急, 有合邦之說, 乃拜田先生于古君山, 欲同守自靖之義, 變甚則繼之以死.八月十一日, 以書自誓曰: "吾之所學禮義也.彼所謂合邦, 奪吾人彊土, 削吾君位號, 肆然尊大, 無禮義之甚者.以吾尊君親上之身, 肯作彼之奴隷而服事乎.與其受辱而生, 孰若蹈海潔身而爲禮義之鬼哉." 十三日, 還家, 的見合邦之報.十五日, 聞田先生入旺島, 謂其子曰: "今, 吾作旺島行." 對曰: "徐待船便." 公又謂夫人曰: "吾今作京行, 速治裝, 行則似不還家." 夫人曰: "家貧, 子獨何以如此." 公默然無言, 以是日書訣同志.絶飮食數日, 束帶見3)容, 言動自若, 時誦'抱經痛哭入山枯死'等語, 乃沐浴櫛髮, 剪瓜仰臥床上, 至十九日巳時, 飮藥就義.葬于興德之五湖里前麓卯坐原.配咸豊李氏曰淡女, 德性端一, 治家有法.生一男三女, 男卽鳳圭, 女適光山金德俊無育, 夫死立後取婦後下從.次適瑞山柳學根, 全州李弘烈.曰鍾泰·鍾浩, 其孫也.始余識公也, 見其溫雅之容, 若不勝衣, 謙冲之言, 若不出口, 其從學諸子, 又皆循循雅飭, 不問可知爲公弟子.蓋久後而但見其一味溫謙, 而未嘗見毅然之色, 凜然之辭, 令人可畏者.及其遇變於一朝也, 判熊魚定取舍之易, 有非高談義理, 自許氣節者之所及.蓋公之學務諸內, 而不求於外, 故養之厚而發之烈如此, 然則公非慷慨殺身者流, 乃從容就義者也.然而或有以布衣殉國, 疑其過中者.夫魏君之欲帝秦也, 魯連有言曰: "彼秦而帝天下, 連有蹈海而死, 不願爲民." 若是時也, 秦果帝者, 連豈徒言之, 亦允蹈之矣.連亦士而非有位者, 未聞古今論者, 以此爲過中.今讀公自誓之書, 宛然魯連語新垣衍口氣, 雖其規模風略, 互有不同, 而就此一義, 則謂公爲今之魯連可也.然則人之疑公, 容有未之思歟.觀田先生挽公之詞, 極其贊揚而曰: "過中近名, 莫謾疑." 可以知之矣.噫, 公之孝學篤實, 固人所公誦, 而無待贊辭者, 惟是殉義一事, 爲公大致, 而不知者有言, 故論著之特詳, 以質于立言君子云爾." 연재 송병선 1836~1905.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두승산 정읍 고부에 있는 산이다. 물과 물고기를 구별하고 웅어(熊魚)는 팔진미의 하나인 곰 발바닥과 어물 요리로, 이를 구별한다는 것은 생명과 의리를 둘 다 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위나라……것이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천자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천자를 참칭(僭稱)한다면 나는 동해를 밟고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후퇴시켰다. 《史記 魯仲連列傳》 용모를 단정히 하다는 의미의 글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심재 황공 행장 기묘년(1939) 小心齋黃公行狀【己卯】 공의 휘는 종복(鍾復), 자는 계양(啓陽)이다. 황씨(黃氏)는 계통이 창원(昌原)에서 나왔다. 고려 시중 휘 충준(忠俊)이 시조가 된다. 그 후에 휘 하응(河應)은 찬성사(贊成使)를 지냈다. 휘 신(信)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거정(居正)은 조선에 들어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효성(孝誠)은 삼등 현령(三登縣令)을 지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사윤(斯允)은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지냈다. 징(澄)은 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수(琇)는 영춘 현감(永春縣監)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경중(敬中)은 호가 오촌(梧村)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제수 되었으며 충청과 강원 감사를 지냈다. 흡(潝)은 광해군 때 정치가 혼란하자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을 배척하다가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도성(道成)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윤(鈗)도 통덕랑을 지냈는데, 처음으로 청주(淸州)의 오근(梧根)에 거주하였으니, 이 분이 공의 5대조이다. 고조 연하(演河)는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검(檢)이다. 조부는 인최(仁最)이다. 부친은 기정(基鼎)이며, 모친은 한산(韓山) 이씨 음애(陰涯) 자(耔)63)의 후손이다. 철종 무오년(1858년) 12월 10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어 남들보다 영특하였다. 8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가 없자 스스로 원근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배웠다. 겨우 《통감》을 마치자 문리가 크게 발전하여 경서는 모두 배우지 않고도 이해하였다. 약관 이후로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진천(鎭川)의 눌항(訥巷)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는데, 가난이 더욱 심해 공부만 할 수 없었다. 이에 비루하고 하찮은 일을 닥치는 대로 부모를 위해 하였다.당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같은 고을 갈탄(葛灘)가에서 도를 강론하였는데, 공은 때때로 자주 찾아가 인사를 드리면서 지극한 의론을 들어서 마음속 깊이 감동한 것이 5~6년이었다. 정해년(1887년) 가을에 이르러 책과 폐백을 바치고서 스승으로 섬길 것을 청하니, 선생이 그릇으로 여겨 매우 아끼면서 소심재(小心齋)란 호를 주어 권면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매우 가난한 가운데서도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으며 힘써 생계를 꾸려가는 여가에 경전을 궁구하고 이치를 연마하여, 정밀히 생각하여 옳음을 구하고 힘써 실천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니 학문이 날로 실제로 나아갔다. 이에 선생이 자주 칭송하였다. 을미년(1895년) 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를 따라 장사를 치렀다.임인년(1902년) 겨울에 다시 청주(淸州) 금계촌(金溪村)으로 이사하였고, 갑진년(1904년)에 청주 북목산(北鶩山) 아래 동성리(東城里)에 다시 집을 지어 이사하였으니, 바로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대개 여러 해를 타향살이 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었는데, 지금 이에 선영 아래로 돌아와 은거하여 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이에 사방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서 책상을 이고 찾아와 집에서 그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날마다 제생들과 학문과 도를 강론하여 선(善)이 사람에게 미쳐 교화를 입은 자들이 많았으니, 절로 옆 사람은 알지 못하는 즐거움이 있었다.임술년(1922년) 7월 4일에 전 선생이 후학을 버리자 흰 두건에 띠를 두르고 소식(素食)을 하며 집밖에 거처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선생의 빈소를 향해 곡을 하며 한 해를 마쳤다. 공은 평소 거처할 때 병이 적어 늙을수록 더욱 강녕하였는데, 갑술년(1934년) 4월에 처음으로 앓기 시작하더니 다음해 2월 12일 돌아가셨다. 향년 78세였다. 집안에 조금의 식량도 없어서 장사지내는 비용을 모두 사우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시대 상황에 구애를 받아 천현(泉峴)의 선영 아래 술좌(戌坐)를 등진 언덕에 부장(赴葬)64)하였다. 문인 가운데 가마(加麻)65)한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첫째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밀양 손씨(密陽孫氏)의 따님으로 부덕을 갖추었으며 남편을 어기지 않고 섬겼다. 장남은 효연(孝淵)으로 박씨 소생이다. 다음으로 충연(忠淵)과 신연(信淵)이 있으며, 딸들은 박정규(朴珵圭), 홍재일(洪在一), 박오규(朴五圭), 박성겸(朴性謙)의 아내가 되었으니, 손씨 소생이다. 손자 화수(華秀)와 창수(昌秀), 손녀 윤홍섭(尹洪燮)의 처 이은경(李殷敬)의 처는 큰아들의 아들딸이다. 면수(冕秀)는 둘째의 아들이며, 긍수(兢秀)와 연수(寅秀)는 막내의 아들이다.공은 기국이 넓고 크며 용모는 풍후하고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굳세며 언동은 간략하면서도 신중하였으니, 한번 보기만 하면 군자인줄 바로 알 수 있다. 천부적으로 남다른 자질을 얻었기에 스스로 높은 덕과 학문을 이루었다. 대개 공정을 마음에 두고서 활용을 명강(明剛)함으로써 하기에 그가 의리를 강론함이 이와 같고 논의를 세움이 이와 같으며 자신의 몸가짐이나 일을 처리함에 이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명칭과 이치의 분석할 즈음에 비록 선유의 말이라도 마음에 생각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억지로 따르지 않았으며, 시비를 변별할 때 비록 여러 사람들이 동조하는 의론이라도 의리에 따져보아 옳다고 여기지 않으면 이치를 굽혀 따르지 않았다.공이 형(形)과 기(氣)와 신(神)과 리(理)에 대해 논하기를 "사람이 천지가 쌓은 정기를 얻어서 형체를 삼으니 사지와 백체(百體)가 이뤄지고, 천지의 떠도는 기를 품부 받아 기로 삼으니 숨을 마시고 내쉬는 사이에 통하고, 천지의 신명을 말미암아 심으로 삼으니 정(情)과 의(意)와 지(志)와 려(慮)가 발하고, 천지의 명리를 따라 성으로 삼으니 인의예지가 선다."라고 하였다.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학설에 대해 논하기를 "호론이 명(命)이 같은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요, 낙론이 기(氣)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호론은 명이 비록 같지만 이미 기 안에 있으니 성(性)이 그에 따라 다르다고 여긴 것이요, 낙론은 성은 곧 이치이니, 비록 기 안에 있더라도 본체는 같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다투는 논의의 대략인데, 이가 기 안에 있는 것은 촛불이 대바구니 안에 있는 것과 같은데 대바구니의 두껍고 얇은 것을 보고서 촛불이 밝거나 어둡다고 끝내 말한다면 옳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맺기를 "호론은 기에 구애되어 리를 잘못 본 바탕에서 천명과 기질 사이에서 본연을 논하였기에 낙론에게 비난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식견과 의론의 대략이다.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도리와 병사를 쓰고 군사를 운용하는 방법도 모두 널리 연구하여 두루 통하였으며 논을 저술하여 부류별로 편집하였으니, 그가 갖추고 있는 것은 참으로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선비의 그것이며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는 은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안으로 세상에 능력을 팔거나 자랑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지니지 않았고 밖으로 귀하고 현달한 사람을 알지 못하였기에 숲속의 초가집에서 몸을 마쳐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공이 올바름을 지키고 의를 행하면서도 세상의 물정에 관심을 둔 것은 본래 그러함이 있었다. 만년에 이르러 조선이 무너진 것을 애통하게 여겨 비분강개하여 세상에 뜻이 없었는데, 어떤 일이든 간에 왜놈과 관계된 뒤에 이뤄진 것은 비록 선조를 받드는 큰일이라도 일체 그만두었으니, 시의(時義)에 밝아서 의연히 절조를 지닌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평생의 학덕을 들어 논하자면 모든 것이 공정하고 명강한 데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은가.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음성(陰城)의 오진영(吳震泳)66)이 선생의 원고를 고쳐 선비를 해치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위세에 달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뱀과 지렁이가 무리를 이루듯 매와 개처럼 주인을 위해 사납게 굴 듯 박쥐가 이쪽저쪽 살피며 머뭇거리듯 하는 자들이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속임을 분별하여 죄를 성토하는 몇몇 사람만이 외롭게 서 있거늘, 오직 공이 서까래만한 붓으로 크게 써서 이르기를 "오진영은 사문의 난적이니, 그 무리들과 함께 모조리 내쳐야 한다."라고 봉황이 산등성이에서 울 듯 호랑이가 산에서 포효하듯 하였다. 이에 사설(邪說)이 물리쳐지고 스승의 무고가 씻어졌으며 간당(奸黨)이 두려움에 담이 쪼그라들고 선류(善類)들의 기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대저 간옹은 큰 스승이다. 절의의 대관(大關)이 없다고 스승을 무고하는 것은 큰 죄인데, 크나큰 스승을 절의의 대관이 없다고 무고하는 것은 죄 가운데 더욱 큰 죄이며 천하의 커다란 변고이거늘, 공의 대의에 의지하여 큰 죄를 성토하고 큰 변고를 바로잡으니 이 또한 공의 공정하고 밝고 강건하게 처리한 일 가운데 큰 것이다.나는 공에 대해 비록 겨우 한 번 인사를 올렸을 뿐인데, 특별히 선생을 보호하는 의리에 뜻을 같이 해준 것에 깊이 감동하여 진심으로 공경하여 따랐다. 지금 공의 아들 신연(信淵)이 행장을 청하였는데, 일을 중대하고 나의 글은 가볍기에 다만 병으로 사양하니, 더욱 간절하게 청하면서 "부친께서 향촌에 곤궁하게 숨어 지냈으니, 그 덕을 아는 자가 드뭅니다. 어른과 부친은 이미 동문이며 또한 큰 변고를 당하여 수많은 군중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서도 뜻과 의리를 함께하였으니, 낱낱이 거론하지 않고 이 큰일만 들어보아도 그 누가 어른보다 부친을 깊이 알겠습니까. 이것이 천리를 왕래하면서 반드시 어른에게 행장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내가 "참으로 이것 때문이라면 감히 사양한다고 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장을 받아 펼쳐서 살펴보니, 문장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 많기에 인하여 공의 유고를 읽고서 대의를 파악하였다. 그리고서 공의 여러 아들들에게서 들은 바를 서술, 편차하여 문장을 완성하고 삼가 나의 의견을 첨부하여 평소 존경하고 신복한 뜻을 부친다. 公諱鍾復, 字啓陽.姓黃氏, 系出昌原.以高麗侍中諱忠俊, 爲上祖.厥後有諱河應, 贊成.信, 工部尙書.居正, 入我朝刑曹判書.孝誠, 三登縣令贈工曹參判.斯允, 平安兵使.澄, 高原郡守贈戶曹判書.琇, 永春縣監贈領議政.敬中號梧村, 文科翰林歷忠淸江原監司.潝, 光海政亂, 上疏斥爾瞻被錮.仁祖改玉, 贈執義.道成, 通德郞.鈗, 亦通德郞, 始居淸州之梧根, 是爲公之五代祖也.高祖演河, 有文行.曾祖檢.祖仁最, 考基鼎, 妣韓山李氏女陰涯耔后.以哲宗戊午十二月十日, 生公.幼有美質, 穎悟出倫.八歲遭外艱, 家貧無學資, 自能往來受學於遠近長者, 纔了《通鑑》, 文理大進, 經書皆不學而通.弱冠後, 爲養親移居鎭川訥巷, 貧益甚不能專學, 鄙細之事, 無不親爲.時艮齋田先生, 講道於同郡葛灘上, 公時常拜謁, 得聞至論, 心竊興感者, 五六年.至丁亥秋, 納書贄, 請師事之, 先生甚器重之, 錫號小心齋而勉之.公自是益自奮勵, 動心忍性於空乏之中, 窮經硏理於食力之暇, 務主於精思求是, 力踐爲己, 學日就實, 先生每稱許之.乙未春, 丁內艱, 執喪如禮.壬寅冬, 又移淸州金溪村, 甲辰復築室於淸州北鶩山下東城里, 卽故居近地.蓋累年棲屑, 奠居無所, 今乃歸隱先隴下, 爲終老計也.於是四方學者, 聞風負笈而來, 舍不能容, 日與諸生講學論道, 善及於人而見化者衆, 自有傍人不知之樂矣.壬戌七月初四日, 田先生棄後學, 白巾環絰, 食素居外, 朔望望哭, 以終期年.公平居少病, 老益康寧, 甲戌四月, 始示憊, 翼年二月十二日, 考終, 壽七十八.家無甔石, 資葬具皆賴士友助, 因時拘, 赴葬泉峴先塋下負戌原, 門人加麻者數十.前配, 順天朴氏女.後配, 密陽孫氏女, 有婦德, 事君子無違.男長孝淵, 朴氏出.次忠淵信淵, 女爲朴珵圭·洪在一·朴五圭·朴性謙妻者, 孫氏出.曰華秀·昌秀, 尹洪燮·李殷敬妻, 長房男女.曰冕秀, 仲房男.曰兢秀·寅秀, 季房男.公器宇寬大, 容貌豊厚, 性度和而剛, 言動簡而重, 一見可知爲君子人, 其資質之得於天者有異, 故德學之成於己者亦高.蓋以公正存心, 而用之以明剛, 故其講義也如是, 立論也如是, 行己處事也莫不如是.剖析名理之際, 雖於先儒之言, 求諸心而不得, 則不敢强從也.辨別是非之時, 雖於衆共之論, 揆諸義而不然, 則未嘗詭隨也.其論形氣神理, 則曰: "人得天地儲精以爲形, 而四肢百體成, 稟天地游氣, 以爲氣, 而喘息呼吸通, 因天地神明以爲心, 而情意志慮發, 順天地命理以爲性, 而仁義禮智立." 論湖洛說, 則曰: "湖非不知命同, 洛非不知氣異.但湖以爲命雖同, 而旣在氣中, 則性隨而異, 洛以爲性卽理也, 雖在氣中, 本體則同.此爭論大略, 終謂理在氣中, 猶燭在籠中, 見籠之厚薄而謂燭有明暗可乎." 結之以'湖拘氣迷理論本然於天命氣質之間, 故見非於洛', 此見識議論之梗槩也.經國制治之術, 用兵行師之法, 皆博究旁通, 著論而類編之, 其所具存, 固非不適用之世儒, 亦非往不返之隱者.然而內不萌沽衒之念, 外不識貴顯之面, 林薄蓬篳, 終身無悔, 其守正行義, 泊於世情者, 有素矣. 逮乎晩年, 痛宗國之傾覆, 悲憤慷慨, 無意生世, 凡於事爲, 涉於彼邊而後成者, 則雖奉先大事, 一切已之.其明於時義, 毅然有操者若此焉.擧公生平德學而論之, 總不外公正明剛者, 不其然乎.至於山頹後, 陰震誣認改稿戕士之變, 人皆趨勢畏禍, 蛇蚓結黨, 鷹犬助虐, 蝙蝠依違者, 環一門也, 幾箇人辨誣討罪者, 孑然而孤居, 惟公以如椽之筆, 大書之曰: "震, 師門之亂賊, 幷與其黨與而斥之." 若鳳鳴于岡, 虎嘯于山, 邪說以闢, 師誣以雪, 奸黨膽落, 善類氣甦.夫艮翁, 大宗師.無節義大關, 誣師大罪, 誣大宗師以無節義之大關, 罪之尤大, 而天下之大變也, 而公大義是仗, 大罪是討, 大變是正, 此又公公正明剛之大者也.余於公, 雖僅一拜面, 特於衛師之義, 深感同志, 心誠敬服, 今於公子信淵之請狀德也, 以事重文輕, 適足以爲病辭, 則其請愈懇曰: "先人窮沒邱園, 知德者鮮矣.子與先人, 旣爲同門, 又當大變, 同志義於千百群衆滔滔一流之中, 不待悉擧而卽此大者, 其相知也孰深焉.此所以往返千里, 必求於子也." 余曰: "苟以是也, 不敢言辭." 乃受其家狀而按閱, 則文多不備, 因取公遺稿, 領略大意, 幷書所聞於公之諸孤者, 謹次成文, 而竊附己見, 庸寓平日敬服之意云爾. 이자 1480~153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시호 는 문의(文懿)이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언관직에 발탁되어 수찬(修撰) ·교리(校理)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 ·우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조광조(趙光祖) 등 기호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도모했으나, 이들의 정치노선에는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정치노선을 걸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음성에 퇴거하여 '음애'라 자호(自號)하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였던 김세필(金世弼) ·이약빙(李若氷) ·이연경(李延慶)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부장 예월(禮月)을 기다리지 않고 염(斂)을 하고 급히 장사(葬事) 지내는 것을 이른다. 가마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학생 김공 행장 –기미년(1919년)- 學生金公行狀【己未】 우리 김씨는 대대로 부안현(扶安縣)에 거주하였다. 고려에 있어서는 문장과 도학이 뛰어나고 유학의 성인을 높이고 불교를 배척한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貞公) 휘 구(坵)가 있으며, 나라에 충성하고 문묘를 처음 만든 상서 충선공(忠宣公) 휘 여우(汝盂)가 있으며,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뜻을 두고서 관향으로 완전히 귀향한 고부(古阜) 군사 휘 광서(光敘)가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첨지 휘 보칠(甫漆)이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여 현감(縣監)에 녹훈되었다. 휘 숙손(淑孫)은 고을을 다스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진사 휘 종(宗)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죽계 휘 굉(鋐)은 진사에 장원하고 생원에 2등하였으며, 도학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이 되었고 사림들이 사당을 세웠다. 참봉 휘 정길(鼎吉)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일으켰다. 중세에 고부에 이사하여 거주한 것이 2백 년에 가까운데 대대로 의를 행함으로 서로 힘써 고가(故家)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공의 휘는 재열(栽烈) 자는 경삼(敬三)이니, 죽계공(竹溪公)에게 십대손이 되며 참봉공(叅奉公)에 9대손이 된다. 나는 공의 집안 조카가 되어 30년을 모셨는데, 그 밖을 보면 탄솔하고 순박하며 말을 어눌하게 하여 행동이 조심스러우니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듯한데, 그 안을 살펴보면 자애롭고 신실하며 충후한 덕은 하늘에서 받은 것 같았다. 조부의 휘는 석우(錫禹)로 일찍 돌아가시고 조모 최씨(崔氏)는 절개를 지켰으며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부친의 휘는 복한(復漢)으로 계모를 섬김에 매우 공손하였는데 또한 불행하게도 일찍 타계하였으니, 당시 공은 혈연단신의 어린아이였다. 계모인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최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최 부인은 성격이 엄하여 공이 잘못을 저지르면 문득 회초리로 때리며 용서하지 않았는데, 공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공은 젊어서 집안일을 맡아서 하느라 공부를 하지 못하였는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조금 여유가 생기자 선조를 받드는 제향과 제수, 제전(祭田)과 묘소를 쓰는 것과 석물(石物)에 관계된 것은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쓰는 것은 대단히 검약하니, 지나치게 검소하여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주거나 취하는 것은 너그럽고 넉넉함을 힘쓰고 작은 이익을 따지지 않았기에 평생 원망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후사로 들인 양자의 생부모는 촌수로 보면 실제로는 멀었는데 친족이 가난하여 이사 와서 함께 살면서 40년을 재산을 함께 쓰게 하면서도 절대로 은덕을 베푼다는 기색을 띠지 않았다. 그 어린 아들이 부모를 여의어 양육할 사람이 없게 되자, 공이 거둬서 길러 젖먹이에서 자라 학문을 배우며 아내를 맞이하고 분가할 때까지 줄곧 친자식처럼 대하였으니, 남의 어려움을 걱정함이 진심에서 나왔다. 공이 거처하는 백실리에 초상이 나면 친소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먼저 달려가 상사(喪事)를 주관하며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 아쉬움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집안사람부터 향리의 노소 상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기미년(1919년) 2월 9일에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헌종 병오년(1846년) 6월 1일에 태어나셨으니 향년 74세였다. 고부 우덕면(優德面) 배장산(拜將山) 을향(乙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치중(致中)의 따님으로, 부덕을 두루 갖추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이에 친족의 아들 익술(翊述)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손자는 다섯 명으로 형근(炯根), 형환(炯鍰), 형종(炯淙), 형연(炯然), 형채(炯埰)이며, 손녀는 두 명으로 큰 손녀는 최재용(崔載庸)에게 시집갔고 작은 손녀는 아직 어리다. 증손으로 인철(仁喆)과 원철(元喆)이 있다.오호라, 공은 우리 가문에 공덕이 있는 사람이다. 선군께서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친족은 십 수 년 이래로 선영의 묘에 시제를 중도에 그만두었는데 다시 거행한 것은 실로 아무개 형이 주관하고 재무를 맡은 공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공의 효성이 멀리 친진(親盡)67)에까지 미친 것이다. 대개 공의 덕과 효는 본친(本親)에 두터이 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은 것이다. 공은 이를 갈 6~7살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의롭지 않은 한 가지 일이나 사납게 꾸짖는 한 마디 말도 남에게 가하지 않았다. 평소 책을 읽어 견문의 도움이 있지 않았는데도 이런 것을 능히 하였으니, 이 또한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만일 학문에 종사하였다면 의리의 정수를 들었을 것이니 그 성취가 어찌 천품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그러나 공의 어짊은 또한 가문의 내력과 관계되는데, 식자들은 일찍이 조모의 가르침을 받았고 선군의 효성을 보고 감화되었다고 하니 그 말을 속일 수 없다. 최 부인은 열부로 복한은 효성으로 일찍이 《유섬천재삼강록(儒剡薦載三綱錄)》에 올랐는데, 지금 익술(翊述)이 이미 충심으로 공을 봉양하고 또한 거상도 잘하니, 나는 이에서 '효자가 끊어지지 않아 길이 복을 준다'68)는 시인의 말을 믿게 되었으며 또한 공의 덕과 선으로 인해 후대에 경사가 많은 것을 징험하게 되었다. 吾金, 世家扶安縣.在麗, 文章道學, 尊聖斥佛, 而有平章事文貞公諱坵.忠王國刱文廟而有尙書忠宣公諱汝盂.志存罔僕, 大歸貫鄕, 而有古阜郡事諱光敘.逮至本朝, 僉知諱甫漆, 討李施愛, 錄勳縣監.諱淑孫, 治有異蹟.進士諱宗, 己卯禍後隱居不仕.竹溪諱鋐進壯生二, 以道學薦爲齋郞, 士林立祠.叅奉諱鼎吉, 丙子倡義.中世移居古阜者, 近二百年, 世以行義相勖, 不失故家風.公諱栽烈字敬三, 於竹溪公爲十世, 叅奉公九世.澤述爲門子姪, 事之三十載, 觀其外, 坦朴訥言, 恂恂若無, 能察其中, 則慈諒冲厚之德, 有得之天者.大父諱錫禹, 早沒, 大母崔氏, 守義保家有法.父諱復漢, 事繼母惟謹, 又不幸早世.時, 公孑然童幼也, 侍母海州吳氏, 養崔夫人, 極其誠, 崔夫人, 性嚴, 公有過, 輒施橽不貸, 公一意承順.少爲幹蠱失學, 力于稼穡, 得稍饒, 凡係奉先享薦置田營墓石儀, 靡不殫誠.自奉甚約, 疑於儉而固也.至於與人取予, 務從寬厚, 不較小利, 以故平生無怨言.所後子本親, 以屬則實遠, 族貧而徙從, 有無共之四十年, 絶無德色.其幼子失恃, 無以養, 公收鞠之, 自乳而長, 以至敎學授室析箸, 一如親子, 恤人之難, 出實心.公所居百室里, 有喪不問親疎貴賤, 爲之先往, 經劃喪紀, 惟力所及, 人多賴以無憾者.由是自家人, 以至於鄕里老少上下, 皆得其歡心焉.歲己未三月二十九日, 以疾卒, 距其生憲廟丙午六月一日, 享壽七十四, 葬于古阜優德面拜將山乙向原.娶驪興閔氏致中女, 婦德備至, 無育, 取族子翊述爲後.有孫男五人, 炯根·炯鍰·炯淙·炯然·炯埰, 孫女二人, 長適崔載庸, 次幼.曾孫, 仁喆·元喆.嗚呼, 公, 吾門有功人也.先君嘗曰: "吾族十數年來, 先墓歲薦之中廢而復擧者, 實某兄經理宗財之力." 斯又其孝之遠及於親盡也.蓋公之德孝, 爲本厚以爲用.自齠齔至于耆耋, 未嘗以一事之不義, 一言之惡詈, 加諸人, 素非有讀書聞見之益, 而乃能有斯, 斯不亦難得矣乎.如使從事問學, 得聞義理之精, 則其所就, 豈止得於天禀之美而已哉.雖然公之賢, 亦係其世類, 識者以爲早襲乎其大母之訓, 觀感乎其先君之孝者, 有不可誣也.崔夫人以烈, 復漢以孝, 曾登《儒剡薦載三綱錄》, 今翊述旣忠養公, 又善居喪, 余於是益信詩人之不匱永錫, 又以驗公之德善, 慶發於後昆也. 친진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된 것을 이른다. 효자가……준다 《시경》 〈기취(旣醉)〉에서 "효자가 끊어지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선한 복을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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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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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극경에게 보냄 을묘년(1915) 與吳極卿 乙卯 지난달 초에 선장(仙庄)을 떠나서 모양(牟陽)과 오산(鰲山)을 지나 돌아오는데, 시절은 이미 가뭄이 오래되어 농가는 실의에 차있었고, 백리 길에 날씨가 뜨겁고 더위를 먹어 땀을 줄줄 흘리면서 고생고생 힘들게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에 가뭄이 더욱 심해지고 더위가 더욱 혹독해졌고 40여 일이 지나자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려고 했습니다. 농사가 희망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안부를 여쭈니, 이즈음 계절의 변화에 잘 대응하여 몸을 조리함에 손상이 없지는 않습니까? 바람 치는 창가에서 책을 읽고 도리를 투철히 깨달을 때 쇄락(灑落)하게 관통하는 기상63)이 또한 가슴속의 맑고 시원한 기운을 절로 생겨나게 하기에 충분합니까? 제 스스로 생각할 때, 앞으로 죽어 골짜기에 나뒹구는 것은 비록 풍년 든 해일지라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이처럼 크게 흉년 든 해에는 더 면하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이미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옛사람이 "배고픈 귀신이 되었는데, 또 다시 근심스런 귀신이 되면, 이 한 몸이 두 가지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64)고 말했으니,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일찍이 사생(死生)을 근심으로 삼지 않고, 오직 죽기 전에 미처 보지 못한 책을 더 볼 수 없고 미처 듣지 못한 의리를 더 들을 수 없는 것을 근심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제가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 학문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진실로 실마리를 연 현인들이 있었는데, 도학의 강론에 대해 말하면, 퇴계 이황선생에 이르러서 비로소 구비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유집이 호남에서 발간된 것은 많지 않아서 전서를 받들어 읽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는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형이 은혜롭게도 빌려준 것을 읽어보고 그 규모를 알게 되었는데, 심법(心法)은 한결같이 주자를 모방했지만, 크기와 엄격함은 미치지 못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전체를 갖추었지만 미미하다."65)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에 주장한 것은 겸(謙)이라는 한 글자에 있으니, 이것은 바로 《서경》 〈열명(說命)〉의 "뜻을 겸손히 하여 어느 때고 배우면 수양이 이루어진다"66)는 것이고, 《주역》의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67)는 것입니다.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존광(尊光)의 덕을 이루었으니, 그의 학문은 바르고 도는 높아서 사문의 종장이 된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오늘날의 선비들은 조금의 문예나 약간의 견문이 있으면 즉시 스스로를 대단히 여기고서 다른 사람을 경시하여 자신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무리들이 어찌 일찍이 꿈속에서라도 학문의 경지에 도달했겠습니까. 일생을 잘못 보내는 것이 애달플 뿐입니다. 제가 가만히 형의 포부와 성취를 살펴보건대, 누구만 못하다고 하여 스스로 불능하다고 생각하고서 아랫사람에게 부지런히 묻습니까? 오늘날 퇴옹(퇴계)을 잘 배운 사람으로는 다시 누가 있겠습니까? 형의 입장에서 저를 보게 되면 경솔함과 미천함이 드러난다고 여길 것이니, 역시 제가 논했던 오늘날 선비들에 대해서도 근접하지 못하면서도 자각하는가 못하는가 할 것입니다. 부디 단점이 드러나는 대로 그때마다 고쳐서 함께 선(善)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오늘날 속인들은 대부분 삼취(三娶) 이후에는 합독(合櫝)68)해서는 안 되며, 첩으로 간주한다고 말합니다. 매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번번이 근거가 없는 설이라고 배척했습니다. 이제 퇴계가 유희범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후비(後妣)도 별도로 신주 독을 만들고 별도로 탁자를 만든다는 문장이 있고 본인도 친히 행했습니다.69) 더구나 재취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삼취 이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퇴계의 뜻은 비록 단지 형세 상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일 뿐 예의 상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속인들이 이것을 가지고 선현이 그렇게 하였다고 핑계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고(先考)․선비(先妣)․후비(後妣) 세 신위에 대해 신주 독과 탁자를 같이 하는 데에 어떤 심한 불편한 형세가 있었기에 퇴계가 이렇게 했던 것입니까?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예기》 〈제통(祭統)〉에서 "제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부부가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은 내외의 관(官)을 갖추기 위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남편이 승중(承重)70)했는데 처가 따라서 상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는 상(喪)에 주부가 없는 것입니다. 상(喪)에 주부가 없으면, 그 우제, 졸곡, 부제, 연제, 상제, 담제에 대하여 〈제통〉에서 말한 '부부가 친히 한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퇴계는 정도가에게 답한 편지에서 "예에서 증손이 증조의 승중이 되면 그 조모나 어머니는 승중복(承重服)을 입고 처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71)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예에 근거한 것은 무슨 책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만약 고찰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정도가는 단지 '옛사람은 음식에 임했을 때 반드시 고수레를 했는데, 지금도 고수레를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72)'라고만 물었을 뿐, 주객이 함께 밥 먹을 때에 고수레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퇴계의 대답73)은 주객이 함께 밥 먹을 때, 어떤 경우에는 고수레를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과 고수레를 권하는 것이 괴상하다는 취급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홀로 밥 먹을 때와 내가 좌중의 가장 연장자가 되었을 때 고수레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말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옛 것에 얽매여 세속을 놀라게 한다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혼자 밥 먹을 때나 가장 연장자일 때에 고수레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대답의 처음에 이미 '이는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으니, 주객이 함께 밥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수레를 허용한 것입니까? 잘 모르겠으나, 평소의 견해로는 일찍이 어떻게 보셨습니까?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먹을 때에 반드시 선대에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고수레를 하여 그 공에 보답하였습니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제사를 흠향하는 자의 경우는 스스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대신 제사를 지내니,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낼 때, 오히려 조상신을 대신하여 술로 제사 지낼 줄 알면서 스스로 밥 먹을 때 스스로 고수레를 하는 것은 거행하지 않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일찍이 우리 선사를 보니 그렇지 않으셨으니, 매번 밥 먹을 때마다 반드시 고수레를 하셨습니다. 요컨대 이것이 마땅히 법이 되어야 하니, 잘 모르겠으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정도가는 남명(조식)이 포은(정몽주)의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논한 설을 인용하고, 다시 자신의 견해로써 논설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포은의 한 번 죽음이 매우 가소롭다."74)라고 한 것 외에는 말한 내용이 옳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퇴계의 대답75)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다만 "세상 사람들이 의론을 좋아하고 공격하기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어주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니 그대도 이런 병폐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을 꺾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현자를 위하여 과실을 숨긴다76)는 도리의 측면에서는 제대로 된 것이지만, 만약 사안에 대하여 도리를 밝혀 질문한 사람의 마음을 설복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정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은 마땅히 과실이 있는 속에서 과실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니, 과실이 없는 속에서 과실이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본디 다른 사람의 과실을 찾아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지, 어떤 사람에게 비록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곡진하게 보호함으로써 과실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퇴계선생이 굳이 이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정도가에게 답한 것은 아마 정도가가 평소에 약간 다른 사람의 과실 찾기를 좋아한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의론을 좋아하고 공격하기를 좋아한다는 말과 병폐가 있다는 말을 참고하면 퇴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가릴 수 없고, 시비에 대해서는 한쪽만 중시할 수 없으니, 이것은 것은 본래 정리(定理)입니다. 어찌 정충대절(精忠大節)이라는 네 글자로 개괄하고 일필로 단정하고는 막아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일일지라도 먼저 대절(大節)을 살펴봤다면, 그 나머지는 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결같이 이와 같을 뿐이라면 학자가 다른 사람의 현부(賢否)와 득실을 논하여 격물치지의 공부를 돕는 것에 대하여 어찌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계곡 장유가 "포은은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칠 수 있으셨던 분이다. 그런데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이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는 절의를 제대로 세운 일이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홉 공신의 반열에 끼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의아하게 생각된다."77) 하였는데, 문충공(정몽주)이 문묘에 종사되면서부터 후학들이 감히 다시 그 잘잘못을 논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잘 모르겠으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논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기에 대하여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포은선생의 일에 대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밝게 뜨고서 반복적으로 따져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폐위 당했을 때 절개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허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우왕이 폐위될지라도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고, 창왕이 비록 죽을지라도 요태자(공양왕)가 또한 종실로서 선왕의 혈손이니 진실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힘이 부족하여 이러한 변고에 이미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없었다면 우선 마땅히 은인자중하고 변통하여 왕씨의 사직을 도모하여 보존하는 후공(後功)을 세웠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면 거의 맹자가 논한 '사직이 군주보다 중요하다78)'는 뜻을 해치지 않고, 성인이신 공자가 말한 '그 죽음을 아껴서 기다린다79)'는 뜻을 실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공에 참여하려다 절망한 날에 한 번 죽음으로써 뜨겁게 나라를 위해 순국하고, 마침내 '정충대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모르겠으나, 포은의 신령이 빙그레 웃으며 '네가 내 마음을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이른바 과실이 있는 중에서 과실이 없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저의 말과 같아야 폐해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최고의 도와 최고의 의리를 논한다면, 우왕을 폐할 때 절개를 세운 공이 있은 뒤에야 진실로 만세의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왕신민(汪信民)은 "사람이 풀뿌리를 캐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80)고 말했는데,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풀뿌리를 잘 씹어 먹는 사람 중에 저만한 사람이 없는데, 나이가 60이 되도록 한 가지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 풀뿌리를 씹어 먹는 것을 입으로만 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과 입으로 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주로는 부귀를 성취할 수 있는데 의리를 생각하여 곤궁해도 편안한 것은 마음으로 풀뿌리를 씹어 먹은 경우이고, 마음으로는 부귀를 사모하는데 재주가 졸렬하여 빈한하게 먹고 사는 사람은 입으로 풀뿌리를 씹어 먹는 경우입니다. 만약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만천하에 궁핍한 백성 가운데 누군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 부귀하게 되어 왕신민이 일컬은 바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까. 이로써 스스로 반성해보면 저의 평생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저의 졸렬한 재주로 일찍 이미 풍파를 따라서 의식(衣食)을 좇았으나 어째서 당시의 뭇사람만 못해서 끝내 성취하지 못했습니까. 그러니 역시 입으로만 풀뿌리를 씹어 먹은 자라고 전적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 결국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가소로울 따름입니다. 다만 지금 만난 형편이 풀뿌리를 씹어 먹고 싶지 않아도 역시 그리할 수 없으니, 우선 마음으로 씹어 먹든 입으로 씹어 먹든 막론하고 씹어 먹은 이후에 그만둘 것입니다. 저번에 부탁한 순무 종자는 보내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떠합니까? 去月初離自仙庄, 歷牟陽鰲山而歸, 時已久旱, 田家望望, 沿途百里, 天氣蟲蟲, 吸暑涔涔, 間關抵家. 厥後旱愈甚暑愈酷, 經四十餘日, 夏將盡秋將至矣. 農既無望, 人豈堪居? 敬問此際有以對時, 節宣不瑕有損? 風牕翫書, 透道悟理, 灑落貫通之氣象, 亦足以自生胷膈之清涼者否? 弟則自念前頭溝壑, 雖在康年, 亦所難免, 矧茲大無, 既自知甚明矣. 且古人云"既爲餓鬼, 又爲愁鬼, 是一身而難堪兩役", 此言有理. 是以曾不以死生爲憂, 惟以未死前, 不能益見所未見之書, 益聞所未聞之義爲憂耳. 竊嘗聞我東學問, 在麗末韓初, 固有發端之賢, 至於講道論學, 則至退溪李先生而始備. 而以遺集之行於湖南者無多, 恨未得奉讀全書, 而深知其規模之所在矣. 比因吾兄惠借而讀之, 有以見其規模, 心法一倣朱子, 而但大與嚴則不及, 是所謂具體而微也. 至其生平所主, 則在謙之一字, 此卽說命"遜志時敏, 厥修來來"者, 而大易之"卑以自牧". 致尊光不可踰之德也, 宜其學正道尊, 而爲斯文宗師也. 胡爲乎今之士, 有些小文藝․若干聞見, 便自大輕人, 惟我獨尊也乎? 如此輩人, 何嘗夢到學問境界? 可哀其枉過一生也. 竊覵兄之抱負樹立, 誰之不如而自以為不能, 而勤於下問? 今世之善學退翁者, 更復有誰? 以兄觀弟, 其輕淺發露, 亦無有近於弟所論今士者, 而不自覺也否. 幸隨見隨攻, 偕至於善, 是所望焉.今俗人多言三娶以後, 不當合櫝而視以副室. 每聞之, 輒斥以無稽之說矣. 今見退翁答柳希范書, 有後妣別櫝別卓之文, 而乃所親行者. 又況於再娶而非三娶以後者亦然, 則退翁之意, 雖只以勢當如此, 非以禮當如此, 然今俗之人, 安得不以此而籍口於先賢乎? 盖三位同櫝同卓, 有何甚不便之勢, 而退翁乃爾也? 竊所未曉.《禮記》曰"祭也者, 必夫婦親之," 所以備外內之官也." 若夫承重而妻不從服, 則是喪無主婦矣. 喪無主婦, 則其虞卒祔練祥禫之祭, 烏在其夫婦親之乎? 然而退翁答鄭道可書曰"禮, 曾孫爲曾祖承重, 而其祖母或母而服重服, 妻不得承重," 未知所云, 據禮者指何書而言耶? 如有考得者, 示及爲幸.道可但問'古人臨食必祭, 今亦祭之, 何如?' 未嘗問主客同飯時祭不祭. 退翁之答, 主客同飯, 一祭一否之不可, 及見勸祭之取怪. 不言在家獨飯, 及我爲座中最長時可祭與否, 豈不當泥古駭俗之意居多, 故并不欲祭於獨飯․最長時耶? 抑上既云此亦有難通處, 則主客同飯以外, 皆許其祭耶? 未知雅見嘗如何看? 夫人無食, 無以爲生, 重莫重焉. 故古人臨食, 必祭先代始爲稼穡飲食之人, 以報其功. 至於死而爲神而享祭者, 不能自祭. 故爲之代祭, 況生人而可容不祭乎? 今之人於先祖享祀, 尚能代神而祭之酒, 至於自飯而自祭, 則不行, 甚可異也. 曾見鄙先師則不然, 每飯必祭之. 要之, 此當爲法, 未知如何?道可引南冥論圃隱出處可疑之說, 而更以自意有所論說. 其云'圃隱一死, 殊可笑'以外, 不可不謂言則是也.' 故退翁之答不言無是事, 而但言世人好議論喜攻發, 不樂成人美, 君亦有此病, 折之. 此於爲賢者諱之道, 則得之, 若謂之即事明理, 以服問者之心, 則未也. 且程子所云"人當於有過中求無過, 不當於無過中求有過". 本爲好求人過者言, 非謂人雖有過, 必當曲護以求其無過也. 其必引此以答道可者, 豈以道可平日有些好求人過之意故歟. 更以好議喜攻․有病之語參之, 可知退翁之意. 不然, 人之功過不能相掩, 是非不可偏重, 自是定理, 烏得槩以精忠大節四字, 一筆句斷, 而禁不得開口乎? 雖曰觀人, 先觀大節, 則其餘不論, 可也. 然若一向如此而已, 則其於學者, 論人賢否得失以資格致之功, 豈不疎乎? 是故, 谿谷張公有言曰"圃隱能以死殉國, 而禑昌之廢戮, 不能有所樹立, 至列於九功臣, 此可疑也." 自文忠從祀文廟, 後學不敢復議其得失, 未知千載尚論, 以爲如何也? 盖亦有見乎此也. 區區嘗於圃隱之事, 平著心明著眼, 反覆商量而得之. 當禑昌之廢, 而不能有所樹立者, 不可謂無過. 然乃其意, 則以爲禑雖廢, 昌是禑之子, 昌雖死, 瑤亦宗室, 先王血孫, 固自爲君也. 力之不足, 既不能有爲於此變, 則且當隱忍遷就, 以立圖存王氏社稷之後功, 庶不害孟子所論社稷爲重於君之義, 而以得孔聖所言愛其死以有待之意焉. 及其并與後功, 而絕望之日, 乃以一死烈烈焉殉國, 而終得爲貞忠大節者也. 未知圃隱之靈, 莞爾以爲爾得我心乎否? 而所謂有過中求無過者, 如吾之說然後, 乃爲無害矣. 高見於此, 以爲如何? 雖然, 論以極等之道․十分之義, 則廢禑之時, 有所樹立然後, 真可爲訓於萬世也. 又以爲如何?汪信民有言, "人能咬得菜根, 則百事可做." 信斯言也, 善咬菜根者, 宜莫如弟, 而年垂六十, 不能做一事者, 何也? 意其咬菜之徒以口而不以心也. 夫其有以心以口之異者, 何也? 才足以致富貴 而思義固竆者, 咬菜以心也. 心慕富貴而才拙食貧者, 咬菜以口也. 若不就此區分, 則滿天下竆民 孰有不做得事者, 亦何足爲貴而爲汪氏所稱哉? 以此自反, 則吾之生平, 又無足恠. 然雖以吾之拙才, 早已隨風逐波, 奔走乎衣食, 何遽不若時輩, 而終不爲? 亦不可全謂咬菜之徒以口者. 而究無一做如前所云者, 竟何也? 可笑也已. 第今所遭之勢, 雖欲不咬菜, 而亦不可得, 則姑不問以心以口咬, 則咬之而後已. 向所託菁根種子, 另念惠寄如何? 쇄락(灑落)하게 관통하는 기상 《논어(論語)》 〈선진(先進)〉의 "늦봄에 봄옷이 다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단(舞雩壇)에서 바람 쐬고 한 곡조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는 증점(曾點)의 말에서 나온 말이다. 배고픈……어렵다 어떤 이가 "올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한데, 어찌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가?"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나도 내가 죽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죽으면 분명 아귀가 될 것이다. 만약 우수에 잠기게 된다면 분명 수귀가 될 것이다. 하나의 귀신이 두 역할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라 했다. 《소암집(疏菴集)》 〈소암선생언행록(疏菴先生言行錄)〉 전체를……미미하다 공손추는 "옛날에 제가 들으니, 자하·자유·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만 가지고 있었고, 염우·민자·안연은 전체를 갖추고 있었지만 미약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선생님께서 자체하시는 바를 묻겠습니다.〔昔者竊聞之, 子夏·子游·子張皆有聖人之一體, 冉牛·閔子·顔淵則具體而微, 敢問所安〕"라 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뜻을……이루어진다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서 "배울 때는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힘써서 항상 민첩하게 하면 그 수양이 이루어지리니, 이를 마음 깊이 새겨 두면 도가 그 몸에 쌓일 것이다.〔惟學 遜志 務時敏 厥修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라고 하였다.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 상(象)에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이 나온다. 합독(合櫝) 부부의 신주를 하나의 독[신주를 담아 두는 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 넣는 의식이다. 퇴계가……행했습니다 퇴계는 "사당의 신주는 두 비에 대해 하나의 감실에 함께 입사하는데, 선비에 대해서는 고위(考位)와 함께 하나의 독에 모시고, 후비는 별도의 독에 모시며 다른 상에 봉안한다. 신주를 꺼내 제사를 지낼 때에 이르면 선비에 대해서는 고위와 함께 하나의 탁자에 모시고 후비에 대해서는 별도의 다른 탁자에 모시되 자리를 나란히 하여 앉힌다.〔祠堂神主, 則兩妣同入一龕, 而先妣共一櫝, 後妣別櫝安別牀. 及出主行祭時, 先妣共一卓, 後妣別一卓, 聯席而坐〕"라 했다. 《퇴계집(退溪集)》 권37 〈답류희범(答柳希范)〉 승중(承重) 상제(喪祭)의 중함을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적장손(嫡長孫)이 부친과 조부를 대신해서 선조의 상제(喪祭)를 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부친 대신 조부모의 상제를 담당할 경우에는 승중손(承重孫)이라 하고, 부친과 조부 대신 증조부모의 상제를 담당할 경우에는 승중증손(承重曾孫)이라고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 예에서……못한다 퇴계는 "예법에 따르면 증손이 증조를 위하여 승중이 되고 조모 혹은 모친이 생존해 계시다면 그의 조모 혹은 모친은 승중복을 착용하고 처는 승중복을 착용하지 못한다고 했다.〔禮, 曾孫爲曾祖承重, 而祖母或母在, 則其祖母或母服重服, 妻不得承重云〕"라 했다. 《퇴계선생문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정도가……어떠합니까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에 보인다. 퇴계의 대답 퇴계는 "이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내가 객이 되어 홀로 고수레를 지내는데 주인이 고수레를 하지 않고, 또는 내가 주인이 되어 홀로 고수레를 지내는데 객이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은 둘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이것이 불가하다면 객이 되어서는 도처에서 주인에게 권하여 함께 고수레를 하고, 주인이 되어서는 매번 빈객이 권유하여 함께 고수레를 하게 되는데, 어찌 세속에서 큰 괴이함을 사지 않겠는가?〔此亦有難通處. 我爲客而獨祭, 主人不祭; 或我爲主而獨祭, 客不祭, 二者無一可者也. 若爲是不可, 爲客而到處勸主人同祭, 爲主而每見客勸同祭, 豈不大取怪於俗耶?〕"라 했다.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포은의……가소롭다 "남명 조선생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를 의심하였는데, 제 생각에도 정포은의 한번 죽음은 자못 웃을 만합니다. 공민왕 조정에서 30년이나 대신 노릇을 하였으니 도로써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도리로 볼 때 이미 부끄러울 만하고,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는데 신씨를 왕씨의 소생이라고 여긴 것이라면 후일 내쫓을 때 자신 또한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왕으로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내쫓아 죽이니, 이것이 가하겠습니까. 만일 우왕(禑王)이 왕씨 소생이 아니라면, 진시황(秦始皇)이 즉위하여 진나라 영씨가 이미 망한 격인데 그 뒤에도 여전히 아무 탈 없이 또 따라서 그 녹을 먹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후일에 왕씨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南冥曹先生嘗以鄭圃隱出處爲疑. 鄙意鄭圃隱一死, 頗可笑. 爲恭愍朝大臣三十年, 於不可則止之道, 已爲可愧. 又事辛禑父子, 謂以辛爲王出歟, 則他日放出, 己亦預焉. 何也? 十年服事, 一朝放殺, 是可乎? 如非王出, 則呂政之立, 嬴氏已亡, 而乃尙無恙. 又從而食其祿, 如是而有後日之死, 深所未曉〕"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퇴계의 대답 정자는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포은의 사심 없는 충정과 큰 절의는 천지의 경위(經緯)이고 우주의 동량(棟梁)이라고 이를 만한데, 세상에 비평하기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 공격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그치지 않는 것을 귀를 막고 듣지 않고자 하였더니, 그대도 이러한 병통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程子曰: "人當於有過中求無過, 不當於無過中求有過." 以圃隱之精忠大節, 可謂經緯天地, 棟梁宇宙, 而世之好議論喜攻發, 不樂成人之美者, 嘵嘵不已. 滉每欲掩耳而不聞, 不意君亦有此病也〕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현자를……숨긴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성공(成公) 9년 조에 "존자를 위해서는 부끄러운 일을 숨기고, 현자를 위해서는 과실을 숨기고, 친자를 위해서는 병을 숨겨 주었다.〔爲尊者諱恥, 爲賢者諱過, 爲親者諱疾〕" 하였다. 계곡……생각된다 《계곡집(谿谷集)》 권2 〈포은과 점필재는 모두 사문에 중한 명성을 지니고 있으나 모두 의아한 점이 있다〔圃隱佔畢齋皆有重名於斯文而皆有大可疑處〕〉에 보인다. 사직이……중요하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것이다.〔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라 했다.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 죽음을……기다린다 공자는 "유자는 거처함에 가지런함과 장엄함이 있습니다. 앉거나 일어남에는 공경스럽고,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신의가 앞서며,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올바름에 맞고, 도로에서는 험하거나 평이한 이로움을 다투지 않으며, 겨울과 여름에는 따뜻하거나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소중히 여겨서 등용되기를 기다림이 있고, 자신을 잘 길러서 앞으로 시행할 것들을 갖춥니다. 유자는 미리 대비함에 이와 같은 점이 있는 자들입니다.〔儒有居處齊難. 其坐起恭敬, 言必先信, 行必中正, 道塗不爭險易之利, 冬夏不爭陰陽之和. 愛其死以有待也, 養其身以有爲也. 其備豫有如此者〕"라 했다. 《예기(禮記)》 〈유행(儒行)〉 사람이……있다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이 "사람이 항상 채소 뿌리만 먹으면서 곤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 하였는데, 호안국(胡安國)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무릎을 치면서 찬탄하였다. 《동래여자미사우잡지(東萊呂紫微師友雜誌)》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극경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吳極卿 己卯 편지에서 가르쳐주신 여러 조목은 정밀하게 생각하여 얻은 실제적 견해로서 게으름피우지 않는 훌륭한 뜻에서 나왔으니, 더욱 절실하게 기쁩니다. 형의 조예가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을 깊이 알게 된 만큼 의심나는 것을 강론하여 학문을 진전시킬 곳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니, 감히 더욱 신중히 생각하여 은혜를 끝까지 받을 바탕으로 만들 것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맹자의 책을 읽어보니 공손추가 "안연은 공자에 대해 전체는 갖추어졌지만 미미하다"81)고 말했는데, 맹자는 그릇되다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고, 공손추가 또 이미 "옛날에 가만히 들었다."라고 말했으니, '전체는 갖추어졌지만 미미하다'는 말이 선철(先哲)로부터 나온 정론이라는 것을 역시 알겠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논해보건대, 이제 퇴계를 주자와 비교할 때 "전체는 갖추었지만 미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은 듯하지만 후학이 감히 가벼이 판단할 바가 아니라고 경계하셨으니, 형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말하는 자가 타당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죄를 알겠습니다. 선배들은 '퇴계(이황)와 우암(송시열)은 모두 주서(朱書)에서 힘을 얻었는데, 퇴계는 학문의 공을 터득하였고, 우암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얻었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명언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인의 일체(一體)만 얻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으로 저의 의론과 비교해보면 또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컨대 다시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퇴옹이 후비(後妣)에 대해 별도로 신주 독을 만들고 별도로 탁자를 만든 일82)은 이미 감히 알 수가 없었고, 보내주신 편지에서 신주를 꺼내 나란히 제사 지내는 것이 재취와 삼취에까지 미치는 것을 더럽고 모독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처(妻)라는 글자는 가지런하다는 뜻인데 초취(初娶)가 이미 남편과 몸을 가지런히 하여 동독동탁(同櫝同卓)했다면, 재취와 삼취는 초취를 이어서 배우자가 되었으니, 어찌 남편과 몸을 가지런히 할 수가 없는 어떤 이유가 있기에 별독별탁(別櫝別卓) 합니까? 아마 혹시라도 남편 한 명과 아내 세 명이 탁자를 함께하여 제수를 먹는 것을 산사람의 일로 보면 부끄러울 수가 있기 때문에 더럽고 모독적이라고 말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비록 초취가 한 사람일지라도 역시 어찌 남녀가 동탁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견해는 상처(喪妻)한 이후에 육례를 갖추어 장가를 드는 경우라면 비록 열 번 장가 들더라도 모두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 승중(承重)을 한 자의 처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살아계시는 경우에 남편의 상복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가례》에는 다만 남편이 승중하면 상복을 따라 입는다고만 하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살아계신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통전(通典)》83)에서 하순(賀循)은 "남편이 조부, 증조부, 고조의 뒤를 이은 후계자라면 그 처는 남편을 따라 상복을 입는다"고 말했습니다. 장자(장재)의 설도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퇴계가 이른바 '예에서 증손이 증조의 승중이 되면 그 조모나 어머니가 생존한 경우 이들은 승중복(承重服)을 입고 처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입니다.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가례증해(家禮增解)》에서 인용한 퇴계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인이 남편의 조부모에 대하여 남편이 승중을 했다면 따라서 상복을 입으니, 이제 증손, 현손이 증조와 고조의 상복을 입으면 그 처는 마땅히 남편을 따라 입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 같은 경우는 아마도 이른바 '시아버지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늙은 것이다'84)라는 것으로, 이미 주부의 일을 며느리에게 맡겼을 것이니, 아마도 상복을 입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기》 〈상복소기〉에서는 '속종(屬從)의 경우는 따라서 입는 그 사람이 죽어도 상복을 입는다'85)고 하고, 공영달의 소(疏)에서는 '속종은 세 경우가 있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남편의 친당(親黨)의 복을 입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으니, 이에 근거한다면 남편이 비록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그 처는 마땅히 상복을 입어야 합니다. 전중(傳重)하여 증복(曾服)과 현복(玄服)에 이르면, 그 이상의 죽었을 때 복을 입지 않는 경우는 복을 입은 것과 똑같습니다."이것은 증손과 현손으로 승중한 자의 처는 마땅히 따라서 상복을 입는다는 것을 주로 말했고, 아울러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도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말했으니, 이전에 퇴옹이 예를 인용하여 정도가에게 답하면서 '따라 입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는 완전히 상반됩니다. 이 설이 전집 몇 권에서 보이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마땅히 이것을 정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취사할 것을 알 수 있다면, 부부가 친히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 굳이 논할 필요는 없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제반(祭飯)86)의 설에 대하여 제가 퇴옹의 뜻과 형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모두 매번 밥 먹을 때마다 고수레를 권하는 것이 괴상한 취급을 받고 억지로 중단하는 것이 비웃음을 산다고 했지만, 한번도 예로 따지면 타당하지 않아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심력(心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비록 괴상히 여기고 비웃더라도 스스로는 괴상하고 비웃을만하다 여기지 않고 행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역시 단지 말을 해야 합니다. 어찌 이런 심력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예는 그 끝을 말해야 하고, 의리는 그 정밀함을 규명해야 하니, 평소에 미리 강론하고 일에 임하여 더욱 권면하는 것은 본래 선비들이 서로에게 보태주는 참된 실체이니 어찌 괴상한 취급을 당하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행하는 것이 미숙하기 때문에 권면하여 이르도록 하는 것은 또한 중등 수준 이하의 사람이 노력하는 상사(常事)이니, 어찌 억지로 한다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제사는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신에게 흠향드림에 있어 예를 갖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밥 먹을 때와는 똑같이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비록 신을 중시하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근본을 깊이 탐구해보면 신도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것일 뿐입니다. 반드시 그를 위해 대신 제사지내는 것은 그 생전에 매번 술과 밥에 고수레를 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를 위해 대신 제사를 지내거늘 하물며 산 사람이 스스로 고수레를 할 수 있음에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또한 관례의 초례와 혼인의 동뢰례 그리고 마을의 음주례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역시 사람이 스스로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두 일찍이 술과 포로 고수레를 하는 절차를 폐하지 않았다면, 유독 평상시 밥 먹을 때에 유추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포은의 출처는 천고의 의심스러운 안건입니다. 당신은 우왕과 창왕이 진실로 폐할만한 흠집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폐하고 쫓아내는 것도 포은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포은의 마음은 또한 이윤과 곽광의 마음87)입니다. 폐할만한 것이 있어서 폐하였는데, 불행한 것은 그와 도모한 자들이 몰래 천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옹의 뜻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천고의 탁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만 같을 수는 없으니, 우왕이 정말로 폐할만한 죄가 있음을 원나라 사신을 맞이한 일을 하나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 말한다면, 그가 즉위한 원년에 이미 그랬던 것이고, 이인구로 하여금 권력을 멋대로 행하여 전녹생(田祿生)과 박상충(朴尙衷)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즉위한지 3년에는 또 사신을 파견하여 원나라에 가게 했으니 포옹의 이윤과 곽광같은 마음이 어찌 이때에 있지 않고 14년에 조선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청한 날에 비로소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까. 우왕이 태조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하게 한 것은 당시에 목자(木子)가 왕이 된다는 참위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영 장군과 도모하여 정벌하러 가는 일을 이용하여 제거하려고 했고 태조도 우왕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군하는 날에 최영장군의 죄목을 나열하고 그를 제거하기를 청했고 마침내 왕을 폐하는 거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포옹이 어찌 태조와 함께 왕을 폐하는 것을 도모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불행한 것은 그와 더불어 도모한 자들이 몰래 천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후세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감히 필연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창왕이 겨우 아홉 살이고 재위에 오른 지 1년 되었는데 어찌 폐할만한 하자가 있어서 그를 폐했겠습니까? 당시 조정 신하들의 의론은 전왕의 부자관계 내력이 불명확하다는 것에 겨우 의존을 했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진실로 폐위되어 쫓겨날 만하다면, 폐위되고 쫓겨난 것 역시 포옹의 마음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에서 구해보면 그런 것이 없지만 그의 자취를 살펴보면 그런 점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평상시에 이 점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생각해봤지만 말이 되지 않으므로 마침내 참으면서 마음을 돌이켜 후공을 도모했다는 설을 모색했는데 고명하신 그대에게 심하게 반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포옹이 성인이 아닌데 도를 밝히고 공을 계산하지 않는 의리에 대하여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은 것이 있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또 단종 때 생육신으로 세조 때에 벼슬을 면하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히 후공을 도모하다가 후에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했습니다. 후현들 중 인물에 대해 잘 논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들을 정충대절로 인정하기를 퇴계가 포옹에게 한 것처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사람을 취하여 그 마음을 논한다면 하자가 없으나 충절에 대하여 의리를 논하고 지극히 타당함을 구한다면 교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했는데, 또 다시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惠教諸條, 得於精思之實見, 而出於不倦之盛意, 尢切欣荷. 深知吾兄造詣逈出尋常. 而自幸講疑進學之有所, 敢不益加慎思, 以請作受卒惠之地也? 嘗讀孟子之書, 有公孫丑謂顏淵之於孔子, 具體而微, 而非惟孟子不以爲非, 丑又既云昔者竊聞之, 則出自先哲定論, 亦可知矣. 以是論之, 今謂退溪之於朱子"具體而微者", 恐無不可, 而見戒以非後學之所敢輕斷, 未詳尊意攸在. 抑謂言則非曰不可, 但以言之者, 非其人故耶? 然則知罪矣. 前輩有言'退溪尢庵俱得力於朱書, 而退溪得學問之功, 尢庵得尊攘之義.' 人皆以爲名言. 此則不爲只得一體之說乎? 以之視鄙論, 又以爲如何? 願有以再教之也.退翁之於後妣別櫝別卓者, 既不敢曉. 來示以出主并祭, 及於再三娶爲凟亂者, 亦所未喻. 妻之爲言齊也, 初娶既以與夫齊體, 而同櫝同卓, 則再三娶是繼初娶而爲配者也, 有何不得與夫齊體之故, 而別櫝別卓耶? 豈或以一夫三妻同卓而食, 觀以生人事, 則爲可羞, 故謂凟亂耶? 若然則雖初妻一人, 亦豈不爲男女同卓之可羞乎? 故淺見以爲喪妻後, 具六禮而聘者, 則雖十娶, 皆當無差別, 未知如何? 承重者之妻, 其姑若祖姑在者, 從夫服當否? 家禮但言夫承重則從服, 而不言其姑若祖姑在則否. 通典賀循曰"其夫爲祖曾高祖後者, 其妻從服." 張子說亦同然. 則退溪所謂'禮, 曾孫承重 其祖母或母在而服重服, 妻不得承重者', 未知出自何書, 故有所疑也.雖然, 今見《家禮增解》所引退溪說, 有曰"婦人之於夫之祖父母, 夫承重, 則從而服之." 今曾玄孫之服曾高祖也, 其妻當從服矣. 若其母, 恐所謂舅沒則姑老, 已付主婦之事於婦矣, 疑若不當服. 然〈喪服小記〉, '屬從者, 所從雖没也, 服.' 疏曰屬'從三, 妻從夫, 服夫之黨, 一也.' 據此則其夫雖已死, 其妻亦當服矣. 盖傳重而至曾玄之服, 其已上死不服者, 與服同也." 此則主言曾玄孫承重者之妻, 當從服, 并言其姑若祖姑, 亦服三年也, 與向所引禮以答鄭道可而謂不從服者, 正相反矣. 未知此說見於全集何卷, 而恐當爲定論. 此可以知所取舍矣, 則夫婦親祭, 自在其中, 而不必論也, 何幸何幸?祭飯之說, 竊詳退翁之意․尊兄之見, 皆只以每食勸祭之取恠, 強作間斷之取笑, 未嘗以爲禮所未當, 而謂不可行也. 然則心力出人, 人雖恠笑, 不自以為恠笑, 而行之不已, 則可矣. 不必多說, 然如弟者, 亦只是說耳. 何能辧得這般心力? 夫禮言其極, 義究其精, 平日之預講, 臨事之更勸, 自是士子相益之實諦, 何至於取恠? 行之未熟, 勉而及之, 亦爲中人以下之常事, 何嫌於強作也? 祭祀不可廢, 享神欲以備禮, 不可與自食同之喻, 雖仰悉重神輕人之意, 若深究其本, 則神亦生人之死者耳. 必爲之代祭者, 以其生前之每祭酒食也. 死者猶爲代祭, 况生者之能自祭乎? 且也冠之醮禮, 婚之同牢禮, 鄉之飲酒禮, 此非事神, 而亦人之自食也. 皆未嘗廢祭酒祭脯之節, 則獨不可以反隅於平常食時乎?圃隱出處, 千古疑案. 而尊喻禑昌固有可廢之釁, 廢之逐之, 亦圃翁之心也. 圃翁之心, 亦伊霍之心也. 因其可廢而廢之, 不幸與之謀者, 陰受天命. 故圃翁之志, 未明於後世者, 亦可謂千古獨見. 然終有不能如痒得爬者, 謂禑誠有可廢之罪, 而以迎元使證其爲一端也, 則於其卽位元年已然, 而使李仁矩專權殺田祿生朴尙衷, 三年又遣使如元, 圃翁伊霍之心, 胡不在此時, 乃於十四年, 韓太祖自威化回軍, 請王避位之日, 始有此心耶? 盖禑之使太祖伐遼東, 以時有木子爲王之讖. 故謀諸崔瑩, 欲因事除之, 太祖亦知禑意. 故回軍之日, 數崔瑩之罪, 請去之, 而竟有廢王之舉. 當是時也, 圃翁豈有與太祖同謀廢王之理乎? 然則不幸與之謀者, 陰受天命. 故志未明於後世者, 未敢信其必然也. 且也昌才九歲在位一年者, 有何可廢之釁而并廢之耶? 當時廷臣議者, 亦不過託以前王父子來歷不明. 然則禑昌固可廢逐, 廢逐亦圃翁心者, 固可謂信然乎? 求其心則無之, 觀其跡則有之. 尋常於此, 反覆思之, 求說不得, 故有隱忍遷就, 以圖後功之說, 而深見誅於高明. 然圃翁要亦非聖人, 則於明道不計功之義, 安知不容有一毫不盡. 且莊陵之六臣, 不免仕於光陵者, 明是圖後功, 而及其捐生取義之後. 後賢尙諭者, 孰不以精忠大節許之, 如退溪之於圃隱乎? 吾故敢曰"就人而論其心, 則無間, 然於忠節講義而求至當, 則不可以爲訓," 未知高見, 復以爲如何. 안연은……미미하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옛적에 제가 들으니 '자하, 자유, 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었고 염우, 민자, 안연은 전체를 갖추고 있었으나 미약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누구를 자처하십니까?〔昔者竊聞之 子夏子游子張 皆有聖人之一體 冉牛閔子顔淵 則具體而微 敢問所安〕"라고 하였다. 퇴옹이……일 《퇴계집(退溪集)》 권37 〈유희범에게 답함〔答柳希范〕〉에 "사당의 신주는 두 비(妣)를 하나의 감실에 모시지만, 선비(先妣)는 하나의 독(櫝)에 함께 모시고 후비(後妣)는 독을 따로 하여 별도의 상에 안치한다.(祠堂神主.則兩妣同入一龕.而先妣共一櫝.後妣別櫝.安別牀)"라고 하였다. 《통전(通典)》 당의 두우(杜佑 : 735~812)가 편찬한 도서명이다. 《통전(通典)》에는 당우(唐虞)에서부터 아래로는 당의 숙종ㆍ대종 때까지의 전장제도가 기록되어 있다. 시아버지가……것이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시어머니는 늙은 것이다. 〔舅没則姑老〕" 하고, 그 주석에 "이는 집안일을 맏며느리에게 전하는 것을 말한다. 〔謂傳家事於長婦也]〕" 하였다. 속종(屬從)의……입는다 《예기(禮器)》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종복의 경우에는 소종이 죽으면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속종의 경우에는 소종이 죽어도 상복을 입는다.〔從服者, 所從亡則已; 屬從者, 所從雖沒也 服〕" 하였다. 종복(從服)은 따라서 입는다는 뜻으로, 인친(姻親)이나 임금의 친속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하는데, 정현(鄭玄)은《예기》〈대전(大傳)〉의 주(註)에서 "종복은 예컨대 남편이 아내의 부모를 위하거나, 아내가 남편의 친당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從服, 若夫爲妻之父母, 妻爲夫之黨服〕" 해설하였다. '소종(所從)'은 종복을 하는 사람이 '따라서 입는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내에게는 남편이 소종이 된다. '속종(屬從)'은 종복이면서 친속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공영달(孔穎達)은 소(疏)에서 "자식이 모친을 따라 모친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남편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 남편이 아내를 따라 아내의 친당의 복을 입는 것이다.〔一是子從母服母之黨, 二是妻從夫服夫之黨, 三是夫從妻服妻之黨〕" 하였다. 제반(祭飯) 끼니마다 밥 먹기 전에 밥을 조금 떠내어 곡신(穀神)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고수레로, '제반(除飯)'이라고도 한다. 이윤과 곽광의 마음 이윤은 탕왕(湯王)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난세를 평정한 뒤에 선정을 베푼 상(商)나라의 명재상이다. 뒤에 탕왕의 적장손인 태갑(太甲)이 포학하게 굴자 동궁(桐宮)으로 축출했다가 그가 개과천선하자 3년 뒤에 다시 영입하여 복위시켰다. 곽광은 한나라 소제(昭帝)가 죽은 뒤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대장군(大將軍)으로서 무제(武帝)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맞이해 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는데, 유하는 몹시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제멋대로 하면서 간하여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곽광은 창읍왕을 즉위시킨 지 27일 만에 폐위하고서 다시 무제의 증손인 유순(劉詢)을 맞이해 와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선제(宣帝)이다. 《한서(漢書)》 권68 〈곽광전(霍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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