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재 전공 묘갈명 병서 을유년(1945) 鍊心齋田公墓碣銘【幷序乙酉】 옛날 고려 말에 담주(潭州 담양(潭陽)) 전씨(田氏)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과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두 선생이 나와 세상에 크게 이름을 드러내었다. 500년이 지나 한말(韓末)에 이르러 야은의 후손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 있으니 덕이 높고 학문이 발라 대종장(大宗匠)이 되었고, 경은의 후손에 연심재 거사(居士)가 있으니 순수한 덕과 실지의 학문으로 간재의 문하에서 칭송을 받았다. 동종(同宗)의 사제(師弟)가 비록 지위와 덕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선조의 공렬을 빛내었으니, 아, 이는 칭송을 받을 만하다. 어느 날 연심재의 윤자(胤子) 전안곤(田安坤)이 아버지를 위해 신헌(愼軒) 이공(李公 이기환(李起煥))이 지은 가장을 얻어 나에게 묘갈명을 짓게 하니 정의(情誼)상 사양하지 못하였다.공의 휘는 희순(熙舜)이고, 자는 사준(士濬)이다. 윗대에 대대로 공경(公卿)이 있었다. 경은의 7세손인 직장(直長) 귀(龜)가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처음으로 김제(金堤)의 죽산(竹山)으로 이사하여 거처하였다. 아들인 장사랑(將仕郞) 경란(慶蘭)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였다. 4세를 지나 가선대부(嘉善大夫) 화규(和圭)가 부안(扶安)의 후산(后山)으로 이사하였는데, 공에게는 6세조이다.증조부 상직(相稷)은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다. 조부 복수(福秀)는 간옹(艮翁)이 찬(贊)을 지어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부친 제풍(濟豊) 역시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모친은 부안 김씨로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손인 용학(龍學)의 따님으로, 간옹이 여사(女士)라고 칭송하였다.공은 고종 정묘년(1867, 고종4) 2월 14일에 태어났다. 7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슬퍼하였다.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는데, 무자년(1888) 흉년 때 호중(湖中)에서 쌀을 지고 수천 리 길을 지나 돌아왔으나 어머니가 작고한 지 이미 10여 일이 지났으니 곡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였다.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어 집안일을 담당했기에 학업에 전념하지는 못하였으나 총명함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문리(文理)가 일찍 성취되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300리 길을 지나 폐백을 가지고 선생을 배알하니 선생이 매우 아껴 호를 내려 주고 명(銘)을 지어 권면하였다. 공은 사문(師門)에 귀의한 때부터 오로지 실지에 힘을 쏟았다.투장(偸葬)을 당해 산지(山地)를 빼앗긴 선묘(先墓)가 있었는데 누차 영읍(營邑)에 호소하여 마침내 투장한 무덤을 파고 산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담양에 있는 선조의 유허(遺墟)는 종중(宗中)의 위임을 받아 비석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어 3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부모의 신주(神主)를 추후에 만들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족친(族親)에게 가규(家規)를 세워 은의(恩誼)를 돈독히 하였으며, 부부가 공경히 대하기를 손님처럼 하여 출입할 적에 반드시 서로 절하였다. 공의 학문은 먼저 이륜(彛倫)을 독실히 행하는 것이었으니 대체로 이와 같았다.고금의 서적은 한번 보면 곧바로 기억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았고, 복서(卜筮), 성명(星命), 풍수(風水)에 대한 학문도 모두 능통하였으니 진실로 박식하였으나 교만하거나 뽐내는 뜻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과 논변할 때는 자기가 이기기를 구하지 않았다.평소에는 말을 빨리하거나 다급한 안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니 비록 자기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분노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우(親友)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규계(規戒)하면서도 환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기꺼이 따랐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좋은 인상으로 대하여 정성스럽게 일러 주었기 때문에 열복(悅服)하였다.대개 공은 덕성이 순박하고 심기(心氣)가 화평하여 온화한 봄날 같은 기상이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자는 심취하고 말을 듣는 자는 분노가 풀려 공을 버리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을 미워하는 것은 엄하여 세력에 의지하여 남을 배척하는 자는 원수처럼 보고 상도(常道)를 범하고 사학(邪學)에 물든 자는 관계를 멀리하고 끊어 용서하지 않았으니 거의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和而不流]9)"라는 말에 해당하는 분이다.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이해(利害)나 칭찬과 비난에 상관없이 힘을 다해 마쳤고 의가 있는 곳에는 비록 칼날과 화살촉이 앞에 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으니 또한 의연히 지조가 있다고 할 만하다. 병으로 임종할 적에는 정신과 기운이 평상시와 같아서 직접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서거하였으니 계미년(1943) 3월 23일이고, 선영 아랫자리에 장사지냈다.부인은 장성 서씨(長城徐氏)로 절효공(節孝公) 능(陵)의 후손인 상철(相哲)의 따님이다.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남편이 없었는데도 장사를 치르는 데 빠뜨리는 것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삼남은 안곤, 정곤(正坤), 성곤(成坤)이고, 삼녀는 진주(晉州) 강교수(姜曒秀), 강릉(江陵) 유재룡(劉載龍), 부안 김형태(金炯泰)에게 시집갔다. 손자 동배(東培), 갑배(甲培)는 전안곤의 소생이고, 춘배(春培), 신배(信培), 문배(文培)는 전정곤의 소생이고, 인배(仁培), 석배(錫培)는 전성곤의 소생이며, 외손 대길(大吉), 대언(大彦), 대선(大善), 대견(大堅), 대영(大永)은 강교수의 소생이고, 원종(元鍾), 해종(海鍾)은 유재룡의 소생이고, 백중(百重), 노중(魯重)은 김형태의 소생이다.아, 말세라 거짓이 늘어나는데 유문(儒門)이 더욱 심해 점점 세교(世敎)가 쇠락하고 도술이 망해가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직 공은 덕을 존숭하고 문사(文詞)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실지를 힘쓰고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 말과 행실이 서로 똑같고 마음과 일이 일치하여 조금도 겉치레를 하는 태도를 볼 수 없었다. 만약 온 나라의 인사들이 공처럼 한다면 세상과 도는 아마 거의 회복될 것이다.공이 일찍이 나에게 "근래에 아무개가 글을 지어 책을 만든 것을 보니 손수 편집하고 정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어지럽게 하고 머리를 흔들게10)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비웃은 것이다. 내가 공을 정성으로 곡할 때 공의 유고(遺稿)가 있는지 물었는데 한 편도 남은 것이 없었으니 또한 문사의 폐단을 깊이 미워한 비범하고 독특한 견해였다. 그러나 공의 시문이 또한 본래 아름답고 좋은데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지난번에 내가 스승의 무고를 변론한 일 때문에 저쪽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는데11) 사람들은 모두 나를 나병(癩病)에 걸린 사람처럼 보고 피했으나 공만이 홀로 취하여 두 집안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우호를 맺게 되었다.12) 이로 인하여 강유(剛柔), 완급(緩急), 과불급(過不及)의 사이에서 규계하고 권면하여 처의(處義)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기약하여 피차간에 보탬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공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학문의 길을 몰라 차질이 많으면 누가 나에게 길을 지시해 주겠는가. 옛날과 지금을 생각해 보건대 그리움을 이길 수 없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예절로 화합하여 和以禮節표리가 일치하였네 表與裡一사람들은 어찌하여 거짓을 행하는가 人胡售僞공은 몸소 실천하였네 公則蹈實임종할 적에 바름을 얻었으니 臨終得正분명한 징험이 해처럼 밝도다 明驗如日내 말은 과장이 아니니 我辭匪溢백세 뒤에도 증명할 수 있으리 百世可質 昔夫有麗之季, 潭州田氏野隱、耕隱二先生出, 大顯名于世。閱五百年, 逮我韓末, 野隱之後, 有艮齋先生, 德尊學正, 爲大宗師; 耕隱之後, 有鍊心齋居士, 以淳德實學, 稱於艮門。同宗師生, 雖位德有殊, 而俱光祖烈。於虖! 是可以有辭矣。日, 鍊心胤子安坤, 爲其考得愼軒李公狀, 俾余銘其墓, 誼不可辭。公諱熙舜, 字士濬。上世世有公卿。耕隱七世孫直長龜, 自京畿龍仁始居金堤之竹山。子將仕郞慶蘭, 殉龍蛇亂。歷四世, 嘉善和圭, 移扶安后山, 於公六世。曾祖相稷, 有孝友行。祖福秀, 艮翁作贊稱賢。考濟豊, 亦有至行。妣扶安金氏, 文貞公坵后龍學女, 艮翁贊以女士。公以高宗丁卯二月十四日生。七歲丁外艱, 哀若成人。事母盡誠, 戊子大無, 負米湖中, 累百里而還, 則母氏下世, 已十餘日, 其哭擗慟慽之狀, 人不忍見。早孤當室, 未專課業, 然聰明過人, 文理夙就。有志爲己之學, 越十舍, 贄謁先生, 先生甚愛之, 錫號爲銘而勖之。公自歸師門, 專用力於實地。先墓遭偸塜而見奪山地者, 累訴邑營, 竟得掘冡而復地。先祖遺墟在潭陽者, 受宗中委任, 立碑建閣, 三年而完。追造考妣神主而行正祭。設規於族親, 用敦恩誼, 夫妻敬待如賓, 出入必相拜。公之學先從彝倫上篤行, 類如此。古今書籍, 一覽輒記, 久不遺忘, 卜筮、星命、風水之學, 亦無不能, 實博識也, 而絶無驕矜意。與人論辨, 不求己勝。平居無疾言遽色, 雖遭忤意人, 不發忿言。親友有過, 必規戒而不失歡, 故樂從之; 敎諸生, 接以好顔而諄諄, 故悅服焉。蓋公德性渾厚, 心氣和平, 有藹然陽春之像, 故覿容者心醉, 聽言者慍解, 不欲捨之而去。然疾惡則嚴, 憑勢擠人者, 視若仇敵; 犯常染邪者, 疏絶不貸, 庶所謂"和而不流"者。事之當爲, 不關利害稱譏, 而殫力成之; 義之所在, 雖鋒鏑在前, 不少畏㤼, 亦可謂毅然有守也。病將終, 神氣如常, 親自沐浴, 易衣而逝, 癸未三月二十三日也, 葬于先塋下坐。配長城徐氏, 節孝公稜后相哲女。事姑孝, 姑沒之日, 夫不在, 而送終無闕, 鄕里敬服。三男安坤、正坤、成坤, 三女晉州姜曒秀、江陵劉載龍、扶安金炯泰。孫東培、甲培, 安出; 春培、信培、文培, 正出; 仁培、錫培, 成出; 外孫大吉、大彦、大善、大堅、大永, 姜出; 元鍾、海鍾, 劉出; 百重、魯重, 金出。嗚呼! 末劫滋僞, 而儒門尤甚, 馴致世敎衰而道術亡, 寧不寒心? 惟公則尊德而不尙文, 務實而不近名, 言行相顧, 心事一致, 未見一毫外飾態。如使擧國人士皆如公爲, 世與道其庶幾乎!公嘗語余曰: "比見某人著書成秩, 手自編理, 令人意亂騷首。" 蓋笑之也。及余哭公象生, 問其遺稿, 則無一篇存者, 亦深憎文弊之超世獨見也。然公之詩文, 亦自佳好而不傳, 可惜也已。曩, 余以辨師誣被一邊人汙衊也, 衆皆視爲癩癘而避之, 公獨取之, 成秦晉之好。因與互相規勸於剛柔緩急過與不及之間, 期盡處義之方, 而不無彼此之益, 今公遽九原矣, 冥行多躓, 孰指我途? 俯仰今昔, 不勝感思, 而爲之銘。銘曰: 和以禮節, 表與裡一。人胡售僞? 公則蹈實。臨終得正, 明驗如日。我辭匪溢, 百世可質。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보이는 말이다. 흔들게:원문은 '騷'이다. 문맥에 근거할 때 '搔'의 착오로 보이는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하였다. 스승의……당하였는데:스승의 무고를 변론한 일은 전우(田愚)가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김택술의 동문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유언을 무시하고 오히려 전우가 생전에 문집을 간행하려는 의향이 있었다고 하면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하자 이를 성토한 일을 말한다. 모욕을 당한 일은 오진영이 자신을 성토한 사람들을 검사국(檢事局)에 고소한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 《後滄集 徧告同門僉公, 敬告同門諸公, 輪告同門同志》 집안이……되었다:두 집안 이 혼인으로 맺어졌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의 진(秦)나라와 진(晉)나라 왕실이 대대로 인척관계였던 데서 유래하였다. 본문 위쪽에 보이는 전희순의 셋째 사위인 부안 김형태가 김택술의 아들이므로 전희순과 김택술은 사돈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