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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칠 기석에게 답함 무인년(1933) 答姜齊七 璣錫 戊寅 중양일(重陽日)에 보낸 편지를 받고 "예전의 질병이 나은 후에 얼굴에 종기가 생겼고, 종기가 그치자 다시 설사의 괴로움이 심하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금년 신운이 곤액하십니다. 비록 그렇지만 질병이 닥치는 것은 성현도 면치 못한 바였으니 하물며 뭇사람들이겠습니까? 끝내 우려할 것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다행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그것으로 위로하고 굳이 뒤늦게 문제 삼을 일은 없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현재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그대로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신 "부모는 오직 질병만을 근심하신다."95)라는 훈계를 마땅히 두렵게 생각하여 음식, 희로애락, 과로 등 모든 질병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을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질병이 나로 말미암아 생겨나 어버이께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오로지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배우는 자는 마땅히 질병이 오면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하늘이 나에게 병을 가한 것은 내 평상시의 처신에 착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깊이 후회하고 질책하여 타일 수신(修身)의 자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로 안팎을 번갈아 닦아 나아가야지 성현 또한 질병을 면치 못한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누그려 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무엇을 하던지 공부처가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섭생하여 쇠약한 몸을 좋아지게 단련하는 여가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는지 모르겠군요. 奉重陽日書, 知昔疾療後, 有面腫, 腫已又苦於痢甚矣.高明今年身運之厄也.雖然疾病之來, 聖賢所不免, 况衆人乎? 終而無慮, 則斯已幸矣.當者與傍觀, 只當以此慰之, 不必追提.但有一焉, 現在侍下者, 當惕念孔子父母唯憂之訓, 其於居處飮食喜怒逸勞, 凡可以致疾者, 一倍戒愼.勿使疾自我作以貽親憂者, 是所可勉.又進而言之, 則學者當於疾病時, 恐懼省念曰, 天之加我以病者, 是治我平日行已未善之罪也, 深自悔訟以爲他日改修之姿.不可少有慍怒慝尤之心者, 尤所當勉.以此二者, 內外交修, 不宜槩以聖賢亦不免疾病之語自寬, 則是乃撫適而非下工處也.未知調將之暇, 亦嘗念及於此否. 부모는……하신다. "맹무백(孟武伯)이 효(孝)를 물으니, 공자께서 '[父母唯其疾之憂]'라고 대답하였다." 《논어》〈위정(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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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최씨 전 병자년(1936) 孺人崔氏傳【丙子】 유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부안 김상락(金相樂)의 아내이다. 30살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 딸 한 명씩을 두었는데 살림이 곤궁하여 살아가기 힘들었다. 비록 남편의 두 형이 몸소 구휼하여 주고 또한 개가할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유인은 정조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다. 아들이 학질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약을 마련할 방도가 없자 울면서 "이 아들이 죽으면 우리 남편은 영원히 죽게 된다."라 하고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흘려 넣으며 국에 타서 마시게 하니 이윽고 조금씩 소생하였다.온갖 고생을 다 형용할 수 없으니, 부귀한 집에서 자라나 평소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림을 타인은 감당하기 어려운데 유인은 다만 줄곧 참고 견디었다. 딸이 장성하여 시집가게 되자 사위를 따라 김제(金堤) 야촌(野村)에 거주하면서 자못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위가 또다시 곤궁하게 되자 아들을 이끌고 고부(古阜) 현암리(玄巖里)로 이사하였다.아들이 장성하여 아내를 두었으나 곤궁함은 이전과 같아서 만년에 창동(滄東)의 옛 집으로 돌아왔으나 또한 편안한 날이 없어서 의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여 늙도록 쉬지 못하였다. 갑술년(1934년) 10월 21일 길을 가다다 타지에서 죽으니 관가에서 묻어주었는데, 한 달이 지나서야 아들과 조카가 비로소 알게 되어 선영의 곁에 반장(反葬)하였다.오호라! 천도는 선한 이를 복 주고 악한 이에게 재앙을 주니 유인은 만 번 죽어도 다행함이 없을 상황에 처하여 한 조각 빙설 같은 절개를 잡았으니, 정자의 '주려 죽은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184)는 뜻을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정절과 그 선행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인데 평생 고생스럽게 살아 옷을 너덜너덜 기워 입고 배가 푹 꺼져 도로에서 넘어져 죽게 됨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재앙을 내림이 어찌하여 이처럼 가혹한가. 삼가 고인의 말에 의혹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유인에게는 남편의 재종질이 되는데 맨 손으로 사는 처치라 살아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죽어도 아무 쓸모없이 슬퍼하니 또한 부끄러울 따름이다. 孺人全州崔氏, 扶安金相樂妻, 年三十夫亡, 有一子一女, 窮無以生, 雖有夫之二兄, 躬不恤未及, 且有不妨改適意, 孺人矢心守貞, 傭針線僅活.子病長瘧幾危, 無以爲藥, 泣曰: "此子亡, 吾夫永死矣." 裂指出血, 和羹飮之, 因漸甦復.凡百辛酸, 不可俱狀.生長富豪, 素善衣食, 而猝困飢寒, 人所不堪, 只得一直忍耐已.而女長嫁人, 從婿居金堤野村, 頗得安過, 壻又窮敗, 則挈子移居古阜玄巖里.子壯有室, 然困復如前, 晩年還于滄東舊居, 亦無有寧日, 奔走衣食, 老不休息.甲戌十月二十一日, 旅死路中, 自官瘞之, 越一月子姪始知, 而返葬先塋之側.嗚呼, 天道福善禍滛, 孺人處萬死無幸之地, 執一片氷雪之節, 其非與聞於程先生'餓死極小失節極大'之義者乎.其貞其善也, 莫斯爲大, 而一生困苦, 鶉結枵腹, 以至顚死道路, 天之降禍, 又何若是酷哉.竊不能無惑於古人之言也.余於孺人爲夫之再從姪也, 而赤手爲生, 生不能少爲之地, 死爲此無益之悲, 亦可愧也已. 주려……크다 《소학》 〈가언(嘉言)〉에서 어떤 사람이 정자(程子)에게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면 재가해도 되느냐고 묻자 정자가 대답하기를 "다만 후대에 추위에 떨며 굶주려 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 굶주려 죽는 것은 대단히 하찮은 일이요, 절개를 잃은 것은 대단히 크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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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호 찬흥에게 답함 정묘년(1927) 答趙正豪 燦興 丁卯 맹자는 "사람의 즐거움에 어진 부형이 계시는 것이다."라고 했고, 여형공(呂滎公)은71) "집안에 어진 부형이 없으니 성취한자가 드물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정호의 아버지는 몸소 농사를 지으며 그대를 놓아 유학케 해주니 그 어진 아버지 됨이 누가 그보다 더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옛날의 호걸이 반드시 다 어진 아버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중궁(仲弓)의 경우 지극히 천악(賤惡)한 아버지였음에도 오히려 십철(十哲)의 으뜸으로 손꼽혔으니,72) 다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 때문에 말합니다. '어진 아버지가 없이 자신의 몸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할 말이 있겠지만, 어진 아버지가 계신데도 그 몸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죄가 막심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을까요? 반드시 도를 밝히고 덕을 세워서 부모가 남기신 몸을 착하게 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한 연후에 내 일을 마쳤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호는 의당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孟子曰人樂有賢父兄, 呂滎公曰內無賢父兄, 而有成者少矣.今正豪之嚴君, 躬幹稼穡, 而縱正豪遊學, 其爲賢父, 孰加於此? 雖然古之豪傑, 未必皆有賢父.如仲弓則至有賤惡之父, 而尙得爲十哲之首科, 其他更何論? 余故曰無賢父而不成其身者, 尙可說, 有賢父而不成其身者, 其罪莫甚焉, 然則如之何其可也? 必也明道立德, 用淑遺體, 揚名後世以顯父母, 然後吾事已了.正豪乎宜深思而盡心焉.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로 그의 부모가 모든 일은 반드시 예법을 따르도록 엄격하게 가르쳤다. 중궁(仲弓)……꼽혔으니 공자가 문하의 제자들을 두고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고, 언어에는 재아, 자공이고, 정사에는 염유, 계로이고, 문학에는 자유, 자하이다.[德行, 顔淵ㆍ閔子騫ㆍ冉伯牛ㆍ仲弓, 言語, 宰我ㆍ子貢, 政事, 冉有ㆍ季路, 文學, 子游ㆍ子夏.]"라고 했는데, 이를 공문사과(孔門四科)라 하고, 열거한 열 명의 제자를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논어》 〈선진(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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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에게 보냄 병인년(1926) 寄炯泰 丙寅 이번 국상(國喪)136)의 애통함은 앞 시대의 큰 근심에 비할 게 아니다. 이 황제 이후 더 이상 우리의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국상이 나면 선비와 서민의 처와 아들까지 또한 모두 상복을 입는 것이 국법이다. 게다가 지금은 나라가 이미 망하고 임금도 없어져 이천만 동포가 너무나 애통하고 망극하여, 눈물을 비처럼 흘리고 우레처럼 울부짖으며 남녀학교의 어린 학생들과 노예ㆍ백정ㆍ배우ㆍ기생에 이르기까지 하루아침에 흰옷을 입지 않은 이가 없음에랴! 너는 비록 관례는 안했지만 성동(成童 15세)은 이미 지났으니 시시덕거리거나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또 연한 검정색 댕기137)를 써서 슬픔을 표현하도록 하여라. 너의 모친은 순수한 흰 명주를 사용하고 네 형수와 누이는 비록 흰 것을 쓸 수 없다면 연한 옥색은 반드시 해야 한다. 今番國恤之痛, 非比前世大慽.以此帝後, 更無吾君故也.凡有國哀, 士庶之妻與子, 亦皆有服 國典也.況今國旣破君又亡, 二千萬衆, 至痛罔極, 揮淚成雨, 號哭如雷, 至於男女學校幼年生徒 皁隷屠賤, 倡優淫妓, 莫不一朝縞素者乎! 汝雖未冠, 成童已過, 不宜嬉笑恣放.又用淺黑唐岐 以表哀情.汝慈則純用縞素, 汝嫂汝妹, 雖不能用素, 淺玉色, 則決不可已也. 이번 국상(國喪) 순종황제의 국상을 말한다. 1926년 음 3월 14일(양 4월 25일) 오전 6시 15분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댕기 원문 '당기(唐岐)'는 댕기를 뜻하는 말로 보인다. 댕기는 한자어로 '당지(唐只)'이나 '당기(唐岐)'는 머리를 땋을 때의 '갈래[岐]'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 댕기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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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관에게 보냄 계유년(1933) 寄炯觀 癸酉 단봉(丹鳳)145)은 비록 굶주려도 결국 모든 새들의 으뜸이다. 아름다운 옥이 팔리지 않는다고 어찌 세상에 드문 보배가 손상되겠느냐. 선비가 출중히 뛰어나 도덕을 마음에 품고서 의롭지 못한 부귀를 더럽게 보는 것이 이와 흡사하다. 매양 늘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맑아져 한 점 티끌이 없다. 선비가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이로써 뜻을 삼은 뒤에야 거의 더럽고 낮은 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너도 함께 알아 두어라. 丹鳳雖飢, 竟爲百鳥之長.美玉不售, 何害稀世之珍? 士之出類拔萃, 懷藏道德, 汚視不義之富貴者, 似之.每一想此, 不覺胸次淸淨, 無一點塵也.士居濁世, 以此爲志, 然後, 庶不歸汚下之地, 爾共識之. 단봉(丹鳳) 목과 날개가 붉은 봉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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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에서의 목욕 浴楚江 백 자 되는 초강은 맑고도 또 깊어 百尺楚江淸且深숨어 지내는 사람은 속된 마음 씻어 기쁘네 幽人端喜滌塵襟남쪽 나라에서 관등절219)에 다시 만나 重逢南國觀燈節녹음 우거진 명정에서 몇 번이나 자리했던가 幾處名亭綠樹陰활발한 천기에 물고기 뛰노는 걸 보고 活潑天機看魚躍청량한 한낮의 꿈에 갈매기 마음 이해하네 淸凉一夢見鷗心바라건대 그대여 어부의 길에 들지 마소 請君莫作漁郞路어찌 무릉도원 함께 찾아가기 쉽게 두었으랴 怎遣桃源易與尋 百尺楚江淸且深,幽人端喜滌塵襟.重逢南國觀燈節,幾處名亭綠樹陰.活潑天機看魚躍,淸凉一夢見鷗心.請君莫作漁郞路,怎遣桃源易與尋. 관등절 불교에서 석가의 탄일(誕日)인 음력 4월 8일에 온갖 등을 켜서 기념하는 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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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집》을 읽고 讀尤菴集 빼어난 기상이 삼백 년간에 모여들어 英氣鍾三百歲間우뚝 북두성과 높은 산처럼 되었지 巍然北斗又高山퇴계 문하에 단비 내려 청출어람 하셨으나220) 溪門時雨靑藍出귤도에서 바람과 서리로 흰머리 생기셨지221) 橘島風霜白髮斑민낙을 평상시 자나깨나 생각하셨고222) 閩洛平生寤且寐춘추의리 유업으로 기록하고 정리하셨네 春秋遺業筆兼刪어찌하면 구천에서 선생께서 일어나셔서 九原安得先生起음사한 무리 말끔히 씻어내어 양이 회복될까 掃盡陰邪陽復還 英氣鍾三百歲間,巍然北斗又高山.溪門時雨靑藍出,橘島風霜白髮斑.閩洛平生寤且寐,春秋遺業筆兼刪.九原安得先生起,掃盡陰邪陽復還. 퇴계……하셨으나 퇴계의 학문을 이어 더 나아갔음을 칭송한 말이다. 원문 '계문(溪門)'은 퇴계의 문도를 말한다. 귤도에서……생기셨지 원문 '귤도'는 제주도를 말하는데, 우암이 1689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갖은 고생을 한 것을 이른다. 민낙을……생각하셨고 성리학에 힘썼음을 의미한다. 원문 '민낙(閩洛)'은 이락관민(伊洛關閩)으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관중(關中)과 민중(閩中)이다. 이수에는 명도(明道) 정호(程顥), 낙수에는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강학하였고 관중에는 횡거(橫渠) 장재(張載), 민중에는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강학하였다. 여기서는 정주학(程朱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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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박진호에게 답함 을해년(1935) 答朴甥珍浩 乙亥 보내온 편지에서 "검과 창을 지닌 자는 호랑이가 오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총포를 안고 있는 자는 도적이 오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며, 금옥(金玉)을 쌓아놓은 자는 흉년을 근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절(氣節, 기개와 절개)을 지닌 자가 유독 세상의 환란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는데, 이는 진실로 정확한 논변입니다. 우리 온재(韞哉)104)의 최근 소견이 이와 같이 매우 고명한데 이르렀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무릇 검포금옥(劒砲金玉)은 모름지기 스스로 구하여 모으고 스스로 지니고 쌓아서 타인이 대신 구하고 대신 지닐 이치가 없는 것인데, 기절만 유독 스스로 양성하여 스스로 지니지 않고 타인에게 의지하여 구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늙고 졸렬한 나에게 의지하여 가르침을 베풀어주길 기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하면서 "의(義)를 모아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했고, 또 의를 모으는 방도를 논하면서 "반드시 일을 두어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 말며 조장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기절(氣節)은 즉 호연지기입니다. 만약 기절을 양성하고자 한다면 맹자의 이 교훈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요? 이 교훈을 주석한 뜻은 그대도 일찍이 송독하고 완색(玩索)한 것이니 내가 모름지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근 연소한 자들의 공통된 병폐를 논하자면 거의 모두 그것을 잊고 일삼음을 두지 않는데 있으니 어찌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 또한 요즘 연소자들 중 한사람이니 그러한 병폐가 없다고 어떻게 담보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는 "인을 행함이 나로 말미암지 남으로 말미암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일 모름지기 스스로 일을 두어서 스스로 잊지 말며, 스스로 의를 모아서 스스로 기절(氣節)을 양성하기에 이르러야지,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서 빌려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불꽃처럼 범할 수 없는 뜻으로 한줌의 흙을 쌓아 높은 산을 완성하는 공을 이룬 연후에 가히 양성을 말할 수 있으니, 이것이 아니면 결단코 성취할 수 있는 이치가 없습니다. 설사 있다고 하면 그것은 호연한 기절(氣節)이 아니라 곧 자질(資質)의 작용으로 간혹 일시에 습취(襲取)된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꺾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또 마땅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來喩謂持劒戈者, 不患虎至, 抱銃砲者, 不患盜來, 積金玉者, 不患歲凶.然則有氣節者, 獨患世亂乎? 比誠確論.不謂吾韞哉近日所見, 懇至高明有如是矣.夫劒砲金玉, 須自求聚自持積, 無他人替求替持之理? 則氣節獨有不自養成自有之, 而仰求他人之理哉? 而乃依之於老拙, 而冀其有賜者何哉? 孟子論浩然之氣曰, 是集義所生者, 又論集義之方曰: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氣節者卽浩氣也.如欲養成氣節, 舍孟子此訓而奚求哉? 此訓之註釋義意, 汝所嘗誦讀而玩索者, 吾不須說.但論近日年少通病, 則擧皆是忘之而至於不有事者, 其何能有成哉? 汝亦近日年少中一人, 安保其無此病也? 孔子曰爲仁由己而由人乎哉? 今須自有事, 自勿忘, 自集義以至於自養成氣節, 雖欲一毫借人分力, 正不可得也.要之以烈火不可犯之志, 下拳土積成高之功, 然後乃可言養成, 非此決無有成之理.藉曰有之, 非浩氣之氣節, 乃資質之作用, 或一時之襲取者, 安得久而不挫乎? 此又所當辨者也. 온재(韞哉) 박진호(朴珍浩) 이름의 '진(珍)'자로 인해 그의 字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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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연 전 병자년(1936) 黃長淵傳【丙子】 벗 오영호(吳永鎬)는 목포(木浦)에 임시로 살고 있는데,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거주하는 마을의 황 효자(黃孝子)는 행실이 대단히 뛰어나니, 오랑캐들177)이 뒤섞여 사는 지역에 재물을 어지러이 다투는 속에서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내가 듣고서 마음속에 담아 두었는데, 후에 그의 행실을 기록하여 보낸다.효자의 이름은 장연(長淵)으로 그 선조는 장수(長水) 사람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후손이다. 대대로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송산리(松山里)에 거주하였는데, 가난에 내몰려 목포부(木浦府) 연동(蓮洞)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이 어른 같았다. 집밖에 있을 때 좋은 맛난 음식이나 좋은 과일을 얻으면 먼저 맛보지 않고 품고 돌아와 드렸다. 어릴 때 학교에 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 품삯을 받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친이 병을 앓아 3년 동안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약과 맛있는 음식을 부친이 원하는 대로 바쳤으며 탕약은 반드시 한밤중 정화수에 담가두었다. 집이 공장과 약간의 거리가 있어서 낮에 틈을 내어 자주 찾아뵈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려 넣었고 넓적다리를 베어 죽을 끓여 드렸는데, 110여 일이 지나서 돌아가셨다. 상례와 장례는 신식을 따르지 않고 고례를 따랐으며, 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다. 새벽마다 비바람과 서리, 눈을 피하지 않고 일어나는 즉시 묘에 문안을 드리고서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생선과 고기는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밤에는 사실(私室)에서 자지 않았다. 당시 그는 28세였는데, 그 아우 남연(南淵)도 또한 효성이 깊다고 한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람이 비록 타고난 선행이 있으나 학문에 종사하여 도리를 정밀하게 선택하고 견고하게 지키지 않으면 맞닥뜨린 상황에 처한 바와 사는 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지금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목포는 어떤 지역이며 그 곤궁함은 또한 어떠한가. 그러나 이 사람은 일찍이 배우지 않았어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에 효도하여 살았을 때 섬기거나 죽었을 때 슬퍼함에 시종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행록에서 말한 '본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공자가 '다만 상지(上智)는 변하지 않는다.'178)라 하였는데, 나 또한 '오직 독실한 효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손가락을 찢거나 넓적다리를 자른 것은 선배들이 비록 중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지성이 아니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선비들이 의를 강론하는 날에 특별히 논하는 것이 옳다." 吳友永鎬僑居木浦, 過余言'所僑村黃孝子事行卓異, 顧此卉氈雜居之地, 貨利紛競之中, 乃有此人, 豈不難哉.余聞而心識之, 後又錄送其行曰: "孝子名長淵, 其先長水人翼成公喜后.世居海南郡花山面松山里, 爲貧窮所迫, 轉居木浦府之蓮洞.性本至孝, 自幼事親如成人, 在外得良饌美果, 不先入口, 懷而歸獻.早未就學, 每傭於工場, 受直金以奉兩親.其父得疾, 三年委臥床褥, 藥餌甘旨, 依願無闕, 湯藥必沒夜半井華水.家距工場稍遠, 晝間亦乘隙頻省, 疾革裂指往血, 割股煮粥, 過百十一日而歿.喪葬不遵新式而從古禮, 哀毁過節, 每晨不避風雨霜雪, 卽起省墓, 往傭於工場, 魚肉一不近口, 夜不寢私室.時年二十八, 其弟南淵, 亦有孝行云." 論曰: "人雖有所執之善行, 非從事學問而擇之精守之固者, 不能不隨所値所處所居, 而有所變移, 常情也.今夫此世何世, 木浦何地, 其貧窮又何如, 而斯人也, 未嘗爲學, 而能一意孝親, 生事死哀, 始終益勤, 非出於天性, 其能之乎.行錄所謂'性至孝'者, 信不誣矣.孔子曰: '惟上智不移', 吾亦曰: '惟篤孝不移', 若夫裂指割股, 先輩雖言其過中, 然非至誠, 決不能爲矣.此則別論於士子講義之日, 可也." 오랑캐들 전구(氈裘)는 모전(毛氈)으로 만든 갖옷인데, 북쪽 오랑캐를 가리킨다. 훼복(卉服)은 풀옷으로, 남쪽 오랑캐를 가리킨다. 목포에 여러 서양인들이 모여든 것을 말한다. 오직……않는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가 없다.〔唯上知與下愚 不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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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택 전 정축년(1937) 魯鎭澤傳【丁丑】 나는 사람들의 선행을 기록하기 좋아하는데, 시골의 일반 백성들에 대해 천진에 맡겨 꾸미지 않는 것을 귀하에 겨이고 그들의 자취가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더욱 그들에 마음을 쏟는다. 친척 낙춘(洛春)이 나에게 와서 책을 읽으며 자신이 사는 파산리(巴山里)에 노진택(魯鎭澤)이란 사람이 조부를 잘 섬기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진택이 겨우 10살 무렵에 그 부친을 여의었다. 당시 그 조부의 나이가 일흔이었으며 아우는 젖먹이였는데, 밖으로 가까운 친척이 없었으며 안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갈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 모친이 과부로 안방을 지키면서 아이들이 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세월이 살처럼 흘러 진택이 이윽고 장성하여 아내를 두었는데, 늙은 조부는 아직도 집에 있었다. 진택은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고용살이를 하면서 술과 고기를 이바지 하였으니 이십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집안의 전곡(錢穀)은 반드시 조부에게 맡겨두었으며 사용할 때 아뢰고 가져갔으니, 늙어서 가사를 맡길 나이181)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작은 출입이나 하찮은 물품이라도 아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모두 고하였다. 이윽고 조부가 정신이 혼미하여 대소변의 실수를 하여 옷과 자리가 더러워지고 냄새가 났는데, 진택이 일 때문에 밖에 있으면 그 아내와 아우가 앞 다퉈 청소하고 깨끗하게 세탁하였으니, 이는 집안사람들이 모두 진택의 효성에 감화된 것이다."라 하였다.내가 듣고서 감탄하기를 "진택이 가정의 교육과 문자를 배웠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지만 능히 이와 같은데, 이와 같은데도 또 찬양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말한 '천진에 맡긴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전함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효자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효손이 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친함으로 말하자면 조부는 부친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부를 잘 섬김은 참으로 효가 되지만 아들을 잃은 조부를 잘 섬기는 것은 더욱 큰 효가 되니, 어째서인가. 죽은 부친의 다하지 못한 효를 대신 다하는 것은 조부에 효도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부친에 효도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조부에 효도하면서 그 부모에 불효한 자는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군이 그 모친을 잘 모시는 것은 지금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미뤄서 알 수 있다. 오호라! 내가 26살에 선친을 여의고 조모를 모신 것이 모두 8년이었는데, 94살의 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셨다. 뜻을 받들고 맛난 음식의 봉양을 뒤미처 생각하면 노군에 부끄러움이 많다. 이를 쓰면서 감개에 젖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余好記人善行, 於村閭匹庶, 貴其任眞不餙, 惜其跡泯無傳, 尤致意焉.宗人洛春來余讀書, 爲說其所居巴山里人魯鎭澤善事祖父事曰: "鎭澤甫十餘, 喪其父.時有祖年七十, 弟在乳, 外無强近之親, 內無幹家之人, 惟其母煢然守帷, 待兒子長成.歲月荏苒, 鎭澤已壯有室, 老祖尙在堂, 鎭澤極其孝養, 以至行傭而供酒肉, 二十年如一日.家中錢穀, 必任置其祖, 用時稟告持去, 不以其老傳而自專, 少出入微細事, 一皆告之, 不差尺寸.旣而其祖神昏, 有失便溺, 衣席臭汙, 鎭澤執役在外, 則其妻與弟掃除澣潔, 爭先爲之, 是則家人皆感化鎭澤之孝也." 余聞之歎曰: "未聞鎭澤有庭訓之襲文字之識, 而能如是, 如是而又無人贊揚之者, 余所謂'貴任眞而惜無傳'者, 此也." 論曰: "孝子固難, 而孝孫尤爲難, 何也.以親言之, 則祖不如父也, 善事祖, 固爲孝, 而善事喪子之祖, 尤爲孝, 何也.代盡亡父未盡之孝者, 非惟孝祖而亦爲孝父也.余故曰: '天下未有能孝其祖而不孝其父母者'也.若魯君之善事其母, 今雖不言, 可以推知矣.嗚呼, 余於弱冠有六, 背先子奉祖母, 凡八年, 壽九十四而卒, 追念志物之養, 有愧魯君多矣.書此而不勝感歎云. 늙어서……나이 '노전(老傳)'은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70세를 '노(老)'라고 하며 이때에 가사(家事)를 아들에게 전한다.〔七十曰老而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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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전 李止善傳 이지선(李止善)은 나와 같은 마을 사람이다. 집안이 대단히 가난하여 살림을 꾸려갈 수 없을 정도였는데, 부모가 늙고 병들어 남의 집에서 품 팔아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갔다. 맛난 음식을 얻으면 품에 넣어 돌아가 부모에게 올렸으며, 얻은 담배도 또한 가져가 바쳤다. 일한 돈으로 부모의 식량을 마련하였으니, 십 수 년을 이처럼 하였다.30살이 되어도 장가를 들지 못하자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천지 만물도 모두 짝이 있는데, 더구나 사람이랴. 아들을 위해 아내를 두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부모가 능력이 없으면 내가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하니, 그대처럼 곤궁한 자는 집을 떠나 세용(歲傭)을 하여 재물을 모아서 아내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제대로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지선이 "내가 집을 하루 떠나면 부모는 하루를 굶으며 이틀을 떠나면 이틀을 주리게 되니, 오래 되면 부모는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 내가 어찌 차마 아내를 두기 위해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여겨 '그가 비록 집을 떠나더라도 산 사람은 입에 거미줄 칠 이치가 없는데, 저가 고집을 피워 신세를 그르친다.'고 여겼다. 심지어는 기롱하여 업신여기는 자까지 있었는데, 오직 조자정(趙子貞)은 이 사람은 효자라고 하고서 조금 물품을 보내 보살펴 주었다.내가 이에 오랫동안 감탄하면서 "지금 윤리가 무너져서 비록 부유하여 편안하게 지내는 자들도 파도에 휩쓸리듯 그 부모를 잊고서 돌아보지 않는데, 이 사람은 가난 속에서 고생하면서도 다만 부모만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으며 아울러 아내를 두는 급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천성적으로 효성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람들이 오히려 이것으로 기롱하고 업신여기는 구설로 삼으니, 오호라! 인심의 변함과 천리가 어두워짐에 더욱 상심할 뿐이다."라 하였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선의 효는 참으로 숭상할 만하다. 다만 맹자가 말하기를 '불효가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이 없는 것이 제일가는 불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순 임금이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아내를 얻었는데,182) 권하거나 기롱하는 자의 견해가 만약 이에서 나왔다면 또한 이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 순 임금이 고하지 않고 아내를 얻은 것은 고하지 않았을 뿐이니 부모에 무슨 해를 끼쳤는가. 만약 지선이 집을 떠났다면 부모는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목전의 부모를 지키지 못하면서 훗날의 효자를 후손으로 두려 하겠는가. 만일 목숨을 유지했더라도 그것은 요행에 불과하니 천리의 올바름이 아니며 인심의 편안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에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때 다만 눈앞의 도의를 구하게 하며 훗날의 이익을 계교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 한다." 李止善, 余同里人.家極貧窮, 無以爲生, 父母老且病, 傭人家日食.有美饌則懷歸獻親, 所得烟草, 亦如之.直金以供親粮, 如是十數年.年三十, 未娶, 人有勸者曰: "天地萬物, 皆有其偶, 况於人乎.爲子有室, 父母之心, 然父母不能, 我當自爲, 盍觀如汝之窮者, 離家作歲傭聚財, 以至有室乎.汝殆未思也." 止善曰: "吾離家一日, 則親有一日之餓, 二日則有二日之餓, 久則親必不保矣, 吾何忍圖有妻子而見親之不保乎." 人多悶其癡呆以爲'渠雖離家, 生人無蛛絲罥口之理, 渠自執迷, 誤却身世', 至有譏侮者, 獨趙子貞謂是孝子, 略有賙護.余爲之感歎者, 久曰: "今倫理壞敗, 雖富厚安平者, 滔滔皆忘其親而不顧, 惟斯人空乏勞苦之中, 但知有親而不知其身, 幷不念室家之急務, 非性於孝者能然乎.然而人猶有以此作譏侮之資者, 嗚呼, 人心之變, 天理之晦, 更可寒心." 論曰: "止善之孝, 固可尙矣.但孟子有言, '不孝有三, 無後爲大.' 故舜不告而娶, 勸譏者之見, 若出乎此, 則不亦有理乎.余曰: '否, 不然, 舜之不告, 則不告而已矣.於親何損.使止善而離家, 則親不可保矣, 焉有不保親於目前, 而求有後於他日之孝子乎.如或得保, 不過爲徼倖, 非天理之正, 人心之安矣.故君子敎人處事之方, 只求當下之道義, 不計後日之功利也.'" 맹자가……얻었는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중에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 순 임금이 부모에게 아뢰면 장가갈 수 없어서 아뢰지 않고 장가갔으니, 이는 후사를 두지 못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군자는 부모에게 아뢴 것과 같다고 여겼다.[不孝有三, 無後爲大. 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以爲猶告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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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김씨 전 경진년(1940) 孺人金氏傳【庚辰】 유인 김씨는 관향이 부령(扶寧)으로 고려 명현 문정공(文貞公) 구(坵)183)의 후손이다. 학생 인성(麟成)의 증손이며 석규(錫圭)의 손녀이며 경순(景淳)의 따님이다. 증조와 부친은 효성으로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으며, 조부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모친은 영광 김씨(靈光金氏) 통정(通政) 택려(宅麗)의 따님으로, 철종 경술년(1850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20살에 의성 김귀재(金貴載)에게 시집갔으니, 정민공(貞敏公) 지수(地粹)의 팔대 손부가 된다. 유인은 18세에 부친을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으며 모친을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자매간에 우애하였다. 시집을 가게 되자 시부모를 존숭하고 남편에게 공경하였으며 동서간에 화목하였다. 30여 세에 남편이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흘러 넣어주었으나, 끝내 목숨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평생 근심을 머금고 한번도 이를 보이지 않았으며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울러 남의 집에 오가는 것도 끊었는데, 다만 한 달에 한 번 모친을 찾아뵈었으니 이마저도 노년 이후의 일로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이다.아들이 없어 남편의 조카 진렬(鎭冽)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두 딸은 파평 윤상국(尹相國)과 광산 김오수(金鰲洙)에게 시집갔다. 유인은 성품이 염결하여 비록 대단히 가난하여 굶주렸지만 조금도 의리에 맞지 않는 물건은 취하지 않았으며 아들과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대개 종신토록 가난하며 홀로 지내는 정상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신축년(1901년) 7월 8일 돌아가시니 향년 52세로, 아무 산 아무 좌에 장사지냈다. 이웃에서 혀를 차고 안타까워하면서 "열부가 떠나갔구나."라고 하였으며, 모친은 탄식하면서 "우리 딸의 용모가 비록 아름답지는 않지만 실로 현철한 여인이다. 어찌 다만 효열로써만 논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에서 유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돌아가신 지 3년 뒤에 사림에서 그 행실을 문서로 천거하여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오호라! 유인은 나의 둘째 고모이다. 기억하기로 예전 내가 14살 때 계재(溪齋)에서 시도(詩道)를 익힐 때 우연히 높은 등수에 올랐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말에 태워 앞뒤로 빽빽하게 따라오면서 그 시를 크게 외위며 나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유인의 문 앞을 지나 나의 집에 이르도록 유인은 나와 보면서 희색을 띄었으며 다음날 심부름꾼을 보내 더욱 힘쓰라고 권면하였으니, 참으로 나를 깊이 사랑하였다. 지금 묘문(墓文)을 지어서 행실과 치적을 자세히 기술하여 훗날 비석을 새기는 데 대비하려 하였으나. 그 후사가 된 아들과 장손이 모두 죽어 더불어 의논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작은 소전을 지었으나, 당시의 추천한 문서도 또한 볼 수가 없기에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대략 서술하여 이에 그친다.경진년 유인의 기일에 쓰다. 孺人金氏, 籍扶寧, 高麗名賢文貞公坵后.學生麟成曾孫, 錫圭孫, 景淳女, 曾祖及考孝聞表宅, 祖有文行.妣, 靈光金氏通政宅麗女, 以哲廟庚戌某月日生.年二十歸義城金貴載, 爲貞敏公地粹八世孫婦.孺人十八, 喪父致哀毁, 孝事母友弟妹.及適人, 尊舅姑敬夫子和妯娌, 三十餘, 夫病革, 斷指注血, 竟不救, 平生銜恤, 一不啓齒, 不參衆會, 幷絶往還, 惟課月見母夫人, 亦向老後事而居近故也.無男, 取夫之從子鎭冽爲后, 有二女, 適坡平尹相國·光山金鰲洙.孺人性廉潔, 雖極寒餓, 毫不取非義物, 子與婦不適意, 亦無言, 蓋其終身貧窮煢獨之狀, 何可盡言.以辛丑七月八日卒, 壽五十二, 葬于某山某坐.隣里嗟惜曰: "烈婦逝矣." 母夫人歎曰: "吾女貌雖不揚, 實哲媛也, 豈但以孝烈論哉." 斯可以知孺人矣.沒後三年, 士林狀薦其行, 載《三綱錄》.嗚呼, 孺人, 余仲姑也.記昔余年十四, 肄詩道溪齋也, 偶居高等, 衆擁余乘馬, 前後簇行, 歌咏其詩, 以爲榮.過孺人門至余家, 孺人出觀有喜色, 翌日專至而申勉之, 眞愛之深也.今欲爲撰墓文, 細述行治, 以備他日顯刻, 然其所後子及長孫俱沒, 無可與論者.故只得立一小傳, 而當時薦狀, 亦不可得見, 略書親所見聞者, 止此云爾.庚辰歲孺人諱辰書. 김구 1211~1278.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말기의 학자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을 지었으며, 우간의대부, 정당문학·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통문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장용·유경 등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고,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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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김씨 전 병자년(1936) 烈婦金氏傳【丙子】 내가 태인(泰仁) 주산리(舟山里)에 절부(節婦)가 있다고 들은 지가 이미 몇 해가 되었다. 이번 봄에 그 마을을 지났는데, 마을 사람 김순거(金舜巨)는 노성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나를 위하여 절부의 일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절부는 강진(康津) 김영환(金水煥)의 아내이며 울산(蔚山) 김태환(金台煥)의 딸이다. 이윽고 시집오니 시부모는 돌아가셨으니, 남편의 숙부 숙모 모시기를 시부모 모시는 것처럼 하여 향촌에 이름이 났다. 남편이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남편이 죽게 되자 예에 맞게 초상을 거행하였다.같은 마을에 최진문(崔進文)이란 자가 익명으로 편지를 던져 절부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이름을 적어 다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의 글이 무욕(誣辱)에 가까웠다. 이에 절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서 칼을 품고 그에게 달려가니,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도망가자 칼을 던져도 닿지 않았다. 이에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돌아왔는데, 불타오르는 마음이 거세어 원통함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한번 죽어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로 마음먹고서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음독할 뜻을 보였지만 실패하여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당시는 설날을 맞아 죽도록 힘든 몸을 일으켜서 음식을 장만하여 시부모와 남편의 영전에 올렸다. 다음날 다시 강한 독약을 먹고서 남편의 숙부와 숙모에게 고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 구차하게 오늘까지 목숨을 유지한 것은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운명이 기구하여 이렇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였으니,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주머니에 화폐 15원과 장자에 비단 약간이 있으니 훗날 아들을 위해 쓰십시오."라고 부탁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인의 나이는 28살이며 아이는 7살이었다.내가 듣고서 슬퍼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큰일이며,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이다. 지금 왕성한 나이에 어린 아들을 버리고 죽으니 어찌 하고 싶은 바가 살고 싶은 것보다 더한 것이 있고 사랑한 바가 아들보다 심한 것이 있지 않으랴. 절부 같은 이는 다만 천하에 한 개 '의(義)'만 알고 이른바 자신과 아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고금 사대부 가운데 이름난 자를 낱낱이 헤아려보아도 오히려 이것을 하기는 어려운데, 이에 외딴 시골 한 부인이 능히 하였으니, 내가 이에 슬퍼하면서 마지않고 장한 일이라 여기기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수환(水煥)의 숙부 아무개가 본군의 사림으로 있으면서 그 일을 천양하고 기록을 보내 나에게 보여주니, 그 글이 순거의 말과 부합한다. 그 글에서 또한 '수환의 모친 의성 김씨 또한 18살에 과부가 되어 절개를 굳게 지키다가 타계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개 절부의 절개는 참으로 그 자체로 뛰어난데, 한 집안에 시모와 며느리가 함께 절개를 지킨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니, 오호라 훌륭하도다.다음과 같이 논한다. "생각건대 절부의 죽음은 대단히 급격한 것으로, 저놈의 무욕(誣辱)을 들어 고을에 드러내고 관가에 알려서 만일 깨끗하게 무욕을 씻었다면 절로 죽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여 무욕을 씻지 못하였다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이른바 '강구해야 할 중도(中道)'에 해당하니,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개 세상이 쇠퇴하고 이치가 막힌 이후로 세력가(勢力家)가 행세한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의 향촌에 어찌 공론이 있으며, 지금의 관가에 어찌 공법(公法)이 있으랴. 세력가가 반드시 시비를 모호하게 하여 옳고 그름이 없어져서 다만 저놈의 무욕을 돕고 유인의 원한만 늘게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쁜 것을 예방할 때는 지나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말며 의리에 맞는 행동을 할 때는 엄격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니, 절부는 일찍 이것에 대해 본 것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저 진문이란 놈을 보건대 마을에서 으스대면서 살아도 누가 머라 하는 사람이 없으며 절부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그러하니, 더구나 그 당시에랴. 오호라! 절부는 이에서 보면 현철한 여인이로다." 余聞泰仁舟山之里, 有節婦焉者, 已年所矣.今春過其里, 里人金舜巨, 老成信實人, 爲余道節婦事甚詳.節婦, 康津金水煥妻, 蔚山金台煥女.旣歸, 舅姑不在, 事夫之叔父母如舅姑, 譽著鄕井.夫嬰疾, 殫誠救護, 及當晝哭, 執喪如禮.同里有崔進文者, 匿名投書, 欲試節婦心而不得, 則再書書名, 辭涉誣辱, 節婦不勝義憤, 懷刃赴彼, 彼知罪奔躱, 擲刃不及, 乃打破其家産什物而歸, 燬心萬回, 寃不得雪, 決以一死自明, 裁一封書, 示志飮毒不中, 被人急救.時値正朝, 扶死執爨, 薦舅姑奠夫靈, 翌日再服重毒, 告夫之叔父母曰: "夫亡而苟延今日者, 待兒子稍長矣.命道崎嶇, 遭此莫雪之辱, 不若死之爲愈.囊有貨幣十五圓·箱帛若干, 他日用於兒子." 言託而逝, 時年二十八, 兒生七歲矣. 余聞而悲之曰: "死生, 人之大事, 愛子, 人之至情.今以盛年棄幼子而死之, 豈非以所欲, 有甚於生, 所愛, 有甚於子乎.若節婦者, 只知天下有一箇義字, 而不知有所謂身與子者矣.歷數今古士夫之顯名者, 猶難乎此, 乃以窮閭一婦人而能之, 余於是又不悲而壯之不已." 已而水煥之叔父某, 以本郡士林闡揚, 狀來示余, 其文與舜巨言相符, 其文又言'水煥之母, 義城金氏, 亦十八而孀, 苦節而終', 蓋節婦之節, 固自卓異, 而一家二節, 姑婦濟美, 嗚呼盛哉.論曰: "有謂節婦之死太遽, 擧彼誣辱, 暴之于鄕, 訴之于官, 如得雪白, 自無事乎死.如其未然, 死且未晩, 此乃學者所謂'講求中道'者, 似然而實不然.蓋自世衰理遏, 而勢行也久矣, 今之鄕黨, 豈有公論, 今之官司, 豈有公法.勢必糊塗是非, 無皀無白, 適足以助彼之誣, 而增此之寃, 安知其不然乎.故防慮不患其過, 裁義惟恐不嚴, 節婦蓋早見於此矣.今觀彼進文者, 揚揚州里間, 而莫敢誰何, 節婦死而猶然, 而况於當日乎.嗚呼, 節婦於是乎哲媛矣."後滄先生文集卷之二十五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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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6 卷之二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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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숙명 【최광호를 계칙함. 을축년(1925)】 端肅銘 【戒崔光鎬 乙丑】 너의 몸을 단정히 하고, 端爾躬,너의 얼굴을 엄숙히 하라. 肅爾容.너의 뜻을 평안히 하고, 安爾意,너의 기운을 누르라. 降爾氣.너의 음성을 조용히 하고, 靜爾聲,너의 행동을 서서히 하라. 徐爾行.의관(衣冠)을 깨끗이 하고, 潔衣巾,정신을 맑고 밝게 하라. 爽精神.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玆無得,어디에다 힘을 쓰랴. 惡乎力.너의 멋진 모습을 키우라. 壯爾帥,너의 얽힌 장애를 깨뜨려라. 破爾累.인자와 현능을 가까이 하고, 親仁賢,글 읽고 책 보는데 애쓰라. 劬簡編.처음부터 부지런히 하고, 始勤止,끝까지 그치지 말라. 終無已. 端爾躬, 肅爾容; 安爾意, 降爾氣; 靜爾聲, 徐爾行; 潔衣巾, 爽精神。 玆無得惡乎力, 壯爾帥破爾累, 親仁賢劬簡編, 始勤止終無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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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명 【최재천에게 증정함. 병인년(1926)】 尙志銘 【贈崔在千 丙寅】 어여쁘다 너의 어린 나이, 嘉乃妙齡,열 서너댓 살206) 되었구나. 間乎象勺,안연(顔淵)은 스승을 모셨고, -안연은 14세에 공자 문하에 왔다-淵逮從師,【顔子十四歲從孔門】공자님은 학문에 뜻을 두려하셨다. 尼將志學.먼 옛 사람들 돌아보며, 緬惟古人,향기로운 발자취 따라가지 않을 텐가. 盍追芳躅,다루지 말 것은 자질이고, 不及者質,높이 올릴 것은 의지이다. 可尙者志.지극한 의지로 기(氣)를 움직이고 志至動氣,철인의 가르침을 밝게 보이라. 哲訓昭示,전일한 의지로 정신을 응집하고 志專疑神,현자의 격언을 끝까지 다 이루라. 格言究致,움직인 다음에 고여 응집하고 旣動乃凝,자질이 변하여 조화로워진다 質變純如.저 공자와 안연 또한 維尼若淵,어찌 다를 바가 있었으랴! 豈在他歟?오호라, 의지로다! 於乎志乎,이를 높이 올릴지라. 其尙只且. 嘉乃妙齡, 間乎象勺, 淵逮從師【顔子十四歲從孔門】, 尼將志學。 緬惟古人, 盍追芳躅, 不及者質, 可尙者志, 志至動氣, 哲訓昭示, 志專疑神, 格言究致, 旣動乃凝, 質變純如。 維尼若淵, 豈在他歟? 於乎志乎, 其尙只且。 열 서너댓 살 원문은 '상작(象勺)'인데, 상(象)은 15세, 작(勺)은 13세를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나이 열셋이면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우며 작(勺)의 춤을 춘다. 성동(成童 : 15세)에는 상(象)의 춤을 춘다.[十有三年, 學樂誦詩, 舞勺. 成童舞象。]"이고 하였다. 《시경》의 시는 노래 가사인데, 상(象)은 시 〈유청(維淸)〉의 곡이고, 작(勺)은 〈작(酌)〉의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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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가 상길의 자사 【병인년(1926)】 朴敬可【相吉】字辭 【丙寅】 태만하면 멸망이 의당하고 怠則滅可,공경하면 길상이 의당하니, 敬則吉可,천년 이어온 단서(丹書)291)의 도리 丹書千秋,누가 그것을 의당하다 않으리. 孰不曰可.사람이 살면서 길상 얻으려면 人生獲吉,지극한 서원이 그것을 허가하리 至願攸可,어찌 스스로 공경하지 않아 胡不自敬,구하면서 못 얻을 길을 고집하랴. 求必未可.'공경하라' 이 한 방도 敬之之方,성현 가르침의 지극한 길이니, 聖訓至可,고요함 속에 지니고 길러서 靜而存養,내 안이 곧으면 이미 얻은 것이니,292) 直內旣可.움직임 속에 보고 살펴서 動而省察,지니고 일삼음 역시 얻으리니, 執事亦可,이를 일러 길상을 구함이라 하니 斯謂求吉,경(敬)이 아니면 얻지 못하네. 非敬莫可.길상 구하는 박상길의 자는 朴相吉字,경(敬)으로 얻으니 경가(敬可)가 맞네. 敬可是可,부지런히 애쓸지니 勉哉勉哉,경가(敬可)여 경(敬)하여 얻으라. 敬可敬可. 怠則滅可, 敬則吉可, 丹書千秋, 孰不曰可。 人生獲吉, 至願攸可, 胡不自敬, 求必未可。 敬之之方, 聖訓至可, 靜而存養, 直內旣可。 動而省察, 執事亦可, 斯謂求吉, 非敬莫可。 朴相吉字, 敬可是可, 勉哉勉哉, 敬可敬可。 단서(丹書) 붉은 새[赤雀]가 물고 왔다는 상고(上古)의 도(道)를 적은 글로서, 주(周) 무왕(武王)이 등극한 후 옛 황제(黃帝)•전욱(顓頊)의 도(道)가 남아있는가를 묻자 상보(尙父)가 단서에 적혀 있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공경하라……얻은 것이니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공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 외면을 방(方)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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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팔은동 삼형제를 위로하며 갑자년(1924) 慰金聖八殷東三兄弟 ○甲子 예서(禮書) 이외에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산천이 달라지며 삼강이 끊어지고 문란해진 것이 아! 오래 되었습니다. 절개와 행실이 우뚝하고 돈독한 선비와 덕이 훌륭한 이들이 죽어서 이미 다 사라졌으니, 신령한 빛이 드높고 지주(砥柱)처럼 우뚝한 사람으로는 오직 선영감(先令監)이 계실 뿐입니다. 병환이 비록 점점 깊어진다 하더라도 정신은 날마다 또렷하고 얼굴빛은 옥처럼 깨끗하니 생각건대 8,90세까지 수를 누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세도(世道)가 의지할 것이 있어 마침내 하늘이 되돌아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루 저녁에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아마 하늘이 끝내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은 듯합니다. 크게 놀라고 대단히 애달프니 천하를 위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삼가 생각할 때, 여러 상주들의 효성스런 마음은 천성으로 타고났으니, 어버이를 잃은 슬픔과 국가를 위한 고통으로 어린 아이처럼 울어 간과 폐가 타들어 가는 상황을 마치 눈으로 목격한듯하여 말하자니 슬프고 슬픕니다. 삼가 듣자니, 몸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는 것을 경계하고 가업을 잘 잇는 것이 효라고 합니다. 여러 상주들은 충의에 힘써 세상을 바로잡거나 학문을 궁구하여 도를 제창함으로써 선영감의 뜻과 사업을 빛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른과 아이들의 큰일이니 전도가 이미 아득하고 책임이 또한 무겁습니다. 얼굴이 시커멓고 수척하여 뼈만 앙상함으로써 목숨을 먼저 상하게 하여 일생의 큰 성취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간절한 소망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禮書之外 夫復何言? 山異河改, 綱絕維紊, 吁亦久矣! 卓節敦履, 搢紳長德, 喪逝已盡, 巋其靈光, 矻其砥柱, 惟先監在爾. 患節雖云侵尋, 神精日朗, 顏彩玉潔, 意其克享耄期. 既今世道之有賴, 終得天返之復覩, 忽焉一夕箕騎遽啟, 豈天終無意乎斯世也耶? 大驚深怛, 實爲天下公私不暇道也. 伏想僉哀執孝思根天, 風樹之悲, 家國之痛, 嬰哭孺泣, 肝乾肺焦, 如在目撃, 言之慽慽. 竊聞毀瘠是戒, 繼述爲孝, 惟僉哀執, 或勵忠義而匡世, 或究學問而倡道, 用光先令監志事. 是大小大事, 而前途既遠, 其任且重. 勿以靣墨骨立, 先傷厥生, 有妨一生大就. 區區不勝懇望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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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기 【임신년(1932)】 可石記 【壬申】 가석(可石) 박공(朴公)은 옛 마을에서 석담(石潭)이라 일컬어진 것으로 인하여 꿈에 어떤 대인 선생(大人先生)이 지금의 호를 써서 바꿔 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 호로 삼았다. 그러나 대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한 내려준 호가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기에 그의 벗인 나 김택술이 그 의미를 풀이하여 말하였다."'석(石)'은 단단하고 굳센 물건이며, '가(可)'는 허여한다는 말이네. 공은 단단하고 굳센 사람이니, '석'이라 허여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네. 그 마을에서 예전 일컬음도 또한 우연이 아니고, 자나 깨나 예전 시대의 현인을 생각하여 지하에서의 명령이 있게 된 데에 이른 것이네. 이미 그 덕을 헤아려 실제에 맞는 호를 내려 주고, 아울러 혐의를 피하여 현인을 공경하는 예를 온전히 갖추게 한 것도 또한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이 신(神)을 감동시킨 결과이니, 대인 선생은 참으로 석담(石潭) 이 선생(李先生 이이(李珥))일 것이네.삼가 생각건대, 그 능력을 허여하되 부족한 것을 권면하는 것은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뜻이지만, 신이 '가석'이라 고해준 뜻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듯하니, 내가 청컨대 그 깊은 뜻을 대신 드러내 보겠네.대저 돌 가운데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옥이지만, 옥도 또한 돌이네. 단단하고 굳센 것만으로도 비록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 양질의 옥이 된 뒤에야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네. 이는 군자가 강직하고 굳세며 견고하고 강인한 의지로 의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민연(泯然)하여 마음이 인(仁)에 편안한 것만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네.공은 잘하는 것과 부족한 것 사이에서 의당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았고, 마침내 신의 은혜를 누렸으니, 꿈이 실제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그 호를 삼은 자도 미혹하고, 그것을 풀이한 자도 미혹하다고 의심을 두는 것은 고루한 일이네. 대저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본 것에 대해 실제의 일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지금 가석이 현인을 사모하는 정성으로 꿈에 석담을 만난 것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석담은 우리나라의 성인이니, 바로 돌 가운데 옥이네. 석담을 사모하고 석담을 꿈꾸며 그 가르침을 받들고 그 덕을 스승으로 삼았으니, 어찌 공이 돌에서 옥이 되는 데에 이미 반 이상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인하여 이를 기록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네." 可石 朴公, 因舊里稱以石潭, 夢有大人先生, 書今號而改錫, 故受而居之.然不知大人之爲誰, 亦莫知所錫之爲何意也.友人金澤述解之曰: "石者堅剛之物, 可者許與之辭.公堅剛人也, 許之以石, 固其宜也.其里其稱舊, 亦非偶, 而寤寐前哲, 至有冥詔.旣量其德, 而錫以當實之號, 幷使避嫌而備全敬賢之禮, 亦一至諴感神之致也.大人先生, 其眞石潭 李先生乎.竊惟許其能而勉不足, 聖賢敎人意也, 神告可石之意, 恐不止此, 吾請替發其蘊.夫石之至美者爲玉, 玉亦石也.堅剛雖曰美矣, 必爲良玉之溫潤, 然後至焉, 有似乎君子之剛毅堅忍, 不犯乎義, 猶不若粹然泯然, 心安於仁也.公於能與不足之間, 宜知所以自勉, 而卒享神惠也, 有疑以夢者非眞, 居其號者迷也, 解之者亦迷也, 則固矣.夫孔子之夢見周公, 未聞有以非眞疑之者.今以可石慕賢之誠而豈不信夢拜石潭? 石潭東方聖人, 乃石中玉也.慕石夢石, 承其敎師其德, 豈非公自石至玉之思過半者乎? 因記而俟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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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丁丑 정축년(1937)일전에 나아가 찾아뵌 것은 2년의 계획 끝에 나온 것인데, 마침 밖으로 외출을 하셔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서운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드님을 만났는데, 대접이 정성스럽고 응대가 명쾌하여 사람 마음을 대단히 흔쾌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른과 닮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만하여 이로써 위로를 삼았습니다. 이전에 얼핏 아드님께서 변형57)을 면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듣고, 가정의 엄격한 교훈으로 이에는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오늘날 젊은 사람 중에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비록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와전임을 통렬히 변론하지는 못했는데, 오늘 이후에야 전통을 지닌 오래된 집안의 의방(義方)이 자연 다른 바가 있다는 것을 더욱 알았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뜻이 고상한 것도 쉽게 얻을 수 없으니, 더욱 위로가 되었습니다.돌아와서 얼마 안 되어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만남이 어긋나서 매우 슬프고 한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자세한 동정을 물으시고 아울러 더욱 편안히 왕래하라는 뜻을 보여주셨으니, 아, 저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사람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는데 높으신 분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격하는 마음은 비록 깊으나 송구한 마음 또한 지극합니다.시생은 몸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밖으로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58)이니, 이러한 때에 이러한 모습은 족히 받들어 아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 몸과 네 명의 아들, 세 명의 동생, 한 명의 조카인 아홉 식구가 옛 의관을 현재도 보존하여 바꾸지 않고 있으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더라도 아마 우리와 짝할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이러한 모양 또한 특이한 일이니, 이것이 영광이 될지 욕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또 논자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막론하고 다만 앞으로는 잘 끝맺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할 뿐입니다.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어른은 올해 나이가 팔순에 다가섰습니다. 사람은 말년에 큰일을 하기 마련이고 또한 세상의 혼란함이 이러할 때에는 젊은이가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생과 우리 어른은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에 오르는 처지59)라고 말할 만한데, 한 번 만나서 문후를 하고는 걸핏하면 몇 년이 지나니, 지난날을 통해서 장래를 추론하건대 앞날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소의 문자 의리를 모두 강론하여 정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어찌 영원한 후세에 다소의 유감이 없겠습니까? 삼가 우리 어른께서도 때때로 생각이 이것에 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날 나아가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은 이것에 있었는데 이미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교(下教)하신 대로 가을 사이에 정산에서 찾아뵈었어야 했으나 이 또한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찾아뵐 계획을 도모할 뿐입니다.지난번에 아드님이 근래에 그린 존영(尊影)을 보여 주었는데, 아주 비슷한 것을 보니 단지 칠푼[七分]60)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초상을 정립한 모습으로도 단좌한 모습으로도 그리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중세에 중국 사람들은 앉을 때 반드시 의자를 사용하였으니, 이미 의자에 앉은 이상 어쩔 수 없이 걸터앉게 됩니다. 그러나 주자가 의자를 사용하는 송나라 때에 살면서도 그 초상은 오히려 의자도 쓰지 않고 걸터앉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본디 의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의자의 사용이 근래의 사람들에게나 있는 데이겠습니까. 의자에 앉는 것은 우리나라 풍속에 없는 것이고, 걸터앉는 것은 또한 유자들이 잠시 동안도 불안해하던 것입니다. 이제 엄정한 유자의 복장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초상을 후세에 전한다면 어찌 사실과 어긋나서 누를 끼침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영정 끝에 그린 사람을 기록한 것이 성명으로 하지 않고 별호로 했으니, 이것이 어찌 젊은 사람이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겠습니까? 일찍이 선사의 영정에 채용신(蔡龍臣)이 석지(石芝)라는 호를 사용한 것을 보고 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것을 보니, 아마도 또한 한 때 화가의 풍습인가 봅니다. 제 견해로는 마땅히 모두 고쳐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日前造拜, 出於兩年經營, 而適值駕外, 未承誨喩, 殊甚缺然.然得見賢哥, 待遇款洽, 酬酢明爽, 大快人意, 眞可謂見其所似者, 以是爲慰.前此似聞賢哥不免變形, 想以庭訓之嚴, 不至於此.然在今日年少, 亦容有之, 故心雖不信, 亦不能痛辨其訛.今而後益知故家義方, 自有所異.弱冠志尙, 亦不易得, 尤以爲慰.歸後來幾, 獲拜下狀, 審悉具道交違悵恨之極, 問訊此間動靜之詳, 並示駕益往還之安, 噫, 非愛我之深, 烏能致此? 然少者未遑, 尊者先施, 感雖深矣, 悚亦至矣.侍生, 鶉結於身, 虎食於外, 此時此狀, 無足奉稟者.惟是身及四子三弟一姪九箇, 舊冠現保無變, 環顧域中, 想少其儔.此世此樣, 亦是異事, 未知此爲自榮耶自辱耶.且無論論之者如何, 秪以前頭克終之難爲憂耳.竊念吾丈今年迫八旬, 夫人之晩年, 大有事在, 且世亂如許, 少者之死亡, 亦無日矣.侍生之於吾丈, 可謂生同義死同傳之地, 而一番靣候, 動輒數歲, 因往推來, 前頭可知.多少文字義理之未盡講定者, 其何以不有多少遺憾於無竆也乎? 伏想吾丈, 亦時一念, 至於此也.前日之進惠, 實在此, 而旣不得遂, 則當依下敎, 以秋間拜會凈山, 又不能.然則不容不更圖進謁計耳.頃得賢哥出示近寫尊影, 見其酷似, 不但七分而已.但像不以正立, 不以端坐, 以踞坐椅上者, 恐未穩.中古中國人, 坐必用椅, 旣坐椅, 則不得不踞然.朱子當有宋用椅之時, 而其像猶不椅不踞.况於我國之本不用椅, 而椅之用, 乃在近時人乎.蓋坐椅, 國俗之所無, 踞坐, 又儒者之所斯須不安者.今以儼然儒服, 踞坐椅上, 傳之後世, 豈不爲爽實而貽累乎? 且幀末之記寫者, 不以姓名而以別號者, 是豈少者敬長之道乎? 曾於先師影幀, 見蔡龍臣用石芝之號, 尋常不快於心, 今又見此, 豈亦一世畵家之風習歟? 淺見恐當并行改正, 未知如何. 변형(變形) 단발령에 의해서 상투를 잘린 모양을 '변형'이라고 한 듯하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 원문의 '호식(虎食)'은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말로, 노나라의 단표(單豹)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깨끗하게 살면서 속세의 이끗을 다투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힌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안으로 정신만 수양하고 밖으로 몸의 단련을 소홀히 한 것을 말한다. 살아서는……처지 송나라 때 명신인 범진(范鎭)은 사마광(司馬光)과 우의가 두터웠는데, 사마광에게 "그대와는 살아서 뜻을 함께하고 죽어서 전을 함께할 것이다.〔與子生同志死同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치의집전(緇衣集傳)》 권3 〈일류장(壹類章)〉 중국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는 성향이 같은 인물을 한 열전(列傳)에 모아 엮기 때문에 한 말로, 이 말은 뜻을 같이 하였다는 의미이다. 칠푼[七分] 초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음을 말한다. 정이(程頤)가 《역전(易傳)》을 짓고서 문인들에게 주며 "단지 7분만 말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스스로 살피고 궁구해야 한다.〔只說得七分 學者更須自體究〕"라고 하였는데, 문인인 장역(張繹)이 그에 대한 제문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인용하여 "선생의 말씀으로 문자에 드러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으로 그려진 것은 7분의 용모가 있다.〔先生有言見於文字者 有七分之心 繪於丹靑者 有七分之儀〕"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附錄 祭文》 글이나 그림으로는 그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7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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