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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비 유인 박씨 행장 先妣孺人朴氏行狀 선비(先妣) 박씨(朴氏)의 관향은 진원(珍原)이니,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후손이다. 증조는 만열(萬烈), 조부는 귀현(貴玄), 선고(先考)는 치성(致聖), 선비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태방(泰邦)의 따님이다. 순조(純祖) 기묘년(1819, 순조19) 장흥(長興) 갈령리(葛嶺里)에서 태어났으니, 바로 박씨의 세거지이다. 아직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던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겨우 일을 살필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사촌 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사촌 언니는 바로 문씨(文氏)에게 시집가서 일찍 과부가 된 이였다. 성품이 엄정하여 과부로 살면서 은장도를 늘 머리맡에 두었으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매우 경계하여 비록 이웃에 있는 친척이라도 일이 없으면 간 적이 없었으니, 엄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 고아가 된 나의 선비를 보고 매우 가련하게 여겨 온 정성을 바쳐 돌보고 가르쳤다. 선비는 17세에 시집왔는데 당시 선고께서는 덕동(德洞)에 우거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서툴렀다. 선비께서 어린 나이에 가사를 책임져 온갖 일을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처리하니 살림을 맡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조금 펴졌다. 지아비를 섬길 적에는 부인의 도리를 다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는 법이 없었고 한 마디 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전 부인의 기일이 되면 성의를 다했고, 전 부인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시집간 딸의 경우에는 비록 사위와 외손자라도 차별 없이 대하였다. 친척과 이웃 마을에 은혜를 두루 베풀어서 모두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정결하였으며, 기물은 소박하면서도 완전히 갖추었다. 해지거나 파손된 것이 있으면 즉시 보수하였다. 옷 한 벌 버선 한 컬레를 10년 동안 바꾸지 않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구휼할 적에는 관대하고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썼고 아끼거나 인색하지 않았다. 일찍이 친가에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친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고 묘를 지키게 하였는데 은애(恩愛)와 돌봄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두터웠다. 조카며느리 양씨(梁氏)가 일찍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자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여 전답을 나누어 주어서 생계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병진년(1856, 철종7) 겨울에 덕동(德洞)에서 품평(品坪)으로 이사하였는데, 온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듯이 눈물을 흘리며 10리까지 따라가 한낮이 되도록 작별하지 못하였으니, 인심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자손에게 학문을 권장하기를 매우 지극하여 현숙(賢淑)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고 장난치거나 잡담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매우 엄히 경계하였다.(매우 경계하고 금지하였다. "切戒禁之") 명촌(明村) 황 처사(黃處士)와 관수재(觀水齋) 박 선생(朴先生)은 모두 소자(小子)의 어릴 적 사장(師長)인데 철마다 이분들에게 문후하는 것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민속 명절이 되어 한가하게 노니는 날이면 번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한가한 날을 만났는데 어찌 아무개 어른을 찾아뵙지 않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을 아이들을 따라 세시풍속 놀이를 할까 염려해서였다. 소자가 14세 때 과장(科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느질하는 도구를 사서 바치자, 선비(先妣)께서 이르기를 "행탁(行橐)에 여유가 있으면 마땅히 서책을 구입할 것이지 바느질하는 물건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면서 호되게 꾸짖으셨다. 중년 이후로 여러 차례 이사하고 자주 혼사를 치르느라 가세가 점점 기울었지만 여유가 있게 처신하였고 남에게 집안의 옹색한 형편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별도로 약간의 물품을 마련해 두었다가 소자(小子)가 과거를 보러 가는 때나 사우(師友)를 따라 멀리 유람하러 가는 길에는 번번이 힘을 보태 권유하여 보내서 경비가 부족하여 곤란을 겪는 근심이 없게 하였다. 생활비를 다 써 버렸다고 할 때에는 못 들은 척하였으나 종이와 먹이 부족하다고 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셨다. 소자를 따라온 객이 있으면 반드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드러나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타일러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게 하였다. 소자에게 손님을 만류하도록 하고 그가 떠나갈 적에는 노잣돈을 주어서 보내게 하였다. 향리(鄕里)에 조문할 곳이 있으면 반드시 부의(賻儀)를 갖추어 가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인사는 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소자가 다른 곳에서 돌아오면 "어찌 늦게 돌아왔는가."라고 하시고, 사문(師門)에서 돌아오면 "어찌 빨리 왔는가."라고 하셨다. 소자가 혹시라도 집안일을 하면 반드시 대신 그 일을 하시고는 서숙(書塾)에 가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지나치게 마음을 다른 곳에 두는가."라고 하셨다. 부인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생존한 자식은 불초 소생뿐이었으니, 애정이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입이 짧은 것을 근심하여 생선과 육류 등의 음식을 날마다 보내주셨고, 혈기(血氣)가 허한 것을 근심하여 막걸리를 날마다 마시게 하였다. 제사가 임박하여 장차 치제(致齊)하려고 할 때면 전혀 참견하시지 않았지만 소자가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의사가 있으면 통렬하게 꾸짖으셨다. 매달 초하루 참알(參謁)하는 때 혹 초하루인지 잊어버리면 번번이 알려주시어 "오늘 삭조(朔朝)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만약 손님과 함께 앉아 있어 알리기 어려울 때면 도포(道袍)를 보내어서 깨우쳐 주셨다. 소자가 처음에 두 자식들을 두었으니 상묵(尙黙)과 상돈(尙敦)이었다. 한 아이에게는 유학을 공부하게 하고 한 아이에게는 농사짓게 하고자 하니, 선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하고 부귀한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유학이나 농사와는 상관이 없다. 설령 농사지어 부유하더라도 유학을 하여 가난한 것만 못하고, 무식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이 유식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흉년이 들었을 때 손자들이 물고기 잡고 나물 캐는 것을 일삼자 선비께서 그들이 학문을 그만둘까 근심하여 조금 한가한 틈이 있으면 번번이 불러서 책을 읽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그만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소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셨다. 혹 병중(病中)이나 조석으로 일이 없을 때 아이들로 하여금 모시고 글을 읽게 하면 번번이 즐겁게 들으셨다. 늘 소자를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난하다고 하여 딴마음을 먹지 말고 오직 독서하고 자신을 단속하여 훌륭한 자손이 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죄를 짓지 말라. 죄를 지으면 남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이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너는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 고종14) 6월 4일에 졸하였다. 8월 27일 기유(己酉)일에 장현(章峴)에 장사 지내고, 10년 뒤 병술년(1886, 고종23) 봄에 고묵곡(古墨谷)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선비는 자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규중의 위의가 정숙하여 비속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매우 곤궁하고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매우 노쇠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며 온화하고 양순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였으니, 옛날의 숙원(淑媛)에 견주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 형편없는 불초 소생은 30년 동안 슬하에 있으면서 일찍이 조금도 지물(志物)의 봉양6)을 한 적이 없다. 지금 또 백발이 성성한 늙은 나이인데도 끝내 이룬 것이 없으니, 불효한 죄는 만번 죽더라도 속죄할 수 없다. 오직 끊어질 듯한 실낱같은 목숨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 지하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겠는가. 천지를 우러러 보고 굽어봄에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다. 모두 3남 7녀를 두었다. 장녀는 광산(光山) 이병성(李秉誠)에게 시집갔고, 장남 한룡(翰龍)은 지행(至行)이 있었는데 8세에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은 바로 불초 소생이다. 둘째 딸은 공주(公州) 이광무(李光茂)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청도(淸道) 김장석(金章錫)에게 시집갔고, 넷째 딸은 요절하였고, 다섯째 딸은 풍산(豐山) 홍승명(洪承命)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은 상림(祥林)으로 5세에 요절하였다. 여섯째 딸과 일곱째 딸은 요절하였다. 겨우 1남 4녀만 성장하였다. 네 딸은 시집가서 모두 조신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소문났으니, 사람들이 선비(先妣)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先妣朴氏。貫珍原。葦南熙中后。曾祖萬烈。祖貴玄。考致聖。妣仁川李氏泰邦女。以純祖己卯。生于長興葛嶺里。卽朴氏世居地也。未省事。失所恃。纔省事。失所怙。鞠於從女兄。兄卽適於文氏而早寡者也。性嚴正。其寡居。刀劒不離於寢側。門鎖藩障。極其戒勅。雖親族在比隣。非有故未嘗往之。其衛身之嚴如此。見我先妣之早孤。甚加哀矜。撫養敎誨。務盡其心。先妣年十七于歸。時先考僑寓德洞。生理甚疎。先妣以沖齡當室。凡百幹理。無異老成。行未幾年。家力稍舒。事君子甚得婦道。無一事擅爲。無一言違異。遇前室忌日。備盡誠意。撫前室所生如己出。及適人。雖婿郞外孫。待之無間。族戚隣里。恩意周徧。皆得其心。衣服儉而潔。器用質而完。有所敝缺。隨手補治。一衣一襪。十年不易。而至於周恤匱乏。務從寬厚。無所係吝。嘗恨親家無嗣。令親族一人主祀守墓。而恩愛眷恤。終始彌篤。從子婦梁氏早寡無育。甚加哀憐。分給田地。資其生計。丙辰冬。自德洞移品坪。一村婦女。莫不號泣如失親戚。追至十里。至日中而不能別。其得人心如此。敎子孫勸學甚至。而欲其親近賢淑。至於遊戱喧雜之地。切戒禁之。明村黃處士觀水齋朴先生。皆小子幼時師長也。時節問候。勉令無闕。當俗節遊閑之日。輒曰。迨此暇矣。何不往謁某丈也。蓋恐其從村兒作俗節戲也。小子十四歲。自科場還。買針線之具獻之。先妣曰。行橐有餘。當買書冊。針線之物。何關於汝。責之不已。中年以來。累度搬移。頻經昏嫁。家力至於不贍。而處之裕如。未嘗對人言窘艱之狀。別蓄若干物。每當小子赴擧之日及從師友遠遊之行。則輒助其方而勸送之。俾無拘費難行之患。至若家用告罄。若不聞焉。紙墨告乏。輒副其急。有客從小子至。必喜形于色。戒廚人善其供具。戒小子使之挽留。其發也。具行贐使送之。鄕里有問弔處。必具賻儀。命行之曰。人事不可廢也。小子自他處還則曰。何其遲也。自師門還則曰。何其速也。小子或親家務。必代執其勞。而命之書塾曰。何其外馳之過也。夫人男子三人。所存惟不肖。其慈愛可謂至矣。憂食性之短。而魚肉之羞。日以饋之憂血氣之虛。而酒醪之物。日以飮之。至於臨祭而將致齊焉。則絶不與之。小子有欲食之意。痛責之。當月朔參謁之時而或忘其爲朔日。則輒告之曰。今日非朔朝耶。若與客倂坐而難於告之。則持送道袍以喩之。小子初有二息。曰尙黙尙敦。欲令一兒業儒一兒業農。先妣曰。貧富有命。無關儒農。設令農而富。不若儒而貧。無識而美衣美食。不若有識而惡衣惡食。丙子歲饑。諸孫以漁採爲業。先妣憂其廢學。稍有暇隙。輒招而使讀之曰。如此者其不愈於全廢乎。平日好聽讀書聲。或在病中及晨昏無事之時。使兒輩侍而讀之。輒欣然聽之。嘗戒小子曰。勿以貧窶貳其志。惟讀書勅躬。無失爲佳子孫。是吾願也。又曰。罪不可作。作罪則人雖不知。天可逃乎。汝其勉之。丁丑六月四日卒。八月二十七日己酉。葬于章峴。後十年丙戌春。移葬于古墨谷巽坐原。嗚乎。先妣天姿溫仁。閫儀貞靜。口不出鄙俗之言。身不接奢麗之物。雖困苦之極而不見有怨懟之色。雖衰老之甚而不見有怠弛之氣。從容和順。婦德備摯。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嗚乎。不肖無狀。在膝下三十餘年。曾未有一分志物之養。今且白首頹齡。而迄未有成。不孝之罪。萬死莫追。惟是一縷溘然。行在不遠。而何以見慈顔於地下乎。俯仰天地。至痛罔極。擧三男七女。一女適光山李秉誠。一男翰龍。有至行。八歲而夭。二男卽不肖也。二女適公州李光茂。三女適淸道金章錫。四女夭。五女適豐山洪承命。三男祥林。五歲而夭。六女七女夭。成長僅一男四女。四女適人。皆以謹勤聞。人以爲有先妣之風焉。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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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백파 김 상사 행장 白波金上舍行狀 내 일찍이 시골의 부로(父老)를 모시는 자리에서 우리 고을 근고의 인물의 성대함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풍의(風儀)가 수려하고 언론이 뛰어나서 활달하여 범상하지 않은 기상이 있는 분으로는 애당초 백파(白波) 김공(金公)을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휘는 재탁(再鐸), 자는 맹경(孟警), 호는 백파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휘 추(錘)의 후손이다. 고려 말에 휘 이안(履安)이란 분이 계셨는데, 판삼사(判三司)로 절개를 세웠으니, 공에게는 15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성옥(聲玉), 호는 온면당(穩眠堂)이고, 조부의 휘는 시춘(始春), 선고(先考)의 휘는 응복(應福), 선비(先妣)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빈(彬)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10월 7일에 도장리(道莊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장난치고 노는 것이 여느 아이와 매우 달랐다. 조금 성장하여 재종제(再從弟) 앙탁(仰鐸)과 함께 스승을 찾아가 배워서 뜻을 넓히고 학업을 넓게 펼쳤다. 이 때문에 지향하는 뜻이 넓고 명성이 자자하여 당대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교제하기를 원했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워 양지(養志)와 양체(養體)7)가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간호할 적에 외진 바닷가나 험한 산중에서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첩첩산중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의 범상하지 않는 행실은 이러한 유가 많았다. 젊었을 때 남애(南厓) 정공(鄭公)에게 수업을 받았기에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어서도 매양 그 묘소에 성묘하였고, 그 아비 잃은 자식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잊지 않았다. 종족과 이웃 마을에 대해서는 애정이 두루 미쳤고 오래된 벗에 대해서는 안부를 묻는 것이 줄어들지 않았다. 향리와 학교의 사이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가 경영하고 계획한 것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온면당(穩眠堂)을 중건하여 돌아가신 분을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8)을 부쳤고, 집 곁 시냇가 바위 위에 백파정(白波亭)을 지어서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모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마음껏 노니는 장소로 삼았다. 중년 이후로 산천 구경을 좋아하였다. 동복 한 명을 대동하고 나귀 한 마리를 타고 여장(旅裝)은 단출하게 하여, 가다가 기이하고 빼어난 산과 수석이 맑게 펼쳐진 전경을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거닐며 시를 읊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숙하기도 하였다. 평생 은거하였지만 명망과 실제가 더욱 융성하였으므로 여리(閭里)에서는 그 효성에 보답하고 주군(州郡)에서는 그 재주를 천거하기까지 하여 그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해년(1827, 순조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오년(1846, 헌종12) 5월 7일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71세이다. 조치(鳥峙) 방축동(防築洞)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동완(東完)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신중하며 온유하여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처신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익(漢益), 한창(漢昌)이고, 딸은 임처상(林處相), 이인휘(李仁徽), 고시상(高時相)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지금 쇠미한 말세에 인물이 보잘것없는데 이렇게 평지에서 돌출하듯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뜻이 우연이 아닌 듯하지만 끝내 또한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공은 병오년(1846)에 돌아가시고 나는 을사년(1845, 헌종11)에 태어났다. 이는 삼성(參星)이 막 빛을 발하자 상수(商宿)가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아서,9) 30리 한 고을에 이렇게 어질고 덕이 있는 장로가 있었지만 세상을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남아 있는 전장(田莊)을 바라봄에 직접 뵙지 못한 한스러움만 간절해진다. 공의 현손(玄孫) 홍기(弘基)가 그의 유집 2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교감해 주기를 부탁하고,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아, 후생이 공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공의 명성을 향리의 부로들에게 들었다. 지금은 향리 부로들의 얼굴과 함께 모두 보지 못하고, 오직 이 한 책을 후생이 노년이 된 날에 얻었으니, 책을 어루만지며 서글퍼서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하겠다. 이에 교정하는 일을 마치고 돌려주고 또 이어서 이처럼 행장을 서술한다. 余嘗侍鄕父老。聞吾鄕近古人物之盛。而其風儀秀爽。言論英暢。有磊落不常之氣。則未始不以白波金公爲第一焉。公諱再鐸。字孟警。號白波。新羅敬順王子諱錘之後。麗末有諱履安。以判三司立節於公爲十五世也。曾祖諱聲玉。號穩眠堂。祖諱始春。考諱應福。妣全州李氏彬女。以正宗丙申十月七日。生公于道莊里。幼而嬉遊。絶異凡兒。稍長與再從弟仰鐸。負笈從師。開廣其志。展拓其業。是以抱負博洽。聲聞藹蔚。一世名碩。無不願交。天性孝順。養志養體。無不備至。其侍疾也。尋醫求藥於窮海艱險之中。其遭故也。築室侍墓於深山萬疊之中。其偉行多此類。少時受業於南厓鄭公。至老白首。每省其墓。恤其孤。眷眷不忘。於宗族隣里。恩愛周洽。故舊朋友。存訊不替。出以風議於鄕邦學校之間。其經紀條畫。多有可觀焉。重建穩眠堂以寓羹墻之慕。結白波亭於宅畔溪石上。爲延賓會友文酒遊衍之所。中年以後。好遊山水間。以一僮一驢。裝服蕭然。行遇林巒奇絶。水石淸曠。輒徘徊吟哦。或移時焉。經宿焉。平生隱淪。望實益隆。以至閭里報其孝。州郡擧其才。莫不欲其爲世用也。丁亥中進士。丙午五月七日終。享年七十一。葬鳥峙防築洞酉坐原。配全州李氏東完女。淑愼柔嘉。甚得婦道。二男三女。漢益漢昌。女林處相李仁徽高時相。孫以下不能記。嗚乎。當今衰叔。人物藐然。鍾此出夷不常之器。天意似不偶然。而終亦沈淹何耶。公歸於丙午。而余生於乙巳。參星纔出。商宿遽沒。使同鄕一舍。有此賢德長老。而未見倂世之樂。瞻言遺庄只切罔及之恨。公玄孫弘基。奉其遺集二卷。屬余校勘。且請狀德之文。嗟惟晩生。旣失公之面。而得公之聲於鄕父老。今則倂與鄕父老之面而皆失之矣。惟此一書。得於晩生垂老之日。撫卷悲愴。有不忍終辭。玆以了還校役。又從而狀述之如是云爾。 양지(養志)와 양체(養體) 양지는 어버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양체는 물질적으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해 드리는 것으로,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간절하게 흠모하는 정성 죽은 사람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이나 그를 앙모(仰慕)하여 앉아서는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을 때면 요 임금을 국[羹]에서 보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삼성(參星)이……같아서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있고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있어서 각각 뜨고 지는 시각이 다른 관계로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다. 《春秋左氏傳 昭公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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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죽와 홍공 행장 竹窩洪公行狀 공의 휘는 이수(履洙), 자는 자원(子源), 호는 죽와(竹窩)이다. 홍씨(洪氏)는 관향이 풍산(豐山)이니, 직학사(直學士)인 휘 지경(之慶)을 비조(鼻祖)로 삼는다. 조선에 들어와 휘 귀(龜)인 분이 계셨는데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고조의 휘는 애(埃)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덕우(德遇)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경고(景古), 호는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이 있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천규(天奎), 호는 오은(鰲隱)이고, 선비(先妣)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통정대부 인호(仁毫)의 따님이다. 명릉(明陵) 을유년(1705, 숙종31)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어버이를 섬길 적에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10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종기를 앓아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공이 주야로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치료할 방법을 상고하여 마침내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다. 오은공(鰲隱公)이 일찍이 부증(浮症)을 앓아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기를 "두꺼비 고기를 먹는 것이 가장 효험이 있다."라고 하였다. 추운 날씨에 눈이 쌓여 있는 때라 사방으로 구했지만 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앞에 있었다. 이것을 잡아서 돌아가 올리니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외출하였는데 갑자기 가슴이 뛰고 몸에 땀이 나기에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오은공이 위독한 병을 앓아 실낱같은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마침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어 결국 회생하게 하였으니, 남다른 행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몸가짐은 단정하고 정중하였고 말은 간략하면서 어눌하였다. 비록 한가할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비록 위급한 상황이라도 다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득실(得失), 이해(利害), 시비(是非), 훼예(毁譽)에 이르러서는 귀를 막아 듣지 못한 듯이 하고, 담담하게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날마다 두 아우 및 종반들과 함께 한 방에서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면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고 수양하였는데 신망(信望)이 사방으로 퍼져 생도들이 문하에 운집하였고 붕우들이 그를 관아에 천거하였다. 임신년(1752, 영조28) 가을에 오은공의 상을 당하여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몸이 여위었고 장사 지낸 뒤에 시묘살이하느라 수척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 해 6월 14일에 여차(廬次)에서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아, 선인 군자(善人君子)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며 은거하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하지만 남에게 미치는 이로움과 은택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향리에서 가법이 있다고 이름난 사족(士族) 가운데 홍씨(洪氏)가 그 하나인데, 후세 자손 중에 또 성대하게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많았으니 이 어찌 유래가 없는 것이겠는가. 당대에 쓰이지 못한 것은 족히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된다.배위(配位)는 함풍 이씨(咸豐李氏) 두평(斗平)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언신(彦信)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있었고, 모두 2남을 두었으니, 영환(永桓)과 영표(永杓)이다. 계배(繼配)는 진주 정씨(晉州鄭氏) 통덕랑(通德郞) 최(最)의 따님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여 규문(閨門)이 화목하였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막(永漠)과 영극(永極)이고, 딸은 정혁(鄭爀)에게 시집갔다. 공의 묘소는 주(州)의 해하리(海鰕里) 병좌(丙坐) 언덕에 있다. 이씨는 합장하였고, 정씨는 묘혈 아래 사좌(巳坐)에 있다. 6대손 승환(承渙)이 그의 숙조(叔祖) 영택(永宅)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남길 글을 청하였다.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履洙。字子源。號竹窩。洪氏系出豐山。以直學諱之慶爲鼻祖。入我朝有諱龜。中郞將。高祖諱埃。中司馬兩試。贈掌樂院正。曾祖諱德遇。贈戶曹參判。祖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刑曹參判。考諱天奎。號鰲隱。妣仁川李氏通政仁毫女。明陵乙酉。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至性。事親無遠。十歲。母夫人患癰幾危。公晝夜號泣。百方稽效。遂吮之得愈。鰲隱公嘗患浮症彌留。醫云。用蟾肉最妙。時天寒雪積。四求不得。忽有一大蟾當前。持之以歸。病果得差。一日出遊。忽心驚體汗。卽歸家。鰲隱公方患劇疾。奄奄垂絶。乃血指注口。竟見回甦。其出人之行。多此類。儀狀端重。言語簡訥。雖燕閒之時。未嘗有怠慢之容。雖顚沛之時。未嘗有急遽之色。至於得失利害是非毁譽。充然如不聞也。泊然如不見也。日與二弟及羣從。同處一室。讀書硏理。晦養積久。孚信旁達。生徒坌集于門。朋友薦報于官。壬申秋。遭鰲隱公喪。哀毁過甚。旣葬廬墓。以羸瘠成疾。翌年六月十四日。卒于廬次。得年四十九。嗚乎。善人君子之於世也。窮居潛藏若無所爲。而其利澤之及人。有不可誣者也。吾鄕士族名有家法者。洪氏居其一焉。而後嗣子孫。又彬彬多志學之人。此豈無所自耶。其不得試於一時者。不足爲輕重也。配咸豐李氏斗平女。府院君彦信后。有婦德。擧二男。曰永桓永杓。系配晉州鄭氏通德郞最女。貞靜端淑。閨門雍睦。擧二男一女。曰永漠永極。鄭爀。公墓州之海鰕里負丙之原。李氏祔左。鄭氏祔下巳坐。六代孫承渙。以其叔祖永宅所撰家狀。來請所以立言垂後者。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據家狀而爲之說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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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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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농은 오공 행장 農隱吳公行狀 내가 약관의 나이에 집을 떠나 상서(庠序)에서 공부할 적에 우리 고을의 인물을 보니 원로와 저명한 선비가 많았는데 유독 농은(農隱) 오공(吳公)이 풍의(風儀)와 언론이 탁월하고 곧았으므로 그를 마음에 가장 흠모하였다. 이윽고 공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 수현(壽玹)이 공이 남긴 사적(事跡)을 수록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아,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30년 전 일이 되었다. 향당(鄕黨)에서는 풍의와 언론이 더 이상 당시처럼 인물의 성대함을 보지 못했고 젊어서 배종하던 나 같은 자도 이미 늙었다. 만약 다시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명망과 자취가 더욱 사라질 것이니 어떻게 훗날의 역사가가 사실에 의거하여 훌륭함을 드러내는 바탕으로 삼겠는가. 이것이 내가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공의 휘는 지상(志祥), 자는 성심(聖心)으로, 고려(高麗) 때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을 비조로 삼는다. 문양공의 후손 가운데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진 현필(賢弼)이란 분이 있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었고, 휘 방한(邦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하였으니,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진례(震禮), 증조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휘 세관(世觀), 조부는 휘 시유(始有)이다. 선고(先考)는 휘 석윤(錫胤),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련(必煉)의 따님으로, 지족당(知足堂) 박성인(朴成仁)의 6대손이다. 순묘(純廟) 병인년(1806, 순조6) 12월 6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어서 12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지성으로 애통해하여 한편으로 곡을 하고 한편으로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기절하였다. 대인(大人)께서 건강을 손상할까 염려하여 매양 위로하고 억제하여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니, 대인이 출타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마다 슬픈 마음을 다 드러내었다. 계비(繼妣) 장씨(張氏)는 성품이 매우 엄격하여 거의 용납하지 못하였지만 공은 곡진하게 받들고 순종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부지런히 봉양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왔다. 장씨가 끝내 기뻐하자 마치 자기가 기쁜 듯이 여겼다. 부친 병간호를 할 적에 너무나도 근심하여 대변을 맛보고 차도가 있는지를 점검하였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내어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소생시켰다. 부친상을 당해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수척하였으며, 정성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아우 치상(致祥)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상생활할 적에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재산과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22세 때 함안 윤씨(咸安尹氏) 범수(範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에 추증된 기견(起畎)의 후손이다. 효성스럽고 유순하며 온화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다. 공은 평소 몸가짐에 절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며 자제를 가르치고 동복(僮僕)을 부릴 적에 모두 분명하게 조리가 있었다. 이웃 마을이나 향당, 상서(庠序)나 학교의 일에 대해 명백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고 폐단을 없애 한 고을의 풍기(風紀)를 세운 데는 그가 노력하여 힘쓴 공이 적지 않았다. 타고난 품성이 기개가 있고 곧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도 감히 의롭지 않다고 보지 않았다. 만년에 금오산(金鰲山)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석정(石亭)에서 가족을 데리고 가서 머물렀는데, 유연히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뜻을 두어 농은(農隱)이라고 자호하였다. 갑술년(1874, 고종11)10) 3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단양(丹陽)의 덕현(德峴)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4년 뒤에 부인 윤씨(尹氏)가 졸하자 공의 묘소 오른쪽 산등성이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수현(壽玹)·수빈(壽彬)이고, 딸은 홍우명(洪祐明)·문석홍(文錫弘)에게 시집갔다. 수현의 아들은 정섭(定燮)·창섭(昌燮)이고, 딸은 이인채(李仁采)·박두현(朴斗玹)에게 시집갔다. 수빈의 아들은 남섭(南燮)이다. 아, 공의 재주와 기개가 어찌 한 고을의 인물이 될 따름이겠는가. 향당에 매양 이러한 인물이 있다면 후생이 어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으며, 향리의 풍속이 어찌 아름답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는가. 공의 행실에 대해서 비록 대략적으로도 보지 못했지만 기업(基業)을 개창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게 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어서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게 할 자는 또한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余在弱冠出遊庠序中。見吾鄕人物。多耆舊名碩。而惟農隱吳公。風儀言論。俊偉宏直。最有欽艶於心。旣而公沒。而其遺胤壽玹。收錄遺事以請狀德之文。嗚乎。叵耐歲月。已屬三十年前事。鄕黨之間。風儀言論。非復當時人物之盛。而陪從少年如義林者。亦已老矣。若復少加日月。則聲望風蹟。益就泯然。而何以爲後史氏据實揄光之地乎。此余所以不敢牢辭者也。公諱志祥。字聖心。以麗朝文襄公諱延寵爲鼻祖。文襄之後。有賢弼封寶城君。子孫因貫焉。至我朝。有諱益孫。以學行除靖陵參奉。諱邦翰。壬亂殉節晉州。皆顯祖也。高祖贈戶曹參議諱震札。曾祖贈戶曹參判諱世觀。祖諱始有。考諱錫胤。妣咸陽朴氏必煉女。知足堂成仁六世孫。以純廟丙寅十二月六日。生公于七松里。幼有至行。年十二遭內艱。至誠哀痛。哭踊頓絶。大人慮有傷生。每慰抑之。不敢徑情。俟大人出。輒盡哀。繼妣張氏。性甚嚴。幾不見容。公委曲承順。毫忽無違。服勤就養。出於至誠。張氏竟底豫如己出。侍親癠。極其致憂。嘗糞以試差劇。血指以甦旣絶。及遭故。過於哀毁。情文備至。與弟致祥友愛甚篤。居處出入。未始相離。財産什物。有無共之。二十二聘咸安尹氏範壽女。贈領相起畎后。孝順柔嘉。其得婦道。公平居持身有度。治家有法。奉祭祀接賓朋敎子弟御僮僕。皆燦然有條。至於隣里鄕黨庠序學校之地。所以裁決疑晦刷滌弊瘼而立一方之風紀者。其力爲不少矣。天性儻直。未嘗以私干人。人亦不敢以非義見之。晩愛金鰲山水之勝。自石亭挈家往住之。悠然有終老之意。自號農隱。甲午三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葬于丹陽之德峴甲坐原。後四年夫人尹氏卒。葬于公墓右岡艮坐原生二子二女。壽玹壽彬。女洪祐明文錫弘。壽玹子定燮昌燮。女李仁采朴斗玹。壽彬子南燮。嗚乎公之才局氣槪。豈惟爲一鄕人物而已。鄕黨之間。每有此等人物。則後生何患無賴。鄕俗何患不美哉。公之行。雖不槪見。而其爲創業可繼者若是。則繼而述之使之。有聞於後世者。想亦不無其人焉。 갑오년 원문은 '甲午'인데, 《松沙集》 「농은오공묘지명(農隱吳公墓誌銘)」에 근거하여 '午'를 '戌'로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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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원 봉사 농은 민공 행장 訓錬院奉事農隱閔公行狀 공의 휘는 대승(大昇), 자는 승여(昇汝), 호는 농은(農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묵헌(黙軒) 선생 휘 지(漬)의 후손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저명한 선비들이 즐비하였다. 휘가 회삼(懷參)이란 분에 이르러서는 호가 의암(義庵)인데, 세조(世祖)가 양위를 받자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친족이라는 이유로 대정현(大靜縣)으로 좌천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나서는 능주(綾州)에 은둔하였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희점(希點)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충익(忠翼)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선고(先考)의 휘는 영우(英雨)로, 병절 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선비(先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세화(世華)의 따님이다. 선묘(宣廟) 계유년(1573, 선조6)에 주(州)의 서정리(西亭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문사(文詞)가 특출하고 무예까지 겸비하였다. 호방하고 강개(慷慨)하였으며, 기절(氣節)과 담략(膽略)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이에 붓을 던지고 무과로 출신하여 관직을 옮겨 훈련원 봉사(訓錬院奉事)에 올랐다. 어느 날 상이 문관과 무관에게 재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품계를 건너뛰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권귀(權貴)의 눈 밖에 나서 관직에서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서는 외부 일에 관심을 끊고 대문을 닫고 휘장을 드리운 채 옛날에 익힌 학문을 복습하고 정리하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북방의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리자, 우산(牛山) 안 선생 방준(安先生邦俊)과 의병을 일으켰다. 옥과 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浡), 찰방(察訪) 이기발(李起浡), 순창 군수(淳昌郡守) 최온(崔蘊),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집(柳楫), 전 찰방 김선(金旋) 등이 일시에 호응하여 기한 내에 모였다. 광주(光州)의 경계에 이르러 전군(前軍)이 지체하면서 나아가지 않자, 공이 큰소리로 매우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군주가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 대의(大義)이다. 나라가 이처럼 위급한데 도리어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온 군중이 숙연하였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당하게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차마 머리를 풀고 좌임(左袵)하는 오랑캐가 되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하여 '원컨대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곧장 누란왕을 베어 죽였으면 한다.[願將腰下劍 直爲斬樓蘭]'라는 시구11)를 읊조리며 끊임없이 혀를 차며 애석해하였다. 향리로 돌아와 대문을 닫고서는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작은 정자를 짓고 망미정(望美亭)이라고 편액하고 당시의 명사와 더불어 산수에서 노닐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지냈다. 현종(顯宗) 갑진년(1664, 현종5) 10월 29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주(州)의 세청면(世淸面) 개선동(改善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주준(柱俊)의 따님이다. 장자는 성(誠), 차자는 간(諫)으로, 병자년(1636, 인조14)에 아버지를 모시고 의병에 나아갔다. 측실(側室)의 두 아들은 의(誼), 계(誡)이고, 딸은 이두연(李斗延)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행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마음이 잘 맞는 때를 만났지만 산관(散官)의 반열에서 배회하여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았기에 산림으로 물러나 종적을 감추고 은거한 채 평소 포부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 하였으니, 식자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오직 의병을 일으킨 일로 말하면 비록 중도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늠름한 충의, 엄정하고 분명한 기율, 신속하게 호응하여 모인 것에서 평소 수양의 깊이와 신망의 중함을 알 수 있어 먼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니, 저 한때의 부침을 가지고 어찌 경중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9세손 재호(在鎬)가 가장(家狀)을 보여 주고 인하여 덕을 형용하는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내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 추앙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公諱大昇。字昇汝。號農隱。驪興府院君黙軒先生諱漬后也。世襲簪纓。名碩磊落。至諱懷參。號義庵。當光廟受禪。以定順王后親屬。謫守大靜縣。及放還也。遯于綾州。子孫因居焉。於公爲高祖也。曾祖諱希點。忠順衛。祖諱忠翼。忠順衛。考諱英雨。秉節校尉。妣水原白氏世華女。以宣廟癸酉。生公于州之西亭里。幼有至行。及長文詞出夷。武藝兼至。倜儻慷慨。有氣節瞻略。屢中鄕解。見屈禮部。於是投筆。出身遷至訓錬院奉事。一日上試藝文武官。公居第一。特命超資折衝。旣而爲權貴所忤。退歸田里。掃却外事。杜門下帷。以溫理舊業。獎進後學。爲畢生計。及丙子朔警。與牛山安先生邦俊。倡起義旅。玉果縣監李興浡察訪李起浡淳昌郡守崔蘊前翰林梁曼容前察訪柳楫前察訪金旋等。一時響應。刻期赴會。至光州界。前軍遲留不進。公揚言大責曰。主辱臣死。此是大義。國之危急如此。而乃玩愒時日乎。一軍肅然。至礪山。聞和成。北向痛哭。且曰忍令吾堂堂禮義之邦。淪爲被髮左袵耶。因誦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之句。咄咄不已。還鄕杜門。不復出仕。築一小亭。扁其額曰望美。與一時名士。遊從於山水文酒之間顯宗甲辰十月二十九日終。葬州之世淸面改善洞午坐原。夫人淸州韓氏柱俊女。長子誠次子諫。丙子侍親赴義。側室二子誼誡。女李斗延。孫曾以下不能悉記。嗚乎。公以孝友之行。文武之才。當明良會遇之際。而低廻散班。位不稱德。退休林樊。斂跡潛光。使平日所抱。不少槪見。爲識者之缺望大矣。惟其擧義一事。雖未免中途左次。而其於忠義之凜烈。紀律之嚴明。應聚之敏速。可見素養之深。宿望之重。而百世之下。足令人起敬。彼一時之低昂。何足爲輕重也。九世孫在鎬示以家狀。因請狀德之文。余以鄕里後生。追仰有素。不敢辭。 원컨대……시구 이백(李白)의 〈새하곡(塞下曲)〉에 나오는 구절이다. 《李太白集 卷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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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낙청헌 처사 위공 행장 樂淸軒處士魏公行狀 공의 성은 위(魏), 휘는 형권(衡權), 자는 중지(重之), 호는 낙청헌(樂淸軒)이다. 시조의 휘는 경(鏡)으로,12) 당(唐)나라 학사(學士)로 동방에 와서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태종(太宗)을 섬겼고, 관등은 대아찬(大阿飱)이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회주(懷州)는 바로 지금의 장흥(長興)이다. 휘 창주(菖珠)에 이르러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시중(侍中)이었다. 대대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으니, 벌열(閥閱) 가문의 찬란함은 조야(朝野)의 전적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휘 충(种)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따라 보위에 오를 때 추대한 공이 있었다. 4대를 전하여 휘 유형(由亨)에 이르러 승문원 습독(承文院 習讀)을 지냈는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제현과 벗하여 잘 지내면서 기록한 창수록(唱酬錄)이 있다. 또 3대를 전하여 휘 덕화(德和)에 이르러서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고,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13)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4대를 전하여 휘 명덕(命德)에 이르러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윤봉구(尹鳳九))을 사사하여 문학과 품행으로 사림의 추중을 받았는데 호는 잉여옹(剩餘翁)으로 유고가 세상에 전해지니, 바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사갑(師甲), 호는 부계(富溪)로, 학문은 가업을 이었으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의 휘는 수택(守澤), 호는 묵와(黙窩)로, 족숙(族叔)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선생이 매우 칭찬하여 중히 여겼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조부의 휘는 영진(榮震), 호는 송탄(松灘)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익조(益祚), 호는 성성재(惺惺齋)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으며 사우(士友)와 교유하였다. 몸소 실천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선비(先妣)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재규(在奎)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며 규중의 법도에 빠뜨림이 없었다. 순묘(純廟) 기유년(1819, 순조19) 9월 16일에 공을 부(府)의 북쪽 단촌(丹村)의 사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장대하고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보통사람과는 매우 달랐으니, 할아버지 송탄공(松灘公)이 늘 애지중지하여 "우리 집안 앞날의 희망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학습 과정을 감독하지 않아도 일과를 매우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사의(辭義)를 토론하고 문장을 지을 적에는 뜻이 통창하고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하여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양친을 섬길 적에는 정성과 힘을 다해 봉양하였고, 화락한 안색과 조심스럽고 경건한 위의를 잠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었다. 18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여 쇠약해진 나머지 병이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여러 차례 위로하고 타일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김에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입맛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물건을 올림에 좌우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부족하게 한 적이 없었다. 신축년(1841, 헌종7)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자 아버지를 대신한 아픔을 더욱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리(情理)와 예법(禮法)은 일일이 예문과 같이 하였다. 모부인께서 병이 들어 잉어를 드시고자 하였다. 공이 강에 가서 울부짖으니 갑자기 한 자 남짓한 잉어 한 마리가 그물에 뛰어들었다. 잡아서 올렸는데 병이 마침내 나았으니, 사람들이 왕상(王祥)의 효성14)에 견주었다. 병인년(1866, 고종3)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여 예를 행하였는데 노쇠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15)와 야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공경히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하는 것을 초하루와 보름 및 봄가을로 하여 때마다 폐하지 않았다. 기휘(忌諱)하는 때를 만나면 치재(致齋)하고 산재(散齋)하는 것16)을 반드시 삼가고 제사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반드시 직접 마련하였으며, 감개하고 숙연하여 마치 살아 계시듯이 대하는 정성17)을 다 바쳤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봉양을 마치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하여 《맹자(孟子)》의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라는 구절18)을 읽을 때면 반복해 읊조리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같은 군(郡)에 사는 남파(南坡) 이공(李公)을 스승으로 섬겨 고인(古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19)에 대해 듣고 부지런히 따라 하면서 오직 부족할까 두려워하였고, 간혹 여가가 있으면 공령(功令 과거(科擧))에 필요한 시문(詩文))과 근체(近體)의 문장을 공부하여 부모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 때문에 문사(文辭)가 풍부하여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니,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두 동생을 사랑으로 보살펴 은의(恩誼)가 융성하였으므로 집 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동생들을 위해 스승을 가려 부지런히 배우도록 하여 큰 유학자가 되게 하였다. 중년 이후에 자식들에게 "내가 전일에 과거 공부하는 잘못을 면치 못한 것은 다만 구구하게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는 뜻이었다. 부모님을 여읜 지금에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 때문에 다시 풍부(馮婦)처럼 팔뚝을 걷어붙이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는 짓20)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고 문을 닫은 채 한가로이 마음을 기르며 《논어(論語)》, 《맹자(孟子)》, 성리서(性理書) 등을 가져다 침잠하여 반복하여 읽고 이전에 연구하지 못한 것에 더욱 매진하였다. 매양 자제와 생도들에게 강의할 적에 그들을 위해서 요지를 말하되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게 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병인년(1866, 고종3)에 해구(海寇)의 변고21)가 일어나 강화도(江華島)가 함락되자 원근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공은 같은 군(郡) 사인(士人) 아무아무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규모가 대략 정해졌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악한 무리들이 매우 치성하니,22) 공이 매양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학(邪學)에 물들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사학을 하는 자가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지도 못하고 정도를 지키는 자가 꼭 죽는다고 보장하지도 못하는 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친족과 벗들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공이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책을 읽고 선을 밝히며 자신의 몸을 닦고 행실을 검속하여 광명정대한 곳에 그 몸을 우뚝이 세우는 것이 사람의 본분에 제일가는 사업이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속여서 구하여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내가 취하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본래 평탄한 길이 있다. 자신을 단속하고 학문에 힘쓰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사람들과 화합하는 것이 모두 복을 받는 길이다. 더구나 제사를 지내면 복이 내린다는 말이 《시경(詩經)》에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님에랴. 부처에게 시주하고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무당들에게 빌고 부적을 부치는 따위는 복을 받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만 있으니, 그것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망치고 가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너희들은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30)에 본 고을 사또 이후(李侯)가 공을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샘이 흐르고 바위가 있는 고향의 승경지에 거처를 정한 다음 초가집을 짓고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고, 사방 벽에 도서(圖書)를 가득 채우고 소요하면서 유유자적하였으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에 대해 누가 말세의 완인(完人)23)이라고 하지 않겠으며, 남복(南服 남쪽 지방)의 일민(逸民)24)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금상 기해년(1899, 고종36) 12월 28일에 생을 마감하자, 부음을 듣고 사람들이 서로 조문하고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3월 무오에 본군(本郡) 용계면(龍溪面) 연하동(烟霞洞)의 충렬공(忠烈公) 묘소 아래 기슭의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사(府使) 김후 택규(金侯宅圭)가 전의(奠儀)를 보냈고, 사방에서 와서 보았으며 여러 고을에서 다 모였다. 배위(配位)는 청풍 김씨(淸風金氏) 인성(麟性)의 따님으로, 모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계홍(啓宖)이고, 딸은 김방현(金邦鉉)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해미 곽씨(海美郭氏)로, 1남을 두었으니, 계상(啓尙)이다. 장방(長旁)은 1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규(性奎)이고, 딸은 조의환(曺毅煥)·신권성(愼權晟)·윤용주(尹瑢柱)·김보인(金輔仁)에게 시집갔다. 차방(次旁)은 1남을 두었으니, 수규(壽奎)이다. 성규는 아들 석룡(錫龍)을 두었다. 아, 내가 공의 두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니, 교제한 인연으로 공을 찾아뵙고 절하였다. 공은 풍채가 중후하고 고인의 풍모가 있었으며 말은 간중(簡重)하였으니, 한번 보면 덕이 있는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행실과 평생 이력은 충신(忠信)과 성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데다가 학문으로 성취하였으며 사우(師友)의 도움을 받아 연마하고 펼쳐 나갔다. 다스림을 낼 적에는 광채가 있었으니, 아마 부자(夫子)가 이른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라는 것25)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의 수준이 점점 떨어져 위선이 판을 쳐서 선배들의 질박하고 성실한 기풍을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봄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공의 두 아들은 노성하여 연세와 덕망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두 손자는 사우(師友)와 교유하여 나이가 젊고 학문에 힘쓰니, 공의 평소 가르침이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기에 당대에 보답 받지 못한 덕은 필시 앞으로 크게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계홍(啓宖)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울면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을 아는 것이 그대만 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행장을 지어서 영원히 후대에 남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잔약하고 용렬한 내가 그 청을 받아들일 자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으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公姓魏。諱衡權。字重之。號樂淸軒。始祖諱鏡。以唐學士東來。仕新羅事太宗。官大阿飱。封懷州君。子孫仍貫焉。懷州卽今之長興也。至諱菖珠。仕麗官侍中。世有聞人。閥閱煒燁。朝野載籍。班班可考。至諱种。在我太祖應順之際。有推戴功。四傳至諱由亨。官承文習讀。棄官歸鄕。與南秋江諸賢相友善。有唱酬錄。又三傳至諱德和。彦陽縣監。以扈聖錄勳。贈戶曹判書。又四傳至諱命德。師事屛溪尹先生。文學行義。爲士林所推重。號剩餘翁。有遺稿行于世。卽公之五世祖也。高祖諱師甲。號富溪。學襲家庭。隱德不仕。曾祖諱守澤。號黙窩。受學于族叔存齋先生之門。先生稱詡甚重。有遺集。祖諱榮震。號松灘。孝友著聞。考諱益祚。號惺惺齋。承襲家學。遊從士友。踐履行治。爲南服儒林之望。妣漆原尹氏在奎女。貞靜柔嘉。閫儀無闕。以純廟己卯九月十六日。生公于府北丹村之第。體相岐嶷。聲音弘亮。穎悟開爽。逈異凡常。王考松灘公每撫愛之曰。吾家前頭之望在此兒。及其就傅。不待程督而課日甚勤。至於討辭解義。行文綴句。通暢贍麗。無異老成。事二親。致誠致力。怡愉之色。洞屬之儀。不以須臾而有間。不以絲毫而有闕。十八丁外艱。哀毁過禮。羸瘠成疾。王考婁慰諭之。俾免傷生。事王考及慈幃。尤盡誠敬。適口之味。適身之物。左右竭蹶。未嘗見乏。辛丑丁王考憂。代父之痛。益不自勝。凡百情文。一日如禮。母夫人病。嘗欲鯉魚。公臨江號泣。忽有一鯉長尺許。躍八于網。持以供之。病乃得愈。人擬之於王祥之孝。丙寅遭內艱。執喪行禮。不以衰老而自恕。繭梅之容。柴骨之象。可以感動傍人。祗謁廟宇。展省墳墓。朔望春秋。隨時不廢。遇忌諱之辰。致散必謹。供具必親。慨然肅然以盡如在之誠。常恨早違所怙。未終其養。讀孟子終身慕之語。未嘗不三復沈咏。聲淚俱發。早師同郡南坡李公。得聞古人爲己之學。遵循娓娓惟恐不足。而間以餘日。及於功令近體之文。以爲父母門戶之望。是以詞藻藹蔚。累捷鄕解。而見屈於禮部。物論惜之。撫愛二弟。恩誼隆洽。庭除之間。無有間言。爲之擇師勤學。至成巨儒。中年以後。謂諸子曰。吾於前日。不免爲場屋之累者。只是區區供悅之意。今風樹孤露。靡所逮及。何爲而復揚馮婦之臂乎。自後不赴公車。杜門養閑。取論孟性理等書。沈潛反復。益究前日之所未究。每講子弟及生徒。爲之說道要義。縷縷詳悉。聽者感服。丙寅海寇之變。沁都失守。遠近汹汹。公與同郡士人某某謀起義旅。規模略定。聞亂靖而罷。甲午匪類大熾。公每戒人曰。與其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況邪者未必得生。正者未必得死耶。是以族戚知舊皆得免焉。公嘗戒子孫曰。讀書明善。修身飭行。卓然立其身於光明正大之地。此是人生本分第一事業。若其枉求非分。沾沾自足。吾所不取也。汝等戒之。又曰。人之獲福。自有坦道。謹身力學。孝於親忠於上和於衆。莫非福也。況祭祀降福之說。見於詩者非一乎。若其供佛飯僧巫覡符章之類。不惟無福而有禍。其爲敗世敎亂家法爲何如哉。汝等切宜識之。歲癸巳。本倅李侯以公孝行。剡薦于朝。除童蒙敎官。所居有邱林泉石之勝。結茅開逕。蒔花裁竹。四壁圖書。婆娑倘佯。其偉韻遐躅。孰不謂叔世之完人。南服之逸民乎。今上己亥十二月二十八日考終。聞者相弔曰。哲人萎矣。翌年三月戊午。葬于本郡龍溪面烟霞洞忠烈公墓下麓艮坐原。府倅金侯宅圭爲致奠儀。四方來觀。數郡畢集。配淸風金氏麟性女。擧一男一女。男啓宖。女適金邦鉉。繼配海美郭氏。擧一男。曰啓尙。長旁一男四女。男性奎女適曺毅煥愼權晟尹瑢柱金輔仁。次旁一男壽奎。性奎男錫龍。嗚乎。余與公二子相友。夤緣過從。拜公於床下。公體厚貌古。言辭簡重。一見可知爲有德君子。若其平生行治終始。履歷不出乎忠信誠慤之外。而濟之以學文師友之助。磨礱展拓。出治光采。庶幾乎夫子所謂從先進者矣。世級浸下。虛僞日滋。而先輩質慤之風。不可以復覩。俯仰今古。寧不慨然。公二子耆老年德。聲聞偉然。二孫遊從師友。年富力學。公平生之敎。可謂不墜於家。而不食之報必將有大來之日矣啓宖持家狀。泣而示余曰。知先君。孰有如吾子。願爲之狀行以垂不朽於來許也。余以殘劣。極知其非所承膺。而慕仰有素。豈忍辭諸。 휘는 경(鏡)으로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시조는 위경(魏鏡)으로 당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전해진다. 위경의 동래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신라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는 설과,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하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위경은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상서시중(尙書侍中)에 이르렀으며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회주(장흥)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신라 말에 대각관시중(大覺官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하여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어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간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1604년(선조37)에 세 등급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1등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2명, 2등은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 31명, 충근정량호성 공신 86명이다. 왕상(王祥)의 효성 진(晉)나라 때의 효자 왕상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繼母)의 학대를 받으며 살았으나 늘 효도를 지극히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날 계모가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직접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려 하자,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晉書 王祥列傳》 파리하고 실의에 빠진 용모 《예기》 〈옥조(玉藻)〉에 "거상할 적의 모습은 파리하고 실의해서, 낯빛의 모양은 근심스러우며, 보는 모양은 놀라서 다급하고 분명치 못하며, 말하는 모양은 낮고 미미하다.[喪容纍纍, 色容顚顚, 視容瞿瞿梅梅, 言容繭繭.]"라고 하였다. 기휘(忌諱)하는……것 《예기》 〈제의(祭義)〉에 "안에서 치재하고 밖에서 산재하여, 재계하는 날에 조상이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며, 그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뜻과 생각을 생각하며,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기던 것을 생각하여, 재계한 지 3일에 마침내 그 재계한 조상을 보게 된다.[祭義曰:致齊於內, 散齊於外, 齊之日,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志意, 思其所樂, 思其所嗜, 齊三日, 乃見其所爲齊者.]"라고 하였다.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 《중용》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성대하게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고 하였다. 맹자(孟子)에……구절 《맹자》〈만장 상(萬章上)〉에 "대효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하나니, 50세까지 부모를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다.[大孝終身慕父母, 五十而慕者, 予於大舜見之矣.]"라고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풍부(馮婦)처럼……짓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진(晉)나라의 풍부라는 사람이 호랑이를 잘 때려잡았는데 뒤에 마음을 바꾸어 선비가 되었다. 어느 날 들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호랑이를 산모퉁이에 몰아 놓고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가 풍부가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맞이하니, 풍부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풍부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孟子 盡心下》 병인년 해구(海寇)의 변고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프랑스의 로즈(Roze) 제독은 순양전함(巡洋戰艦) 귀리에르(Guerriere)를 비롯하여 함대 7척과 6백 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14일 강화부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교전 끝에 점령하였다. 갑오년에……치성하니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봉기를 이른다. 완인(完人)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화나 당쟁 같은 변란 속에서도 자신의 절조와 목숨을 모두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가리킨다.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 활동한 유안세(劉安世)가 그런 인물이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났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일민(逸民) 뛰어난 학문과 덕행을 소유하고서도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부자(夫子)가……것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이르기를 "예악을 행함에 있어 선배들은 촌사람처럼 순박하였고 후배들은 군자처럼 문채가 나는데, 내가 만약 행한다면 나는 선배들의 태도를 따르겠다.[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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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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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조 정랑 죽림 황공 행장 吏曹正郞竹林黃公行狀 공의 휘는 기한(起漢)인데 후에 처원(處源)으로 개명하였다가 또 기원(基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응조(應肇), 호는 죽림(竹林), 장수(長水) 사람이다. 고(故) 상국(相國) 방촌(厖村) 휘 희(喜)의 후손이다. 선생은 열성공(烈成公) 휘 수신(守身)을 낳았고, 열성공은 장원군(長原君) 휘 신(愼)을, 장원군은 대사간(大司諫) 휘 성창(誠昌)을, 대사간은 현령(縣令) 휘 칙(則)을, 현령은 학생 휘 사민(師閔)을, 학생은 판서 휘 눌(訥)을, 판서는 참의(參議) 휘 천일(千鎰)을, 참의는 참판(參判) 휘 용립(龍立)을, 참판은 참판 휘 종익(宗翼)을 낳았으며, 참판은 충의위(忠義衛) 휘 하서(河瑞)를 낳았으니 하서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자중(宇中), 조부의 휘 상곤(象坤)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유진(有鎭)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선비(先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이흥(以興)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190년, 우리 순조(純祖) 정축년(1817, 순조17)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벽신동(闢新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기질이 특이하고 남달리 영특하였으므로 그를 본 사람들은 공이 큰일을 해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6세에 통정공(通政公)26)이 가족을 데리고 능주(綾州) 연화동(蓮花洞)으로 이사하였고, 10세에 마을 학당에서 배웠다. 어느 날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이웃의 닭을 훔치기를 도모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자기 집의 송아지를 끌고 와 잡게 하였다. 같이 배우는 자 가운데 가난하여 서책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혹 학업을 그만두기까지 하니, 공이 몇 묘(畝)의 전답을 팔아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등 다소의 책을 구입하여 재실(齋室)에 두고서 보게 하였다. 그의 기량(氣量)과 풍도는 이러한 유가 많았다. 18세에 유씨(柳氏) 춘수(春樹)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헌종(憲宗) 5년 기해년(1839, 헌종5)에 정시(廷試)에 합격하였지만 공은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학업을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가가 있으면 더욱 열심히 독서하였다. 경자년(1840, 헌종6)27)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842, 헌종8)에 효릉 별검(孝陵別檢)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던 날 동산과 연못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수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조경묘 영(肇慶廟令)으로 옮겼다. 무신년(1848, 헌종14)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지만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도의 예(禮)를 지극히 하였다. 상기가 끝나자 노부인(老夫人)이 계시다는 이유로 벼슬하고자 하지 않았다. 무오년(1858, 철종9)에 강씨 부인의 병이 깊어짐을 근심하여 단지(斷指)의 정성으로 소생하게 하였다. 경신년(1860, 철종11)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어머니의 명으로 억지로 관직에 나아갔다. 임술년(1862, 철종13)에 철종대왕(哲宗大王)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친히 문신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또 응제(應製)에 삼정책(三政策)을 올려 기용(器用)과 복식은 토산품을 사용하고 외국에서 생산된 물건은 사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고,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864, 고종1)에 봉사(封事)를 올려 조경전(肇慶殿), 경기전(慶基殿)의 의물(儀物)을 개수하기를 청하였다. 이해 여름에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이 있었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866)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江華島)를 함락하여 도성의 민심이 흉흉하여 대성(臺省)이 비니, 어떤 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자, 공이 말하기를 "지방의 산관(散官)이라도 오히려 분문(奔問)하는 의리28)가 있다. 더구나 도성에서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변고를 만났는데 자기 한 몸만 빠져나가는 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스스로 요동하지 않으니, 당시 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정묘년(186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하는 일에 나이 많은 것을 핑계로 스스로를 관대하게 하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정언(正言) 및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맡았다. 을해년(1875)에 외직으로 나가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다. 무인년(1878)에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879) 3월 15일에 병으로 관아에서 졸하였다. 그때 아들 작(稓)이 관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4월 17일에 보성군(寶城郡) 도촌면(道村面) 용호동(龍湖洞) 마을 뒤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장흥(長興) 천포면(泉浦面) 화동(花洞) 연봉(鳶峯) 아래 호은공(湖隱公) 묘소의 좌측 자좌(子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방촌 상국(厖村相國)으로부터 대대로 청렴결백한 것으로 서로 계승하였다. 내가 관직 생활한 이후로 일찍이 물건 하나에 스스로 얽매여 우리 방촌 선조가 남기신 교훈을 저버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가업을 꾸리기를 권유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업(産業)을 자손에게 남겨주면 어떻게 자손들이 청렴결백하기를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일을 부탁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관직에 있을 때 남에게 청탁을 받은 적이 없는데, 지금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 도리어 남의 청탁을 받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성품은 또 관간(寬簡)하여 평소 옆에서 어린아이가 울더라도 조금도 꾸짖거나 금하지 않았다. 하루는 서찰을 써서 책상 위에 두었는데, 아이가 그 위에 물을 엎질렀지만 조금도 화내는 기색이 없었고, 또 시속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종족에게 화목하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군주에게는 충성을 다해 섬기고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니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칭찬이 자자하였다. 다만 출사한 지 40여 년 동안 하급 관료에 머물러 있었기에 명망과 지위가 드러나지 않고 자신의 뜻이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유감스럽겠는가. 公諱起漢。後改處源。又改基源。字應肇。號竹林長水人故相國厖村先生諱喜之后。先生生烈成公諱守身。烈成生長原君諱愼。長原生大司諫諱誠昌。大司諫生縣令諱則。縣令生學生諱師閔。學生生判書諱訥。判書生參議諱千鎰。參議生參判諱龍立。參判生參判諱宗翼。參判生忠義衛諱河瑞。卽公之高祖也。曾祖諱宇中。祖諱象坤。考諱有鎭。副護軍。妣晉州姜氏以興女。以崇禎一百九十年。我純祖丁丑。生公于長興泉浦面闢新洞。幼有異質。穎悟絶人。見者知其爲遠器。六歲。通政公挈移于綾州蓮花洞。十歲出就里塾。一日同學者謀攘隣雞。公曰何必攘人之物。遂牽其家犢。令屠之。同學之貧者。多艱於書冊。或至廢業公賣數畝田。具四子六經多少書。貯之齋室以資之。其氣量風義。多此類。十八歲聘夫人柳氏春樹女。憲宗五年己亥。中廷試。公以少年登科。學業未就爲憂。公私之暇。讀書愈苦。庚午除承文院正字。壬寅除孝陵別檢。到莅之日。見園池湮廢。修而新之。乙巳除成均館典籍。旋移肇慶廟令。戊申拜司憲府監察。以親老歸養。壬子丁外艱。哀禮備至。服闋以老夫人在堂。不肯從仕。戊午憂姜夫人疾病。血指得甦。庚申除司諫院正言。以親命黽勉就職。壬戌哲宗大王臨春臺。親試文臣。公居魁。又應製上三政策。請器用服飾。用土物。勿用異物。拜監察。旋爲禮曹正郞。移宣傳官。拜吏曹正郞。甲子上封事。請修肇慶慶基兩殿儀物。夏出莅慈仁縣監。有治績。乙丑拜司憲府持平。丙寅洋夷陷江都。都下恟恟。臺省爲空。或勸之歸鄕。公曰散官在外。尙有奔問之義。況在輦轂之下。遭此非常之變。而脫身自私者。豈臣子之道耶。終不自撓。時論多之。丁卯遭內艱。哀毁之節。不以耆艾自恕。服闋。拜禮曹佐郞。累遷正言及吏曹正郞。乙亥出爲黃山道察訪。戊寅拜開城府經歷。己卯三月十五日。病卒于官。時子稓輿櫬歸鄕。以四月十七日。葬于寶城郡道村面龍湖洞村后艮坐之原。後移葬于長興泉浦面花洞鳶峯之下。湖隱公墓左子坐之原。公嘗曰。吾家自厖村相國。世以淸白相承。吾自守官以來。未嘗以一物自累以負我厖村先祖貽謨云。或勸立産業。公笑曰以産業遺子孫。何如以淸白爲子孫計耶。在家時有人以事來囑。公曰。吾在官未嘗受人囑。今居私第而反爲人行囑耶。其人慚而退。性又寬簡。平居僮幼啼呼於側。略不呵禁。一日業札而置於席上。僮幼溺其上。小無怒色。又不爲時好所趨。嗚乎。公孝於父母。睦於宗族。信於朋友。事君忠莅民愛。所至皆有聲稱。但出身四十餘年。低廻下僚。名位不揚。已志不伸。其爲斯世之憾。爲何如哉。 통정공(通政公) 부호군을 지낸 부친 황유진(黃有鎭)의 품계가 통정대부이므로 이렇게 호칭한 듯하다. 경자년 원문은 '庚午'인데, 《승정원일기》 헌종 6년 7월 20일 괴원 분관(槐院分館) 기사에 근거하여 '午'를 '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분문(奔問)하는 의리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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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呈鄰里老 居隣無畏友。所業日空疎。幸逢三丈老。共討古今書。進菜羞情薄。傾壺惜酒虛。生來無一玩。倏忽二毛餘。十里烟霞洞。茅屋竹籬疏。氣鬱徒呼酒。時違欲廢書。有淚歌師表。無媒誦子虛。陪筵多好語。猶勝讀三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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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남헌 홍공 행장 鳳南軒洪公行狀 공의 휘는 채주(埰周), 자는 경좌(卿佐), 다른 휘는 종진(鍾鎭), 자는 응중(應仲), 호는 봉남(鳳南)이다. 홍씨(洪氏)의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고려(高麗)의 직학(直學) 휘 지경(之慶)의 후손이다. 침수정(枕漱亭) 휘 경고(景古)의 6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이수(履洙), 증조의 휘는 영한(永漢), 조부의 휘는 희우(羲禹), 선고(先考)의 휘는 수모(壽謨)이다. 선비(先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휘 대현(大鉉)의 따님이니, 칠졸재(七拙齋) 창우(昌禹)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오년(1834, 순조34) 8월 25일에 우봉리(牛峰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였고 2세 때 능히 말을 하였다. 6세에 이웃집 아이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가서 공부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지만 부형은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8세에 가숙(家塾)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다.'라는 구절29)에 이르러서 즉시 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말하기를 "저 어둡고 검은 것은 무슨 물건입니까?" 하자, 말하기를 "이것은 운기(雲氣)이다. 구름이 걷히면 하늘이 실로 가볍고 맑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리가 일취월장하여 문장을 지으매 매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5세 되던 무신년(1848, 헌종14)에 하동 정씨(河東鄭氏) 가문 원렬(元烈)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니,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후손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향당(鄕黨)의 여러 선생을 찾아뵙고 공손하게 제자의 예를 올렸다. 동년배의 사우(士友)로 말하면 남들에게 추앙을 받는 문학과 조행(操行)이 있는 사람이 모두 깊이 교제를 맺어 끓이지 않고 왕래하였다.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시험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와 정시(廷試)에 해마다 응시하였는데 합격 불합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성품이 명민(明敏)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또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진신 사대부(縉紳士大夫)들이 정사에 통하지 않는 점이 있고 일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은 옛일을 끌어다가 현재의 문제를 바로잡아 밝힘에 응답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향당(鄕黨)과 상서(庠序)에서 풍속의 기율을 돈독히 하고 장려하며, 사대부의 풍습을 가지런히 하고 바르게 한 것은 그의 힘이 또한 컸다. 경오년(1870, 고종7)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경진년(1880, 고종17)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생 과거에 응시한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던 뜻이었는지 모르겠거니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쇠약함과 병만 더욱 깊어졌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문을 닫고 세상 사람들을 사절하려는 마음을 먹고 산 한 기슭을 매입하여 침수정(枕漱亭)을 중건하여 남은 생애를 편안하게 의탁할 곳으로 삼았다. 때때로 친구나 마을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문장을 지으며 유유자적하였으니, 이러한 즐거움을 늦게 얻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정해년(1887, 고종24) 윤4월 10일에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마을 뒤 국수봉(菊秀峯)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자식이 없어 종자(從子) 우전(祐銓)을 후사로 삼았다. 우전의 아들은 승환(承渙), 승택(承澤), 승준(承浚)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매우 고상하였고, 풍도(風度)가 범상하지 않았으니, 많은 사람 속에 있으면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았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매우 사랑하고 공경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처자식을 대할 적에는 엄격하면서도 다정하였으며, 종족을 대할 적에는 온화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벗과 교제하고 향려(鄕閭)에 거처한 것으로 말하면 평탄하고 곧고 자애롭고 미더운 풍모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평상시 말하고 웃는 것을 삼가고 출입을 간소하게 하였다. 항간의 비루한 습속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향인에 대해서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학문하기를 권유한 것으로 말하면 간절하게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의 문장은 온후하고 화평하여 화려하거나 기이하며 괴벽하거나 난삽한 뜻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스스로 탄복하였으니,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돌아가신 다음 해 겨울에 승환(承渙)이 유문(遺文)을 가지고 벽산서실(碧山書室)로 나를 찾아와 덕을 형용할 수 있는 문장을 지어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이는 당일에 종유하던 분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보잘것없는 내가 실로 남의 집안에서 영원히 전할 글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대해 감히 손을 대지 못하지만 깊은 교분으로 인하여 끝까지 사양하기 어려웠다. 보고 들은 것을 수습하여 후일 훌륭한 글을 지을 사람의 붓을 기다린다. 公諱埰周。字卿佐。一諱鍾鎭。字應仲。號鳳南。洪氏系豐山。高麗直學諱之慶後。枕漱亭諱景古六世孫。高祖諱履洙曾祖諱永漢。祖諱羲禹。考諱壽謨。妣順天朴氏諱大鉉女。七拙齋昌禹後。以純廟甲午八月二十五日。生公于牛峰里第。體質歧嶷二歲能言語。六歲見隣兒讀書。累請就學。父兄以其幼不許。八歲出就家塾授讀。至輕淸在上。卽開門仰天曰。彼昏黑者何物。曰此是雲氣也。若雲捲則天固輕淸也。自是文理日就。綴文點句。每驚傍人。十五歲戊申委禽于河東鄭氏之門元烈女。錦城君盛后。旣成人。出見鄕黨諸先生。恭執弟子之禮。至於年輩士友。有文學操履爲人推服者。無不深相結納。往復不絶。以親命學擧子業。鄕解廷試。逐年應擧。而不以得失經心。性明敏。長於料事。又邃禮學。縉紳士大夫。政有所不通。事有所可疑。多就咨訪。公援古訂今。酬答如流。至於鄕黨庠序之間。所以敦獎風紀。齊整士習者。其力亦多矣。歲庚午遭外艱。庚辰遭內艱。自念平生赴擧。未見所以供悅之意。而風樹遽驚。衰病轉深。於是有杜門謝世之志。買山一麓。重建枕漱亭以爲餘日寄傲之所。時與親朋鄕子弟。或行酒或講文。悠然自適。恨其得此之晩。丁亥閏四月十日。以宿症終于正寢。葬里後菊秀峯壬坐原。公無育。以從子祐銓爲後。祐銓子承渙承澤承浚。公天稟甚高。風儀不羣。在稠人中。如雲鶴之於野雞。事父母。極其愛敬。處兄弟。極其友悌。御妻孥。嚴而有恩。待宗族。和而有節。至於交朋友處鄕閭。易直子諒之風。感動於人。平居愼言笑簡出入。里巷俚俗。不經於目。鄕人毁譽。不出於口。至於導人爲善。勉人以學。懇懇不遺餘力。其文章溫厚和平。無華麗奇巧隱僻艱澀之意。而見者怡然自服。可知其爲有德之言也。公沒翌年冬。承渙抱遺文。訪予于碧山書室。請狀德之丈曰。此非當日從遊人之責乎。嗚乎。予以無狀。固不敢犯手於人家不朽之託。而契誼甚厚。有難牢讓。收拾見聞以俟後日立言之筆。 가볍고……구절 《동문선(東文選)》 「청향정기(淸香亭記)」에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질 때 가볍고 맑은 것이 위에 있게 되었는데, 인물이 생겨날 때 이 기운을 온전히 타고난 자는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된다.[天地之判也, 輕淸者在上, 而人物之生, 禀是氣以全者, 爲聖爲賢.]"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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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 처사 이공 행장 芝南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지호(贄鎬),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이다. 관향은 광산(光山)이니, 고려(高麗) 때 명신인 상서 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가 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일영(日映)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호는 옥봉(玉峯), 관직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이분이 휘 선제(先齊)를 낳았으니, 호는 필문(蓽門), 관직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군(慶昌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휘 조원(調元)을 낳았으니,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다. 은일(隱逸)로 여러 번 징벽(徵辟)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호선(好善)을 낳았으니, 호는 면재(勉齋),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렬(烈)을 낳았으니, 호는 졸암(拙庵), 관직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이분들은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언규(彦規)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영근(永根)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광우(光佑)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면휘(勉徽)로, 호는 묵재(黙齋)이며, 선비(先妣)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이긍(履兢)의 따님이니 참판에 추증된 세규(世規)의 현손(玄孫)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11월 22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필봉(筆峯)이 용으로 변하여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므로 어릴 때 자를 '필룡(筆龍)'이라고 하였다. 공은 자태와 용모가 의젓하였다. 조금 지각이 있을 적에 묵재공(黙齋公)의 곁에 있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돈을 보내자, 묵재공이 말하기를 "사지금(四知金)30)도 받지 않는데 더구나 오지금(五知金)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이 곁에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공에게 일마다 규범을 따르도록 가르쳤고, 일찍이 고식지계(姑息之計)를 낸 적이 없었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적에 백씨, 중씨 형과 함께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학업을 익혔으니,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지극하였다. 성동(成童)의 나이에 오서(五書)31)와 오경(五經)을 돌아가면서 섭렵하여 문리(文理)와 문장이 현저하게 일취월장하였다. 어느 해에 구씨(具氏) 가문과 혼인하였으니, 바로 첨지중추부사 상윤(相允)의 따님이다. 관례를 행한 뒤에 같은 고을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박 선생을 배알하고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모친상과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한 나머지 거의 생명을 해칠 지경이었는데도 전후의 의식 절차는 한결같이 예경(禮經)대로 하였다. 맏형수 송씨(宋氏)가 병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공이 부인 구씨와 더불어 다른 일은 제쳐두고 한마음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여 여러 달 동안 낮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맏형수가 세상을 뜨고 백형(伯兄)이 또 고질을 앓으니, 공이 또 맏형수에게 한 것처럼 6개월 동안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는 절차와 연상(練祥)의 의절에 정성을 다하고 예문을 갖추니, 이웃 마을에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부모나 장인 장모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아가 된 어린 조카를 매우 애처로운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 자식처럼 기르고 가르쳤다. 중년에 개연히 탄식하기를 "내가 시문(時文)에 인생을 그르쳤으니 비록 이전의 잘못은 뒤미처 고치지는 못하지만 아마 만년의 공부는 조금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연구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태극도(太極圖)」, 「경재잠(敬齋箴)」, 구용구사(九容九思)32)를 좌우(座右)에 붙여 두고 늘 스스로 경계로 삼았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적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에 따라 응대하고 진퇴(進退)하는 절차와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 착실하게 이끌어주고 신칙하여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늘 생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입지(立志)는 학문을 하는 근본이다. 근본이 이미 확립되면 궁격(窮格)33)과 존양(存養)34)은 교차하여 힘을 쏟아야지 한쪽을 폐해선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敬)은 성시성종(成始成終)35)이고 철상철하(徹上徹下)이다.'36)라는 말은 성인이 제시하신 덕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이 말한 "심(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主宰)이니, 만약 맑게 한다면 허명하고 깨끗한 부고(府庫)가 되고, 맑게 하지 못한다면 더럽고 탁한 주머니가 된다."라는 말을 늘 암송하였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가 말한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생존하는 이치가 그만 끊어지게 된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는 심학(心學)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손이 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의 규범을 정하여 돈독하고 화목한 도리를 강론하였고, 마을 규약을 만들어 서로 구휼하는 의리를 밝혔다. 학문계(學問契)를 만들어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익히는 비용을 마련하고, 흥학계(興學契)를 만들어 동네 생도들을 강학에 모으는 계책으로 삼았다. 원전(原錢)은 양사재(養士齋)에 두어서 온 고을 장보(章甫)들이 향음례(鄕飮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는 경비로 삼게 하였다. 수시로 향방(鄕坊)과 상숙(庠塾)에 모여서 개강(開講)하거나 예를 익혔으므로 제기가 질서 정연하고 의관이 단정하니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경인년(1890, 고종27) 봄에 선비들을 모아 《정암선생문집(靜庵先生文集)》을 중간(重刊)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신묘년(1891)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예부에서 주관하는 대과(大科)에는 낙방하였다. 임진년(1892) 3월 24일에 졸하였다. 신산(莘山) 뒤 기슭 술좌(戌坐) 언덕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모두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다.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시집갔다. 공은 용모가 단아하였고 절조가 굳세고 우뚝하여 뺏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 언변이 있었다. 담론(談論)을 잘하고 풍자하는 데 장점이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며, 선을 즐거워하고 의리를 좋아하는 것은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 포부와 경륜은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거처하는 바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를테면 여리(閭里)와 향방(鄕坊) 같은 곳에서 고심하고 주선하여 유풍(儒風)과 예속(禮俗)을 성대하게 일으켰으니,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 것이 적지 않았다. 나는 함께 종유한 사람으로 매양 간절하게 추억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그 자손이 영원히 남길 글을 지어 달라는 청에 대해서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더하고 뺀다. 公姓李。諱贄鎬。字東賢。號芝南。系出光山。以麗朝名臣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入我朝。有諱日映。號玉峯。副提學。生諱先齊。號蓽門。大提學。封慶昌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生諱好善。號勉齋。大司成生諱烈。號拙庵。同副承旨皆其顯祖也。高祖彦規贈戶曹參議。曾祖永根。贈兵曹參判。祖光佑。贈掌樂院正。考勉徽。號黙齋。妣咸陽朴氏履兢女。贈參判世規玄孫。憲宗丙申十一月二十二日。生公于綾之莘山里第。夢筆峯化爲龍。入懷而有娠。故小字曰筆龍。姿相岐嶷。稍有知。在黙齋公側。適有人餽以錢物。黙齋公曰。四知金猶爲不受。況五知乎。蓋指公之在側也。是以敎公事事循蹈規矩。未嘗爲姑息計。及就傅上學。與伯仲二兄同案連業。友悌甚至。至成童。五書五經。循環涉獵。文理詞華。斐然日就。某歲委禽于具氏之門。卽僉樞相允女也。旣冠。造謁同鄕無邪齋朴先生。因受周易。遭內外艱。哀毁過甚。幾於傷生。前後儀節。一遵禮經。伯嫂宋氏有疾彌留。公與具氏舍置他事。專以迎合調治爲務。晝不就席。夜不就枕者數月。及歿。伯兄又得貞疾。公至誠救護亦如之。至六朔而竟不起。喪葬之節。練祥之儀。備盡情文。隣里感歎。以爲雖在父母舅姑。無以過之。撫其幼孤。極加哀矜。養育敎誨。無間已出。中歲慨然歎曰。吾爲時文所誤。縱不能追補前闕。庶可以少收晩業。遂將心經性理諸書。沈潛硏究。手不釋卷。太極圖敬齋箴九容九思。貼之座側。常自鏡攷。敎授蒙率。一依小學。應對進退。威儀容止。循循提勅。的有課程。常戒生徒曰。立志是爲學之本。本旣立則窮格存養。交致其力。不可偏廢。又曰。敬是成始成終徹上徹下語。聖賢所示人德之方。無有切於此。每誦淸心堂所謂心者一身之主宰。苟能淸之。則爲虛明瑩澈之府。不能淸之。則爲汚陋穢濁之囊。履素齋所謂動靜語黙之間。毫釐有差則生理便息之語曰。此是心學切要之語。凡爲學者所當佩服不忘。況其爲子孫者乎。定門規以講敦睦之道。立洞約以明周恤之義。設學問契爲村中子弟肄業之資作興學契爲坊裏生徒講聚之計。置原錢養士齋爲一鄕章甫飮射之需。隨時會聚於鄕坊庠塾之間。或開講或習禮。樽俎之秩秩。衣冠之濟濟。觀者感悅。庚寅春。會多士。重刊靜庵先生文集。布行于世。辛卯中鄕解。赴禮部見屈。壬辰三月二十四日卒。權葬於莘山後麓戌坐原。擧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公體相端粹。志節勁特。有不可奪之操。有不可屈之辯。善於談論。長於風諭。好學慕賢。出於至誠。樂善嗜義。如恐不及。抱負經綸。未得見試於時。而隨其所居所接。如閭里鄕坊之地。苦心周章。使儒風禮俗。蔚然興行。其爲世敎之補不少矣。余以從遊餘生。每切追惟之悵。今於其遺胤不朽之托。不忍牢辭。謹据家狀爲之增刪云。 사지금(四知金) 후한(後漢) 때의 학자 양진(楊震)과 관련한 고사이다. 양진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받았던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金) 10근을 바치자, 양진이 "그대의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故人知君, 君不知故人, 何也?]" 하니, 왕밀이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고 금을 물리쳤다. 《後漢書 楊震列傳》 오서(五書) 사서(四書)인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와 《소학(小學)》을 이른다. 구용구사(九容九思) 구사(九思)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할 때는 충성되기를 생각하고,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묻기를 생각하고,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고서는 의리에 맞는지를 생각하라.〔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論語 季氏》 구용(九容)은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處身)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이다. 《禮記 玉藻》 궁격(窮格) 궁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이고, 격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반성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존양(存養)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고 하였다. 성시성종(成始成終) 주자(朱子)가 "경은 성학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敬者,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경(敬)을 통해 학문을 시작하고 경을 통해 학문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철상철하(徹上徹下) 상하를 모두 통한다는 말이다. 《논어》〈자로(子路)〉에 "거처할 때에 공손히 하며, 일을 집행할 때에 공경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 충성스럽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비록 이적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라고 하였는데 그 집주에 "정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를 모두 통하는 말씀이니 성인은 애당초 두 말씀이 없는 것이다.[程子曰, 此是徹上徹下語, 聖人初無二語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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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至錦城。見李魯榮而相分。【錦城倅】 相見如曾識。臨行惜晩逢。春風應帶夢。幾夜度千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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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寧金雅。訪余下沙。因請別韻。卽許之。 昔上蓬莱頂。滿山摠白雲。誰知眞面目。今日始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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惜別 石屛尋舊約。搴菊復看梅。雲襲三更枕。泉分一注盃。金篦從此別。碨磊向誰開。仙客吾何擬。淸塵夢百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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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견【규원】에게 답함 答金文見【奎源】 이보다 앞서 인편이 출발하였는데 모두 화급(火急)하여 단지 한 폭의 편지만 써서 여러 형이 돌아가면서 보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소략하기는 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뜻밖에 여러 형의 편지를 받았는데 각각 수백언(數百言)이나 되었습니다. 펼쳐 본 뒤 부지런함과 태만함이 서로 현격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에 대한 칭찬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어찌 아우에게 그런 면이 있겠습니까. 한마디 말로 백대(百代)를 넘어 서로 감동하는 자가 있건만 하물며 한 시대를 함께 하면서 두 차례나 편지를 주고받은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아우가 어찌 다시 훈계를 할 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자연히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춘 대가가 있을 것입니다. 등잔을 밝히고 새벽을 잇는다는 것은 전한 사람의 망녕된 말입니다. 예전에 익힌 학업은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지식은 이어지지 않고 그저 오래도록 세월만 허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양(涵養) 운운하신 것은 온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대체로 공부(功夫)는 동(動)과 정(靜)을 통합하여 말하는 것이지 적연부동(寂然不動) 한쪽만 가리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부에는 본래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때, 궁리 격물(窮理格物)의 때, 성찰(省察)의 때가 있어 적연부동만으로 이 마음의 이치를 밝힐 수 없습니다. 또 적연부동에만 의지하면서 응접(應接)이 저절로 적절해지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아마도 이보새(伊蒲塞)의 기미와 서로 멀지 않을 것16)16) 이보새(伊蒲塞)의……것:불교의 학설에 가깝게 된다는 말이다. 이보새는 범어 upāsaka의 음역으로, 오계(五戒)를 받은 재가 남자 불교 신도를 말한다. 우바새(優婆塞)라고도 하며 근사남(近事男), 근선남(近善男), 청신남(淸信男), 청신사(淸信士) 등으로 의역된다.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함양은 본래 학문의 본령입니다. 그러나 또한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분을 부라려서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실심(實心)으로 실천하여 날이 쌓이고 달이 거듭된 다음에야 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前此便發。擧皆火急。只擧一幅書。爲僉兄輪照計。雖涉草草。而其於力不及何哉。料外得僉兄書。各具數百言。披玩以還。甚愧勤慢之相懸也。吹噓過實。弟豈有是耶。以片言單辭。而有曠百世相感者。況竝一世而有再度往復耶。更加藥石。弟豈其人乎。天下自有一副大方可以當之者。焚油繼晷。傳之者妄也。舊業不記。新知無繼。只是悠悠玩愒而已。涵養云云。恐未穩。大抵功夫。是統動靜說。非但指寂然不動一邊說。且功夫固有存養時。有窮格時。有省察時。不可專以寂然不動。而明此心之理也。又不可專靠寂然不動。而欲應接之自得其宜也。若如此說。則與伊蒲塞氣味。恐不相遠。豈不可懼。涵養固爲學問之本領。然亦非撑眉努眼所可辦。必讀書窮理。實心踐履。日積月累而後。可以見功。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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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574)에 차운하다 次歸去來辭 무릇 간 곳이 있은 뒤에야 돌아갈 곳이 있는 법이니, 바로 도공(陶公)575)과 같은 경우이다. 나의 경우에는 애당초 간 곳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는가. 다만 귀숙(歸宿), 귀취(歸趣), 귀결(歸潔)의 취지로 이 글을 지었으니, 보는 사람들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경진년(1940) 6월 모일.돌아가자 歸去來兮인세에 살기 어려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人間難居胡不歸이미 하늘의 운수가 이와 같으니 旣天運之如此어찌 상심하여 홀로 슬퍼하기만 하겠는가 奚怊悵而獨悲이 몸이 말세 세상에 태어나니 身叔季之末먼 옛날의 일을 따르리라 마음먹는다오 生心古昔之遠追드넓은 천지에도 용납되지 않으니 廣天地之不容어찌 우리 도가 끝내 잘못된 것이겠는가 豈吾道之終非원자의 거친 밥을 달게 여기고576) 甘原子之糠食중씨의 해진 옷을 알맞게 여기며577) 適仲氏之弊衣구복의 하찮음을 믿고 諒口腹之賤小도의의 정미함을 본다오 見道義之精微마침내 영대를 바라보니 乃瞻靈臺천군이 밖으로 내달리지 않는구나578) 天君不奔형체는 그림자를 벗하고 形自友影발은 문밖을 나가지 않도다 足不出門잃은들 어찌 잃은 적이 있으랴 亡何嘗亡보존하면 참으로 보존된다네579) 存乃眞存배부름은 고기 밥상을 기다리지 않고 飽不待梁肉취함은 술동이로써 하지 않는다오 醉不以酒樽혹 날이 저물도록 말을 잊고 或竟晷而忘言느닷없이 얼굴 펴고 웃기도 하도다 忽有時而解顔담박한 맛을 진미로 여기고 味至淡而爲珍만나는 상황마다 늘 편안하다오 隨所遇而常安깊은 산에 문을 닫아걸으니 閉我門兮深山온갖 세상일과 상관없게 되도다 總萬事而無關천리의 운행은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理運渺其難測때때로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핀다네 時俯察而仰觀옛날 장저와 걸닉580) 같은 은자들은 昔沮溺之隱者고원한 곳으로 초월해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超高遠而不還하물며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는 矧今日之末梢어찌 그 기풍을 따라 배회하지 않으리오 盍趨風而盤桓돌아가자 歸去來兮조그만 방은 노닐기 좋은 곳이로다 斗室足以邀遊책속의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卷中人以爲師가르침을 구하는 동몽에 자신을 부친다오 竊自附於蒙求안자의 즐거움을 사모하고581) 慕顔聖之其樂맹자의 근심한 것을 생각하네 懷孟氏之所憂서자의 높은 풍도를 우러르니 仰徐子之高風밭에서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고582) 食其力於田疇수부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니 服秀夫之卓識애주에서 《대학》을 강학했다오583) 講大學於崖舟진실로 이로써 일생을 마치고 固以此而終身죽어도 고향을 잊지 않으리라 死猶不忘首丘세상이 끝없이 변화함을 보건대 相世變之罔極어찌 그리 도도하게 흘러가는가 何滔滔之一流만약 입에 올린다면 말이 추잡해지니584) 所可道也甚醜차마 말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도다 不忍言兮且休그만두어라 己矣乎만년의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되리오 桑楡晩景能幾時하고자 해도 일삼을 게 없고 欲爲兮無所事가고자 해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欲往兮何所之어버이의 남긴 몸을 받들어 스스로 깨끗이 하니 奉親遺而自潔타고난 것 온전히 지킴을 기약할 수 있도다 全天賦之可期세상길의 험난함을 보지 않고 不見世路荊棘오직 밭을 김매는 데 마음을 다하리라 惟勤心田耘耔남들이 비웃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니 任他人口笑罵뱃속에 들어 있는 시서에 부끄럽지 않아라 無愧腹中詩書이것이 진제585)로 돌아가는 것이니 是爲歸來眞諦당장 행해야 할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目下當行復奚疑○후창(後滄) 김공(金公)이 돌아가신 이듬해에 그 문인(門人)이 세상에 공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공의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에 대해 짧은 말이나마 해 달라고 말하였다. 내가 공에게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삼가 생각건대, 공의 고명한 자질과 탁월한 뜻은 진실로 이미 절륜한데, 마침내 구산(臼山 전우(田愚)) 선생에게 질정하러 나아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뜻을 들어 체득하고 온축하며 각고로 노력하고 오랫동안 쌓아 나감으로써 식견과 마음에 보존한 것이 또다시 공정(公正)하고 정밀해졌다. 그러므로 발휘되어 문장을 이룬 것이 간결하고 명쾌하며 곡절 있고 통창하였다.그 성리설(性理說)의 미묘함을 분석하고 학문의 핵심을 밝힌 것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형용해서 모두 극치에 이르렀고, 의리와 이욕의 분계를 논한 것은 추상처럼 엄격하여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과 왕복하여 논변할 때에는 묻기를 좋아하는 도량과 아집을 버리는 용맹함이 말뜻에 넘쳐났다. 그러한데도 이치와 일이 혹 어긋날까 염려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도를 강구하여 대심중생(大心衆生)586)의 바람이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도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공의 체용(體用)이 이에 갖추어졌다.아아, 공은 시운이 험난한 때에 태어나 궁벽한 산과 끊어진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겨 의리를 지키며 자정(自靖)하는 것을 궁극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차 뜻과 사업은 펴지 못하겠지만 세교(世敎)의 책임은 사양할 수 없었으니, 입언(立言)하고 책을 저술하여 선(善)을 돕고 악(惡)을 억누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현의 도(道)와 생민의 강상(綱常)이 모두 다 실추되지 않게 하는 것도 공이 고심했던 바이다.그런데 사문(師門)의 무함하는 변고가 또 동문(同門) 안에서 일어나 인심을 헤아릴 수 없고 화기(禍機)가 번갈아 임박하였는데, 공은 만 길 절벽처럼 우뚝 서서 통렬하게 변론하고 준엄하게 논척함으로써 사도(師道)를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하였다. 이를 좋아하지 않은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공격하여 비록 공의 몸을 곤욕스럽게 하였지만, 끝내 가릴 수 없었던 것은 공이 주송(朱宋)587)의 대의를 본받은 점이다. 후세에 이 유집을 읽고 감회가 이는 자들은 그래도 공이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고 사문(師門)의 통서가 공을 의뢰하여 전해질 수 있었음을 알 것이다.을미년(1955) 동짓날에 안동(安東) 김노동(金魯東)이 쓰다. 有所往而後有所歸, 若陶公是也.余則初無所往, 安有所歸? 但以歸宿歸趣歸潔之意, 作此辭, 覽者諒之.庚辰六月日.歸去來兮, 人間難居胡不歸?旣天運之如此, 奚怊悵而獨悲?身叔季之末, 生心古昔之遠追.廣天地之不容, 豈吾道之終非?甘原子之糠食, 適仲氏之弊衣.諒口腹之賤小, 見道義之精微.乃瞻靈臺, 天君不奔.形自友影, 足不出門.亡何嘗亡? 存乃眞存.飽不待梁肉, 醉不以酒樽.或竟晷而忘言, 忽有時而解顔.味至淡而爲珍, 隨所遇而常安.閉我門兮深山, 總萬事而無關.理運渺其難測, 時俯察而仰觀.昔沮溺之隱者, 超高遠而不還.矧今日之末梢, 盍趨風而盤桓?歸去來兮, 斗室足以邀遊.卷中人以爲師, 竊自附於蒙求.慕顔聖之其樂, 懷孟氏之所憂.仰徐子之高風, 食其力於田疇.服秀夫之卓識, 講《大學》於崖舟.固以此而終身, 死猶不忘首丘.相世變之罔極, 何滔滔之一流?所可道也甚醜, 不忍言兮且休.己矣乎, 桑楡晩景能幾時?欲爲兮無所事, 欲往兮何所之?奉親遺而自潔, 全天賦之可期.不見世路荊棘, 惟勤心田耘耔.任他人口笑罵, 無愧腹中詩書.是爲歸來眞諦, 目下當行復奚疑?後滄金公旣沒之明年, 其門人刊行遺集于世, 謂余爲心期所在, 要有一言.余於公, 曾切高山之仰, 未窺其閫域, 則何能有所發揮之哉? 竊念公高明之姿、超卓之志, 固已絶倫, 迺就正臼山, 得聞天人性命之旨, 體認而蘊蓄, 刻苦而積累, 所見所存, 又復公正精密矣.故發而成文章者, 簡潔爽亮, 紆餘通暢.其剖析性理之微妙, 闡明學問之肯綮, 則毫分縷解, 形其難形, 皆極歸致至, 論義利界分, 則嚴如秋霜, 不可犯.然與人往復辨說, 好問之量、捨己之勇, 溢於意表, 猶恐理與事之或貳, 講究經濟, 大心衆生之願, 未嘗不切于燕居之中,則公之體用, 於斯備矣.嗚呼! 公生當陽九之運, 竄身於窮山斷壟之間, 以秉義自靖爲究竟.然其將志業之未伸, 而世敎之責, 有不得辭焉, 則立言著書, 扶抑尊攘, 靡極不至, 使聖賢之道、 生民之綱, 不盡墜地者, 亦公苦心之所在也.而師門之誣, 又起於同室之內, 人心叵測, 禍機交迫, 公則壁立萬仞, 痛辨嚴斥, 使師道由是而光焉.不說之徒, 譁而攻之, 雖折困公身, 而終不能掩者, 惟公師法朱宋之大義, 則後之讀斯集而興感者, 尙識其爲一世之大儒, 而師門之統緖賴而得傳也.乙未陽復節, 安東金魯東書. 귀거래사(歸去來辭) 남북조 시대 동진(東晉)의 은사이며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한 삶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공(陶公) 도연명(陶淵明)으로,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원자(原子)의……여기고 원자는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이다. 그가 노(魯)나라에서 가난하게 살 때 거친 밥으로 이틀에 한 번 끼니를 때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득(自得)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중씨(仲氏)의……여기며 중씨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이 중유(仲由)인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자로를 칭찬한 말이 있다. 마침내……않는구나 영대(靈臺)와 천군(天君)은 모두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에 "마음이 중앙의 텅 빈 곳에 있으면서 오관을 다스리니, 이를 일러 천군이라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라고 하였다. 잃은들……보존된다네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해진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말을 근거 삼아 말한 것이다. 《孟子 告子上》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은자(隱者)로, 세상일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고 숨어 살았는데, 《논어》 〈미자(微子)〉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연(顔淵)이 가난한 생활을 편안하게 여기고 도를 추구했던 즐거움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서자(徐子)의……살았고 서자는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를 가리킨다. 그는 진번(陳蕃)의 우대를 받아 천거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면서 공검의양(恭儉義讓)과 담박명지(淡泊明志)를 숭상하였다. 《後漢書 卷35 徐穉傳》 수부(秀夫)의……강학했다오 수부는 남송(南宋) 말엽의 충신 육수부(陸秀夫)를 가리킨다. 애주(崖舟)는 애산(崖山) 일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는 뜻이다. 남송 말엽에 송나라 조정은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애산으로 도망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항거하였다. 당시 재상인 육수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임금인 위왕(衛王)에게 《대학장구》를 강론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론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만약……추잡해지니 《시경》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만약 말할진댄 말이 추잡해지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진제(眞諦) 불교 용어로, 세속을 초월한 참된 진리를 의미한다. 대심중생(大心衆生) 불교 용어로, 보리살타(菩提薩陀) 또는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주송(朱宋)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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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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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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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권13 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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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재 김공 묘지명 栗齋金公墓誌銘 공의 휘는 종국(鍾國), 자는 성일(聖一), 호는 율재(栗齋)이다. 김씨(金氏)는 계보가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휘 충한(沖漢)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수은(樹隱)이다. 고려에서 벼슬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본조에 들어와 휘 영전(傳號)이란 분이 계시니, 호는 필암(蓽庵)이고, 참봉을 지냈다. 여러 대를 전해 내려와 휘 대기(大器)에 이르렀는데, 호는 경재(警齋)이고 진사를 지냈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에게 수학하였다. 이분이 휘 명철(命哲)을 낳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횡(鑅)을 낳았는데, 호가 태암(泰巖)이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운정(運鼎)인데, 감찰을 지냈고, 증조는 휘 희학(希學)인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 지형(之炯)인데, 장악원 정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 홍기(鴻基)인데, 호가 농와(聾窩)이다. 모친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정영(鄭爃)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축년(1817, 순조17) 2월 28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태어났다.공은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였으니, 곡학(曲學)하는 선비의 기습(氣習)이나 구차한 유학자의 기습이 없었다. 처음에 시서(詩書)를 공부하다가 활쏘기와 말타기를 함께 익혔는데, 버들잎을 꿰뚫을 정도로 기예가 정밀하고 심오하였으며 용병술(用兵術)이나 기율(紀律)에도 모두 통달하였다. 술을 마신 뒤에는 《시경》〈진풍(秦風) 무의(無衣)〉 몇 곡조를 읊조렸으며, 《사기(史記)》를 읽다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 바다를 밟고, 장량(張良)이 진(秦)나라를 격파하였다는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무릎을 치며 북받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중년 이후로는 변고를 겪은 것이 점점 깊어지고 세상일을 겪은 것이 점점 많아져, 젊었을 때의 풍도는 규각(圭角)42)을 드러내지 않고 편안하게 수렴하여 날로 노성(老成)한 법도를 이루었다. 또 무사재(無邪齋) 박씨 어른과 만년에 이웃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교유하여 깨달은 것이 많았다. 병인년(1866, 고종3) 강도(江都)의 난43)에 그 족숙(族叔) 산남공(山南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약속이 이미 정해져 출발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문득 난이 평정되어 그만두었다.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에게는 우애 있으며, 붕우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규문을 잘 다스리고 정돈하여 조화로우면서도 예법이 있었고, 자손을 가르침에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으니, 아름다운 명성과 훌륭한 명예가 향리에 자자하였다.기유년(1909, 순종3) 4월 7일에 졸하였는데, 신산(薪山) 오른쪽 산기슭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상산 김씨(商山金氏)로, 김욱해(金郁海)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만원(萬源), 두원(斗源)이고, 딸은 흥덕(興德) 장대규(張大奎)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권주(權柱)이고, 손녀는 정재우(鄭在禹)에게 출가하였다. 차방손(次房孫)은 권율(權律), 권하(權夏), 권권택(權澤), 권권후(權厚), 권권신(權信)이고, 손녀는 구교열(具敎烈)에게 출가하였다.아, 공의 평생을 살펴보건대, 풍진세상에서 불우하였지만 뇌락(磊落)하고 강개(慷慨)함은 먼 후대에도 오히려 족히 느낄 수 있다. 더구나 같은 세상 같은 고을에 살면서 직접 인사드리지 못했으니,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권하(權夏)가 그 대인의 명을 받들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옛날엔 광견44)이지만 古之狂狷오늘날은 강개한 기상일세. 今之慷慨이로 인해 분별하여 因是裁之성취할 수 있었네. 可以有造만년에 좋은 이웃을 만나 晩接芳隣순박함을 회복하였네. 于以回淳신산의 기슭에 薪山之麓넉 자의 봉분이 있네. 四尺其崇봄가을로 향기로운 제물 올리니 春秋芬苾자손이 번성하리라. 子孫繩繩 公諱鍾國。字聖一。號栗齋。金氏系出慶州。有諱沖漢號樹隱。仕麗。官禮儀判書。入我朝。有諱永傳號蓽庵。參奉。累傳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學於重峯趙先生。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從牛山安先生擧義。皆其顯祖也。高祖諱運鼎監察。曾祖諱希學。贈戶曹參議。祖諱之炯。贈掌樂院正。考諱鴻基號聾窩妣晉州鄭氏爃女公以純廟丁丑二月二十八日生于薪山里。天稟豪爽。無曲士拘儒之氣。初業詩書。兼習弓馬。穿楊碎柳。技藝精深。用兵紀律。無不曉解。酒後歌無衣詩數闋。讀史至魯連蹈海張良椎秦等處。廢書擊節。不勝其慷慨。中身以後。閱世漸深。更事漸多。少年風韻。不露圭角。而帖然收斂。日就孚老成規矩。又與無邪齋朴丈。晩而接隣。日夕遊從。多所契悟焉。丙寅江都之亂。從其族叔山南公。倡起義旅。約束己定。啓行有日。旋以亂平而止。孝於父母。友於兄弟。信於朋友。修整閨門。和而有禮。敎訓子孫。嚴而有法。令聞令譽。藉藉鄕里。己酉四月七日卒。葬薪山右麓子坐原。齊商山金氏郁海女。二男一女。男萬源斗源。女適興德張大奎。長房孫權柱。女鄭在禹。次房孫權律權夏權澤權厚權信。女具敎烈。嗚呼。迹公平生。其落拓風塵而磊落慷慨。百世之下。猶足相感。況在倂世同鄕而未得拜床。其恨爲何如也。權夏以其大人命。奉家狀。謁誌銘。銘曰。古之狂狷。今之慷慨。因是裁之。可以有造。晩接芳隣。干以回淳。薪山之麓。四尺其崇。春秋芬苾。子孫繩繩。 규각(圭角) 위가 뾰족하고 밑이 네모난 벽옥(璧玉 둥근옥)이 규(圭)이고, 이 벽옥의 뾰족한 모서리가 규각이다. 언행이 모가 나서 남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규각나다'라고 한다. 병인년 강도(江都)의 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이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천주교도 탄압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광견(狂狷) 《논어》〈자로(子路)〉에 공자가 "중도(中道)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광견한 사람과 함께 하겠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뜻이 크고 지조가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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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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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정공 묘지명 莘齋鄭公墓誌銘 공의 휘는 의상(義相), 자는 사균(士均), 호는 신재(莘齋)이다. 정씨(鄭氏)는 본래 하동(河東) 사람이다. 고려 때 밀직 부사(密直副使) 국룡(國龍)이 그 비조이다. 본조에 들어와 휘 지영(之英)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분이 휘 여해(汝諧)를 낳았으니 지평으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에게서 수학하였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세상에서는 둔재(遯齋)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휘 기령(箕齡)은 호가 양심재(養心齋)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그 현조(顯祖)이다. 고조는 휘 문원(文黿)인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인채(仁采)인데,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조부는 휘 석(錫)인데, 호가 반산(盤山)이다. 부친은 휘 양무(陽武)인데, 니, 문장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났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고명복(高命復)의 따님이다. 정종(正宗) 기유년(1789, 정조13) 7월 28일에 능주(綾州)의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평범한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나아가고 물러남과 응대하는 예절이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어른에게 공경하였으며 자상하고 민첩함이 어른과 같았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을 올리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공은 집안일을 잘 주간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니, 몸에 맞거나 입에 맞게 하여 어버이가 충분히 기뻐하시도록 힘썼다.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은혜로웠다. 전처와 후처가 모두 자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온 고을에 두루 거처하였으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는 시공지친(緦功之親)45)하는 자가 수십 호였다. 사람이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위문하였으며, 흉년에 구휼하여 상황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고 은의(恩意)가 두루 미쳤다.공은 몸가짐[容儀]이 매우 위엄이 있어, 보는 자가 자연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온화하고 정성스러워 마치 술을 마시고 스스로 취한 듯하였다. 세상일을 잘 알고 물정에 해박하였으며, 말을 하는 데 장점이 있었고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났다. 이 때문에 공이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일을 할 때면 모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향리에서 언쟁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과 복잡하게 뒤얽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비록 완강하여 교화하기 어렵고 완악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도 공의 말을 들으면 어느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정자(程子)가 친족을 화합하게 한 훈계46)를 모방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 적에는 여씨(呂氏)가 고을에서 거처하던 위의47)를 따랐다. 선조인 둔재(遯齋) 선생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편집한 다음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불러 효도하고 우애 있게 하라고 경계하고, 친족들을 불러 화목하게 지내라고 경계하였다. 또 가까이 사는 붕우를 맞이하여 사람마다 영결을 고하였다. 이윽고 자리에 나아가 별세하였으니, 바로 갑자년(1864, 고종1) 11월 24일이다. 이곡(耳谷)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풍류치(風流峙)에 있는 선영의 부건(負乾) 언덕으로 이장하였다.배위(配位)는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김상준(金相俊)의 따님이다. 계배(繼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아무개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백환(百煥), 차자는 주환(周煥), 딸은 양달환(梁達煥)에게 출가하였다. 장방손(長房孫)은 재한(在翰), 차방(次房)은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 명환(明煥)의 아들 재수(在洙)를 양자로 삼았다.아, 공은 우리 고을 선진(先進)이며 숙유(宿儒)이다. 나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우레 같은 높은 풍의(風義)를 익숙히 들었으나 가난과 병마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나아가 인사드리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공은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다. 뒤에 재한(在翰)과 교유하게 되고, 지금 또 유장(遺狀)을 얻어서 읽어 보니, 더욱 당시에 듣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금 아득히 세상이 바뀌어 옛 것은 다 사라졌지만 오직 이 어른의 발걸음이 닿았던 촌락의 풍속은 순후하고 예스러워 현송(絃誦)이 끊이지 않으니, 이는 당시에 그분이 창도(唱導)한 힘이 아니겠는가. 아, 공경할 만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둔재 선생의 고가요 遯齋古家능주의 명문가일세. 綾陽名門선조 뜻 계승해 헛되지 않으니 繼述不空전형이 보존되었네. 典刑斯存전야에서 광채를 숨겼고 潛光畎畝산속에서 한가로이 지냈네. 養閒林樊그 유풍과 여운 遺風餘韻사랑스러워 할 만하네. 俾也可愛 公諱義相。字士均。號莘齋。鄭氏本河東人。勝朝密直副使諱國龍。其鼻祖也。入我朝。有諱之英。官縣監。生諱汝諧持平。受學于佔畢齋金先生。與一蠹寒暄爲道義交。世稱遯齋先生。諱箕齡號養心齋。中進士。皆其顯祖也。高祖諱文黿。贈參議曾祖諱仁采。壽陞正憲。祖諱錫號盤山。考諱陽武。以文行著世。妣長澤高氏命復女。以正宗己酉七月二十八日。生公于綾之華山里。幼而岐嶷。不類凡常。進退唯諾。出入孝弟。委曲敏贍。一如成人。家素貧。菽水戛戛。公極幹家務以就其養。便身適口。務盡其歡。御家衆。嚴而有恩。前後室皆有子女。而內外斬斬。無有間言。宗族甚繁。遍於一鄕。而緦功之親。同住一巷者。數十戶。生死問唁。飢饉賙恤。隨時無闕。恩意浹洽。公容儀甚嚴。見之者自然畏憚然接人酬語。溫溫諄諄。如飮醇自醉。諳於世故。該於物情。長於言辭。優於幹理。是以語人無不服。作事無不集。鄕里間。有爭辨而未平者。有盤錯而未解者。無不待公咨決。雖强梗難化頑忍無恥者。聽公言。不覺赧然愧屈。立門規。做程子合族之訓。說洞約。遵呂氏居鄕之儀。先朝遯齋先生遺稿。蒐輯編摩。刊行於世。臨終招二子。戒以孝友。招諸族戒以敦睦。又邀居近朋友。面面告訣。已而就枕而逝。卽甲子十一月二十四日也。葬耳谷。後移于風流峙先壟負乾原。配淸道金氏相俊女。系配金海金氏某女。有二男一女。長百煥次周煥。女適梁達煥。長房孫在翰。次房無嗣。以從兄明煥子在洙爲後。嗚呼。公吾鄕先進宿儒也。余在弱冠。艶聞風義。如雷灌耳。但貧病苟活。未得一就拜床。而因循之頃。公已千古矣。後得與在翰遊從。今又得其遺狀而請之。益聞當日之所未聞。方今桑海茫茫。舊物掃地。而惟是杖屨所經。村俗淳古。絃誦不絶。此非當日倡遵之力耶。吁可敬也。銘曰。遯齋古家。綾陽名門。繼述不空。典刑斯存。潛光畝畝。養閒林樊。遺風餘韻。俾也可諼。 시공지친(緦功之親) 시마친(緦麻親)과 대공친(大功親), 소공친(小功親)을 이른다. 정자(程子)가……훈계 정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하였다. 《近思錄》 여씨(呂氏)가……위의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을 만들었는데 이를 여씨향약(呂氏鄕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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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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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경에게 써서 주다 書贈曺泰卿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立志]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도 뜻이 세워지지 않으면 성취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커다란 공부와 커다란 사업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천지를 위해서 마음을 세우고[立心] 생민(生民)을 위해서 도를 세우고[立道] 옛 성현을 위해서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萬世)를 위해서 태평 성세를 여는 것159), 이것이 사군자(士君子)가 세우는 뜻이다.그러나 일시적인 입지(立志)는 누구인들 없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뜻을 지키고 잃지 않아야만 큰일을 할 수 있다.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삼가고 두려워함160),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의 두려움과 공경스러움161), 공자(孔子)가 말한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하는 것162), 자사(子思)가 이른 경계하고 근신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163)이 그것이다. 이것이 성인과 성인이 주고받은 첫 번째 요결(要訣)이며 치지(致知)와 독행(篤行) 등의 각종 공부가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다. 천하에 어찌 근원 없는 물줄기, 기초 없는 건물이 있겠는가. 이에 뜻을 세우고 뜻을 지키는 데 관한 말로 태경(泰卿)을 면려한다. 學莫先於立志。夫日用小事。未有志不立而能有所就。況大工夫大事業乎。爲天地立心。爲生民立道。爲往聖繼絶學。爲萬世開太平。此士君子所立之志也。然一時立志。誰曰無之。必須持其志而不失。可以有爲。持之如何。堯舜之兢兢業業。湯文之栗栗肅肅。孔子所謂正衣冠尊瞻視。子思所謂戒愼恐懼是也。此是聖聖授受第一要訣。而致知篤行種種工夫。皆從此出。天下安有無源之流。無基之築哉。玆以立志持志之說。爲泰卿勉焉。 천지를……여는 것 《근사록》 〈위학(爲學)〉에 장재(張載)가 이르기를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정립하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정립하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야 한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라고 하였다. 요(堯)임금과……두려워함 《서경》 〈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 보이는 말이다. 탕왕(湯王)과……공경스러움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덕을 찬양하면서 "궁중(宮中)에 계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종묘(宗廟)에 계실 때에는 공경스러웠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항상 임재(臨在)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기셨고, 싫증내어 나태하지 않은 때에도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보전하셨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공자(孔子)가……하는 것 《논어》 〈요왈(堯曰)〉에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다섯 가지 미덕을 가르쳐 주면서 "군자는 의관을 정제하고 시선을 엄숙히 한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자사(子思)가……두려워하는 것 《중용장구》 제1장의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는 때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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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오의 자에 대한 설 文敬五字說 사문(斯文) 문재희(文載熙)가 처음에는 경오(敬於)를 자(字)로 삼았는데, 대체로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169)에서 취하였는데, 어느날 내가 '오(於)'를 '오(五)'로 고치기를 권하여 곧 경오(敬五)가 되었다. 경오(敬五)가 말하기를, "자(字)에 설(說)이 있는 것은 옛 법도입니다. 저를 위해 설명을 덧붙여 그 뜻을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경오는 내 고향의 선사(善士)170)이다. 평소에 아끼고 우러렀기에 굳이 사양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망녕되이 고친 것이 있건만 감히 고치게 된 뜻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는가. 무릇 학문의 도는 단지 지선(至善)의 소재를 밝히고 지선(至善)의 경지에 머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선의 소재를 밝히는 방도는 하루아침에 깨닫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반드시 거듭 쌓이고 계속된 다음에야 그 공을 알 수 있으며, 지선의 경지에 머무는 방도는 막혀 있는 채로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르지 않고 반드시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기른 다음에야 힘을 쏟을 수 있다. 이것은 집희경지(緝熙敬止) 이 네 자에 이미 남김없이 전부 담겨있다.그러나 선후 완급(先後緩急)의 순서에 적합하지 못하면 이른바 '밝힌다[明]'라는 것은 바람을 움켜잡고 물에서 달을 건지려고 생각하게 되고 이른바 '머문다[止]'라는 것은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는171) 우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집희경지(緝熙敬止)의 아래 문구에 '임금이 되어서는[爲人君]' 이하 다섯 가지의 세목172)이 있게 된 까닭이다. 이 다섯 가지는 바로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으로 손을 대고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약여(躍如)173)하지 않겠는가.'희(熙)' 자로 이름을 짓고 '경오(敬五)'를 자로 정하였으니 그 뜻이 서로 의지하고 그 공부가 번갈아 갖추어져 체(體)가 있으면 용(用)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수 있다. 경오는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진하기 바란다. 이른바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지만 도가 거기에 있다."174)라는 말도 또한 처음부터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文斯文載熙。表德初以敬於。蓋取於緝熙敬止之語也。一日余勸其改於以五。卽敬五也。敬五曰。字之有說古也。願爲之敷衍其義也。夫敬五吾鄕善士也。尋常愛仰。有難牢讓。況妄有所改。而敢不輸道其改之之意耶。夫學問之道。只是明夫至善之所在。而求止乎至善之地。明之之道。非一日頓悟之謂。必積累繼續而後。可見其功止之之方。非膠滯不顧之謂。必莊敬持養而後。可以爲力。此緝熙敬止四字。已說盡無餘蘊矣。然非有以適於先後緩急之序。則所謂明者。有捕風撈月之想。所謂止者。有揠苗助長之患。此緝熙敬止下文。所以有爲人君以下五者之目也。五者是人生日用平常切近之地。而所以示人下手發足之方。其不躍如乎。名之以熙。字之以敬五。其義相須。其功交備。可以有體而有用有始而有卒矣。願敬五顧名思義勉勉循循。則所謂不下帶而道存。亦未始非此耳。 오집희경지(於緝熙敬止) 《시경》 〈문왕(文王)〉에 "심원하도다, 우리 문왕이시여. 아, 실로 계속해서 공경하는 덕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고 하여 문왕의 덕을 칭송한 말이다. 선사(善士)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善士), 즉 훌륭한 선비일 경우에는 한 고을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한 나라의 선사일 경우에는 한 나라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일 경우에는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고, 천하의 선사를 벗으로 사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또 옛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싹을……돕는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이……세목 《대학》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목목한 문왕이여, 아! 계속하여 밝혀 공경하여 머무르셨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무르시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무르시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르시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머무르시고, 나라 사람과 사귈 때는 믿음에 머무르셨다."라고 하였다. 약여(躍如)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나오는 "군자는 활을 당기고 쏘지 않으나, 약여하여 중도에 서 있거든 능한 자가 따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표현이다. 시선이……있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말은 평이하면서도 뜻은 심원한 것이 좋은 말이고, 지키기는 간단해도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 좋은 도이니, 군자의 말은 눈앞의 일상을 얘기하지만 거기에 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에 "옛사람들은 시선이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리띠 위는 바로 눈앞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지극히 가까운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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