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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회안 서문》 五常會案序 송(宋) 나라 신하 서안국(徐安國)의 집에 일락당(一樂堂)이 있었고, 남헌(南軒) 장 선생(張先生 장식(張栻))이 그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이는 대체로 안국의 양친이 기모(期耄)106)에 이르도록 장수하여 모두 생존해 계시고, 안국의 사형제가 기애(耆艾)107)가 되도록 아무런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즐거움 중에 이보다 좋은 것이 없지만, 이러한 즐거움을 얻은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간혹 있었는데, 지금 강씨(姜氏)의 오상계(五常契)가 또한 그것에 딱 맞는 경우라고 이를 만하였다.나는 강 사문(姜斯文) 문욱(文郁)과 평소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을유년(1885) 여름에 내가 일이 있어 금릉(金陵 강진(康津))에 갔다가 지나는 길에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아름다운 마을로 강 사문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발에 별 탈 없이 풍채가 늠름한 분을 뵈었는데, 이분이 사문의 대인이었고, 의관을 가지런히 한 채 책상을 마주하고 걸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분들은 사문의 형제 네 사람이었다.아, 만약 선조께서 공덕을 쌓아 당대에 누리지 않은 보답이 없었다면 인간의 좋은 운수가 어찌 유독 이 한 집안에만 모여 있겠는가. 이른바 일락(一樂)108)이 서씨와 다름이 없었는데, 다만 연령이 위로는 기모에 이르지 않았고, 아래로는 기애에 이르지 않았으니, 현재를 기준으로 헤아려 계산하면 비록 조금 손색이 있는 듯하지만, 앞으로 누릴 복은 도리어 더 나을 것이다.내가 떠나려고 할 때 사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우리 형제들이 맏이를 인형(仁馨), 둘째를 예형(禮馨), 셋째를 의형(義馨), 막내를 지형(智馨)이라 명명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각기 한 몸씩 점유하게 되었으나 '신(信)' 글자의 자리가 비게 되었기 때문에 강신회(講信會)를 만들어 이를 채우고 '오상(五常)'이라 명명하였으니, 그대가 서문을 지어주기 바라네.하니, 내가 말했다. "오행(五行)은 토(土)가 아니면 생성되지 않고, 오상(五常)은 신(信)이 아니면 성립되지 못한다. 지금 사문의 형제가 비록 각기 하나의 덕을 차지하고 있지만, 충신(忠信)과 진실함이 그 본령이 아니겠는가. 아! 여러 부류로 말한다면 부모님이 모두 생존하신 것은 양의(兩儀)이고, 형제가 무고한 것은 사상(四象)이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것은 팔괘(八卦)이니, 팔괘가 낳고 쌓여서 효(爻)가 되는 것이 사 백이고, 변하여 괘(卦)가 되는 것이 사 천이며109), 그 작용은 광대하여 만물의 수를 다해도 끝이 없다. 내가 생각건대, 강씨(姜氏) 자손이 매우 많아지고, 복록이 가득 넘쳐나는 것이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부모를 여읜 몸으로 홀로 외롭게 지내기에 일락당의 기문을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여러 번 감탄하였는데, 지금 오상계(五常禊)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네." 宋臣徐安國家有一樂堂。南軒張先生爲之記。蓋安國之二親。期耄而俱存。安國之兄弟四人。耆艾而無故也。余謂天下之樂。無以加此。而得之者。絶無而僅有焉。今姜氏之五常契。亦可謂與之的對矣。余與姜斯文文郁有雅。乙酉夏。余有事往金陵。歷訪姜斯文於冠山之芳村。見白首無恙。風儀偉然。是斯文大人也。對床連榻。衣冠濟濟是斯文兄弟四人也。噫如無積累不食之報人間好氣數。豈獨萃此一門耶。所謂一樂者。與徐氏無異。但年齡上不至期耄。下不至耆艾。則目前經算。雖若少遜。而前頭享用。反復勝焉。臨發。斯文謂余曰。吾兄弟命名。伯曰仁馨。仲曰禮馨。叔曰義馨。季曰智馨。仁義禮智。各占一身。而信字位虛。故作講信會而足之。名曰五常。願吾子爲之序焉。余曰。五行非土不生。五常非信不立。今斯文兄弟。雖各據一德。而忠信誠慤。非其本領耶。噫。以衆類言之。父母俱存。是兩儀也。兄弟無故。是四象也。宜爾室家。是八卦也。八卦生積。而爲爻者四百。變而爲卦者四千。其用之廣。至於盡萬物之數而無窮焉。吾謂姜氏子孫之兟兟。福祿之穰穰。必將有如之者矣。義林風樹餘生。隻身煢煢。每讀一樂堂記。不覺三復感歎。今於五常禊。亦然云。 기모(期耄) 80세에서 100세의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는 80, 90세를 모라 한다[八十、九十曰耄.]"라고 하였고,  "100세를 기라 하니, 봉양을 받는다.[百年曰期, 頤.]"라고 하였다. 기애(耆艾) 50세에서 60세의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50을 애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을 기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일락(一樂)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가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팔괘가……천이며 팔괘가 중첩되어 8괘✕8괘=64괘가 되고, 하나의 괘마다 6개의 효로 구성되어 64괘✕6효=384효가 되는데, 이를 반올림하면 400효가 되며, 64괘가 다시 중첩되어 64괘✕64괘=4,096괘가 되는데, 이를 반올림하면 4000괘가 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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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 김공 진의록》 서문 山南金公振義錄序 대장부의 평소 포부는 똑같지만, 그 사적과 공적은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 등의 차이가 있으니, 평소의 포부가 이미 바르다면 비록 조그만 공효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숭상할 만한 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남들보다 뛰어난 불세출의 공적이 있다 하더라도 취하지 않는 바가 있다.산남(山南) 김공(金公)은 우리 고을의 선배이다. 신장이 9척에 이르고, 근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품은 뜻이 강개하고 우뚝하여 천만 명이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는 기상이 있었다. 그의 학문은 기억하고 암송하는 세속 선비들의 관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사물의 이치에 해박하고 세상일에 통달하였으며, 산수와 말타기, 활쏘기, 진(陣)을 펴고 수레를 모는 등의 방법에 이르러서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병인년(1866)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에, 공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奮發)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배운 것을 여기 말고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마침내 격문(檄文)을 써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알렸다. 이에 고을의 자제들 중 풍문을 듣고 모집에 응한 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활과 창, 갑옷, 양식이 바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훈련을 하고 기강과 군율을 세운 뒤에 출군(出軍)할 날을 잡았으나 적들의 변란이 평정되어 미쳐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다.아, 당(唐)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89)은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였고, 우리나라의 건재(健齋)90)와 여러 공들의 경우에는 비록 몸은 초야에 있었지만, 이름은 조정의 반열에 있었다. 그런데 공과 같은 경우에는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도 아니었으며, 조정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산남의 일개 벼슬하지 않은 선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외침이 한번 나오자 떨쳐 일어나 모집에 응한 자들이 사방에서 이르렀고, 기약한 월일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온갖 일을 맡을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만약 평소 의로운 행실이 진중하여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 수 없었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비록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바른 포부만큼은 단연코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다.의로움을 지키는 자는 일에 임하여 반드시 이익을 바라보지 않고, 공변됨을 유지하는 자는 난리에 임하여 반드시 사심을 따르지 않으니, 만약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조금만 항복을 늦추어 산남의 의로운 깃발이 심도(沁都 강화도(江華島))에 도착했다면 수양(睢陽)의 큰 승리와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91)가 다만 공에게 있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은 때와 만남에 관계된 것이고, 사람을 논하는 수단이 아닐 것이다.내가 고을의 후배로 효상(爻象 형적(形跡))을 목격한 것만도 이미 30년간의 일이고, 당시 고을의 장로들이 지금은 모두 죽었지만, 오직 찬란한 풍도와 의리만큼은 역력하게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지라 우러러 감복하는 나머지 삼가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외사씨(外史氏)92)가 취하기를 기다린다. 大丈夫素抱一也。而其事功則有成敗隱顯之不同。素抱旣正。雖靡尺寸之效。有足可尙。不然。雖有絶人不世之功。有所不取。山南金公吾鄕先進也。身長九尺。膂力過人。懷慨磊落。有千萬人吾往之氣。其學不屑屑於俗儒記誦之習。而博於物理通於世故。至於算數騎射布陣行車之法。無不精通。丙寅洋醜之變。公慨然自奮曰。平生所學。捨此焉用。遂草檄文。喩以擧義。於是鄕子弟。聞風應募者。陸續雲集。弓弩戈戟。甲冑芻粮。無不立辦。錬習紀律。啓行有日。而賊變告平。未及有爲而止。嗚呼。唐之張許。守土者也。我朝之健齋諸公。雖身在草野。而名在朝班。至若公非守土非朝班。而只是山南一布衣耳。然而義聲一出。奮募四至。不喩期月。衆務自集。如非平日行義之重。有以素服於人。安能如此。此雖功未就名未著。而其素抱之正。斷然有不可掩者矣。守義者。臨事必不見利。持公者。臨亂必不徇私。若使洋醜少緩授首。而山南義旗。達於沁都。則安知睢陽大捷。晉陽偉節。獨不在於公乎。然則成敗隱顯。時也遇也。非所以論人也。余以鄕里後生。目擊爻象。已是三十年間事。當日鄕老。今皆殞沒。而惟有風義煒燁。歷歷在人。感仰之餘。謹述略干語。以待外史氏取焉。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함락하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인 장순과 수양 태수(睢陽太守)인 허원(許遠)이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며 반란군을 수차례 격파하였으나,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마침내 성이 함락되면서 모두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新唐書 忠義列傳 張巡, 許遠》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다. 진주성에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였다. 수양(睢陽)의……절개 수양(睢陽)의 큰 승리는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에서 안녹산의 장수 윤자기(尹子奇)가 이끄는 대군을 막아 크게 격파한 일을 말한다.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에서 김천일(金千鎰)과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등이 의병을 이끌고 왜병에 맞서 항거하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한 일을 말한다. 외사씨(外史氏) 외방에 거주하면서 조정 이외의 외부에 관계된 사항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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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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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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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향약안》 서문 鄕約案序 선왕(先王)이 천하의 전토(田土)를 구획하자 백성들이 모여살며 생활하였는데, 사는 곳을 각기 구분 짓고 통속(統屬)하는 바를 두었다. 이런 까닭에 5가(家)를 인(隣)이라 하고 인에는 인장(隣長)을 두었으며, 5린을 이(里)라 하고 이에는 이장(里長)을 두었으며, 4리를 족(族)이라 하고 족에는 족장(族長)을 두었으며, 5족을 당(黨)이라 하고 당에는 당정(黨正)을 두어 주(州)ㆍ향(鄕)ㆍ방(邦)ㆍ국(國)에 이르렀다. 이렇게 조리(條理)와 기강(紀綱)이 찬란하게 빛나고 어지럽지 않게 되어 교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아, 삼고(三古) 시대94)의 아름다운 법이 땅을 쓴 듯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훗날의 군자들이 오히려 남아 있는 법을 주워 모아 향촌과 마을 사이에서 모방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횡거(橫渠)의 정제(井制)95)와 남전(藍田)의 향약(鄕約)96)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대로 여러 임금이 연이어 일어나 더욱 향수(鄕遂)97)의 제도를 중시하고 상서(庠序)98)의 가르침을 밝혔으니, 그 깊이 젖어 들고 배어든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우리 능주(綾州) 고을에 마을[黨]이 여덟 곳인데, 송석(松石) 마을은 그중 하나이다. 강의 상류 쪽에 위치해 있고, 들과 산이 서로 섞여 있어 예로부터 의관을 차려입은 지체 높은 집안과 유림(儒林)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 많아 유풍과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것이 어찌 유래한 바가 없겠는가. 다만 세대가 내려오면 기풍이 시들고, 법이 오래되면 실정이 쇠퇴하기 때문에 답습해 오던 것들이 흩어지고 사라져서 이에 이르렀다.내가 변변찮은 사람으로 간혹 이곳에서 부형과 장로의 뒤를 따르며 삼가 들은 것이 있었다. 고금을 돌아봄에 사사로이 감개한 마음이 없을 수 없는데, 닦아 거행하고 고쳐 새롭게 할 것을 도모함에 어찌 분수에 넘친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무릇 가정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공손한 행실이 있고, 마을에는 어질고 후덕(厚德)한 풍속이 있으며, 골목에는 거문고를 타며 시를 암송하는 소리가 있고, 들판에는 망을 보며 지키는 관리의 도움이 있으며, 마을에는 예의를 지켜 사양하는 풍도가 있다. 어느 마을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 없어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미쳐나간다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우리 동향의 여러 군자들은 서로 각기 이에 힘써서 자신에게 있어서는 몸을 수양하고, 집에 있어서는 그 집안을 가지런히 다스리고, 이웃에 있어서는 그 이웃을 교화하고, 마을에 있어서는 그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여 《여씨향악(呂氏鄕約)》99)의 규약처럼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며,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휼해야 한다. 또한 옛 규약을 참작하여 늘리거나 줄이는 등 알맞게 고쳐서 한 통을 써 놓고 매달 초하루 회합하기로 약속한 날이나  향음(鄕飮)과 향사(鄕射)100)를 행하는 날이 되면 반드시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면서 서로 갖추게 하고 깨우치게 해야 한다. 게다가 훌륭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한 두 개의 장부를 만들어서 권면하고 경계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어찌 삼고 시대의 남겨진 법이 아니겠으며, 우리나라의 여러 임금께서 선포한 조칙이 아니겠는가. 先王疆理天下。居聚生息。各有區分。而有所統屬。是故五家爲隣。隣有隣長。五隣爲里。里有里長。四里爲族。族有族正。五族爲黨。黨有黨正。以達於州鄕邦國。條理紀綱。燦然不亂。而敎化可興也。嗚呼。三古美法。掃地久矣。後之君子。猶能掇拾遺經而依倣鄕里間者。如橫渠之井制。藍田之鄕約而已。至於我東。列聖繼作。尤重鄕遂之制。明庠序之敎。其所以涵濡薰蒸者。蓋已久矣。惟我綾之鄕。爲黨者八。松石其一也。處於上流。山野相錯。多衣冠舊族儒林名家。而遺風餘韻。猶有存焉。此豈無所自耶。但世降則氣有所蔽。法久則情有所替。故因仍渙解。以至于玆。余以無似。間從父兄長老之後於此。竊有所聞矣。緬古覸今。不能無感慨之私。而謀所以修擧更張者。又安得以僭踰而辭也。夫家有孝悌之行。里有仁厚之俗。巷有絃誦之聲。野有守望之助。黨有禮讓之風。無黨不然。自近及遠。則國治而天下平矣。維我同鄕諸君子。胥各勉焉。在身則修其身。在家則齊其家。在隣則化其隣。在里則正其里。以德業相勸。過失相規。禮俗相交。患難相恤。如呂氏鄕約之規。而且爲增損裁酌。書其一通。至於月朔會約之時。及鄕飮鄕射之日。必爲抗聲讀過。使相備曉。且立善惡二籍。俾有勸戒焉。此豈非三古遺法。而我朝列聖之所宣勑者耶。 삼고(三古) 시대 중국 고대를 세 시기로 나누어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라 하는데,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복희를 상고, 신농(神農)을 중고, 오제(五帝)를 하고라 하기도 하고, 복희(伏羲)를 상고, 문왕(文王)을 중고, 공자(孔子)를 하고라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성인이 정치와 교화를 담담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를 가리키는 듯하다. 횡거(橫渠)의 정제(井制) 횡거(橫渠)는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의 호이고, 정제(井制)는 장재가 "정전법을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고을에서 시험해 볼 수는 있다."라고 하여 시행하려고 했던 정전제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의 정전제에 대한 주석에 보인다. 남전(藍田)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남전현(藍田縣)에서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여씨향악(呂氏鄕約)이라고도 한다. 그 대강은 "덕행과 공업을 서로 권하고,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며,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로 구성 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세 향약의 모범이 되었다. 《宋史 呂大防列傳》 향수(鄕遂) 지방의 고을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周)나라 때 왕성(王國) 밖 100리 이내를 향(鄕)이라 하고, 100리에서 200리 사이를 수(遂)라 하여 각각 육향(六鄕)과 육수(六遂)로 행적 구역을 나눈 데서 유래하였다. 《周禮 地官司徒》 상서(庠序) 국가의 교육 기관을 비유하는 말로, 하(夏)나라 때에는 교(校)라고 하였고, 은(殷)나라 때에는 서(序)라고 하였고, 주(周)나라 때에는 상(庠)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여씨향악(呂氏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그 대강은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德業相勸],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구휼한다[患難相卹]."라는 등의 네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향음(鄕飮)과 향사(鄕射)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말한다. 조선 세종 때에 이루어진 《오례의(五禮儀)》에 의하면 향음주례는 한성부(漢城府)와 외방 각 고을에서 매년 10월에 날을 가려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과 재행(才行)이 뛰어난 사대부나 서인들을 모아 술을 마시게 하면서 충효와 교화 등을 펴는 의례이고, 향사례는 개성부(開城府)와 외방 각 고을에서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면서 유학의 도덕과 기풍을 배양시키던 의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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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승동동안》 서문 佳勝洞洞案序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뜻을 얻는다면 요순(堯舜)시절의 임금과 백성처럼 천하 사람들과 선(善)을 함께하는 것이 진실로 평소의 포부이다.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산림 속으로 물러나 숨어 지내면서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과 함께 향례(鄕禮)와 향약(鄕約)의 절목을 강론하고 실행하여 서로 바로잡고 경계하며, 서로 친근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애초에 하나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장횡거(張橫渠)는 정전(井田)을 그리고110), 주회암(朱晦庵)은 사창(社倉)을 설치하여111) 혹 학자들과 함께하기도 하였고, 혹 시골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문순공(李文純公) 온계(溫溪)의 향약112)과 이문성공(李文成公) 석담(石潭)의 학규113)가 모두 이러한 것이다.능주의 부춘방(富春坊)114)에 가승동(佳勝洞)이 있는데, 또한 남쪽 지방에서 이름난 마을이었다. 산수가 탁 트이고, 바람과 햇볕이 모여 예로부터 의관을 차려입은 지체 높은 집안과 시례(詩禮)의 가학(家學)이 전승되어온 명망 높은 가문이 옛부터 많이 거주하였으니, 마을의 풍속이 아름답고, 인심이 순박한 데에는 대체로 유래가 있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면 폐지되고, 일이 오래되면 쇠퇴하게 되니, 이는 예로부터 공통된 근심거리였는데, 하물며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사문(斯文) 김경원(金景源)과 김권회(金權晦)는 마을에서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였는데, 개연히 옛 규례를 회복하는 데에 뜻을 가지고 장로(長老)에게 여쭈어 아뢰고 동료들과 모의하여 동안(洞案)을 다시 수정하였다. 이어서 동약(洞約)을 세우되 시대에 적합한 것을 참고하고 지방의 풍속을 참작함으로써 오랫동안 준행(準行)될 수 있도록 계획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일이다.아, 천하의 일 중에 이미 내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진실로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지만, 내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일 몇 가지뿐이다. 더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나아간다면 선을 함께하는 바탕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우리들이 노력하느냐, 노력하지 않느냐, 성실하느냐, 성실하지 않느냐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어 버렸지만, 이 삼대(三代)로부터 남아 전해진 의례(儀禮)가 우리 고을 사이에서 행해짐을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실로 구구한 바람이다.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士生斯世而得其志。則堯舜君民。兼善天下。固其素抱也。不爾則退藏於山林之中。與鄕井知舊。講行鄕禮鄕約之節。互相規警。互相親睦。未始非一副當好事也。張橫渠井田之畫。朱晦庵社倉之設。或與學者共之。或與鄕隣同之。至我東李文純公溫溪之鄕約。李文成公石潭之學規。皆是也。綾之富春坊有佳勝洞。亦南州之名村也。山水開爽。風日會聚。衣冠舊族。詩禮名家。自古多居焉。其村俗之美。人心之醇。蓋有所自來矣。然法久則敝。事久則替。此是自古通患。況在今日而安保其不然乎。斯文金景源金權晦。洞之秀士也。慨然有意於復古之規。稟告長老。謀及儕友。重修洞案。因立洞約。參以時宜。酌以土俗。爲視久準行之計。甚盛擧也。嗚呼。天下事。旣非吾力可及。則固無可爲之道。而吾力可及者。其惟此等事數件而已。況由此而進。安知不爲兼善之本乎。惟在乎吾輩之勉不勉誠不誠如何耳。余老且病。萬念如灰。而使此三代遺儀。得親見其行於吾鄕井之間。實區區之願也。願諸君子勉乎哉。 장횡거(張橫渠)는……그리고 장횡거는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로, 횡거는 그의 호이다. 《맹자집주》 〈등문공 상(滕文公上)〉의 정전제에 대한 주석에서 장재가 "정전법을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고을에서 시험해 볼 수는 있다."라고 하여 시행하려고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주회암(朱晦庵)의 사창(社倉) 주회암(朱晦庵)은 남송의 주희(朱熹)로, 회암은 그의 호이다. 사창은 주희가 효종(孝宗) 건도(乾道) 4년(1168)에 건녕부(建寧府) 숭안(崇安)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재해를 입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시한 구제책이다. 주희는 본부(本府)에 곡식 600섬을 청하여 백성들의 사정이 급할 때 2할의 이자를 받고 빌려주되 조금 가뭄이 들면 이자의 반을 면제해 주고, 크게 가뭄이 들면 이자를 모두 면제해 줌으로써 백성들이 부자들에게 미곡을 빌려 쓰고 높은 이자를 착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민가에서 보관하기가 불편하므로 사창(社倉)을 세워 미곡의 관리를 전담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 결과 1171년 건녕부 숭안현(崇安縣) 개요향(開耀鄕) 오부리(五夫里)에 사창이 세워졌으며, 1181년 8월에 절동 제거(浙東制擧)에 임명된 뒤에 사창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황제에게 아뢰어, 전국에 확대하여 시행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려졌다. 《朱子大全 卷13 辛丑延和奏箚4》 《朱子年譜 卷2》 《朱子大全 卷77 建寧府崇安縣五夫社倉記》 《宋史 卷35 孝宗本紀3》 이문순공(李文純公) 온계(溫溪)의 향약 퇴계 이황이 1556년(명종11)에 경북 안동 예안(禮安) 지방에서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 제정한 〈예안향약(禮安鄕約)〉으로, 문순과 온계는 이황의 시호와 호이다. 이문성공(李文成公) 석담(石潭)의 학규 율곡 이이가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부임하여 제정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해주에 머물 때 제정한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말하는 것으로, 문성과 온계는 이이의 시호와 호이다. 부춘방(富春坊) 옛 능주의 부춘면을 말한다. 훗날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능주군이 화순군에 통합되면서 부춘면도 단양면과 통합되어 각각 한 글자씩 취한 춘양면으로 바뀌고 화순군에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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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유고》 서문 愼庵遺稿序 뽕나무나 가래나무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손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릇이나 잔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의 입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 손자취와 입 기운도 이처럼 공경하고 사모하는데, 하물며 정신과 마음이 당일의 기술(記述) 사이에 깃들어 있는 것임에랴. 보배롭게 여겨 보호하고, 진귀하게 여겨 간직하고자 생각할 것이니, 그러한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신암(愼庵) 손공(孫公)은 집에 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롭다고 소문이 났고, 관직에 임해서는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일컬어졌으며, 심지어 베풀어 행하는 모든 일이 어느 것 하나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은택을 입히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글에 나타난 것이 또 어찌 다만 평범한 월로(月露)115)에 비하겠는가.천성이 질박하고 진실한데다 담박하고 조용하여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문사(文辭)가 어눌하고 저술한 것도 적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글을 짓지 않았고, 글을 짓더라도 일찍이 건연(巾衍 책이나 글을 넣어 두는 상자)에 보관하여 후대에 보일 계책으로 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해진 것이 많지 않아서 편질(編帙)과 문류(門類)가 쓸쓸할 정도였다. 그러나 백세토록 정신을 전하여 끝없는 사모의 정을 붙이는 바탕으로 삼는 것을 어찌 편질의 많고 적음으로 차이를 둘 수 있겠는가.공의 맏아들 영렬(永烈)이 종제(從弟) 영모(永謨)로 하여금 모아 편집하게 함으로써 대대로 전해 실추시키지 않을 계책으로 삼고, 이어서 나에게 현안(玄晏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공에게 외람되게도 두터운 지우(知遇)를 받은 지 오래되었고, 공의 맏아들과는 또 서로 따르며 노니는 교분을 계속 이어오고 있으니, 어찌 감히 사람이 미천하고 문장이 졸렬하다 하여 구구하게나마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桑梓之不敢慢焉。以手迹之所在也。杯圈之不敢用焉。以口澤之所存也。嗚呼。以手之迹口之澤。而敬慕之如此。況精神心術之寓於當日記述之間者。思欲爲之寶護而珍藏者。其心豈有窮己哉。愼庵孫公。居家以孝友聞。莅官以慈惠稱。以至凡百施爲。無一不出於利人澤物之心。則其著於文字者。又豈止爲尋常月露之比也。天性質實澹黙。不喜表襮。訥於文辭。簡於著述。非有甚故。未嘗下筆。下筆又未嘗貯之巾衍。以爲示後計。是以所傳無多。而編帙門類。至爲寂寥。然百世傳神以爲寓慕無窮之地者。豈以編帙多寡而有間哉。遺胤永烈。令其從弟永謨。裒稡而編摩之。以爲傳世不墜計。因有玄晏之託。余於公。猥承辱知之厚者久矣。而於遺胤。又有源源遊從之契。豈敢以人微文拙。而不有區區一言之役也耶。 월로(月露)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소재인 풍화월로(風花月露)의 준말로, 내용은 없으면서 겉만 화려하게 꾸민 시문(詩文)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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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보이다 見志 은사256)가 동으로 건너온 지 몇천 년인가 殷師東渡幾千年백색을 숭상하는 유풍이 오늘까지 전해졌네 尙白遺風此日傳더구나 나는 어버이를 여읜 적장자257)로서 矧我孤哀當室子차마 흑색의 옷을 몸에 입을 수 있겠는가 忍將黑服著身邊 殷師東渡幾千年, 尙白遺風此日傳.矧我孤哀當室子, 忍將黑服著身邊. 은사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사기》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의하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다고 한다. 어버이를 여읜 적장자 원문의 '고애(孤哀)'는 부모를 모두 여의어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실(當室)'은 아버지가 죽은 후 집안 일을 담당한 사람으로, 주로 적자(嫡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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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견과 최여중의 방문을 받고 田士狷崔汝重見訪 동남에서 꽃다운 발걸음 때마침 찾아와서 東南芳躅適相求백설 속에 청등 켜니 밤이 더욱 그윽하네 白雪靑燈夜轉幽대지는 지금 문득 상전벽해 되었으니 大地如今飜桑海고사는 어느 곳 산림에서 늙어가는가 高士幾處老林邱뉘 알았으리 졸계가 신묘한 작용으로 귀결되고 誰知拙計歸神用또 광생이 상류를 차지하게 할 줄을 且許狂生占上遊휩쓸려 가는 세상 돌아보니 어디로 가야하나 環顧滔滔安所往시절 슬퍼하니 또 머지 않아 배를 타야 하리365) 傷時亦不遠乘舟 東南芳躅適相求, 白雪靑燈夜轉幽.大地如今飜桑海, 高士幾處老林邱.誰知拙計歸神用, 且許狂生占上遊.環顧滔滔安所往, 傷時亦不遠乘舟. 배를 타야 하리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살고 싶어하는 생각을 말한다. 공자가 일찍이 천하에 현군(賢君)이 없어 도를 행할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 타고 바다에 떠서 떠나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論語 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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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인수 의 시에 차운하다 次李君【仁洙】 바탕이 어리석다 한스러워 말고 莫恨質蚩蚩큰 일을 하는 데에 뜻을 두게나 志乎大有爲어느 곳에서나 성실로 통하고 誠通幽顯地어느 때나 공경으로 일관해야지 敬貫始終時이치를 궁구해 마음의 거울 열고 窮理開心鏡인륜을 두터히 해 덕의 기반 쌓게 敦倫積德基그대 부지런히 배우는 뜻에 감동해 感君勤學意진중히 새로운 시로 화답한다네 珍重和新詩 莫恨質蚩蚩, 志乎大有爲.誠通幽顯地, 敬貫始終時.窮理開心鏡, 敦倫積德基.感君勤學意, 珍重和新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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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일89)에 천태산에 오르다 기묘년(1939) 上巳日, 上天台山【己卯】 병든 몸으로 맑은 봄에 오른 건 登臨扶病趁春晴세속을 벗어난 동풍이 있어서네 爲有東風不世情원림 몇 곳엔 꽃이 활짝 피었고 幾處園林花亂發산야엔 일시에 풀이 많이 돋았네 一時山野草多生인심은 모두 양장90)처럼 험하고 人心盡是羊腸險부귀는 원래 깃털처럼 가볍다네 富貴元來羽翅輕하늘가의 낙조는 어쩔 수 없는데 落照天涯無柰矣제 경공은 어찌 홀로 눈물 흘렸나91) 齊公何獨淚縱橫 登臨扶病趁春晴, 爲有東風不世情.幾處園林花亂發, 一時山野草多生.人心盡是羊腸險, 富貴元來羽翅輕.落照天涯無柰矣, 齊公何獨淚縱橫? 상사일(上巳日) 음력 3월 첫째 사일(巳日)을 말한다. 예부터 이날에는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상서롭지 못한 것을 불제(祓除)하는 수계(修禊)의 풍속이 있었다.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353) 상사일(上巳日)에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 당대의 명사 40여 인이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에 모여서 계사(禊事)를 행하고, 이어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성대한 풍류놀이를 했던 고사가 전한다. 양장(羊腸) 태항산(太行山)에 있는 옛날의 판도(阪道) 이름으로, 세상길의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고한행(苦寒行)〉에 "북쪽으로 태항산을 오르니, 길도 험하여라 어쩌면 이리 높은가?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길에, 수레바퀴가 부서지누나.〔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 하였다. 하늘가의……흘렸나 해가 지듯 죽음은 필연적이라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이 우산(牛山)에서 놀다가 아름다운 국토를 내려다보면서 얼마 후에 죽을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晏子春秋 內篇 諫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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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으로 가는 양순집을 전송하는 서문 送梁順集往漢北序 호남(湖南)과 한북(漢北 한양(漢陽)의 북쪽)은 천 리나 떨어진 지역이고, 전쟁의 기운이 가득한 풍진 세파를 도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데도 우리 벗 순집(順集)은 사문(師門)과 종유(從遊)하여 일 년에 한 번씩 다녀오는 것을 너무 멀다는 이유로 꺼리지도 않고,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그만두지도 않았다. 진실로 도를 지향하는데 근면하고 뜻을 세움이 독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나는 약관(弱冠) 때부터 이미 이러한 행차에 뜻을 두었으나 전후로 30년 동안 끝내 이루지 못했고, 지금 순집이 가는 것을 보면서 또 천리마의 꼬리에 붙은 파리116)가 되지도 못했다. 아, 나는 유독 어떤 사람이기에 미치지 못함이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순집의 이 행차가 만약 벼슬살이를 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얻음과 잃음, 통달함과 막힘이 진실로 나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고, 만약 유람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즐거움과 괴로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또한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벼슬살이를 구한 것도 아니고, 또 유람하는 것도 아니니, 진실한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 오직 도의(道義)에 있지 않겠는가.도의(道義)는 하나이니, 간간(侃侃)하게 강직하고 은은(誾誾)하게 화락한 모습으로 봄바람 앞에 앉아 있는 듯하고 눈이 쌓이도록 서서 기다리는 것처럼 하면서117) 천하의 도(道)를 강론하고, 천하의 의(義)를 밝히는 것이 어찌 한 집안이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돌아와 돌이켜보고 나머지 파급될 만한 것들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대가 들은 것이 바로 내가 들은 것이고, 그대가 얻은 것이 또한 내가 얻은 것이 될 것이다.나는 늙은 몸이라 비록 억지로 행장을 꾸릴 수 없지만, 사우(師友)를 인연한 관계로 소문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대에게 기대를 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생각건대, 천 리 먼 길 사람을 전송함에 예의상 노자가 있어야 하는데, 서생의 집에 장물(長物)118)을 가진 것이 없기에 단지 졸렬한 말 몇 줄로 노자를 대신하고, 또 "누가 물고기를 요리하는가? 작은 가마솥과 큰 가마솥을 씻어 주리라. 누가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까? 좋은 목소리로 위로하리라."119)라는 한 문장을 노래하여 전송할 뿐이다. 湖南漢北。千里之地。干戈風埃道路抵搪。吾友順集。從遊師門。一年一行。不以絶遠而憚焉。不以多難而沮焉。苟非向道之勤。立志之篤烏能辦此也。余自弱冠。已有意此行。而前後三十年。竟未就矣。今見順集之行。又未作附驥之蠅。嗚呼。余獨何人。其所不及若是懸絶哉。雖然。順集此行。若出於干進。則其得失通塞。固無關於我矣。若出於遊觀。則其苦樂勞佚。亦無有於我矣。旣非干進。又非遊觀。而所以血心尋覓。獨不在於道義乎。道義一也。侃侃誾誾。坐春立雪。講天下之道。明天下之義者。豈一家一人之私哉。況歸而顧之。不吝餘波。則子之聞卽我之聞也。子之得。亦我之得也。吾老矣。縱不能强理鞭策。而所以夤緣師友。得聞所聞。未嘗不有望於子也。但念千里送人。禮合有贐。而書生門戶。無有長物。只用蕪詞數行。以替贐儀。又歌誰能烹魚。漑之釜鬵。誰將西歸。懷之好音。一章以送之。 천리마의……파리 선현이나 명사(名士)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정의림이 양순집을 따라가서 한북에서 사문과 종유하는 것을 비유한다.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독실하게 학문을 닦았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었기 때문에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주(注)에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천리에 이르듯,[蒼蠅附驥尾而致千里] 안회(顔回)도 공자 덕분에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간간(侃侃)하게……하면서 원문의 "侃侃誾誾, 坐春立雪"을 국역한 것으로, "간간은은(侃侃誾誾)"은 《논어》 〈선진(先進)〉에 "민자가 옆에서 모실 때에는 온화하였고, 자로는 굳세었고, 염유와 자공은 강직하니,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좌춘(坐春)"은 스승의 훈도와 덕화를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때 주광정(朱光庭)이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여남(汝南) 땅에서 뵙고 돌아와 "광정이 봄바람 속에 한 달 동안 앉아 있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 "입설(立雪)"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송나라 양시(楊時)가 처음 정이(程頤)를 찾아갔을 때 마침 정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므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서 기다렸는데, 정이가 눈을 떴을 때는 문밖에 내린 눈이 한 자가량이나 쌓여 있었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宋史 卷428 楊時列傳》 장물(長物) 여유 있는 물건이나 좋은 물건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공(王恭)이 숙부인 왕침(王忱)의 요청을 받고 단 하나밖에 없는 돗자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침이 미안하게 생각하자, "숙부께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저는 원래 장물(長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世說新語 德行》 누가……위로하리라 《시경》 〈비풍(匪風)〉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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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회와 김익부를 전송하는 소서 送鄭景晦金翼夫小序 을사년(1905) 겨울에 정군 경회(鄭君景晦)와 김군 익부(金君翼夫)가 영상(嶺上)으로부터 가천(佳川)의 아픈 나의 집을 방문하여 이틀 밤을 서로 마주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해박한 포부와 정밀하고 깊은 조예가 참으로 소년 중에서 뛰어났다. 그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한마디 해줄 것을 청하였다.무릇 그대들은 문명한 교령(嶠嶺 영남) 지방에서 태어나고, 높은 덕을 지닌 애산(艾山)120)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니, 학문의 절도(節度)에 대해 반드시 상세하게 들었을 것이고, 덕을 쌓고 공업을 닦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익히 배웠을 것인데, 이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무슨 들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스스로 생각건대, 천박하고 용렬한 내가 설령 조금 아는 것이 있어 멀리서 찾아온 뜻에 부응하고자 한들 구구하게 소나 말의 발굽 자리에 고인 물이 어찌 바다를 구경한 눈에 물로 보일 수 있겠는가.아, 온 세상이 기나긴 어둠에 잠기고 온 천하가 서양의 물결로 뒤덮이고 있는 때에 간혹 공맹(孔孟)의 책을 읽고 공맹의 학문을 따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또한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고 찢기어 온통 참됨에서 벗어나고 바름을 잃었는데, 연원을 지켜 순박하면서도 잡되지 않은 경우는 오직 존사문(尊師門)121) 뿐일 것이다.선비가 되어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문하에서 노니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만한 기이한 만남이라 이를 만하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못된다. 만약 존사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한 가닥 바른 학맥이 더이상 붙어 있을 곳이 없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존사문이 말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대들이 과연 이것을 알고 힘쓸 수 있다면, 오늘날 석과(碩果)의 씨앗이 되는 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추운 계절에 그대들을 전송하며 아득히 끝없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삼가 이 글을 써서 노자를 대신한다. 歲乙巳冬。鄭君景晦金君翼夫。自嶺上過佳川病廬。信宿相對。娓娓傾倒。其抱負之該洽。造詣之精深。信是少年翹楚。將行。請以一言之贈。夫君輩生於嶠嶺文明之邦。遊於艾山碩德之門。其學問節度。聞之必詳。進修蹊逕。講之必熟。外此而有何可聞於人者乎。自惟淺劣。設有一知半解。欲以塞遠來之意。而區區蹄涔。何足爲水於觀海之眼乎。嗚呼。大宇長夜四海懷襄。間或有讀孔孟之書。從孔孟之學。而亦且千分萬裂。擧不免離眞失正。若其淵源持守。醇而無雜。其惟尊師門乎。爲士而居此世遊此門者。可謂千載奇遇也。餘不足言。若使尊師門之學而有不傳焉。則一縷正脈。更無可寓。豈不可惜。此則尊師門所不言者也。君輩果能知此而勉焉。不失爲今日之碩果種子耶。歲寒相送。不勝悠悠無窮之感。謹書此而贐焉。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존사문(尊師門) 상대방의 스승에 대한 경칭으로,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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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더위 酷熱 겹겹의 더운 구름 자욱하여 걷히지 않고 疊疊炎雲鬱未開축융121)의 엄한 명으로 중복이 돌아왔네 祝融酷令再回庚때때로 두보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으니122) 有時欲發少陵叫어디서 하삭의 술잔123) 기울일 수 있을까 何處能傾河朔杯돌은 벌겋게 달아올라 부술 수 있을 듯하고 石見爍紅疑可碎산은 까맣게 타서 장차 무너질 것만 같네 山經焦黑若將頹만백성을 말끔히 소생시킬 일 머지않았으니 淸蘇萬姓前期在옥우124)에서 하룻밤에 가을바람 재촉하리라 玉宇金風一夕催 疊疊炎雲鬱未開, 祝融酷令再回庚.有時欲發少陵叫, 何處能傾河朔杯?石見爍紅疑可碎, 山經焦黑若將頹.淸蘇萬姓前期在, 玉宇金風一夕催. 축융(祝融) 고대 화신(火神)의 이름이자, 남방(南方) 또는 남해(南海)를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관자(管子)》 〈오행(五行)〉에, "사룡을 얻어 동방을 다스리고, 축융을 얻어 남방을 다스렸다.〔得奢龍而辯於東方, 得祝融而辯於南方.〕"라고 하였다. 두보(杜甫)처럼……싶으니 너무나 더워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말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 〈초가을 무더위에 시달리는데 문서가 계속 쌓이네[早秋苦熱堆案相仍]〉에 "관복 띠를 매니 더워 미칠 듯 크게 소리 지르고자 하는데, 문서는 어찌 급하게 서로 이어서 쌓이는가?〔束帶發狂欲大叫, 簿書何急來相仍?〕"라는 구절이 있다. '소릉(少陵)'은 두보의 호이다. 하삭(河朔)의 술잔 무더운 여름철에 피서(避暑)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술자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에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자제와 하삭에서 삼복(三伏) 무렵에 술자리를 벌이고 밤낮으로 정신없이 마셔댄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初學記 歲時部上 夏避暑飮》 옥우(玉宇) 옥우경루(玉宇瓊樓)라 하여 달 속에 있는 궁궐을 말하는데, 천제(天帝)가 있는 하늘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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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정 윤섭 의 별장에서 崔春汀【潤燮】庄上 덕산 남쪽에서 문을 닫고 높이 누으니 閉門高臥德山陽세상 길 평탄치 않아 온통 태항산98)이네 世路難平盡太行접역99)의 의관에는 전범이 남아 있고 鰈域衣冠餘典範이정100)의 시례는 명성과 영광 이었네 鯉庭詩禮繼聲光책 속의 풍아101)는 모두 세속 초월했고 卷中風雅皆超俗정원의 난초 매화는 색다른 향기 있네 園裏蘭梅別有香만년에야 비로소 함께 시를 주고받으니 始共唱酬遲暮日부생이 무슨 일로 오래도록 겨를 없었나 浮生緣底久無遑 閉門高臥德山陽, 世路難平盡太行.鰈域衣冠餘典範, 鯉庭詩禮繼聲光.卷中風雅皆超俗, 園裏蘭梅別有香.始共唱酬遲暮日, 浮生緣底久無遑. 태항산(太行山)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인데,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시 〈고한행(苦寒行)〉에 "북쪽으로 태항산을 오르니, 길도 험하여라 어쩌면 이리 높은가. 구절양장 구불구불한 길에, 수레바퀴가 부서지누나.〔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라는 구절이 보인다. 접역(鰈域) 가자미 모양으로 생긴 지역 또는 가자미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이다. 이정(鯉庭) 집안에서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그의 아들 이(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가자 불러 세우고는 시(詩)와 예(禮)를 배워야 한다고 훈계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論語 季氏》 풍아(風雅)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ㆍ소아(小雅)를 말하는데, 전하여 바르고 고상한 시문(詩文)의 비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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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오씨 보의회안》 서문 寶城吳氏輔誼會案序 내가 항상 여씨(呂氏)의 향약(鄕約)124)과 범씨(范氏)의 의장(義庄)125)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삼고(三古) 시대126)의 남은 제도에 가장 잘 맞고, 지금의 시대에 행해질 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삼고 시대의 백성에게 행해졌던 정사(政事)는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만큼 치밀했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익을 좇아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면서 점차 쇠락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땅을 쓴 듯 다 사라져 버려졌으니, 선비가 옛날의 도를 배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물러나 시골 마을의 친구들이나 집안의 친족들과 함께 강론하며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어찌 이 두 가지와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나의 벗 송봉옹(松峰翁)은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옛 이름)의 남쪽에 은거하며 함께 거주하는 친족 10여 사람과 의장의 규례를 모방해 모임을 창설하여 '보의회(輔誼會)'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모여 강습함에 때가 있게 하고, 가르치고 봉양함에 재물이 있게 하였으며, 길흉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게 하고, 환난에는 도움이 있게 하였으니, 은혜와 정분을 돈독히 하여 서로 지켜주고 돕는 것이 굳고 단단하면서도 주도면밀하고 상세하다고 이를 만하다. 오씨(吳氏)의 후손이 받게 될 복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나는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처지로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거처를 정할 겨를도 없는데, 힘입을 곳이 없는 외로운 사직(社稷)을 탄식하고, 구원을 요청할 곳이 없는 사신(使臣)들을 애통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모임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적으로 감동과 부러움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이 글을 써서 오씨를 위해 축하한다. 余嘗愛呂氏之鄕約。范氏之義庄。最得三古之遺制。而可行於今日。蓋三古維民之政。可謂盛水不漏。而熙往穰來。漸次零替。至於今日。掃地盡矣。爲士者。學古之道。旣不得有爲於斯世。則退而與鄕黨知舊門闌族親。可以講行者。豈非此二事乎。余友松峰翁。隱居爾陵之南。與其族之同居者十餘人。倣義庄之規。倡以設之。命曰。輔誼會。使講聚有時。敎養有資。吉凶有須。患難有助。所以篤恩誼而相維持者。可謂鞏固而周詳矣。吳氏後祿。豈有量哉。余以孤根弱植。煢煢流離。不遑定居。歎杕社之無賴。哀原隰之無求。今於此會之設聞。不勝感艶之私。謹書此爲吳氏賀焉。 여씨(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란(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네 조항이었다. 이것이 후대에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小學 卷六 善行》 범씨(范氏)의 의장(義庄) 송(宋)나라 때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자신의 봉급과 재산 일부로 전지(田地) 수천 묘(畝)를 사들여 만든 전장(田莊)을 말하는 것으로, 범중엄은 이 땅에서 거둔 조(租)를 저축해 두었다가 혼가(婚嫁)나 상장(喪葬)을 치르지 못한 종족들에게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宋史 卷314 范仲淹列傳》 《小學 卷5 嘉言》 삼고(三古) 시대 중국 고대시대 때 성왕(聖王)으로 일컬어지는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이 다스렸던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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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탄 流民歎 유랑민 유랑민이여 유랑민을 어이하나 流民流民柰流民삼남 땅 모든 곳이 적지137)가 되었구나 赤地三南率土濱부모 처자식이 곡하며 서로 부여잡기를 爺孃妻兒哭相持날 버리고 오늘 어디로 가려는가 하니 棄我今日欲何之말하기를 서북쪽으로 삼천리를 가면 爲言西北三千里공장이 곳곳에 있어 돈이 물 같다 하네 工場處處錢如水항아리의 곡식 팔아 여비를 마련했으나 傾放甁粟作盤纏돈을 입수하지 못해 곤궁하기만138) 하네 錢未入手徒顚連옛날에 맹자가 근심하고 탄식했던 것은 昔在鄒賢已憂歎노약자는 죽고 건장한 자는 흩어짐인데139) 老弱者死壯者散하물며 지금과 같은 변란에 있어서랴 矧在而今之變亂유랑민 유랑민이여 참으로 한탄스러우나 流民流民眞堪歎실로 하늘이 한 일인데 어찌하겠는가 天實爲之柰若何 流民流民柰流民? 赤地三南率土濱.爺孃妻兒哭相持, 棄我今日欲何之?爲言西北三千里, 工場處處錢如水.傾放甁粟作盤纏, 錢未入手徒顚連.昔在鄒賢已憂歎, 老弱者死壯者散.矧在而今之變亂, 流民流民眞堪歎, 天實爲之柰若何? 적지(赤地) 흉년이 들어 거둘 만한 농작물이 하나도 없게 된 땅을 말한다. 곤궁하기만 원문의 '전련(顚連)'으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것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온 천하의 쇠잔하고 병든 자, 고아와 독거노인과 홀아비와 과부가 모두 곤궁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나의 형제들이다.〔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라는 표현이 있다. 맹자(孟子)가……흩어짐인데 맹자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제(齊)나라 대부 공거심(孔距心)을 질책한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하〉에 "맹자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그대의 백성 중에 노약자는 구렁이에 빠지고 흩어져 사방으로 가는 장성한 사람들도 몇 천 명이 된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이것은 거심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다.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또한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라고 하자, 말하기를 '이는 거심의 죄입니다.'라고 하였다.〔凶年饑歲, 子之民, 老羸轉於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曰: 此非距心之所得爲也. 曰: 今有受人之牛羊而爲之牧之者, 則必爲之求牧與芻矣. 求牧與芻而不得, 則反諸其人乎? 抑亦立而視其死與? 曰: 此則距心之罪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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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150)에서 송심석151) 어른의 시에 차운하다 龜巖亭, 次心石宋丈韻 백일홍이 만발하여 맑은 물가에 잠겼는데 赬桐滿發蘸晴汀하늘이 이름난 정자 가져다 승지에 두었네 天把名亭勝地停맑은 절조는 당시에 세속을 일찍 벗어났고 淸節當年曾脫俗남긴 꽃다운 이름은 천년 뒤에도 향기 나네 遺芳千載尙聞馨옥봉에 달빛이 비추면 먼저 문을 열고 玉峯月照先開戶하포에서 바람 불어도 사립문 닫지 않네 荷浦風來不掩扃산인동의 바위는 얘기를 나눌 만하였으니 散人洞裏石堪語원방 계방 같은 형제라는 말도 들을 만하네152) 元季雙難更足聽 赬桐滿發蘸晴汀, 天把名亭勝地停.淸節當年曾脫俗, 遺芳千載尙聞馨.玉峯月照先開戶, 荷浦風來不掩扃.散人洞裏石堪語, 元季雙難更足聽. 구암정(龜巖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장군목길 1028에 있는 정자로, 구암(龜巖) 양배(楊培)의 덕망을 흠모하여 1898년에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송심석(宋心石) 심석은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 호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동옥(東玉)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많은 문인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두문불출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은사금을 가져왔으나 거절했고, 일제가 경학원 강사로 천거하자 거절한 뒤 일제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학문삼요(學問三要)〉·〈사례축식(四禮祝式)〉·〈용학보의(庸學補疑)〉 등이 있다. 산인동(散人洞)의……만하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양배(楊培)와 양돈(楊墩) 형제가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순창군 구미리 서쪽의 산인동에 은거하여 자연과 벗한 일을 말한다. 산인동 물가에 이들이 분점(分占)하여 낚시했던 '배암(培巖)'ㆍ'돈암(墩巖)'이라는 형제바위가 있다. 《旅庵遺稿 卷4 散人洞記》 《頤齋遺藁 卷23 梅堂慕亭二楊公小傳》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은 후한(後漢)의 진기(陳紀)와 진심(陳諶)의 자(字)인데,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나 난형난제(難兄難弟)로 불렸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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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운약에게 써 준 서문 贈鄭君雲躍序 지금까지 영남 내의 여러 군(君)들을 전별하며 말을 해준 것이 다소 없지 않지만, 유독 운약(雲躍)의 요청에 더욱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나와 운약은 지난봄에 뇌룡정(雷龍亭)127)에서 한 번 만나고, 지금 또 화엄사(華巖寺)에서 다시 만났으니, 교분이 오래되고 마음이 맞았다. 게다가 운약이 애산옹(艾山翁)128)의 종부제(從父弟)가 됨에랴. 그 교분과 정분으로 보면 구구하나마 한마디 말을 해주는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뒤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발굽에 고인 물은 바다를 구경한 눈에는 물로 보이기 어렵고, 반딧불의 빛은 촛불을 마주한 자리에서 빛이 되기 어렵다. 나는 운약에게 발굽에 고인 물이나 반딧불이 되겠지만 사양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털끝만큼이나마 보탬이 되려함은 어째서인가? 말을 해주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고, 감히 말을 해주지 못하는 것도 군이 애산옹의 아우이기 때문이다.명(明)나라의 유학자 방손지(方遜志 방효유(方孝孺))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들은 저명한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음이 없지만, 일반 사람의 자손이 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비단 자손만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친속(親屬 친족)의 경우도 그렇다. 선(善)은 크지 않으면 책무에 걸맞을 수 없고, 악은 비록 작더라도 오히려 조롱을 끼칠 수 있으니, 운약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내가 운약에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말을 해준다면 이 말보다 먼저 말해줄 것이 없으니, 운약은 힘쓰기 바란다. 今爲嶺中諸君之別。不無多少贈言。而獨於雲躍之請。尤有所不敢者何哉。吾與雲躍。去年春。一見於雷龍亭。今又再見於華巖寺。舊交矣心契矣。而又爲艾山翁從父弟乎。以其契誼。則區區一言之贈。必不在他人之後矣。然蹄涔之滴。難爲水於觀海之眼。螢爝之光。難爲照於對燭之筵。吾於雲躍。爲蹄涔螢爝。有所不辭。而其絲毫之補何。不欲無言者。爲艾翁之弟故也。不敢有言者。亦艾翁之弟故耳。明儒方遜志有言曰。人莫不喜爲名人子孫。而不知其尤難於衆人。非但子孫爲然。在親屬亦然。善不大。則不足以稱其責。惡雖小。而猶足以貽其譏。雲躍知之乎。吾於雲躍。不告則已。如告之。則無有先於此者。願雲躍勉之。 뇌룡정(雷龍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45세 때 모친의 상을 당하고 고향인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여묘를 마친 뒤에 이곳에 세운 정자로, 60세까지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애산옹(艾山翁)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으며,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ㆍ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와 더불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의 3대 제자로 불리었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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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탄 無薯歎 대지의 백성 식량은 날로 어려우나 大地民食日以艱나는 구학125)의 근심을 먼저 끊었네 吾人先切溝壑憂벼 조 기장 피는 원래 분수 아니고 稻梁黍稷元非分밀 보리 팥 콩도 도모하기 어렵네 來牟豆菽猶難謀고구마만이 내 식량으로 적당하니 惟有甘薯宜吾食곡물에 비해서 거두기가 용이하네 比諸穀物容易收봄에 싹 터 여름에 심고 가을에 캐니 春苗夏種秋而採팔뚝만큼 큰 뿌리가 내 집에 가득하네 根大如腕盈我屋생으로 먹든 익혀 먹든 불가함이 없고 生食熟食無不可술 밥 떡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네 酒飯與餠惟所欲줄기는 나물로 잎으로는 국을 만들고 莖爲菜兮葉爲羹넝쿨도 땔감으로 만들려면 말려야 하네 蔓亦爲薪須乾曝청성126)이 이 물건 있는 줄 일찍 알았다면 淸聖早知有此物수양산 기슭에서 고사리 캘 필요 없었으리 不必采薇首陽麓나에게 황무지를 새로 개간한 밭이 있으니 我有荒地墾新田이걸 심으면 풍족한 생활 되기에 넉넉하리 種此優作餘生活그 가운데에 말만큼 커다란 초가집을 짓고 中置草廬如斗大담서실이란 세 글자로 편액을 달았네 扁以三字啖薯室여기서 담소하고 여기에서 먹고 휴식하며 爰是言笑爰食息게로기 먹었던 채옹127)과 짝이 되고 싶었네 蔡翁啖薺擬作匹어찌하여 금년엔 날씨가 너무나 가물었나 夫何今年天亢旱봄에 난 싹이 일찌감치 쑥쑥 자라지 못했네 春苗早已未長茁심은 것이 많지 않은데다가 말라 죽었으니 種不多兮更枯死백지128)에는 부질없이 잡초만 무성해졌네 白地空自草桀桀아, 하늘이 우리들에게 嗚呼皇天於我輩이런 곤궁함을 내리니 얼마나 큰 액운인가 降此窮困一何厄걱정 번뇌가 옥처럼 이룬다129)고 말하지 말라 莫云憂戚庸玉成건어물 가게에서 찾을 신세130)를 어찌하겠나 其如薧魚肆中索요절과 장수함에 의심하지 않을131) 뿐 아니라 除非夭壽無貳心하늘의 처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죽이네 俟天處分靜屛息다행히도 그날그날 견디며 살아가다 보면 如幸得過且過也내년에는 그래도 다시 고구마를 먹게 되리 明年猶復此薯食 大地民食日以艱, 吾人先切溝壑憂.稻梁黍稷元非分, 來牟豆菽猶難謀.惟有甘薯宜吾食, 比諸穀物容易收.春苗夏種秋而採, 根大如腕盈我屋.生食熟食無不可, 酒飯與餠惟所欲.莖爲菜兮葉爲羹, 蔓亦爲薪須乾曝.淸聖早知有此物, 不必采薇首陽麓.我有荒地墾新田, 種此優作餘生活.中置草廬如斗大, 扁以三字啖薯室.爰是言笑爰食息, 蔡翁啖薺擬作匹.夫何今年天亢旱? 春苗早已未長茁.種不多兮更枯死, 白地空自草桀桀.嗚呼皇天於我輩, 降此窮困一何厄?莫云憂戚庸玉成, 其如薧魚肆中索.除非夭壽無貳心, 俟天處分靜屛息.如幸得過且過也, 明年猶復此薯食. 구학(溝壑) 시궁창과 산골짜기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청성(淸聖) 깨끗한 성인(聖人)이라는 뜻으로, 백이(伯夷)를 가리킨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伊尹)ㆍ백이(伯夷)ㆍ유하혜(柳下惠)ㆍ공자(孔子)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이윤은 성인 중에 천하를 구제하기로 자임한 자이고, 백이는 성인 중에 깨끗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이고, 공자는 성인 중에 때에 알맞게 행한 자이다.〔伊尹聖之任者也, 伯夷聖之淸者也, 柳下惠聖之和者也, 孔子聖之時者也.〕" 하였다. 게로기 먹었던 채옹(蔡翁) 송(宋)나라 유학자 채원정(蔡元定)이 서산(西山)에서 공부할 적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게로기를 캐어 먹었던 일을 말한다. '제(薺)'는 제니(薺苨) 혹은 게로기라고도 하는데, 사삼(沙蔘)과 비슷한 다년생 식물이다. 《송사(宋史)》 〈채원정열전(蔡元定列傳)〉에 "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배고픔을 참고 게로기를 캐어 먹으며 글을 읽다가, 주희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자 하였다. 주희가 그의 학문 실력을 시험해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이 사람은 나의 오래된 벗이라고 할 것이니, 제자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登西山絶頂, 忍饑啖薺讀書, 聞朱熹名, 往師之. 熹扣其學, 大驚曰: 此吾老友, 不當在弟子列.〕"라는 기록이 나온다. 백지(白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거두어들일 것이 없게 된 땅을 말한다. 걱정……이룬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사람이 옥처럼 훌륭하게 완성된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 하였다. 건어물……신세 현재의 곤경을 해결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말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붕어 한 마리가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으면서 길 가는 장주(莊周)에게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자신을 살려줄 수 있겠느냐고 하므로, 장주가 장차 오월(吳越) 지방으로 가서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 대주겠다고 하자, 그 붕어가 화를 내며 "나는 지금 당장 한 말이나 한 되쯤의 물만 얻으면 살 수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하니 일찌감치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는 것이 낫겠다.〔吾得斗升之水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요절과……않을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이는 말로, "마음을 보존하여 성(性)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고,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에 의혹을 품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기다리는 것은 천명을 세우는 일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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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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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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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설 의사155)를 기리며 3수 설진영(薛鎭永)이 순창에서 거주하였는데 성씨를 바꾸는 변고가 생기자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贊薛義士【鎭永2)居淳昌, 改姓之變, 投井而死.○三首】 공과 같은 높은 절개는 세상에 없었으니 高節如公世所無의리 취해 저버리지 않은 선유를 배웠네 取熊不負學先儒성명을 보전하여 돌아가 조상을 모시니 保全名姓歸陪祖그 하늘만을 보았지 몸을 보지 않았네 但見其天不見軀큰 것을 잃고 작은 살갗 기를 줄만 아니156) 失大惟知養小膚분분한 속인들은 눈썹 수염에도 부끄러우리 紛紛俗輩愧眉須청컨대 우뚝 선 동전자157)를 보라 請看卓立銅田子너무 차이가 나 품성이 다른가 의심스럽네 懸絶還疑稟性殊공을 조문하여 공연히 탄식할 필요 없으니 吊公不用謾歎吁우리 유림에 장부 있음을 스스로 축하하네 自賀吾林有丈夫멀리서 서풍 아래 세 번 술을 따라 올리니 遙酹西風三酌酒긴 무지개가 저녁에 해산 모퉁이에 일어나네 長虹暮作海山隅 高節如公世所無, 取熊不負學先儒.保全名姓歸陪祖, 但見其天不見軀.失大惟知養小膚, 紛紛俗輩愧眉須.請看卓立銅田子, 懸絶還疑稟性殊.吊公不用謾歎吁, 自賀吾林有丈夫.遙酹西風三酌酒, 長虹暮作海山隅. 설 의사(薛義士)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을 말한다.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1895년(고종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큰……아니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먹고 마시기만 하는 사람은 남이 천하게 여기니, 작은 것을 길러 큰 것을 잃기 때문이다.〔飲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라고 한 대목을 말한다. 동전자(銅田子) 설진영(薛鎭永)을 가리킨다. 순창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등에 가계가 이어져 동전리의 지명을 본 따 동전 설씨(銅田薛氏)로도 불린다. 永 底本에는 "泳".《淳昌薛氏族譜》에 근거하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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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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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신연 과 이별하며 5수 別黃致實【信淵○五首】 천리 길을 왕래하는데 往來千里路아쉽게 설날160)에 이별하네 怊悵三朝別어찌하여 너무나 바쁜가 胡爾太悤悤슬프게도 궁귀161)가 빼앗네 傷哉窮鬼奪술도 없이 즐겁게 노닐다가 無酒以遨遊죽을 끓여 마주 앉아 마시네 煮饘相對歠누가 예절이 엉성하다 말하랴 誰言禮節疎친의가 친밀하기 때문이었네 爲是親誼密선군 생각하라는 말로 그대 권면하니162) 勖子先君思수없이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게 不回經百折그저 증별의 말로 대신하였으니 聊將當贈言아무쪼록 오늘을 잊지는 말게나 愼勿忘此日구당163)은 지금 세상의 길이요 瞿塘今世程구렁텅이는 내 집안의 방이네 溝壑吾家室훗날의 만남이 있을까 없을까 後會有乎不근심하는 마음만 괜히 산란하네 憂心空惙惙행색이 차츰차츰 멀어지니 行色看看遙무엇을 잃은 듯 멍해지네 茫然如有失눈이 희미해져 머리 돌리니 眼迷方首回나도 모르게 눈물 쏟아지네 不覺淚河決 往來千里路, 怊悵三朝別.胡爾太悤悤? 傷哉窮鬼奪.無酒以遨遊, 煮饘相對歠.誰言禮節疎? 爲是親誼密.勖子先君思, 不回經百折.聊將當贈言, 愼勿忘此日.瞿塘今世程, 溝壑吾家室.後會有乎不? 憂心空惙惙.行色看看遙, 茫然如有失.眼迷方首回, 不覺淚河決. 설날 원문의 '삼조(三朝)'는 세(歲)ㆍ월(月)ㆍ일(日)의 아침으로,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이다. 궁귀(窮鬼) 항상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그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일찍이 자신을 괴롭히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쫓아 버리겠다는 뜻으로 〈송궁문(送窮文)〉을 지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선군……권면하니 《시경》 〈연연(燕燕)〉에 "선군(先君)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先君之思, 以勖寡人.〕"라고 한 표현을 끌어온 것이다. 구당(瞿塘) 중국 사천성(泗川省) 삼협(三峽)의 하나인 구당협(瞿唐峽)을 말한다. 이곳은 강 양쪽 언덕이 가파르게 높이 치솟은데다가 골짜기 어귀의 강 가운데 염여(灎澦)라는 큰 바위가 서 있어 물살이 몹시 사납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전복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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