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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의 〈증과암〉 시에 보운(步韻)497)하다 2수 步敬山《贈果菴》韻【二首】 예로부터 한 뜻이 삼군보다 나았으니498) 從來一志勝三軍이해에 대해 언제 무게를 따졌던가 利害何曾較兩斤모두 가르침 받들고 스승 높일 책임 있으니 奉訓尊師均有責원컨대 힘을 합쳐 음산한 구름을 쓸어내세 願言同力掃陰雲인은 곡식 씨앗 같고499) 씨앗엔 뿌리 있으니 仁爲穀種種有根가을 열매가 끝내 익는 것도 봄에 시작되네 秋實終成厥始春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그대는 어진 사람이니500) 好惡知君仁者是향리에서는 드물게 그 후손을 번창케 하리라 必昌其後罕鄕隣 從來一志勝三軍, 利害何曾較兩斤?奉訓尊師均有責, 願言同力掃陰雲.仁爲穀種種有根, 秋實終成厥始春.好惡知君仁者是, 必昌其後罕鄕隣. 보운(步韻) 두 수 이상으로 된 다른 사람의 연작시 운을 따라서 차례대로 차운(次韻)하여 시를 짓는 것을 이른다. 화답시 중에 뜻은 문답하는 것 같으나 다른 운부(韻部)를 사용하는 것을 '화시(和詩)'라고 이르며, 운부는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을 '화운(和韻)', 글자는 같으나 순서가 다른 것을 '용운(用韻)', 순서까지 모두 같은 것을 '보운(步韻)'이라고 한다. 한……나았으니 《논어》 〈자한(子罕)〉에 "삼군을 거느리는 장수(將帥)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인(仁)은……같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인은 인심이다.〔仁, 人心也.〕"라고 말한 것에 대해, 주희가 주석에서 "정자가 말한 '마음은 곡식의 씨와 같고 인은 생생의 이치이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程子所謂心如穀種, 仁則其生之性是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능히……사람이니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제대로 좋아하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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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유고》129) 서문 雲巖遺稿序 《주역》에 이르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한지라 하루를 마치지 않고 떠나가니, 정하고 길하다."130)라고 하였는데, 부자(夫子 공자)가 이 말을 찬미하여 말하기를, "절개가 돌처럼 단단하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바로 결단함을 알 수 있다. 군자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 유순함을 알고 강함을 아니,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본다."131)라고 하였다. 송자(宋子 송시열)가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소중옹(疏仲翁)132)을 안타깝게 여겨 대서특필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운암옹(雲巖翁)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대직(臺職)133)을 역임하고, 명성과 덕망이 드높아 융중한 자리에 의망(擬望)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빛나게 하고 만종(萬鍾)의 봉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들이 앞날에 차례대로 있을 일로 기약되었다. 그러나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결단하여 호연(浩然)하게 〈귀거래사(歸去來辭)〉134)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구름이 걸쳐 있는 적막한 숲속에서 화락한 모습으로 유유자적하며 노닐었다. 아,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며, 얻을 줄만 알고 잃을 줄 몰라 승두(升斗)만한 조그마한 이익에 턱을 늘어뜨린 채 부유한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며 주는 음식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이러한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평소에 지었던 문고(文稿)는 산실되어 수습하지 못하였고, 만년에 주워 모은 것들 사이에서 얻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춘추》나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의 붓을 잡는 사람들이 송자(宋子)가 소중옹(疏仲翁)을 가엾게 여긴 것처럼 반드시 그를 대서특필하여 백세토록 썩지 않게 할 것이니, 보잘 것 없는 문고가 있든 없든 또는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자손의 마음에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삼가 모아서 약간을 엮었을 따름이다. 易曰。介于石。不終日貞吉。夫子贊之曰。介如石。焉用終日。斷可識矣。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萬夫之望。宋子哀疏仲翁所以見與於春秋綱目之書。而大書特書者。其不以是耶。雲巖翁少年釋褐。歷踐臺職。聲望藹蔚。期擬隆重。專城之榮。萬鍾之養。此其前頭次第事耳。然而見幾勇決。浩然賦歸。囂囂徜徉於雲林寂寞之中。嗚呼。知進而不知退。知得而不知喪。朶頤於升斗之利。垂涎於輕肥之憐者。曷足以知此等義諦耶。平日文稿散逸不收。而得於晩後掇拾之間者。亦無幾焉。然世之秉春秋綱目之筆者。必將大書特書。使之不朽於百世。如宋子哀疏仲翁。何待於區區文稿之有無與多寡哉。但子孫之心。不欲其泯然。謹輯之爲若干編云耳。 운암유고 대한제국 때 장흥(長興) 출신의 문신 정두흠(鄭斗欽, 1832~1901)의 문집인 《雲巖集》을 말하는 것으로, 1918년에 아들 제하(濟夏)가 편집ㆍ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4권2책이며, 목활자본이다. 운암은 정두흠의 호이고, 자는 응칠(應七)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처음 최상관(崔相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였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을 올렸으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개가……길하다 《주역》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보인다. 절개가……우러러본다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에 보인다. 소중옹(疏仲翁) 벼슬길에서 한창 득의(得意)했을 때 미련 없이 물러나 초야에서 자신의 지조를 지켰던 옛 인물이다. 대직(臺職) 대간(臺諫)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을 말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중국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80여 일 만에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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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경에게 써 준 서문 贈曺彛卿序 조군 이경(曺君彛卿)은 선정신(先正臣)의 후예이며 법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있고, 현철한 사우(師友)가 있어서 시례(詩禮)135)와 학문의 가르침에 종사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고,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136)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다.아, 서계(書契)137)가 만들어진 이후로 책 읽는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으며, 십실(十室)138)이 형성된 이후로 충신(忠信)의 자질을 지닌 사람을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 도를 듣고 천하 후세에 법을 드리운 사람은 얼마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라건대 이경은 이것을 돌이켜 구하여 통렬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사람으로 말하면 성인을 표준으로 삼고, 학문으로 말하면 도를 표준으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지극하지 못하거든 우리의 일에 결함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연히 이치를 가까이 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이다. 훗날 호남 고을에서 도를 창도한 기풍이 동남쪽 사이에서 크게 떨쳐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나는 이경의 한 무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曺君彛卿。以先正裔孫。法家子弟。有姿質之美。有師友之賢。而從事於詩禮學問之敎。眞所謂可與共學。可與適道者也。嗚呼。書契以後。讀書者何限。十室以往。忠信之質何限。然而聞其道而垂法於天下後世者。無幾焉。其故何居。願彛卿於此。反求而痛省之。言人則以聖爲準。言學則以道爲準。以爲一毫未至。便是吾事有闕。則自然切實近理。自住不得矣。他日湖鄕。若聞有倡道之風。大振於東南之間。則吾以爲出於彛卿一隊人也。 시례(詩禮) 가정에서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비유하는 말로, 공자가 뜰에 혼자 서 있을 때에 아들 이(鯉)가 지나가자 그에게 시(詩)와 예(禮)를 배웠는가 물어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일러 주며 공부하라고 훈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더불어……있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가 말하기를 "더불어 학문을 함께 할 수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서계(書契) 상고 시대에 나무에 새겨 썼다는 최초의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상고에는 노끈을 묶어 뜻을 전하여 다스렸는데, 후세에 성인이 서계로 바꾸었다.[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易之以書契.]"라는 글이 보인다. 십실(十室) 조그마한 고을을 비유하는 말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말하기를 "10여 가구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나[丘]처럼 충신한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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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천태산에 오르다 2수 偶上天台山【二首】 유유한 내 그리움은 강물처럼 길어 悠悠我思漢河長아득한 하늘 한쪽을 멀리 바라보네 極目杳然天一方무슨 생각으로 숲에서 앉고 눕는가 底意林間聊坐臥무단히 바위 위에서 혼자 방황하네 無端石上獨彷徨다정한 이웃 떡으로 배고픔 달래고 多情隣餠療飢腹사리 아는 아이의 술로 갈증을 푸네 解事兒樽沾渴腸가슴속 번뇌를 씻어내는 게 상쾌하나 滌過胸煩雖一快읊으며 돌아온 증광164)을 배우려 할까 詠歸詎擬學曾狂오래 세상 구경하며 길이 해를 보내고 싶어 久觀我欲度年長세상 밖으로 벽곡165)의 방법을 찾아 나섰네 物外行尋辟穀方유럽 아시아의 풍조에 질병의 고통이 생겨 歐亞風潮生疾痛영주산 천태산의 산천에서 혼자 방황하네 瀛台泉石獨彷徨어찌 성현이 남긴 가르침을 생각지 않는가 盍思聖哲曾垂訓한스럽게 선비의 무리도 마음을 바꾸었네 可恨儒流亦變腸아무리 따져 봐도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니 算去算來皆謾想무하향166)에서 술에 취해 광인이 되리라 無何鄕裏醉成狂 悠悠我思漢河長, 極目杳然天一方.底意林間聊坐臥? 無端石上獨彷徨.多情隣餠療飢腹, 解事兒樽沾渴腸.滌過胸煩雖一快, 詠歸詎擬學曾狂?久觀我欲度年長, 物外行尋辟穀方.歐亞風潮生疾痛, 瀛台泉石獨彷徨.盍思聖哲曾垂訓? 可恨儒流亦變腸.算去算來皆謾想, 無何鄕裏醉成狂. 증광(曾狂) 광(狂)은 뜻만 크고 행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데, 광이란 호칭을 받았으므로 증광이라 한 것이다. 《論語 先進》 벽곡(辟穀) 화식(火食) 하지 않고 생식을 하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을 말한다. 무하향(無何鄕)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흔히 이상향(理想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 논변하면서 말하기를 "현재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나무를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판에다가 심어 놓고서,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는가?〔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於無何有之鄕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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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경501)의 〈야귀재〉 시에 차운하다 次吳極卿《夜歸齋》韻 일만 솔 깊은 곳에 초가집 하나 있으니 萬松深處一茅堂자나 깨나 안풍502)을 누가 감히 잊으랴 寤寐安豊詎敢忘물 맑은 밭고랑엔 싹이 크는 걸 보겠고 水白田間看苗碩등불 푸른 책상에는 운초503)의 향기 있네 燈靑案上有芸芳문을 나섬에 어디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出門何地堪投足도를 걱정해 애가 끊이지 않은 적 없었네 憂道無時不斷腸썰렁한 지금의 사업일랑 얘기하지 말게나 泠淡休言今事業훗날 태괘의 양이 자라는504) 좋은 기반이니 好基他日泰陽長 萬松深處一茅堂, 寤寐安豊詎敢忘?水白田間看苗碩, 燈靑案上有芸芳.出門何地堪投足? 憂道無時不斷腸.泠淡休言今事業, 好基他日泰陽長. 오극경(吳極卿) 극경은 오병수(吳秉壽, 1883~1961)의 자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수산(壽山)이다. 사호(沙湖) 오익창(吳益昌)의 후손으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죽산(竹山)에서 출생하여 종숙 호산(壺山) 오죽하(吳竹下)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에 《수산집》 5권 3책이 있다. 안풍(安豐)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에 은거한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병수를 가리킨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동생행(董生行)〉이란 노래를 지어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운초(芸草) 향내 나는 풀로 책이 좀먹는 것을 방지한다. 태괘(泰卦)의 양(陽)이 자라는 1월에 해당하는 태괘는 양(陽)인 군자가 안에 있고 음(陰)인 소인이 바깥에 있으니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는 것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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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실 군이 멀리서 찾아왔다가 이별할 때에 최여중의 집에 함께 가서 세 사람이 회포를 펴다 무인년(1938) 黃君致實遠訪別時, 同至崔汝重家, 三人敍懷【戊寅】 세 벗505)의 난초 같은 말에 한 방이 향긋하나 三益蘭言一室芳문을 나서면 풍상이 들이치지 않는 곳이 없네 出門無處不風霜진나라 피할 망상에 복사꽃 뜬 물506)을 찾으나 避秦妄想尋桃水공자를 배우는 단방507)은 주자를 본받는 것이네 學孔單方法紫陽북리의 두터운 정에 돌아보는 마음 많았는데 北里厚情多眷眷서원의 높은 의기 또한 당당하네 西原高義亦堂堂하룻밤 옛사람의 글을 읽는 것보다 나으나 一宵勝讀前人語나는 무지하여 부끄럽고 감사하기 그지없네 而我空空愧感長 三益蘭言一室芳, 出門無處不風霜.避秦妄想尋桃水, 學孔單方法紫陽.北里厚情多眷眷, 西原高義亦堂堂.一宵勝讀前人語, 而我空空愧感長. 세 벗 원문의 '삼익(三益)'으로, 세 사람의 유익한 벗이라는 말이다.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라는 말이 나온다. 복사꽃 뜬 물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 또는 이상향을 비유한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진(秦)나라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단방(單方) 원래는 민간에서 전래되는 약방문으로, 한두 가지 약재를 쓰지만 신통하게 효력이 잘 나타나는 약을 말한다. 전하여 여기서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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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회안》 서문 興學會案序 완도군(莞島郡)은 남해(南海)의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 있고, 서울에서 천여 리나 떨어져 있어 문물(文物)과 예교(禮敎), 의장(儀章)의 등위(等威)가 내륙 지역의 여러 군(郡)들보다 조금 손색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해의 운세가 양구(陽九)139)를 침범하고, 구야(九野)140)가 막혀 이단의 학설과 가르침이 날로 치성하고 달로 확장하면서 바람에 휩쓸리고 파도에 진탕되어 마르고 깨끗한 땅이 없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완도의 선비들이 먼저 부자묘(夫子廟)를 세우고, 그 다음에 학문을 진흥시키는 규례를 갖추어서 학교에 모여 시서(詩書)의 학업을 강습하고, 제물을 진설하여 읍(揖)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익히는 것이 성대하게 바람이 불 듯 유행하여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이는 내륙 지역의 여러 군에는 없는 것이니, 어찌 기수(氣數)가 순환하여 드러나고 감추어짐에 때가 있어서 그렇겠는가. 어쩌면 하늘이 사문(斯文)을 다 잃지 않고자 하여 한 줄기 양맥(陽脈)을 한 모퉁이 지역에 모아 두게 함으로써 훗날 크게 올 장본(張本 일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것인가?무성(武城)에서 소 잡는 칼을 사용했다고 한 것은 대체로 자유(子游)가 홀로 실행한 것을 훌륭하게 여겨서인데141), 하물며 오늘날 같은 세상에 궁벽하고 삭막한 바닷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며 시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랴. 만약 부자(夫子 공자)가 살아계셨다면 어찌 빙그레 웃을 뿐이겠는가.민중(閩中)142)은 예로부터 먼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일컬어졌는데, 치산(廌山)과 구산(龜山)143) 두 선생을 얻고 나서 마침내 천하의 문명한 고을이 되었으니, 지금의 완도군이 다만 당시의 민중이 되지 않게 될 줄 어찌 알겠는가. 오직 완도군의 선비들은 노력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 계(契)는 김군(金君) 석욱(錫旭)이 창도하였는데, 그의 벗 관산(冠山 장흥(長興))의 김군(金君) 영엽(泳燁)을 통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莞之爲郡在南海窮漠之濱。去京師千餘里。文物禮敎。儀章等威。不能無少遜於內地諸郡久矣。歲侵陽九。九野閉塞。異說異敎。日熾月張。風靡波盪。無地乾淨。然而莞之士。先立夫子廟。次設興學之規。講聚乎庠塾詩書之業。遊習乎樽俎揖讓之節。蔚然風行。俗以丕變。此是內地諸郡所未有也。豈氣數循環。而顯晦有時者然耶。抑天不欲盡喪斯文。而使一縷陽脈。收斂翕聚於一隅之地。以爲他日大來之張本耶。武城牛刀。蓋善子游之獨行。況在今日域中。而得聞其一隊絃誦之聲於窮漠之濱。若使夫子而在焉。則豈惟莞笑而已哉。閩中古稱蠻荒之區。而得廌山龜山兩先生。遂爲天下文明之鄕。安知今日之莞。獨不爲當日之閩耶。惟莞之士。勉之勉之。是契也。金君錫旭倡之。因其友冠山金君泳燁。問序於余云。 양구(陽九) 음양도(陰陽道)에서 수리(數理)에 입각하여 4천 5백년 되는 1원(元) 중에 다섯 번 발생하는 양액(陽厄)과 네 번 발생하는 음액(陰厄)을 합한 말로, 극에 달한 재액(災厄)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대한제국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을 비유한다. 구야(九野) 하늘의 팔방과 중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온 세상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성(武城)에서……여겨서인데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論語 陽貨》 민중(閩中) 지금의 복건성(福建省)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하며 성리학을 대성하였다. 치산(廌山)과 구산(龜山) 치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유초(游酢, 1053~1123)의 호로, 당시 지부구현(知扶溝縣)이었던 정호(程顥)의 부름을 받아 학사(學事)를 맡고 그때부터 정호 형제를 사사하였다. 구산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양시(楊時, 1053~1135)의 호로, 정호 형제를 사사한 뒤 이정자(二程子)의 도학을 발전시켜 낙학(洛學)의 대종이 되었고, 주자(朱子)를 비롯하여 장식(張栻)ㆍ여조겸(呂祖謙) 등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은 여대림(呂大臨)ㆍ사량좌(謝良佐)와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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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노인수연시집》의 서문 禮洞老人壽筵詩輯序 인생 육십을 옛사람은 하수(下壽)라 하였으나, 세대가 내려오면서 운수(運數)가 모질어져 백성들이 요절한 경우가 많았고, 요행히 이 나이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병들어 쇠약하고 곤궁하여 외롭게 지내며 삭막하게 세상사는 재미가 없게 되었다. 대체로 사람 중에 하수를 얻은 자가 열에 둘이 되지 않고, 하수까지 살면서 운수에 별 탈이 없는 자가 또 다섯에 하나가 되지 않으니, 이른바 "양(陽)은 획[━]이 하나이고, 음(陰)은 획[╍]이 둘이기에 길함은 적고, 흉함은 많다."라는 것이 바로 이치와 형세상 그렇게 되는 것이다.내가 듣건대 예동(禮洞) 하군(河君)의 구갑(舊甲 환갑(還甲))이 되는 생일이 올봄에 있어서 여러 날 동안 장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집안사람은 온화하고 자신은 건강하여 안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밖으로는 별 탈이 없으며, 아래로는 여러 자제들이 난초의 뿌리처럼 함께 자라고, 손자들이 난초의 잎처럼 서로 비추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복의 풍성함이 오늘날 같은 말세에 견줄만한 이가 드물었다. 모르겠지만, 어떻게 수양(修養)했기에 향유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인가? 듣건대, 맏아들 해수(海秀)가 부지런히 일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여 효성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의복과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휼해 주었다고 하니, 상서로움을 가져오고 복을 받는 것이 또한 여기에서 한 단서를 증험해 볼 수 있다.고을 사람들이 서로 경축하고, 벗들이 모여 축하하며 시를 읊어 주고받은 것이 책을 이룰 만큼 쌓이자, 그해 가을에 손주를 안은 성욱(性煜)이 초라한 내 집으로 찾아와 그 일에 대한 서문을 지어 첫 부분을 장식해주길 요청하였다.아, 나도 올해 또한 회갑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미 병으로 피폐한데다 또 홀로 곤궁하게 지내고 있으니, 덕과 복이 있는 집안사람과 비교하면 그 운수가 미치지 못함이 어찌 30리 뿐이겠으며, 옥돌 잔에 들어있는 술과 질항아리에 담긴 평범한 음식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어 부럽게 여기는 뜻을 담아 보내고, 또 같은 세상을 함께한 동경(同庚 동갑(同甲))으로 인생의 막바지에 만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칠 따름이다. 人生六十。古人謂之下壽。然世降氣促。民多夭折。幸而至於此者。又多衰癃窮獨。索然無聊。蓋於人而得下壽者。未爲十之二。下壽焉而氣數無恙者。又未爲五之一所謂陽一而陰二。吉少而凶多者。乃理勢之使然也。余聞禮洞河君舊甲晬日。在於今春。而行壽老之宴者。有日矣。家溫身康。內而偕老。外而無故。下而羣蘭倂茁。孫葉交映。其天餉之豊。在今衰叔而鮮見其比。未知何修而所享若是。聞其胤子海秀。服勤致養。以孝著聞。縮衣節食。以賙貧乏。其所以致祥受福。亦可卽此而驗其一端矣。鄕閭相慶。朋友聚賀。歌詠酬唱。積爲卷軸。其年秋。抱孫性煜過敝廬。請序其事以弁其端。嗚呼。余於今年。亦爲回甲人矣。而旣病廢矣。又窮獨矣回視德門福家。其氣數之不相及。奚啻三十里哉。瑟瓚黃流。瓦缶褻味。蓋不可易也。玆敢力疾行墨。以酬歆艶之意。又以寄倂世同庚戀戀覯降之思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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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구씨 행장 淑夫人具氏行狀 부인은 성이 구씨이고 세계(世系)는 능성(綾城)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민첨(民瞻)이 상세(上世)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고조인 휘 삼익(三益)은 진사(進士)였고 증조인 휘 채(埰)도 진사였으며 조부인 휘 찬원(贊源)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 상윤(相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비(妣)는 고성 이씨(固城李氏) 석윤(錫淵)의 딸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 12월 14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이 어려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첨지중추부사공이 언문(諺文)으로 《소학(小學)》을 적어 부인을 가르쳤다. 또 "남자는 요순(堯舜)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여자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46)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고, 인하여 학임(學任)으로 이름을 짓고 15세에 계례(笄禮)를 치르자 희임(希任)으로 자(字)를 지어 주었다. 부인은 교도(敎導)와 훈계(訓戒)를 따르며 감히 어기지 않았다. 18세에 처사공(處士公) 이지호(李贄鎬)에게 출가하였다. 공경과 순종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남편을 섬겼으며 동서들에게도 온화하고 공손하며 화목하게 지내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시어머니 박씨(朴氏)가 나이도 많고 병환이 위중하여 항상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보살피고 섬기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한 번도 편안히 쉬지를 않아 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소박하고 초라한 의복과 음식으로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이웃의 아녀자가 조롱하며 비웃는 말을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배부르기를 기약하지만,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안의 아내는 굶주릴 것을 각오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니 어찌 괴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소 살림살이는 매우 검약하였지만 제사를 받들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은 어떻게든 주선하고 장만하여 기어코 풍성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자 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고 피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롭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며느리에게 경계하기를, "아녀자의 행실은 순종이 으뜸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훈계나 명이 규중(閨中)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말소리가 문밖으로 들리지 않았으니, 가풍(家風)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집안이 어렵고 궁핍해져 여러 아들이 이를 걱정하자 부인이 책망하기를, "가난은 선비의 일상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너희들이 학문을 그만두어 집안의 명성이 실추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행동거지가 침착하여 태만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은 온화하면서도 절도있게 대하고 동복(僮僕)은 은혜로우면서도 엄하게 다스려 가까운 이웃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면서 흡족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갑진년(1904, 고종41)에 숙부인에 봉해졌는데, 이는 추증(追贈)된 남편을 따라 봉호(封號)를 받은 것이다. 무신년(1908, 순종2) 1월 4일에 생을 마쳐 비사등(飛沙嶝) 선영의 오른쪽 산등성이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자는 승우(承愚), 차자는 승정(承正)이고 딸은 동복(同福)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어리다. 아, 내가 지남옹(芝南翁)47)과 종유(從遊)하고 또 그의 윤자(胤子)와 앞뒤로 수십 년간 교유하면서 숙부인이 집안에서 보인 품행이 훌륭하고 자애로운 가르침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익히 들었다. 지금 그 집안의 가장(家狀)을 보니 전에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으니 부모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다. 더욱 힘을 쏟아 학문을 그만두지 않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당시 숙부인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빛내는 도리일 것이다. 夫人姓具氏。系出綾城。麗朝平章事諱民瞻。其上系顯祖也。高祖諱三益進士。曾祖諱埰進士。祖諱贊源贈戶曹參判。考諱相允僉樞。妣固城李氏錫淵女。以純祖癸巳十二月十四日生。夫人幼而能言。僉樞公以諺文。書小學以敎之。且曰。男子當以堯舜爲法。女子當以任姒爲法。因名之以學任。及笄字之以希任。夫人遵循敎戒。無敢違越。十八歸于處士李公贄鎬。奉舅姑事君子。克敬克順。與娣姒溫恭和洽。未有間言。其姑朴氏年高沈疾。常在床褥。晝夜侍供。殫誠竭力。雖勞苦之極。未嘗就便。見者一辭稱賞。家貧甚。縕袍麤糲。處之裕如。隣家婦女。有譏笑之言。夫人曰。業農之家。其妻必飽。業儒之家。其妻必飢。此是常事。何足怪也。日用調度。極其儉約。而至於奉祭祀接賓客。周旋營辨。期於豐潔。夙興夜寐。血力拮据。以至事力稍紓。嘗戒諸婦曰。女子之行。以順爲上是故敎令不出於閨中言語不聞於門外。其家風爲何如也。晩年家力艱乏。諸子以爲憂。夫人責之曰。貧者士之常。不足爲憂。而但恐汝輩失學以墜家聲也。性度溫仁。動止安詳。怠慢之氣。不形於色。華麗之物。不近於身。待宗族和而節。御僮僕惠而嚴。至於比近隣里。無不懽然稱愜焉。甲辰封淑夫人。蓋從其君子追贈也。戊申正月四日卒。葬飛沙嶝先壟右岡午坐原。生二男一女長承愚次承正。女適同福吳桂泳。孫男女皆幼。嗚乎。余從芝南翁遊。又與其胤子遊。前後數十年。其內行之備。慈誨之美。稔聞久矣。今見其家狀。與前所聞者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更惟勉力。無失其學。無墜家聲如當日之敎也。此實立揚顯親之道。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태임은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사는 무왕(武王)의 어머니로 모두 어진 후비(后妃)였다. 지남옹(芝南翁) 남편인 이지호(李贄鎬, 1836∼1892)의 자호(自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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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오공 행장 松庵吳公行狀 송암 오공의 휘는 수화(壽華), 자는 태중(泰仲)이다. 고려조의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48)이 공의 시조(始祖)이다. 4대를 내려와 휘 현필(賢弼)에 이르러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지고 이로 인하여 보성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대대로 작위와 공훈이 드러났다. 휘 충을(忠乙)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현손(玄孫)인 휘 익손(益孫)은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 보성으로부터 능주(綾州)의 대곡(大谷)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인하여 무덤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부터 오씨는 능주에 살게 되었다. 증손인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절제사(節制使)로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하여 조정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하고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공의 8대조이다. 고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후유(厚有)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이다. 고(考)는 휘가 치상(致祥)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며 효성과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경우(警禹)의 딸로 일송(一松) 홍치(洪治)49)의 후손이다. 헌종 을미년(1835, 헌종1) 11월 무자일에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스스로 말하고 먹을 줄 알게 되자 응대와 대답에 어김이 없이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8세 때 대인(大人)이 몸소 밭을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서 대인을 대접하려고 하자, 주막 아낙이 공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안주까지 갖추어 주고서 값을 말하지 않았다. 맏형과 뜻을 같이하고 경서를 물려받아 쓰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세가 되자 맏형에게 이르기를,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셨으니 우리 형제는 형편상 함께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맡아 늙은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 또 형님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몸소 부지런히 일하여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대인(大人)의 성품이 준엄하여 노기를 띨 때마다 집안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온화한 말로 넌지시 간하여 대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대인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둘째 아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저절로 풀어진다."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매우 위독해지자 여러 날에 걸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뽑아 바쳤으며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몸이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애통해하는 모습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대인이 연로한 나이에 배필을 잃은 것을 보고 마음이 공허하고 적적할 것을 염려하여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까운 옛친구들을 초빙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년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분가(分家)를 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집안일은 반드시 부친의 일을 먼저 처리한 뒤 자기 집안일을 처리하였다. 형제 5인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각각 성가(成家)를 하여 차례차례 분가(分家)하게 되자 살림을 차리는 데 필요한 온갖 것에 대하여 공이 반드시 물자를 대어주어 형 집에서 나누어 내는 비용이 없도록 하였다. 얼마 뒤 여러 아우에게 이르기를, "아버님의 연세가 매우 많으시다. 공양하는 의절은 나중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찌 오로지 큰형님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있겠는가. 한 달 중에서 15일 치 양식은 내가 드릴 것이니 나머지 15일은 너희 세 명이 각각 5일 치씩 드리거라."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 번갈아 양식을 대어 매우 극진히 봉양하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 노쇠했다는 이유로 애통함을 누그러트리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와 산재(散齋)에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큰형을 섬기는 것도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하여 크고 작은 집안일을 반드시 여쭌 다음 거행하였다. 큰형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설사를 하면 그때마다 자기 손으로 치웠다. 형의 자식을 보살피는 일도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여 갖가지 보살피는 일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여러 아우와 여러 제부(弟婦)도 역시 서로 친애하여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함께 나누었다.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까지 미치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일찍이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도중에 그 사람이 병에 걸리자 함께 오던 이들은 모두 먼저 떠났지만, 공은 행낭 안의 물건을 팔아 그를 치료해주고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왔다. 이웃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집을 짓도록 물자를 대주어 편안히 지내도록 하였고 열읍(列邑)의 선비들이 글방을 마련하려고 하자 공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알아보아 일이 진척되도록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마련하여 종족(宗族)을 화목하게 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 고향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빈궁한 교우(交友)나 가난한 친족이 살아가기 어려우면 그때마다 진휼(賑恤)하였고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사망(死亡)과 상사(喪事)에 문안하거나 물품을 보내는 일을 그때마다 빼놓지 않았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비적(匪賊) 무리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공은 자제(子弟)들과 친척을 모아놓고 잘못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평소에 인륜(人倫)을 사랑하고 선(善)을 즐겨 행하며 의(義)를 좋아하였고 화려한 명성이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별서(別墅)를 짓고 작은 길을 내어 오가며 시를 읊조리고 빈객이나 벗이 이르면 그때마다 곧바로 잔을 돌려 술에 취하면서 몹시 즐거워하였다. 평소 행실이 쌓이자 명망이 암암리에 드러나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의 유림이 조정에 천거하고 아뢰어 침랑(寢郞)에 제수되고 정문(旌門)을 세우는 표창을 받았다. 여러 아들이 정문을 세우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무엇 하나 잘한 것이 없건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되어 하늘을 속인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굳이 물리쳤다. 이 때문에 여러 아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봄 병이 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자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경계하기를, "효(孝)로 선조를 받들고 의(義)로 자식을 가르치며 선한 자가 아니면 사귀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야 선대의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보화(寶貨)는 써버리면 다 사라지지만 충효는 누려도 끝이 없다. 학식을 쌓자면 반드시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농사를 업으로 삼자면 반드시 힘을 다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하거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세상을 떠나니 곧 3월 27일이었다. 향리(鄕里) 인사(人士)들은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칠송(七松)의 가락동(嘉樂洞)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곧 전배(前配) 고씨(高氏) 묘의 왼쪽이었다. 고씨는 본적이 장택(長澤)이고 시우(時祐)의 딸이며 참의를 지낸 신부(臣傅)의 후손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다. 계배(系配)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석우(錫祐)의 딸이며 학성군(鶴城君) 완(完)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장섭(長燮), 덕섭(德燮)이고 딸은 이승정(李承正)에게 출가하였다. 장섭은 재동(在東), 재남(在南), 재경(在慶)을 낳았고 덕섭은 재원(在元)을 낳았다. 아,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로웠으며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의가 있었다. 또 마음 씀씀이가 후덕함에 가까웠으며, 처신은 주도면밀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자애롭고 인정이 넘쳤으며 일 처리는 공평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사람이나 외부인이나 공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공을 편안하게 여겼다. 자신은 화락함을 누리고 집안은 이로써 평안하였으며 훌륭한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시경》 〈벌목(伐木)〉에서 노래한 '신이 들어주어 마침내 화평하게 되리라.'는 것이 공을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지우(知遇)를 입어 앞뒤로 20년에 걸쳐 논의를 반복하며 깨우침을 얻었고 출입하며 의지하였으니 그 힘이 적지 않았다. 어찌 공이 조금 더 머물지 않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버릴 줄 알았겠는가. 장섭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행장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습니다. 대인과 서로 잘 알던 분으로 말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식견이 천박하고 고루한 몸이라서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차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을 약술하여 돌려 보낸다. 松庵吳公諱壽華。字泰仲。勝朝文襄公諱延寵。其鼻祖。四傳至諱賢弼。封寶城君。因以貫焉。世著爵勳。至諱忠乙。入我朝。官贊成。玄孫諱益孫。以學行除寢郞。自寶城葬其親於綾州大谷。因寓墓下。綾之有吳始此。至曾孫諱邦翰。壬辰之亂。以節制使殉節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八代祖也。高祖諱世觀贈戶曹參判。曾祖諱厚有。僉樞。祖諱錫永號竹湖。考諱致祥號溪隱。孝友著聞。妣豐山洪氏警禹女。一松治后。以憲宗乙未十一月戊子。生公于七松里。自能言能食。應對唯諾。承順無違。父母有疾。涕泣廢食。八歲見大人躬耕。心甚悶然。竊往店幕。將沽酒餉之。酒媼嘉其意。具與肴饌而不言其直。與伯氏共方連業。晝夜不懈。至成童。謂伯氏曰。家貧親老。吾兄弟勢難倂學。吾當幹家。安養老親。又使兄專業。不亦可乎。躬服勤勞。家力稍舒。大人性峻。每有怒色。家人莫出一語。公溫言幾諫。輒廻其意。大人嘗語人曰。吾與二兒言。不覺怒氣自解。母夫人有病甚劇。血指延數日。遭故。毁瘠過甚。哀動傍人。見大人年高喪耦。慮有窮寂之懷。日夕不離側。招致故舊所善以悅其意。中年以親命析箸。而晨昏不廢。家務必先幹父而後及於私。兄弟五人。友愛甚篤。及各有室。次第析箸。而其設産凡百。公必資給。使兄家無分損之費。旣而謂諸弟曰。親年極隆。供養之節。不可歇后。豈可專委於伯氏耶。一月之內。十五日之養。我當供之。餘十五日。君三人各供五日也。自是迭相進供。備極其養。執喪哀戚。不以衰老自恕。遇諱辰。致齋散齋。極其誠敬。事伯氏如嚴父。家事巨細。必稟而行。有疾。晝夜扶持。泄痢輒掬而除之。撫愛兄子恩意甚至。種種周恤。無所吝。諸弟諸婦。亦相親愛。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各得其心。嘗自京還。同行一人。中路遘疾。諸伴皆先去。公賣行槖什物。爲之調治。俟其愈而同歸。隣有火患。出力營構。使之安堵。列邑多士。將營講舍公嘉其意。爲之血力周章。俾就其緖。設門憲以睦宗族。立洞規以和鄕井。遇飢歲。窮交貧族。有難存活。輒加賑恤。吉凶死喪。存訊贈遺。隨時不替。甲午匪徒大熾。公會子弟族戚。戒勿犯。平日愛好人倫。樂善嗜義。於聲華利達泊如也。築室開逕。嘯詠其中。賓朋至。輒行酒酣暢。極其歡洽。平生積累。聲譽闇章。鄕道儒林。薦報於朝。除寢郞。蒙旌褒諸子將營棹楔。公曰。無一善狀而至有此擧是欺天也。人而欺天。於心安乎。固却之。是以諸子不果。乙未春。遘疾幾危。會家衆戒之曰。奉先以孝。敎子以義。非善不交。非禮不行。可以不失先業也。寶貨用之有盡。忠孝享之無窮。績學必要其成。業農必盡其力。爾輩識之。言終而逝。卽三月二十七日也。鄕里人士知不知。莫不痛惜。葬七松之嘉樂洞午坐原。卽前配高氏墓左也。高氏籍長澤。時祐女。參議臣傅后。早逝無育。系配金海金氏錫祐女。鶴城君完后。生二男一女。長燮德燮。李承正也。長燮生在東在南在慶。德燮生在元。嗚乎。公孝於父母。友於兄弟。睦於宗族。信於朋友用心近厚。行己周愼。接物慈惠。處事公平。是以內外懷之。上下安之。身享和樂。家用平康。令聞令望。藉藉人口所謂神之聽之。終和且平者。非公之謂耶。猥受知遇。前後二十年之間。所以往復規警出入倚仗者。其力爲不少矣。豈知公不少留而遽棄乃爾耶。長燮持家狀示余曰。狀行。非平素相熟不可。與大人相熟。匪公伊誰。余以淺陋。固知其有難承膺。而撫念事契。有不忍終辭者。略舒梗槪以還之。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윤관(尹瓘)과 여진을 정벌하는 데 참여하였다. 홍치(洪治) 1441~1513.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저서로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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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묵계 박공 행장 贈嘉善大夫戶曹參判黙溪朴公行狀 공의 휘는 장근(章根), 자는 진초(震初)이고 묵계는 그의 호이다. 세계(世系)는 진원(珍原)에서 나왔으며 직제학을 지낸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50)이 공의 중조(中祖)이다. 세자사부(世子師傅) 증 이조 판서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51)이 공의 7대조이다. 죽천(竹川)은 휘 근효(根孝)를 낳았다. 근효는 호가 만포(晩圃)이고 관직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훈(功勳)으로 이름이 났다. 군자감 정은 휘 춘수(春秀)를 낳았다. 춘수는 호가 아수(我誰)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관직은 직장(直長)을 지내고 병자년(1636, 인조14)에 의병을 일으켰다. 직장은 휘 몽형(蒙亨)을 낳았다. 몽형은 호가 농은(農隱)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보성(寶城)에서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살았으며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만리(萬履)는 참봉을 지냈고 조부 휘 무석(武錫)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고(考)인 휘 수원(守遠)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진주 소씨(晉州蘇氏) 식(植)의 딸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계비(繼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유중(維重)의 딸로 부덕(婦德)으로 칭송을 받았고 영조(英祖) 계유년(1753, 영조29) 10월 9일에 장흥부의 녹동리(鹿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장난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부모님 곁을 지키며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스승에게 나아가52) 공부하게 되자 송독하여 익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조금 자라서는 직접 집안일을 처리하여 집 안팎을 드나들며 온 힘을 다하였고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일이 끝나고 여력이 있으면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고 책을 읽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문장의 이치와 문사(文詞)의 화려함이 찬연하게 날로 성취를 이루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과거를 위한 공부는 위기(爲己)의 학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또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는 없다." 하였다. 늘 경전의 주지(主旨)에 몰두하고 예설(禮說)의 단서를 찾는 것을 존심치기(存心治己)의 근본으로 삼았다. 집안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반드시 의절(儀節)을 강구(講求)하여 하나하나 예를 따랐으며 일찍이 임시방편으로 시속(時俗)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친척이나 오랜 벗들이 공을 본받아 행하였으며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앞다투어 공에게 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을 당했을 때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애통함에 몸이 무척 수척하게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났다. 봄, 가을이 되면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며 슬퍼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는 듯이 하였고 삭망(朔望)이 되면 분영(墳塋)에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와 큰 이불로 함께 자는 일을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재숙(齋塾)을 세워 서적을 비치하고 사우(師友)를 맞이하며 자손의 과정(課程)을 점검하였는데 분명하여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 친척이나 이웃이 병이 들거나 죽어서 상례를 치르거나 굶주리거나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안부를 묻고 진휼하면서도 집안에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선영 아래에 집 한 칸을 짓고 영모(永慕)라고 편액을 걸었다. 매번 경사스러운 날이나 좋은 계절이 오면 친족을 불러 모아 정겨운 담화를 펼치고 벗들을 모아서 그윽한 정취를 드러내고 자제와 향리(鄕里)의 젊은이들을 불러서 강서(講書) 규정이나 독법에 대한 의절을 거행하였다. 평소에 공경과 근신(謹愼)으로 자신을 지키고 충직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여 소문이 미치는 곳에서는 애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군자다운 어른으로 추앙하였다. 을미년(1835, 헌종1) 6월 4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83세였으며 살던 동네인 시근등(柿根嶝)의 사좌(巳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정환(廷煥)이 수직(壽職)53)을 받아 귀하게 되면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흥덕 장씨(興德張氏) 세준(世浚)의 딸로 3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재무(載茂), 재충(載忠), 재철(載喆)이다. 계배(繼配)는 인천 이씨(仁川李氏) 진계(震啓)의 딸로 2남을 두었으며 이름은 계환(桂煥), 정환(廷煥)이며 정환은 수직(壽職)으로 대호군(大護軍)의 품계에 올랐다. 손자는 중흥(重興), 중회(重會)54), 중운(重運)55),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56),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57)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준수하고 특출한 자질로 시(詩)와 예(禮), 문헌을 갖춘 집안에 태어나서 가풍의 영향을 받고 학문과 덕행을 갈고닦아 이처럼 우뚝하게 수립하였다. 마땅히 가슴에 품은 경륜을 펼쳐 한 시대에 쓰여야 했건만 동강(東岡)58)을 굳게 지키고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공에게는 진실로 유감이 없겠지만 사세(斯世)의 아쉬움이 어떠하겠는가. 공의 계윤(季胤)59) 중순(重淳)이 아들 기현(琦鉉)을 보내 공의 덕을 서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근방에 사는 후생(後生)으로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삼가 공을 우러러 흠모한 지 진실로 매우 오래되었다. 이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약간의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보태었다. 公諱章根。字震初。黙溪其號也。系出珍原。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其中祖也。世子師傅贈吏曹判書竹川先生諱光前。其七世祖也。竹川生諱根孝。號晩圃。官軍資監正。壬辰著勳。監正生諱春秀。號我誰。中司馬。官直長。丙子擧義。直長生諱蒙亨。號農隱。通德卽。自寶城移寓長興府。是公之高祖也。曾祖諱萬履。參奉祖諱武錫。贈司僕寺正。考諱守遠。贈左承旨。妣晉州蘇氏植女。無育。繼妣寶城宣氏維重女。以婦德稱。以英廟癸酉十月九日。生公于府之鹿洞里。幼而岐嶷。不好戱遊。日侍親側。唯諾唯謹。就傅上學。誦習不放。家貧甚。稍長。躬幹家務。出入竭蹶。備極忠養。行有餘力。輒侍側讀書。以悅親志。文理詞華。斐然日就。嘗曰。功令非爲己之學。居今之世。雖不可廢。而亦不可以專力於此也。每潛沈經旨。紬繹禮說。以爲存心治己之本。家有冠婚喪祭。必講求儀節。一一從禮。未嘗苟且循俗。是以親戚知舊。效而行之。有未瑩處。爭來取決焉。遭前後喪。一遵家禮。哀毁備至。杖而後起。春秋霜露。悽愴如見。朔望墳塋。展省無闕。與兄弟友愛甚篤。長枕大被。老而不替。立齋塾儲書籍。邀師友課子孫。無不的有成規。族戚隣里。有疾病死喪及飢饉匱乏。輒存訊之賙恤之。不知家力之不贍也。晩構一室於先壟下。題其顔曰永慕。每以佳辰良節。會族親以舒情話。聚朋舊以暢幽情。招子弟及鄕里少年。行講規讀法之儀。平居以恭謹持己。以忠慤接物。風聲攸曁。無不愛慕欣欣。以君子長者推之。乙未六月四日考終。享年八十三。葬于所居坊柿根嶝巳坐原。以子廷煥壽貴。贈戶曹參判。配興德張氏世浚女。擧三男。曰載茂載忠載喆。繼配仁川李氏震啓女。擧二男。曰桂煥廷煥。壽陞大護軍。孫曰重興重會重運重玟重萬重龍。重淳官通政。重熙重憲。曾孫以下不盡錄。嗚乎。公以秀爽雋異之資。生於詩禮文獻之家擩染濯磨偉然植立如此宜其有展布蘊藉。以需一時之用。而固守東岡。優遊卒歲。在公固無憾焉。而爲斯世之缺望爲何如耶。公季胤重淳。伻其子琦鉉來謁狀德之文。余以傍近後生。雖靡倂世。而嘗竊慕仰。固已久矣。玆不敢以匪其人牢辭。謹据家狀。略加修潤焉。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 1368?∼1446?. 초명은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 영암 군수(靈巖郡守),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죽천 선생(竹川先生) 휘 광전(光前) 1526∼1597.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헌릉 참봉(獻陵參奉), 왕자의 사부(師傅), 함열(咸悅)·회덕(懷德)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장이 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중흥(重興), 중회(重會) 《송사집》에 실린 〈증호조참판박공묘지명(贈戶曹參判朴公墓誌銘)〉에 따르면, 첫째인 재무(載茂)의 아들이다. 중운(重運) 둘째인 재충(載忠)의 아들이다. 중민(重玟), 중만(重萬), 중룡(重龍) 넷째인 계환(桂煥)의 아들이다. 중순(重淳), 중희(重熙), 중헌(重憲) 다섯째인 정환(廷煥)의 아들이다. 동강(東岡)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는 곳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선세(先世) 이래로 국가에 대한 공훈과 임금의 은총이 대를 이어 왔는데 그대만 어찌하여 동강의 언덕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勳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는 구절이 있다. 계윤(季胤) 막내아들의 맏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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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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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일전에 왕림하여 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쇠약하여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지팡이를 집고 찾아가서 답례할 예의도 갖추지 못했는데,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서 거의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근래에 경학에 힘쓰며 지내시는 생활은 때에 맞추어 평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러러 그리워하는 구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제대로 힘을 쏟지 못하였고 늙어갈수록 더욱 황폐해지고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에 이르지 못할까 절박하게 한탄만 할 뿐입니다. 애산(艾山)의 자【尺】와 저울【枰】에 대한 가르침은 전날에 우리 두 사람이 마주하여 펼친 내용들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합일(合一)과 분수(分殊)를 성(性)의 측면에서 보는 것은 합당하나, 거기에 심(心)이라는 한 글자를 더하여 넣어서 합일로 간주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일전에 영남의 선비 한 사람이 호남의 한 곳에 보내온 편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편지에 "치우쳐서 말하면 성(性)이요, 전체적으로 말하면 심(心)이다"라고 하였고, 또 "오성(五性)은 각기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그것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 바로 심(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영남의 여러 노숙(老宿)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설과 같다면, 찬연히 분명히 나뉜 것이 성(性)이고 혼연하여 하나로 된 것이 심(心)이며, 소덕(小德)이 성이고 대덕(大德)이 심이며, 체용(體6用)이 서로 다른 성품이고 본말(本末)이 서로 다른 형상이니, 그 뜻이 불가함이 당연합니다. 무릇 심(心)에 대해 극히 정미한 경지에서 말한다면, '심(心)은 태극(太極)과 같다'라 하고, '오직 심(心)만이 상대되는 것이 없다'라고 하며, '몸에서 주재하는 것이 심(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경계에 이르러 말하면, 심(心)이 곧 성(性)이고, 성이 곧 심이니, 어찌 구별하여 말하여 한 개의 성(性)자를 심(心)과 서로 견주어서, 한편으로는 치우침에 속했다가 한편으로는 전체에 소속시키겠습니까. 경함차록(景涵箚錄) 책자에 또한 이 내용이 담겨 있으니, 그와 함께 찬찬히 서로 의논하여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日者枉顧。何等感戢。而病骨殘喘。末由杖。策以擧回謝之儀。而駸駸日月。又爲幾旬朔矣。未審經體動靜。與時安宜。溯仰區區不任。義林少而不力。老益荒廢。日暮道遠。只切難逮之恨而已。艾丈尺枰之喩。前日吾兩人對攄之說盡矣大抵合一分殊當於性上看不當添入一心字以作合一看。日前得嶺儒一人抵湖南一處書。有曰。偏言則性。全言則心。又曰。五性各一其理。而其所以合一者心也。未知此說出於嶺中諸老宿之口耶。若此說。則粲然底是性。渾然底是心。小德也是性。大德也是心。體用異品。本末殊狀。其不可也決矣。夫心極其精而言之。則曰心猶太極也。曰惟心無對。曰主於身爲心。說到此境界。心便是性。性便是心。豈別說出一箇性字與心對頭。使一屬之偏。一屬之全哉。景涵箚錄冊子中。亦有此意。幸與之從容商確。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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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의 〈망운탄〉에 차운하다 次李元浩《望雲嘆》 내가 예전에 〈운한〉132) 시를 읽었으니 我昔讀過雲漢詩동주133)의 세상은 어찌 그리 가물었던가 東周之世一何旱외로운 백성들에게 남은 것이 없었으니 黎民孑孑無餘遺그 때문에 길게 한숨 쉬고 또 짧게 탄식했네 爲之吁長又嘆短어찌 금년의 가뭄을 직접 볼 줄 생각했으랴 豈意親見今年旱너무 심한 것은 예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네 太甚不曾古時但사람들이 말하길 비가 내릴지 알고 싶으면 人言欲識雨與否다만 구름 기운이 이어졌다 끊어짐에 있는데 亶在雲氣連復斷뭉게뭉게 구름 일면 사람의 마음 기쁘게 하고 萋萋有渰悅人意유유하여 무심하면 그 게으름을 미워한다네 悠悠無心憎其懶그 말이 맞을까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其然乎哉豈其然들어도 귀가 시원하지 않고 배만 더 고달프네 聞不爽耳腹增憊엄숙하면 제때 비가 내림은 기성의 가르침이니134) 曰肅雨若箕聖訓천고에 명백함은 큰길이 평탄한 것과 같네 千古明如周道坦오늘날의 인간사를 한 번 보게나 試看今日人事際어떻게 하늘을 감동시켜 단비를 빚겠는가 那得感天時雨醞서로 친근하던 윤리는 세상에서 끊어졌고 相親倫理世間絶서로 이익 취하는 풍조가 천하에 가득하네 交征利風天下滿게다가 선비의 풍습엔 사특하고 어긋남 많아 更有士習多邪悖마침내는 우리 무리가 모두 흩어지게 하였네 遂令吾黨盡渙散아, 극도의 혼란함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건 嗚呼亂極乃至此일찍이 옛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네 曾所未見古史纂하늘이 크게 노하여 큰 흉년을 내렸으니 上天赫怒降大無오래도록 강산에 뜨거운 햇볕을 덮었네 久將江山覆火傘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계된 이치 말하지 말라 莫曰天人相關理아득하고 현묘하고 심원하여 헤아릴 수 없네 渺漠玄遠難可算남녀 백성들은 실로 죄가 없는데 蒼生男女實無辜횡액에 걸려 짝을 잃으니 개탄스럽네 橫罹仳儷慨其歎아득하게 수로와 육로에 매일 가득 차서 逖矣日滿水陸路수없이 엎어지고 넘어지니 어찌 근심을 견디랴 十顚九倒豈勝悹무릇 이 지경이 된 것은 허물이 똑같으니 凡厥致此咎惟均후회가 없지 않으나 아무 소용이 없네 莫無追悔不可趕옥전거사는 참으로 어진 사람이라 玉田居士寔仁者백성들의 걱정을 자신의 일로 여겨 生民之憂非閒管백 리에서 〈망운탄〉을 부쳐왔는데 百里寄來望雲歎용용135)한 장편은 고금에 드문 것이네 舂容鉅篇今古罕정한 제목을 글로만 보지는 말지니 命題莫看以辭已뜻은 근본에 있지 줄기에 있지 않네 意在本根不在稈참으로 구름 빛깔로 기쁨과 탄식을 삼는 건 苟以雲物爲喜歎털과 깃만 알고 태생과 난생엔 어두운 것이네 但知毛羽昧胎卵듣건대 옛날에 군자가 길함을 얻을 때는 聞昔君子得吉也모름지기 흉함을 따라 묘하게 운행한다네 須從其凶妙斡轉마음이 바르고 기운이 순한 공이 지극해지면 心正氣順功旣至천지도 함께 효과가 서로 이어진다네136) 天地亦與效相纘나에게도 허물 있을까 먼저 염려하여 先念吾亦有咎否감히 여관에 있듯 편히 지내지 못했네 不敢安處如在館이어 바라건대 사람이 모두 마음 다스려 繼願人皆治心舍한 간특함도 빈 터에 숨게 하지 않으면 勿令一慝隱町畽하늘이 반드시 보답해 좋은 징조 내려서 天必報答賜休徵만백성이 모두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리라 俾爾萬姓咸飽煖나는 그대의 시 밖의 말을 한 것이니 我是發君詩外言한 동그라미에 어찌 크고 작은 사발 있으랴 一規豈有大小椀만일 나의 지금 생활을 묻는다면 若問吾人今生活어찌 풍작 흉작으로 걱정 즐거움을 삼겠나 豈以豊歉作戚衎평생에 잊지 않을 것이 어디에 있는가 平生不忘何處在도랑에 뒹구는 송장 빛깔이 검은 것이라 溝中之瘠其色䵟그런 뒤에야 정신이 상쾌하고 즐거우리니 然後精神快樂像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도 한계가 있다네 旱餘甘霈猶有限이것으로 나를 멀리하지 않은 뜻에 사례하니 將此奉謝不遐義바라건대 함께 면려하여 오래도록 짝이 되세 願同勉勵永作伴 我昔讀過《雲漢》詩, 東周之世一何旱?黎民孑孑無餘遺, 爲之吁長又嘆短.豈意親見今年旱? 太甚不曾古時但.人言欲識雨與否, 亶在雲氣連復斷.萋萋有渰悅人意, 悠悠無心憎其懶.其然乎哉豈其然? 聞不爽耳腹增憊.曰肅雨若箕聖訓, 千古明如周道坦.試看今日人事際, 那得感天時雨醞?相親倫理世間絶, 交征利風天下滿.更有士習多邪悖, 遂令吾黨盡渙散.嗚呼亂極乃至此, 曾所未見古史纂.上天赫怒降大無, 久將江山覆火傘.莫曰天人相關理, 渺漠玄遠難可算.蒼生男女實無辜, 橫罹仳儷慨其歎.逖矣日滿水陸路, 十顚九倒豈勝悹?凡厥致此咎惟均, 莫無追悔不可趕.玉田居士寔仁者, 生民之憂非閒管.百里寄來《望雲歎》, 舂容鉅篇今古罕.命題莫看以辭已, 意在本根不在稈.苟以雲物爲喜歎, 但知毛羽昧胎卵.聞昔君子得吉也, 須從其凶妙斡轉.心正氣順功旣至, 天地亦與效相纘.先念吾亦有咎否, 不敢安處如在館.繼願人皆治心舍, 勿令一慝隱町畽.天必報答賜休徵, 俾爾萬姓咸飽煖.我是發君詩外言, 一規豈有大小椀?若問吾人今生活, 豈以豊歉作戚衎?平生不忘何處在, 溝中之瘠其色䵟.然後精神快樂像, 旱餘甘霈猶有限.將此奉謝不遐義, 願同勉勵永作伴. 운한(雲漢)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날씨를 걱정하는 시이다. 폭군인 여왕(厲王)의 뒤를 이은 선왕(宣王)이 심한 가뭄이 들자 자신을 돌아보고 백성들을 위해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읊었다. 동주(東周) 주(周)나라 평왕(平王)부터 난왕(赧王)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가리키는데, 주 평왕(周平王)이 낙양(洛陽)에 도읍하여 동방(東方)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엄숙하면……가르침이니 《서경》 〈홍범(洪範)〉에 나오는 말로, "아름다운 징조는 엄숙함에 제때에 비가 내리며, 조리가 있음에 제때에 날이 개며, 지혜로움에 제때에 날이 따뜻하며, 헤아림에 제때에 날이 추우며, 성스러움에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이다. 〔曰休徵: 曰肅, 時雨若; 曰乂, 時晹若; 曰哲, 時燠若; 曰謀, 時寒若; 曰聖, 時風若.〕"라고 하였다. '기성(箕聖)'은 은(殷)나라의 성인(聖人)인 기자(箕子)를 말한다. 용용(舂容) 문장에서 한가로운 운치가 우러나고 전아(典雅)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이어진다네 《중용장구》 제1장 제5절 주희의 주에 "천지와 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이 또한 바르고, 나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가 또한 순하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음에 이르는 것이다.〔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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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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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526) 愁城 세 겹으로 두른 수성은 백등527)과 같으니 三匝愁城似白登백방으로 깨뜨리려 해도 할 수 없어 괴롭네 百方解破苦未能새로 터득한 학문이 없어 마음이 꽉 막혔고528) 學無新得心茅塞선조가 전한 가업 실추해 흙 무너지는 형세네 業墜先傳勢土崩지금 세상에 누구와 함께 거궐529)이 되겠는가 今世同誰爲駏蟨소년 시절에는 망녕되이 곤붕530)에 견주었네 早年妄自擬鯤鵬모두 이치에 실어 보내는 게 기발한 계책이니 摠輸理遣爲奇計임거와 충거531)를 십 층으로 만들 필요도 없네 不用臨衝造十層 三匝愁城似白登, 百方解破苦未能.學無新得心茅塞, 業墜先傳勢土崩.今世同誰爲駏蟨? 早年妄自擬鯤鵬.摠輸理遣爲奇計, 不用臨衝造十層. 수성(愁城) 아주 풀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시름을 성벽(城壁)에 비유한 것으로, 유신(庾信)의 〈수부(愁賦)〉에 "허다한 수성은 공략해도 끝내 부서지지 않고, 허다한 수문은 흔들어도 끝내 열리지를 않네.〔攻許愁城終不破, 蕩許愁門終不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庾開府集箋註 卷1》 백등(白登)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는 산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흉노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7일간 이 산에서 포위를 당해 있었는데, 흉노의 선우 묵특(冒頓)이 포위망 한 쪽을 터주어 탈출하였고, 이후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고 한다. 《史記 卷93 韓信列傳》 마음이 꽉 막혔고 학문이나 수양을 중단하여 마음이 거칠어지고 막혀 버렸다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일찍이 고자(高子)에게 이르기를 "산중의 오솔길이 잠깐 사람이 이용하면 길이 되고, 한참 동안 이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나서 막아 버리나니, 지금 그대는 띠풀이 마음을 막아 버렸도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 今茅塞子之心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下》 거궐(駏蟨) '공공거허(蛩蛩駏驉)'라는 짐승과 '궐'이라는 짐승을 합칭한 말로, 서로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다. 궐이라는 짐승은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어서 잘 달리지 못하므로, 항상 공공거허에게 감초(甘草)를 뜯어 먹여 주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그의 등에 업혀 도망쳐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淮南子 道應訓》 곤붕(鯤鵬) 《장자(莊子)》의 우화에 나오는 큰 물고기와 새의 이름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背〕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남쪽 바다로 갈 때 9만 리를 날아올라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 하였다. 《莊子 逍遙遊》 임거(臨車)와 충거(衝車) 모두 성을 공격할 때에 쓰는 병거(兵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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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어른이 산북리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聞悅齋丈到山北里 열옹의 의기는 늙을수록 호방한데 悅翁意氣老猶豪게다가 문장 예봉도 예리한 칼과 같네 更有詞鋒若利刀시절은 자장521)이 남국 유람한 때 아니고 時匪子長翫南國생각은 원량이 동고에서 휘파람 불던 것과 같네522) 思同元亮嘯東皐유문의 본래 모습은 의관에 남아 있고 儒門本色餘冠服신선의 맑은 의표처럼 머리털이 하얗네 仙骨淸標皓鬢毛정토사에서 강론하자는 약속 있으니 淨土講論知有約육경은 성인의 찌꺼기523)라고 하지 마소 六經莫謂聖人糟 悅翁意氣老猶豪, 更有詞鋒若利刀.時匪子長翫南國, 思同元亮嘯東皐.儒門本色餘冠服, 仙骨淸標皓鬢毛.淨土講論知有約, 六經莫謂聖人糟. 자장(子長)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그는 20세 때부터 남쪽의 회계(會稽)와 우혈(禹穴)과 구의(九疑)로부터 북쪽의 문수(汶水)와 사수(泗水)에 이르기까지 중국 각지를 두루 유람하였다고 한다. 《史記 太史公自序》 생각은……같네 열재(悅齋) 소학규(蘇學奎)의 은둔하겠다는 의지가 도잠(陶潛)과 같았다는 말이다. 원량(元亮)은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진(晉)나라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登東皐以舒嘯.〕"라고 하였다. 육경(六經)은 성인의 찌꺼기 다만 문자에 의해서 전해진 성현의 말은 마치 술을 다 짜고 버린 찌꺼기와 같다는 것으로, 고인의 진면목을 추구하지 않고 껍데기만 익힘을 일컫는 말이다. 제 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바퀴 만드는 사람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而夫.〕"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莊子 天道》 '육경'은 유가(儒家)의 기본 경전인 《시경》ㆍ《서경》ㆍ《주역》ㆍ《춘추》ㆍ《예기》ㆍ《악경》을 이르는데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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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 홍공 행장 竹溪洪公行狀 공의 휘는 정모(珽謨), 초휘(初諱)는 수정(壽挺), 자는 의범(懿範), 호는 죽계(竹溪)이다. 관향은 풍산(豐山)이니, 일송(一松) 휘 치(治)의 후손이다. 고조는 휘 천규(天奎)로,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를 받았다. 증조의 휘는 이발(履潑)이고, 조부의 휘는 영구(永九)이며, 선고(先考)의 휘는 양우(亮禹)이다. 전비(前妣)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지옥(之玉)의 따님이고, 선비(先妣)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윤호(允鎬)의 따님이다. 인릉(仁陵 순조(純祖)의 능호) 정해년(1827, 순조27) 10월 6일에 우봉리(牛峯里)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무릇 출입하거나 장난칠 때 한번도 어버이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얻으면 반드시 품속에 넣어 가서 어버이에게 드렸다. 집안이 늘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 자주 잇지 못하였으므로,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땔나무를 하고 직접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곁에서 봉양하였다. 부모가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였고 가업이 그 덕분에 흥성하였다. 11세에 어버이의 병이 매우 심해지자 목 놓아 울면서 실신할 듯이 하였다. 한밤중에 홀로 의원을 찾아가는데 깊은 산 험준한 고개에서 맹수가 우는데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벽에 의가(醫家)에 이르렀다. 의원이 그에게 물어보고서 사정을 알고는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면서 "지극한 정성이 이러하니 어버이의 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진년(1844, 헌종10)에 청도 김씨(淸道金氏) 홍만(弘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을사년(1845, 헌종11)에 김씨가 졸하고, 병오년(1846, 헌종12)에 밀양 박씨(密陽朴氏) 재호(在浩)의 따님을 맞아들였는데 평소에 서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공경하였다. 박씨 또한 온화하고 인자하고 유순하였으며 부도(婦道)를 잘 지켰다. 임자년(1852, 철종3)에 부친상을 당하고, 갑자년(1864, 고종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심하고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는 도구와 상례를 거행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여 한결같이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을 따랐으니, 대개 살아 계실 때 섬기며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禮)로써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에게는 아우 하나가 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밤낮으로 단란하게 모여 다정하게 웃고 이야기하였으며, 음식과 의복 등 온갖 물품은 있고 없는 것을 공유하였다. 이를 미루어 확대하여 족친과 붕우, 이웃 마을과 향당에까지 미쳤으니, 자상하고 화락한 풍습이 두루 퍼졌다. 일찍이 성내는 말이나 화난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기에 남들도 감히 바른 이치가 아닌 것을 가지고 간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젊었을 때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가숙(家塾)을 세우고 훌륭한 스승을 초빙하여 자식과 손자를 가르쳐 권면하고 힘쓰게 한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가문의 규범을 세워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의리를 강론하고, 마을의 규약을 만들어서 예의 바른 풍속으로 사귀는 법을 밝혀서 상서(庠序)와 교원(校院)에서 곧은 논의를 내었으니, 그 계획하고 경영한 것이 그의 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침수정(枕漱亭)은 선조 팔우공(八愚公)이 지은 것인데 퇴락한 지 오래되었다. 공이 일찍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가 족질(族侄) 채주(埰周)와 함께 도모하여 중건하여 날마다 족친, 빈붕(賓朋)과 더불어 그 정자에서 소요하고 시를 수창하였으니, 그 풍모와 운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앙모하게 하였다. 기축년(1889, 고종26) 11월 7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3월 13일에 부춘동(富春洞) 굴등(窟嶝)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근의 사우들이 제문을 지어 와서 조문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아들은 형주(馨周)·근주(垠周)·기주(基周)이고, 딸은 이진표(李晉杓)·구치모(具致模)에게 시집갔다. 형주의 아들은 우팔(祐八)·우경(祐璟)이고, 근주의 아들은 우열(祐烈)이며, 기주는 재종숙부(再從叔父) 각모(珏模)의 양자로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어려서나 장성해서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노년에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니, 공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군자나 장자(長者)로 추중(推重)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홍우경(洪祐璟)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천태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후대에 남길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어 삼가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公諱珽謨。初諱壽挺。字懿範。號竹溪。系出豐山。一松諱治後。高祖諱天奎通德郞。曾祖諱履潑。祖諱永九。考諱亮禹。前妣慶州金氏之玉女。妣昌寧曺氏允鎬女。以仁陵丁亥十月六日。生公于牛峯里第。公性至孝。自幼凡出入嬉戱。未嘗一咈親意。得一美味。必懷而供之。家素貧。菽水屢空。躬幹漁樵。親執滫瀡。左右就養。父母賴以安。家業賴以興。十一歲。親癠甚劇。號泣不能支。夜半獨行尋醫。深山峻嶺。虎豹叫嘷。公少不畏。曉頭至醫家。醫問知驚異曰。至誠如此。親疾必瘳。甲辰聘淸道金氏弘萬女。乙巳金氏卒。丙午聘密陽朴氏在浩女。平居相待如賓。朴氏亦溫仁柔嘉。克執婦道。歲壬子丁外艱。甲子丁內艱。哀傷慘怛。見者無不釀涕。送終之具。執喪之節。必誠必信。一遵情文。蓋其生事死葬。可謂終始以禮矣。公有一弟。友愛甚篤。日夕團聚。笑語款洽。飮食衣服。凡百資用。有無共之。推以至於族戚朋友。隣里鄕黨。慈詳愷悌之風。浹洽周徧。未嘗以忿言戾色。加於人。人亦不敢以非理干之。嘗恨少貧失學。立家塾延賢師。敎子課孫。勸勉甚至。立門規講敦睦之義。修洞約。明禮俗之交。出以風議於庠序校院之間。其所以謀畫經紀。多其力焉。枕漱亭先祖八愚公所構。而頹廢久矣。公嘗懷慨歎。與族侄埰周。合謀重建。日與族親賓朋。逍遙酬唱於其中。其風儀趣想。令人可仰。歲己丑十一月七日。考終于正寢。以三月十三日。葬于富春洞窟嶝子坐原。遠近之友。操文來弔者甚衆。男馨周垠周基周。女適李晉杓具致模。馨周子祐八祐璟。垠周子祐烈。基周出爲再從叔父珏模後。餘皆幼。嗚呼。幼壯孝悌。老而好義。知不知。皆以君子長者推之而無異辭。辛卯春。祐璟抱家狀。訪余於天台寓舍。請不朽之託。余以無似。牢辭不得。謹次如右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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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림재 안공 행장 德林齋安公行狀 공의 휘는 수책(壽策), 자는 인직(寅直), 호는 덕림(德林)이다. 고려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선생 휘 유(裕)의 후손이다. 회헌 선생의 증손 휘 원형(元衡)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기에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죽성군의 증손 휘 을겸(乙謙)이 영암(靈巖)의 고을원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장흥(長興)에 살았다. 고조의 휘는 영룡(迎龍)이고, 증조의 휘는 한징(漢徵)이다. 조부의 휘는 택인(宅仁), 호는 해옹(海翁)으로, 장흥부의 동쪽 건산촌(乾山村)에 대대로 살았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도움을 받아 생활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며 구걸하거나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면 문득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또 풀어 준 노비가 백여 구(口)였다. 선고(先考)의 휘는 몽원(夢元), 선비(先妣)는 청주 김씨(淸州金氏) 판관(判官)을 지낸 용채(龍采)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부덕(婦德)까지 겸비하였다. 정묘(正廟) 정사년(1797, 정조21) 11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난스럽게 행동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마치 성인(成人)처럼 의젓하였으니, 비록 잠시 잠깐도 개구리 걸음걸이 하는 사이에도37) 어버이의 뜻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해옹공(海翁公)으로부터 대수가 내려오면서 가세가 기울어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온 힘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심지어 농사짓고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며 품팔이하거나 장사하는 것까지 직접 하였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비록 곤경에 처하여 떠돌아다니거나 온갖 세파 속에서도 반드시 책을 가지고 다녀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번번이 책을 폈으니, 옛날에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거나38) 나뭇짐을 지고 독서한 자39)와 같았다.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어머니를 모실 적에 효심을 다해 봉양하여 어머니에게 질병이 있으면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한 숟갈 뜨면 자기도 한 숟갈 뜨고 어머니가 두 숟갈 뜨면 자기도 두 숟갈 떴다.40) 하루는 어머니가 옴이 올랐는데, 갑자기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비자(枇子)를 사용하면 낫는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니 이 과일을 파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구하여 바치자 과연 차도가 있었다. 또 어머니가 재차 학질에 걸려 몇 년 동안 낫지 않았다.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든 어버이가 계시는데 외출하였다가 들어가면서 드릴 맛있는 음식이 없구나.' 하였다. 마침 거위 무리가 강에 가득한 것을 보고서 지팡이를 던져 거위 한 마리를 잡아서 마침내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올렸는데 학질이 곧 나았다. 김씨 부인이 언젠가 꿈속에서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르면서 말하기를 "효자 아무개는 이것을 받으라."라고 하였는데, 당시에 공이 없어서 김씨 부인이 나가서 받으니, 바로 종이 뭉치 한 봉(封)이었다. 사람들이 "상천에서 복을 내렸으니 필시 전답 문권(文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가세가 날로 형통해졌다. 중년에 능주(綾州)의 칠송리(七松里)로 이사하여 우거하면서 대문을 닫고 종적을 감춘 채 고요히 자신을 수양하였다. 한 방에 도서를 채우고 세 오솔길을 내어 꽃과 대나무를 심었으니, 유연히 석인(碩人)의 잊지 못하는 흥취41)가 있었다. 평소 숙흥야매(夙興夜寐)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반드시 삼가서 행하고 청소하는 것을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다. 자제(子弟)와 가속들로부터 안팎의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직책을 나누어 주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이 엄정하여 조리가 있었다. 족친과 빈붕(賓朋)을 접대할 때면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들어 허물없이 터놓고 지냈다.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 2월 9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간리촌(澗里村) 뒤 애운동(靄雲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완산 이씨(完山李氏) 진방(震芳)의 따님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첫째 아들은 영({氵+穎}), 둘째 아들은 협(浹)이고, 딸은 서춘구(徐春球)에게 시집갔다. 영은 후사가 없고 세 딸을 두었으니, 문방호(文邦浩)·민정호(閔禎鎬)·이교일(李敎馹)에게 시집갔다. 협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국정(國禎)으로 장방(長旁)의 양자로 갔고, 딸은 양재선(梁在璇)에게 시집갔다. 국정(國禎)은 창섭(昌燮)·종섭(宗燮)·홍섭(弘燮)을 낳았다. 아, 국정은 선사(善士)이다. 독서하고 학문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서 가업을 실추하지 않고 성대하게 능양(綾陽)의 명문가가 되게 하였다. 창섭 형제는 모두 스무 살 안팎 무렵에 특출하다는 소문이 났고 삼가고 조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배웠으니, 안씨(安氏)의 남은 복록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덕림공(德林公)께서 공덕을 쌓아 누리지 않은 보답이니, '선행을 쌓으면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의 훈계42)가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공은 내 선친의 벗이다. 옛날에 선친의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서 들었다. 지금 국정이 기술한 가장(家狀) 1편을 얻어서 읽음에 당시 귀로 들은 것처럼 역력하니, 슬픈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다. 삼가 이처럼 서술한다. 公諱壽策。字寅直。號德林。勝朝文成公晦軒先生諱裕後。先生曾孫有諱元衡。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曾孫有諱乙謙。宰靈巖。因寓于長興。高祖諱迎龍。曾祖諱漢徵。祖諱宅仁號海翁。世居府東乾山村。愛人好施。賴活甚衆。行見寒乞僵路。輒解衣衣之。又白放奴婢百餘口。考諱夢元。妣淸州金氏判官龍采女。端淑貞靜。婦德備至。以正廟丁巳十一月某日生。公自幼不戲動不妄言。凝然如成人。雖造次蛙步之頃。未嘗一咈親意。自海翁公下世。家計無聊。公盡力就養。至於耕稼漁樵。行傭賃販。身親爲之。好讀書。雖在流離艱阻。世故萬端之中。而必以書自隨。少有間隙。輒披閱。如古之帶經而鋤。負薪而讀者。十九遭外艱。哀毁過禮。奉慈幃。盡孝養。有疾晝不離側。夜不就寢。一飯再飯。惟親是視。一日患疥瘡。忽夢有老人曰。用枇子可愈。夢訖。有鬻是果者。果見差愈。又患再瘧。積年彌留。一日自外歸家。自念病親下。出入無一味可以歸供。適見羣鵝滿江。因擧杖投之。中一鵝。遂持以供之。瘧疾乃差。金夫人嘗夢有仙人自天而下。呼之曰。孝子某受此。時公不在。金夫人出而受之。乃一封紙塊也。人以爲上天降福。必是土田文券也。自是家享漸息。中年移寓于綾州之七松里。杜門斂跡澹寂自養。一室圖書。三逕花竹。悠然有碩人不諼之趣。平日夙興夜寐。定省必謹。掃洗必淨。自子弟家衆。至內外婢僕。分職授事。嚴有條理。待族戚接賓朋。皆歡欣相得。絶其畦畛。以哲宗己未二月九日卒。得年六十三。葬于澗里村後靄雲洞亥坐原。配完山李氏震芳女。生二男一女。長氵+穎。次浹。女適徐春球。氵+穎無嗣。三女適文邦浩閔禎鎬李敎馹。浹一男一女。男國禎出后長旁。女適梁在璇。國禎生昌燮宗燮弘燮。嗚乎。國禎善士也。讀書學問。修身謹行。使家業不墜。蔚然爲綾陽名家者。昌燮兄弟。皆妙年騰異。謹勅從學。安氏餘祿。豈有量哉。此皆德林公積累不食之報。吾夫子積善餘慶之訓。豈不信然乎。公我先友也。昔者侍先人側。得聞公之行義。今得國禎所述家狀一編。讀之歷歷如當日耳聞。不勝悲感之私。謹述之如此云爾。 개구리……사이에도 개구리 걸음은 선 자리(脚下)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 경서를……하거나 전한(前漢)의 예관(兒寬)에 대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마다 독송하였다.[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58 兒寬傳》 나뭇짐을……자 육조(六朝) 시대 서진(西晉)의 문신이자 학자 유지(劉智)는 어릴 때 가난하여 나뭇짐을 지고 글을 읽었으며 유행(儒行)으로 이름났다. 어머니가……떴다 《소학(小學)》〈계고(稽古)〉에 "문왕이 병이 나자 무왕은 관과 띠를 벗지 않고 봉양하였다. 문왕이 한 숟갈 먹으면 무왕도 한 숟갈 먹고, 문왕이 두 숟갈 먹으면 무왕 또한 두 숟갈 먹었다.[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再飯, 亦再飯.]"라는 말이 나온다. 석인(碩人)이……흥취 석인은 어진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선행을……훈계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선행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자손에게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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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기공 행장 忍齋奇公行狀 인재 기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先輩) 항렬이다. 내가 어린 나이에는 공의 현덕(賢德)에 대해서 듣기만 하고 직접 얼굴을 뵙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 공의 후사(後嗣)인 기종섭(奇{土+宗}燮)과 벗이 되고 또 공의 손자인 기세진(奇世搢)과 서로 교류하면서 공의 전형(典型)에 대해서 개괄할 수 있었다. 또 그 후에는 집안에 보관된 글을 보고 공의 평소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 같은 고을이고 또 같은 시대였건만 백발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 속의 고인(古人)으로 대하였구나! 행장과 같은 글은 진실로 나처럼 보잘것없는 자가 손을 대면 안 되지만, 고금을 돌이켜 보니 감회를 이기지 못하겠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짓는다. 공은 휘가 동규(東奎)이고 자는 윤집(允集)이다. 기씨(奇氏)는 세계(世系)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지역의 옛 지명)에서 나와서 신라, 고려 시대부터 동방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인 휘 건(虔)은 응교(應敎)를 지낸 휘 찬(襸)을 낳고 휘 찬은 호가 물재(勿齋)인 휘 진(進)을 낳았다. 물재는 아우인 복재(服齋)43)가 기묘년(1519, 중종14)의 화를 당하자 마침내 광주(光州)로 물러나 지냈다. 재랑(齋郎)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대림(大臨)을 낳았는데, 대림은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고봉(高峰) 선생 기대승(奇大升)44)의 형으로 공에게는 11대 선조이다. 고조는 휘가 종태(宗泰)이고 증조부는 휘가 상호(商頀)이며 조부는 휘가 사봉(師鳳)이다. 고(考)는 휘가 하진(夏震)이며 비(妣)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달권(達權)의 따님이다. 순종(純宗) 무자년(1828, 순조28)에 능주(綾州 전라도 화순 지역의 옛 지명)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평범한 아이들과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게 되어서는45) 응대 진퇴(應對進退)나 평소의 과정(課程)이 스승이 이끌어 주거나 깨우쳐 주지 않아도 법도를 따르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대학》에 더욱 정통하였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을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요결(要訣)로 삼았다. 이해하지 못하면 손에서 놓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감정이 격앙되어 분하고 답답하게 여기다가 뜻을 이해하게 되면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기뻐하는 얼굴빛과 온순한 용모로 모시고 봉양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받드는 데 필요한 물품을 모두 넉넉하게 공급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이를 미루어 친족과 벗들에게 미치니 공경스러우며 즐겁고도 편안하여 원망 섞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는 정성스럽게 알려주고 상세하게 일깨워 듣는 자가 자기도 모르게 성심을 다해 흠모하고 복종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시렁 위에 있던 책자(冊子)가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가져간 사람을 찾아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 간 것이 아니라 빌려 가면서 미처 주인에게 알리지 못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돌려주었다. 향리(鄕里)의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분쟁을 일으킨 뒤 마침내 원한이 쌓여서 여러 해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공만이 깨우치고 화해시켜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게 하였다. 공의 충직하고 순후한 마음이 만물에 미치고 정성과 신의가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경오년(1870, 고종7)에 중병에 걸렸다. 하루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부모를 섬기는 것이 보잘것없었다. 지금 또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니 불효한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구나. 너는 반드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잘 섬겨서 네 아비가 땅속에서 품고 있을 한을 위로해다오." 하였다. 끝내 1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가양평(加陽坪)의 선영 아래 을좌(乙坐)에 매장하였다가 뒤에 배위(配位) 염씨와 합장하였다. 배(配)는 파주 염씨(坡州廉氏) 백우(柏佑)의 딸이다. 착하고 온순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덕(婦德)에 모자람이 없었다. 을유년(1825, 순조25) 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으며 이름은 종섭({土+宗}燮), 정섭(楨燮)이다. 손자는 세진(世搢), 세엽(世曄), 세만(世萬)이며 손녀는 선영기(宣永基)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은 장방인 종섭의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물살이 도도하게 흐르듯 세상이 점차 쇠퇴하여 민간과 선비들의 풍습이 실로 한심스러워할 만하고 향당(鄕黨) 선배의 근후(勤厚)한 풍도는 끝내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설령 이를 붙잡아 되돌려 놓는 것을 지금 세상의 책무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자손이 되어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할 방도만은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진(世搢)이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사우(士友)들과 종유(從遊)하고 있으니 집안의 학업이 그에게 의뢰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忍齋奇公。吾鄕先輩行也。余小少聞其賢。而未及承顔。其後得與其遺胤琮燮友。又得其孫世搢相過從。而公之典刑。可以槪矣。又其後得家藏文字。而公之平生行義。可以詳矣。嗚乎。旣同鄕矣。又倂世矣。而至於白首之年。始對以卷中古人耶。狀行之文固非淺劣所可犯手。而撫念今古。不勝曠感。謹据家狀。公諱東奎。字允集。奇氏系出幸州。自羅麗爲東方鉅族。我朝有諱虔。諡貞武。生諱襸應敎。生諱進。號勿齋。弟服齋。遭己卯之禍。遂退居光州。除齋郞不就。贈左贊成。封德城君。生大臨。贈左承旨。高峰先生大升之兄也。於公爲十一世。高祖諱宗泰。曾祖諱商頀祖諱師鳳。考諱夏震。妣河東鄭氏達權女。以純宗戊子。生公于綾州牛峯里。幼而騰異。不類凡兒。及就傅。應對進退日用課程。不待提勅而循循不怠。尤邃於大學。以格致誠正爲一生受用之訣。不得不措。激昂憤悱。至有會意。輒怡然如也。性至孝。怡色婉容。左右服勤。志物之養。莫不畢給。推以至於族戚儕友。愷悌樂易。人無怨言。敎授生徒。指意懇到。開喩詳悉。使聽者不覺誠心向服。一日失架上冊子。傍人欲推尋。公曰。非竊去也。必是借去而姑未及告於主人耳。未幾。有人果謝而還之。鄕里有人與人忿爭。遂成嫌隙。積年不平。人無有能解者。公獨喩和之。使如平昔。蓋其忠厚之及物。誠信之感人。多此類也。歲庚午沈疾。一日語其子曰。吾平日事親無狀。今又嬰疾。勢將不起。不孝之罪。莫大於此。汝須善事二親。以慰乃父泉下之恨也。竟以十一月二十七日卒。葬于加陽坪先隴下乙坐合祔。配坡州廉氏柏佑女。和順勤儉。婦德無闕。乙酉生。後公十七年卒。擧二男。曰琮燮楨燮。孫世搢世曄世萬。孫女宣永基。長旁出也。餘皆幼。嗚乎。世級漸下。如水淊淊。民風士習。實可寒心。而鄕黨先輩長厚之風。終不可得以復見耶。縱不能把持挽迴以爲斯世之策。而爲人子孫者。獨不思所以繼述闕祖者乎。世搢有志學問。方從遊士友間。庶幾家庭之業。賴之而不墜於地。余有望焉。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의 호이다. 자는 자경(子敬),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저서로 《복재집(服齋集)》,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8년(명종1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벼슬이 대사간ㆍ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스승에게……되어서는 10살 무렵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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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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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夜久不寢。咄歎旣往之失學。庶幾來者之可追。感作拙韻。因以自警。兼示文兄。 太極無聲臭。厥初賦與眞。陰陽有動靜。氣質或不均。凡聖皆貴學。不學不成人。琢玉方成器。磨鏡始祛塵。曰余安暴棄。空長七尺身。處世費衣食。摘埴徒逡巡。漸與先哲遠。轉於下愚親。謾催犬馬年。鬂髮蒼蒼新。一言無爲法。半武不足倫。屈指三十七。跳丸日日循。今夕是何夕。庚子正上旬。三陽方向燠。萬物欲回春。願學天行健。君子必體仁。吾兄曾有盟。無辭共霓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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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와 처사 문공 행장 竹窩處士文公行狀 공의 휘는 영수(永壽), 자는 극여(極汝), 호는 죽와(竹窩)이다. 세계(世系)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공의 상조(上祖)이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대대로 능성(綾城)에 살았으며 충효와 시(詩)ㆍ예(禮)를 세업(世業)으로 삼아 사림(士林)에 이름이 났다. 고(考)는 휘가 혁진(爀鎭)이고 호는 오재(鰲齋)이며, 비(妣)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영환(永桓)의 딸이다. 순조 신유년(1801, 순조1)에 우봉리(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홍씨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곰[熊]을 홍씨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잘 기르거라. 이 아이가 너희 집안의 천리마이다." 하였다. 공이 태어난 뒤 소자(小字)를 웅(熊)이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기와 국량이 남다르고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선량하였다. 아이들과 놀면서 한 번도 다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구하면 차마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가지 못하고 반드시 가슴에 품고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갑술년(1814, 순조14)에 큰 흉년이 들어 쌀 동이가 텅 비게 되었다. 공은 겨우 10여 세였건만 항상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캐어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부모의 몸에 편하고 입맛에 맞는 물품은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형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채소, 나물 따위일지라도 반드시 한 그릇에 담아 형과 함께 먹었다. 그해에 온 가족이 돌림병에 걸려 형이 죽고 양친이 모두 위태로웠다. 공은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양친이 복용할 약을 맛보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때때로 형의 널을 어루만지며 목 놓아 슬피 울었다. 몇 달이 지나 양친이 모두 회복되자 향리(鄕里)에서 감탄하며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일찍이 학업에 전력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자손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일에 더욱 간절하게 마음을 쏟았으며 의방(義方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오산(金鰲山)의 뛰어난 산수를 좋아하여 초가를 엮고 오솔길을 열어 도서(圖書)와 금(琴)과 술을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시를 읊조렸으며 빈객이나 붕우가 이따금 이르면 시를 창화(唱和)하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자못 흥취를 다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7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배(配)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문길(文吉)의 딸로 성품이 부드럽고 온순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얌전하여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묘(墓)는 작약산(芍藥山) 아래 정좌(丁坐)에 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정휴(定休)는 백부의 후사가 되었고 효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둘째는 석휴(碩休)이다. 딸은 광산(光山)의 이선호(李瑄鎬), 강화(江華)의 최익교(崔益敎), 전주(全州)의 이문종(李文宗)에게 출가하였다. 정휴(定休)의 아들은 봉환(鳳煥), 석휴(碩休)의 후사가 된 용환(龍煥), 천휴(千休)의 후사가 된 기환(麒煥), 그리고 귀환(龜煥)이 있다. 아, 공은 곧 옛날의 유로(遺老)와 같은 인물이다. 어려서는 효제(孝悌)로 이름이 났고 장성해서는 신의(信義)로 알려졌으며 늙어서는 염정(恬靜 물욕 없이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칭송을 받았다. 말을 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일을 처리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서 고을에 이르고 친척에서 붕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을 흠모하고 공경하면서 모두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겼다. 의림(義林)60)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때 공에 관한 얘기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주저하면서 실행하지 못하고 일도 많아서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하였으니 이제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선인(先人)의 또래가 차례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 박아(博雅)하고 장자(長者)의 후덕한 풍모를 가진 향당(鄕黨)의 원로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봉환(鳳煥)이 공의 유장(遺狀)을 안고 와 나에게 수식(修飾)과 윤색(潤色)을 청하였다. 나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진실로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지만, 요행스럽게 혼자만 살아남은 인생이 머리가 흰 늙은이가 되어 향당 선배의 유언(遺言)과 유사(遺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통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永壽。字極汝。號竹窩。系出南平。江城君諱益漸。其上祖也。至中葉。世居綾城。以忠孝詩禮著爲世業聞于士林考諱。爀鎭。號鰲齋。妣豐山洪氏永桓女。以純廟辛酉。生公于牛峯里第。先是洪氏夢一老人持熊與之曰。善養之此其汝家千里駒也。旣生。小字曰熊。自幼志局不羣。天姿慈諒。與兒曺遊嬉。未嘗爭競。得一美味。不忍先入口。必懷而獻之。當甲戌大無。甁罌枵如。公方十餘歲。常漁採爲養。而便身適口之物。未嘗乏焉。與其兄友愛甚至。得蔬食菜咬。必共一器而食。是歲渾家犯疫。兄歿。兩庭俱危。公露禱嘗藥。夜不解帶。時時撫柩哀號。居數月。兩庭皆蘇。鄕里莫不歎賞。嘗以不得專力學業爲恨。敎子訓孫。尤惓惓致意。導以義方者。無所不至。愛金鰲水石之勝。結茅開逕。圖書琴酒。日夕嘯咏。賓朋時至。唱和酬酢。頗盡其趣。以乙丑七月二十七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五。配公州李氏文吉女。婉順貞靜。閫範無違。墓在芍藥山下丁坐合兆。二男三女。男定休。系伯父。以孝薦剡。碩休。女光山李瑄鎬江華崔益敎全州李文宗。定休男鳳煥龍煥系碩休后。麒煥系千休后。龜煥。嗚乎。公卽古之遺老也。幼以孝弟著長以信義聞。老以恬靜稱。出言而人無不信。處事而人無不服。自家庭至鄕閭。自親戚至朋友。皆愛慕欽欽。各得其心。義林幼侍先人側。得聞公久矣。而因循多故。未得一承顔範。今爲三十年間事耳。先人年行。次第奄歿。而鄕黨耆舊。博雅長厚之風。不可得以復見矣。鳳煥抱其遺狀。請予脩潤。以予無似。固不敢下手。而孤露餘生。至老白首。得見鄕黨先輩遺言遺事。其悲感爲何如也。玆不敢辭。 의림(義林) 본 행장의 지은이인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이다.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3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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