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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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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만회당 윤공 행장 贈嘉善大夫吏曹參判晩悔堂尹公行狀 공의 휘는 태행(泰行), 자는 낙행(樂行), 호는 만회당이다. 윤씨(尹氏)는 세계(世系)가 파평(坡平)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시조 휘 신달(莘達)61)은 태사(太師)를 지냈고, 휘 집형(執衡)62)은 시호가 문정(文靖)이고, 휘 관(瓘)63)은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휘 위(威)는 시호가 문헌(文獻)인데 남원(南原)에서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므로64) 자손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만동(萬東)에 이르러 병화(兵火)를 당하자 능주(綾州)의 해망산(海望山) 산중에 우거(寓居)하면서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분이 공의 10대조이다. 5대조 휘 상석(商錫)은 기근을 겪은 해에 온 고을의 공세(公稅)를 대신 납부하여 현종조(顯宗朝)에 성은(聖恩)을 입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고조 휘 홍도(弘道)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고 증조는 휘 창종(昌宗)이고 조부 휘 일주(壹周)는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필중(必中)이고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완산(完山) 이인석(李寅錫)의 딸로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으며 남편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순조(純祖) 신미년(1811, 순조11) 9월 1일에 회덕리(懷德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진솔하며 겉으로 꾸미지 않았고 성품은 온화하고 침착하였으며 교유하는 이들이 모두 선사(善士)였다. 어려서부터 지조(志操)를 지녀 말하고 웃는 것도 범상치 않았고 일찍이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언급한 적이 없으나 선악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살피거나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절(儀節)은 추위가 혹독하고 덥거나 비가 내리더라도 조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8세에 서당 선생에게 나아가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배웠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정하고 읽고 사색하는 일을 밤낮으로 멈추지 않았다. 장로(長老)들이 기특하게 여기고 공을 아끼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평범한 애들과 달라서 성취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하였다. 본래 집안이 곤궁하여 공은 물고기 잡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일을 몸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는 기쁘게 하기에 힘썼고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공경을 다 하였으며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시(詩)와 예(禮)를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사촌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음식은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고 술도 혼자 마시는 일이 없어 화락한 기운이 일가에 넘쳐났다. 몸가짐은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여 업신여기거나 예의 없는 기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일 처리는 주도면밀하고 세심하여 망설이거나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정상이 마음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서로 왕래하는 빈객과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지만 정성스럽게 대접하여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친의 병환이 매우 위독해지자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피를 마시게 하여 3일이면 끝날 수명이 늘어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상을 치를 때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전(奠)을 올리고 곡(哭)을 하는 의절(儀節)이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빈(殯)65)이 끝난 뒤에도 상복(喪服)의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았고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얼굴빛은 검어지고 소식(素食)을 하는 것이 옛 효자에 뒤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아버지의 상을 치르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유서(遺書)를 남기며 이르기를, "내 죽음은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선(善)하지도 못하면서 오만하게 날뛰며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보다는 정도를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또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천도(天道)를 거스르면 화가 생겨나고 천도를 따르면 복이 이른다. 선(善)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惡)은 따라서는 안 된다. 겸허함과 공손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검소함과 간략함으로 집안일을 처리하며 삼가고 조심하며 책을 읽어 집안의 선한 자손을 만드는 것이 내가 평생 바라던 일이다." 하였다. 하루는 장경일강(莊敬日强)66) 4자를 벽에 써놓고 아침저녁으로 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평소에 윤리(倫理)를 소중히 여기고 유학(儒學)을 숭상하며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권세(權勢)를 뒤쫓지 않아, 곤궁함을 고수(固守)하고 졸렬(拙劣)함을 편안히 여겼다. 좋은 계절을 만날 때마다 술을 빚고 안주를 장만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으로 마을의 오랜 친구들을 불러 술에 취해 소요하면서 하루를 즐겼으니 공은 풍류와 흥취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어떤 인물인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다. 금상(今上) 신묘년(1891, 고종28) 9월 2일에 편안히 생을 마쳐 본리(本里) 안산(案山)의 오른쪽 간좌(艮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일엽(日燁)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계배(繼配)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해인(海仁)의 딸로 1녀를 두었다. 아들 병임(秉臨)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여산(礪山)의 송두옥(宋斗玉)에게 출가한 딸은 선씨 소생이고 홍기모(洪基謨)에게 출가한 딸은 박씨 소생이다. 종질(從姪)인 병현(秉玹)을 후사로 삼았으며 병현은 광산(光山) 이주태(李周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정섭(定燮)을 낳았다. 정섭이 대인(大人)의 명으로 가장(家狀)을 내게 가지고 와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행장을 적을 덕망과 문장을 지닌 인물이 못되지만, 병현이 나의 벗이니 참으로 그의 말이 징험할 만하기에 위와 같이 차례대로 적어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취사(取捨)를 기다린다. 公諱泰行。字樂行。號晩悔堂。尹氏系出坡平。爲東方大姓。始祖諱莘達太師。有諱執衡諡文靖。諱瓘諡文肅。諱威諡文獻。討賊南原。以功食菜南原。子孫仍貫焉。至諱萬東。當兵火。寓綾之海望山中。隱德不仕。寔公十世。五世祖諱商錫。遇歲饑。替納一邑公稅。顯宗朝蒙恩贈參判。鄕人士立碑頌之。高祖諱弘道通政。曾祖諱昌宗。祖諱壹周贈通政。考諱必中贈參議。妣完山李寅錫女。婦德甚備。無違君子純廟辛未九月一日公生于懷德里體相峻茂眞率不爲表襮。和厚詳審。所交遊皆善士。幼有志操。言笑不凡。未嘗短長人。而淑慝甚嚴。天性至孝。定省之節。進退之儀。雖祈寒暑雨。少無闕焉。八歲就學塾師。授小學孝經等書。嚴立課程。俯讀仰思。晝宵不輟。長老奇而愛之曰。此兒異於凡。進就不可量也。家素貧窶。漁樵耕牧。無不躬幹。其養親也致其樂。其接人也致其敬。以承庭訓詩禮爲家法。與諸從弟。友愛甚篤。食必均味。酒無獨酌。怡怡之氣。洋溢家門。其持身也和而莊。侵侮好狎之意。不見於貌。其處事也。詳而密。依違苟且之狀。不介于心。過從之賓。遊賞之人。連絡不絶。接待款厚。無一人不歡。親疾甚劇。露禱灌血。得延三日之命。終以天年。擗踊之儀。奠哭之節。一遵禮制。旣殯不脫絰帶。寒不重衣。暑不揮扇。面墨行素。不下於古孝也。遭內艱。亦如前喪。一日遺書曰。吾死不過三年。匪類鴟張。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又戒子孫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以違。惡不可以從。持己以謙恭。處家以儉約。謹勅讀書。做人家好子孫。吾畢生所願也。一日以莊敬日强四字。書于壁右爲朝夕常目之資。平日愛好倫理。敦尙儒雅。不慕名利。不趨權勢。而固窮守拙。每遇佳節。釀酒備肴。邀鄕黨知舊。婆娑徜徉於山水奇絶處。以成終日之樂。風流興致。有異於人。此其非出塵之表。何以若此乎。令人可想。當宁辛卯九月二日考終。葬本里案山右艮坐原。配寶城宣氏日燁女。擧一男一女。繼配咸陽朴氏海仁女。擧一女男秉臨早死。無育。女礪山宋斗玉宣氏出。洪基謨朴氏出。以從姪秉玹爲后。娶光山李周泰女。生男定燮。定燮以大人之命。抱家狀。有一言之託。顧非其人。秉玹余友。信其言可徵。序次之如右。以竢立言君子裁擇焉。 시조 휘 신달(莘達) 윤신달(尹莘達, 893~973)으로 918년에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 벽상익찬 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휘 집형(執衡)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윤금강(尹金剛)의 아들이자,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아버지로, 검교 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냈으며,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휘 관(瓘) 윤관(尹瓘, ?~1111)으로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102년에 지공거를 맡았고 이어서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 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고 이후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자 조정의 결정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였다.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원래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인종(仁宗) 8년(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하면서 인종의 어머니인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李氏)의 시호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역적을 …… 받았으므로 윤위(尹威)는 1200년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관찰사가 되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본관을 남원으로 하면서 파평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장경일강(莊敬日强)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군자는 장중하고 공경함으로 날마다 굳세어지고, 안일함과 방자함으로 날마다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통정대부 행 능주군수 손공 행장 通政大夫行綾州郡守孫公行狀 공의 휘는 인용(麟鏞), 자는 익삼(益三), 호는 신암(愼庵)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휘 부(富), 사도(司徒)를 지낸 밀성군(密城君) 휘 윤(贇)은 모두 상계(上系)의 이름난 조상이다. 문과(文科)를 거쳐 목사(牧使)를 지낸 휘 책(策),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휘 비장(比長)67)은 모두 중엽(中葉)의 이름난 조상이다. 제학공(提學公)은 호가 입암(笠巖)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 및 당시의 저명한 석학들과 더불어 15학사(學士)로 불리었으며, 금남공(錦南公) 최부(崔溥)와 임금의 명을 받아 국사(國史)를 함께 편수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벼슬을 내려놓고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으로 물러났다. 고조인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에 추증되었고 증조인 휘 덕효(德孝)는 생원을 지냈다. 조부 휘 몽두(夢斗), 고(考) 휘 처상(處祥)은 모두 은덕(隱德)을 지녔다. 비(妣)는 고흥 유씨(高興柳氏) 광인(光仁)의 딸로 품성이 인자하고 순후하며 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잘 갖추었다. 순조 신묘년(1831, 순조31) 5월 21일에 창평현(昌平縣) 외남면(外南面) 사봉리(四峯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과 기질이 따듯하고 선량하며 외모가 뛰어나 사람들이 큰일을 담당할 재능이 있음을 알았다. 3세가 되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땅을 뒹굴고 통곡하여 어린 나이에 끝없이 슬퍼하는 모습에 곁에서 보던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외롭고 어린 나이에 일가도 없이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처지를 말로 형용하기 어렵지만,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화평한 기색과 부드러운 말투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평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할 방도가 없자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등 힘을 다해 부지런히 애쓰지 않은 일이 없었고, 몸에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마련하여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애통해하여 몸이 야위었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도구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하게 준비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기일(忌日)을 맞으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정갈히 한 뒤 고기를 썰고 삶는 일을 몸소 하였고 제사에 임해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목소리와 용모를 직접 뵙는 듯이 하였다. 오랫동안 부지런히 애를 써서 중년에 이르러서는 집안의 재력이 넉넉해졌다. 그러자 가까운 조상을 위한 제전(祭田)과 먼 조상을 위한 묘제(墓祭)를 지낼 땅을 마련하고 또 가난한 대종가(大宗家)와 소종가(小宗家)를 도와주었다. 가난하여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모든 친족에게는 그때마다 곳간을 털어 도와주었다. 안채에서는 무당의 술책을 쓰지 않았고 사랑채에서도 장기나 바둑 따위의 유희를 즐기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의복을 걸치지 않았고 보고 즐기기 위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효성과 우애, 근면과 검약, 청렴과 조용함, 소박하고 진실함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궁극의 계책으로 삼았다. 악류(惡類)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친척과 마을 이웃들을 경계하여 단발령(斷髮令)을 따르는 무리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머리를 깎고 사느니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게 낫다. 너희들은 절대로 세상의 변화에 휘둘리지 말라." 하였다. 을유년(1885, 고종22)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892, 고종29)에 함종 부사(咸從府使)가 되었다. 임인년(1902, 광무6)에 능주 군수(綾州郡守)에 제수되었다. 비로소 부임하여 갑진년(1904) 여름에 해임되어 돌아왔다. 고을을 다스릴 때는 명성과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며 녹봉(祿俸) 수천을 덜어 고을 전체의 호역(戶役)에 응하니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석벽에 새겨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적어두었다. 고을에 최 충의공(崔忠毅公)68)의 정려(旌閭)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자 공이 물자를 대주어 수선하게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노사(蘆沙)69), 화서(華西)70) 두 선생은 실로 유문(儒門)의 정맥(正脈)이다. 문하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문인(門人) 가운데 면암(勉庵)71)과 송사(松沙)72) 같은 우러러볼 만한 여러 어른이 계시다. 너희는 이들을 뒤따라 학문을 익혀야 한다." 하였다. 공은 면암의 소장(疏章)을 볼 때마다 그의 직언(直言)과 당론(讜論)에 탄복하면서 면암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더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하였다. 을사년(1905, 광무9) 여름에 병에 걸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았다. 11월이 되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궐연(蹶然)히 일어나 이르기를, "국가 대계(大計)의 망극(罔極)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고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이 위독해져 약을 넘기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여러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고치고 선행을 보면 반드시 이를 따르는 것이 수신(守身)과 보가(保家)의 첫 번째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들에게 경계하기를, "부인(婦人)은 순종을 덕으로 삼고 목소리가 규방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집에 전권(錢券)이 있자 가져다 찢으며 말하기를, "단지 다툼의 단서만 일으킬 뿐이다. 내가 선행을 남기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화를 물려주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세수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자리로 나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니 곧 12월 15일이었다. 향리(鄕里)에서 모두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원근에서 서둘러 조문을 오는 이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주(州)의 가옥치(佳玉峙) 마을 위에 있는 모좌(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보성 선씨(寶城宣氏) 계효(季孝)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영수(英壽)의 딸이며, 그 다음 계배(系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홍경(弘璟)의 딸로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영렬(永烈)은 선씨가 낳았고, 진사(進士)인 영하(永夏)와 조병상(曺秉相), 나영성(羅營成)에게 출가한 딸들은 백씨가 낳았다. 아들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과 유재홍(柳在弘)과 문제철(文濟哲)에게 출가한 딸은 문씨가 낳았다. 손자 이하는 모두 적지 않는다.내가 같은 고을에 살면서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입은 지가 오래이다. 매번 화락하면서도 신중하고 성실했던 공의 풍도(風度)를 볼 때마다 애호하는 마음이 한없이 일었다. 또 다섯 아들과 다섯 사위, 많은 손자가 뜨락에 가득하고 흰 머리와 붉은 슬갑(膝甲)73)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렸으니 이치가 잘못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아, 하늘이 원로(元老)를 남겨 두려고 하지 않아 공의 목소리와 풍채, 용모는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자손이 많고 남은 복이 끝나지 않았으니 어찌 공의 지업(志業)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는가. 영렬(永烈)이 자기 삼종제(三從弟)인 영모(永謨)를 내게 보내어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행장을 적기에 적합한 덕망과 문장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고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가장(家狀)을 근거로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였을 뿐이다. 公諱麟鏞。字益三。號愼庵。孫氏系出密陽。吏部尙書淸城府院君諱富。司徒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文科牧使諱策。弘文館提學諱比長。皆中葉顯祖也。提學公號笠巖。與佔畢齋金先生宗直。及當時名碩。稱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同修國史。燕山朝退休扶安葛村。高祖諱興新贈副護軍。曾祖諱德孝生員。祖諱夢斗。考諱處祥。皆有隱德。妣高興柳氏光仁女。德性仁厚。閫範甚備。以純廟辛卯五月二十一日。生公于昌平縣外南面四峯里第。性氣溫良。體相峻茂。人知爲遠器。三歲而遭外艱。匍匐顚倒。孺哀罔極。傍人無不感涕。孤弱零鮮。生長外家。其情景難狀。而侍慈幃。以怡色婉辭。慰悅其志。家素貧甚無以爲養。漁樵耕牧。凡百事務。無不服勤殫力。使便身適口之物。畢給於前。其遭故也。擗踊毁瘠。送終凡具。必誠必信。俾無餘憾。遇忌諱之辰。沐浴操潔。裁割烹飪。躬親爲之。臨祭而悽愴怵惕。如見音容焉。積累勤苦。至中身而家溫力足。於是置近代祭田。及遠世墓祭之土。又補大小宗家之貧者。凡族親之貧而未能婚與葬者。輒傾囷助之家不用巫覡之術。庭不設博奕之戲。身不着華靡之服。手不持玩好之物。惟以孝友勤儉。廉靜澹泊。爲身家究竟計。非類之變。戒族戚隣里。俾勿浸染。薙令之行。語諸子曰。薙髮而生。不如存髮而死。汝輩愼勿爲世變所遷移也。乙酉除繕工監監役。壬辰咸從府使。壬寅拜綾州郡守。始赴任。甲辰夏解歸。其居官也。著有聲績。捐廩數千。以應一邑戶役。竪碑又磨崖。以識不忘。邑有崔忠毅公旌閭。歲久頹圮。公爲之出力以繕修。嘗語諸子曰。蘆沙華西兩先生。實儒門正脈。縱不能及其門。門人可仰如勉庵松沙諸丈在焉。此汝輩從遊之所也。公每得勉庵疏章。歎其直言讜論。雖不見用。而足以聳人觀聽云。乙巳夏屬疾。累朔沈綿。至十一月。聞有國變。蹶然起曰。國計罔極乃至是耶。歔欷不自勝。未幾疾添劇。藥餌不下。一日顧諸子曰。有過必改。見善必遷。此是守身保家第一事。戒諸婦女曰。婦人以順爲德。勿使聲出於閨旁之間也。家有錢券。取而折之曰。適以惹起爭端。吾雖不能貽之以善。乃反遺之以禍乎。有頃。盥洗着新。就席從容而逝。卽十二月十五日也。鄕里咸曰。善人逝矣。遠近奔弔者。相屬於道。翌年二月。葬于州之佳玉峙村上某坐之原。配寶城宣氏季孝女。系配水原白氏英壽女。系配南平文氏弘璟女。皆封淑夫人。男永烈。宣氏出。永夏進士。女曺秉相羅營成。白氏出。男永吉永鎭永實。女柳在弘文濟哲。文氏出。孫以下不盡錄。余在同鄕。爲公所辱知者久矣。每見其愷悌謹慤之風。令人有愛好無己之意。又見其五男五婿羣孫滿庭。白首朱紱。光榮炫耀。以爲福善禍淫。其理不忒。嗚乎。天不憖遺。而聲音儀容。已千古矣。螽斯詵詵。餘祿未艾。安知公之志業。不有能繼述者耶。永烈伻其三從弟永謨。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不敢承膺。而緬古感今。有不忍終辭者。謹据狀而爲之修潤焉爾。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 비장(比長)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笠巖),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세조 10년(146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였다 최 충의공(崔忠毅公) 최경회(崔慶會, 1532~1593)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제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9일 동안 싸우다 전사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이다.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침(外侵)에 대한 6가지의 방비책을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을 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배우고,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고,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6월 11일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 지방 진위대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대마도에 감금되어 단식하던 중 그해 11월에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돌아왔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붉은 슬갑(膝甲) 관직을 상징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취호 처사 이공 행장 醉湖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승호(承灝), 자는 도민(道敏), 호는 취호(醉湖)이다. 세계(世系)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고려조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순백(珣白)이 비조(鼻祖)이다. 진현관 학사(進賢館學士)를 지낸 휘 기밀(奇密),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휘 홍길(弘吉), 참판(參判)을 지낸 휘 일영(日映), 경창군(慶昌君) 휘 선제(先齊), 이조 참의를 지낸 휘 조원(調元),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 호선(好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휘 열(烈)은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조들이다. 고조인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인기(仁基), 증조인 휘 응근(應根), 조부인 휘 광하(光夏), 고(考)인 휘 종진(宗震)은 대대로 문학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는 신평 송씨(新平宋氏) 성묵(聖黙)의 딸이고, 계비(繼妣)는 진주 형씨(晉州邢氏) 효달(孝達)의 딸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헌종2) 9월 9일에 능주(綾州)의 단양리(丹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도 너그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곁에 머물면서 진퇴(進退)나 출입(出入)에 오직 부모의 명을 따르며 어기는 일이 없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자 대인(大人)은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매번 공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다. 계모(繼母) 형씨(邢氏)를 섬기는 것도 한결같이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처럼 하여 온화한 말투와 부드러운 기색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밖에서 돌아오면 그때마다 반드시 무언가를 갖다 드렸으며 생선 한 마리 과일 하나와 같이 미미한 것일지라도 빠트리는 경우가 없었다. 아우들을 보살피고 아꼈으며 은혜로운 정이 순박하고 두터워 집안에서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제가(諸家)를 두루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힘차고 풍부하였으며 더욱이 시의 운율에 뛰어났다. 매번 붕우들과 시와 술을 펼칠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초고를 읊어도 주옥(珠玉)처럼 아름다웠으며 낭랑한 목소리는 시를 토할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시속의 기호를 따르지 않았고 과장(科場)에 나아가기는 했어도 몰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청탁을 넣지 않았다. 평소에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명예와 이익에 관계된 곳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오직 산속의 서재(書齋)와 마을의 서당 등 적막한 구석에 자신의 자취를 감추고 벗들과 모여 강론을 펼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여생의 마지막 계책으로 삼았다. 간혹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경관을 만나거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뜬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을 마시고 시 한 수를 지으면서 표연히 속세를 벗어나는 의표가 있고 아득히 천지를 자유롭게 떠돌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마치 사람이 사는 세상의 성쇠(盛衰)나 득실(得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일찍이 서재에 취호(醉湖)라는 편액을 걸고 간혹 성명(姓名)을 적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면 그때마다 강호 취객(江湖醉客)이라고 일컬었으니 대체로 만년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말이었던 듯하다. 병술년(1886, 고종23) 7월 12일에 거동(車洞)의 우사(寓舍)에서 생을 마쳤다. 묘는 여러 차례 천장(遷葬)을 거쳐 태봉리(台峯里) 반탁동(半坼洞)에 있는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영운(永運)의 딸이며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용휴(龍休)이고 차례대로 진휴(進休), 구휴(球休), 채휴(埰休)이며, 딸은 조병연(曺秉淵)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병순(炳純)과 병근(炳根)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과거(科擧)와 격식에 얽매어 걷잡을 수 없이 함께 휩쓸리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간간이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간혹 시사(時事)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풍치와 기상(氣象)이 종종 자질구레한 사람들보다 훨씬 우뚝하여 당시 사람들의 명망이 집중되는 자가 있다. 이들은 천부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가릴 수 없는 것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공이라면 애초에 그런 인물이 아닐 리가 없다. 진휴(進休)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선고(先考)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25년이 되었습니다. 그사이에 세상의 변화가 예측하기 어려웠고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 당시의 저술이 한 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불초한 이 자식은 애통하고 한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당시에 종유(從遊)했던 분들 가운데 선고와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는 오직 장인(丈人)만 살아계십니다. 원하건대 대략을 찬술하여 후손들에게 선고(先考)의 지행(志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교분이 있고 인척 관계가 더해져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이승과 저승으로 멀어졌으니 옛날과 지금에 대한 감회가 일어 미치지 못하는 한이 늘 절실하였기에 차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姓李。諱承灝。字道敏。號醉湖。系出光山。以麗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鼻祖。進賢館學士諱奇密。直提學諱弘吉。參判諱日映。慶昌君諱先齊。吏曹參議諱調元。大司成諱好善。同副承旨諱烈。皆顯祖也。高祖通德郞諱仁基。曾祖諱應根。祖諱光夏。考諱宗震。世著文行。妣新平宋氏聖黙女。繼妣晉州邢氏孝達女。憲宗丙申九月九日。生公于綾州丹陽里。公天性溫仁慈厚。自幼在父母側。進退出入惟命是從。未有違異。早喪慈幃。哀毁過節。其大人慮其傷生。每寬慰之。事繼母邢氏。一如所生。溫言柔色。務盡其歡。每自外還。必有所獻。雖一鱗一果之微。未有闕焉。撫愛諸弟。恩誼純篤。戶庭之間。無有間言。博涉諸家。文詞宏贍。而尤長於詩律。每値朋友文酒之席。信口呼草。如瓊琚珠玉。琅琅有聲。愈出愈奇。業於程文而不趨時好。赴於試圍而不用關節。平日不見要貴之人。不涉聲利之地。惟掩身斂迹於山齋村塾寂寞之濱。講聚朋徒。課授蒙率。以爲餘生究竟計。或遇山水幽賞之地。風月淸澹之夕。一觴一詠。飄然有出塵之標。邈然有獨往之意。若不知人間世有榮悴得失也。嘗題齋顔以醉湖。或有標識姓名處。輒稱江湖醉客。蓋其晩年寓意也。丙戌七月十二日。卒於車洞寓舍。墓累遷而安厝於台峯里半坼洞乙坐原。齊南平文氏永運女。擧四男一女。長龍休。次進休。次球休。次埰休。女適曺秉淵。孫炳純炳根。餘皆幼。嗚乎。世之儒者局束於功令程式之間。滔滔同流。漫不自振者多矣。間有英才美質。或不免黽勉於時。而其風韻氣象。往往拔出於區區常調之外。而偉然爲時望之所歸。此其天質之美。自然呈露。而有掩不得者如此。如公者。未始非其人也。進休一日過余。泣且語曰。先人之沒。今二十有五載矣。其間世變區測。室家流離。當日著述。隻字不遺。此不肖所以痛恨罔極也。在當日遊從之列而與先人最熟者。惟丈人在焉。願爲之撰述梗槪。使爲後嗣者。知厥考志行之有在也。嗚乎。余於公。以丱角舊交。又忝瓜葛之親。聲氣攸孚。期詡漸密。居未幾何。幽明遽隔。緬古感今。常切未逮之恨。有不忍多辭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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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화암 처사 이공 행장 華庵處士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李), 휘는 침(忱), 바꾼 휘는 윤제(崙齊), 자는 백규(葵伯), 관향은 공주(公州)이다. 국초(國初)에 휘 명덕(明德)은 목은(牧隱)의 뛰어난 제자로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공에게는 11대 선조가 된다. 공숙은 이조 참판 휘 효근(孝根)을 낳았고, 참판은 이조 참의 휘 림(琳)을 낳았고, 참의는 철산 부사(鐵山府使) 휘 공필(公弼)을 낳았고, 부사는 맹산 현감(孟山縣監) 휘 교(嶠)를 낳았고, 현감은 주부(主簿) 휘 시돈(時敦)을 낳았다. 주부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추증된 휘 경운(慶雲)을 낳았고, 동지돈녕부사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휘 영숙(靈肅)을 낳았고, 참의는 진사 휘 위(韡)를 낳았다. 휘 위는 호가 혁회재(衋悔齋)이며 은봉(隱峯) 안(安) 선생74)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혁회재는 진사 휘 동명(東鳴)을 낳았고, 진사는 휘 만휘(萬輝)와 만방(萬芳)을 낳았다. 공은 만방(萬芳)의 아들이었으나 백부인 만휘(萬輝)의 후사로 나갔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영장(營將) 오세장(吳世長)의 딸이다. 숙종 임술년(1682, 숙종8)에 주(州)의 월곡리(月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말하고 웃고 장난하고 노는 모습조차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면서는 날마다 과정(課程)을 준수하였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고 공경으로 형과 어른을 섬겼으며 몸가짐이나 말하는 것이 다급한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성장해서는 지방의 상서(庠序)나 서울의 태학(太學), 원근에 있는 장덕(長德)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당시의 명사(名士)인 권한수(權寒水)75), 이한포(李寒圃)76), 조이우(趙二憂)77), 이도암(李陶庵)78), 민단암(閔丹巖)79), 섬촌(蟾村)80) 같은 이들이 모두 공의 사우(師友)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위아래가 뒤바뀌는 때를 만나고 게다가 사림(士林)의 당화(黨禍)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한층 격렬해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뒤섞여 오랫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공은 포의(布衣)의 서생(書生)으로 비록 세상에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탄식과 분노는 커다란 무지개와 겹겹이 쌓인 노을이 천 길 높이로 솟은 듯한 기상이 있어 종종 읊는 시나 주고받는 편지에 드러나곤 하였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부터 영조 무신년(1728, 영조4)까지 여러 선정(先正)이 무함을 당하자 도내의 유생들을 이끌고 소장을 올리고 대궐 앞에서 절규한 것이 4~5차례였다. 간언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구중 대궐에 울리고 바람처럼 온 나라를 진동시켜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경중 고저(輕重高低)를 가름하는 데 힘을 보탰으니 어찌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10년 동안 과거를 중지하라는 하교가 내리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화학산(華鶴山) 아래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치고자 계획하고 자호(自號)를 화암(華庵)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임해서는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한 뒤 새 자리를 깔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착용하고, 이어 여러 아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집안과 고을에서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경계하였다. 마지막에 주자(朱子)가 이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직(直)일 뿐이다.81)"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말이 끝나자 조용히 세상을 떠나니 때는 계축년(1733, 영조9) 1월 14일이었다. 배(配)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세희(世曦)의 딸로 지평 문홍헌(文弘獻)의 현손(玄孫)이다. 계배(繼配)는 강릉 유씨(江陵劉氏) 재창(再昌)의 딸로 산당(山堂) 유호인(劉好仁)의 5대손이다. 3남 2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정후(政厚), 인후(仁厚), 생후(生厚)이고 딸은 정지숭(鄭智嵩), 김명태(金命泰)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아득한 시골구석에서 태어나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가까이로는 한 고을의 선사(善士)들과 벗하고 멀리로는 한 나라의 선사들과 벗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인(仁)을 보충하여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사람과 짐승, 중화(中華)와 오랑캐, 군자와 소인의 분별과 관련된 시비(是非)와 의리(義理)에 대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 없이 큰소리로 주장을 펼쳐 스스로 시류(時流)의 분노를 일으키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이 공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흥을 일으키고 탄식할 것이다. 대절(大節)이 이와 같으니 나머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82)을 스승으로 삼아 향음례(鄕飮禮)를 배웠다. 박장(朴丈)이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100년 전 관(官)에서 향유(鄕儒)를 맞이하여 향음례를 행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당시 고을에 도암(陶菴)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학한 사람으로 교관(敎官) 박헌가(朴獻可)와 화암(華庵) 이윤재(李崙齊) 2인이 있었지만, 교관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공(李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빈(賓)과 주(主), 개(介)와 준(僎)83)의 위치, 오르내리며 절하고 읍(揖)하는 의절(儀節)이 문채가 찬란하고 질서가 엄연하며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매우 조화로웠다. 관에서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이곳이 예절과 법도를 갖춘 고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날 이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공을 흠모하던 뒤에 공의 5대손 병섭(秉燮)을 통하여 비로소 공의 유집(遺集)을 구해 읽어보고 전에 들었던 내용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삼가 차례대로 적어 병섭의 마음에 보답한다. 公姓李。諱忱。改諱崙齊。字葵伯。貫公州國初有諱明德以牧隱高弟官監司贈領議諡恭肅。於公爲十一代祖也。恭肅生吏曹參判諱孝根。參判生吏曹參議諱琳。參議生鐵山府使諱公弼府使生孟山縣監諱嶠。縣監生主簿諱時敦。主簿生諱慶雲贈同知敦寧府使。同知生諱靈肅贈吏曹參議。參議生進士諱韡號衋悔齋。學于安隱峯先生之門。衋悔生進士諱東鳴。進士生諱萬輝萬芳。公卽萬芳之子。而出爲萬輝后。生妣海州吳氏營將世長女。以肅宗壬戌。生公于州之月谷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見者奇之。自就傅。日遵課程。孝事父母。敬事兄長。持身出言造次不放及長出遊於庠序學校及遠近長德之門一時名勝。如權寒水李寒圃趙二憂李陶庵閔丹巖蟾村。皆其師友也。當天地翻覆。冠屨倒置之餘。加以士林黨禍。橫生層激。是非邪正。混久未定。公以布衣書生。雖不得用於世。而其感慨悲憤之意。蓋有長虹層霞。橫互千仞底氣象。而往往發於諷詠往復之間自肅宗甲午至英宗戊申。爲諸先正被誣。率道內儒生陳章叫閽者。爲四五度言雖不用。而其所以聲徹九閽。風動一國。而有力於邪正慝淑輕重低昂之間者。其功豈少補哉。及其有十年停擧之敎也。悵然歸鄕。築室於華鶴山下。爲躬耕終老之計。自號曰華庵。臨歿。沐浴操潔。設新席着深衣大帶因戒諸子以孝弟忠信居家處鄕之道。極其詳悉。末誦朱夫子所謂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直而已之語。語畢從容就逝。時癸丑正月十四日也。配南平文氏世曦女。持平弘獻玄孫。繼配江陵劉氏再昌女。山堂好仁五世孫生三男二女政厚仁厚生厚鄭智嵩金命泰也。嗚乎。公生於遐隅。慨然自拔。近而友一鄕之善士。遠而友一國之善士。攻闕輔仁以自展拓。至於是非義理。有關於人獸華夷君子小人之分者。無不明目張膽。高談大言。至於身觸時怒而不畏焉。使後之人。讀其言誦其行。不覺興感而咨嗟也。大節如此。其餘可槪也。余少師無邪齋朴丈。學鄕飮禮。朴丈因言吾鄕百年前。官邀鄕儒。將行此禮。不知所爲時。鄕有受學於李陶庵先生者。朴敎官獻可李華庵崙齊二人。而敎官已古。請李公爲相於是賓主介僎之位。升降拜揖之節。燦然有文。儼然有秩。不徐不疾。旣洽而止。官曰吾固知此爲文禮之鄕。而不圖今日至此之美也。贊歎不已云。欽慕之後。因公之五代孫秉燮。乃得其遺集而讀之。益信其前所聞者。謹序次以塞秉燮之意云爾。 은봉(隱峯) 안(安) 선생 은봉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으로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역임했다. 저서로 《은봉전서》가 있다. 권한수(權寒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이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고 이후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 등이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한포(李寒圃)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686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수찬, 교리, 응교, 대사간, 이조 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에 올랐다. 조이우(趙二憂)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86년(숙종12)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정언, 경연동지사, 호조ㆍ공조ㆍ이조의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남아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도암(李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이다.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02년 알성 문과에, 17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했다. 저서에 《도암집》과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ㆍ(→,)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민단암(閔丹巖)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ㆍ세심(洗心)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로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 《연행록(燕行錄)》,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사원(士元), 호는 섬촌(蟾村)ㆍ정암(貞庵)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47년(영조23) 집의(執義)ㆍ대사헌ㆍ공조 참판ㆍ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천지가 …… 뿐이다 주희가 임종하기 얼마 전에 병이 깊었는데도 제생(諸生)에게 강론하기를 "학문을 하는 요체는 오직 일마다 옳음을 살펴 구하고 그름을 결단코 제거하는 데 있다. 오래도록 쌓아 가면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서 저절로 발하는 바에 모두 사사로이 굽어짐이 없게 된다. 성인이 만사에 응하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 직일 뿐이다.[爲學之要, 惟在事事審求其是, 決去其非. 積累久之, 心與理一, 自然所發皆無私曲. 聖人應萬事, 天地生萬物, 直而已矣.]"라고 하였다. 《朱子年譜 卷4 七十一歲 三月》 무사재(無邪齋) 박장(朴丈)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ㆍ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주역(周易)》에 해박하고 정밀하였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介)와 준(僎) 향음주례(鄕飮酒禮) 때 행사를 도와 주선하는 자를 가리킨다. 주인을 돕는 자를 준(僎), 빈(賓)을 돕는 자를 개(介)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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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신재 이공 행장 懷愼齋李公行狀 우리 고을은 호좌(湖左 충청남도)에서 시(詩)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근고(近古) 시대에 이르러 경전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더욱 빈빈(彬彬)하였다. 회신재(懷愼齋) 처사(處士) 이공(李公) 휘 춘형(春馨) 또한 그런 인물이다. 공은 공산(公山)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국초의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이 중조(中祖)이다. 5대조 휘 위(韡), 호 혁회재(衋悔齋)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84)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효우(孝友)와 학문(學問)으로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고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이고 증조는 휘 만휘(萬輝)이다. 조부 휘 윤제(崙齊), 호 화암(華庵)은 도암(陶庵) 이 문정공(李文正公 이재(李縡))에게 학문을 익히고 상소(上疏)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을 구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고(考)는 휘가 정후(政厚)이고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재탁(再濯)의 딸이다. 영조 갑자년(1744, 영조20)에 능주(綾州)의 부춘방(富春坊)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애롭고 온화하며 근면하고 신중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부친의 병을 수발하면서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차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모친이 병들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고생을 이겨내면서 글을 읽어 문사(文詞)가 풍부하였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년에는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85)을 찾아뵙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만년에 칠송(七松)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헌무정(獻舞亭)으로 이주하여 두문불출하며 심신을 수양하였다. 손수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옮겨 적고 깊이 연구하고 본질을 완미(玩味)하여 그 기쁨에 자신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았건만 명성과 실제가 더욱 융성해져 마을과 향당(鄕黨)의 오랜 벗이나 생도(生徒)들이 공에게 의지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평소에 저속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사벽(邪僻)한 색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몸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선행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기고 악행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다. 《춘추(春秋)》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에 대해) 더욱 연구하여 밝히고 힘써 지켜나갔으며 대명유민(大明遺民) 4자를 크게 써서 앉는 자리에 걸어두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상사(上舍) 남익(南熤)과 이웃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학문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봄가을로 향리(鄕里)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간간이 나라 안의 장덕(長德)과 종유하며 더욱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아, 공은 고상하고 소탈한 운치(韻致)가 시나 말 등에서 매우 많이 드러날 뿐만이 아니다. 〈권학론(勸學論)〉, 〈신우기(新寓記)〉 등의 저작은 공이 어떤 인물인지 더욱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에서 공을 천거하는 문서가 앞뒤로 빈번하게 이어지고 공이 남긴 성덕(盛德)의 향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바다에 숨겨진 구슬이지만 반드시 훗날 외사씨(外史氏)의 기록에서 빠지지 않아 능양(陵陽)의 고사(故事)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배(配)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철한(澈漢)의 딸이며 아들은 문규(文圭)ㆍ문익(文翊)ㆍ문표(文{白+表})이다. 손자와 증손자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너무 많아 적지 않는다는 뜻인 듯합니다.) 묘(墓)는 지동촌(池洞村) 뒤의 입동(笠洞) 을좌(乙坐)에 합장하였다. 현손 장환(長煥)이 유집 1권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어 한마디 말로 공의 덕을 드러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공을 우러러 흠모하였기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吾鄕在湖左。以詩禮稱。至近古。經明行修之士。尤彬彬焉。懷愼齋處士李公諱春馨。亦其人也。公公山著族。以國初恭肅公諱明德爲中祖。五世祖諱韡號衋悔齋中進士。師事隱峯安文康公。孝友學問。爲士林儀表。高祖諱東鳴進士。曾祖諱萬輝。祖諱崙齊號華庵。受學于陶庵李文正公。疏救尤春兩先生。有遺稿。考諱政厚。妣濟州梁氏諱再濯女。以英宗甲子。生公于綾之富春坊。慈祥勤勅。事親無違。幼侍父病。血指見愈。母病又如之。刻苦讀書。詞藻贍富。爲親供擧。不以得失介意。中年謁性潭宋先生。得聞爲己之學。晩自七松。挈移獻舞亭。杜門養靜。手抄心經近思錄等書。沈潛玩素。怡然不知老之將至。潛光鏟輝。望實彌隆。閭里鄕黨知舊生徒。無不倚以爲重焉。平生口不出鄙俚之言。目不覩邪僻之色。足不妄行。身不妄動。見善若己有之。見惡若己凂之。於春秋尊攘之義。尤加講明而力守之。大書大明遺民四字。揭於座側以見志焉。與南上舍熤。結隣對床。講磨無闕。春秋會鄕里士子。講小學大學。間從國內長德。益自展拓焉。嗚乎。其高韻逸趣。見於吟哦咳唾之餘者。不啻多矣。而至若勸學論新寓記諸作。尤可以見公之爲公矣。況鄕道剡報。前後頻仍。而遺芬餘馨。藉藉人口者。足以爲百世不刊之證耶。滄海遺珠。必不見漏於後日外史之筆。而爲綾陽故事之一也。配濟州梁氏諱澈漢女。子文圭文翊文白+表。孫曾以下不能盡錄。墓池洞村後笠洞乙坐合祔。玄孫長煥。持遺集一卷示余。因請一言以狀其德。余以鄕里後生。慕仰有素。不敢以匪其人辭。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은봉전서》이 있다.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ㆍ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성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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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9 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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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下沙諸小年。賦蓮塘韻。 靜觀草木性。君子少如君。茂叔同歸趣。長庚去雕文。淡葩羞紫玉。嫩葉遜靑雲。安得氷霜味。沈痾去十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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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居無事。偶得十數句。以示文兄。 芙蓉殿南服。噫吁嚱危哉。高妙除人間。淸虛絶浮埃。我欲往從之。口呿先發款。攀梯梯欹側。策馬馬虺尵。經營問幾載。瞻忽益崔嵬。下得一小經。永菴向陽開。礲斲審面勢。間架集衆材。門巷甚方列。林薈亦裁培。雖云無佳景。心胸自足恢。由此日邁征。陟彼路有媒。出門望行客。不見一人來。或從發軔止。或逐半途回。招招印須友。趲程勿徘徊。歲月流水走。鬂髮石火催。日暮蒼山遠。努力一車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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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임생(任生)이 와서, 또한 보내주신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편지를 통해 부모님을 모시고 지내시는 체후가 더욱 평안하다는 것을 알고서, 위로되고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는 권루(卷婁)12)하여 마음이 어수선하여, 도무지 말할 것이 못 됩니다.심(心)은 오직 영묘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영묘하지 못하여서 마른 나뭇가지나 불 꺼진 재【枯木死灰】13)와 같다면, 어찌 주재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능자자(能字者)'라는 글자는 심(心)을 말한 것입니다. 영묘한 바는 이(理)가 있기 때문이니, 이(理)가 아니면 어찌 이 영묘함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하단에 '소자저(所字底)'라는 글자는 성(性)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말하길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깨닫게 되는 것은 마음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주재(主宰)하는 것은 심(心)이요, 주재하는 것의 근원은 성(性)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이 뜻이 아니겠습니까. 심성(心性)의 경계에 구분을 분명히 하여서, 부디 세 번 생각을 더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理) 위에 이가 있고, 이로써 이를 부린단 말입니까. 아마도 꼼꼼히 살피지 못하여서, 그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저 심(心)과 성(性)은 진실로 두 개로 나뉜 것이 아니니, 그 본체의 이름과 뜻에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가르침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任生來。又承惠存。以審侍體增謐。慰浣無任。義林卷婁憒憒。無足云喩。心惟靈故能主宰。若不靈如枯木死灰則何有主宰之可言。此所以下能字者字而言心。然其所靈以有理故也。非理安有此靈。此所以下所字底字而言性。朱子曰。能覺者氣之靈。所覺者心之理。又曰。主宰者心。主宰底性。亦非此意耶。此於心性界至。截得分明。願加三思。如何理上有理。以理使理。恐偶未照管而說得到此耳。大抵心性固非二物。而其當體名義。有不可苟也。更示之爲望。 권루(卷婁) 《장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말로, 외물을 좇아 자신의 심신을 고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고목사회(枯木死灰) 불교에서 흔히 쓰는 화두(話頭)로서, 사람이 욕심이 없거나 생기가 없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유학자가 불가(佛家)의 참선(參禪)을 비판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근사록집해》 권13 〈변이단(辨異端)〉에 정호(程顥)의 말을 인용하여 "마음의 근원이 안정되지 못하므로 마른 나무나 꺼진 재와 같아지려고 한다.【釋爲心源不定, 故要得如枯木死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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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앞에 보낸 편지와 뒤에 보낸 편지가 동시에 도착을 하여 열어 읽어보고는, 마음이 활짝 트여서 긴 여름날에 우울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그러졌습니다. 이로 인해 경전을 읽으며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한 것을 알고서, 간절히 바라는 바에 더욱 들어맞아 흐뭇하였습니다. 저는 어지럽고 못난 채로 시간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괴로울 뿐입니다. 심설(心說)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이끌어 깨우쳐준 그 가르침이 지극하여서, 모두 그 학문의 경지가 깊고 남을 위한 충직한 마음이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습니다. 주재자(主宰者)와 주재저(主宰底)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그렇다면 주재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영묘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재저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덕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性)은 무엇입니까. 이(理)가 심(心)에 가춰진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性)은 곧 이(理)이니, 성과 이를 어찌 구별한단 말입니까. 심의 영묘함이 진실로 이(理)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이가 행하는 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氣)가 아니면 영묘함을 발휘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영묘한 바가 없으니, 영묘하기 때문에 주재하는 것입니다. 영묘함을 버리고서는 아마도 별도로 주재처(主宰處)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이 목석과 같고서 능히 주재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삼가 그대와 경함(景涵)의 생각을 살펴보건대, 영묘함은 전적으로 기(氣)에 속해 있고, 주재함은 전적으로 이(理)에 속해 있다는 것은 각기 일정한 근거가 있고 각기 알맞은 때가 있는 듯하지만, 마음의 영묘함이 바로 신묘한 주재처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더욱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무릇 영묘함과 주재함에 대해 평탄하게 설명하면, 정밀하고 거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파고들어 말하면, 실로 피차의 구분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심(一心)의 사이에 어찌 영묘함이 있고 또 신묘함이 따로 있어서 대치하고 병립한단 말입니까. 그대가 '주재자(主宰者)'를 '이(理)'자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理)가 심(心)에 상대함이 있고, 이 위에 이가 있다는 등의 말들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재저리(主宰底理)'를 '주재성정(主宰性情)'이라고 간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의리(義理) 상에 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법(文法) 상에서도 부당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재자(主宰者)는 진실로 마음의 영묘함이니, 이를 주재(主宰)의 성정(性情)이라고 한다면, 이(理)가 주재(主宰)라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주자(朱子)께서 마땅히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요, 주재하는 바는 성정이다"라고 했을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소(所)와 소이(所以)에도 또한 그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주자께서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은 이(理)이고, 소당연(所當然)은 의(義)이다'라 한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저(底)'자는 또한 '소(所)'자나 '소이(所以)'자와는 그 뜻에 다름이 없었는데, 옛사람들의 글자를 배치한 뜻이 이와 같은 경우가 진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前書後書。一時倂至。開玩豁然。長夏紆鬱。不覺消釋。因審經體衛安。益協懇祝。義林憒劣捱遣。見無一狀可煩耳。心說娓娓提諭。極其緘悉。其造詣之深。謀忠之至。令人歎服夫主宰者。主宰底。煞有分別。主宰者何物。非指心之靈而言耶。主宰底何物。非指心之德而言耶。性是何物。非指理之具於心者而言耶。然則性卽理也。性與理有何分別乎。心之靈。固不可遽謂之理。而亦不可謂非理之所爲。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靈故主宰。舍靈則恐無別求主宰處。曷嘗見冥頑如木石而能主宰者乎。竊覵賢與景涵之意。以靈專屬之氣。以主宰專屬之理。似涉乎各有占據。各有時節。而殊不知心之靈。乃是神妙主宰處也。宜乎多言而愈不合也。夫靈與主宰。以平坦說去。則若有精粗之可言。而究而言之。則實無彼此之可見。一心之間。豈有靈又有神。對峙而倂立乎。賢以主宰者。作理字看。故有以理對心。理上有理等。多少說話也。且賢以主宰底理。看作主宰性情云爾。則非惟於義理有欠。亦恐文法不當如是也。主宰者。固是心之靈。而曰主宰性情云。則理爲主宰之義。顧安在耶。若如賢意。則朱子當曰。主宰者心。所主宰者性情云云。固不當如是而止也。所與所以。亦未見其有異。朱子所謂所以然理也。所當然義也。此亦可見矣。底字亦與所字所以字。其義無異。古人下字之義如此處。固非一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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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중에게 답함 答梁處中 지난번에 황생(黃生)과 함께 논변한 바가 있었는데, 끝내 설득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지리멸렬하게 흐리기만 하여 그의 마음을 돌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오직 그대【東溪】14)의 힘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니 도리어 그대와 황생의 의견이 같았습니다. 이에 나의 비루한 견해가 과연 어긋나고 잘못되어 의견을 바꾸어 바로잡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나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와 황생은 신(神)자를 이(理)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을 야기시키는 듯합니다. 이 마음이 이미 쏠리는 바람에 창졸지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청컨대 주자(朱子)의 설로 질문을 하여도 괜찮겠습니까. 명덕(明德)장 주석에서 '허령(虛靈)'이라 하였고, 진심(盡心)장 주석에서는 '신명(神明)'이라 하였으며, 혹문(或問)에서 또한 '신명'이라 하고, 혹은 '허령'이라 말하고, 혹은 '신명'이라고 하였는데, 어째서입니까. 영(靈)은 기(氣)의 영묘함이요, 신(神)은 기(氣)의 신묘함이니, 영과 신은 서로 맞닿아 있고, 허와 명은 서로 응하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 말하여도 서로 차이가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신명(神明)을 이(理)로 여긴다면, 이(理)로 이(理)를 갖추고 이(理)로 이(理)를 신묘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옳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공자(孔子)께서 마땅히 '도(道)로써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라고 하였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자(張子)는 '성(性)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였지, '심(心)으로 능히 성을 검속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본래 둘로 나뉜 것이 아니니, '구(具)․응(應)․묘(妙)․재(宰)'라고 한 것들이 모두 그 하는 바이니, 내가 이른바 "단지 이 영묘함뿐이니, 바로 이것으로 주재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찌 주자(朱子)의 설과 반대되는 바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대가 보기에 몹시 놀라서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지요. 주자께서 말하길 "허령(虛靈) 두 글자는 명덕(明德)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15)라고 하였으니, 덕(德)은 심(心)에 비하여 더욱 정밀한데, 오히려 '이미 충분하다【已足】'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심(心)의 본지(本旨)가 어찌 이보다 부족함이 있어서 단지 사물 자체만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무릇 영(靈)은 체(體)에 가깝고, 신(神)은 용(用)에 가까우며, 영은 비교적 실(實)에 해당하고, 신은 비교적 허(虛)에 해당하나, 그 형이하(形而下)가 됨은 하나입니다. 묘용(妙用)을 신(神)이라 여긴 것은, 아마도 신(神)이 바로 이(理)의 묘용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만 신(神)이 바로 이(理)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자께서 어찌 "신령(神靈)은 성(性)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겠으며, 또한 어찌 "신명(神明)은 물(物)이요, 이(理)가 아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신(神)은 천지(天地)의 묘용(妙用)이며 음양(陰陽)의 불측(不測)을 말한 것이니, 본래 무위지물(無爲之物)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무위(無爲)하면서 유위(有爲)의 주(主)가 된다고 하니, 어찌 무위함이 있으면서 신(神)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께서 말하길 "심(心)은 몸에서 주(主)가 되고, 성(性)은 심(心)의 이(理)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심(心)은 이기(理氣) 합일(合一)의 물(物)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능히 주재하는 자【能主宰者】는 영(靈)이요, 주재하는 대상【所主宰底】은 이(理)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주체자【能者】가 대상자(所者)를 부리는 것이 되고, 장수가 되는 것이니, 이 어찌 소이(所以)의 위에 다시 소이(所以)를 두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理)가 주(主)가 되는 것에는 신(神)자를 끌어다가 이(理)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연후에 이(理)가 비로소 주(主)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본령(本領)과 기(氣)를 이(理)로 착각하고 있다고 그대를 나무랐던 것은, 마땅히 남을 책망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모든 조항마다 모두 예를 들어서 열거하기 어려우나, 만약 '영(靈)이 기(氣)이고, 신(神)이 이(理)이며, 신(神)은 장수이고, 영(靈)은 병졸이며, 영(靈)은 신(神)이 아니면 영묘하지 못하고, 신(神)은 영(靈)이 아니면 신묘하지 못하다'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말들은 병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신(神)과 영(靈)을 나누어서 이(理)와 기(氣)에 배속하고서 논리를 세우는 데 어긋나지 아니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동계(東溪) 한 사람만의 견해가 아니니, 근래에 주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혹 많이들 이와 같이 합니다. 이는 심(心)이 주재(主宰)가 된다는 말을 보고서 기(氣)가 주인의 자리를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허령(虛靈)의 밖에 별도로 신(神)이라는 한 글자를 찾아서, 억지로 이름지어 이(理)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운용(運用)․작위(作爲)함은 모두 귀일되는 것이니, 만약 선유(先儒) 가운데 기질을 논하는 자가 온몸의 기질을 버리고서 희미하고 아득한 사이에서 별도로 심(心)의 기질을 찾는다면, 그 말류(末流)의 병폐됨이 어찌 주기론에만 그치겠습니까. 무릇 도리(道理)란 무형(無形)이라, 알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견해가 아직 명확하지 못한데 억지로 판별해내려고만 한다면, 이는 바람을 붙잡거나 그림자를 묶어놓는 격이니, 죽을 때까지 세월을 보낸다 한들 어찌 학문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리는 더욱 존양(存養)함에 몰두하고 정진하여서 갖가지 강학과 토론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니, 부디 늙은 나이【桑楡】16)라도 학문에 수확이 있기를 혹 희망해봅니다. 曩與黃生有所論辨。而終不回頭。顧惟滅裂。無力可回。所恃者。惟東溪之力可以助之。及讀來書。反與黃生之見同焉。可知愚陋之見。果是差謬而所當回頭者。未始非此漢也。然賢與黃生。錯認神字作理看了。是以生出無恨葛藤此意已熟。有非倉卒可解。請以朱子說質之可乎。明德註曰。虛靈云云。盡心註曰。神明云云。或問又曰。神明云云。或言虛靈。或言神明何耶。靈是氣之靈。神是氣之神。靈與神相貼。虛與明相應。故一例互言。而非有差殊也。如以神明爲理。則是以理具理。以理妙理可乎。如此則孔子當曰。道能弘道。不當曰人能弘道。張子當曰性能檢性。不當曰心能檢性也。虛靈神明。本非二物。而曰具曰應曰妙曰宰。皆其所爲則。愚所謂只此靈也。便能主宰云云。何嘗與朱子說。有所背馳。而賢者見之以爲大驚小怪耶。朱子云。虛靈二字。說明德意已足。德於心較精。而猶云已足。況心字本旨。有何不足於此。而只以當體爲言耶。夫靈近體。神近用。靈較實。神較虛。而其爲形而下者則一也。以妙用爲神者。蓋言神是理之妙用云爾。非直以神爲理也。不然朱子何以曰。神靈不可以言性。又何以曰。神明是物非理云耶。且神是天地妙用陰陽不測之謂。則本非無爲之物。今曰無爲而爲有爲之主。安有無爲而可以謂之神者耶。朱子曰心是主於身。而性是心之理也。以此言之。心是理氣合一之物也。愚故曰。能主宰者是靈。所主宰底是理。能者爲役所者爲帥。此安有所以之上復有所以之嫌耶。於此可見理之爲主。而不必引神字作理然後。理始爲主也。然則兩本領。及認氣爲理之譏。賢者恐當以責人者自責。庶乎可矣。諸條固難枚擧。而如云靈是氣。神是理。神爲帥。靈爲役靈非神不靈。神非靈不神。此等句語。無非病痛。安有分神靈屬理氣。而立論不差者乎。然此非東溪之獨見。近日主理之論。或多如此。蓋見心爲主宰之語。而恐氣之奪主也。遂於虛靈之外。別討一神字。强名之曰理。凡運用作爲。一切歸之。如先儒之論氣質者。舍周身氣質。而別求心之氣質於渺茫怳惚之間者也。其爲末流之獘。豈但主氣而已哉。夫道理無形。難知亦難言。況見之未明。而强辨不置。則如捕風繫影。卒歲窮年。寧有了期耶。此吾輩尤當汲汲存養沈索。以開種種講討之路。庶幾桑楡之收。或有望焉。 동계(東溪) 조선 말기 유학자였던 양회락(梁會洛, 1862~1935)로,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입니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허령(虛靈) …… 충분하다 주자(朱子)가 "허령불매 네 글자로【虛靈不昧四字】 명덕의 뜻을 이미 충분히 말하였다【說明德意已足】"고 하였다. 상유(桑榆) 늙은 나이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서쪽의 해가 지는 곳으로 저녁을 가리키는데, 당초에는 일이 잘못되었으나 마침내 성공하였음의 비유로 쓰인다. 마원(馬援)이 "처음에는 비록 회계에서 날개를 드리웠지만 마침내 민지에서 날개를 떨칠 수 있었으니,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 이를 만합니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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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관 김영공 영궤에 곡하다 哭韋觀金令公靈几 오산은 우뚝우뚝 흰구름은 깊은 데 烏山矗矗白雲深천고의 높은 풍도는 어디서 찾을까 千古高風何處尋세속 벗어난 문장은 가을 물의 기운이요291) 絶俗文章秋水氣추위 능멸한 절조는 늙은 솔의 마음이네292) 凌寒節操老松心세상 길은 백 갈래라 근심 끝이 없었는데 世程百轍憂無極평생 돌봐준 정에 한을 금하지 못한다오 情眷平生恨不禁다만 원컨대 돌아가 천제를 모시는 날엔 但願歸陪天帝日우레 도끼로 모진 음기를 시원히 깨소서 快將雷斧破頑陰 烏山矗矗白雲深, 千古高風何處尋.絶俗文章秋水氣, 凌寒節操老松心.世程百轍憂無極, 情眷平生恨不禁.但願歸陪天帝日, 快將雷斧破頑陰. 가을 물의 기운이요 맑은 기운을 말한 것이다. 늙은 솔의 마음이네 변치 않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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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로 가는 길에 짓다 湖西路中作 위관293)은 이미 세상 떠났고294) 韋觀已觀化지산295) 또한 산에 묻혔구나 志山又山埋호서로 가는 천리길을 湖西千里路헛되이 갔다 헛되이 오네 虛往而虛來 韋觀己觀化, 志山又山埋.湖西千里路, 虛往而虛來. 위관(韋觀) 《후창집》 권26의 〈차위관김장【상덕】견증운(次韋觀金丈【商悳】見贈韻)〉을 참고할 때, 김상덕(金商悳)이다. 세상 떠났고 원문의 '관화(觀化)'는 죽고 사는 것을 마치 변화를 보는 것처럼 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죽고 사는 것은 주야가 바뀌는 것과 같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이 눈으로 막 보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다.[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 而化及我.]"라고 하였다. 지산(志山) 《후창집》 권3의 〈지산 김 어른【복한】께 올림[上志山金丈【福漢】]〉을 참고할 때, 김복한(金福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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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20)에서 감회가 일어 月明菴有感 이곳에 이르러 느낀 바가 무엇인가 到玆何所感옛날 스승에게 절했을 때가 생각나네 憶昔拜師時모용과 곽태21)는 은혜와 정이 깊었으나 茅郭恩情重《춘추》를 강론할 때는 말이 명백했네 春秋講話淸대들보 꺾이고 태산이 무너진22) 지 몇 해인가 樑山經幾載후파와 이한23)은 평소의 뜻을 저버렸네 芭漢負平生높은 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北望登高處화산24)에 석양이 밝구나 華岑夕日明-경자년(1900, 광무4) 가을에 내가 이 절에서 처음 선사(先師)에게 인사를 드리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강론하였는데 선사께서 매우 기뻐하였다. 또 "곽태(郭泰)가 모용(茅容)의 집에 이르러 학문을 권하여 덕을 이루게 하였다. 내가 이러한 의리를 인용하여 그대의 집을 방문할 것이다." 하였다.- 到玆何所感? 憶昔拜師時.茅、郭恩情重, 《春秋》講話淸.樑山經幾載? 芭、漢負平生.北望登高處, 華岑夕日明.【庚子秋, 余初拜先師於此寺講《春秋左氏傳》, 先師喜甚.且曰?郭泰至茅容家, 勸學成德.吾引此義往訪君家?.】 월명암(月明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에 있는 암자이다. 모용(茅容)과……깊었고 모용은 후한(後漢) 때 효자이며, 곽태는 후한(後漢) 때 명사(名士)이다. 당시 곽태(郭泰)가 모용의 집에 유숙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대들보……무너진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니, 여기서는 저자 김택술의 스승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세상을 떠났음을 말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후파(侯芭)와 이한(李漢) 후파는 양웅(揚雄)의 제자이고 이한은 한퇴지(韓退之)의 제자이자 사위인데, 여기서는 후창 김택술이 간재의 제자로서 자신을 가리킨다. 화산(華山) 스승 간재가 강학하던 계화도(繼華島)의 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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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제 송사(松沙)29) 어른의 편지를 받아보고서 근래에 상황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 월고(趙月皐)30) 어른이 봉산(凰山)에 이르러 선생의 묘에 제사를 지낸 다음 이어 우리 고향에 들를 것이라고 하였는데, 단가(丹嘉)의 여러 곳에 보낼 안부 편지 및 조장(弔狀)을 일일이 써놓고 미리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문목(問目)에 저의 대답은, "성정(性情)을 말하자면 심(心)은 그 안에 내포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응하는 마음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주자(朱子)의 편지를 보았는데, 제 말에서 크게 옳지 않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자는,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성(性)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발(已發)의 상태에서 등급에 따른 절도가 어긋나지 않은 것은, 어찌 심이 정(情)을 주재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31)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심(心)은 동정(動靜)을 꿰뚫으며 상하를 관통하는데, 말할 수 있는 방소(方所)가 없다면 곧 진실로 성정(性情)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성정(性情)을 말하면서 심(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주로 생각하는 부분이 없고 붙어 있을 지점도 없는 것이니, 반드시 공허하고 흩어져버리는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학자로 하여금 손을 쓸 곳과 발을 디딜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경립(景立)은 빨리 돌이켜 통렬히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돌아보건대 이러한 논의에 대해 우열을 가려보아도, 한두 가지의 적확한 견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외람되이 여러 벗들과 감히 논변한 것이, 매번 이러한 부류가 잘못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겠습니까? 스스로 오류에 빠졌고 다른 사람도 잘못하게 하였으니 매우 송구합니다. 昨得松沙丈書。知近節無故。月皐趙丈到凰山。致祭先生墓。因過吾鄕云。丹嘉諸處書問及弔狀。一一修裁。預爲等待如何。向日問目。鄙所答有曰。言性情則心包在其中。有何可對之心。後看朱子書。知此說有大不是處。朱子曰未發而知覺不昧者。豈非心之主乎性者乎。已發而品節不差者。豈非心之主乎情者乎云云。夫心者。貫動靜。通上下。而無方所之可言。則固不可與性情爲對。然若曰。言性情而心在其中。則是無主腦無着落。必至於空虛漫渙之歸。而使學者。無下手着脚處。願景立亟反而痛省之也。顧此愚劣。無一二的見。而猥與諸友敢爲論辨者。安知每每非此類也。自誤誤人。極爲悚然。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8.17.~1916.10.28.)을 가리킨다. 한말의 의병장으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 월고(趙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를 가리킨다.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스승은 기정진(奇正鎭)이고 저서로 《월고문집(月皋文集)》이 있다. 미발의 상태에서 …… 아니겠는가 해당 발언은, 주자가 호광중의 편지에 답한 「답호광중서(答胡廣仲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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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립에게 보냄 與朴景立 어버이의 병을 돌보는 상황이 아직 현저히 좋아지는 효과가 없는지요? 밤낮으로 모시고 지키느라 자고 먹을 겨를도 없을 것이니 그 애태우고 고생하는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속담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긴 병에도 효자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하루 이틀의 병이라면 누군들 정성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쌓여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난 이후에는 그 효도와 불효의 참된 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 수가 있고,27) 난세(亂世)에 충신(忠信)이 드러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평생 동안 책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기를 위하여 큰 사업과 큰 의리에 쓰기 위함이니 이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으면, 끝내 생전에 후회해도 소용없는 한이 될 것이니, 부디 힘쓰시기 바랍니다. 다음 달 초 열흘께 포천(抱川)의 인편이 있을 듯한데 소식을 들었는지요? 자인(子仁)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초지(草枝)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혹시 운람(雲藍)에게 나아간 것인지요? 장마가 그치지 않아 분명히 많이 지체될 터인데 걱정이 많습니다. 의림(義林)은 앞으로 봄이 오면 묵계(墨溪)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음강(陰江)28) 가에서 벗들을 만나 하루 동안 시원하게 회포를 풀 것입니다만, 경립과 함께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화암(華巖)에서의 약속이 멀지 않으니 경립은 며칠 동안 함께 바람을 쐴 계획을 함께할 수 없겠는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책을 보는 노력 또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다소의 의리(義理)를 쌓아두어 그때 질정(質正)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湯候尙無顯減之效否。晝夜扶衛。寢食無暇。其焦勞之狀。何以言喩。里言曰。長病無孝子。余謂長病有孝子。若一日二日之病。孰不致誠盡力。至於積月積年而後。其孝不孝之眞情可見。如疾風之勁草。亂世之忠信也。況平生讀書正爲此時用。大事業大義理。此外何有。一有未安。終爲生前難追之恨。勉之勉之。來月旬間。似有抱川便。聞之否。子仁諸人。自草枝尙未還。或爲前進於雲藍所耶。雨潦不止必多見滯。爲慮悶悶。義林向自當春到墨溪。回路會朋友于陰江之上。作一日暢須。恨景立不與也。華巖之約不遠。景立未可共爲數日溯風計耶。然則前此看書之功。亦不可少緩。須蓄積多少義理。爲其時就正之資也。 맹렬히 불어오는 …… 알 수가 있고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는 표현이 있다. 《舊唐書 卷63 蕭瑀列傳》 음강(陰江):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앞을 흐르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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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유고》 서문 松庵遺稿序 이 몸을 소유한 사람 중에 선조께서 남겨준 기(氣)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기가 이어지고 이어지며 태어나고 태어났기에 지극히 친근하고 절실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더욱 오래될수록 그 음성과 안색을 상상할 만한 것이 없어지면서 어떤 모습의 사람이었는지 막연하여 알 수 없게 된다. 서책이나 그릇을 사모하는 것은 입 기운과 손때가 있어서일 뿐이고, 선산의 뽕나무와 가래나무에 깃들어 있는 것은 상로지감(霜露之感)93)일 뿐이다. 비록 진짜 모습을 모사하여 시험해 보더라도 터럭만큼도 어긋나지 않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어긋나지 않게 하였더라도 영대(靈臺 마음)의 경우는 또 형상해 낼 수 없으니, 어찌 비단 칠분(七分 초상화)에 불과할 뿐만이 아닌, 정신과 심술이 발현되고, 행의(行義)와 풍범(風範)이 남아 있는 평소의 유묵(遺墨)만 한 것이 있겠는가.오 사문(吳斯文) 정섭(長燮)이, 선대인(先大人) 송암공(松庵公)이 일찍이 소요하면서 읊었던 약간의 글을 수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슬하에서 섬길 때의 음성과 용모가 눈에 선하기에 비록 부모를 여읜 지 오래되었어도 한 가닥 모습만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일찍이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에서 손자로, 손자에서 또 손자로 이어지면 우러러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이 유고에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저를 위해 현안(玄晏 서문)을 짓는 일을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하였다.아, 똑같이 사람의 자식이지만 효성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버이를 잊었느냐 잊지 않았느냐 때문이다. 옛사람은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도 감히 부모를 잊지 못하고, 심지어 소리가 없는 곳에서도 듣고, 형체가 없는 곳에서도 보는 듯 여겼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겠는가.사문(斯文)이 이미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고, 또 대대로 자손들이 길이 효도할 바탕을 만들었으니, 어버이를 드러내는 정성과 후대에 물려줄 계책이 무관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송암공(松巖公)은 우리 향촌의 선배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친인척 간에 화목한 행실과 진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질박하고 성실한 풍모는 이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니,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이 어찌 한 집안에서만 우러러 사모하는 바탕이 될 뿐이겠는가. 마땅히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人有此身。孰非祖先之遺氣。接續生生。至爲親切。然世代彌久。其聲音顔色。無處可想。而邈然不知爲何狀人。書冊杯圈。所慕者口手之澤而已。邱隴桑梓。所寓者霜露之感而已。雖摸眞而省試之。不可使毫髮不爽。設有不爽。至於靈臺。則又莫狀焉。曷若平日遺墨。精神心術之所發。行義風範之所存者。匪但爲七分哉。吳斯文長燮。蒐輯其先大人松庵公所嘗吟詠往復若干文字。編爲一卷。持以示余曰。逮事膝下。音容在目。雖孤露之久。而一縷不泯。何嘗可忘。然子而孫。孫而又孫。則所可瞻想。獨不在是耶。願爲我勿辭玄晏之役也。呼呼。均爲人子。而孝有不同者。以其忘親與不忘也。古人之一出言一擧足。而不敢忘父母。以至聽於無聲。視於無形者。其不以是耶。斯文旣寓終身之慕。又爲世世子孫永言孝思之地。其於顯親之誠。貽後之謨。可謂無關矣。然松庵公吾鄕先進也。其孝友睦婣之行。忠信質慤之風。可以爲斯世之模範者。則此書之成。豈止爲一家瞻慕之資而已。當與鄕黨子弟共之。 상로지감(霜露之感)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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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에게 답함 答尹季仁 지난번에 오는 인편만 있고 가는 인편이 없어서 답장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며칠 사이 객지에서 거처하는 정황은 좋으며, 체후는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황생(黃生)에게 보낸 편지는 그대가 이미 보았는데 그 가부(可否)가 어떠합니까? 대저 황생(黃生)의 뜻은 신(神)을 이(理)라 여기고, 영(靈)을 기(氣)로 여겨서 영은 주재하지 못하고 주재하는 것은 신(神)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영(靈)은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없는데,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서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신(神)이라고 하였습니다. 횡설수설하여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닙니다만 그 대체적인 의도는 여기에 근본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영(靈)과 신(神)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합쳐지고 나서 생겨난 것입니다. 진실로 이(理)와 기(氣)를 나눠 배치하여 볼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의 사물로 영(靈)의 오묘함이 사용되는 곳이 바로 신(神)인 것입니다. 신(神)과 영(靈)이 어찌 서로 마주하거나 나란하게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심(心)이 이름을 얻어서 영(靈)이라고 하고, 신령하기 때문에 능히 주재(主宰)할 수 있습니다. 능히 주재하는 것이 바로 영(靈)이므로 주재하는 것은 바로 이(理)이니, 마른 나무나 꺼진 재【灰】와 같은 사물에는 진실로 모두 이(理)가 있으나, 주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영(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령(虛靈)하여 주재(主宰)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허령(虛靈) 안에는 절로 오묘한 작용의 법칙이 주재할 수 있으니 영(靈)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이(理)는 작용하는 별도의 일이 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 갖추어지고 응하므로 이것은 허령(虛靈)이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생(黃生)은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견해가 혹 왼편으로 치우쳐서 그러한 것이 아닌지요? 매번 한 번 계인(季仁)과 서로 확실하게 토론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자세히 말씀해주신 내용을 받아보고 이에 대략 펴보았으니, 더욱 세심히 연구하여 알맞은 논의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주기론(主氣論)이 무척 성행하고 있으나 오직 한 두명의 선각자들이 여러 책에 훌륭한 글을 후세에 남겨 그 폐단을 구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이 세상에 남긴 공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그 설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주리(主理)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간혹 지나쳐서 도리어 잘못을 바로잡고 지나치게 직언하는 데로 귀결되는 문제가 없을 수 없으니 이 역시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向便有來無去。未得修謝矣。未審日來旅居節宣。體事佳勝。馳溯不任。向抵黃生書。賢旣視至。則其可否何如耶。大抵黃生之意。以神爲理。以靈爲氣。以爲靈不能主宰。而主宰者神也。靈不能具衆理應萬事。而具衆理應萬事者神也。橫說翌說。其端不一。而其大意。則本於此矣。愚謂靈與神。皆是理與氣合而有者也。固不可分配理氣看。然則只是一物。而靈之妙用處。便是神。神與靈。豈是待對倂立之物哉。且心之得名。以其靈也。靈故能主宰。能主宰者是靈。所主宰底是理。如枯木死灰之物。固皆有理。而謂之主宰則不可。以其不靈故也。若曰虛靈不能主宰。而虛靈之中。自有主宰妙用之則。靈爲無用之長物。理爲作用之別事。朱子曰。虛靈不昧。以具衆理應萬事。具之應之。是非虛靈之爲主宰者耶云云。然黃生竟不見從。未知愚見或左而然耶。每欲一與季仁相確而未果矣。今承詳示之喩玆以略布。幸加細究。以示稱停之論也。近世主氣之論盛行。而惟一二先覺。立言著書。以救其敝。此其有功於斯世者大矣。然後之人聞其說。而不得其意。名爲主理。而又或過之。反不無矯枉過直之歸。此亦不可以不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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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인에게 답함 答尹季仁 편지에 답장이 늦어진 채 지금 벌써 몇 달이 지났습니다. 궁벽한 곳에 우거하느라 세상의 습속에 빠졌으므로 그 퇴락한 모습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겠습니다. 혹독한 더위가 위세를 거두고 시원함이 잠깐 생겨나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부친의 기력은 강녕하시며, 시봉하는 정황은 기쁘고 즐거우며, 체후는 더욱 다복하신지요? 가르치고 배우던 시절에 소견이 얕지 않으니 매번 성대히 축원하였습니다. 의림(義林)은 긴 여름 동안 숨 가쁜 더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은 가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나 또 학귀(瘧鬼)가 번뇌롭게 하여 원기를 다 빼앗긴 채 골골하며 죽을 지경일 따름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여러 조목의 문목(問目)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날 마주하고 공부할 적에 이미 논파(論破)했던 것들이 아닌지요? 이에 사의(謝儀)를 써서 감히 함께 언급합니다. 예(禮)에서는 증조부(曾祖父)는 현고부(顯考父)로, 고조부(高祖父)는 황고부(皇考父)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주(註)에서는, "현고(顯考)에게는 사당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氣)가 지(志)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사람이 지나치게 취하면 뜻이 어지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志)가 기(氣)를 움직이면 사람이 장중하고 공경함이 날로 강해지는 것과 같으니 덕(德)을 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이것입니다. 부리지포(夫里之布)87)는 곧 한 사람의 지아비와 1리(里)에 부과되는 세금이니, 만약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벌하여 이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전국(戰國) 시대에 이미 이를 벌하였습니다. 또한 시장이나 주택이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가을볕을 여름볕처럼 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정삭(正朔)을 고치되 월수(月數)를 고치지는 않았으니, 하물며 여름을 가을로 고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맹자(孟子)》에, "이 기(氣).……"88)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몰라 감히 억측하여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맹자(孟子)가 경추씨(景丑氏)에게 가서 묵은 것은 장차 현인을 감히 부를 수 없는 뜻을 말하여 제(齊)나라 왕이 그것을 듣게 하려고 한 것이었지, 맹중자(孟仲子)의 둘러대는 말을 따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닙니다.89) 一紙稽復。今幾月矣。居寓僻左。墮在世臼。其頹落之狀。卽此可驗。酷炎收威。新凉乍生。未審尊庭氣力康寧。侍旁怡愉。節宣增祉。斅學時節。見到不淺。每用翹祝。義林長夏喘暑。喫盡苦況。今則秋涼入戶。而又爲瘧鬼所惱。元氣見奪。㱡㱡欲盡耳。奈何。問目諸條。未知向日面穩時。業已論破耶。玆修謝儀。敢此倂及。禮以曾祖爲顯考。以高祖爲皇考。故中庸註曰。顯考無廟。氣動志。如人過醉亂志。玩物喪志是也。志動氣。如人莊敬日疆。作德心逸是也。夫里之布。是一夫一里之布。若有無業之人。則罰之使出此布也。戰國時。旣有此所罰。又一切施之於市宅之民。秋陽之爲夏陽。似甚不然。古者。改正朔而不改月數。況可改夏爲秋乎。在孟子是氣云云。愚所未瑩。不敢臆說。宿景丑氏。將以語不敢召之義。使齊王聞之也。非爲欲遂仲子之權辭也。 부리지포(夫里之布)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부포(夫布)와 뽕나무나 삼(麻)을 심지 않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이포(里布)를 가리킨다. 이 기(氣)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 上)」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을 가리킨다. 맹자가 …… 것이 아닙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 2장인 장조왕장(將朝王章)의 내용으로, 임금이라도 현인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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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북계회 2수 山北契會【二首】 풍진 세상에 옛 사림은 영락했는데 風塵零落舊詞林적막한 물가를 무슨 일로 찾았는가 寂寞之濱底事尋봄옷 떨친 기우92)는 천 길의 기상이요 春服沂雩千仞像옛 거문고 속 산수93)는 평생의 마음이네 古琴山水百年心어떻게 꽃 아래서 흠뻑 취하지 않겠는가 那能花下無沈醉상쾌하게 산봉우리에서 한바탕 읊조리네 聊快峯頭一朗吟산북의 맑은 별장은 참으로 속세 밖이니 山北淸庄眞物外이문이 어느 곳에서 감히 다다르겠는가94) 移文何處敢來臨문을 나서자 마음이 맑고 편해 즐거우니 出門却喜意淸平날개가 돋아나 백옥경95)에 오른 것 같네 羽化如登白玉京일천 숲에서 웃는 꽃은 모두 고운 모습이요 花笑千林皆好面일만 나무에서 우는 새는 환영하는 듯하네 鳥呼萬樹若歡迎시가 절묘한 경치 만난 건 신이 도운 듯하고 詩當妙境神如助술로 쇠약한 몸 보호하니 힘이 약하지 않네 酒護衰身力不輕우연히 만난 동인96)은 인연이 더욱 소중하니 邂逅同人緣復重봉래산97) 찾아가는 해산 길은 쓸 데가 없네 鰲蓬不費海山程 風塵零落舊詞林, 寂寞之濱底事尋?春服沂雩千仞像, 古琴山水百年心.那能花下無沈醉? 聊快峯頭一朗吟.山北淸庄眞物外, 移文何處敢來臨?出門却喜意淸平, 羽化如登白玉京.花笑千林皆好面, 鳥呼萬樹若歡迎.詩當妙境神如助, 酒護衰身力不輕.邂逅同人緣復重, 鰲蓬不費海山程. 기우(沂雩)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다는 말로, 산수간에 노는 즐거움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해 보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하였다. 《論語 先進》 산수(山水)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탔다고 하는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으로, 〈아양곡(峨洋曲)〉이라고도 한다.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험준하기가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兮若泰山.]" 하였으며,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광대히 흐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兮若江河.]" 하였는데, 이를 지음(知音)이라 하여 친구 간에 서로 상대의 포부나 경륜을 알아줌을 비유하게 되었다. 《列子 湯問》 이문(移文)이……다다르겠는가 은거를 그만두고 세상에 나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공치규(孔稚珪)가 북산(北山)에서 함께 은둔하던 주옹(周顒)이 벼슬길에 나서자 산신령을 가탁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그를 꾸짖었던 고사가 있다. 백옥경(白玉京) 천제(天帝) 혹은 신선이 상주(常住)하는 천상의 낙원으로, 옥루(玉樓)라고도 한다. 동인(同人) 서로 마음이 맞는 벗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동인괘(同人卦)〉를 풀이한 말에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끊고,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봉래산(蓬萊山) 원문의 '오봉(鰲蓬)'으로, 여섯 마리의 큰 자라가 떠받치고 있다고 하는 세 개의 선산(仙山) 가운데 하나이다. 《列子 湯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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