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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암 처사 조공 유사장 希庵處士趙公遺事狀 공의 휘는 두열(斗烈), 자는 의지(義之), 호는 희암(希庵)이니, 조씨는 계통이 함안(咸安)에서 나왔다. 중엽에 휘 승숙(承肅)105)은 세상에서 덕곡 선생(德谷先生)이라고 불렀고, 고려가 망하자 망복(罔僕)106)하였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종례(從禮)는 호가 율정(栗亭)이고 벼슬은 직제학(眞提學)이며, 휘 림(琳)은 호가 신재(愼齋)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참봉(參奉) 휘 희광(希匡)이 동복(同福)에 거주하였고, 4대를 전해 내려와 감정(監正) 휘 옥생(玉生)이 능주(綾州)에 거주하여 자손들이 이로 인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증조 중국(重國)은 통정(通政)을 지냈고, 조부는 달운(達運)이며, 부친은 시복(時福)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이 있었고,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광수(金光洙)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정유년(1777)에 능주 오산리(鰲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녔고 학문의 과정은 가정의 가르침을 따랐다. 점차 성장하면서 고을의 사우(士友) 가운데 어진 자를 좇아 종유하여 강구하고 연마하여 스스로 넓혀나갔다. 효우의 행실이 가정에 드러났고 돈독한 친목의 풍조가 종족에게 알려졌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재난과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으니, 자상하고 측달(惻怛)함이 두텁지 않음이 없었다. 집 한 채를 지어 '망미(望美)'라고 편액하여 걸고, 오직 은은하게 날로 닦되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생도들을 가르칠 때에 과조(科條)가 찬연했다. 때로 좋은 손님 및 벗과 함께 시냇가와 산, 바람과 달 사이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놀며 마음을 시원하게 펴면서 유연(悠然)히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있었다. 중년에는 한가한 날에 병학(兵學)을 섭렵하여 대략 대치(大致)를 알았지만 또한 시험해보지 못했다. 철종 병진년(1856) 7월 28일에 고종명하여 산음(山陰) 후록(後麓)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인(曺光仁)의 따님으로 5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용희(鏞熙)·용기(鏞起)·용직(鏞直)·용순(鏞珣)·용후(鏞厚)이고, 사위는 광산(光山) 이장휘(李章徽)와 공주(公州) 이문현(李文現)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선(善)을 쌓은 집에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107)"라고 하였으니, 자손의 남은 복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공의 장손 조익제(趙翼濟)는 훌륭한 선비이고, 그의 사촌 형제와 여러 자질(子侄)도 모두 근칙(謹勅)한 사람들이니, 이는 공이 선을 쌓은 데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조씨의 가문에 반드시 번창하고 성대할 날이 있을 것이다. 公諱斗烈。字義之。號希庵。趙氏系出咸安。中葉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麗亡罔僕。我朝有諱從禮。號栗亭官直提學。諱琳。號愼齋大司成。皆顯祖也。諱希匡參奉。寓居同福。四傳至諱玉生。監正。寓綾州。子孫因居之。曾祖重國通政。祖達運。考時福。世有文行。妣光山金氏光洙女。正廟丁酉。公生于州之鰲山里。幼而就塾。學問課程。遵循庭訓。稍長。從鄕裏士友之賢者。遊從講曆。以自展拓。孝友之行。著於家庭。敦睦之風。聞於宗族。賙窮賑匱。赦災恤患。慈詳惻怛。無不款洽。築一室。揭顏以望美。惟以闇然日修。不求人知爲究竟計。訓迪生徒。科條燦然。時與佳賓良朋。觴詠遊暢於溪山風月之間。悠然有出塵之標。中年以餘日。涉獵兵學。略曉大致。而亦未有所試。哲宗丙辰七月二十八日終。葬山陰後麓酉坐原。夫人昌寧曺氏光仁女。生五男二女。鏞熙鏞起鏞直鏞珣鏞厚。光山李章徽公州李文現。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餘祿。而其人可知。公之長孫翼濟善士也。其群從諸子侄。皆謹勅人也。此非公積累之報耶。余謂趙氏之門。必有昌大之日。 조승숙(趙承肅) 1357~1417.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덕곡집(德谷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書經 微子》 선(善)을……있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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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조공 유사장 溪庵曺公遺事狀 공의 성은 조(曺), 휘는 학신(學臣), 자는 내권(乃權), 호는 계암(溪庵)이다. 휘 계룡(繼龍)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108)와 혼인하여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창녕(昌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뛰어난 공훈과 현달한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 조정 초에 이르러 휘 서(庶)는 시호가 청간(淸澗)이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상국(上國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가 특별히 총애하여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하였다.109)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국병(國柄)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능성(綾城)에 살았고, 자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고조 휘 봉인(鳳人)은 호가 동파(桐坡)이고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증조의 휘는 동근(東覲)이고, 조부의 휘는 현묵(賢默)이며, 부친의 휘는 명화(命貨)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한봉(張漢鳳)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순수하게 갖춰졌으니, 순조 12월 20일에 청계리(淸溪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후(淳厚)하고 활달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곁에서 어버이를 모시면서 응대하고 대답하며 잘 받들어 따르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였으며, 맛있는 것을 구하면 입에 넣지 않고 반드시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드렸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을 때 번거롭게 지휘 감독하지 않았는데도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약관에 널리 제가(諸家)를 섭렵하여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 나고 아름다웠으며,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여 죽을 먹고 물을 마셨으며, 삭망(朔望)마다 성묘하여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형제 3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니, 산을 매입하여 과일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고기를 길러서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 이로써 봉양을 올렸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로써 제수를 올렸다. 늘그막에 청계(淸溪) 가의 한 구역에 정사(精舍)를 지어 그 편액에 '벽류(碧流)'라고 쓰고, 사촌 형제들과 밤낮으로 서로 마주 대하면서 즐겁게 지내는 정을 다하였다. 또 집안 자제와 마을의 수재를 모아 학업을 익히게 하자, 사방의 친구들이 그 일을 노래하여 화답하였다. 평소에 삼가고 경계함으로 몸가짐을 하였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공손함과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였다. 자손을 가르칠 때 덕이 있는 자를 친근하게 하여 절차(切磋)의 유익함이 있게 하고자 하였다. 일찍이 자식을 가르치는 시를 짓고 말하기를, "이미 옛것을 익히고 또 새것을 알아야 하니[旣溫其故又知新], 성인 되고 우자 되는 건 본디 자신에게 달려 있다네.[爲聖爲愚自在身] 그 가운데 진실하고 분명한 곳을 알고자 한다면[欲識箇中眞的處], 내가 어른을 어른으로 존경하는 것과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明吾長長與親親]"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마음속에 보존된 것을 알 수 있다. 계사년(1893) 4월 12일에 졸하여 천운산(天雲山) 아래 부임(負壬)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윤성연(尹聲淵)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모두 지극하였고 4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승(仁承)·의승(義承)·예승(禮承)·지승(智承)이고, 딸은 광산(光山) 이동호(李東鎬)·하동(河東) 정장현(鄭章鉉)·양성(陽城) 이봉기(李鳳基)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누적한 행실과 풍부한 재능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에 시험되지 못하여 빛을 숨기고 아름다움을 속에 품은 채 멀리 황량하고 누추하며 적막한 물가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공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손상될 것이 없지만 이 세상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동향(同鄕)에 있으면서 미적거리고 일이 많아 미처 찾아뵙지 못했는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였다. 노년에 비로소 공의 유장(遺狀)을 구해 읽었는데, 간절하게 추앙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생(李生) 승복(承福)은 바로 공의 외손으로 나와 종유(從遊)했는데, 공의 큰아들이 낳은 손자 병규(秉圭)의 명으로 나에게 행실을 기록하는 글을 요청하였다. 公妣曺。諱學臣。字乃權。號溪庵。有諱繼龍。尙眞平王公主。封昌城君。因以昌寧爲貫。卽其始祖也。自羅至麗。名勳達爵。奕世不絶。至我朝初。有諱庶。號淸澗官直提學。奉使上國。高皇帝寵異之。賜桃核盃。六傳而諱國柄。濟用監正。退寓于綾城。子孫世居焉。高祖諱鳳人。號桐坡中司馬。文行著聞。有遺集。曾祖諱東覲。祖諱賢默考諱命貨。妣興德張氏漢鳳女。閨範純備。以純廟十二月二十日。生公于淸溪里。姿稟淳厚開爽。自幼不好戱美。不好爭競。日侍親側。應封唯諾。承順如流。得一味不入口。必袖而供之。就傳受業。不煩提督而文理日就。弱冠博涉諸家。詞藻斐蔚。執喪哀毁。啜粥飮水。朔望省掃。風雨不廢。兄弟三人。友愛純篤。買山種果。鑿池蓄魚。親在以供其養。親沒以供其奠。晩年築一區精舍於淸溪之上。題其顏曰碧流。與群從昆季。日夕相對。以盡湛樂之情。又聚門子弟村秀才。使肄業。四方知舊歌其事而和之。平居持身謹勅。御家勤儉。接人恭恕。敎子孫。欲其親近有德。俾有切磋之益。嘗有訓子詩曰。旣溫其故又知新。爲聖爲愚自在身。欲識箇中眞的處。明吾長長與親親。此可以見其所存矣。癸巳四月十二日卒。葬天雲山下負壬原。配咸安尹氏聲淵女。婦德備至。生四男三女。男仁承義承禮承智承。女適光山李東鎬河東鄭章鉉陽城李鳳基。孫以下不錄。嗚呼。有積累之行。贍富之才。而不見知於人。不見試於世。潛光含章。遐擧遠引於荒陋寂寞之濱。在公固無加損。而在斯世爲何如也。余在同鄕。因循多故。未及拜床。而奄隔千古。衰暮之日。始得其遺狀而讀之。區區追仰之情。尤切罔喩。李生承福。卽公之外孫。而從余遊。以其長房孫秉圭命。謁誌行之文。 진평왕(眞平王)의 공주(公主)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된 덕만 공주(德曼公主)를 말한다. 사명(使命)을……하사하였다 1398년(태조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를 만나 공물(供物)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주었고,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高麗列朝登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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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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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재 정공 유사장 求心齋鄭公遺事狀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유(先儒)이니, 김점필재(金佔畢齋)의 문인으로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훌륭하게 세상에 유명해져 자손들이 계승할 만한 바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손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때때로 유학(儒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근고(近古)의 호는 구심재(求心齋), 자(字)는 성언(成彦)인 처사(處士) 휘 양훈(陽勳)도 그중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모습이 있어서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곁에서 어른을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서 그 뜻을 듣고 인하여 말하기를, "만일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가한 틈을 타서 이웃 마을 경암(敬庵) 정공(鄭公)의 문하로 나아가 배웠으니, 경암은 바로 그의 친족 장로(長老)이다. 정공(鄭公)은 평소에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는 데에 법이 있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어긴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서부터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순조롭게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문리(文理)와 시문(詩文)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고, 의리의 근원에 침잠하여 핵심적인 깊은 뜻에서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았으니, 이는 마치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마음에 보존되어 몸에 체득한 것과 남에게 시행하여 일에 조처한 것이 찬연히 조리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 과거 공부를 하여 시문(時文)110)의 각 체가 풍부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종적을 감추고 전원에 빛을 숨겼으며, 삼경(三逕)111)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러니 그 뛰어난 운치와 지취, 고아한 풍격과 뛰어난 자취를 또 어찌 보잘것없이 부침하는 것으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막힌 데에서 형통한 곳으로 변하여 가고112)[否之亨], 곤란한 데에서 통하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113)[困之通] 애초에 사군자(士君子)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아님이 없다. 공은 하동(河東)의 저족(著族)이다. 고조 휘 흘(忔)은 호가 송암(松庵)으로 정동계(鄭桐溪)114)의 문인인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이가 돈재 선생의 4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문참(文參)이고, 조부의 휘는 세채(世采)이며, 부친의 휘는 집(鏶)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조상민(趙尙敏)의 따님이니, 영조 정사년(1737) 6월 7일과 순조 기사년(1809) 8월 6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고, 묘는 신산(莘山) 응막동(鷹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상(興相)과 필상(必相)이고, 딸은 제주(濟州) 양은호(粱殷浩)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족손 정재우(鄭在禹)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어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유풍(遺風)과 여열(餘㤠)은 고을 인사들이 전송(傳誦)한 말뿐입니다. 연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전송(傳誦)이 점점 미약해지면 백세(百世) 뒤에 누가 다시 공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은혜로운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추앙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遯濟鄭先生。吾鄕先儒也。以金佔畢齋門人。文學行義。偉然名世。而爲子孫可繼之地。是以詵詵來許。紹休趾美。往往以儒學著聞。近古求心齋處士諱陽勳。字成彦。亦其人也。自幼凝然有成人儀樣。不好戱嬉。不事遊走。日侍長者側。應對惟謹。一日見入授讀。從傍聽其義。因曰。若不讀書。何以知此等義理乎。遂挾閒就學于隣閈敬庵鄭公之門。敬庵卽其宗黨長老也。平日持守有方。敎授有法。公一遵其敎。未有違越。年弱冠。自四書五經至諸史百家。無不輪流淹貫。文理詞華。斐然成章。沈潛乎義理之源。紬縪乎肯綮之蘊。如冰解而凍釋。是以其存於心而體於身。施於人而措諸事者。燦然有條。儼然有則。每以餘日。游於功令之業。時文各體。無不贍麗。而不以得失關心。斂迹窮荒。潛光畎畝三逕花竹。四壁圖書。婆娑徜徉。聊以自遣。其偉韻逸趣。高風遐躅。又豈可以區區陞沈而差殊觀哉。否之亨。困之適。未始非士君子安身立命處也。公河東著族。高祖諱忔。號松庵。鄭桐溪門人。丙子擧義。贈判尹。是遯齋先生四世孫也。曾祖諱文參。祖諱世采。考諱鏶參奉。妣咸安趙氏尙敏女。英宗丁巳六月七日。純祖己巳八月十六日。卽其懸弧與屬纊也。墓莘山鷹幕洞亥坐原。齊淸道金氏。擧二男一女。男興相必相。女適濟州粱殷浩。孫以下不錄。族孫在禹。持家狀過余曰。著述不爲少矣。而屢失回祿。隻字不遺。其遺風餘㤠所可想象者。鄕人士傳誦之語而已。年代愈遠。而傳誦浸微。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乎。願勿悋一言之惠也。聞之不勝追仰之私。有不敢多辭云。 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막힌……가고 비(否)는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하고 막히는 때이니, 이러한 때에는 절개를 굳게 지키면 길하여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전(象傳)〉에 "천지가 사귀지 않음이 비이니,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해서 녹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天地不交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라고 하였다. 곤란한……것은 곤(困)은 곤란하고 험난한 때이니,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의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험하지만 기뻐하여 곤란하여도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일 것이다.〔險以說, 困而不失其所亨, 其唯君子乎.〕"라고 하였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동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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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 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방(榮邦),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류(松柳)이니 계통은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휘 칭도(稱道)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 봉어(尙衣奉御)였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휘 영모(令謨)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휘 지(漬)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으로 시호는 문인(文仁)이며, 휘 근(瑾)은 여산 부원군(驪山府院君)이니, 모두 여사(麗史)에 드러나 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중립(中立)은 판전교령(判典校令)을 지냈고, 휘 소생(紹生)은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지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으로, 세조조(世祖朝)에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고115), 풀려나 마침내 능주(綾州) 월곡(月谷)에 살았으니 이분이 11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해익(海翼), 증조의 휘는 수귀(壽龜), 조부 휘 정수(挺洙)는 교관(敎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상록(相祿)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언규(李彦珪)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계비(系妣) 숙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광흡(李光熻)의 따님이니, 영조 을미년(1775)에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고 조숙하여 엄연히 성인의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점차 자라면서 개연히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도가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소학(小學)》으로 전지(田地)를 정하고, 《대학》으로 규모를 세우며, 《논어》와 《맹자》로 조리(操履 몸가짐과 마음가짐)를 밝혔다. 그래서 매우 부지런하게 여러 번 독송하고 깊이 사색에 잠겨 이를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하였으니,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처럼 편안히 자득하였다. 자리 곁에 구용(九容)116)과 구사(九思)117)를 써놓고 출입하고 기거할 때에 늘 거울삼아 살폈다.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때 분명하게 과정(課程)을 두고 차근차근 질서 있게 매진하여 성취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인정(仁情)과 예문(禮文)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늘그막에 집 한 채를 지어 편액에 '송류정(松柳亭)'이라 쓰고,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날마다 서적을 스스로 즐겼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에 관해서는 담박하였다. 문규(門規)를 정하여 친척 간의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익혔고, 향약(鄕約)을 세워 예속(禮俗)의 사귐을 밝히자 내외의 사람들은 원망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였으니, 몸이 집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친 이익과 혜택이 많았다. 경자년(1840)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선하동(仙荷洞)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고암촌(鼓巖村) 앞 반룡산(盤龍山) 북쪽 기슭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계사년(1893)에 손자 민덕호(閔德鎬)의 귀함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희대(文喜大)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매우 갖춰졌고 묘는 합장했으며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치형(致衡),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치승(致昇), 호조 참판에 추증된 치화(致華)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시창(金時昌)과 달성(達城) 배원태(裵元台)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욱(泳郁)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했을 때,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진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지만, 단지 민영욱과는 조부, 아들, 손자 3대의 가깝고 두터운 정분이 있었기에 차마 결국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榮邦。字季彬。號松柳。系出驪興。諱稱道。仕麗朝官尙衣奉御。是爲鼻祖。諱令謨平章事文景。諱漬都僉議政承文仁。諱瑾驪山府院君。竝著麗史。我朝有諱中立判典校令。諱紹生三陟都護府使。諱懷參號義庵。世祖朝謫守大靜。解放。遂寓于綾州之月谷。是其十一世祖也。高祖諱海翼。曾祖諱壽龜。祖諱挺洙贈敎官。考諱相祿贈司僕寺正。妣淑人慶州李氏彦珪女。有女士行。系妣淑人光山李氏光熻女。英宗乙未。生公于松石坊五柳村。生有異質。穎悟夙就。嚴然有成人儀度。稍長。慨然有志於古人爲己之學。嘗自警曰.非學無以知道。非道無以爲人。以小學定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明操履。誦數甚勤。思索甚苦。存之於心。體之於身。氷解凍釋。怡然自得。書九容九思於座側。出入起居。常常鏡考。敎誨生徒。的有課程。循循征邁。多所成就。性孝。生事葬祭。一遵禮制。情文兩至。晩築一室。題其顔曰松柳亭。寄敖徜徉。日以書籍自娛。至於聲利芬華泊如也。定門規以講敦睦之誼。立鄕約以明禮俗之交。內外無怨。遠近胥悅。身不出家。而利澤之及人者多矣。庚子五月十八日考終。葬仙荷洞。後移窆于鼓巖村前盤龍山北麓丁坐原。癸巳以孫德鎬之貴。贈承政院左承旨。配淑夫人南平文氏喜大女。壹儀甚備。墓祔。三男二女。男致衡。致昇出爲季父后。致華贈戶曹參判。女適光山金時昌達城裴元台。孫曾以下不盡錄。曾孫泳郁奉家狀來。有不朽之託。余以非其人。固不敢承當。而但於泳郁。有祖子孫三世契分之厚。不忍終辭云爾。 세조조(世祖朝)에……좌천되었고 1456년(세조2)에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盷)에게 송현수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는데, 민회삼이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 《梅山集 卷40 義菴閔公墓誌銘》 구용(九容)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진중하게[足容重], 손은 공손하게[手容恭], 눈은 바르게[目容端], 입은 무겁게[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하게[聲容靜], 머리는 곧게[頭容直], 숨소리는 엄숙하게[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이 있게[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하는 것이다. 《禮記 玉藻》 구사(九思)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마음가짐으로,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고[色思溫], 모습은 공손함을 생각하고[貌思恭], 말할 때는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言思忠], 일할 때는 경건함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疑思問], 화를 낼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재물을 얻을 때는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것이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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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증에게 답함 答洪士拯 편지에 답하지 못한지 또한 며칠이 지났으니, 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버이 곁에서 모시는 상황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정(貞)이라는 시호(諡號)는, "남은 힘이 있으면 학문을 연구하고 분비(憤悱)한다."102)는 뜻입니다. 의심스럽고 답답한 말이 끊임없이 편지에 가득하니 아끼고 우러러 보는 마음은 더욱 보통의 편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말하기는 쉽지만 그 실상을 보기는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비유입니다. 대저 한 가지 일을 함양하는 것이 공부의 본령(本領)이니 반드시 착실하게 체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것이 쌓이고 힘을 오래 쏟은 후에야 볼 수 있으니 어찌 안배하고 배치하는 것을 하여 생각하고 바랄 수 있겠습니까? 마치 천여 장(丈)의 혼탁한 물이 어찌 그 중간에 한 한기만 홀로 맑을 이치가 있겠으며, 사면이 암흑같이 어두운 상황에서 어찌 중간에 한점만 밝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혹 그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이포새(伊蒲塞)103)가 눈을 부릅뜨며 만들어내는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고 하니, 반드시 그 의리를 궁구하여 연구하여 항상 마음속에 침잠하여 스며드는 것이 있으면 또한 날마다 실천하는 사이에 성실함을 기르고 참된 것이 쌓여서 선한 힘이 점차 채워지고 자라날 것입니다. 이른바 미발(未發)의 경지로 쉽게 힘이 되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에 구구하여 아직 나아가지 못한 경지이니, 이번의 나의 벗이 질문한 것에 대해 가만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괴로움을 안고 일찍이 겪어온 모습이 이와 같으니 부디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承書未復。又幾日矣。每庸耿耿。未審侍傍節宣貞謚。餘力鑽硏。而憤悱之意。疑鬱之辭。娓娓盈幅。愛仰之私。尤非尋常書尺之比。所謂言之甚易。見之實難者。眞善喩也。大抵涵養一事。是功夫本領。必着實體認。眞積力久而後。可以見之。豈希望懸想安排布置之爲哉。如千丈渾濁之水。豈有中間一條獨淸之理。四面黑窣之地。豈有中間一點獨明之理。設或有之。亦不過伊蒲塞撑眉努眼之術也。其德其不孤矣乎。必須窮硏義理。常常浸灌胸次。又於日用踐履之際。養誠積眞。使善力漸次充長。則所謂未發之地者。易以爲力。而明淨純固矣。此是愚者平日區區未就之地。而今於吾友之問。竊有同病之憐。故玆布其辛苦嘗試之狀如此。惟諒會。 분비(憤悱)한다 몰라서 분하게 여기고 표현을 못해서 답답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학자가 몰라서 분하게 여기지 않으면 나는 알려 주지 않고, 표현을 못하여 답답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틔워 주지를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이포새(伊蒲塞) 범어(梵語) '우바새(優婆塞 ; Upāsaka)'의 이역(異譯)으로, 속세에 있으면서 오계(五戒)를 받은 남자 불교도를 뜻하며, 불교를 믿는 남자의 총칭으로도 쓰인다. 여기에서는 사술을 부리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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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암 형을 찾아가다 3수 訪省菴白兄【三首】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매양 한탄하나니 光陰每恨水流如만났다 헤어진 지 어느덧 여러 해 지났네 逢別於焉閱歲餘오직 책상머리에서 서책을 가까이했을 뿐 惟有案頭親簡冊언제 문 밖에서 신발과 수레 손질했던가 何曾門外理鞋車곤궁해도 서로 면려하여 절조가 견고했고 窮居胥勖節强固늙어갈수록 더욱 정이 도타워짐을 알겠네 老去愈知情不疎새로운 시 차지하고도 미처 쓰지 못했으니 占得新詩題未及나중에 편지에 써서 보내도 무방하리라 無妨他日羽鱗書머리털이 온통 하얘진 것은 탄식하지 않고 不歎鬢髮白紛如공부 과정이 여유롭지 못함을 한할 뿐이네 只恨工程未裕餘빈곤한데 어찌 소리232)에 편안함을 잊으랴 貧困豈忘安素履실패해도 앞 수레의 경계를 범하기가 쉽네 敗顚易犯戒前車이치를 연구함에 실낱처럼 정밀해야 하니 要須硏理絲毫密어찌 마음 다스림에 준칙을 엉성하게 하랴 怎使治心準尺疎번거롭게 그대가 자주 채찍질 해주었기에 煩子頻加鞭策力나는 나이고 글은 글임을 모면하게 되었네 免敎我我復書書누가 다시 성암 옹의 강건함과 같을까 省翁康健復誰如몸이 윤택하니 덕이 넉넉한 줄 알겠네 身潤方知德有餘경계 절실한 절간처럼 호화롭지 않았고233) 戒切桑門不衣馬흥이 높은 율리에서는 건거234)를 탔네 興高栗里命巾車윤리는 일찌감치 집안에서 돈독했고 理倫早向家中篤세태는 일찍 책을 통해서 멀리했네 世態曾從卷裏疎다시금 만년에 더욱 수립하여 更願晩齡彌樹立유림전에 특별히 더 써넣길 바라네 儒林傳上特加書 光陰每恨水流如, 逢別於焉閱歲餘.惟有案頭親簡冊, 何曾門外理鞋車?窮居胥勖節强固, 老去愈知情不疎.占得新詩題未及, 無妨他日羽鱗書.不歎鬢髮白紛如, 只恨工程未裕餘.貧困豈忘安素履? 敗顚易犯戒前車.要須硏理絲毫密, 怎使治心準尺疎?煩子頻加鞭策力, 免敎我我復書書.省翁康健復誰如? 身潤方知德有餘.戒切桑門不衣馬, 興高栗里命巾車.理倫早向家中篤, 世態曾從卷裏疎.更願晩齡彌樹立, 儒林傳上特加書. 소리(素履) 꾸밈이 없는 짚신이라는 뜻으로, 본분을 지키며 질박하고 청백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꾸미지 않은 짚신을 신고 가니, 허물이 없으리라.〔素履往, 無咎.〕"라고 하였다. 경계……않았고 성암(省菴) 백남두(白南斗)의 생활이 검소하였다는 말이다. 원문의 '의마(衣馬)'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찐 말을 타는 것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서적(公西赤)이 제나라에 갈 적에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라고 하였다. 건거(巾車) 휘장을 친 작은 수레로,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혹은 건거를 준비하라 명하고, 혹은 외로운 배를 노질한다.〔或命巾車, 或棹孤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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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곡재 족선조(族先祖) 충경공(忠景公)222)의 묘재(墓齋)이다. 風谷齋【族先祖忠景公墓齋】 남원 동쪽에 가성223)이 울울한데 佳城鬱鬱帶方東중건한 병사224)가 반공에 솟았네 丙舍重新聳半空충경공은 고금에 이름 영원하고 忠景古今名不朽요천 지척에는 승경이 그지없네 蓼川咫尺勝無窮제물에는 각자가 성심을 다하지만 苾芬各自誠心盡화수225) 아래의 우리는 근본이 같네 花樹吾曾根本同풍곡이란 편액을 지명 따라 붙였으니 風谷嘉扁因地錫후선들의 흥기도 이 속에 달려 있네 後承興起在斯中 佳城鬱鬱帶方東, 丙舍重新聳半空.忠景古今名不朽, 蓼川咫尺勝無窮.苾芬各自誠心盡, 花樹吾曾根本同.風谷嘉扁因地錫, 後承興起在斯中. 충경공(忠景公) 김익복(金益福, 1551~1599)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계응(季膺), 호는 금릉(金陵)이다. 노진(盧禛)의 문인으로,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ㆍ능성 현령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가성(佳城)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 "가성이 울울하니, 3천 년 만에 해를 보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머물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등공이 유언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이곳에 장사지내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西京雜記 卷4》 병사(丙舍) 산소 곁에 지어 놓은 재실(齋室)을 이른다. 화수(花樹)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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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기 澗齋記 죽수(竹樹) 남쪽 한 고을에 연화봉(蓮華峯)이 있고, 연화봉 아래로 청량한 시냇물 한 줄기가 넘실넘실 굽이져 흐르는데, 그 깊이가 옷자락을 걷어 올려야 건널 수 있는 정도였다. 시냇가에 울타리가 쭉 늘어서 있는 마을을 간리(澗里)라 하고, 마을 곁에 맑고 깨끗한 한 가옥을 간재(澗齋)라 하는데, 나의 벗 이 사문(李斯文) 광빈보(光彬甫)가 그 주인이다.하루는 그 집을 찾아갔다가 인하여 무슨 뜻으로 집을 '간(澗)'이라 한 것이지 물으니, 사문이 웃으며 말하기를, "시냇가에 있는 마을을 간리라 하는데, 간리에 있는 집만 유독 간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네. 무릇 이름을 유독 다르게 짓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네. 지금 시냇물이 천태산(天台山)에서 수십 리를 길게 뻗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고, 이 시냇물을 끼고 있는 집이 수백 가옥이나 되는데, 모두 간재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사문의 은미한 뜻이 있을 것이네.아, 세상에 나가고 은둔하는 것과 도를 행하고 감추는 것은 사군자가 몸을 세우는 큰 절목이네. 한 가지 예절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달갑게 여기지 않고, 한 가지 일이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데, 하물며 온 천지가 혼탁하여 세상이 도와 어긋나는 때임에랴.사문은 정연(挺然)히 스스로 분발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뜻을 지킨 채 홀로 자고 깨어 말하고 지내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장차 옛사람이 은둔하며 지냈던[考槃] 시내65)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연화봉의 시내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고, 고반의 시내는 군만이 홀로 대하는 것이네.《주역》 〈규괘(睽卦)〉의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이를 본받아 함께하고 달리한다.' 하였는데, 정자가 이를 주해하여 말하기를, '크게 함께할 수 없는 자는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이고, 홀로 달리할 수 없는 자는 세속을 따라 나쁜 것을 익히는 사람이다.' 하였네. 요점은 함께하면서도 달리할 수 있는데 있으니, 이것이 여러 사람이 함께 대하는 연화봉의 시내가 군만이 홀로 대하는 고반의 시내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하니, 사문이 말없이 오랫동안 있다가 인하여 〈고반〉시 3장을 노래하고 시냇가에서 나를 전송하였다. 竹樹南一坊有蓮華峯。峯下一條清澗。透迤渟滀。其深可揭。澗之上。藩落櫛比曰澗里。里之畔。一字蕭灑曰澗齋。余友李斯文光彬甫。其主人也。一日造其齋。因問齋之爲澗何義。斯文笑曰。里之在澗上者爲澗里。則齋之在澗里者。獨不爲澗齋乎。余曰否。夫名所獨獨。所以别之也。今澗自天台。延流十數里。夾澗而家者。不下數百。皆可爲澗齋乎。必有斯文微意之存焉。噫。出處行藏。士君子立身大節目。一禮之未備。有所不屑。一事之不合。有所不就。況在九有渾渾世與道違之日乎。斯文挺然自拔。確然自守。而獨寤寐言。永矢不諼。將有慕於古人考槃之澗。然則蓮華之澗。衆所同也。考槃之澗君所獨也。易睽之象曰。君子以同以異。程子解之曰。不能大同者。亂常拂理之人也。不能獨異者。循俗習非之人也。要在同而能異。此非澗之所以爲澗乎。斯文默然久之。因歌考槃詩三章。送我於澗之濱焉。 홀로……시내 《시경》 〈고반(考槃)〉의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어 말하지만, 길이 이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弗告.]"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고반은 고사(高士)가 은둔해 지내는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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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기 晚翠軒訣 천하의 식물들은 똑같지만, 그 종류에 따라 품평하여 등급을 나눈다면 하루 이틀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고, 한두 달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어 그 등급이 혹 서로 두 배나 다섯 배가 되기도 하고 혹 서로 열 배나 백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욕수(蓐收)71)가 절기를 살피고 매서운 서리가 한껏 맹위를 떨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저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던 식물들은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고, 꺾이듯 생기를 잃어간다. 이러한 시기에 한 때의 위세에 뜻을 빼앗기지 않고, 큰 동요에 절개를 바꾸지 않은 채 울울창창하여 우뚝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어떤 식물인가? 아, 세한(歲寒)에 대한 우리 부자의 탄식72)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이 지나도록 다 사라지지 않는 뜻을 갖게 한다.대저 절개는 혹 만년에 변하기도 하고, 행실은 혹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폐해지기도 하며, 일은 혹 마지막에 실패하기도 하니, 이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이다. 더욱이 위급하거나 급박한 때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으로 겁박한다면 의기소침하여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주 선생(朱先生)이 말하기를, "만약 진실로 깨달음이 있어 참되게 공부한 것이 있다면 쇠로 만든 바퀴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라도 또한 어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소 한가한 때에 절차탁마하여 담금질하고 단련하더라도 위급한 때에 힘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가로이 담소나 나누고 무리지어 논쟁이나 하면서 무르고 연약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임에랴."하였으니, 이 말은 부자의 탄식을 드러내 밝혀서 한 해의 정경이 추워지기 전에 미리 수양하게 한 것이다.나의 벗 만취자(晚翠子)는 어렸을 때나 장성했을 때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그 고상한 뜻과 법도 있는 풍모가 충분히 믿을 만한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며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만취(晚翠)' 두 글자를 문미에 표시해 두고 늘 바라보았다. 이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가 드러내 탄미했던 은미하고 깊은 뜻을 알고서 오늘날 궁구해야 할 결말에 적합한 뜻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것이 비록 지극히 덧없다 하더라도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나는 갯버들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 기운만 바라봐도 시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였으니, 만취자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아서 겨우살이나 덩굴 식물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하는 것처럼 풍상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호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天下之植物一也。然以其彙類而品第之。則有得一日二日之春者。有得一月二月之春者。或相倍蓰。或相什佰。而至於蓐收按節。嚴霜肆威。則彼林林叢叢。無不苶然而失色。摧然而喪氣矣。于斯時也。不爲時威所奪。不爲衆撓所移。而欝欝蒼蒼。挻然自守者果。何物也。噫。吾夫子歲寒之歎。令人有千載不盡之意。夫節或移於晚。行或廢於久。事或失於終。此人之所同患也。況在顚沛急遽之際。而劫之以不測之禍。其有不銷屈者乎。朱先生曰。若使眞有所見。實有下功夫處。則便有鈇輪。頂上轉旋。如何動得他。又曰。平居暇日。琢磨淬礪。緩急之際。未易爲力。況游談聚議習爲軟熟者乎。此語是發明夫子之嘆。使之豫養於歲色未寒之前也。余友晚翠子。幼壯孝悌。老而好學。其志尚風儀。有足可恃。而猶且歉斂然。恐其不及。以晚翠二字。標諸楣而常目。可謂知先聖先師發歎微奥之旨。而得今日着題究竟之義也。世路遭遇雖極無常。而所以行吾法遂吾志者。豈不綽綽然耶。佘以蒲柳殘質。常切望秋之戒。企見不棄於晚翠子。如蔦蘿之依松柏而得庇風霜之萬一耳。 욕수(蓐收)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서방(西方)의 신(神)으로,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를 주관한다. 소호(少皥) 혹은 금신(金神)이라고도 한다. 《禮記 卷5 月令》 세한(歲寒)에……탄식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말하여 혼란한 세상이나 곤궁한 때를 당하여야 군자의 변치 않는 절개를 볼 수 있다고 탄식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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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기 愚齋記 어떤 객이 주인에게 힐난하기를, "무릇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어리석다고 말하면 이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스스로 자기가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인께서는 이미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어리석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어리석음[愚]'으로 집을 명명하셨는지요?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해명하기를, "어리석음은 지혜로움에 대비시켜 말한 경우가 있으니, 공자의 이른바 '하우(下愚)는 변화시킬 수 없다.'73)라는 것이 이것이고, 또 기교에 대비시켜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주자의 이른바 '순수한 어리석음을 온전히 할 수 있다.'74)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살면서 하나의 흠과 하나의 병통이 어찌 일찍이 기교 가운데서 나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내용이 없이 겉만 화려한 문체를 숭상하고 온갖 솜씨를 펼치는 데 힘쓰는 것은 문사(文詞)의 기교이고, 남의 뜻을 받들어 맞추고 권세를 쫓아 아부하며 용의주도하게 온갖 행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공을 세워 이름을 세상에 떨치려는 자의 기교이며, 은미하고 편벽된 것을 찾아 자신만의 특이한 술책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방술사(方術士)의 기교이고, 술수와 농락으로 이익을 이루는 것은 시정(市井) 상인의 기교입니다. 심지어 언어나 필찰, 의복, 그릇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런 상투적인 기교들이 강물처럼 도도하게 유행하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에 대해 우뚝 서서 돌이킬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주인은 타고난 바탕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몸가짐이 바르고 진중하며, 처신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알고, 일을 처리하는 데 근본이 있습니다. 그 말은 간략하고 어눌하며, 그 문장은 평이하고 담백합니다. 부친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되 벼슬을 구하거나 청탁하는 일이 없고, 생계를 꾀하기 위해 농사에 힘쓰되 달리 영리를 추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읽는 것은 성현의 글에 지나지 않았고, 거처하는 곳은 비바람을 막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일토록 함께 어울리면서도 쓸데없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고, 책상이나 자리 주변에 진기한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어리석은 것이지만, 순수한 어리석음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지 않게 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아, 주인이 어리석다 자처하는 것은 타고난 바탕에서 얻어진 것일 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점차 많아지고, 세간의 일을 겪은 세월이 점점 오래되다 보니 세상의 병이 되는 것으로 기교만한 것이 없고 기교를 치료하는 약이 되는 것으로 어리석음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힘을 다해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서 일신의 동정(動靜)이 모두 한결같이 여기에서 나오게 하고, 또 온 세상을 들어 치료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한 글자의 부절(符節)을 게시하여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집을 명명한 본래 의도는 아니지만, 집을 명명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뜻에 자못 도움이 될 듯하니, 바라건대 나를 위해 기문(記文)으로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客有難於主人曰。凡人自謂已愚。是不愚者也。自謂不愚。是眞愚者也。主人旣知其愚。是不愚也。奚復以愚名齋焉。傍有解之者曰。愚有對智而言者。孔子所謂下愚不移是也。又有對巧而言者。朱子所謂全其純愚是也。居今之世。一疵一病。何嘗不從巧中出也。體尙浮虛。務盡伎倆者。文詞之巧也。承迎趨附。用意百態者。功名之巧也。索隱搜僻。好自立異者。方術之巧也。機關籠絡。以濟其利者。市井之巧也。至於言語筆札衣服器用。都是此個窠臼。如水滔滔。惟恐不及。其能挺然於此而思欲反之者。有幾人也。主人天姿朴實。容儀質重。行已有耻。處事有本。其言也簡而訥。其文也平而淡。爲親應擧而不用干託。計口力穡而無他營求。所讀不過聖賢之文。所居不過風雨之庇。終日遊衍。無一剩語。左右几席。無一長物。以世之巧者觀之。固愚矣。而不知其全其純愚者。乃所以不愚也。嗚乎。主人之愚。不惟其得於天姿。讀書漸多。閱世漸久。知世之爲竊病者。莫如巧。巧之爲藥者。莫如愚。於是用力矯捄。使一身動靜。渾然一出於此。而又欲擧一世而藥之。故揭此一字符。使人人得以見之也。主人曰。此非吾名齋之本意然於名齋自警之義。頗似有補。願爲我記焉。 하우(下愚)는……없다 하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고 했는데, 상지(上知)는 이미 선(善)의 극치에 이르렀으므로 더 변화할 것이 없고, 하우는 선을 믿지 않고[自暴] 선을 행하지 않으므로[自棄] 변화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순수한……있다 주희(朱熹)는 과거 공부의 폐해를 지적하며 "그들이 익히는 것이 과거 공부에 지나지 않아서 기량이 더욱 정밀해질수록 마음씨는 더욱 나빠지니, 이는 가르치지 않아서 오히려 그 순수한 어리석음을 보전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한다.[其所習不過科擧之業, 伎倆愈精, 心衍愈壞. 蓋不如不敎猶足以全其純愚之爲愈也.]"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27 答詹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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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와기 謙窩記 높기만 하고 낮추지 못하며, 존귀하기만 하고 굽히지 못하는 것을 교만이라 이르니, 교만하면 흉하게 된다. 얻는 것만 알고 잃는 것을 알지 못하며, 보존하는 것만 알고 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거만이라 이르니, 거만하면 후회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하늘의 높음으로 땅에 낮추는 것은 〈태괘(泰卦)〉가 되고75), 산의 존귀함으로 땅에 굽히는 것은 〈겸괘(謙卦)〉가 되니76), '겸(謙)'의 시의(時義)가 크지 않은가.지위가 천하에 으뜸이되 필부를 예우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은 제왕(帝王)의 겸이고,77) 때에 맞추어 대유(大有)에 올라 천자에게 향응하는 것은 공후(公侯)의 겸이며,78)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입 안의 음식을 뱉어내며 선비에게 몸을 낮춘 것은 재상(宰相)의 겸이다.79) 지혜가 천만 사람보다 뛰어나면서도 나무꾼에게도 묻는 것은 성인(聖人)의 겸이고,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치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춘 채 담박하고 검소하여 안으로 쌓아 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학자(學者)의 겸이다. 덕이 넓어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다스려진 세상에서의 겸이고, 주머니 끈을 묶듯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아서 허물이 없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의 겸이다.나의 벗 겸와옹(謙窩翁)은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별호)의 북쪽에 은거하여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그 겸손의 의리를 터득함이 깊었으니, 이를 가져와 호로 삼은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주역》의 여러 괘 중에 순전히 길하여 흉함이 없는 것은 오직 〈겸괘(謙卦)〉만이 그러하니, 그렇다면 옹이 만년에 누리게 될 복은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高而不能下。尊而不能降。是謂驕。驕則凶。知得而不知喪。知存而不知亡。是謂亢。亢則悔。是故以天之高而下於地則爲泰。以山之尊而降於地則爲謙。謙之時義。不其大矣乎。位加四海而禮下匹夫。帝王之謙也。時躋大有。而享于天子。公侯之謙也。位極人臣。而吐哺下士。宰相之謙也。智出千人。而詢于芻蕘。聖人之謙也。絅錦淡簡。內而不出。學者之謙也。德博而不伐。治世之謙也。括囊而無咎。亂世之謙也。余友謙窩翁。隱居爾陵之北。白首窮經。囂囂自樂。其有得於謙謙之義者深矣。引而號之。不亦宜乎。易諸卦純吉無凶。惟謙爲然。然則翁晚境所享。不占而可知。 하늘의……되고 《주역》 〈태괘(泰卦)〉의 괘상(卦象)을 말한 것으로,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 ☷)가 위에 있고,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이 땅에게 몸을 낮추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산의……되니 《주역》 〈겸괘(謙卦)〉의 괘상(卦象)을 말한 것으로, 땅을 상징하는 곤괘(坤卦 ☷)가 위에 있고,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 ☶)가 아래에 있어 드높은 산이 평평한 땅에 자신을 굽히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지위가……겸이고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황제에 오른 뒤에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하였던 엄광(嚴光)에게 두터운 예물을 보내 초빙하고 벼슬을 주었지만, 엄광은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며 종신토록 은거하였는데, 훗날 범중엄(范仲淹)이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서 "〈둔괘 초구〉에 '양덕이 바야흐로 형통하거늘 능히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어 민심을 크게 얻는다.' 하였으니, 광무제가 이것을 따랐다.[在屯之初九, "陽德方亨, 而能以貴下賤, 大得民也". 光武以之.]"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83 嚴光列傳》 《古文眞寶 後集 卷6》 때에……겸이며 대유(大有)는 《주역》 64괘 중 14번째 괘의 이름으로, 소유한 것이 많다는 뜻이다. 〈대유괘(大有卦) 구삼(九三)〉에 "공이 천자에게 향응하니. 소인은 하지 못한다.[公用亨于天子, 小人弗克.]"라고 하였는데, 《역전(易傳)》에 이르기를, "삼효가 크게 소유한 때를 당하여 제후의 지위에 있으면서 풍부하고 성대함을 소유하면 반드시 이로써 천자에게 향응한다. 이는 자신의 소유를 천자의 소유로 여김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신하로서의 떳떳한 의리이다.[三當大有之時, 居諸侯之位, 有其富盛, 必用亨通于天子. 謂以其有, 爲天子之有也, 乃人臣之常義也.]라고 하였다. 신하로서……겸이다 옛적에 주나라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필하면서 천하의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는 데 급급하여 "머리를 한번 감는 동안에도 세 번이나 젖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나갔고, 밥 한 끼를 먹는 동안에도 입 안의 음식을 세 번이나 뱉어냈다.[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卷33 魯周公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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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이르러 열재 어른54)을 배알하려 했으나 하지 못하다 2수 到益山 擬拜悅齋丈 未果【二首】 형문55)에서 절하고 작별할 때를 돌이켜 생각하니 回憶衡門拜別時한 추위 두 더위의 세월이 흘렀구나 一寒二暑歲華移노년의 질병은 하늘이 응당 보호할테지만 老年疾病天應護백 리의 소식 전하는 기러기 돌아오지 않네 百里音書鴈未歸정신과 외모가 씻은 듯 맑다는 걸 들어 기쁘고 神觀喜聞淸似洗붓과 시가 나는 듯 빠르다는 걸 흔쾌히 본다오 筆詩快看迅如飛거처할 곳을 되려 정하지 못해 한탄스러우니 爲歎棲息還未定멋진 포구 구름 낀 마을에 문안함이 더디다오 佳浦雲村面候遲금마56)의 맑은 가을 나그네 이른 때 金馬淸秋客到時강가에는 수위 낮아지고 고개 구름 옮겨가네 江干水落嶺雲移길 따라 보이는 건 모두 새로운 모습인데 沿途觸目皆新態어느 곳에 마음 논할 옛 지기가 있을까 何處論心有舊知자주 머리 들어 선옹을 서글피 바라보니 悵望仙翁頻擧首문득 날개 돋아 높이 날고 싶은 생각이 드네 飜思生翼欲高飛배회하며 온갖 상념 물리치기 어려운데 徘徊萬想排難遣영주산57)으로 돌아가는 백 리 길이 더디네 歸路瀛山百里遲 回憶衡門拜別時, 一寒二暑歲華移.老年疾病天應護, 百里音書鴈未歸.神觀喜聞淸似洗, 筆詩快看迅如飛.爲歎棲息還未定, 佳浦雲村面候遲.金馬淸秋客到時, 江干水落嶺雲移.沿途觸目皆新態, 何處論心有舊知?悵望仙翁頻擧首, 飜思生翼欲高飛.徘徊萬想排難遣, 歸路瀛山百里遲. 열재(悅齋) 어른 소학규(蘇學奎, 1859~1948)로, 열재는 그의 호이다. 자는 화지(化知)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형문(衡門) 나무를 가로로 걸쳐서 만든 소박한 문으로, 은사(隱士)의 집을 뜻한다. 《시경》 〈진풍(陳風) 형문(衡門)〉에 "형문의 아래에서 편안히 살 만하네.[衡門之下, 可以棲遲.]"라고 하였다. 금마(金馬) 전라북도 익산의 옛 이름이다. 영주산(瀛洲山) 선경(仙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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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열 어른이 화답한 시에서 자신의 나이는 연로한데 시는 노성하지 않음을 탄식하다 得悅丈和詩 歎其年老而詩不老 득열 노인의 시 호방하여 젊을 때보다 나으니 悅叟詩豪勝少時마음과 정신은 나이가 든다고 쇠하지 않는다네 心神不逐邵齡移자산은 명성이 강관에 진동하였고63) 子山名字江關動노두는 공부가 기촉에서 돌아와 노성해졌네64) 老杜工程夔蜀歸이치를 보았으니 참으로 초목을 평할 수 있고 觀理正宜評草木기미를 살폈으니 또한 잠비65)를 읊을 수 있네 玩機亦可詠潛飛후생은 부럽지만 아 어찌 미치겠는가 後生健羡嗟何及시상은 먼저 쇠하고 평소 바람은 더디구나 藻思先衰素望遲 悅叟詩豪勝少時, 心神不逐邵齡移.子山名字江關動, 老杜工程夔蜀歸.觀理正宜評草木, 玩機亦可詠潛飛.後生健羡嗟何及? 藻思先衰素望遲. 자산(子山)은……진동하였고 자산은 북주(北周)의 문장가 유신(庾信)의 자이다. 두보(杜甫)의 〈영회고적(詠懷古跡)〉에, 유신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은 것에 대해 "유신은 평생토록 몹시 쓸쓸했는데, 늘그막에 시부가 강관을 진동했네.[庾信生平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라고 하였다. 강관(江關)은 강남과 같은 말이다. 노두(老杜)는……노성해졌네 노두는 두보(杜甫)를 이른다. 두보가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피하여 처음에는 촉(蜀) 땅으로 들어가서 성도(成都)에 살면서 엄무(嚴武)의 참모로 있다가 대력(大曆) 초년에 엄무가 죽고 촉 땅이 혼란에 빠지자 강을 따라 내려와서 기주(夔州)의 동쪽 지역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때부터 시가 더욱 노성해졌다고 한다. 잠비(潛飛)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준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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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雨 雪消山見色。氷解水聞聲。洗到塵埃盡。仁心乃發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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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재 정공 유사장 碧嵐齋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영환(英煥), 자는 내실(乃實), 호는 벽람재(碧嵐齋)이니 하동 사람이다. 밀직(密直) 휘 국룡(國龍)과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중엽에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를 사사(師事)하였고,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 일컬었으니, 공에게 10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복채(復采), 증조의 휘는 탁(鐸), 조부의 휘는 양엽(陽曄)이고 부친의 휘는 원상(元相)이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김복헌(金復憲)의 따님이니, 순조 병자년(1816)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기개와 도량이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성품과 도량이 겸손하고 검약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성인(成人)의 위의(威儀)와 모양이 있어 다른 사람과 장난치지 않고 다투지 않았으며, 몸에는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았고, 발은 분잡(紛雜)한 곳에는 이르지 않았다. 고기 잡고 나무한 뒤에 한가한 날이면 조용히 곁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고, 제멋대로 편한 곳으로 나아간 적이 없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때에 게으르지 않고 과정(課程)을 따르자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형제 4인이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으니 화기(和氣)가 집안에 가득 찼고,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좁쌀도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으며, 제부(諸婦)도 이처럼 하자 가정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부모상을 당해 몹시 슬퍼하여 수척하고 야위었으며, 정문(情文 인정과 예문)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 평생토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분수를 지켜 천진한 성품대로 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냈지만, 여휘(餘輝)가 은은하게 날로 그 빛이 드러나119) 원근의 인사들이 자자하게 칭송하여 군자로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벽람(碧嵐)' 두 글자를 편액으로 써서 걸어 자신의 뜻을 부쳤다. 정축년(1877) 8월 8일에 세상을 떠나 신산(莘山) 계월봉(桂月峯)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운규(李雲奎)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재헌(在憲)이고 딸은 문종휴(文鍾休)에게 출가했다. 계배(系配)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이신(文以新)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오른 재관(在寬)·재탁(在卓)·재의(在義)이고, 딸은 홍우전(洪祐銓)과 이성재(李成在)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손자 복현(福鉉)이 가장(家狀)을 들고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여 불후하게 전하려고 했을 때,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英煥。字乃實。號碧嵐齋。河東人。密直諱國龍。文忠公諱芝衍。皆上系顯祖也。中葉有諱汝諧。師事金佔畢齋。世稱遯齋先生。於公爲十世。高祖諱復釆。曾祖諱鐸。祖諱陽瞱。考諱元相。妣淸道金氏復憲女。純祖丙子。生公于莘山里。氣字端嚴。性度謙約。自在幼稚。凝然有成人儀樣。不與人戱狎。不與人爭競。身不着華麗之服。足不到紛雜之地。漁樵餘日。從容侍側。應對惟謹。未嘗私自就便。就傳執業不怠。遵循課程。文理日就。兄弟四人。友悌甚篤。長枕大被。和氣滿室。尺布斗粟。有無共之。諸婦亦如之。庭無間言。遭內外艱。哀毁欒欒。情文兩至。一生沈晦。推分任眞。婆娑林樊。而餘輝闇章。遠近人士。藉藉稱誦。無不以君子人推之。揭碧嵐二字以寓其意。丁丑八月八日終。葬莘山桂月峯甲坐原。配全州李氏雲奎女。一男一女。男在憲。女適文鍾休。系配南平文氏以新女。三男二女。男在寬壽陞同中傴。在卓在義。女適洪祐銓李成在。孫以下不錄。公之孫福鉉以家狀。過余謁文爲不朽計。辭不獲。謹據狀而略加修潤焉耳。 은은하게……드러나 대본의 '암장(闇章)'은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의 준말로, 군자의 도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아 은은하지만, 도가 내면에 있기에 날로 그 빛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中庸章句 第33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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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처사 정공 유사장 新泉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수현(洙鉉), 자는 성첨(聖瞻)이고 계통은 하동에서 나왔다. 휘 도정(道正)은 평장사(平章事), 휘 국룡(國龍)은 도첨의(都僉議),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이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충공이 낳은 휘 익(翊)이 우리 조정에 와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였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 선생(金佔畢齋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분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이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으며,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중(德中), 증조의 휘는 명윤(命潤), 조부의 휘는 구원(矩元), 부친의 휘는 재대(在大)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드러났다. 모친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순조 계유년(1813) 1월 24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고 시원하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장난과 저속한 말은 입에서 내지 않았고, 음란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가서는 장상(長上)을 섬기되 공경하고 삼가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학문하는 절도와 몸가짐의 위의(威儀)와 모양은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점차 자라면서 동향(同鄕)의 만희재(晩羲齋)120)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21) 박영주(朴永柱) 공과 종유하여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였다. 중년에 와서 하석(霞石)122) 성 선생(成先生)과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고 평소에 간직했던 경전의 은미하고 심오한 뜻과 전례(典禮)의 의심스럽고 난해한 절목을 의논하여 확정 짓고 헤아려 질정하였으니, 확충시켜 나아간 바가 많았다. 일찍이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 근체(近體)의 문장에 비록 매우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시속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여 가문의 바람에 응하였는데, 이때 와서 드디어 한 번에 모두 사양하여 물리치고, 두문불출하여 세상과 사절한 것은 고요함을 지키고 한가롭게 지내려고 해서였다. 이에 한 구역에 정사(精合)를 짓고 물을 끌어와 샘을 만들어 '신천(新泉)'이라 편액하고, 날마다 마을의 뛰어난 자들을 데리고 와서 글을 읽었다. 고을에서 매번 예회(禮會) 및 문예(文藝)의 연회를 베풀 때면 반드시 공을 빈객으로 맞이했는데, 공이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으로 풍의(風儀)가 매우 훌륭하여 이 때문에 온 좌중이 숙연하였고, 고을 자제들을 대하여 자상하게 이끌어 깨우쳐 주되 성의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듣는 이들이 절로 감복하였다. 평소에 온화하고 어질고 자애로워 화기(和氣)가 사람을 감동시켰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려 빠지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속세와 단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모든 이들이 원망함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믿었으며, 똑같은 말로 추켜세우고 이간하는 말이 없어 사림(士林)에서 공을 조정에 추천하는 데에 이르렀다. 무자년(1888)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나 부등(釜嶝)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모(某)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8남을 두었으니, 순철(淳哲)·순기(淳基)·순귀(淳龜)·순룡(淳龍)·순원(淳䲶)·순별(淳鱉)·순홍(淳鴻)·순필(淳弼)이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정병국(鄭炳國)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요청하였다. 아, 내가 어렸을 때에 이분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일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향방(鄕邦)에서 당시의 덕망 높은 어른들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여생에 다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公諱洙鉉。字聖瞻。系出河東。平章事諱道正。都僉議諱國龍。贊成事文忠公諱芝衍。皆顯祖也。文忠生諱翊。入我朝。官兵曹判書。六傳諱汝諧。受學于金佔畢齋先生。以學行薦。拜司憲府持平。世稱遯齋先生。是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五傳諱殷河號六松。隱德不仕。以孝旌閭。於公爲六世。高祖諱德中。曾祖諱命潤。祖諱矩元。考諱在大。世著文行。妣晉州姜氏某女。有婦德。純廟癸酉正月二十四日。生公于綾之車洞里。氣宇秀爽。性度至孝。自幼。凡嬉戱俚近之語。不出諸口。淫邪之物。不接於目。入事父兄。出事長上。克敬克謹。一如成人。爲學節度。持身儀樣。一以古人爲法。稍長從同鄕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講討問辨。至中歲。往拜霞石成先生蘆沙奇先生。以平日所蓄經傳微奧之旨。典禮疑難之節。商確裁質。多所展拓。嘗於功令近體之文。雖不甚屑意。而隨俗黽勉以應門戶之望。至是遂一令掃斥。杜門謝世。爲守靜養閒計。築一區精舍。引流爲泉。顔曰新泉。日引村秀才子。尋行數墨。鄕中每設禮會及文藝之遊。必邀公爲賓。公以儒布儒服。風儀甚偉。一座爲之肅然。對鄕子弟。諄諄提諭。誠意懇至。聽者自服。平居溫仁慈愛和氣動人和而不流貞不絶俗是以內外無怨。遠近相信。一辭推詡。無有間言。至有士林剡薦。戊子十二月二十六日考終。葬釜嶝子坐原。配驪興閔氏某女。系配密陽朴氏某女。有八男。曰淳哲淳基淳龜淳龍淳䲶淳鱉淳鴻淳弼。孫以下不盡錄。曾孫炳國抱家狀來。謁不朽之文。嗚呼。余在小少。陪從杖屨。承奉聲咳。歷歷如昨日。而奄然千古之隔。已二十餘年。鄕邦間。不復見當日耆舊人物之盛。其爲餘生不盡之恨何如。玆不敢以非其人辭。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하석(霞石) 성근묵(成近黙, 1784~1852)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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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양공 유사장 華庵梁公遺事狀 공의 휘는 재성(在成), 자는 대집(大集)이다. 양씨는 계통이 제주(濟州)에서 나왔고 대대로 성주(星主 제주 목사)를 물려받았다. 고려 의종(毅宗) 때에 와서 휘 원준(元俊)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휘 문성(文聖)은 우리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휘 팽손(彭孫)123)은 교리(校理)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 학포 선생(學圃先生)으로 불렀다. 증조의 휘는 한영(漢永), 조부의 휘는 상기(相麒), 부친의 휘는 제묵(悌默)이니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광산 이씨는 이용하(李龍河)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 무신년(1848) 12월 25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선량한 성품이 있었기에 부모를 섬길 때에 오직 삼가서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여러 아이와 놀 때도 입으로는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손으로는 경솔하고 잡된 장난을 치지 않았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진퇴와 응낙(應諾)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매우 부지런히 독서하여 과정(課程)에 흠결이 없었다. 평소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것을 몸소 주관하지 않음이 없어서 구체(口體)의 봉양(奉養)124)에 모자람이 없었다. 거처할 때에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에 즐거움을 다하여 온 집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는데 늙어서도 여전하였고, 재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여 굶고 배부른 것이 고르지 않은 탄식이 있은 적이 없었다. 모든 혼례비용과 출입할 때의 재물과 빈객의 대접을 모두 자력으로 공급하였고, 미루어 족친과 인척, 친구와 종유하는 자에게까지 모두 기쁘게 은혜를 베풀고 찬연(燦然)히 예로 대하였다. 계미년(1883)에 화학산(華鶴山)에 살면서 몇 칸짜리 집을 짓고, 형제가 서로 마주 대하며 말하고 웃으며 화락하게 지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자식과 조카들이 곁에서 모시면서 독서하고, 친한 벗들이 책상을 둘러싸고 수창(酬唱)하였으니, 그 세속을 끊은 모습과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늙었다고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빈궁하다 하여 스스로 기운을 잃지 않아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에 유감이 없었다. 갑오년(1894)의 난에 이웃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이 정도를 지키면서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고,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거스르면 화가 발생하고 하늘을 따르면 복이 이르며, 선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은 좇아서는 안 되니,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들이 살고 죽는 명맥(命脈)이다. 공은 동생 양재해(梁在海)에게 천 리 밖의 스승에게 배우고 사방에 유학(遊學)함으로써 거의 헛되게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권하고, 피와 땀으로 힘써 일하여 그 비용을 감당하자 향리(鄕里)에서 탄복하고 칭찬하여 '이러한 형이 있어서 이러한 동생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그리워하지 않고 명성과 위세를 바라지 않았으며, 거친 의복과 거친 음식에도 고궁(固窮)125)하고 안빈(安貧)하였지만, 흠모한 것은 선인(善人)과 정사(正士)이고 힘써 노력한 것은 경사(經史)와 서적(書籍)이었다. 시냇가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쑥대 우거진 궁벽한 곳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애오라지 인생을 마쳤으니, 그 고상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세상에서 진실로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공과 같은 땅에 살면서 비록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친밀함은 조석으로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백발의 노년에도 앙모하는 바가 적지 않았는데, 어찌 공이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계묘년(1903) 12월 21일에 세상을 떠나 장흥(長興) 장서면(長西面) 운곡(雲谷) 삼개봉(三開峯) 아래 정방(丁方)을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찬휴(文粲休)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회중(會中)·회연(會沇)·회구(會求)이고, 딸은 하동 정순봉(鄭淳鳳)에게 출가했다. 양재해가 가장(家狀)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기에, 삼가 가장의 말을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公諱在成。字大集。梁氏系出濟州。世襲星主。至高麗毅宗朝。有諱元俊。門下侍郞平章事。有諱文聖。仕我朝皆其顯祖也。至諱彭孫校理贈吏判諡惠康。世稱學圃先生。曾祖諱漢永。祖諱相麒。考諱悌默。皆有隱德。妣光山李氏龍河女。公以憲宗戊申十二月二十五日生于綾之莘山里。幼有至性。事親惟謹。未嘗有違。與群兒遊。口不出鄙俚之言。手不作浮雜之戱。七歲上學。進退唯諾。不類他兒。讀書甚勤。課程無闕。家素貧甚。漁樵耕牧。無不躬幹。口體之養。不至見乏。居致其敬。養致其樂。二家之內。和其藹如也。與弟友愛甚至。長枕大被。老而猶然。有無共之。未嘗有飢飽不均之歎。凡皆嫁之用。出入之資。賓客之供。皆自力以給。推以至於族親姻戚。知舊遊從。皆驩然有恩。燦然有禮。癸未僑寓於華䳽山中。構數椽屋子。兄弟相對。言笑湛樂。日以爲常。子侄侍傍讀書。親朋繞床酬唱。其絶俗之標。出塵之象。可艶而不可忘也。遭喪哀甚。不以耆艾而自恕不以貧寠而自沮。情文無憾甲午之亂。戒隣里人曰。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戒子弟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違。惡不可從。爲善去惡。此是民人生死命脈也。勸其弟枉海。從師千里。遊學四方。殆無虛歲。而血力拮据以應其費。鄕里歎賞。以爲有是兄有是弟。平生不慕名利。不赳聲勢。惡衣菲食。固窮安貧。而所慕者善人正士。所務者經史書藉。徜徉於溪山之間。沈淹於蓬蒿之中。優哉游哉。聊以卒歲。其高韻逸躅。世固有知之者矣。余與公居在同壤。雖未能源源相聚。而襟期之密勿。未嘗非朝夕合席也。白首歲寒。所仰不細。豈知公不少延而遽至於此耶。以癸卯十二月二十一日觀化。葬長興長西面雲谷三開峯下向丁之原。配南平文氏粲休女。有婦德。先公一年而終。生三男一女。會中會沇會求。女適河東鄭淳鳳。在海撰家狀示余。因有一言之托。謹据狀辭。略加修潤焉。 양팽손(梁彭孫) 1488~1545.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9년(중종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구체(口體)의 봉양(奉養)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효도와 상대되는 말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 離婁上》 고궁(固窮) 군자는 곤궁할 때에도 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진실로 곤궁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제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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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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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성균 생원 봉양 손공 유사장 成均生員鳳陽孫公遺事狀 공의 휘는 덕효(德孝), 자는 왈현(曰賢), 호는 봉양(鳳陽)이니, 손씨는 계통이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신라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이 그 시조(始祖)인데, 고려에 와서 훈벌(勳閥)126)이 혁혁히 빛나 우리나라의 거성(巨姓)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책(策)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경(敬)은 그의 백씨(伯氏 맏형) 휘 검경(儉敬)이 뜻을 굽히지 않아 보성(寶城)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홍문 제학(弘文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호는 영귀당(詠歸堂)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일(逸)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이고, 부친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이다.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양효영(梁孝永)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대구 서씨(大邱徐氏)는 서문강(徐文綱)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워 부덕(婦德)이 매우 갖춰졌으니, 영조 무인년(1758)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재성(才性)이 총명하여 스스로 말의 뜻을 알았고, 한 번 들으면 매번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배워 공부할 때에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매우 민첩하였다. 어느 날 종가(宗家)에 가서 사당이 불완전하여 제사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돌아와 부친에게 고하여 묘우(廟宇)를 수선하고 종가를 구휼(救恤)하자고 청하자, 부친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이와 같으니 가문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글방을 열어 스승을 맞이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및 백가(百家)의 책을 쌓아놓고 강학(講學)을 도와주었으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방기함이 없게 하였다. 부친이 질병에 걸려 임종할 때 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가문의 계책은 다만 독서에 달려 있으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일심(一心)으로 향학(向學)하여 한결같이 변함없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 운명(殞命)하였다. 공은 슬프고 비통함이 끝이 없어 여러 번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송종(送終 장사(葬事))의 절차와 집상(執喪)의 법은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친이 임종할 때에 부탁한 것을 생각하여 더욱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잠시도 편안히 한가하게 지내지 않았고, 문장이 성대하고 명성이 매우 자자하여 순조 갑술년(181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영귀(榮歸)127)함에 미쳐 친척과 친구들이 환영하면서 축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공이 기뻐하는 얼굴빛 없이 말하기를, "부모를 잃은 처지로 외람되이 과거에 합격하여 귀가하여 문으로 들어왔는데 기쁨을 드릴 곳이 없으니, 정경(情景)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서럽고 슬플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자고, 낮에는 책상을 맞대며 기뻐하면서 화락하게 지냈으며, 재산과 집물(什物)은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다. 병술년(1826) 4월 4일에 졸(卒)하여 인량동(仁良洞) 좌곡사동(左谷寺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5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두(啓斗)·몽두(夢斗)·필두(弼斗)·채두(采斗)·인두(寅斗)이고, 딸은 남원 윤필창(尹必昶)·탐진 최주효(崔柱孝)·탐진 최홍규(崔弘奎)·광산 김모(金某)에게 출가했다. 손자 처호(處護)·처진(處震)·처팔(處八)·처수(處修)는 장남이 낳았고,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권(處權)과 처영(處英)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처범(處範)은 넷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종은 다섯째 아들의 뒤를 이었다. 현손 영렬(永烈)이 그의 부친 군수공(郡守公)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의 8촌 동생 손영모(孫永謨)로 하여금 나에게 가문에 길이 전하려고 하는 글을 요청하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처럼 말한다. 公諱德孝。字曰賢。號鳳陽。孫氏系出密陽。新羅文孝公諱順。其鼻祖。至麗朝。勳閥烜爀。爲東方巨姓。我朝有諱策文。牧使。生諱敬。見其伯氏諱儉敬。以不屈謫寶城。公亦與之南下。三傳至諱比長文科重試官弘文提學吏曹參議。燕山朝退休扶安。號詠歸堂。世有隱德。高祖諱遇節。贈戶曹參議。曾祖諱逸。贈工曹參判。祖諱始䧺。同中樞。考諱興新。副護軍。妣濟州梁氏孝永女。系妣大邱徐氏文綱女。溫仁柔嘉。婦德甚備。以英宗戊寅十月十四日生。公才性穎悟。自能解語。一有所聞。輒不忘。就學授課。記誦甚敏。一日往宗家。見廟貌不完。祭儀未備。歸告大人。請爲之修繕廟宇。周恤宗家。大人心奇之。語人曰。有兒如此。家戶有望矣。遂開塾延師。貯四子六經及百家書以資講學。朝夕戒勅。俾無放闕。大人遘疾臨終。顧謂公曰。門戶之計。只在讀書。我死之後。汝若一心向學。終始無替。則我之目。可以瞑矣。言訖而終。公哀痛罔極。屢絶而甦。送終之節。執喪之儀。一遵禮制。念大人臨沒之託。益加刻勵。暫不暇逸。文瀾藹蔚。聲華藉甚。純廟甲戌中司馬。及其榮歸也。親戚知舊。無不歡迎稱慶。公無喜色曰。風樹餘生。猥參科名。而歸家入門。獻悅無所。追念情景。只切悲愴而已。與其弟友愛甚篤。夜則連枕。書則連床。怡怡湛樂。財産什物。有無共之。丙戌四月四日卒。葬仁良洞左谷寺洞子坐原。齊光山金氏昌瑞女。五男四女。男啓斗夢斗弼斗采斗寅斗。女適南原尹必昶耽津崔柱孝耽津崔弘奎光山金某孫處護處震處八處修長房出。處祥處茂處宗二房出。處權處英三房出。處範四房出。處宗系五房。玄孫永烈以其大入郡守公所撰家狀。使其三從弟永謨。請余文爲傳家不朽計。辭不獲。謹据狀爲之說如是云爾。 훈벌(勳閥) 국가에 공훈(功勳)이 있는 문벌(門閥)을 말한다. 영귀(榮歸) 과거에 급제한 후 근친(覲親)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파 처사 정공 유사장 松坡處士鄭公遺事狀 공의 휘는 순영(淳榮), 자는 현여(顯汝), 호는 송파(松坡)이다. 정씨는 하동(河東)을 관향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평장사(平章事) 휘 도정(道正)이 처음으로 보첩(譜牒)에 오른 선조가 된다.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휘 익(翊)은 중현 대부(重顯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휘 인귀(仁貴)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휘 여해(汝諧)는 호가 돈재(遯齋)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學行)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중계(中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지평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니 문행(文行)이 세상에 드러났고, 참봉의 현손 문상(文翔)은 호가 화은(華隱)으로 병자년의 난에 의병을 창도하였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명윤(命潤)은 호가 잠곡(潛谷)이고, 증조 휘 구원(矩元)은 호가 농암(聾巖)이며, 조부 휘 재칠(在七)은 호가 죽와(竹窩)이고, 부친의 휘는 국현(國鉉)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으니, 순조 신묘년(1831) 8월 12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살이 쪘으며, 풍모는 장중(莊重)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웃지 않았다. 정성(定省)128)과 감취(甘毳 맛있고 연한 음식)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삼갔으며, 성품이 독서하는 데 부지런하여 날마다 과정(課程)이 있었고, 많은 서적과 경서를 교대로 섭렵하였으며, 문사(文詞)의 각 체는 지은 글이 넉넉하고 시원스러워서 한 시대의 거벽(巨擘 대가(大家))들이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만 운명에 막혀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공론이 원통하게 여겼지만, 공은 편안히 처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만희재(晩羲齋)129)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130) 박영주(朴永柱) 공은 모두 고을의 덕망이 높은 선비이니, 공이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계속해서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늘그막에 선거(選擧)의 폐단을 보아 마침내 관리가 되려는 뜻을 끊고, 한결같이 요약(要約)함으로 돌아와 근원(根源)을 궁구할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이에 《중용》·《대학》·《논어》·《맹자》 등의 책을 가지고 밤낮으로 이치를 연구하고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날에 보았던 것은 매독환주(買櫝還珠)131)일 뿐만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늙으면 지혜로워지지만, 모(耄)132)가 뒤따른다.133)'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장흥(長興)의 어곡리(漁谷里)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산이 깊고 마을이 후미져서 세속의 경계가 요원하고, 마을의 뛰어난 선비 몇 사람만이 문정(門庭) 사이에서 글을 읽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여 빛을 감추었으니, 은은하게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 것134)과 같았다. '송파(松坡)'라고 자호(自號)하고 시를 지어 뜻을 보였으니, "추워진 뒤에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보았으니[特立坡松寒後見], 애오라지 만년의 절조를 지키면서 서로 같아지고자 한다.[聊持晩節願相如]"라고 하였다. 정미년(1907) 2월 18일에 졸(卒)하여 부등(釜嶝) 정좌(丁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낭주 최씨(朗州崔氏)는 최한신(崔漢信)의 따님으로 6남을 두었으니, 우채(瑀采)·봉채(琫采)·학채(䳽采)·필채(弼采)·발채(發采)·기채(琪采)이다. 손자는 찬협(燦協)·찬주(燦宙)·찬일(燦佾)·찬홍(燦弘)·찬회(燦懷)·찬의(燦宜)·찬명(燦明)·찬직(燦直)·찬석(燦錫)이다. 아, 공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배이다. 내가 상숙(庠塾)135)에서 연회(宴會)하는 자리와 사우(士友)들이 글을 짓고 술 마시는 장소에서 인연으로 종유(從遊)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헤어지고 가난과 질병으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어곡리 산중으로 찾아가 그가 덕을 진전시킨 공(功)을 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영원히 세상을 떠난지라 따라가려 해도 오직 미치지 못하니 매우 통한스러울 뿐이다. 정찬협이 한창 부모상 중에 있으면서 가장(家狀)을 들고 찾아와 불후(不朽)의 글을 청했을 때,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진실로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가장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눈물이 줄줄 흘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公諱淳榮。字顯汝。號松坡。鄭氏本河東人。平章事諱道正。爲登譜之祖。諱芝衍。贊成事諡文忠公。諱翊重。顯大夫贈兵曹判書。諱仁貴戶曹參判。諱汝諧。號遯齋。師事佔畢齋金先生。以學行除司憲府持平。皆中系顯祖也。持平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文行著世。參奉玄孫文翔。號華隱。丙子亂倡義旅。生諱殷河。號六松。孝旌閭。於公爲七世也。高祖諱命潤。號潛谷。曾祖諱矩元。號聾巖。祖諱在七。號竹窩。考諱國鉉。世有隱德。妣淸道金氏某女。壼範純備。純廟辛卯八月十二日。生公于綾之車洞里。公面圓體厚。風儀莊重。自幼不好戱美。不妄言笑。定省甘毳。必誠必謹。性勤讀書。日有課程。群書群經。輪流涉獵。文詞各體。栽述贍暢。一時巨擘。無不推先。但厄於命。未得有遇於時。物論稱屈。而處之恬然。未見有不平之意。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皆鄕裏宿德也。公隨時省候。講磨不輟。晩年見選擧之敝遂絶意干進。一以反約窮源爲究竟計。將庸學論孟等書。日夜硏理。乃歎曰。前日之見。不帝爲買櫝而還珠也。古人所謂將知而耄至者。非此之謂耶。寓居長興之漁谷里。山深洞僻。俗境遙遠。惟有村秀才子多少人。尋行數墨於門庭之間。閉戶塞竇。潛光鏟輝。誾然如尙絅之錦。自號松坡。賦詩以見志。有曰。特立坡松寒後見。聊持晩節願相如。丁未二月十八日卒。葬釜嶝丁坐原。配朗州崔氏漢信女。擧六男。瑀采琫采䳽采弼采發采琪采。孫燦協燦宙燦佾燦弘燦懷燦宜燦明燦直燦鍚。嗚呼。公吾鄕先進也。余於庠塾樽俎之地。士友文酒之場。得以夤緣遊從。有所薰染。曉暮分離。貧病苟活。未能一造漁谷山中得觀其進德之功。而公已千古矣。追惟靡逮。只切痛恨。燦協方在重哀之中。以家狀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知不敢承膺。而撫狀釀涕。有不忍終辭云。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면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매독환주(買櫝還珠) 상자만 사고 구슬을 돌려준다는 뜻으로,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천히 여기고, 천하게 여겨야 할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초(楚) 나라 사람에게서 궤[櫝]를 살 때, 그 궤에 장식된 좋은 구슬들은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궤만 차지했던 고사에서 나왔다. 《韓非子 外儲說》 모(耄) 80세 노인이 늙으면 정신이 혼미하여 노망이 든다는 말이다. 늙으면……뒤따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 원년(昭公元年)〉에 나온다. 은은하게……것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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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覽菊思古人 遠思牛醫兒。近憶尨村老。出處雖不同。天機中自保。常思陶靖節。搴菊悵無酒。苟食非吾心。一朝棄五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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