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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기 臺隱記 죽수(竹樹) 관아 남쪽 10리에 연봉(鳶峯)이 있고, 연봉 아래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곳이 가승동(佳勝洞)87)이다. 연봉의 중간 허리쯤에 대(臺)가 있는데, 너비는 수십 보가 되고, 높이는 수십 길이나 된다. 구불구불 이어져 오던 골짜기가 평평하게 멈추고, 깊고 으슥한 정경이 툭 트이면서 뭇 산들이 형상을 바치고, 수많은 시내가 모여드는 이곳이 바로 정공(鄭公)의 은일처[薖軸]이다.공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시작하여 사조(詞藻)가 아름답고 뛰어났는데, 여러 번 향시(鄕試)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빛나는 문장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몸이 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삼을 기르고 기장을 심어 여러 식구들에게 제공했고, 경전 공부에 힘쓰고 문장을 닦아 후학들에게 응대하였으며, 본성에 맡기고 분수를 지키며 영리를 추구하거나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그 뛰어난 풍도와 빼어난 자취만은 잠겨 있어도 밝게 보이고 감추어도 드러나서 사방의 선비들이 대에서 은둔하고 있는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공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대은(臺隱)'이라 일컬었으니, 그 지역을 일컫는 것이 그 사람을 일컫게 된 것이다.아, 사람은 진실로 한 시대에 뛰어난 사람이고, 지역도 한 지역에서 뛰어난 곳이니, 사람이 지역과 부합하고, 경계가 성정과 어울려서 서로 맞아 떨어질 수 없고, 서로 필요로 하여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백세가 지난 뒤에 이 마을을 지나면서 이 대에 임하는 자들 중에 어느 누가 백세 전에 공이 존재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삼봉(三峯)의 천 길 높이에서 위승경(魏升卿)의 문장을 볼 수 있고, 비수(肥水)의 백 리 굽이에서 동소남(董召南)의 의로운 행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88) 竹樹治南十里。有鳶峯。峯之下閭閻櫛比者。是佳勝洞。峯之中腰有臺。廣可數十武。高可數十尋。逶迤而平停。窈窕而軒敞。羣峀獻狀。百川朝堂。卽鄭公薖軸也。公早業功令。詞藻藹蔚。累舉鄉解。不利禮部。回光斂輝。身不出臺外一步。藝麻種黍以供百口。劬經績文以應後學。任眞推分。無營無欲。惟其偉韻逸躅。潛昭闇章。而四方之士。無不知公之隱乎臺矣。是以語及於公。必以臺隱稱之。稱其地。所以稱其人也。嗚乎。人固一時之勝。地亦一方之勝。人與地符。境與情稱。相得而不可離。相須而不可闕。百世之下。過是洞而臨是臺者。誰不知公之在於百世之上乎。三峯千仞。可以見魏升鄕之文章。肥水百里。可以想董召南之行義。 가승동(佳勝洞) 현 전남 화순군 춘양면 가봉리(佳鳳里)로, 예전 가승동(佳勝洞) 마을의 가(佳)자와 봉무정(鳳舞亭)마을의 봉(鳳)자를 합하여 가봉리라 하였다. 삼봉(三峯)의……것이다 성당(盛唐) 시인 잠삼(岑参)은 장안(長安)에 있을 때에 〈송위승경(送魏升卿)〉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고 동도(東都)로 돌아가는 위승경(魏升卿)의 문장이 삼봉(三峯)과 같다고 칭송하고, 한유(韓愈)는 〈차재동생행(差哉蕫生行)〉을 지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회수(淮水)와 비수(淝水) 사이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동소남(董邵南)을 칭송하였는데, 이러한 옛 일에 견주어 연봉((鳶峯)과 대(臺)를 보면 위승경처럼 뛰어난 문장과 동소남만큼이나 훌륭한 행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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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송암 오공 정려기 孝子松庵呉公旌閭記 효자는 고(故) 임진년의 충신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휘 방한(邦翰)의 8세손으로, 세상에 충효로 알려졌다. 효자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에게 병환이 있으면 곧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버이가 시킨 일을 처리할 때에는 뜻을 다해 받들어 따랐다.8살 때에 들녘에 나갔다가 부친이 직접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서 무더위를 무릅쓴 채 고생하시는 것을 걱정하여 몰래 주점으로 가 술을 사서 부친에게 드리려고 하자, 술집 여인이 그의 생각에 감동하여 좋은 안주까지 함께 주고 돈을 받지 않았다.14살 때에 형과 함께 가숙(家塾)에서 독서하였는데, 하루는 형에게 말하기를, "집이 이렇게 가난하여 늙으신 부모께서 몸소 힘든 일을 하시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자식으로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응당 직접 집안일을 주관해야만 형님께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좌우로 노역을 맡아서 남은 힘을 다 쏟아 내면서 집안의 형편이 점점 펴지고 변변찮은 음식일망정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가정을 이루었을 때에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분가하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리는 예절을 빠뜨린 적이 없었고, 모든 일은 반드시 부모님 일을 먼저하고 자신의 일은 나중에 하였다. 형제 다섯이 차례로 분가할 때마다 효자는 반드시 자신이 집기를 마련해 주었고, 형님 집에 비용을 분담시키거나 손상시키지 않게 하였다.부모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매달 자신이 15일의 음식을 바쳤고, 나머지 15일은 동생 셋이 각각 5일의 음식을 바쳤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하여 미담으로 삼을 정도였다. 모부인(母夫人)이 병에 걸려 매우 위독했을 때 효자가 손가락을 깨문 피로 다시 소생시켰으나 이틀이 지난 뒤에 끝내 일어나시지 못하자, 슬픔이 너무도 심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홀로 남은 부친을 모시는 데 더욱 정성을 다하여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니면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허전하고 적적하신 마음을 위로해 드렸고, 부친께서 좋아하셨던 옛 친구 분들을 힘껏 초청하여 부친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부친의 상을 당해서는 초상을 집행하는 예절에 늙고 쇠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의례에 따라 마음을 다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상차(喪次 상주가 머무는 방)를 떠나지 않았으며, 하루걸러 묘소를 살폈다.그 형님을 섬김에 마치 엄한 부친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진퇴와 출입,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고,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슬픔이 자못 심하였지만, 상례(喪禮)에 관한 모든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집행하고 집안사람이나 자제들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형의 아들이 혼사를 의논하면서 혼례 물품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훗날로 미루고자 하자, 효자가 그를 위해 몸소 모든 물품들을 마련하여 혼례를 거행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친족과 인척, 벗들에게까지 미루어서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는데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이 있었다.아,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풍속이 나빠져 진실한 마음이 날로 야박해져 가지만, 효자와 같은 참된 마음과 진실한 행실을 지닌 사람은 오늘날 세상에 옛사람이라 이를 만하였으니, 종친과 친족들은 효성스럽다고 일컬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손하다고 칭찬하였으며, 아름다운 소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정려(旌閭)의 표창이 성대하고 장중하게 내려왔다. 골짜기에 핀 난초의 향기와 깊은 못에서 우는 학의 울음소리는 끝내 절로 숨길 수 없으니, 그 이치가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는가.그의 맏아들 장섭(長燮)이, 내가 부친과 종유(從遊)한 날이 오래되고 부친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가장 익숙하다고 하여 한마디 말로 기문(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孝子故壬辰忠臣贈兵曹叅判諱邦翰八世孫。世以忠孝著聞。孝子幼有至性。親有疾。輒涕泣廢食。執使令。極意承順。八歲出野。見其父躬耕。悶其冒暑作苦。竊往店肆。將沽酒以餉之。酒媼感其意。輒具佳肴以與之。不受其直。十四歲與其兄。讀書家塾。一日告兄曰。家貧如此。而老親親執勞役。此豈人子安心處乎。吾當躬幹家務。兄主可以讀書。自是左右服勞。靡遺餘力。使家力漸舒。而菽水有賴。及有室。以親命分爨。而晨昏之節。未嘗廢闕。凡百事務。必先幹父。而後遂及於私。兄弟五人。漸次分爨。孝子必自備什物以給。使兄家無分損之費。其養親也每月自供十五日之饌。餘十五日。弟三人各供五日。鄕里傳以爲美談。母夫人遘疾甚危。孝子血指得甦。居二日竟至不起。哀毁過甚。幾於滅性。侍偏嚴。尤盡其誠。非甚故。不離側。以慰其窮寂。凡故舊所喜。極力招致。以悅親意。及遭故執喪之節。不以耆衰自恕。一遵情文。三年身不離喪次。間日展墓。事其兄如嚴父。進退出入。家事巨細。必稟而行。及兄歿。哀戚殊甚。喪事凡百。必自親執。未嘗委之於家人子弟。兄之子將議昏。以昏具未備。欲退後。孝子爲之躬辦凡具以行之。推以至於族戚朋友。賙窮恤匱。弔死問生。曲有恩意。嗚乎。世降俗下。眞情日薄。而如孝子之實心實行。可謂今世之古人也。宗族稱孝。鄉黨稱弟。以至令聞上徹。旌褒隆重。谷蘭之香。皐鶴之音。終有不得自掩者。其理豈不信然。其胤子長燮。以余從遊日久。見聞最熟。請一言以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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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기 藍溪記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80) 하였고, 공자가 이르기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政事)를 도모하지 않는다."81) 하였으니, 이 때문에 조정에 있을 때에는 조정의 일을 말하고, 관청에 있을 때에는 관청의 일을 말하며, 공인(工人)들은 반드시 공방에 거처해야 하고, 축관(祝官)은 제기(祭器)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다.윤 사문(尹斯文) 흥서보(興瑞甫)는 집이 가천(佳川)인데, 호가 남계(藍溪)이다. 가천은 남계와는 땅과 경계가 다르고, 서로 거리가 현격하게 머니, 이것이 어찌 강을 호수로 알고, 바다를 산봉우리라 부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비단 지위를 벗어나고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에 비견될 뿐만이 아니다. 남계는 진실로 이름난 지역이지만, 명성을 우선시하고 실질을 뒤로 하는 것은 사문의 뜻이 아니며, 가천의 물이 남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마치 귀결처로 요약되는 뜻이 있는 것 같지만, 근원을 버리고 말류를 쫓는 것 역시 사문이 행하려는 것이 아니다.옛적에 주 선생(周先生)은 연봉(蓮峯) 아래에 집을 짓고 그 집의 당호(堂號)를 '염계(濂溪)'라 하였고82), 주 부자(朱夫子)는 창주(滄洲) 가에 살면서 그 집의 편액을 '자양(紫陽)'이라 하였다.83) 월(越)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짓고, 북방 오랑캐의 말은 북풍에 의지하니, 사물의 본성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현인군자(賢人君子)로서 근본을 마음에 두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 응당 이와 같지 않겠는가.사문은 영평(永平 경기도 포천 지역의 옛 지명)의 명문 종족으로, 대대로 영평의 남계에 거주하다가 중간에 이주하여 능주의 가천 사람이 된 지 이미 3대가 되었다. 과축(薖軸)84)을 기구(箕裘)85)처럼 여기고 헌면(軒冕)86)을 진흙처럼 여기며 문밖을 출입하지 않고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배운 것은 오직 주렴계과 주자양의 학문뿐이었고, 움직이고 고요히 지내는 것 하나하나와 말하고 침묵하는 것 하나하나를 주렴계와 주자양처럼 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호칭과 표방함에 어찌 유독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아,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작용이 두루 하지 못한 바가 있고, 흩어져서 각기 다르기만 하고 화합하여 함께하지 못하면 본체가 확립되지 못한 바가 있다. 지금 생각이 지위를 벗어나지 않되 거처함에 편안함을 생각하지 않고, 몸은 산중에 있되 호칭은 산 밖에 있으니, 사문의 학문을 대강 알 수 있다. 내가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지만 하얀 실을 그대의 쪽빛에 맡기기를 바란다. 易曰。君子思不出其位。孔子曰。不在其位。不謀其政。是以在朝言朝。在官言官。工必居肆。祝不越俎。尹斯文興瑞甫。家佳川而號藍溪。夫佳之於藍。異壤殊境。相距懸然。是何異於認江爲湖喚海作嶺耶。非特爲出位越俎之比而已。藍固名區。而先名後實。非斯文之意也。佳之水注於籃。似若有要歸之義。而舍源趨流。亦非斯文之爲也。昔周先生築室蓮峯之下。題其堂曰濂溪。朱夫子僑寓滄洲之上。扁其室曰紫陽。越鳥南枝。胡馬北風。物性猶然。況賢人君子而其懷本戀舊。不應如是耶。斯文以永平名族。世居永之藍。中間移而爲綾之佳人。已三世矣。箕裘薖軸。塗泥軒冕。足不出門。名不出世。所學惟是周朱之學耳。一動一靜。一語一黙。無不欲周朱是似。則其於稱號標榜。奚獨不然。鳴乎。樂山而不樂水。則用有所不周。散殊而不合同。則體有所不立。今思不出位。而居不懷安。身在山中。而號在山外。斯文之爲學。可以槩矣。吾雖不敏。願以素絲付子之藍。 군자는……않는다 《주역》 〈간괘(艮卦) 상(象)〉에 "산이 거듭함이 간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생각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兼山艮, 君子以, 思不出其位.]"라는 말이 보인다. 그……않는다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 선생(周先生)은……하였고 주 선생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이다. 그는 만년에 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여산(廬山)의 연화봉(蓮花峯) 기슭에 거주하면서 그 앞에 흐르는 시내를 염계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주 부자(朱夫子)는……하였다 주 부자는  주희(朱熹, 1130~1200)를 말한다. 그는 복건성 숭안(崇安)에 살면서 그의 부친 주송(朱松)이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 있는 자양산(紫陽山)에서 독서했던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집 이름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후인들이 주희를 '자양'으로 불렀다. 과축(薖軸) 은거의 삶을 비유하는 말로, 《시경》 〈고반(考槃)〉에 "숨어 살 집이 언덕에 있으니, 큰 선비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라고 한 것과 "숨어 살 집이 고원에 있으니, 큰 선비가 소요하는 곳이로다.[考槃在陸, 碩人之軸.]"라고 한 것에서 끝의 한 글자씩 가져와 합성한 것이다. 기구(箕裘)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궁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헌면(軒冕) 수레와 면류관이라는 말로, 관작과 봉록이 높은 벼슬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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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에 우연히 읊다 新春 偶吟 새 봄의 좋은 계절 온 집에 찾아오니 新春時令到千門장차 강남의 물색도 번성함을 보리라 行看江南物色繁꽃과 버들 핀 앞 시내엔 나그네 발길이요 花柳前川遊子屐뽕과 삼나무 자란 사방엔 들 농사 마을이네 桑麻四境野農村몇 곳에서 마음 기뻐 마음 껏 즐기고 賞心幾處恣行樂어떤 이가 시구 찾아 침식도 잊었는가 覓句何人忘寢飧나는 유달리 주의의 한46)이 생기나니 而我偏生周顗恨동풍에 애써 청주 한 잔에 부쳐본다오 東風强付一淸罇 新春時令到千門, 行看江南物色繁.花柳前川遊子屐, 桑麻四境野農村.賞心幾處恣行樂, 覓句何人忘寢飧.而我偏生周顗恨, 東風强付一淸罇. 주의의 한 망국을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주의(周顗)'는 동진(東晉)의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서진(西晉)이 유송(劉宋)에 쫓겨 장강(長江)의 동남쪽으로 건너가 동진(東晉)이 되었는데, 당시 주의(周顗), 왕도(王導) 등 여러 재상들이 좋은 날을 만날 때마다 이 신정에 모여 풀을 깔고 앉아서 연음(宴飮)을 하였다. 한번은 연음하던 중에 주의가 탄식하기를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산하는 정히 절로 다른 것이 있구나.[風景不殊, 正自有山河之異.]"라고 하자, 온 좌중이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유독 승상 왕도만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의당 우리가 왕실과 힘을 합쳐 중원을 회복해야 할 터인데, 어찌 초나라 죄수 꼴로 서로 마주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當共戮力王室, 克復神州, 何至作楚囚相對?]"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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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어른과 작별하는 길에 함께 최여중49)을 찾아가 정토사에서 놀다 2수 悅丈別路 同訪崔汝重 因遊淨土寺【二首】 토산 동쪽에 명승지를 찾아 나서니 行尋絶勝土山東몸이 신선처럼 하늘에 오름을 느끼네 已覺身如羽化空졸졸 흐르는 샘물과 시냇물 늘 비가 되고 泉澗淙淙常作雨빽빽한 소나무와 대나무 절로 바람이 이네 松篁密密自生風시율에 뛰어난 졸재50)에게 도움 많았음을 알겠고 拙齋詩律知多賴의관 갖춘 열재 어른과 다시 함께하여 기쁘네 悅丈冠紳喜復同요사이 유쾌한 일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 快事邇來曾未有문득 하늘가에 석양이 붉어질까 두렵구나 天邊却怕夕陽紅고국을 그리워하는 위포51)의 몸으로 韋布相憐故國身빈산에서 모이니 더욱 고명한 분들이네 空山一會更高人그윽한 회포가 시와 노래마다 드러나고 幽懷盡逐詩歌發생의는 다시 경계와 경물을 따라 새롭네 生意還從境景新백 리의 시냇가는 빼어난 경치를 바치고 百里溪上呈秀色숲속의 벌레와 새들은 천진을 즐기네 萬林蟲鳥樂天眞날 추워진 뒤에야 앞날의 기약을 아나니 歲寒知有前期在이별의 시름으로 머리 아파하지 않으리 不把離愁却惱神 行尋絶勝土山東, 已覺身如羽化空.泉澗淙淙常作雨, 松篁密密自生風.拙齋詩律知多賴, 悅丈冠紳喜復同.快事邇來曾未有, 天邊却怕夕陽紅.韋布相憐故國身, 空山一會更高人.幽懷盡逐詩歌發, 生意還從境景新.百里溪上呈秀色, 萬林蟲鳥樂天眞.歲寒知有前期在, 不把離愁却惱神. 최여중(崔汝重) 여중은 최태일(崔泰鎰, 1899~?)의 자이며, 호는 백졸재(百拙齋)이다. 고부(古阜) 사람으로, 후창의 문인이다. 졸재(拙齋) 최태일(崔泰鎰)의 호인 백졸재(百拙齋)를 줄여 쓴 것이다. 위포(韋布) 가죽띠와 베옷을 입은 서생을 뜻하는 말로서,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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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포를 쓰다 書懷 반백년 전문하여 사류가 되었으나 半百專門作士流먼 구석 옛 영주에 궁벽하게 사네 僻居遐陬古瀛州용납받기 어렵다 하여 큰 도를 의심치 않지만 莫以難容疑道大실속 없음을 스스로 알아 허명이 부끄럽네 自知無實愧名浮책 속의 동지들에 눈이 반갑게 열렸고 卷中同志靑開眼침상에서 깊은 근심에 백발이 다 되었네 枕上幽憂白盡頭다시 봄이 돌아와 흥이 다소 일어나니 還有春來多少興시 읊고 돌아옴45)이 어찌 옛 사람만의 놀이랴 詠歸豈獨昔人遊 半百專門作士流, 僻居遐陬古瀛州.莫以難容疑道大, 自知無實愧名浮.卷中同志靑開眼, 枕上幽憂白盡頭.還有春來多少興, 詠歸豈獨昔人遊. 시 읊고 돌아옴[詠歸] 봄에 초연한 풍류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갓을 쓴 사람 5, 6인에다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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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직에게 답함 答曺仲直 지난번 김생(金生)이 돌아왔을 때 마침 급한 일로 인하여 답장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시일이 오래 지나 인편을 찾을 방도가 없어 그대로 지내느라 매우 편치 않았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편지를 보낸 이후로 어버이를 모시며 경서를 읽으면서 지내는 정황이 신명의 도움을 받아 평안하신지요? 영랑(令郞)14)의 길례(吉禮)를 잘 치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복록(福祿)이 이어져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예는 비록 축하하지 않는 것이나, 구구한 정사(情私)로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번 그대를 보면, 자품(姿禀)이 굳세고 단정하며 행실에 이미 방정함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외람되이 더불어 노니는 사람의 끄트머리에 있으면서, 만분의 일이나마 충심을 바쳐 그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기를 생각하니, 그 마음에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저의 성품이 거칠고 경솔한데다, 더욱 늙고 어두워져 실낱만큼도 서로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 매번 그대의 편지를 받을 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오랫동안 멍하니 있으니 오직 그대는 부디 힘써서 아홉 길의 공이 한 삼태기 모자란 데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5)【질문】공자께서 말씀하신, "더불어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고,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이와 더불어 말한다."는 말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말하고,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대답】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과 접하는 측면을 이야기한 것이고,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측면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질문】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모시는 것은 증자(曾子)처럼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이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자식 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본분에 지나치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無過分】'는 세 글자가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개 '할 수 있는 것'이란, 적합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합한 일을 하면 이는 곧 본분에 지나치는 것이 아니고,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이는 본분에 지나치는 것입니까?【대답】이 단락은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니, 자식이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서 순(舜) 임금과 같은 분이 지극하면서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주공(周公)과 같은 분이 지극하되 본분에 지나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형공(王荊公)은 효로 일컬어졌는데, 그가 말하기를, "주공은 신하가 세울 수 없는 큰 공을 세웠으니, 신하가 쓸 수 없는 예악(禮樂)을 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또한 효를 행함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질문】위(衛) 나라 공자(公子)가 집안 살림을 잘한다는 칭찬은 그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지나치게 호화롭고 화려하게 하지 않았고, 본분에 맞는 전지(田地)를 지켰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집안 살림을 잘한다는 것인가요? 그 집에 거하기를 잘하는 것인가요? 처음과 조금, 그리고 부유하게 된 것으로써 살펴보건대, 아마도 집안의 힘이 점차 펴짐이 있음을 말한 것이겠지요.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고 훌륭하다."'라는 것은 높은 서꺼래의 좋은 저택과 각종 기물에 이르기까지 재력과 지위에 따라 적당히 하고 그만둔 것이니, 아름다움을 다하고자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대답】이번 조목 문답은 《주서(朱書)》에 있는 것이니, 그대의 질문이 아무개와 비슷합니다. 이는 그렇지 않으니, 비로소 조금 부유해졌다는 것은, 것은 집을 짓는데 들인 공역(工役)이 점차 나아간 차례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갖추었고 훌륭하다."라는 것은 건축물의 창문을 만들고 꾸미는데 그런대로 절제하였음을 가리킨 것이니, 모든 기물 등과 같은 것들은 여의(餘意)일 따름입니다.【질문】'신명(神明)' 두 글자는 바로 마음의 본체가 밝아 모든 변화의 수응(酬應)하는 오묘함으로 밝고 어둡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허령(虛靈)의 '영(靈)'자와는 어떠합니까?【대답】'신(神)'자는 비교적 '정(精)'의 뜻을 지녔습니다.【질문】《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중용의 효능은】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를 이루는 요소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빠뜨릴 수 없도다."라고 하였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과연 어떻게 형용해야 사물에 체(體)가 되어 존재하는 것입니까.【대답】이(理)를 벗어나서는 사물이 없고, 이미 사물이 있으면 체(體)가 되었다는 뜻이니, 볼 수 있을 것입니다.【질문】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性)만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을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사(子思)가 말한, '천명지성(天命之性)'은 기를 말한 것이 아니고,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성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분명하지 않고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까?【대답】본원의 측면으로부터 말한 까닭에 성(性)을 말하고 기(氣)를 말하지 않았으나, 기는 일찍이 갖추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으로 인하여 말한 까닭에 기를 말하되 성을 말하지 않은 것이니, 성은 일찍이 분명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질문】《맹자(孟子)》 「고자장(吿子章)」의 집주(集註)에서, "성(性)은 형이상이고, 기(氣)는 형이하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理)는 단지 위에서 형상화된 것이라 형이하가 될 수 없으며, 기는 단지 아래에서 형상화된 것이라 형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인가요?【대답】이(理)는 두루 통하고 기(氣)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정자(程子)는, "이(理)는 전체를 두루 통하고 기(氣)는 편벽되었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통하는 것을 따라 온전하게 갖추면 형이상이라고 하고, 그 국한된 것을 따라 편벽되면 형이하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기가 아니면 이가 어떻게 홀로 위에서 형상화되며, 이가 아니면 기가 어떻게 홀로 아래에서 형상화되겠습니까? 向於金生之迴。適因忽急。未得修謝。繼而日久。覓便無階。尙爾闕如不安多矣。未審信后侍旁經履。神相裕謐。令郞吉禮。聞已利行。源源餘祿。曷其有艾。禮雖不賀。而區區情私不能不爲賀也每覸座右。姿禀勁正。行已有方。求之今日。甚不易得。忝在遊從之末。思欲效萬一之忠而俾有以成其美者。其心豈有窮已哉。自惟滅裂。加以衰昏。無絲毫可以相資者。每承座右書。不覺憮然久之。惟座右勉之勉之。使九仞之功。無爲一簣之虧。如何如何。孔子所謂可與言。而不與之言。不可與言。而與之言。與孟子所謂未可以言而言。可以言而不言。有分耶。孔子所謂。是就接人上說。孟子所言。是就心上說。孟子曰。事親若曾子者。可也。程子釋之曰。子之身所能爲者。皆所當爲。無過分之事。無過分三字。有可疑。蓋能爲者。卽得爲者乎。然則。得爲爲之。是乃無過分。而不得爲爲之。是則有過分耶。此段有深意在。子之事親若大舜者。可謂至矣。而無過分之事。臣之事君若周公者。可謂至矣。而亦無過分之事也。蓋王荊公以孝稱之者。而其言曰。周公有人臣不能爲之功。則當用人臣不能用之禮樂。觀於此。其爲孝亦可知也。衛公子善居室之稱。蓋見其生長乎富貴。而不之豪華。能守得本分田地故也。此蓋善其居室乎。善居其室乎以始少富有觀之。似是家力漸次有舒之謂也苟合完美。自禳題堂高之類。及至多般器用等物。隨力稱可而止。不欲盡其美也。如何。此條問答。朱書有之。子之問有若某矣。此其不然。始少富有。指其築室工役。漸就之序也。苟合完美。指其室堂窓牖。經紀修雕。苟可之節也。如凡器物等此乃餘意耳神明二字。是此心本體之明。而酬應萬變之妙。明卽不昧。而神字與虛靈之靈字。何如。神字。較有些子精底意。中庸曰。視之而不見。聽之而不聞。體物而不可遺。旣曰不見不聞。則果何名狀。而體於物歟。理外無物。旣有物。則所以體之之義。可見。程子曰。論性不論氣。不備。論氣不論性。不明。然則。子思言天命之性。不言氣。孟子言浩然之氣。不言性。此皆不明不備歟。自本源上說去。故言性不言氣。而氣未嘗不備也。因吾心上說來。故言氣不言性。而性未嘗不明也。吿子章集註曰。性形而上者也。氣形而下者也。然則理只形於上。而不能形下。氣只形於下。而不能形上歟。理通而氣局。程子言理全而氣偏。朱子以爲從其通且全者。而謂之形上。從其局且偏者。而謂之形下也。蓋非氣理。何以獨形於上。非理氣。何以獨形於下乎。 영랑(令郞)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르는 말로, 영식(令息)이라고도 한다. 아홉 길의 …… 어떻겠습니까 《서경》 「여오(旅獒)」에서, "작은 행실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에 누를 끼쳐, 아홉 길의 산을 만들다가 공이 흙 한 삼태기 모자란 데서 무너지는 격이 되리라.【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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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재기 晩隱齋記 재주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 집안의 융성과 쇠퇴를 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처음에 곤궁하다가 뒤에 태평해진 경우도 있고, 처음에 태평하다가 뒤에 곤궁해진 경우도 있으며, 처음과 뒤 모두 곤궁한 경우도 있고, 처음과 뒤 모두 태평한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본디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또한 일찍이 사람의 일과 서로 연관되지 않은 적이 없다. 조부와 부친께서 성취해 놓은 뒤를 계승하였을 때에 어떤 이는 삼가 부지런히 지켜서 끝까지 안락를 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교만하고 방자하며 제멋대로 행하고 안일하여 스스로 패망을 부르기도 하며, 쇠잔한 집안의 뒤를 계승하였을 때에 어떤 이는 옛날 습성대로 나약하고 게을러서 끝내 진작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힘을 내 분발하여 스스로 수립하기도 하니, 이러한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대략을 알 수 있다만은(晩隱) 백공(白公)은 쇠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고로움을 거리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여 빈틈없이 꼼꼼하게 대비하고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함으로써 살아계신 부모님을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을 모두 누리게 하였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장사지낼 때에는 그 예를 다 갖추었다. 심지어 사당을 세우고 묘를 보수하며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제사를 받드는 예절과 종족을 보호하고 친족을 도탑게 대하며 이웃을 구휼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도리, 글방을 열고 서적을 쌓아 두며 선비를 맞이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례대로 배열하고 벌여서 법도에 맞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함에  있어서 완비했다고 이를 만하다.수명은 백세를 누렸고, 지위는 2품에 올랐으며, 네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영예를 바쳤고, 여러 손자들은 앞으로 학문에 대한 희망이 있으니, 어찌 사람의 일을 완비함으로써 하늘이 복을 내려 줌이 또한 이와 같지 않았겠는가.만년에 이르러서는 크고 작은 집안의 일들을 일체 쓸어버리고 도외시한 채 별장 하나를 지어 날마다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거문고를 켜고 술을 마시며 음풍농월하고 이리저리 소요하면서 그 즐거움을 다하였으니, 공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의리에 있어서도 정밀하였다고 하겠다. 이것이 공을 만은(晩隱)이라 한 이유이다.아, 공은 볼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시의 시고(詩稿) 약간 편뿐이지만, 이것을 열람한 뒤에 인하여 보잘것없지만 추앙하는 소회를 기술하여 은근한 뜻에 부응한다. 不佞生長鄕曲。見人家隆替。亦已多矣。有先困而後泰者。有先泰而後困者。有先後俱困者。有先後俱泰者。此固氣數使然。而亦未嘗不與人事相須也。承父祖成立之餘。或謹勤守成而終享安樂。或驕恣放逸而自速敗亡。承家戶殘替之餘。或因循懦怠而終於不振。或激勵奮發而自爲樹立。觀於此而可以知其人之大略矣。晩隱白公。生於家戶殘替。而服勤殫勞。綢繆拮据。使養生而致其樂。送死而備其禮。至於立祠修墓置田奉祀之節。保宗厚族賙隣賑民之道。開塾儲書延士敎子之方。次第排列無不如儀。此於爲人之事。可謂備矣。壽享百歲。位躋二品。四男供科宦之榮。諸孫有方學之望。豈不以人事之備而天之降福亦若是耶。及其晩年。大小家事。一切掃却。置之度外。修一區別業。日與族戚故舊。鳴琴行酒。吟風弄月。逍遙徜徉。極其行樂。公於進退之義。亦云精矣。此公之所以爲晩隱也。嗚乎。公不可見。而所可見者。惟當日詩稿若而篇耳。閱覽之餘。因以述區區追仰之懷。以塞勤意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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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지은 양촌 임장251) 병룡 에 대한 만시 追挽讓村林丈【秉龍】 집안 대대로 문장 닦았으니 家世業文章백발에도 참된 도를 구했네 白頭求道眞나는 자질이 고루하였으나 而余孤陋質화도의 춘풍에 함께 앉았네252) 同坐華島春음을 배척한 날 소리 호응했고 聲應排陰日국화 읊던 때에 정이 친밀했네 情親賦菊辰어찌 그리 바삐 기미성 타셨나253) 箕騎此何忙우리 무리에 한 사람 적어졌네 吾黨少一人백리 길에 한 번 통곡 못하니 百里無一慟병들고 가난한 걸 어찌하리오 其如病且貧바람결에 뒤늦은 만사 부치고 臨風寄追誄동쪽 바라보며 혼자 상심하네 東望暗傷神 家世業文章, 白頭求道眞.而余孤陋質, 同坐華島春.聲應排陰日, 情親賦菊辰.箕騎此何忙? 吾黨少一人.百里無一慟, 其如病且貧.臨風寄追誄, 東望暗傷神. 양촌 임장(讓村林丈) 양촌은 입병룡(林秉龍, 1864~1939)의 호이다. 본관은 조양(兆陽), 자는 태운(台雲), 호는 용치재(用致齋)ㆍ양촌이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출신으로, 간재 전우의 고제(高弟)이다. 문집 《용치재유고》 11권 9책이 전한다. 화도(華島)의……앉았네 계화도(繼華島)의 전우(田愚)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말이다. 기미성(箕尾星) 타셨나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는 말로, 훌륭한 인물의 죽음을 의미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은 그것을 얻어서 무정을 도와 천하를 모두 소유하였으며 동유성(東維星)에 올라 기성과 미성을 타고 열성과 나란하게 되었다.〔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乘東維, 騎箕尾, 而比於列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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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정260) 시에 차운하다 次友于亭韻 이 정자를 짓기도 전에 우애가 있었으니 友于先在此亭成실제와 부합해 그 이름 걸어도 부끄럼 없네 副實無慙揭厥名서로 좋아하는데 어찌 형수261)의 감동 논하랴 式好奚論荊樹感몹시 그리워해 이미 체화262)의 정이 간절했네 孔懷已切棣華情문 밖의 시끄러운 풍진 소식은 들리지 않고 不聞戶外風塵鬧산속의 밝은 물과 돌을 스스로 사랑하였네 自愛山中水石明어찌 평천에 남긴 경계의 말263)이 필요하랴 豈待平泉遺戒語가업 전해 집안 명성 잇는 이가 원래 있었네 箕裘元有繼家聲 友于先在此亭成, 副實無慙揭厥名.式好奚論荊樹感? 孔懷已切棣華情.不聞戶外風塵鬧, 自愛山中水石明.豈待平泉遺戒語? 箕裘元有繼家聲. 우우정(友于亭)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있는 정자로, 정협규(丁夾圭)ㆍ정익규(丁益圭) 형제가 노년에 지은 것이다. 형수(荊樹) 자형화(紫荊花)라는 화초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경조(京兆) 사람인 전진(田眞) 삼형제가 각기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뜰에 심은 자형화를 갈라서 나누어 가지려 하니 자형화가 곧 시들었다. 삼형제가 이에 뉘우치고 다시 재산을 합하니, 자형화가 다시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 《續齊諧記 紫荊樹》 체화(棣華) 아가위꽃으로, 형제를 비유한다. 《시경》 〈상체(常棣)〉에 "상체의 꽃이여, 꽃받침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하였다. 평천(平泉)에……말 당(唐)나라 재상 이덕유(李德裕, 787~850)의 〈평천산거계자손기(平泉山居戒子孫記)〉를 말한다. '평천(平泉)'은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의 남쪽에 있었다. 그는 이곳에다 기화요초를 심고 기암괴석을 갖추어 두었는데 수석(樹石)의 아름다움이 천하제일이었다. 이덕유는 이곳 수석을 특히 사랑하여 〈평천산거계자손기〉에서 "후대에 평천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고, 평천의 나무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좋은 자제가 아니다.〔後代鬻平泉者, 非吾子孫也; 以平泉一樹一石與人者, 非佳子弟也.〕"라고 하였다. 《古今事文類聚續集 卷9 居處部 園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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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정기 東溪亭記 사군자(士君子)가 이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없다면 원림(園林)과 천석(泉石)이 뛰어난 곳을 택하여 오만함을 부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산이 굽이지고 물가의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있는 별장은 대체로 곤궁한 선비의 쇠잔한 힘으로는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부귀하여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어진 것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기거하고 여기에 머무는 목적은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고 즐기거나 한 때의 한가로움을 훔치기 위한 계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유인(幽人 은사(隱士))으로서의 곧음과 길함을 볼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지역을 얻지 못하고, 그 지역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을 얻지 못하니, 사람과 지역이 서로 만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일 것이다.고(故) 처사(處士) 신공(申公) 휘 광택(光宅)은 학술과 의로운 행실이 당시 벗들 사이에서 자자하게 회자되며 존중을 받았는데, 서석산(瑞石山 무등산) 아래 동계(東溪) 가의 한 구역에 집을 짓고 도를 강설하고 학문을 창도하며 유유자적하게 삶을 마쳤다. 대저 신공은 남쪽 고을의 고상한 선비이고, 서석산은 남쪽 지방의 명승지이니, 이는 사람과 지역이 서로 만나고, 정경과 마음이 서로 맞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이 서석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공에게는 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석산이 아니더라도 공이 거처하면 좁은 집은 넓은 집이 될 것이고, 공이 머무르면 노지(露地)는 이름난 정자가 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서석산이 공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지역이 반대로 시내와 숲이 부끄럽게 여기는 허물이 있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당시 서로 만나 알아줌을 얻게 된 것은 공의 복이 아니라, 바로 서석산의 행운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찾아가서 백 년 뒤에 정채(精釆)를 상상해보고, 인하여 서석산을 위해 축하하려 한다. 士君子旣不得有遇於斯世。則當占園林泉石之勝以寄敖焉足矣。然山之曲水之涯。名區別庄。類非窮士孱力所能排置。而舉爲富貴繁華人粧點。然則其所以爰居爰處者。不過爲文酒遊衍。一時偷閒計耳。曷嘗見隱居求志。幽人貞吉者乎。有其人。未必得其地。有其地。未必得其人。人地相得。其亦難矣哉。故處士申公諱光宅。學術行義。藉藉見重於一時士友之間。就瑞石下東溪上。築一區屋子。講道倡學。優游卒歲。夫申公南州之高士。瑞石南方之勝境。此其非人地相得境情相稱者耶。然公而不遇瑞石。固不害爲公。湫屋是廣居。露地是名亭。若瑞石而不遇公。則百年天荒。反不免有澗愧林慙之累。是知當日之賞音。非公之福。而乃瑞石之幸也。余雖老且病。將一理巾屐。想象精釆於百年之後。因以爲瑞石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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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독재기 耕讀齋記 일찍이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가 지은 〈동생행(蕫生行)〉89)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삼가 생각건대, 그의 지극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으로 상상되는데 끊임없이 칭찬하며 말하는 것은 겨우 아침에 밭을 갈고 저녁에 글을 읽었다는 몇 건의 일 뿐이다.나무를 깎아 정전(井田)을 구획한 때로부터 여덟 식구든 다섯 식구든 어느 집이 밭에서 힘들여 일한 집이 아니겠으며, 서계(書契)를 만들어 결승(結繩)의 정사를 대신한 때로부터 상상(上庠 태학(太學))이든 하상(下庠 소학(小學))이든 어느 사람이 학교에 나아가 공부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만일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하고 형편상 학업에 전념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선비가 혹 밭갈이를 병행하기도 하였고, 농부가 혹 독서를 겸하는 것도 항상 밥을 먹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으니, 어찌 동생(董生)의 제일가는 도가 될 수 있겠는가.내가 이것에 대해 일찍이 구구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문자는 우활하고 졸렬한데 일에 한가롭지 못하여 이따금 상충되기도 하였고, 지각과 근력이 매우 피로한 상태로 망망하게 집에 돌아오면 이길 수 없는 노곤함에 혼미함과 졸음이 교대로 침범하여 비록 정신을 차려 깨고자 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전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곤 하였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몸이 이미 일을 시작하게 되면 마음도 함께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하면서 뜻이 날로 빼앗기게 되니, 비록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책을 마주할 생각이 들지 않고 곧바로 마음이 밖으로 내달리게 된다. 이것이 어찌 나만 그렇겠는가.무릇 사람의 힘은 두 가지 일을 편안하게 수행하기 어렵고,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생각에 작용하기 어려워 이쪽 일에 편안하면 저쪽 일에 방해가 되고, 저쪽에 마음이 작용하면 이쪽에 마음이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의 이른바 주경야독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폐단이 전혀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반드시 독실하고 강인하여 우뚝하게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는 연후에야 한 몸의 기운이 뜻을 따르지 않음이 없게 되어 약했던 것은 강해지고, 혼미했던 것은 명철해지면서 갈팡질팡하던 것들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다. 이에 문공(文公)이 일컬었던 뜻과 동생(蕫生)이 성취했던 행실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나의 벗 정경지(鄭敬之)는 이릉(爾陵 능주(綾州)의 별호)의 남쪽에 은거하며 그 집의 편액을 '경독(耕讀)'이라 하였으니, 실제로 행했던 일로 말미암아 마음을 세우고 덕에 나아감에 이보다 절실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경지는 어려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롭다고 일컬어졌고, 늙어서는 학문을 좋아한다고 알려졌으며, 안으로는 아내와 자식들이 아침저녁으로 근심할 것이 없었고, 밖으로는 벗들과 모여 강학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니, 대체로 동생(董生)이 성취한 바와 깊이 들어맞는 바가 있고, 어리석은 우리들처럼 명분만 따르고 실상이 없이 옛 습관대로 세상일에 빠져 지내는 사람과 비견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인하여 더욱 힘써서 마침내 원대한 뜻을 이룬다면 이릉의 계산(溪山)이 회수(淮水)의 동백산(桐柏山)90)이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자자하게 회자(膾炙)될 줄 어찌 알겠는가. 嘗讀韓昌黎所撰蕫生行。竊意其至行高節。想必不少。而所以娓娓稱道。乃在於朝耕夜讀數件事而已。自剡木畫井。八口五口。孰非力田之家。自造書代繩。上庠下庠。孰非就學之人。至若事力不逮。勢難專業。則士或倂耕。農或兼讀。亦是恒恭飯。奚足爲董生第一道哉。余於此。曾有所區區經試者矣。文字迂拙。不閑事役。而種種撞着。知力甚勞。茫茫歸家。不勝困倒。昏睡交侵。雖欲回醒。旋復如故。豈惟此也。身旣執役。心亦與俱。憧憧往來。志日見奪。雖有餘力。無意對冊。便成坐馳。豈惟余也。凡人力難以兩便。人心難以二用。便於此則妨於彼。用於彼則奪於此。世之所謂耕讀者。安知保無此弊也。必須篤實剛毅。有卓然不可奪之志。然後一身之氣。莫不從令。而弱者可强。昏者可明。憧憧者可以妥帖矣。於是乎知文公所稱之意。董生所造之行。不偶爾之。余友鄭敬之。隱於爾陵之南。扁其堂曰耕讀。因其行事之實。而立心進德。無有切於此者。敬之幼以孝悌稱。老而好學聞。內無妻子朝夕之憂。外有朋友講聚之樂。盖董生所造。深有所契。而非如愚輩徇名無實。因循汨没之比也。若因此加勉。卒究遠大。則安知爾陵溪山不爲淮水桐柏而藉藉於天下耶。 동생행(蕫生行) 한유(韓愈)의 시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을 말한다. 동생(董生)은 당(唐)나라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으로,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주경야독하면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이 시를 지어서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회수(淮水)의 동백산(桐柏山) 동소남(董召南)이 은거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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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연 九龍淵 하얀 은하수 거꾸로 쏟아서 倒瀉白銀漢문득 벽옥 연못 만들었구나 飜成碧玉淵눈서리가 여름날에도 날리고 雪霜飛夏日벼락이 갠 하늘에서 일어나네 霹靂起晴天눈이 놀라 처음엔 멀리 바라보고 駭眼初望遠정신 아찔해 문득 다가서기 두렵네 眩精却怕前여산이 어찌 여기보다 낫겠는가 廬山那勝此그래서 나는 청련126)을 비판한다오 而我非靑蓮 倒瀉白銀漢, 飜成碧玉淵.雪霜飛夏日, 霹靂起晴天.駭眼初望遠, 眩精却怕前.廬山那勝此, 而我非靑蓮. 청련(靑蓮)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말한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이백이 여산폭포의 장관을 묘사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시에 "수직으로 삼천 척을 날아 떨어지니,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하네.[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고 한 구절로 유명하다. 《李太白集 卷20 望廬山瀑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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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폭 飛鳳瀑 가는 폭포가 가파른 절벽에 걸려 細瀑懸巉壁흩날려 돌며 봉황의 날개 되었네 揚旋作鳳翔자색 안개가 날려 거꾸로 오르고 紫煙飛倒上서설이 뿜어대듯이 막 쏟아지네 瑞雪噴初雱언제 신묘한 도끼에 깎여졌다가 何日剜神斧이제 속인의 눈을 비비게 하는가 玆來刮俗眶굶주려도 곡식은 먹지 않는다니 有能飢不粟이 물 마시면 배를 채울 만하리 飮此可充腸 細瀑懸巉壁, 揚旋作鳳翔.紫煙飛倒上, 瑞雪噴初雱.何日剜神斧, 玆來刮俗眶.有能飢不粟, 飮此可充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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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2장 黃鳥 二章 아침 해가 맑고 아름다우며 정원의 나무들은 짙푸르렀다. 어디선가 날아온 꾀꼬리가 이곳의 적막을 깨고 좋은 소리를 들려주니 나는 마음에 감회가 있어 마침내 〈꾀꼬리〉 2장을 지었다.아 너 꾀꼬리여 嗟爾黃鳥생황처럼 지저귀는구나 笙簧百囀가엾은 우리 백성들 哀我民生구렁에서 얼마나 뒹구는가 溝壑幾轉너의 편안한 풍류가 부럽구나 樂子之風流燕晏부이다.[賦也]아 너 꾀꼬리여 嗟爾黃鳥온 몸에 황금옷 입었구나 遍身金衣가엾은 우리 백성들 哀我民生백 번 기운 베 옷에 가죽 띠 맸으니 百結布韋너의 후황한 부귀가 부럽구나 樂子之富貴炫輝부이다.[賦也] 朝日淸佳, 庭樹陰綠.何來黃鳥, 破此寂寞.聞爾好音, 我懷有感, 遂賦黃鳥二章.嗟爾黃鳥, 笙簧百囀.哀我民生, 溝壑幾轉, 樂子之風流燕晏.賦也.嗟爾黃鳥, 遍身金衣.哀我民生, 百結布韋, 樂子之富貴炫輝.賦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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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가의 아낙네 貧家婦 십 년 썰렁한 부엌에 헤진 치마 하나 十載寒廚一弊裳야윈 얼굴은 어느 날에 빛이 나려나 瘦顔何日可生光들에는 선대가 남겨준 논밭이 없고 野無先世遺田土집에는 남편이 선비나 상인도 아니네 家不阿郞業士商마을 이웃에게 수모 당해 마음은 숯검정이고 心爲村隣逢侮燼자녀들이 굶주려 우니 머리는 서리 내렸네 髮因兒女哭飢霜윤회의 한 이치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輪回一理如非妄다음 생엔 기쁘고 즐겁기를 하늘에 비네 快樂他生禱彼蒼 十載寒廚一弊裳, 瘦顔何日可生光.野無先世遺田土, 家不阿郞業士商.心爲村隣逢侮燼, 髮因兒女哭飢霜.輪回一理如非妄, 快樂他生禱彼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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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날 밤에 객이 오다 上元夜 客至 분분한 이단의 설이 세상을 어지럽히니 紛紛異說亂西東귀 밝기390) 원치 않아 술통도 비었구나 不願耳明樽亦空하늘의 기운 깨끗하고 맑음은 보름밤이요391) 天氣澄淸三五夜백성의 마음 변하는 건 고금의 풍속이지 民情變改古今風유인은 거울 속에 서리 가닥 허옇고 幽人鏡裏霜莖白만호는 시렁 끝에 등불 빛이 붉구나 萬戶棚頭燭影紅좋은 밤에 옥루392) 재촉하지 말게나 莫使良宵催玉漏이 자리 함께 하는 좋은 인연 쉽지 않네 勝緣不易此筵同 紛紛異說亂西東, 不願耳明樽亦空.天氣澄淸三五夜, 民情變改古今風.幽人鏡裏霜莖白, 萬戶棚頭燭影紅.莫使良宵催玉漏, 勝緣不易此筵同. 귀 밝기 정월 대보름 아침에 귀밝이술 즉 이명주(耳明酒)를 마시는 풍속이 있어서 한 말이다. 하늘의……밤이요 하늘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옥루(玉漏) 물시계의 미칭으로, 시간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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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청헌기 樂淸軒記 낙청헌(樂淸軒) 위공(魏公)은 천관산(天冠山)22) 산중에 은거하며 덕업을 닦고 의리를 행한 세월이 앞뒤로 57년이 되기에 호남의 선비들이 일제히 흠모하여 선배와 큰 덕망을 지닌 분으로 칭송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진실로 이미 어르신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지만, 단지 고루하게 집에만 있었기에 공의 헌(軒)에 올라 '낙청(樂淸)'이라 하게 된 뜻을 묻지 못했다.삼가 생각건대, 시세(時勢)는 쇠퇴함과 융성함이 있기에 풍속이 모두 순박할 수 없고, 기질은 아름다움과 악함이 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선할 수 없으니, 비록 맑음을 즐긴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서 즐길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 즐기는 바가 풍기(風氣)와 형체 밖에 있어서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인가?정해년(1887) 겨울에 내가 선롱(先壠)의 일로 금릉(金陵)23)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단촌리(丹村里)에서 공을 뵈었는데, 그 집안을 살펴보니, 산림과 수석(水石), 정원의 돌과 궤석(几席)이 거울처럼 열려 있고 옥처럼 배열되어 한 점 티끌도 없이 깨끗하였다. 또한 백발에 화사한 얼굴로 높이 관을 쓰고 느슨한 띠를 두른 채 그 사이에서 사쁜사쁜 가볍게 거니는 모습이 표연(飄然)하여 마치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밤새도록 곁에서 모셨는데,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사이에서 나온 말씀들이 모두 지극하고 긴요한 것들이었고, 끊임없는 천기(天氣) 중에서 흘러나왔기에 더욱 나도 모르게 송연(悚然)히 옷깃을 여미었다.아, 풍속이 경박하여 온 세상에 탁류가 넘쳐나는데, 어느 누가 천관산 아래에 이처럼 깨끗한 한 곳이 있을 줄 알겠는가. 영원히 세속을 떠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비록 그 본심이 아닐지라도 한 조각 아교(阿膠)24)가 진흙 물결이 일렁이는 사이에서 쓸모가 없다면 나의 우물을 지키며 홀로 그 맑음을 즐긴다 한들 어느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가슴에 쌓은 경륜을 드러내지 않고, 담박하면서도 간명한 도를 스스로 감춘 것이 세상의 혼탁한 사람과 같지 않아 매우 구별되었는데, 공이 어찌 일찍이 그 맑음을 스스로 말한 적이 있었겠는가. 공이 오히려 감히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공의 맑음을 아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오직 남쪽 고을로 부임해 온 송석(松石) 송공(宋公)만이 한번 보고 알아서 그 헌에 '낙청'이라 썼으니, 낙청의 뜻을 송공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지사(志士)가 서로 만나 어울리는 한 부분이다.나의 어리석음으로도 감히 그 사이를 엿보아 헤아리지 못하지만,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사사로이 염모하고 흠앙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이와 같이 그 대략을 기술한다. 樂淸軒魏公。隱居天冠山中。修德行義。前後五七十年。湖之士。翕然向之。稱先輩長德。余自童丱。固已艶聞。而但固陋屛居。未獲登公之軒。問所以樂淸之意。切念時有汚隆。俗不能皆淳。氣有美惡。人不能皆善。雖樂淸。其將何所可樂乎。抑其所樂。有在於風氣形殼之外。而匪夷所思者耶。歲丁亥冬。予以先壠事。往金陵。其歸謁公於丹村里。見其邱林水石。庭石几席。鑑開玉排。瑩然無一點塵累。而華顔白髮。峨冠博帶。婆娑其間。飄然若天仙降坐。予終宵侍側。而發於警咳提喩之間者。皆至言要語。自滚滚天機中流出。尤不覺悚然斂衽也。嗚乎。風澆俗漓。擧世淊淊。而誰知天冠山下有此一區乾淨哉。長往自潔。雖非其心。而一片阿膠。無所用於淈泥揚波之間。則守我井渫。獨樂其淸。孰謂不可哉。然含蘊不露。淡簡自晦。與世之汶汶者不似。大故逈別。則公何嘗自道其淸也。公猶不敢自道。況知公之淸者。幾人哉。惟松石宋公來莅南州。一見知之。題其軒曰樂淸。樂淸之意。非宋公孰能知之。此是志士相遇一副節拍處也。以余之愚。亦不敢窺涯其間。而但以耳目之睹記。不勝艶欽之私。謹述其梗槩如是云爾。 천관산(天冠山)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금릉(金陵)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별호(別號)로 지금은 김천시에 속해 있다. 아교(阿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는 약물이라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외편(外篇) 〈가둔(嘉遯)〉에 "얼마 안 되는 아교(阿膠)로는 황하의 흐린 물을 맑게 만들 수가 없다.[寸膠不能治黃河之濁]"라는 내용이 보이고, 주희가 친구 남헌(南軒) 장식(張栻)에게 준 〈수남헌(酬南軒)〉에서 "어찌 한 치의 아교로 천 길의 혼탁함을 구하겠는가.[豈知一寸膠, 救此千丈渾.]"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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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기 丹溪記 천관산(天冠山)25) 남쪽에 살고 있는 단계자(丹溪子)는 바로 내 만년의 벗인데, 하루는 어떤 객이 그곳을 들렀다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단계의 주인과 서로 알고 지냈으니, 또한 단계로 호를 명명한 뜻을 알고 있겠지요? 오색(五色)은 황색이 정색(正色)이 되고, 오채(五采)는 백색이 바탕이 되지만, 단색(丹色)은 정색도 아니고 바탕도 되지 않습니다. 주(周)나라 사람은 적색(赤色)을 숭상하였으되 단색을 말하지 않았고, 노성(魯聖 공자)은 주색(朱色)을 허여하였으되 단색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주인의 집은 청산(靑山)에 있고, 몸은 백옥(白屋)26)에 거처하고 있으며, 평일에 대하는 것은 누런 책[黃卷]이고, 만년에 얻은 것은 하얀 머리털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단색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취하여 편액으로 걸어 놓은 것인지요?" 하니, 내가 말하였다. "황암(黃巖) 위에 거처하였기에 두씨(杜氏)는 황암 처사(黃巖處士)라 한 것이고,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거처하였기에 허씨(許氏)는 백운 선생(白雲先生)이라 한 것인데27), 단산(丹山) 가운데 거처하는 자만 유독 단계의 주인이 될 수 없겠는가.나이가 기노(耆老)28)에 이르도록 두 부모가 모두 살아계신 경우는 예로부터 옛적에 오직 노래자(老萊子)29)와 서형중(徐衡仲) 등 몇 사람뿐이었는데, 지금 주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볼 수 있으니, 쌓아온 덕이 깊고 두텁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천하의 가장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흰 머리가 아롱져 빛날 때까지 기쁜 기색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즐거움을 다하고 있으니, 이는 그 마음에 내재된 것도 단색이고, 밖으로 드러난 것도 단색이어서 사람과 만물에 응대하고 접할 때에도 크고 작은 일이 단심(丹心)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뿌리를 감추고 향기를 머금어서 고요하기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 꿋꿋하게 세한(歲寒)의 절개30)를 지키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내가 알기에 호를 명명한 뜻이 본디 현재 거처하고 있는 지역에서 나온 것이지만, 기쁨을 표하는 마음과 경계를 부친 의리도 일찍이 그 가운데에서 함께 행해지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네. 객이여, 만약 주인을 만나거든 나를 위해 운당(篔簹)의 시31) 한 구절을 읊어주게나. " 라고 하였다. 冠山之陽有丹溪子。卽我晩年友也。一日客有經過而來者。謂余言曰。子與丹溪主人相知。亦知其丹溪命號之意耶。五色黃爲正。五采白爲質。丹則非正非質。周人尙赤而不言丹。魯聖與朱而不及丹。且主人家在靑山。身處白屋。平日所對者黃卷。晩年所得者皓髮。未知何有於丹。而取爲扁揭也。余曰。居於黃巖之上。而杜氏所以爲黃巖處士也。居於白雲之下。而許氏所以爲白雲先生也。則居於丹山之中者。獨不得爲丹溪主人耶。行年耆老。兩庭俱存。自古在昔。惟老萊子與徐衡仲數人而已。而今於主人。又見之矣。其非積累深厚。何以享此天下太上之樂也。白首班斕。恰愉盡歡。此其存於中者丹。而著於外者亦丹。以至酬人接物。大小大事。無非自丹心中流出。況晦根含薰。寂若無有。耿耿爲歲寒之守者。豈其偶爾哉。余知命號之意。固出於見在所居之地。而其識喜之心。寓警之義。亦未嘗不倂行乎其中也。客乎如見主人。爲我歌篔簹詩一絶。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백옥(白屋) 흰 띠로 지붕을 덮은 집이나 기둥과 들보에 채색을 하지 않은 집을 말하는 것으로, 평민(平民)이나 한사(寒士)의 집을 가리킨다. 허씨(許氏)는……하였는데 허씨는 원(元)나라 때의 이학가(理學家)인 허겸(許謙)으로, 원래 송(宋)나라 사람이었는데 나라가 망함에 따라 평생 벼슬하지 않고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전념하며 스스로 호를 백운산인(白雲山人)이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백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김이상(金履祥)에게 수업하였고, 주자의 학문을 추종하였으며, 사방의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元史 券189 許謙列傳》 기노(耆老) 나이 60세와 70세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나이 60세를 '기(耆)'라 하니 지시하여 부린다. 70세를 '노(老)'라 하니 집안일을 물려준다.[六十曰耆指使, 七十曰老而傳.]" 라는 구절이 보인다. 노래자(老萊子) 노래자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로 나이 70에도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고 한다. 《小學 稽古》 세한(歲寒)의 절개 당시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뜻을 지키고 있음을 비유한 말로, 공자(孔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운당(篔簹)의 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한탄스러움을 노래한 시이다. 주희가 젊은 시절에 운당포(篔簹鋪)를 지나다가 벽에 "빛나는 영지는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는데, 나는 유독 어찌하여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하는가.[煌惶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는 시를 보고 공감한 적이 있었는데, 4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그곳에 와서 당시의 시가 이미 없어졌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언뜻 지나가는 백 년 세월 얼마나 되랴. 세 번 꽃 피는 영지는 무엇을 하려는가. 말년에도 금단은 소식 없으니, 운당포 벽 위의 시가 거듭 한탄스럽네.[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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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기 松下記 소나무라는 식물은 복숭아나무나 오얏나무처럼 향기로운 꽃을 왕성히 피우는 데 모자람이 있고, 오동나무나 버드나무와 같이 짙은 그늘도 적다. 단지 단단한 줄기와 성근 가지, 가느다란 잎, 거친 껍질을 지닌 채 울울창창할 뿐이다. 그러나 성현(聖賢)과 은일(隱逸), 문인과 시인들 중에서 애호하고 숭상하여 노래하고 읊으면서 그 품성을 모든 나무들 위에 올려놓고, 그 부류를 장부의 반열에 견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건대, 봄과 여름 사이에 온 산의 모든 식물들이 푸른빛 일색이다가도 가을 서리가 맹위를 떨치면 쇠락하여 거의 다 그 빛을 잃어버리는데, 오직 빼어나게 자신의 색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소나무뿐이다.아, 절개를 혹 만년에 바꾸기도 하고, 지조를 혹 마지막에 잃기도 하며, 일을 혹 오랜 세월 끝에 폐지하기도 하는데, 더욱이 매우 곤궁한 때와 다급한 즈음에 지조를 잃지 않고 태연하게 나의 의리를 행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만년의 절개를 보호하는 것이 사군자의 첫 번째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창졸간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편안하게 지내는 평소 때부터 궁리하고 실천함으로써 옳음과 그름, 삿됨과 바름이 마음과 안목 사이에서 명료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대하고 충만하게 한다면 평탄한 때든 험난한 때든 처음과 끝을 보존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나는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처럼 졸렬한 품성으로 풍상에 얽매여 거의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었으니, 지금 이후로 소나무 밑을 따른다면 혹 상유(桑楡)17)에 만분의 일이나마 수습할 수 있지 않겠는가. 松植物也。欠桃李之紛芳。少梧柳之繁陰。而只有硬幹疎枝。細髥鹿甲。鬱然蒼然而已。然聖賢隱逸。文人韻士。無不愛尙歌咏。擅其品於衆木之上。比其類於丈夫之班。其故何在。觀夫春夏之際。滿山品彙。一色蒼翠。及其秋霜動威。零落殆盡。而惟挺然自守者此耳。嗚乎。節或移於晩。守或失於終。事或廢於久。況於窮塞之時。顚沛之頃。能不迷所守而泰然行吾義者。幾人乎此保晩節所以爲士君子第一事也。然此非倉卒可辦。必須窮理實踐於平居燕安之日。使是非邪正。瞭然心目。而浩然之氣。剛大充滿。則其於處夷險。保終始。何難之有哉。余以樗櫟劣品。纏滯風霜。幾不能自保。自今以往。從松下子。庶或有桑楡萬一之收耶。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노년기를 비유한다.  반대로 동우(東隅)는 해가 뜨는 곳으로 젊은 시절을 비유한다. 후한(後漢)의 장군(將軍) 풍이(馮異)가 적미병(赤眉兵)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패주했다가 나중에 적을 격파하자, 광무제(光武帝)가 "동우에는 잃었으나 상유에 수습하였다.[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했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後漢書 卷47 馮異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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