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조 습정공300) 한충 의 유고를 읽다 讀族祖習靜公【漢忠】遺稿 남원(南原)의 산수 기운이 帶方山水氣모여서 습정공을 낳았네 鍾生習靜公마음은 의리의 길과 통하고 心通義理路성품은 강직한 풍모 지녔네 性帶剛直風천 리 머나먼 한강 가 千里漢之上매산(梅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네 就正梅門中세도가 날로 변하여 世道日以變향사 올리던 만동묘301)를 철거하였네 廟享撤萬東아아 잊을 수 없어라 於虖不可忘신종과 의종 두 분이여 神毅有兩宗하물며 이는 의리에 근거해 예를 제정한 것이니 矧玆義起禮우재옹302)에게서 나온 것이라네 出自尤齋翁이 일은 게다가 사문과 관계되니 事又係斯文초야의 선비들 어찌 입 닫고 귀 닫을까 韋布豈啞聾곧 나라의 선비들을 창도하여 乃倡國中士좋은 계책을 구중궁궐에 올렸네 琅玕呈九重어찌 생각했으랴 임금께서 들어주지 않고 豈料邈荃聽대궐에서 견책이 내려올 줄을 譴責降天門머나먼 초나라 산중에서 逖矣楚山中〈복조부〉303) 읊은 지 5년이라네 賦鵬五經年대로304)의 수제자였고 大老首弟子두 황조의 한 충신이었네 兩皇一忠臣조야에서 공공연히 칭송하였으니 朝野公共誦백대 기다리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혹 없으리305) 百世質鬼神일에 도움 되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 莫曰事無補그저 대의를 보존한 것이라네 而但大義存훗날 다시 제향하는 날 後來復享日이 상소가 원인이 되리라 此疏爲原因만약 그 공로를 논한다면 苟可論厥功공이 실로 으뜸을 차지하리라 公實居首先아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나 嗟余生太晩직접 얼굴을 뵙지 못했네 未及拜承顔이제 남긴 글을 읽노라니 今來讀遺文흉중이 탁 트여 맑구나 豁然淸心肝만약 조정에 서게 한다면 如使立人朝어찌 이 같은 반열에 그치랴 豈止若是班임금의 덕에 흠이 있을 때는 時當君德闕장유306)처럼 간쟁하였고 長孺非別人위태롭고 망하려던 때는 時當危亡際문산307)처럼 행동하였지 文山卽其身같은 시대를 산 비평가들은 幷世月朝家이러한 뜻을 자세히 논하리라 此意合詳論 帶方山水氣, 鍾生習靜公.心通義理路, 性帶剛直風.千里漢之上, 就正梅門中.世道日以變, 廟享撤萬東.於虖不可忘, 神毅有兩宗.矧玆義起禮, 出自尤齋翁.事又係斯文, 韋布豈啞聾?乃倡國中士, 琅玕呈九重.豈料邈荃聽, 譴責降天門?逖矣楚山中, 賦鵬五經年.大老首弟子, 兩皇一忠臣.朝野公共誦, 百世質鬼神.莫曰事無補, 而但大義存.後來復享日, 此疏爲原因.苟可論厥功, 公實居首先.嗟余生太晩, 未及拜承顔.今來讀遺文, 豁然淸心肝.如使立人朝, 豈止若是班?時當君德闕, 長孺非別人.時當危亡際, 文山卽其身.幷世月朝家, 此意合詳論. 습정공(習靜公) 김한충(金漢忠, 1801~1873)으로, 자는 효백(孝白), 호는 습정(習靜)이다.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자, 〈만동묘를 다시 제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請萬東廟復享疏]〉를 올렸고, 이 일로 인해 이듬해에 평안북도 초산(楚山)으로 귀양을 가서 1870년에 사면되었다. 저서에 《습정재선생유고》가 있다.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明)나라의 의종(毅宗)과 마지막 황제인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유명을 받아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1704년(숙종30)에 현재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웠다. 그러다가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을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11)에 다시 세웠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우재옹(尤齋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복조부(鵩鳥賦)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을 때 복조(鵩鳥)가 지붕 위에 날아와 모였는데, 당시 민간에 전하는 말로는 복조가 지붕에 앉으면 그 집 주인이 죽는다고 하였으므로, 가의가 슬퍼하여 〈복조부〉를 지었다고 한다. 《史記 賈生列傳》 대로(大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을 가리킨다. 백대……없으리 진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29장에 "군자의 도는……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대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하지 않는다.[君子之道……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장유(長孺)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신하인 급암(汲黯)의 자이다. 그는 간쟁을 서슴지 않아 무제로부터 '사직지신(社稷之臣)'이란 칭찬을 받았다. 《史記 汲黯列傳》 문산(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1276년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뒤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나라에 대항하다가 1278년에 사로잡혀 시시(柴市)에서 처형되었다.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宋史 文天祥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