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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의 시에 차운하다 次可石韻 마음 공부가 아직 치밀하지 못한데 心工曾未密두발은 홀연 어찌 이리 성글어졌나 頭髮遽何疏이제라도 더욱 힘쓰지 않는다면 及此不加勉끝내 독서를 저버리게 되겠구나 竟歸負讀書 心工曾未密, 頭髮遽何疏.及此不加勉, 竟歸負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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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로 가는 도중에 2수 長水途中【二首】 천릿길 영남으로 오늘에야 가니 千里嶠南此日行젊은 시절부터 경영했던 일이네 經營曾自少年靑심진동 수석은 어찌하여 늦었으며 尋眞水石緣何晩심진은 골짜기 이름이다.수승대 정자는 몇 번이나 꿈꿨던가 搜勝亭臺夢幾成수승은 대(臺)의 이름이다.산하는 이미 상전벽해를 겪었고 已閱山河桑改碧문득 머리털 보니 눈처럼 환하네 忽看鬢髮雪如明시당자268) 덕분에 내가 일어났으니 起余賴有時堂子아침이슬 처음 마르고 산 기운 갰네 朝露初晞嵐氣晴험한 돌길을 가는 것도 싫지 않으니 不厭間關石逕行저 물 파랗고 산 푸른 걸 사랑하네 愛渠水綠與山靑용문의 장쾌한 유람은 일찍 저버렸으나 龍門壯觀雖曾負상자평269)의 여생은 끝내 이루었네 向子餘年有竟成객지의 세월은 빠름과 늦음이 없고 客裏光陰無早晩눈에 보이는 경물은 절로 선명하네 眼中景物自鮮明아득하구나 덕유산은 어느 곳일까 渺然德裕知何處동녘에 구름이 개지 않아 한스럽네 却恨東天雲未晴 千里嶠南此日行, 經營曾自少年靑.尋眞【洞名】水石緣何晩? 搜勝【臺名】亭臺夢幾成?已閱山河桑改碧, 忽看鬢髮雪如明.起余賴有時堂子, 朝露初晞嵐氣晴.不厭間關石逕行, 愛渠水綠與山靑.龍門壯觀雖曾負, 向子餘年有竟成.客裏光陰無早晩, 眼中景物自鮮明.渺然德裕知何處? 却恨東天雲未晴. 시당자(時堂子) 이한응(李漢應, 1902~1949)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사유(士裕), 호는 시당(時堂)이다.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쌍계리 마평 마을에서 출생하여 이병은(李炳殷)ㆍ김택술(金澤述)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문집으로 《시당유고》 2권 1책이 전한다. 상자평(向子平) 자평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상장(向長)의 자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보낸 뒤에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여기라고 하고는 집을 떠나 뜻이 맞는 벗들과 오악(五岳) 명산을 유람하며 종적을 감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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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정277)에서. 덕곡278)의 한거잡영 시에 차운하다 5수 敎授亭 次德谷閒居雜詠韻【五首】 망복의 의리279)로 당시 이곳에 은거하였으니 罔僕當年此遯居손수 심은 송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手栽松柏尙存餘알겠네 정자에서 제자 가르치던 때에 應知敎授亭中日날마다 《춘추》 한 책 강론한 것을 日講春秋一部書당시 세상과 사는 거처에 상관없이 不關時世與生居법이 서로 똑같아 부족하거나 남음 없었네 一揆相同無欠餘율리의 맑은 바람과 수양산의 달280) 栗里淸風首陽月열 자의 비석에 성상의 글이 빛나누나281) 螭龜十尺炳宸書생육신 가운데 한 분 生六臣中其一居어계의 충정은 20세 이후부터 닦았다네282) 漁溪忠自念修餘조손이 전후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 祖孫前後難爲地사책(史策)에 편입되어 계속 기록되었네 太史之編相繼書이날 남기신 거처를 직접 보니 身親此日見遺居흡사 가르침을 직접 듣는 듯하네 宛若承聞謦欬餘덕행을 흠모하는 무한한 뜻이 仰止高山無限意전날 책으로만 봤을 때보다 배나 더해지네 倍增前日但看書같은 시대 내 선조도 아주 돌아오셨으니 同時吾祖大歸居스스로 관직 버리고 고부로 온 뒤였네283) 來自投官古阜餘팔판동과 두문동284) 마을 이름 전해 오니 八判杜門傳洞號분명하게 의리의 기록이 모두 적혀있네 班班義錄已幷書 罔僕當年此遯居, 手栽松柏尙存餘.應知敎授亭中日, 日講《春秋》一部書.不關時世與生居, 一揆相同無欠餘.栗里淸風首陽月, 螭龜十尺炳宸書.生六臣中其一居, 漁溪忠自念修餘.祖孫前後難爲地, 太史之編相繼書.身親此日見遺居, 宛若承聞謦欬餘.仰止高山無限意, 倍增前日但看書.同時吾祖大歸居, 來自投官古阜餘.八判、杜門傳洞號, 班班義錄已幷書. 교수정(敎授亭)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정자로,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조승숙(趙承肅)이 1398년(태조7)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의 호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부(敬夫)이다. 1391년(공양왕3) 부여 감무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율리(栗里)의……달 고결(高潔)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이다. 율리는 진(晉)이 망하고 유송(劉宋)이 서자 도잠(陶潛)이 정절(靖節)을 지키고자 은거했던 곳이고, 수양산(首陽山)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곳이다. 열……빛나누나 성종(成宗)이 조승숙(趙承肅)의 청절(淸節)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중에서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여덟 자의 글귀를 뽑아, 자연암반(自然巖盤)에 거북 머리를 조각한 곳에 새겨 넣었다. 어계(漁溪)의……닦았다네 어계는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명인 조려(趙旅, 1420~1489)의 호로, 조승숙(趙承肅)의 후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겨우 26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은둔하였는데, 후세에 이 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 같은……뒤였네 김택술의 선조인 김광서(金光叙, ?~?)가 고려가 망하자 부안(扶安)으로 돌아와 늙은 일을 가리킨다. 《硏經齋集 卷58 羅麗遺民傳》 팔판동(八判洞)과 두문동(杜門洞) 모두 고려의 유신(遺臣)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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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림293)에 대한 노래 孤雲林歌 함양성 북쪽에 십 리 펼쳐진 숲 咸陽城北十里林하늘 덮고 해 가리니 어찌 그리 빽빽한가 蔽天蔭日何蒙密고운이 손수 나무 심은 지 云是孤雲手自栽지금 천여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邇來一千餘歲閱울울창창한 모습 하루 같고 鬱鬱蔥蔥如一日나무 아래엔 더는 뱀과 개미 따위 없으니 樹下更無蛇蟻類당시에 도술 부렸다고 다투어 말하네 爭道當時寓道術가운데 있는 정사는 높고 시원하니 中有亭榭高且敞유람객과 가기들 늘 끊이지 않았네 遊人歌鼓長不絶또 한 가지 이상한 일 있으니 復有一種事異常숲에는 소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네 林中不見松樹一사람들 말하길 고운이 입산하던 날 人言孤雲入山日소나무 보면 내 정히 죽은 것이라 말했다 하네 謂見松樹我定沒근래 한두 그루 간간이 자라니 近有一二間出生고장 사람들 서로 돌아보며 놀라 혀를 차네 居人相顧驚咄咄내가 이 말 듣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我聞此言心未定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더욱 헷갈리누나 其然未然復恍惚무엇보다 이곳은 명류의 유적지라 除是名流遺跡地수목도 외려 사람 위해 애석해하였네 樹木猶爲人愛惜옛 사실을 밝히고 싶지만 누구와 말할까 欲詳故實誰共語한 조각 석비294)가 이끼에 반쯤 매몰됐구나 一片石碑苔半沒 咸陽城北十里林, 蔽天蔭日何蒙密?云是孤雲手自栽, 邇來一千餘歲閱.鬱鬱蔥蔥如一日, 樹下更無蛇蟻類.爭道當時寓道術, 中有亭榭高且敞.遊人歌鼓長不絶, 復有一種事異常.林中不見松樹一, 人言孤雲入山日, 謂見松樹我定沒.近有一二間出生, 居人相顧驚咄咄.我聞此言心未定, 其然未然復恍惚.除是名流遺跡地, 樹木猶爲人愛惜.欲詳故實誰共語? 一片石碑苔半沒. 고운림(孤雲林)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 위치한 숲으로, 상림(上林)을 말한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천령군(天嶺郡) 태수로 부임하였는데, 함양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謂川)이 자주 범람하여 백성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위천 주변으로 둑을 쌓고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하여 홍수를 막게 했다고 한다. 천령군은 경상남도 함양군의 옛 이름이다. 석비(石碑) 상림(上林) 내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신도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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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교관 양 효자 정려기 贈教官粱孝子旌閭記 성상께서 즉위한 지 40년(1764, 영조40) 여름에 본도 유생 최병교(崔秉教)의 등장(等狀)101)에 고 사인 양복문(粱福文)의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를 내려 포장하고 증직과 복호(復戶)102)의 은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등장을 살펴보건대, 효자는 시례를 익힌 저명한 가문에서 집안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지극한 성품과 행실이 일찍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어버이의 병을 시중 들 때 왼쪽 다리 살을 베어 소생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다시 심해지자 또 오른쪽 다리 살을 베어 며칠의 목숨을 연장시켰다. 돌아가시자 슬퍼하여 몸을 훼손한 것이 심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먼 조상을 추모함에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친척과 향리에서 한결같은 말로 탄복하며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마을에서 보고하고 고을에서 추천한 것이 전후로 계속 이어져 구고(九臯)의 학이 울어 소리가 하늘에 들리기까지 하였으니,103) 잠긴 것이 밝게 드러나고104) 어둑하여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105)은 그 이치가 실로 그러한 것이다.나의 거처가 이웃 고을에 있어 익히 들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의 현손 정묵(正黙)과 5세손 재근(在瑾)이 그 일을 기록해 주기를 청하니, 내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聖上卽阼四十年夏。本道儒生崔秉教等。狀報故士人粱福文孝行于朝。以有旌褒贈貤及復戶之典。按狀。孝子以詩禮著族。承襲庭訓。至性至行。夙聞於人。侍親劑。割左肱。得蘇。居無何。疾復劇。又割右股。延數日命。及沒。哀毀過甚。幾於傷生。送終追遠。情文無闕。族戚鄕里。莫不一辭歎賞。村報鄕薦。前後續續。以至於九臯之鶴。聲聞于天。潛昭闇章。其理固然。居在隣壤。稔聞已久。其玄孫正黙五世孫在瑾。請記其事。余不敢以非其人辭。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연명(連名)하여 관부(官府)에 올리는 소장(訴狀)이나 청원서, 진정서를 말한다.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소지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올리지만, 등장은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올린다. 복호(復戶) 충신이나 효자 등에게 조세(租稅)나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구고(九皐)에……하였으니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잠긴……드러나고 《시경》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더라도 또한 매우 밝다.[潜雖伏, 亦孔之昭.]"라고 한 것을 축약한 것이다. 어둑하여……것 《중용장구》 제33장에 "군자의 도는 어둑하여 은은한 가운데 날로 드러난다.[君子之道, 闇然而日章.]"라고 한 것을 축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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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기 海隱記 발굽에 고인 물이나 표주박에 담긴 물로부터 도랑이나 시냇물에 이르기까지 백 갈래 만 갈래 온갖 물줄기들이 가까이 흐르고 멀리 흘러서 서로 모이고, 큰물이 서로 만나 합쳐지고 또 합쳐지며, 쌓이고 또 쌓여 어느 한줄기도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다가 물의 나라가 되는 이유이다.아, 해은(海隱) 조공(趙公)이 출신(出身)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천 리 머나먼 바닷가 모퉁이에서 품었던 생각이 무엇이겠는가? 옛사람 중에 맑은 샘을 보고서 서울을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고91), 우물을 치는 것을 보고 임금이 명철해질 것을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92), 하물며 온갖 냇물이 모여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득히 국중(國中 한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당시 호를 취한 뜻이 단지 평범하게 은거를 뜻하는 것에 비견될 뿐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벼슬에 나아가든 벼슬에서 물러나든 단연코 다른 뜻이 없음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공이 살아계셨을 때에 한번 나아가서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다네."93)라는 몇 곡조에 화답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自蹄涔蠡勺之微。至於溝澮溪澗。百川萬流。遠近相聚。大水相遇。合之又合。積之又積。無一不朝宗於海。此海所以爲水之國也。噫。海隱趙公出身仕路。白首懸車。海隅千里。所懷維何。古人有見洌泉而念京師者。有見渫井而思王明者。況觀乎大海百川朝宗之所。而可無悠悠戀國之心耶。乃知當日取號之意。 非直爲尋常志居之比。而進憂退憂。斷斷無他之意。槩可想矣。恨未及在時一造。以和山有榛數闋。 맑은……있었고 《시경》 〈하천(下泉)〉 에 "차가운 저 하천이여, 우 수북이 자라는 잡초를 잠기게 하도다. 개연히 내 잠 깨어 탄식하니, 저 주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冽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모시서〉에 의하면, 이 시는 주나라 왕실이 쇠망해 감에 따라 작은 나라가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것을 한탄한 것이라 하였다. 우물……있었는데 《주역》 〈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우물을 깨끗이 청소했는데도 먹어 주지 않아서 나의 마음이 안타깝다. 내가 그 물을 길어 줄 수 있으니, 임금이 현명하면 함께 그 복을 받으리라.[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竝受其福.]"라는 말이 있다. 산에는……있다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생각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은 서방 사람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서방의 미인은 서주(西周)의 훌륭한 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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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의 영은동에 이르렀다가 선조 복야부군69)의 유적에 느낌이 일어 삼가 부군이 지은 시에 차운하다 소서를 아울러 기록한다. 到邊山靈隱洞 有感先祖僕射府君遣蹟 謹次府君題詩韻【幷小序】 부군의 시에 "누가 이 절을 지었는가, 숲 아래 흰 머리의 중이라네. 돌샘은 밤낮으로 내리는 비요, 솔 사이 달은 고금을 비추는 등불이라. 지상에는 도솔천이 솟아 있고, 인간 세상에는 무릉도원이 감춰져 있네. 선사와 나 두 늙은이, 높은 누각에 한가로이 기댔다오."라고 하였는데, 시의 격조가 전아하고 중후하며 맑고 깨끗하여 근 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제2연은 국중에 있는 인가의 자제를 위해 학교에서 가르치는 처음 과정이다. 대개 바른 성정이 발로되어 시가 된 것이니 그 덕행을 알 수 있다. 김의는 문정 부군70)의 성대한 도학과 문장을 열어 주셨다. 시는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71) 대체로 이 지역은 실로 부군이 선정을 베풀던 곳으로, 김의의 일이 소백의 감당72)과 같아 후인들이 애석하게 여긴 것인데 하물며 후손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비석을 세우고 정자를 짓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는데, 불행히 후손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지주가 되어 사사로이 매각하였으니 그 사람의 죄를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중에서 매각한 사람을 밉게 본 자들이 모두 환수를 요구하지 않아 공공연히 남의 소유가 되었으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내가 이곳에 이르니, 그저 보이는 것은 숲의 나무를 베어 곳곳마다 숯 구덩이가 있고 그을음이 가득한 모습이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그렇지만 사물은 주인에게 돌아가는 이치가 있고 운수는 반드시 돌아오는 이치가 있으니, 그저 우리 종족이 합심하고 협의하여 성심으로 경영해서 기어코 옛 땅을 회복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에 삼가 시 한 수를 지어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한다. 임오년(1942) 9월 그믐 문정공 시향제(時享祭) 하루 전에 택술은 쓰노라. - 훗날 비석을 세우면 '고려 은청광록대부 우복야 합문지후 김공 유적비'라고 써야 하고, 정자를 세우면 '월천정'이라고 편액을 달아야 할 것이다. 부군의 시 제 2연의 시어를 사용하였데, 이 구절은 주부자의 시73)에 '삼가 천년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을 달이 차가운 물을 비추는 듯하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어느 해던가 영은사에서 何年靈隱寺복야께서 산승을 만난 때가 僕射見山僧아직도 돌샘에는 빗소리 들리고 猶聽石泉雨공연히 솔 사이 달은 등불처럼 남아 있네 空餘松月燈신선 인연은 봉도에 있고 仙緣有蓬島승경은 파릉74)과 같구나 勝狀等巴陵유적 보니 뒤미처 감회가 이는데 遺蹟生追感아득하니 누구에게 기댈거나 蒼茫問孰憑 府君詩曰 '誰創此蘭若 白頭林下僧 石泉日夜雨 松月古今燈 地上聳兜率 人間藏武陵 與師成二老 高閣等間憑' 詩之爲調 典重淸絶 至今近千載 猶膾炙人口 第二聯則 爲國中人家子弟上學初課 蓋性情之正發而爲詩 其德行可知 宜啓文貞府君道學文章之盛也 詩載《輿地勝覽》 蓋此一區 實爲府君憇苃之所 後人愛惜宜同於召伯之甘棠 矧在後承哉 立碑作亭 不容已也 而不幸後裔一人 以己名爲地主 私自賣却 其人之罪 固不可勝言 而宗中之憎視賣却者 幷不徵還 而公然作他人有 亦獨何心 余之到此 但見斫伐林木 在在炭坑 煙煤漲天 可勝歎哉 雖然物有歸主之理 運有必返之天 只在吾宗族同意協論 誠心經紀 期於復舊耳 玆謹賦一詩以記之 壬午九月晦 文貞公歲一祀 前一日澤述識【後日立碑 則當書之曰 '高麗銀靑光祿大夫右僕射閤門祗侯金公遺蹟碑' 作亭 則當扁之曰 '泉月亭' 用府君詩第二聯語 而取朱夫子詩 '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之義】何年靈隱寺, 僕射見山僧?猶聽石泉雨, 空餘松月燈.仙緣有蓬島, 勝狀等巴陵.遺蹟生追感, 蒼茫問孰憑? 복야 부군(僕射府君) 고려 문신인 김의(金宜)를 말한다. 본관은 부령(扶寧)이고, 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우복야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김작신(金作新)의 아들이고,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아버지이다. 문정 부군(文貞府君) 김의(金宜)의 아들인 김구(金坵, 1211~1278)를 말한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시는……있다 이 시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권5상 〈전라도(全羅道) 부안현(扶安縣)〉의 영은암(靈隱菴)을 설명하는 곳에 실려 있다. 소백(召伯)의 감당(甘棠) 주 문왕(周文王) 때 서백(西伯)에 임명된 소공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는 뜻에서 백성들이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 "무성한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그 그늘에 쉬셨던 곳이니라."라고 노래했다 한다. 《詩經 甘棠》 주부자(朱夫子)의 시 주희(朱熹)의 〈재거감흥이십수(齋居感興二十首)〉를 가리킨다. 《晦庵集 卷4》 파릉(巴陵) 중국 호남성(湖南省) 악양(岳陽)을 가리킨다. 이곳에 동정호(洞庭湖)가 있어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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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기 松峯記 능주(綾州)의 송석(松石) 마을에 오봉산(五峯山)이 있고, 오봉산 아래에 나의 벗 송봉(松峰)이 거주하고 있으니, 대체로 거주하는 곳을 표지하여 호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일찍 핀 것이 먼저 시드는 것은 일반적인 만물의 이치이고, 처음엔 부지런하다가 나중엔 나태해지는 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니, 천 리 길을 혹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아홉 길 높이 쌓아올린 산이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무너지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하물며 사람이 늙고 남은 수명이 짧아지면 헛된 욕심이 일어나기 쉽고, 기운이 쇠퇴하고 마음이 약해지면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 어려움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옹(翁)은 지금 52세이니, 젊고 장성했을 때의 화려한 시절은 이미 지난 일에 속하고,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오직 앞으로 남은 쇠잔한 시절일 뿐이다. 이는 뭇 초목들이 봄여름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기다리는 것은 가을날의 서리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옹이 지니고 있는 호가 비록 거처를 표지한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일찍이 한편이나마 현위(弦韋)18)를 뜻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공은 어려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늙어서는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도 다른 사람을 따라 둘러대는 뜻이 없었으니, 청컨대 한 가지 일로 말해보겠다. 나는 옹에게 죽마고우로서 죽고 사는 일이나 기쁘고 슬픈 일을 서로 구제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드나들며 놀고 즐길 때도 서로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서로 바로잡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재산을 경영하고 저축하는 데 서로 관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려서부터 50대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가지 일도 서로 속이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면 다른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한(歲寒)의 약속19)을 부칠 수 있고, 스스로 호로 삼는 바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이것을 써서 송봉기(松峯記)로 삼게나. 綾之松石坊。有五峯峯之下。余友松峰翁居之。蓋志其居而號焉者也。然早發先萎。恒物之理也。始勤終怠。凡人之情也。千里之軔。或廢於半途。九仞之山。多虧於一簣。況人老年促。虛欲易動。氣衰情弱。晩節難持乎。翁今五十有二歲矣。少壯繁華。已屬過境。而坐以待之者。惟是前頭衰颯時節。如衆卉群木。閱春夏許多時。而所待者。秋霜而已。然則翁之有號。雖云志居。而亦未嘗不出於一副弦韋之意也。翁幼而孝弟。老而好義。至於凡百云爲。無有徇人回互底意。請以一事言之。余於翁竹馬舊交也。死生歡戚。無不相求。出入遊衍。無不相從。是非得失。無不相規。財産營畜。無不相關。自幼至老五十年。未嘗見其有一事相欺。推此以觀。其他可知。此可以付歲寒之約。而無愧乎所自號者矣。請書此爲松峯記。 현위(弦韋) 활시위와 다룬 가죽을 말하는 것으로, 팽팽함과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는 성질이 너무 급해 자기의 성질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녔고, 진(晉) 나라 때 동안우(董安于)는 자기의 성질이 너무 느슨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팽팽한 활시위를 차고 다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충하는 자료가 됨을 뜻한다. 《韓非子 觀行》 세한(歲寒)의 약속 만년의 절개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孔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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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소년에 대한 노래 李氏少年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산서308)의 이씨 소년들을 山西李氏諸少年효도하고 공경하며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오309) 孝悌餘力則學文산서의 땅은 비옥하니 山西之土肥而沃아침이면 나가 자신의 밭을 갈고 朝而出耕我田산서의 집은 깊고 조용하니 山西之屋幽而靜저녁이면 돌아와 자신의 책을 읽는다오 暮而歸讀我篇먹을 것 있어 어버이 봉양할 수 있고 有食可以養其親배움이 있어 옛사람을 바랄 수 있다네 有學可以希古人아아 산서리 한 지역은 吁嗟一區山西里흡사 옛날 안풍 마을310)과 비슷하네 宛如昔日安豊村옛날에는 동생 한 사람 뿐이었는데 抑昔董生一而已어찌하여 지금은 동생 같은 무리가 떼로 나왔나 胡今董生輩出羣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서옹311)이 의를 행하여 집안 법도에 영향 준 것을 瑞翁行義貽家謨물 맑고 가지 창달함은 근원과 뿌리 좋아서라네 流淸枝達自源根또 보지 못했는가 又不見시당312)의 인도에 좋은 방법 있는 것을 時堂導率妙有術솔선수범한지 지금까지 십 년이라오 以身先之今十年당대에도 이런 일 있다는 걸 듣지 못했으니 未聞唐代曾有此이씨 가문의 자제들 어진 이 많은 이유라오 所以李門子弟多佳賢내가 노래를 지어 후세에 드날리노니 我作歌行揚今後한창려313)의 대수필이 아닌들 어떠하랴 巨手柰非昌黎韓원컨대 저마다 스스로 더욱 노력한다면 願言各自彌努力몸 세우고 덕 이루어 좋은 명성 전해지리라 立身成德流芳芬 君不見山西李氏諸少年? 孝悌餘力則學文.山西之土肥而沃, 朝而出耕我田.山西之屋幽而靜, 暮而歸讀我篇.有食可以養其親, 有學可以希古人.吁嗟一區山西里, 宛如昔日安豊村.抑昔董生一而已, 胡今董生輩出羣?君不見瑞翁行義貽家謨? 流淸枝達自源根.又不見時堂導率妙有術? 以身先之今十年.未聞唐代曾有此, 所以李門子弟多佳賢.我作歌行揚今後, 巨手柰非昌黎韓?願言各自彌努力, 立身成德流芳芬. 산서(山西) 전라북도 남원(南原)에 소재한 마을 이름이다. 효도하고……배운다오 《논어》 〈학이(學而)〉에 "자제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는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안풍(安豊) 마을 중국 수주(壽州)의 속현(屬縣)이다. 당(唐)나라 때 안풍 사람 동소남(董卲南)이 몇 차례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하여 주경야독하면서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모셨는데, 동시대의 문장가인 한유(韓愈)가 그를 칭송한 글인 〈동생행(董生行)〉이 《소학(小學)》〈선행(善行)〉에 실려 있다. 서옹(瑞翁) 누구인지 미상이나, 문맥상 산서(山西)에 사는 이씨의 선조인 듯하다. 시당(時堂) 이교익(李喬翼, 1830~1890)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858년(철종9)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한창려(韓昌黎) 〈동생행(董生行)〉을 지은 한유(韓愈)를 말한다. 창려는 그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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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조 명은공295) 수민 의 유고를 읽다 讀族祖明隱公【壽民】遺稿 명은의 기절이 온 천하를 덮으니 明隱氣節蓋九州명은 두 자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오 明隱二字足可知명나라 망한 지 벌써 이백 년이니 明亡已爲二百載명나라에 숨고자 하나 장차 어디로 갈까 欲隱於明將何之공의 마음은 천지처럼 광대하여 吾心廣大如天地일찍 존화양이의 의리296)에 종사하였네 早事尊攘華與夷본래 마음속에 대명국이 있었으니 自有心中大明國어찌 신주297)의 산하에서만 그러하랴 何獨神州河山爲선대를 추증하는 고명이 내려온 날 先世贈誥命下日위호를 받지 않고 굳게 지조 지켰네298) 不受僞號堅執持우리 김씨는 대대로 주나라를 높혔으니 吾金世世尊周家이 임명장은 사당에 들어갈 수 없었네 此紙無以入廟祠찬란하게 숭정이라고 특별히 썼으니 特書煌煌崇禎地천추를 밝게 비춰 길이 할 말이 있게 되었네 輝映千秋永有辭박학하고 뛰어난 글솜씨는 적수가 드물었고 博學雄文罕敵手천인 성명의 은미한 이치를 궁구하였네 天人性命究厥微평생 공부한 《춘추》의 엄정한 의리를 平生春秋嚴正義〈내성지〉299)에서 살짝 볼 수 있다오 柰城誌中一斑窺아아 그 포부가 이와 같은데 嗚呼抱負有如此초막에서 늙어 죽은 것은 어째서인가 老死蓬蓽胡然而조정의 관로 세계를 한번 봐 보게 請看朝著仕路界혼탁하고 어지러워 술지게미 진흙 뒤섞였다오 泯泯棼棼混糟泥어찌하여 자신의 강대한 기운을 굽히고 安能屈我剛大氣떼지어 몰려다니며 굶주림만 구제하는가 隨羣逐隊但救飢아정(雅正)한 유서가 책 상자에 가득하니 遺書爾雅滿箱架세상과 백성 구제하는 방법 모두 여기에 있네 淑世澤民都在斯어찌 이 글을 세상에 널리 알려서 盍將此篇公諸世우리 유림에 보관하고 집집마다 간직하지 않으랴 奉弆吾林家家丌 明隱氣節蓋九州, 明隱二字足可知.明亡已爲二百載, 欲隱於明將何之?吾心廣大如天地, 早事尊攘華與夷.自有心中大明國, 何獨神州河山爲?先世贈誥命下日, 不受僞號堅執持.吾金世世尊周家, 此紙無以入廟祠.特書煌煌崇禎地, 輝映千秋永有辭.博學雄文罕敵手, 天人性命究厥微.平生《春秋》嚴正義, 《柰城誌》中一斑窺.嗚呼抱負有如此, 老死蓬蓽胡然而?請看朝著仕路界, 泯泯棼棼混糟泥.安能屈我剛大氣, 隨羣逐隊但救飢?遺書爾雅滿箱架, 淑世澤民都在斯.盍將此篇公諸世? 奉弆吾林家家丌. 명은공(明隱公) 김수민(金壽民, 1734~1811)으로,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제옹(濟翁), 호는 명은(明隱)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수학하였고,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하였다. 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저서에 《명은집》이 있다.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한족이 세운 중국의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오랑캐 민족인 청(淸)나라를 물리친다는 말이다. 신주(神州) 중국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추연(騶衍)이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선대를……지켰네 김수민(金壽民)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충절이 있는 사람 7인을 조정에 상언(上言)하자 성상이 가납(嘉納)하여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이때 으레 쓰던 방식으로 청인(淸人)의 연호를 썼다. 그러자 김수민이 개연하여 청인의 연호를 쓴 임명장을 선조에 고할 수 없다 하여 받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숭정기원(崇禎紀元)'이라고 특별히 쓰도록 명하였다. 《惕齋集 卷9 明隱金君墓誌銘》 내성지(柰城誌) 김수민(金壽民)의 《명은집》 권18에 실린 글로, 단종(端宗)과 명나라 건문(建文) 황제의 역사적 사건을 비판적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춘추 의리에 바탕을 둔 역사적 인물들의 잘잘못을 가려 민족의 자존 의식을 높인 문학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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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조 습정공300) 한충 의 유고를 읽다 讀族祖習靜公【漢忠】遺稿 남원(南原)의 산수 기운이 帶方山水氣모여서 습정공을 낳았네 鍾生習靜公마음은 의리의 길과 통하고 心通義理路성품은 강직한 풍모 지녔네 性帶剛直風천 리 머나먼 한강 가 千里漢之上매산(梅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네 就正梅門中세도가 날로 변하여 世道日以變향사 올리던 만동묘301)를 철거하였네 廟享撤萬東아아 잊을 수 없어라 於虖不可忘신종과 의종 두 분이여 神毅有兩宗하물며 이는 의리에 근거해 예를 제정한 것이니 矧玆義起禮우재옹302)에게서 나온 것이라네 出自尤齋翁이 일은 게다가 사문과 관계되니 事又係斯文초야의 선비들 어찌 입 닫고 귀 닫을까 韋布豈啞聾곧 나라의 선비들을 창도하여 乃倡國中士좋은 계책을 구중궁궐에 올렸네 琅玕呈九重어찌 생각했으랴 임금께서 들어주지 않고 豈料邈荃聽대궐에서 견책이 내려올 줄을 譴責降天門머나먼 초나라 산중에서 逖矣楚山中〈복조부〉303) 읊은 지 5년이라네 賦鵬五經年대로304)의 수제자였고 大老首弟子두 황조의 한 충신이었네 兩皇一忠臣조야에서 공공연히 칭송하였으니 朝野公共誦백대 기다리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혹 없으리305) 百世質鬼神일에 도움 되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 莫曰事無補그저 대의를 보존한 것이라네 而但大義存훗날 다시 제향하는 날 後來復享日이 상소가 원인이 되리라 此疏爲原因만약 그 공로를 논한다면 苟可論厥功공이 실로 으뜸을 차지하리라 公實居首先아 나는 너무 늦게 태어나 嗟余生太晩직접 얼굴을 뵙지 못했네 未及拜承顔이제 남긴 글을 읽노라니 今來讀遺文흉중이 탁 트여 맑구나 豁然淸心肝만약 조정에 서게 한다면 如使立人朝어찌 이 같은 반열에 그치랴 豈止若是班임금의 덕에 흠이 있을 때는 時當君德闕장유306)처럼 간쟁하였고 長孺非別人위태롭고 망하려던 때는 時當危亡際문산307)처럼 행동하였지 文山卽其身같은 시대를 산 비평가들은 幷世月朝家이러한 뜻을 자세히 논하리라 此意合詳論 帶方山水氣, 鍾生習靜公.心通義理路, 性帶剛直風.千里漢之上, 就正梅門中.世道日以變, 廟享撤萬東.於虖不可忘, 神毅有兩宗.矧玆義起禮, 出自尤齋翁.事又係斯文, 韋布豈啞聾?乃倡國中士, 琅玕呈九重.豈料邈荃聽, 譴責降天門?逖矣楚山中, 賦鵬五經年.大老首弟子, 兩皇一忠臣.朝野公共誦, 百世質鬼神.莫曰事無補, 而但大義存.後來復享日, 此疏爲原因.苟可論厥功, 公實居首先.嗟余生太晩, 未及拜承顔.今來讀遺文, 豁然淸心肝.如使立人朝, 豈止若是班?時當君德闕, 長孺非別人.時當危亡際, 文山卽其身.幷世月朝家, 此意合詳論. 습정공(習靜公) 김한충(金漢忠, 1801~1873)으로, 자는 효백(孝白), 호는 습정(習靜)이다.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자, 〈만동묘를 다시 제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請萬東廟復享疏]〉를 올렸고, 이 일로 인해 이듬해에 평안북도 초산(楚山)으로 귀양을 가서 1870년에 사면되었다. 저서에 《습정재선생유고》가 있다.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明)나라의 의종(毅宗)과 마지막 황제인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유명을 받아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1704년(숙종30)에 현재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웠다. 그러다가 1865년(고종2)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을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11)에 다시 세웠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우재옹(尤齋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복조부(鵩鳥賦)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을 때 복조(鵩鳥)가 지붕 위에 날아와 모였는데, 당시 민간에 전하는 말로는 복조가 지붕에 앉으면 그 집 주인이 죽는다고 하였으므로, 가의가 슬퍼하여 〈복조부〉를 지었다고 한다. 《史記 賈生列傳》 대로(大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을 가리킨다. 백대……없으리 진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중용장구》 제29장에 "군자의 도는……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으며, 백대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하지 않는다.[君子之道……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장유(長孺)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신하인 급암(汲黯)의 자이다. 그는 간쟁을 서슴지 않아 무제로부터 '사직지신(社稷之臣)'이란 칭찬을 받았다. 《史記 汲黯列傳》 문산(文山) 남송(南宋)의 정치가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남송이 원(元)나라에 항복하자, 1276년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된 뒤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나라에 대항하다가 1278년에 사로잡혀 시시(柴市)에서 처형되었다.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宋史 文天祥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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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기 三坡記 이릉(爾陵)114)의 치소 북쪽 10리에 백암(白巖)이 있는데 대개 이름난 마을이다. 물이 동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의 천만 갈래 물길이 여기에 이르러 합해져 앞에서 멈추어 고이고, 산이 서북쪽으로부터 뻗어 오는 것의 천만 봉우리가 여기에 이르러 그쳐서 좌우로 나열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면서 시원하고, 주위를 둘러싸면서도 넓고 평평하여 이미 이름하여 형상할 수 없다. 북쪽에는 상좌봉(上座峰), 남쪽에는 발우봉(拔尤峰), 서쪽에는 응봉(鷹峯)이 있어 셋으로 나열하여 정치(鼎峙)하고 있으니, 마치 거인(鉅人)과 장덕(長德)이 밝은 거울과 그림 병풍 사이에 서로 마주하여 함께 인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개 백암은 이릉의 빼어난 승경이고, 이 삼봉은 또 백암의 승경이다.나의 벗 삼파자(三坡子)는 이곳에 세거하여 그대로 호로 삼았다. 그러나 '봉(峰)'이라 하지 않고 '파(坡)'라고 하였으니, 또한 설명할 것이 있는가? '봉'은 높은 것이고 '파'는 낮은 것이니, 외면의 이름은 낮게 하려고 하고 내면으로 힘쓰는 실상은 높게 하려고 한다. 하늘의 높음으로 산보다 낮은 것이 축(畜)이 되고,115) 산의 높음으로 땅보다 낮은 것이 겸(謙)이 되니,116) 지금 외면으로는 파이고 내면으로는 산인 것은 또한 어찌 겸손하고 겸손한 대축(大畜)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바로 군자가 경금(褧錦)117)하는 제일의 법이니, 내 알건대 삼파(三坡)의 봉(峯)은 반드시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118)과 더불어 그 높이를 같이하고 한 지방의 빼어난 승경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爾陵治北十里有白巖。盖名村也。水之自東南來者。千派萬流。至此而合。渟滀於前。山之自西北來者。千峯萬峀。至此而止。羅列於左右。幽深而軒敝。周遭而廣平。已不可名狀。北有上座。南有拔尤。西有鷹峯。參列鼎峙。如鉅人長德。相對拱揖於明鏡畫屏之間。盖白巖爾陵之選勝。三峯又白巖之選勝也。余友三坡子。世居於此。因以號焉。然不曰峰而曰坡。抑有說耶。峯高者也。坡下者也。名之在於外者。欲其下。實之務於內者。欲其高。以天之高而下於山則爲畜。以山之高而下於地則爲謙。今外坡而內山。亦豈非謙謙大畜之義耶。此是君子褧錦第一法。吾知三坡之峯。必得與魏升卿五千仞。同其高。而不止爲一方之選勝也。 이릉(爾陵) 이릉부리현(爾陵夫里縣)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이다. 하늘의……되고 산천대축(山天大畜)의 《주역》 〈대축괘(大蓄卦)〉 형상을 말한다. 산의……되니 지산겸(地山謙)의 《주역》 〈겸괘(謙卦)〉 형상을 말한다. 경금(褧錦) 비단 옷 위에 다시 홑옷을 덧입어서 화려함을 감춘다는 뜻으로,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에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홑옷을 덧입었다.[衣錦褧衣]"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위승경(魏升卿)의 오천 길 잠삼(岑參)의 시 〈위승경을 전송하며[送魏升卿]〉에 "그대는 삼봉이 곧장 오천 길을 올라간 것을 보지 못했겠지만, 군의 문장을 보건대 또한 이와 같네.[君不見三峰直上五千仞, 見君文章亦如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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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암기 土庵記 토암옹(土庵翁)은 이름이 학(㙾)이고, 자가 자술(子述)이니, 이는 대체로 선친 겸와공(謙窩公)께서 개미 새끼들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어 명명함으로써 부지런히 힘써서 성취를 이루게 한 것이다. 옹은 평소에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수용하여 행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 노쇠하여 혹 실추시키게 될까 염려하다가 마침내 '토(土)' 자로 암자의 이름을 짓고 항상 눈앞에 두고 돌아보면서 경계하는 계책으로 삼았다무릇 때때로 익히는 것은 징험할 길이 없지만, 흙을 쌓는 것은 자취가 있으니, 쌓인 흙의 많고 적음을 보고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알 수 있다. 아, 행실을 보면 그 상서로움을 알 수 있고, 일을 부과하면 반드시 그 공적을 바쳐야 하는데, 이는 몽사(濛汜)로 해가 저물어 갈 때20)에 마지막 결말을 지어 천지 부모(天地父母)와 교환하는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주부자(朱夫子)는 시에서 이르기를, "무두질한 가죽을 차서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고, 나무가 뿌리를 감추는 듯 행하여 스승의 전수(傳受)를 삼가 받드네.21)"하였다. 또 침상에는 '위(韋)' 자를 써 놓고, 서재에는 '회(晦)' 자를 걸어 놓고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옹의 뜻도 이러한 데에 근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土庵翁名㙾字子述。蓋其考謙窩公。以蛾子述學含土之事。擧而命之。俾其有勤苦作成也。翁平日服膺而受肘焉。及其晩年。恐慮衰而或失墜也。遂以土名庵。爲常目顧警之計。夫時迷無徵。累土有跡。視累土之多寡。而其勤慢可知也。嗚乎。視履可考其祥。賦事必獻其功。此在濛汜殘景。所以爲究竟結杪。而交還於天地父母者。其意豈偶然哉。朱夫子詩曰。佩韋遵考訓。晦木謹師傳。又題韋於寢。揭晦於齋。以寓終身之慕。翁之意。其亦有本於此云爾。 몽사(濛汜)로……때 인생의 노년을 비유한다. 몽사는 해가 지는 곳인데,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해가 부상(扶桑)에서 떠올라 몽사로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두질한……받드네 주희(朱熹)가 만년에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고정서원(考亭書院)에 적어 놓은 것이다. 앞의 구(句)는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이 "조급한 성질이 도를 해친다."라고 스스로 경계하여 자신의 호를 '위제(韋齋)'라고 한 가르침을 이어 따를 것을 다짐한 것이다. 위(韋)는 무두질하여 부드럽게 만든 소가죽을 이르는데, 전국(戰國) 시대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 이것을 차고 다니면서 느긋하게 처신했다는 고사가 전해지며, 예로부터 성급한 자들이 이것을 차고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뒤의 구는 주희의 스승 유자휘(劉子翬)가 주자에게 전수해 준 "나무는 뿌리를 잘 감추어야 봄에 잎이 무성하게 피고, 사람은 몸을 잘 감추어야 정신이 안에서 살찌는 것이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는 가르침을 삼갈 것을 다짐한 것이다. 주자가 자로 삼은 원회(元晦)ㆍ중회(仲晦)와 호로 삼은 회암(晦菴)ㆍ회옹(晦翁)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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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봉321) 창렬 을 애도하다 悼崔華峯【滄烈】 깊은 산에 자취 감추고 구산322) 문하에서 배웠으니 跡晦雲山學臼門평생토록 의를 행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네 生平行義出流羣중년에 횡역 만남은 일신의 운세와 관계 있고 中經橫逆關身運늙어서는 참된 공부 배가 되어 도의 근원 찾았네 老倍眞工覓道源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배워 정의 잊기 어려운데 同座春風難忘誼그대 떠난 텅 빈 집에서 이날 무슨 말을 하랴 虛堂此日那堪言계수나무 숲에는 밤마다 늘 달이 걸렸는데 桂林夜夜長懸月초은323)의 노랫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구나 招隱歌聲更不聞 跡晦雲山學臼門, 生平行義出流羣.中經橫逆關身運, 老倍眞工覓道源.同座春風難忘誼, 虛堂此日那堪言?桂林夜夜長懸月, 招隱歌聲更不聞. 최화봉(崔華峯) 최창렬(崔滄烈, 1877~1940)로, 화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회경(晦卿)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농산(農山) 신득구(申得求)에게서 수학하였고 그가 죽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 입문하였다.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등과 교류하였다. 많은 초고를 남겼으나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화봉유고(華峯遺稿)》 2책만 전한다. 구산(臼山)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또 다른 호이다. 초은(招隱) 한(漢)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에게 초빙된 인사들 가운데 소산(小山)이라고 일컫던 이들이 굴원(屈原)의 고사에 감동한 나머지 지은 〈초은사(招隱士)〉라는 시부(詩賦)를 말한다. 그 첫 행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네.[桂樹叢生兮山之幽.]"라고 하였다. 《楚辭 卷8 招隱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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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송331)의 '《주역》을 읽고 우연히 짓다' 시에 차운하다 次林砥松讀易偶成 대역만을 공부하고 온갖 것들 제거하니 專門大易百爲除지송 노인의 근면한 공부 세상에 짝할 이 없네 砥老勤工世莫如사변상점332)의 현묘한 이치가 담겨 있고 辭變象占玄妙理희문주공333)의 성스럽고 신묘한 책이라네 羲文周孔聖神書강절은 수를 추산하매334) 일찍이 흠이 없었고 數推康節曾無欠이천은 도를 말하매335) 또한 여유가 있었네 道說伊川亦有餘그래도 깊이 계합함은 오직 본의336)로 귀결되니 深契惟應歸本義그 가운데 참된 즐거움을 누가 알겠는가 箇中眞樂孰知歟 專門《大易》百爲除, 砥老勤工世莫如.辭、變、象、占玄妙理, 羲、文、周、孔聖神書.數推康節曾無欠, 道說伊川亦有餘.深契惟應歸本義, 箇中眞樂孰知歟? 임지송(林砥松) 임장우(林章佑)이다. 전우(田愚)의 《간재집(艮齋集)》에 그에게 보내거나 답한 편지가 다수 실려 있다. 사변상점(辭變象占) '상기사(尙其辭)', '상기변(尙其變)', '상기상(尙其象)', '상기점(尙其占)'을 줄여서 한 말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에는 성인의 도가 네 가지 있다. 역을 가지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자는 그 언사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음양 변화를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자는 역의 상을 숭상해야 하고, 역을 가지고 미래를 점치려는 자는 그 점괘를 숭상해야 한다.[易有聖人之道四焉. 以言者尙其辭, 以動者尙其變, 以制器者尙其象, 以卜筮者尙其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희문주공(羲文周孔) 《주역》을 완성한 복희(伏羲),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줄임말이다. 《주역회통(周易會通)》 범례(凡例)에 의하면, 복희씨는 괘획(卦畫)을 그었고, 문왕은 괘사(卦辭)를 지었고, 주공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는 십익전(十翼傳)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절(康節)은 수를 추산하매 강절은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이다. 《주역》에 정통하여서, 역전(易傳)에 근거해 팔괘(八卦)를 해석하였고, 도가 사상을 참고해 '상수지학(象數之學)'을 개창하였다. 이천(伊川)은 도를 말하매 이천은 송나라 학자 정이(程頤)이다. 의리(義理)를 위주로 《주역》을 주해(註解)하여 《이천역전(伊川易傳)》을 지었다. 본의(本義) 주희(朱熹)가 《주역》의 점사(占辭)를 위주로 설명한 《주역본의(周易本義)》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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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화대기 望華臺記 사람은 지극히 정든 곳에 대해 그곳을 떠나게 되면 그리워함이 없을 수 없고, 그리워하면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 중에 언덕에 올라 부모님이 계신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고94), 높은 산에 올라 군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며, 개암나무와 감초를 노래하며 미인(美人)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으니95), 이것은 인정상 그칠 수 없는 것이다.운암(雲巖) 어른은 사문(斯文)의 훌륭한 유학자이자 성대한 조정의 저명한 관리로서 명성과 덕망을 한 몸에 받아 조정과 재야에서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는데,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홀연히 수레를 돌려 만 길 높이 흩날리는 속세 밖으로 멀리 떠나 10 묘(畝)의 농토 사이에서 한가로이 소요하며 편안히 지냈다. 하지만, 오직 진심어린 단심(丹心)으로 그리워하며 해[임금]를 향한 정성스런 마음만은 막을 수 없었기에 마침내 집 옆에 있는 산 정상의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에 하나의 대(臺)를 축조하고 한가한 날에 올라 서울을 우러러 바라보는 장소로 삼았다.아, 문정(文正)은 강호로 물러나 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였고96), 횡거(橫渠)는 명아주와 콩잎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였으니97), 이는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동서양의 나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에 대한 생각98)을 그만둘 수 없는 지금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알지 못하겠지만, 어른께서 대에 올라 서울을 향해 바라보는 날에 과연 어떠한 감회에 젖어 들었을까? 천고토록 다 없어지지 않을 슬픔에 반드시 노래하고 통곡하더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아, 서산(西山)99)은 어디이며, 동해(東海)100)는 어느 곳인가? 구름이 깔리고 달이 밝은 산중의 망화대(望華臺)의 한 구역을 어느 누가 오늘날의 서산이 아니며, 동해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入於至情之地。離之則不能無思焉。思之則不能無望焉。古人有陟岵屺而望父母。陟崔嵬而望君子。歌榛苓而望美人。此人情之所不能已也。雲巖丈人。以斯文偉儒。熙朝名宦。聲望期注。朝野拭目。及其時事一變。而幡然回轍。乃遠引遐舉於萬丈軟塵之外。而棲遲偃仰於十畝農圃之間也。惟是赤際丹心戀戀向日之誠。遏住不得。遂就舍傍山頂可舒遠眺處。占築一臺。以爲間日登臨瞻望京華之所。嗚乎。文正江湖之憂。橫渠藜藿之戀。此在平時而猶然。況今東塵西氛。瀰漫天地。而匪風下泉之思。有不可已。未知丈人臨望之日。果作如何懷緖也。其千古不盡之悲。必有非歌哭可足者。噫。西山何地。東海何處。雲月山中一區望華臺。誰謂非今日之西山東海也耶。 언덕에…… 있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로, 《시경》 〈척호(陟岵)〉에 "저 산에 올라서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저 민둥산에 올라서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陟彼岵兮, 瞻望父兮.……陟彼屺兮, 瞻望母兮.]"라고 하였다. 개암나무와……있었으니 미인(美人)은 훌륭한 임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도다. 누구를 생각하는가, 저 미인은 서방 사람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문정(文正)은……걱정하였고 문정은 북송 초기의 명재상이자 문장가였던 범중엄(范仲淹)의 시호이다. 범중엄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의 높은 곳에 처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에 처하면 군주를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라는 말이 보인다. 《范文正公集 卷7 岳陽樓記》 횡거(橫渠)는……그리워하였으니 횡거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그는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안석(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신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며 자신을 등용하고자 했던 신종(神宗)을 염려하였다. 비풍(匪風)과……생각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은 《시경》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의 편명으로, 모두 주(周)나라의 왕업이 쇠망해 가는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외세로 인해 점차 쇠망해가는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염려를 말한다. 서산(西山)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했던 수양산(首陽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백이ㆍ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으려 할 적에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에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구나.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문득 없어졌으니 나는 누구를 의지해서 돌아가야 하나. 아아, 가야지. 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兮. 以暴易暴兮, 不知其非兮.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兮. 於嗟徂兮, 命之衰矣.]"라는 내용이 보인다. 동해(東海) 전국 시대 제(齊)나라  의사(義士)였던 노중련(魯仲連)이 절개를 지켜 빠져 죽고자 했던 동해(東海)를 가리키는 듯하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서 위(魏)나라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제국(帝國)으로 섬긴다면 포위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저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천자가 된다면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은 되지 못하겠다고 한 고사가 전해진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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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 영모재 중수기 具氏永慕齋重修記 죽수(竹樹)106)의 동쪽 연주산(聯珠山)은 고 평장사 구공(具公)의 묘소가 있는 곳이고, 산 아래에 날개를 펼친 듯 운림(雲林)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손들의 영모재(永慕齋)이다. 대개 상재(桑梓)의 생각107)과 상로(霜露)의 감회108)를 깃들이고, 노래하고 곡하며 종족을 모으는 장소로 삼았으니, 마치 진씨(甄氏)의 사정(思亭)109)과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110)과 같았다. 오직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무궁하다면 이 재사 또한 장차 자손과 더불어 시종 함께 할 것이니 다르게 보아서는 불가하다. 이 때문에 전후로 수백 년 동안 무너지는 대로 수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후손 본수(本修)가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생각을 내어 도모가 여러 종친에게 미쳤는데, 모모가 그 일을 주관하고 모는 그 재정을 담당하고 모모는 그 일을 감독하여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5개월 만에 공사가 끝났다. 기울어진 것은 바로 세우고 느슨해진 것은 견고하게 하고 세월이 흘러 퇴색 된 것은 깨끗하게 새롭게 하여, 청(廳)·당(堂)·문(門)·무(廡)가 환하게 모습을 바꾸었으니, 《서경》의 이른바 "긍구긍당(肯構肯堂)"111)과 《시경》의 이른바 "사속비조(似續妣祖)"112)를 모두 볼 수 있다.오호라! 고심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애써 주선하여 여기에 이른 것은 단지 조석으로 첨모(瞻慕)하여 저존(著存)의 정성113)을 지극하게 하고 밤낮으로 강론하고 수양하여 계술(繼述)할 방범을 궁구하여 안으로는 집안의 기대가 되고 밖으로는 나라의 빛이 되는 것이니, 이 재사에 노니는 사람은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竹樹之東。聯珠之山。故平章事具公衣履之藏。山下翼然。在雲林之端。卽其子孫永慕之齋也。盖以寓桑梓之思。霜露之感。而爲歌哭聚族之地。如甄氏之思亭。黃氏之望考亭也。惟是慕先之心爲無窮已。則此室亦將與子孫相終始。而不可以差殊觀也。是以前後數百年。隨敝隨補。非止一再。後孫本修。慨然發慮。謀及諸宗。某某尸其事。某掌其財。某某董其役。首尾五朔。功役告訖。傾側者峻直。縱弛者鞏固。漫漶者鮮新。廳堂門廡。煥然改觀。書所謂肯構肯堂。詩所謂似續妣祖。皆可見。嗚乎。苦心血力。拮据至此者。只是朝夕瞻慕以致著存之誠。夙夜講修以究繼述之方。內以爲門戶之望。外以爲邦國之光。遊此室者。盍相勉焉。 죽수(竹樹)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의 옛 이름이다. 상재(桑梓)의 생각 부모가 살던 고향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로(霜露)의 감회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슬퍼하며 사모한다는 뜻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진씨(甄氏)의 사정(思亭) 송(宋)나라 때 진씨(甄氏) 집안의 사람인 진군(甄君)의 정자인데,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를 가리킨다. 진씨 집안은 원래 서주(徐州)의 부호였는데, 진군 때에 이르러 집안이 가난해졌다. 이에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형편이라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영구(靈柩)를 여럿 마련하여 함께 장사 지내고 무덤가에 집을 지었다. 그러자 당시 문장가인 진사도(陳師道)가 그 내력과 조상을 사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정기(思亭記)〉를 지었다. 황씨(黃氏)의 망고정(望考亭) 오대(五代) 남당(南唐) 때 황자릉(黃子稜)이 아버지의 무덤을 멀리 바라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긍구긍당(肯構肯堂)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다.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만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그 규모를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의 터도 마련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당을 짓고자 하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사속비조(似續妣祖) 자손이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저존(著存)의 정성 돌아가신 어버이에 대해 사랑과 정성을 다 들이면 살아 계신 듯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공경히 제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후손이 조상에 대하여 "사랑을 다하면 혼령이 보존되고, 정성을 다하면 혼령이 드러난다.[致愛則存, 致慤則著.]"라는 말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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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헌기 瑞軒記 남쪽 지방의 산 가운데 혹 서석산(瑞石山)119)보다 큰 것이 있겠지만 그 모습의 단엄(端嚴)함과 기상의 명수(明秀)함은 마치 대인 장자(大人長者)가 높이 공수하여 우두커니 서 있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서석산이 실로 제일이다. 옛날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120)께서 이 산을 가장 사랑하여 소싯적에 유람해 보았고 만년에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바라보았으니, 대개 천지의 정대한 기상은 사람과 산이 차이가 없다.오호라! 하늘이 돌보지 않아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뒤에 태어나 늦게 배운 사람이 갈팡질팡하여 귀의할 곳이 없는데, 당시 첨앙하던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서석산만 존재하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한 목숨이 유랑하다 궁벽한 곳에 머물러 노쇠함과 병이 침범하여 문을 닫고 세상을 사절하다보니, 드디어 이 산과 아울러 모두 잃게 되었다.안군(安君) 공삼(公三)121)은 상서로운 사람이다. 이 산의 끝에 살면서 이 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그 전 면목을 안석과 뜰 사이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고, 심지어 기거하며 출입하고 주선하며 돌아보는 사이에도 단엄 명수한 기상이 아님이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숭악(崧岳)의 준천(峻天)은 길보(吉甫)를 찬미하기 위한 것122)이고, 태산(泰山)의 암암(巖巖)함은 자여(子輿)를 찬미하기 위한 것123)이네. 군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또한 선생의 문도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산을 보고 뒤미처 상상함에 광감(曠感)124)한 마음이 없겠는가.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사랑하고 선생께서 마주하시던 것을 마주하면 그 기상과 체덕(體德)이 말씀으로 가르치던 것 보다 친절한 것이 어찌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의 뒤에 있겠는가. 군은 그칠 곳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네. 내 비록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행차를 준비하여 그대를 따라 서헌에 올라 늦게 태어나 사모하면서도 우러르지 못한 무궁한 회포를 위안 받으려 하네. 南方之山。或有大於瑞石者。而若其體容端嚴。氣象明秀。如大人長者。高拱凝立。使人仰止而不敢慢焉。則瑞石固第一也。昔我蘆沙先生。最愛此山。少時杖屨及焉。晚年築室相對之地。朝夕贍望。盖天地正大之氣。人與山不異也。鳴乎。昊天不弔。泰山已頹。後生晚進。倀倀靡歸。而可以寓當日瞻仰之餘者。惟是瑞石獨存。顧此賤命。流泊僻左。衰病侵尋。杜門謝世。遂幷與此山而失之。安君公三瑞人也。居山之趾。而對山之面。使其全幅無不呈露於几席庭。石之間。以至起居出入。周旋顧眄。無非是端嚴明秀之象。此軒之所以爲瑞者歟。然崧岳峻天。所以美吉甫也。泰山巖巖。所以贊子輿也。君雖不及先生之門。亦不可謂非先生之徒。則見此山而豈無追想曠感者乎。愛先生之所愛。對先生之所對。其氣象體德。所以親切於言語之外者。豈惟不在於及門者之後而已哉。君可謂知所止矣。吾雖病。將一理巾屐。從子登軒。以慰晚慕靡仰無窮之懷云爾。 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안군(安君) 공삼(公三)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을 말한다. 자는 공삼,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숭악(崧岳)의……것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 시는 선왕(宣王)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나가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윤길보(尹吉甫)가 시(詩)를 지어 그를 전송한 것이다. 길보를 찬미한 것이라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태산(泰山)의……것 《근사록》 권14 〈관성현(觀聖賢)〉에서 정자(程子)가 "공자는 천지와 같고, 안자는 온화한 바람, 상서로운 구름과 같으며, 맹자는 태산에 바위가 중첩하듯 우뚝한 기상이다.[仲尼天地也, 顔子和風慶雲也, 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여(子輿)는 맹자의 자이다. 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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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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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성헌기 省野記 성(性)은 실로 동일하여 사람에게 보존 된 것 또한 그다지 서로 멀지 않다. 그러나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의 나뉨과 길흉화복(吉凶禍福) 성패존망(成敗存亡)의 자취는 천차만별이어서 끝이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대개 호리(毫釐)의 즈음에 향배(向背)의 기미는 단지 성찰함과 성찰하지 못함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제순(帝舜)께서는 대성(大聖)인데도 자주 성찰하라는 경계를 받았고,125) 증자(曾子)는 대현(大賢)인데도 삼성(三省)126)의 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 보다 못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성(省)'이라는 한 글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사용하는 제일의 참 진리여서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불가한 것이다.나의 벗 오군(吳君) 영지(永之)127)가 문미에 붙일 만한 한 마디를 청하였다. 영지는 지사(志士)인지라, 그 뜻은 반드시 보통 바라보려는 계획에 있지 않을 것이니, 표시하여 새겨서 항상 바라보는 것의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어찌 이것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단목씨(端木氏)의 서(恕)128)와 원성공(元城公)의 성(誠)129)과 더불어 전후로 일자부(一字符)가 되고 종신토록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몽매하여 의리에 의심스러움이 있으면 비록 스스로 성찰하려고 해도 그 방법은 말미암을 것이 없을 것이다. 원컨대 영지는 독서하여 궁구하는 공부를 더욱 더하여 시비(是非)와 진망(眞妄)으로 하여금 구분되는 것이 있게 하면 성찰하는 공부를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심술(心術) 염려(念慮)의 은미함과 용모(容貌) 위의(威儀)의 사이와 사물(事物) 응접(應接)의 즈음에 무엇인들 내가 마땅히 성찰해야할 곳이 아니겠는가. 어느 곳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인들 그러하지 않음이 없어 흠뻑 젖어들어 융화되어 날마다 원대함을 궁구하면 문미 끝의 한 '성' 자가 순임금의'누성(屢省)'과 증자의 '삼성(三省)'을 이어서 이 세상에 명성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性固一也。而其存乎人者。亦不甚相遠也。然而知愚賢不肖之分。吉凶禍福成敗存亡之跡。千差萬別。有不可紀極者何歟。蓋其毫釐之際。向背之幾。只在於省不省如何耳。帝舜以大聖而有屢省之戒。曾子以大賢而有三省之語。況其下者乎。然則省一字。是人生日用第一眞詮。而不可斯須去身者也。余友吳君永之。請一語可以鎭楣者。永之志士也。其意必不在於尋常觀瞻之計。所以標銘而爲常目之要者。豈有以加於此者哉。可與端木氏之恕。元城公之誠。前後爲一字符。而有終身用之者矣。然知識蒙蔽。義理有疑。則雖欲自省。其道無由。願永之更加讀書窮索之功。使是非眞妄。有所分落。可以下省之之功。凡心術念慮之微。容貌威儀之間。事物應接之際。夫孰非吾合省之地哉。無處不然。無時不然。沈浸融洽。日究遠大。則安知楣端一省字。不繼屢省三省而有聲於斯世也耶。 제순(帝舜)께서는……받았고 《서경》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제순(帝舜)이 "하늘의 명을 삼갈진댄 때마다 삼가고 기미마다 삼가야 한다.[則天之命, 惟時惟幾.]"라고 하고, 이에 노래하기를, "고굉이 기쁘게 일하면 원수가 흥기하고 백공이 기뻐한다.[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熙哉.]"라고 하니, 고요(皐陶)가 "유념하시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을 일으키시되 법도를 삼가 공경하시며,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자주 살펴 공경하소서.[念哉, 率作興事, 愼乃憲, 欽哉, 屢省乃成, 念哉.]"라고 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省) 《논어》 〈학이(學而)〉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나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한가? 붕우와 더불어 사귐에 성실하지 못한가?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는가? 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한 것을 말한다. 오군(吳君) 영지(永之) 오장섭(吳長燮, 1862~?)을 말한다. 자는 영지,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단목씨(端木氏)의 서(恕) 단목은 자공(子貢)의 성(姓)이고 이름은 사(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종신토록 행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묻자, 공자가 "서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원성공(元城公)의 성(誠) 원성공은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데 그가 원성에 살았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유안세는 성격이 강직하여 휘종(徽宗) 때 간신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에게 미움을 받고 7번이나 유배를 당하여, 멀리 광주(廣州) 및 광서(廣西) 지방을 전전하였으나 하루도 병든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비결을 묻자 "성실함[誠]뿐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스승 사마광(司馬光)이 평생토록 마음을 다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요체로 꼽은 덕목이었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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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20 卷之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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