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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락【내귀】에게 답함 答趙仲洛【來龜】 오래 격조하던 차에 한 폭의 고마운 편지는 어찌 보배로운 큰 옥98)과 같을 뿐이겠는가? 더구나 여행하는 체후가 손상이 없음을 알았으니, 위로되고 후련한 마음 말할 수 없네. 모르겠으나 가르치고 배우는 여가에 옛날 학업은 한결같이 긴요한데 착수하여 실마리를 찾았는가? 이 일은 단지 뜻 세움에 책임이 있으니, 뜻을 세우지 못하면 실로 말할 만한 것이 없네. 뜻이 진실로 서면 그 면려하고 신칙하는 것은 어찌 곁에 있는 사람이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마치 나그네가 집으로 가고 밥 먹는 사람이 배부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계단과 길, 절도는 스스로 아는 곳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세월은 쉽게 흘러가고 공부는 진보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네.[문]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궁리(窮理)', '진성(盡性)', '지명(至命)'이라 하였는데, '궁(窮)', '진(盡)', '지(至)'라고 한 것은 대개 천하의 사물은 이(理)가 있지 않는 것이 없지만 오직 이(理)에 궁구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그 지(知)가 다하지 못함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반드시 궁구한 뒤에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궁'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성(性)은 나에게 있는 것이고 밖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다만 능히 들어서 다할 뿐입니다. 또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데 잠시 외면하는 마음이 있으면 문득 성을 다하지 못하니, 이것이 '진' 자를 놓았던 까닭입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는데, 이미 성을 다하면 명(命)에 이르기 때문에 "성을 다하여 명에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지' 자를 놓은 까닭입니다.[답] '궁' 자는 '궁구 사색[窮索]'의 공이 될 뿐 아니라, 또 '궁극(窮極)'의 뜻이 있네. 그대가 논한 것은 의의가 있는 듯 하지만 다만 '재유외지지심(纔有外之之心)'은 '일리미명(一理未明)'으로 고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문] 이(理)는 철두철미하여 포함하지 않음이 없으니, 선과 악은 이(理)가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이 이를 말함에 대부분 모두 선을 말하고 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개 이것은 세상을 따라 교구(矯捄)하는 뜻입니다. 고인은 이를 말하지 않았으나 다만 '중(中)', '충(衷)', '칙(則)', '이(彝)'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중', '충', '칙', '이' 등의 글자는 변하여 하나의 '이'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 자를 "순전히 선하여 악이 없다.[純善而無惡]"라고 하는 까닭입니다.[답] 이는 비록 포함하지 않음이 없지만 또한 어찌 일찍이 그 가운데 악을 포함하였던가? '무소불포(無所不包)' 네 글자는 실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하문에 지금 사람은 이를 선으로 말하고 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크게 실언한 것에야 어떠하겠는가?[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린다.[以心使心]"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보건대, 정 선생의 뜻은 스스로 주재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단지 하나의 심(心)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함으로 인해 도리어 두 개가 있는 듯하니, 자세히 보면 이것은 하나의 심이다."라고 하였으니,99) 어떻게 스스로 주재가 될 수 있습니까?[답] 스스로 주재가 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곳이네. 안배하고 조작하여 종종 병통이 생기는 것은 모두 능히 스스로 주재가 되지 못하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네. 阻閡之久。一幅惠墨。何趐爲尺葵拱璧也。矧審旅體無損。慰豁不可言。未知斅學之餘。舊業一着。喫緊就緖否。此事只在責志。志不立。則固無話可說。志苟立矣。則其勉勵勸勅。豈在傍人之頰舌哉。如行者之赴家。食者之求飽。而其階逕節度。自有領略處矣。如何如何。日月易得。功夫難進。此是可憂也。窮理盡性至命。曰窮曰盡曰至者。蓋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是以必窮之而後可知。此所以下窮字。性是在我者。非由外而得。但能擧而盡之而已。且萬物皆備於我。纔有外之之心。便是不盡性。此所以下盡字。天命之謂性。旣盡性則可以至命。故曰盡性知命。此所以下至字。窮字。非惟爲窮索之功。且有窮極之義。所論似有義。但纔有外之之心。改以一理未明。如何。理是徹頭徹尾。無所不包。善惡莫非理。然則今人言理。擧皆以善言。而不以惡言之者。何也。蓋是隨世矯捄之義。古人不言理。但有曰中曰衷曰則曰彝之語。及至乎今。中衷則彝等字。變而爲一理字。此所以以理字。謂純善而無惡。理雖無所不包。亦何嘗包惡在其中。無所不包四字。固不可對不知者言之。況下文今人言理以善。不以惡者。大是失言。程子曰。以心使心。朱子曰。觀程先生之意。說自作主宰耳。只是一箇心。被他說得來。却似有兩箇。仔細看來。只是這一箇心。如何可以自作主宰。自作主宰。此是要處。安排造作。種種病痛。皆從不能自作主宰中出來 보배로운 큰 옥 저본의 '척규공벽(尺葵拱璧)'을 풀이한 말이다. '葵'는 '圭'의 오자로 보인다. 정자(程子)……하였으니 《주자어류》권34〈논어16(論語十六) 술이편(述而篇)〉인원호재장(仁遠乎哉章)에 나오는데, 글자의 출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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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에게 부치려고 지은 시 5수 擬寄敬山【五首】 기러기 끊기고 물고기 잠긴196) 지 삼 년이라 鴈斷魚沈三載今교분 맺은 마음을 서로 저버려 한탄스럽네 却歎相負定交心산중에는 아마도 새로운 시흥이 있을 텐데 山中應有新詩興침상에서 혼자 병중에 읊노라니 가련하네 枕上堪憐獨病吟한겨울 북방의 눈발을 지금 당하니 朔雪窮陰見卽今일만 수목 조락하여 살 마음 닫았네 萬林凋落閉生心누가 푸른 솔처럼 서 있는 몸이 되어 孰能身作蒼松立웅장한 용울음 같은 풍랑 소리 들으랴 自聽風濤龍壯吟밝은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昭然天理古猶今무슨 일로 인생에 문득 마음을 어길까 底事人生却昧心유생들이 도의를 말하는 걸 들어보면 試聽儒冠談道義나무꾼 목동의 요란한 노래만 못하네 不如樵牧亂謳吟앞서지도 처지지도 않고 지금 만남을 不先不後適丁今우습게도 옛사람은 도리어 고심하였네 堪笑前人却惱心지사가 쇠란한 세상을 만나지 않으면 志士未逢衰亂世문장이 풀벌레 소리처럼 공허해지네 文章空似候蟲吟큰소리만 치는 지금과 섞이기 싫은데 嘐嘐不欲混當今지금 세상에 누가 이 마음을 알겠는가 今世誰能識此心한 베개 꿈에 삼고197) 세상에서 놀다가 一枕夢遊三古世깨어나서 문득 혼자 큰소리로 읊조리네 覺來忽復獨高吟 鴈斷魚沈三載今, 却歎相負定交心.山中應有新詩興, 枕上堪憐獨病吟.朔雪窮陰見卽今, 萬林凋落閉生心.孰能身作蒼松立? 自聽風濤龍壯吟.昭然天理古猶今, 底事人生却昧心?試聽儒冠談道義, 不如樵牧亂謳吟.不先不後適丁今, 堪笑前人却惱心.志士未逢衰亂世, 文章空似候蟲吟.嘐嘐不欲混當今, 今世誰能識此心?一枕夢遊三古世, 覺來忽復獨高吟. 기러기……잠긴 소식이 끊긴 것을 말한다. 기러기의 왕래는 때가 일정하므로 비단을 기러기의 발에 매달아 멀리 서신을 전달했다는 설과 한(漢) 나라 때의 악부(樂府)에 "나그네가 멀리서 찾아들어와 내게 잉어 한 쌍을 주고 가기에,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는 한 자의 비단 편지.〔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에서 나온 말이다. 삼고(三古) 상고(上古)ㆍ중고(中古)ㆍ하고(下古) 시대를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태평성대를 누린 당우삼대(唐虞三代)와 같은 이상적인 옛 시대를 범범하게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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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바람에 초당이 벗겨지고 부서졌기에 두 공부173)의 〈띳집이 가을바람에 부서진 것을 한탄하는 노래[茅屋爲秋風所破歌]〉에 화운하다 大風雨捲破草堂, 和杜工部《茅屋爲秋風所破歌》 하늘에서 홀연히 성난 소리가 내려 上天忽然降怒號우사와 풍백이 지붕 이엉 말아가니 雨師風伯捲屋茅들판으로 멀리 가버릴까 근심했네 心之憂矣行邁郊부서진 집의 옥천자174)가 우스우니 堪笑破廬玉川子누가 맹성요175)에 집을 새단장하랴 誰能新家孟城坳돌아와 누워 무력함을 탄식하는네 歎息歸臥無毫力간적 같은 파리와 모기 가증스럽네 可憎蠅奸與蚊賊수리할 온갖 계책 떠오르지 않으니 百計葺理無所出어떡하면 파리 모기 몰아낼 수 있을까 那由此物驅除得하늘 우러러 몰래 바라는 게 무엇인가 仰天暗祝何攸願즉시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나온다면 卽時雲開見日色반쯤 검게 타버린 내 마음 풀어지리라 紓我心肝半焦黑방 구들장은 밤새도록 쇠처럼 차갑고 房突連夜冷似鐵창문 종이는 조각조각 전부 찢어졌네 牕紙片片盡破裂또한 어찌하여 하늘가의 무정한 비는 又何天邊無情雨때때로 이어져 잠시도 그치지 않는가 時時續續不暫絶방 부숴도 노지에서 잔다176)고 예전에 들었는데 昔聞掀却臥房露地睡회옹의 한마디 말에서 통철한 이치를 보겠네 晦翁一語見理徹온 세상 둘러보매 비바람이 험악하니 環顧擧世風雨惡몇이나 이런 일 당해 시름을 함께할까 幾人遭此同愁顔그저 태산처럼 본분 지켜 자중할 뿐이네 只可安分自重如泰山아, 죽으면 골짝에 묻히는데 집을 어디에 쓰랴 嗚呼死卽在壑安用屋내 신사177)를 보전하여 돌아가면 만족하리라 全吾神舍而歸可自足 上天忽然降怒號, 雨師風伯捲屋茅.心之憂矣行邁郊, 堪笑破廬玉川子, 誰能新家孟城坳?歎息歸臥無毫力, 可憎蠅奸與蚊賊.百計葺理無所出, 那由此物驅除得? 仰天暗祝何攸願?卽時雲開見日色, 紓我心肝半焦黑.房突連夜冷似鐵, 牕紙片片盡破裂.又何天邊無情雨? 時時續續不暫絶.昔聞掀却臥房露地睡, 晦翁一語見理徹.環顧擧世風雨惡, 幾人遭此同愁顔? 只可安分自重如泰山.嗚呼死卽在壑安用屋? 全吾神舍而歸可自足. 두 공부(杜工部)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낸 당나라의 두보(杜甫)를 말한다. 부서진 집의 옥천자(玉川子) 허름한 집에 거처하는 작자 자신을 비유한 말이다. 옥천은 당나라 시인인 노동(盧仝)의 호이다. 노동은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옥천자라고 불렀다.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몇 칸짜리 모옥(茅屋)에서 살았는데, 한유(韓愈)가 몹시 예우하였다. 한유의 〈기노동(寄盧仝)〉 시에 "옥천 선생 낙성 안에 살고 있는데, 몇 칸짜리 부서진 집뿐이로구나.〔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5》 맹성요(孟城坳) 맹성(孟城) 입구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었다. 맹성은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종남산(終南山) 자락의 망천(輞川)에 있는 옛 성이며, '요(坳)'는 지형이 움푹 패여 요철(凹凸)이 있는 곳을 말한다. 자던……잔다 이는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답한 편지에 보이는 말로, 이 편지에 이르기를, "맹자의 '대인에게 유세할 때에는 그 지위를 하찮게 여겨야 한다.'라는 말을 논해보건대, 맹자는 진실로 대인을 경외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다만 그 높은 지위를 하찮게 여긴 자일 뿐입니다. 이 마음을 체득하면 누워서 잠자던 방을 무너뜨리더라도 태연히 노지에서 잠잘 수 있으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진정 큰 영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은 도리어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가에 다가간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혈기가 거칠면 도리어 조금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嘗論孟子說大人則藐之, 孟子固未嘗不畏大人, 但藐其巍巍然者耳. 辨得此心, 卽更掀却臥房, 亦且露地睡, 似此方是眞正大英雄人. 然此一種英雄, 却是從戰戰兢兢臨深履薄處做將出來. 若是血氣粗豪, 却一點使不著也.〕"라고 하였다. 《晦菴集 卷36 答陳同甫》 신사(神舍) 신명(神明)의 집이란 뜻으로, 마음을 뜻한다. 송(宋)나라 황간(黃榦)이 "심이란 신명의 집이니, 허령하고 통철하여 뭇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사물을 수응하는 것이다.〔心者神明之舍, 虛靈洞徹, 具衆理而應萬物者也.〕" 하였다. 《勉齋集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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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에 여중과 정토사에서 놀다 2수 七月旣望, 與汝重遊淨土寺【二首】 병이 나아도 태양과 맞설 수 없어 病起難能敵老陽한낮에 칠성당으로 달아나 피했네 午天走避七星堂매미들이 함께 울어 소리 씩씩하고 萬蟬幷噪聲何壯외론 길손이 조니 꿈이 길어지네 孤客閒眠夢欲長동인185)이 강개하여 시에 눈물 나고 慷慨同人詩有淚옛 교분 은근하여 술에 향기가 나네 殷勤舊契酒生香천 년 뒤에 아득히 소동파 생각하니 千秋緬憶東坡子이날 하늘 한쪽에서 누굴 바라보았나 此日望誰天一方절기가 삼음에 이르러 점차 양을 깎나니 節屆三陰漸剝陽세월은 물과 같아서 당당하게 지나가네 居諸如水去堂堂풍년이라 민생이 풍족하다 다퉈 말하나 爭言歲稔民生足무슨 일로 가을 되면 길손의 한 많아지나 底事秋來客恨長길의 가시나무를 없애지 못해 한탄스럽고 途棘堪歎無與掃방의 난초는 오래 향기 머무니 기쁘네 室蘭猶喜久留香어떡하면 영균186)처럼 세상을 살아갈까 靈均度世那由得단가187)에게 오묘한 처방을 묻고 싶네 欲向丹家問妙方 病起難能敵老陽, 午天走避七星堂.萬蟬幷噪聲何壯? 孤客閒眠夢欲長.慷慨同人詩有淚, 殷勤舊契酒生香.千秋緬憶東坡子, 此日望誰天一方?節屆三陰漸剝陽, 居諸如水去堂堂.爭言歲稔民生足, 底事秋來客恨長?途棘堪歎無與掃, 室蘭猶喜久留香.靈均度世那由得? 欲向丹家問妙方. 동인(同人) 서로 마음이 맞는 벗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의 〈동인괘(同人卦)〉를 풀이한 말에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그 예리함이 쇠를 끊고, 한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영균(靈均) 전국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충신이자 문장가인 굴원(屈原)의 자(字)이다. 그는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직간을 하다가 조정에서 모함을 받아 좌천된 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 등을 짓고 상강(湘江)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단가(丹家)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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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경연참찬관 월헌 조공전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參贊官月軒曺公傳 조공(曺公)의 휘는 현(顯), 자는 희경(希慶)이며 월헌(月軒)은 그의 호이다. 신라 태사 계룡(繼龍)이 비조(鼻祖)가 되고,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자기(自奇), 비서소감(祕書少監) 사단(思旦),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장양공(莊襄公) 저(著)가 그의 현조(顯祖)이다. 조부 세창(世昌)은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으며, 아버지 억년(億年)은 참봉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났다. 공은 지기(志氣)가 무리보다 뛰어나고 강개함이 장대하여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여 명종(明宗) 을묘년(1555, 명종10)에 나가 달량진(達梁鎭, 해남 달랑포)을 지켰다. 그 당시 섬 오랑캐들이 침범해오자 변방 성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115)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났는데, 공이 휘하를 독려하여 성에 올라 힘써 싸우자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는데도 밖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적들이 성을 수겹으로 에워싸자 칼을 뽑아 공격하여 수십여 수급을 베었고 검도 부러졌다. 그리하여 지붕의 기와를 걷어 던져 적을 죽이고 부상을 입힌 것이 매우 많았으나 기와가 다 떨어져 성은 함락되었다. 적들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공을 굴복시키고 등을 갈라 간을 드러내기까지 하였는데, 도적을 꾸짖는 소리가 오히려 끊이지 않았다. 적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관을 갖추고 시체를 거두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21세였다. 3년이 지난 정사년(1557, 명종12)에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고, 선조 무인년(1578, 선조11)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116) 효종 을미년(1655, 효종6)에는 포충사(褒忠祠)117)에 올려 제향하였고, 숙종 계미년(1703, 숙종29)에는 정려를 명하였다. 외사씨(外史氏)11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옛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119)이 회양(睢陽)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논하는 자들이 고금 천지의 쌍혼(雙魂)으로 그들을 인정하였는데, 공이 장순 허원과 함께 고금의 3혼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정이 태평할 때에 공이 먼 지방의 보잘 것 없는 관원으로 우뚝하게 떨쳐 한 시대에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풍의(風義)를 빛냈으니, 38년이 지나 임진년의 변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했던 일이 영호남(嶺湖湖) 사이에 잇달아 있었던 것이 공이 이끈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 집에서 잠도 자고 일어나서 날마다 먹고 마시며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으니, 삼가 전(傳)을 지어 후대의 재필(載筆)120)할 사람을 기다린다. 曺公諱顯。字希慶。月軒其號也。以新羅太師繼龍爲鼻祖。高麗平章事自奇。秘書少監思旦。都僉議政丞莊襄公著。其顯祖也。祖世昌掌隷院判決事。考億年參奉贈刑曹參判。公生于嘉靖乙未。志氣不羣。慷慨磊落。投筆登武科。明宗乙卯。出守達梁鎭。時島夷入寇。邊城海戍。望風奔潰。公督管下。登城力戰。賊不敢近。居數日。矢盡力竭。外援不至。賊圍城數匝拔劒擊斬數十級。劒亦折。捲屋瓦投之。殺傷甚衆。瓦盡城陷。賊憤其久不下。伏公刳背。至於露肝。而罵賊之聲。猶不絶。賊義之。具棺斂尸。時年二十一。越三年丁巳贈兵曹參議。宣廟戊寅。遣官致祭。孝宗乙未。躋享褒忠祠。肅廟癸未。命旌閭。外史氏曰。昔張巡許遠。死於睢陽之戰。論者以古今天地一雙魂。與之。公之於巡遠。謂之古今三魂。非過論也。當我朝昇平恬憘之際。公以遐土冗官。崛然奮張。扶綱常於一時。耀風義於萬目。後三十八年。壬辰之變。倡義殉節。相望於嶺湖之間者。安知非公倡之耶。載寢載興。日用飮食。受賜多矣。謹爲立傳以以俟後之載筆者。 바다를 지키는 수군 원문의 '해수(海戍)'는 바닷가의 수자리이다. 이백(李白)의 자류마(紫騮馬)에 "흰 눈이 덮인 관산은 멀고 누런 구름 자욱해 해수는 아득해라.[白雪關山遠, 黃雲海戍迷.]" 하였다. 관리를……했으며 1578년(선조11)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구충연(具忠淵)을 보내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치루는 제사)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포충사(褒忠祠)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죽수서원 옆에 위치한다. 1610년(광해군2)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만 모셨으나, 1630년(인조8)에 당시 이조판서인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문홍헌(文弘獻)을 배향하였다. 이후 1657년(효종8) 을묘왜란때에 해남 달랑포에서 전사한 조현(曺顯)을 추배 했으며, 1860년(철종11)에 구희(具喜)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외사씨(外史氏) 《사기》 등에는 사관이 어떤 일을 논하는 논평의 글이 나오는데, 이 글은 사관의 글이 아니므로 외사씨라고 한 것이다. 소설에서 끝에 작가 개인 의견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외사씨왈(外史氏曰)' 표현을 많이 쓴다.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재필(載筆)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운문을 '문(文)', 산문을 '필(筆)'이라 하였다. 후대에 재필(載筆)은 '필기도구를 휴대하고 군왕의 언행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이른다. 또는 '소차(疏箚)나 표문(表文)을 짓는다.'라는 등의 문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양서(梁書)》 권14 〈임방전(任昉傳)〉에 "임방이 매우 글을 잘 지었는데 더욱이 재필을 잘 지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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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미정기 木美亭記 내가 듣건대, 천관산(天冠山)54) 북쪽에 높이 우뚝 서 있는 산을 우산(牛山)이라 하고, 산 아래에 날아오를 듯 있는 정자를 목미정(木美亭)이라 하는데, 고(故)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55)가 축조하고,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56)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다만 모르겠지만, 그 산의 나무는 맹자 때에 이미 그 기름을 잃어서 민둥산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57), 더욱이 수천 년이나 지난 뒤에 어찌 유독 그렇지 않아서 도리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진(秦)나라 내의 황죽(篁竹)은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고, 낙양(洛陽)의 모란[牧丹]58)은 과거에 없었으나 후대에는 있게 되었으니, 그 물산(物産)의 번성과 쇠퇴는 또한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매양 한번 찾아가고 싶었지만 병으로 발걸음이 미치지 못하다가 근년에 산 아래의 벗이 찾아와 종유(從遊)할 수 있었는데, 기상과 풍모가 대체로 범상치 않은 것이 요림 옥수(瑤林玉樹)59)와 같아서 매우 애호할 만하였다. 아, 평소 자나 깨나 잊지 못했던 이 산을 방문을 나가지 않고서도 만날 수 있었으니, 물산은 본디 번성과 쇠퇴가 있지만, 진실로 수양함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속적인 해침에서 벗어나 성취한 바가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아, 맹자는 어느 때 사람이며, 우산(牛山)은 어느 지역에 있었던가? 누가 그 말을 만 리 머나먼 바닷가에서 비로소 서로 얻어 왕춘(王春)60)의 한 가닥 맥으로 하여금 얼음이 어는 한겨울과 같은 시기에 실추되지 않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이후로 또 어찌 숭산(嵩山)의 다섯 아름 되는 나무와 형산(衡山)의 천 길 되는 재목이 장차 숲을 이루며 빽빽하게 늘어서서 큰 집을 지탱하고 용마루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쓰이지 않을 줄 알겠는가. 이것이 악와공이 이 정자를 짓게 된 뜻이다. 그러나 식물도 또한 다양하니, 여름에 휴식을 얻고 가을에 열매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이며, 휴식을 얻지 못하고 가시를 얻는 것은 어떤 식물인가? 이는 씨를 뿌리는 초기에 구별되는 바이니, 굳이 성숙해지는 때를 기다려 "좋은 쑥이 아니라 나쁜 쑥이로다."61)라는 탄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양하는 방법은 우산장(牛山章)에 갖추어져 있어 평소에 익혔을 것이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나는 잡목 같은 졸렬한 자질로 풍상(風霜)에 곤욕을 당하여 오래도록 사방 한 치 되는 나무조차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남은 풍교를 뒤따라서 구구하나마 상유(桑楡)의 시기62)에 다소간 봉마(蓬麻)의 도움63)을 받을 수 있을까? 余聞天冠之北。有巋然而特立者曰牛山。山之下。有亭翼然曰木美。故樂窩安處士所築。錦谷宋先生所錫名也。但未知其山之木。在孟子時。已失其養而至於濯濯。況後於數千載。何獨不然。而乃以美云耶。然秦中篁竹。昔有而今無。洛陽牧丹。前無而後有。其物産盛衰。又不可以一槩可評。每欲一者屨及。而病未能焉。近年得山下友之過從。氣象風裁。槩不草草。若瑤林玉樹。蔚然可愛。噫。平日所寤寐此山者。不出戶而可以覯降矣。物產固有盛衰。苟非有養焉。則安能免於侵尋。而其所就乃爾耶。嗚乎。孟子何時。牛山何地。誰謂其說乃始相得於海荒萬里之濱。使王春一脈。不墜於窮陰堅冰之時耶。率是以往。又安知無嵩山五園之樹。衝山千尋之材。將林立叢列而爲支厦負棟之用耶。此是樂窩公經始之意也。然植物亦多矣。夏得休息而秋得其實者。何物。不得休息而得其刺者。何物。此在下種之初所當區別。不必待日至之時而有匪莪伊蒿之歎也。若其滋養之術。牛山章備矣。講之素矣。夫何贅焉。余以樸樕劣品。厄於風霜。不得爲方寸之木久矣。安得追躡餘風。以受多少蓬麻之助於區區桑楡之日乎。 천관산(天冠山) 전남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면 일원에 위치한 산(723m)이다. 악와(樂窩) 안 처사(安處士) 안국심(安國心, 1838~1890)으로, 악와는 그의 호이다.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 조선후기에 부호군, 대사헌, 찬선 등을 역임한 문신 송내희(宋來熙, 1791~1867)로, 금곡은 그의 호이다. 자는 자칠(子七)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838년(헌종 4)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된 후 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거쳐 뛰어난 학행을 인정받아 1853년(철종 4)에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천거되었으며,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1857년부터 10년 가까이 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내고 뒤에 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금곡문집(錦谷文集)》이 있다. 그……이르렀는데 목미정이 자리한 산의 이름이 우산(牛山)인 연유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 우산장(牛山章)에서 맹자가 양심(良心)을 잃게 되는 이유를 말하면서 제(齊)나라 동남쪽에 있는 우산이 무성하게 우거졌지만, 도시 근처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끼로 베어 가고, 또 소와 양이 남은 그루터기의 싹을 뜯어 먹어서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낙양(洛陽)의 모란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가 어느 겨울날, 꽃나무들에게 당장 꽃을 피우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다른 꽃들은 모두 이 명령을 따랐으나 모란만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불을 때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려고 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화가 난 황제는 모란을 모두 뽑아서 낙양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로 모란은 '낙양화'로도 불리게 되었고, 불을 땔 때 연기에 그을린 탓에 지금도 모란 줄기가 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2004, 나카무라 고이치, 뿌리와이파리.) 요림 옥수(瑤林玉樹) 요림 경수(瑤林瓊樹)와 같은 말로,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처럼 인품이나 풍도가 매우 고결하고 훌륭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이 당시의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두고 "태위는 신성한 자태가 고상하여 마치 옥으로 이루어진 숲의 옥으로 만들어진 나무와 같으니 자연히 풍진(風塵) 밖의 인물이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43 王戎列傳》 왕춘(王春) 음력으로 신춘(新春)을 말하는 것으로. 공자가 《춘추》를 편찬할 때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대일통(大一統)의 사상을 표시하기 위해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 조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쓴 데서 유래하였다. 좋은……쑥이구나 《시경》 〈육아(蓼莪)〉에 보인다. 상유(桑楡)의 시기 저물녘에 떨어지는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봉마(蓬麻)의 도움 훌륭한 벗의 도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자라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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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헌기 德軒記 호에는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 있는데, 서산(西山)이나 북산(北山) 따위가 이것이고, 그 덕을 표시한 것이 있는데, 경재(敬齋)나 의재(義齋) 따위가 이것이다. 능주 서쪽에 있는 천태산(天台山)는 남쪽 지방의 명승지로, 천태산(天台山)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구불구불 이어져 오다 10여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러 고개를 돌린 채 단정히 선 모습으로 우뚝 수려하게 솟구쳐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덕봉(德峯)이라 한다.내 벗 박공 우서(朴公禹瑞)의 집이 그 아래에 있는데, 그 집을 덕헌(德軒)이라 명명하였으니, 대체로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이 옛 문헌에 드러난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덕' 한 글자처럼 요약되고 극진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비록 그 거처를 표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덕을 표시한 것도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공은 몸가짐이 조심스러웠고 세상에 쓰일 재주를 품었으면서도 이 세상에 없는 듯 자취를 감춘 채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으니, 덕을 몸에 쌓음이 깊었다.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시례(詩禮)64)를 익히고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자손들이 성대하게 번창하였으니, 덕을 집안에 폄이 두터웠다. 덕을 쌓고 폄이 이미 깊고 두터웠음에도 오히려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서 항상 바라보며 경계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이 비록 수석(水石)의 아름다운 이름에 있더라도 감히 태만하지 않았으니, 이곳에 반드시 덕봉의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모여서 장차 후세에 도와 발현시킬 것을 또한 헤아릴 수 있겠는가.백세 이후에 이 산을 보고서 공의 거처를 알 것이고, 이 산의 모습을 보고서 공이 체득한 덕을 알 것이니, 공은 산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고, 산 또한 공이 아니라고 기필하지 못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조그만 언덕이나 개밋둑만하니, 비록 바람결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탱하고자 하더라도 높은 산 아래에서는 단지 산이 되기 어렵다는 것만 알게 될 뿐이다. 號有識其居者。西山北山之類是已。有識其德者。敬齋義齋之類是已。綾之西有天台山。盖南方勝區也。山一支北行。透迤至十許里。而有回頭疑立。挺然尖秀者曰德峯。余友朴公禹瑞家其下。名其軒曰德。盖識其居也。然聖門要訣。著於往牒者。不爲不多。而未有若德之一字。爲約而盡也。然則雖識其居。而所以識其德者。又未嘗不在其中。公持身謹勅。才抱需世。而泯然斂迹。不少槩見。則德之畜於身者深矣。孝友詩禮。箕裘承襲。而螽斯椒聊。蔚然茁長。則德之種於家者厚矣。蓄之種之旣深且厚。而猶不自足。有以常目警省者。雖在水石佳名。而不敢慢焉。此必德峯之靈爲之降聚。而將以助發於來許者。又可量乎。百世之下。見此山而識公之居。見此山之容而識公之體德。則公未必非山。而山亦未必非公也。如余培塿邱垤也。雖欲依附風際。以自友爲。而高山之下。秖見其難爲山也。 시례(詩禮) 집안에서 전해지는 가학(家學)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아들 이(鯉)에게 시(詩)와 예(禮)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훈계했던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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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칠원 현감 퇴은 안공 행장 通訓大夫漆原縣監退隱安公行狀 공의 휘는 신일(信一), 자는 군유(君有), 호는 퇴은(退隱)이며, 고려조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로가 있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으로 삼았다. 휘 정(挺)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직제학이 휘 을겸(乙謙)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다. 군수가 휘 여주(汝舟)를 낳았는데 직장을 지냈으며, 장흥(長興)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직장이 휘 거(矩)를 낳았는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좌랑이 휘 신동(愼同)을 낳았는데 직장(直長)을 지냈다. 직장이 휘 양필(良弼)을 낳았는데 봉사(奉事)를 지냈고, 봉사가 휘 기(磯)를 낳았는데 부장(部將)을 지냈으며, 부장이 휘 여지(汝止)를 낳았는데 판관(判官)을 지냈다. 판관이 휘 우주(宇宙)를 낳았는데 참봉을 지냈으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봉사를 지낸 희순(希淳)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8월 10일에 부(府)의 중산리(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활달하여 또래들보다 훨씬 탁월하였다. 겨우 8~9세 때, 병사 오정방(吳定邦, 1552~1652)이 겸부사(兼府使)로서 연병관(鍊兵館)에서 강무(講武)92)하였는데, 공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가서 구경하니 오정방이 각각 배 하나씩를 주었다. 여러 아이들은 받은 즉시 베어 먹는데, 공만이 홀로 품속에 넣자 오정방이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장차 돌아가 어버이께 드리려고 하는데, 하나가 모자랍니다."라고 하니, 오정방이 기특하게 여겨 곧바로 백여 개의 배와 고기를 주었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여 밤에도 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을 자도록 하라고 꾸짖으면 그때마다 물러나 문 밖에 서 있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들어왔으니 그 지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12세에 족대부(族大父) 동애(桐厓) 휘 중묵(重默)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국상(國喪)을 당하여 여러 장로(長老)가 모두 관아의 뜰로 달려가 곡을 행하자 공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단(壇)을 설치하고 재계한 뒤에 망곡례(望哭禮)94)를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8세에 참봉공의 명으로 청음(淸陰) 김선생95)을 가서 뵙고 인하여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이 매번 칭찬함이 끊이지 않았다. 광해군 정사년(1617, 광해군9)에 폐모(廢母)의 변고96)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이는 천지가 있은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하고는 곧장 소장(疏章)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언로(言路, 임금에게 말을 아뢰는 길)에 막혀 결행하지 못했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도적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가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집안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이겠는가."라고 하더니, 칼을 잡고 부원수(副元師) 신경원(申景瑗)97)의 막사에 나아가 군무를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루어, 병절교위(秉節校尉)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98)에 오랑캐인 금나라 침략하자, 공은 전 부사(府使) 민기(閔機)99) 등과 힘을 합해 호종(扈從)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의위 부사과(忠義衛副司果)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인조7) 봄, 상소를 올려 군사 장비를 정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 동쪽에 강성한 왜구들이 있어 원망을 맺음이 이미 깊고, 서쪽에는 사나운 북쪽 오랑캐가 있는데, 얕잡힌 것이 이미 많아 위급한 형세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빨리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다. 이때 극악한 역적 백룡(白龍)100)이 도당을 불러 모았는데,101) 남원(南原)이 더욱 심하였다. 부사 박정(朴炡)102)이 편지를 보내 공을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의 계략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부디 와주시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편지를 받고 곧장 가서 책략을 도모하여 거의 다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목장흠(睦長欽)103)이 박공(朴公)을 이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공이 이룩한 계책에 힘입어 마침내 잔당을 소탕하자 경내가 평안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 경상 우도(慶尙右道)104)가 기근이 심하여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자, 박정이 공을 추천하여 칠원 현감(漆原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혼자 말을 타고 부임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고 진대(賑貸)105)하여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나타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평안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주고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크게 쳐들어오자 공이 달려가 감사(監司) 심연(沈演)106)을 만나 일을 의논하니 심연이 말하기를, "급히 본현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서 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현으로 돌아와 동구(同仇) 의리로써 타이르니 현의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수천 명을 모아 심공과 합세하여 곧장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병사 김준용(金俊龍)이 광교(光敎)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러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공이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군령(軍令)의 무엄함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본현(本縣)의 장졸들을 불러 말하기를, "오직 내가 여기에 있는데, 너희는 장차 어디로 가려하느냐.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가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읍의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칠원의 병사들만은 독전(獨全)하여 영산(靈山)의 수령 윤면지(尹勉之)와 함께 길을 배로 재촉하여 나아갔다. 얼마 안 있어 남한산성에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는 소식107)을 듣고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윤공과 이별하며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통곡하고 어느 곳으로 돌아갈거나 (痛哭歸何處)동쪽 바다 이곳이 살기 좋겠네 (東溟是好居)라고 하였다. 2월에 어버이의 병 때문에 보고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2월에 관직을 버리고 같은 고을 사람 웅천 현감(熊川縣監) 위정렬(魏廷烈, 1580~1644)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숭덕(崇德)108)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모든 서찰 아래에 오직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몇 년이라고만 써서 풍천(風泉)의 생각109)을 부쳤으며, 인산(仁山)의 아래에 집을 지어 '지수정(智水亭)'이라 편액을 걸고 날마다 벗들과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근심을 떨쳐냈다. 그 뒤에 나이가 많아 가선대부 품계로 승진하였는데,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새 직함을 쓰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청국(淸國)의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현종7)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2월 수문포(水門浦) 왼쪽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사문(斯文)의 이름난 가문으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현향(賢鄕, 상대방의 고향)의 장덕(長德) 문하에서 공부하여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절도는 진실로 이미 대체(大體)를 터득하였지만, 다만 당시의 세상일이 우환이 많음을 보고 개연(慨然)히 세상에 뜻을 두어 환란에 미리 대비할110) 계책을 세웠다. 또 무략(武略)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가하고 조용한 틈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익히곤 하였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서는111)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분주하게 절충(折衝)112)하고, 드나들며 보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전후로 이와 같이 성대하였으니, 공은 문무(文武)의 재능과 장상(將相)의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한데, 낮은 관직을 맴돌며 오히려 그가 품은 생각을 크게 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물며 여기에 더 나아가 아무 일이 없는 때를 만나 조용히 간언(諫言)113)하고 임금의 덕을 보좌했다면 이 세상을 도용(陶鎔)114)한 것이 어떠했겠는가. 공이 말한 '학문과 절의는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는 실제(實際)의 말이니, 백년 뒤에 공의 글을 읽고 공의 세상을 논하는 자가 마땅히 모두 다 알 것이다. 부인은 장연 변씨(長淵邊氏)로, 참봉을 지낸 덕룡(德龍)의 따님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자녀가 없어 종증조(從曾祖) 형 언두(彦斗)의 둘째 아들 인업(仁業)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장손 이행(而行)은 호가 포옹(圃翁)이며, 차손은 이형(而亨)이며,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8세손 인환(仁煥)은 어진 선비이니, 그 종질 규칠(圭七)을 보내 나에게 행장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고 미천하고 용렬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다만 두터운 교분으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公諱信一。字君有。號退隱。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至諱挺。仕我朝官直提學。是生諱乙謙郡守。是生諱汝舟直長。始居長興。是生諱矩佐郞。是生諱愼同直長。是生諱良弼奉事。是生諱磯部將。是生諱汝止判官。是生諱宇宙參奉。卽公之考也。妣漆原尹氏奉事希淳女。以萬曆乙未八月十日。生公于府之中山里。穎悟開爽。絶山等夷。纔八九歲時。兵使吳定邦。以兼府使。講武于錬兵館。公與羣兒往觀之。吳各賜一顆梨。羣兒卽受而啗之。公獨懷之。吳問之曰。將歸遺二親。而但少一顆耳。吳奇之。乃賜百顆及肉物。遇親癠。極其致憂。夜不解帶。父母責令就睡。則輒退立門外。少頃復入。其至誠如此。十二受學于族大父桐厓諱重默之門。一日遭國恤。諸長老皆赴縣庭行哭。公與羣兒設壇齋後。行望哭禮。見者異之。十八以參奉公命。往謁淸陰金先生。因受業焉。先生每稱賞之無已。光海丁巳。聞有廢母之變。歎曰。此是有天地以後所未有之擧。卽製疏章。竟爲言路所沮。未果上。辛酉登武科。甲子賊适之叛。公不勝忿憤曰。大駕播遷。此豈臣子安坐屋裏時乎。杖劒詣副元師申景瑗幕。贊助戎務。多所效績。拜秉節校尉宣傳官丁卯三月。金虜人寇公與前府使閔機等戮力扈從。拜宣略將軍忠義衛副司果。己巳春。上疏請修武備。略曰。我國東有倭寇之强。而構怨旣深。西有建胡之狠。而見弱已多。危急之勢。朝不慮夕。亟令修葺軍器。錬習武士。以備緩急。識者韙之。時劇賊白龍。嘯聚徒黨。南原尤甚。府使朴炡以書邀公曰。吾君算略。已所稔知。庶肯來思共濟時艱。公得書卽行。謀畫方略。斬獲殆盡。睦長欽繼朴公而莅南原。賴公成算。竟勦餘黨。境內晏然。丙子春。嶺右饑甚。盜賊倂起。朴炡薦公爲漆原縣監。公單騎赴任。蠲除賑貸。恩威幷著。民賴以安。朝廷嘉賞之特。賜表裏一襲。冬北寇大入。公馳見監司沈演議事。沈曰。急往本縣收兵以來。公還縣。諭以同仇之義。縣人莫不願從。遂募得數千與沈公合勢。直向南漢。至中路。聞兵使金俊龍敗於光敎。諸軍皆散。公大呼曰。軍令無嚴何至此也。招本縣將卒曰。惟我在。此。汝將何之。若有退一步者斬。是以列邑軍皆散。而漆原兵獨全。與靈山守尹勉之。倍道而行。旣而聞南漢出城之報。痛哭而還。別尹公有詩曰。痛哭歸何處。東溟是好居。二月以親病。申省請遞。不許。十二月。棄官與同郡人熊川宰魏廷烈。同還鄕里。不復仕進。不用崇德年號。凡書尺下。惟書崇禎幾年。以寓風泉之思。築室仁山之下。扁曰智水亭。日與知舊。文酒自遣。後以年老。陞嘉善階。戒子孫曰。我死勿用此新銜。蓋以有淸國年號故也。丙午十二月十日捐館。明年二月葬于水門浦左麓艮坐原。嗚乎。公以斯文名家。稟質挺異。而從事於賢鄕長德之門。立心爲己。學問節度。固已見得大體矣。但見時事多虞。慨然有志於世而所以爲綢繆陰雨之計。又不可以不閒於武略。故每於簡黙之暇。兼習弓馬。至於出身通籍。一心徇國。而奔走折衝。出入捍衛。所以樹立勞勩者。前後磊落如此。公可謂文武全才。將相偉器。而低廻下僚。猶未能大展其所蘊。爲可恨也。況進於此。遭時無事。從容啓沃。輔翼允德。則其陶鎔斯世者。爲何如哉。公所謂學問節義。本非二事者。是實際語也。百歲之下。讀公之書。論公之世者。當有以悉之也。夫人長淵邊氏參奉德龍女。有婦德墓合祔。無育。取從曾祖兄彦斗第二子仁業爲嗣。孫長而行號圃翁。次而亨。曾玄以下不錄。八世孫仁煥賢士也。送其從姪圭七。屬余以狀行之文。余以固陋微劣。有不容承膺。而但以契誼之厚。有不敢終辭云爾。 강무(講武) 조선조 때 1년에 두 번 봄철과 가을철에 행하던 행사의 하나로, 지정(指定)한 곳에 장수와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임금이 주장하여 사냥하여 아울러 무예(武藝)를 연습하던 일을 말한다. 중묵(重默) 안중묵(安重默, 1556~1607)으로, 자는 기현(基賢), 호는 동애(桐崖),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박광전(朴光前)ㆍ정개청(鄭介淸)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의 효렴(孝廉) 천거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ㆍ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등을 지냈다. 병법(兵法)에도 능하여 정유재란 중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찾아오자 병론(兵論)을 전수해 주었으며,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저서로는 《동애선생실기(桐崖先生實記)》가 있다. 망곡례(望哭禮)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서울에서는 대궐 문 앞에 모여 곡하고, 지방에서는 서울 쪽을 바라보면서 곡하는 의식을 말한다. 청음(淸陰) 김선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이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폐모(廢母)의 변고 1617년(광해군9)에 조정에서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말한다. 신경원(申景瑗) 1581~1641.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이다. 1605년(선조38)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선전관을 거쳐 온성 판관·부사를 지내고, 1619년(광해군11) 영유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황주 신교에서 패한 관군을 모아 안현에서 반군을 대파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평안·황해·함경·강원 4도 부원수로 맹산 철옹성을 지키다가 포로가 되자 단식으로 항거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 전쟁인 정묘호란을 말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나라에게 빼앗긴 것이다. 민기(閔機) 1568~164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이다. 1597년(선조30)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주 부윤을 지냈다. 백룡(白龍) 인조(仁祖) 대에 남원 지역에서 출몰하던 도적의 괴수를 말한다. 《漫浪集 卷9 睦參判墓碑銘, 韓國文集叢刊 103輯》 불러 모았는데 원문의 '소취(嘯聚)'는 도적들이 그들의 도당을 신호인 휘파람을 불어서 모으는 일을 뜻한다. 박정(朴炡) 1596~1632.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동선(朴東善)의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정시(庭試)에 급제, 춘추관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훈3등(勳三等)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함평현감ㆍ통정(通政)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좌승지ㆍ대사간ㆍ병조 참의ㆍ참지를 거쳐 1629년(인조7)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강적(强賊)을 평정하여 금주군(錦州君)에 피봉되었다. 이조 참판ㆍ병조 참판ㆍ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목장흠(睦長欽) 1572~1641.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1599년(선조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직을 두루 거친 뒤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1613년에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 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승지에 임명되어 판결사, 함경도 관찰사, 경주 부윤 등을 거쳐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1641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 원문의 '영우(嶺右)'는 경상 우도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7년(1407)에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서쪽을 경상 우도라고 하였다. 성주(星州)ㆍ선산(善山)ㆍ합천(陜川)ㆍ함양(咸陽)ㆍ의령(宜寧)ㆍ남해(南海)ㆍ거창(居昌)ㆍ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창원(昌原) 등 28개의 군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진대(賑貸) 재난이나 흉년이 든 해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 주던 일을 말하는데,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春窮期)에 관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거두어들이던 제도이다. 심연(沈演) 1587~164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峯)이다.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재판을 공정히 하고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곳의 목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패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한성부 판윤, 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임지에서 죽었다. 남한산성에서……나와 1636년(인조14)에 청나라가 재차 침입하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로 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한 일을 말한다. 숭덕(崇德)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1636~1643)이다. 풍천(風泉)의 생각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의 국력이 약해 청나라에 유린당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명(明)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멸망한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 담겨 있다. 환란에 미리 대비할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에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뜻하며, 원문의 '통적(通籍)'은 문표(門標)에 성명ㆍ연령 등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던 명패(名牌)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하고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절충(折衝)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이다.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간언(諫言) 원문의 '계옥(啓沃)'은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간언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도용(陶鎔) 도용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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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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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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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다시 앞의 운자로 회포를 적어 열재 어른께 드리다 疊前韻述懷 呈悅丈 이 마음은 큰 곳이고 이 몸은 작은데 此心大處此身微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아는 이 드무네 微大之間識者稀천지간엔 결점이 없는 양심을 부여받았고 天地降衷無缺點사생간엔 온전히 돌아갈 수 있어86) 부끄럽지 않네 死生不怍可全歸삼순구식해도 오히려 도연명의 밥이 있는데87) 三旬猶有淵明食누더기 옷 입고 어찌 계로의 옷88)을 부끄러워하랴 百結寧慙季路衣요사이 원하는 바에 응대하길 더욱 간절히 하니 轉切邇來酬所願모두 인간만사에 이미 기심을 잊었다네 都將萬事已忘機 此心大處此身微, 微大之間識者稀.天地降衷無缺點, 死生不怍可全歸.三旬猶有淵明食, 百結寧慙季路衣?轉切邇來酬所願, 都將萬事已忘機. 온전하게 돌아갈 원문의 '전귀(全歸)'는 몸을 잘 보존하여 훌륭한 명성을 남기고 생을 마치는 효성을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하게 돌아가야만 효라고 이를 수 있다. 몸을 훼손하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몸을 온전히 했다고 이를 수 있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라고 하였다. 삼순구식(三旬九食)해도……있는데 삼순구식은 한 달에 아홉 번 식사한다는 뜻으로, 끼니도 잊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의미한다. 도연명의 〈의고(擬古)〉 9수 중 제5수에 "동방에 선비 하나, 옷차림 늘 허름하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만나고, 십 년 동안 갓 하나 썼다네. 고달픔 이에 비할 바 없지만, 언제나 즐거운 얼굴이라네.〔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三旬九遇食, 十年著一冠. 辛苦無此比, 常有好容顔.〕"라는 말이 나온다. 《陶淵明集 卷4》 계로(季路)의 옷 계로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자인데, 가난하기 때문에 해진 옷을 입은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자로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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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흠89) 용환 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도하며 聞鞠士欽【庸煥】云亡有悼 슬프다 살아서는 가난했고 哀哉生旣貧죽어서도 집에 노친이 계셨네 死復堂有老늙은 부모가 이 죽음 싫어하여 老人斯惡之매우 초라하게 고장90)했다지 藁葬極艸艸다섯 아들은 살림을 꾸릴 수 없어 五子無以家이리저리 떠돌며 몹시 고초를 겪었네 漂泊經辛惱그댄 참으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으니 君固非凡流신학문을 끊고 오직 옛 것을 배웠네 絶今惟古學가령 그 뜻을 확충했더라면 如使充其志세운 바가 또한 우뚝했을 터인데 所立亦應卓어이하여 객지를 떠돌아다니며 其如長棲屑일이 마음과 서로 어긋났던가 事與心相違예전에 음의 세계로 변하던 날 曩在陰變日명백하게 시비를 변별했으면서 明白辨是非그릇됨을 따른 건 무슨 마음이었나 詭隨何心者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그댈 보았네 視君霄壤懸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今焉至於斯하늘의 보답이 어찌 이리 뒤집혔는가 報施一何顚도도한 그대에겐 괴이할 게 없겠지만 無怪滔滔子저것을 위해 이렇게 하지 않으리라 爲彼不爲此 哀哉! 生旣貧, 死復堂有老.老人斯惡之, 藁葬極艸艸.五子無以家, 漂泊經辛惱.君固非凡流, 絶今惟古學.如使充其志, 所立亦應卓.其如長棲屑, 事與心相違?曩在陰變日, 明白辨是非.詭隨何心者? 視君霄壤懸.今焉至於斯, 報施一何顚?無怪滔滔子, 爲彼不爲此. 국사흠(鞠士欽) 사흠은 국용환(鞠庸煥, 1884~1931)의 자이며, 호는 외재(畏齋)이다. 일제강점기 유학자로 간재(艮齋)의 문인이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저서에 《외재사고(畏齋私稿)》가 있다. 고장(藁葬) 시신을 짚이나 거적에 싸서 예(禮)를 갖추지 않고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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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의 새 사찰 台山新寺 무슨 일로 명산의 절 문에서 쫓겨나 何事名山黜寺門여기에 와서 창졸간에 띠집 세웠나 來玆倉卒起茅椽불상은 옛 터에 남아 있던 바위에 봉안했고 佛安舊址餘存石비용은 이웃마을서 조금씩 돕는 돈에서 나왔네 費出隣村小助錢법계에서 편안히 하루를 머물고 나니 法界居然成一日복전283)에서 길이 천 년을 지낸 듯하네 福田遠矣閱千年우리 사림엔 어찌 맑은 수사가 적은가 吾林豈少淸修士풍상에 부서진 집에 밥짓는 연기도 식었네 風霜破屋冷人煙 何事名山黜寺門, 來玆倉卒起茅.椽佛安舊址餘存石, 費出隣村小助錢.法界居然成一日, 福田遠矣閱千年.吾林豈少淸修士, 風霜破屋冷人煙. 복전(福田) 복(福)을 낳게 하는 밭이라는 뜻인데, 부처를 섬기면 복이 생기는 것이 마치 밭에서 곡식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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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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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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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행130) 【봉흠】에게 답함 答白景行【奉欽】 한 모퉁이의 진귀한 편지가 3년 동안 격조했던 오랜 뒤에 나왔으니, 그 위로되고 시원한 마음 과연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경서를 공부하는 기거가 시절 따라 평안한 줄 알았음에랴. 실로 두 손 모아 축원하던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노쇠한 질병으로 날로 쇠약해지는 것은 이치이니, 어찌하겠는가? 다만 옛날부터 먹었던 옛 학업에 대한 마음은 성취한 것도 없는데 엄자(崦嵫)131)의 광경이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으니, 단지 인생은 되돌리기 어려운 한이 절실할 뿐이네. 보내온 편지에서 나에 대해 일컬은 것은 이것이 어찌 알맞게 비긴 말이라 하겠는가? 매우 부끄럽고 송구하여 감당할 수 없네. 보여준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132)는 표격(標格)이 고매(高邁)하고 사운(詞韻)이 청절(淸絶)하여 읊조린 뒤에 마치 천년 위에서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133)을 보는 것 같았네. 그렇다면 오늘 주인이 요순의 도를 즐기면서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겠네. 운자에 따라 지어 지성스러운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필력이 졸렬하고 의사가 껄끄러워 묘사해 낼 수 없고, 단지 한 수 절구를 지어 대신하네. 문채가 없음이 심하니, 바라건대 보고나서 한 번 웃으며 적료함을 깨뜨리는 자료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착정산 중의 우물 파는 노인 鑿井山中鑿井老지금 우물 몇 길이나 팠는가 如今鑿到幾尋深끊임없이 흐르는 물 솟아나는 것 볼 터이니 會看活水源源出마른 곳 적실 한 잔의 물 따라주길 사양 말게 霑涸休辭一勺斟 一角珍緘。出於三載阻違之久。其爲慰豁。果何如哉。矧審經體起居。對時安謐者乎。實協拱祝。義林衰替病痼。日就澌頓。理也奈何。但宿心舊業。未有所就而崦嵫光景。遽至於此。只切人生難追之恨而已。來喩所以稱道者。此豈着題可擬之語哉。愧悚萬萬。不敢承當。俯示鑿井洞琴操。標格高邁。詞韻淸絶。諷詠以還。如見耕鑿皥皥之象於千載之上。然則今日主人所以樂堯舜之道而囂囂焉者。槩可想矣。切欲追步。以答勤意之萬一。而筆拙意澁。摸寫不得。只構得一絶詩以代之。不文甚矣。幸加視至。以爲一笑破寂之資如何。鑿井山中鑿井老。如今鑿到幾尋深。會看活水源源出。霑涸休辭一勺斟。 백경행(白景行) 백봉흠(白奉欽, 1859~1909)을 말한다. 자는 경행, 호는 명강(明岡),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저서로는 《명강유고(明岡遺稿)》가 있다. 엄자(崦嵫) 엄자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해가 져서 이 산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만년 또는 노년의 비유로 쓰인다. 착정동금조(鑿井洞琴操) 《명강유고》권1에 실려 있다. 경착(耕鑿) 호호(皥皥)의 기상 태평성대의 기상을 말한다. 경착은 밭 갈고 우물 판다는 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뜻이다. 요 임금 때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면서, 내 우물 파서 마시고 내 밭을 갈아서 먹을 뿐이니, 제왕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호호는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덕으로 왕업을 이룬 임금의 백성은 태평하다.〔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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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원123) 【병춘】에게 답함 答閔士元【內春】 이미 안부 편지를 보내 주었고 또 장차 잠시 머물고 있는 평수(萍水)124)를 찾아오려고 하였는데 나를 향한 마음을 알겠으니, 어찌 감사한 마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르겠으나 편지를 받은 이후 여러 날이 되었으니 여행하는 절도는 어떠한가? 병을 조리하는 중에는 바깥으로 사모하는 것을 단절하면 이 때는 독서와 학문에 가장 용이하게 힘쓸 수 있네. 고인 중에 이와 같이 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그대의 옥성(玉成)125)이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우러러 위로하는 마음 매양 진지하네. 또 편지 가득한 말과 뜻은 후회하고 감발하는 지극함이 아님이 없었으니, 이와 같이 마음을 세운다면 어찌 얻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궁벽한 곳에 벗들과 떨어져 쓸쓸히 지내고 있어 보고 들으며 상종할 유익한 벗이 적을 것이니, 이것이 매우 근심스럽네. 양(羊)으로 소[牛]를 대신 하게 한 것은 만약 다른 온당한 방법이 있었다면 맹자가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선왕(宣王)이 행한 것과 맹자가 말한 것이 바로 온당한 방법이었네. 등문공(勝文公)이 끝내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멀리 헤아리는 것은 불가하니, 고인이 이른바 의심스러운 것은 놓아둔다[闕疑]는 것은 정히 이러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이지(夷之)가 다시 찾아뵙고 다시 찾아뵙지 않은 것에 대해 또한 어찌 헤아려 추측할 수 있겠는가? 문인이 매번 찾아가 뵙는 것은 다른 말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실로 번거롭게 다하려는 것은 불가하네. "곡종(穀種)……"이라 한 것은 자라서 결실을 거두니, 이것은 행하여 사업이 된 곳이네. 만약 인의(仁義)의 단서라고 말하면 불가하다고 한 것은 인의의 단서는 정(情)이 아닌가? 인의예지는 성(性)이고, 측은(惻隱)과 수오(羞惡)는 정(情)이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과 정의 경계를 말한 것이 극도로 분명하네. 만약 "측은지심은 인(仁)이다."라고 한다면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기는 듯하니, 이 때문에 한유(韓愈)의 박애(博愛)를 인(仁)이라 한다는 설126)이 후세 사람에게 비판을 당했던 것이네. 다만 맹자 시대에는 성선설(性善說)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아 혹 성이 악하다고 여기고 혹 성이 선악이 섞여 있다고 여겼네. 그러므로 맹자가 사단(四端)을 설명해 내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밝혔네. 대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가리킨 뜻이니, 절대로 한유가 정을 인식하여 성으로 여긴 것과 견줄 것이 아니네. 형이상(形而上)의 것은 도(道)이니, 형상화 된 뒤의 것[形而後]과 함께 상대해서 거론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하네. 기질(氣質)의 성(性)은 실로 성인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본연(本然)의 성은 비록 하우(下愚)라도 또한 가지고 있으니, 어찌 성을 회복하는[復性] 전후를 가지고 기질의 성과 천지의 성을 나누겠는가?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였는데, 성(性)은 인의(仁義)이고, 정(情)은 희노(喜怒)이네. 이 성을 갖추어 이 정을 발하는 것은 심(心)이니, 심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성(性)은 공경(公卿)과 같다고 한 것은 또한 말이 되지 않네. 성(性)은 비유하자면 임금이고, 심(心)은 비유하자면 장수이고, 기(氣)는 비유하자면 졸도이네. 이것으로 보면 심과 성의 구분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네. 旣垂惠存。又且相尋於萍水一宿之地。仰認傾嚮。曷勝感感。未審伊後有日。旅節何似。調病之中。斷制外慕。此時讀書學問。最易爲力。古人多有如此者。則安知吾友玉成。亦不在此乎。慰仰每摯。且滿幅辭意。無非悔恨感憤之至。如此立心。安有不得之理。但僻處離索。少聞見過從之益。此爲悶悶也。以羊易牛。若有他穩當道理。孟子何不言之。宣王之所行。孟子之所言。便是穩當道理也。滕文公之終未有爲。不可懸度。古人所謂闕疑。正指此等事而言也。夷之之更見不更見。亦何可揣測也。門人之每每進見。非有異言可述。則固不可煩悉也。穀種云云。長而結實。是行之爲事業處。若曰仁義之端則不可。仁義之端非情耶。夫仁義禮智性也。惻隱羞惡情也。故孟子曰。惻隱之心。仁之端也此言性。情界至。極其分明。若曰惻隱之心仁也。則似乎認情爲性。是以。韓子博愛謂仁之說。見譏於後人。但孟子時性善之說。不明於世。而或以性爲惡。或以性爲善惡混。故孟子說出四端。以明性之本善。蓋沿流指源之意也。切非韓子認情爲性之比也。形而上是道。不可與形而後。對擧而言之也。氣質之性。固聖人之所無。而本然之性。雖下愚亦有之。豈可以復性前後。分氣質之性。天地之性耶。心統性情云云。性是仁義。情是喜怒。具此性而發此情者。是心也。心之統性情。不亦宜乎。性如公卿。亦不成說。性譬則君也。心譬則將也。氣譬則卒徒也。以此見之。心性之分。槩可知矣。 민사원(閔士元) 민병춘(閔丙春, 1878~?)을 말한다. 자는 사원,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평수(萍水) 부평초가 물위에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객지를 뜻한다. 옥성(玉成) 사람을 옥처럼 훌륭히 완성시켜 준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汝於成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한유(韓愈)의……설 한유가 〈원도(原道)〉에서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한다.[博愛之謂仁]"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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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칠127) 【권주】에게 답함 答金應七【權柱】 노쇠하여 칩거하고 있어 하나의 식지 않은 시체일 뿐이니, 어찌 족히 있으나 마나 한데 사람들 축에 끼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버리지도 멀리하지도 않고 매번 찾아와 주고 거듭 안부 편지를 보내어 전후로 끊임이 없음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네. 이것은 필시 선대인(先大人) 어른께서 살아 계실 때 종유하던 계분을 잊지 않고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이어받으려는 것이니, 고상한 의리에 감복하는 마음이 또 어찌 단지 보통 왕복하던 것과 견줄 뿐이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을 살펴보면, 그 몸가짐과 행동을 삼가고 경계하여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뜻이 대단히 지극하다고 하겠네.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석과(碩果)128)의 소식이니, 매우 기쁘고 기쁘네. 고인의 시에 "이미 밭 갈고 또 씨 뿌려 놓았으니, 때때로 돌아와 내 읽고 싶은 책을 읽노라.[旣耕亦已種 時還讀我書]"라고 하였으니,129) 이것은 그대의 오늘 일이 아니겠는가? 힘쓰고 힘쓰시게. 다시 기원하건대 더욱 아끼고 보중하여 그대에게 향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 해주게. 의림(義林)은 쌓인 병이 오래 되어 원기가 점점 탈진되어 숨이 끊어져 거의 다하려하는 것은 형세이니 어찌하겠는가? 단지 그대로 맡겨 둘 뿐이네. 衰朽跧蟄。一未令尸耳。曷足爲有無。而可以比數於人哉。然而座右。不棄不遐。每賜枉顧。荐辱書存。前後源源。至於如此。此必不忘先大人丈當日遊從之契。而繼其志述其事者也。感服高義。又豈止爲尋常往復之比而已。觀此一事。則其謹身勅行。無忝所生之意。何所不至。先丈逝後。碩果消息。可喜可喜古人詩曰。旣耕亦已種。時還讀我書。此非座右今日事耶。勉之勉之。更祈加愛增重。以慰相向義林積瘁之久。元氣漸奪。㱡㱡垂盡。勢也何爲。只得任之耳。 김응칠(金應七) 김권주(金權柱, 1878~?)를 말한다. 자는 응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석과(碩果)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같은 주석 참조. 고인의……하였으니 도잠(陶潛)의 시 〈산해경을 읽고[讀山海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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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산이 찾아왔는데 과암도 자리에 있었다 2수 圭山見訪, 果菴亦在座【二首】 아침에 봉필190)의 먼지를 깨끗이 쓸고 朝來蓬蓽掃塵淸잠시 만나 우연히 진솔함을 이루었네 少會適然眞率成머리털 일천 가닥은 온통 눈빛이고 鬢髮千莖皆雪色오동나무 한 잎엔 또 가을소리 나네 梧桐一葉又秋聲이치 형세는 웅어191)를 겸하기 어려우나 理形難得熊魚幷심법은 멀리 물과 달처럼 밝기를 생각하네 心法遙思水月明시와 술로 수창하는 우호뿐만이 아니니 不啻詩樽酬唱好서로 도의로써 남은 생애를 권면하세 胥將道義勉餘生오래도록 황하 맑아짐192)을 보지 못했다고 누가 말했나 誰言久不見河淸내 몸을 옥처럼 이루지 못한 것이 스스로 한스럽네 自恨吾身未玉成운당포에선 그래도 금단 소식을 바랄 수 있지만193) 篔鋪猶堪望丹信여릉194)처럼 가을소리를 읊을 필요는 없네 廬陵不必賦秋聲선비가 노년이 되면 절조를 지키기 어렵나니 士當晩節難持守좋은 벗 도움 받아 학문을 더욱 강명해야 하네 學籍良朋愈講明바라건대 오늘 술동이 안의 술을 가져다가 願把樽中今日酒세 물건195) 대신해 올리고 평생을 맹세하세 替供三物誓平生 朝來蓬蓽掃塵淸, 少會適然眞率成.鬢髮千莖皆雪色, 梧桐一葉又秋聲.理形難得熊魚幷, 心法遙思水月明.不啻詩樽酬唱好, 胥將道義勉餘生.誰言久不見河淸? 自恨吾身未玉成.篔鋪猶堪望丹信, 廬陵不必賦秋聲.士當晩節難持守, 學籍良朋愈講明.願把樽中今日酒, 替供三物誓平生. 봉필(蓬蓽) '봉문필호(蓬門蓽戶)'의 줄인 말로 쑥대나 싸리로 만든 문이라는 뜻인데, 가난하여 누추한 집을 이른다. 웅어(熊魚) 곰 발바닥 요리와 생선 요리라는 뜻으로, 의리와 이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하였다. 황하(黃河) 맑아짐 성인이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도래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황하는 천 년에 한 번 맑아진다고 하는데, 남당(南唐)의 이강(李康)이 지은 〈운명론(運命論)〉에 "대저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태어나고, 이사가 울면 성인이 나온다.〔夫黃河淸而聖人生, 里社鳴而聖人出.〕"라고 하였다. 《文選 卷27》 운당포(篔簹鋪)에선……있지만 늙어서도 학문을 이룰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주희(朱熹)가 젊은 시절에 운당포(篔簹鋪)에서 쉬다가 그 벽에 "빛나는 영지는 일 년에 세 번 꽃이 피는데, 나는 유독 어찌하여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하는가.〔煌惶靈芝, 一年三秀, 予獨何爲, 有志不就?〕"라고 쓰인 시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공감한 적이 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뒤에 우연히 다시 그곳에 왔을 땐 그 시가 이미 없어졌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시를 지어 "언뜻 지나가는 백 년 세월 얼마나 되랴. 세 번 꽃 피는 영지는 무엇을 하려는가. 말년에도 금단은 소식 없으니, 운당포 벽 위의 시가 거듭 한탄스럽네.〔鼎鼎百年能幾時? 靈芝三秀欲何爲? 金丹歲晩無消息, 重歎篔簹壁上詩.〕" 하였다. 《朱子大全 卷84 題袁機仲所校參同契後》 '금단'은 도가에서 말하는 복용하면 장생불사한다는 단약(丹藥)으로, 여기에서는 진정한 학문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여릉(廬陵) 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이기 때문에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가을 기운이 만물을 숙살 조락(肅殺凋落)시키는 데에 느낌이 있어 〈추성부(秋聲賦)〉를 지었다. 세 물건 맹약할 때 쓰이는 닭ㆍ개ㆍ돼지의 세 가지 동물을 말한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백씨가 질나팔을 불거든 중씨는 젓대를 부는지라, 너와 더불어 한 꿰미에 있는 듯하노니 진실로 나를 모른다고 할진댄 이 세 물건을 꺼내어 너와 맹약하리라.〔伯氏吹壎,仲氏吹篪,給爾如貫,諒不我知,出此三物,以詛爾斯.〕"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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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암 김장 휴철 에 대한 만시 輓可菴金丈【休哲】 한국 유민의 선비로서 韓國遺民士연재198) 문하에 일찍 귀의했으니 淵門早依歸성실하고 한결같아 다른 재주 없으며 斷斷無他技온화함은 오직 덕의 바탕이었네 溫溫惟德基도공처럼 항상 좋은 안색을 지니고199) 陶公常好顔노생처럼 혼자서 심의를 입었으니200) 盧生獨深衣조문석가201)의 뜻을 朝聞夕可志초당의 편액에서 짐작할 수 있네 菴扁可揣知차마 서하의 아픔202)을 말하랴 忍言西河痛의지할 데 없어 늙을수록 슬프니 煢獨老益悲보답함이 어찌 그리도 어긋났나 報施一何錯하늘은 믿을 수가 없네 上天難諶斯이제 옥국203)의 신선이 되어 今作玉局仙만사를 모두 잊었을 것인데 萬事都忘之하물며 다시 이 세상에 산다면 矧復此世生영화가 아니고 도리어 치욕이네 非榮反辱而아, 뒤에 남은 자들이 堪嗟後死者공을 흠모해마지 않을 때이네 羡公無已時 韓國遺民士, 淵門早依歸.斷斷無他技, 溫溫惟德基.陶公常好顔, 盧生獨深衣.朝聞夕可志, 菴扁可揣知.忍言西河痛? 煢獨老益悲.報施一何錯? 上天難諶斯.今作玉局仙, 萬事都忘之.矧復此世生, 非榮反辱而.堪嗟後死者, 羡公無已時.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이다. 도공(陶公)처럼……지니고 안빈낙도의 삶을 영위하였다는 말이다. 도잠(陶潛)의 〈의고(擬古)〉 9수 중 제5수에 "동방에 선비 하나, 옷차림 늘 허름하네.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만나고, 십 년 동안 갓 하나 썼다네. 고달픔 이에 비할 바 없지만, 언제나 즐거운 얼굴이라네.〔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三旬九遇食, 十年著一冠. 辛苦無此比, 常有好容顔.〕" 하였다. 노생(盧生)처럼……입었으니 일제 치하에서도 전통 선비의 복장을 고수하였다는 말이다. '노생'은 노중(盧中, 1327~1390)으로, 원(元)나라 중기에 태어났으나 유생(儒生)의 복장을 하고 예법을 지켰다. 《遜志齋集 卷22 盧處士墓銘》 '심의(深衣)'는 선비들이 편안하게 거처할 때 입던 편복(便服)으로, 유학자들이 주로 입었다. 조문석가(朝聞夕可)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줄인 말이다. 서하(西河)의 아픔 자식을 잃은 아픔을 의미한다. 《사기(史記)》 권67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하(子夏)는 서하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죽자 통곡하다가 눈이 멀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옥국(玉局) 송대(宋代)의 저명한 도관(道觀)인 옥국관(玉局觀)으로, 소동파(蘇東坡)가 영주(永州)에서 사면을 받고 돌아와 옥국관 제거(提擧)가 되어 한가하게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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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박씨전 孺人朴氏傳 유인 박씨(孺人朴)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지수(枝樹)의 후손이다. 고조는 경옥(慶沃)이며, 증조는 문환(文煥)으로 진사를 지냈다. 조부는 재두(在斗)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영진(英鎭)으로 온화하고 자혜로웠다. 어려서부터 효행(孝行)이 있고 유순(柔順)하여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다. 19세에 사인(士人) 이승우(李承愚)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봉양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부덕이 두루 지극하였다. 남편 집안은 대대로 문학을 일삼아 매우 청빈하였으므로 유인이 집안일을 맡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살림을 꾸려감에 검소하여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집안의 형세가 점차 펴져서 어버이에게 올리는 좋은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 하루는 그 시어머니의 옷상자를 모르게 열어보고는 마침내 자신이 시집올 때 보관해둔 화려한 옷을 꺼내어 빨아서 바꿔 넣었다. 시부모의 물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이처럼 하였다. 만년에 집안이 횡액(橫厄)을 당한 것은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유인(孺人)은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수숙(嫂叔)172) 사이에도 공경이 쇠하지 않았고, 동서 간에 화목함을 잃지 않았으며 어린 조카아이들에게 자애로움이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제가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겨우 6살이 되었을 때 유인이 세상을 떠났다. 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한미한 선비의 아내와 약한 나라의 신하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라 여겼으니,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 쉬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인의 행실과 도덕 같은 경우는 옛날의 정숙한 여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173)하였으니, 지금 남겨진 아들이 어찌 장래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그 어머니의 어짊을 드러내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孺人朴氏。貫密陽。壬辰忠臣枝樹后。高祖慶沃。曾祖文煥進士。祖在斗折衝。考英鎭。溫仁慈惠。自幼以孝順。鍾愛於父母。十九歸士人李承愚。事君子奉舅姑。必誠必敬。婦德周至。夫家世業文學。淸貧殊甚。孺人勤於幹理。儉於調度。夙興夜處。暫不暇逸。是以家力稍紓。而親旨不匱。一日密啓其姑衣篋。遂出己于歸時所貯華服。澣替其色納之。待乏又如之。晩年家遭橫厄。人所不堪。而孺人少無幾微色。平日敬不衰於嫂叔。和不失於娣姒。慈不替於兒姪。是以終孺人之身。兄弟共爨。未有分離。晩得一子。甫六歲。而孺人謝世。君子曰。寒士之妻。弱國之臣。自古以爲難。觀人不於其所易。而於其所難。若孺人之行之德。視諸古之貞女淑媛。可以無愧矣。詩曰。釐爾女士。從以孫子。今所遺子。安知不將來立揚以顯其母氏之賢也耶。 수숙(嫂叔) 형제와 형제의 아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시경(詩經)에……준다 《시경》은 대아(大雅)의 〈기취(旣醉)〉편을 이른다. 이 시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釐' 자를 '주다'라는 의미의 '予'로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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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정씨 십충전 河東鄭氏十忠傳 정공(鄭公) 열(悅)은 자가 구남(懼南)이고 호가 모암(慕庵)이다. 고조 여해(汝諧)는 일두 선생(一蠹先生)121)과 종형제가 되고, 호는 둔재(遯齋)로 지평(持平)을 지냈다. 공은 지향하는 뜻이 고결하고 문장은 해박(該博)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막사로 달려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많았고, 갑자년(1624, 인조2)에 같은 고을 양위남(梁渭南)122)과 배경생(裵慶生)123) 등과 함께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에 달려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또 의병을 모집하여 난리에 달려가다가 완산(完山)에 이르렀을 때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일이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다. 칙(恜)은 자가 충보(忠甫), 호가 우수(愚叟)이며 열의 종형제[從父弟]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문학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효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유격대로 적을 정탐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군수 김득광(金得光, 당시 보성군수)이 왜노를 기습하여 격파하니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다. 예교(曳橋)·첨산(尖山)·노양(露梁)·안치(鴈峙) 등지에서 힘써 싸우다가 많은 적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갑자년과 정묘년에 종형(從兄, 정열을 말함)과 함께 난리에 달려갔다. 인기(仁紀)는 자가 원기(遠期)로 열의 사종제이다. 영특하고 웅대한 자질로 '충의(忠義)' 2자를 허리에 찬 칼에 새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자년의 변란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124)의 막사에 나아가 사흘 동안 연달아 싸워 이겼는데 갑자기 탄알을 맞고 죽었다.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문상(文翔)은 자가 일경(一卿)이며 호가 화은(華隱)으로 칙의 아들이다. 강개한 절개가 있어 정묘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의병으로 나아갔다. 병자년에 안문강공(安文康公)125)을 가서 방략(方略)을 많이 도왔다. 문웅(文熊)은 자가 우경(虞卿)이며 호가 회은(晦隱)으로 열의 아들이다. 지극한 행실이 있으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문리(文鯉)는 열의 종자이다. 의기(義氣)를 좋아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갑자년에 의병으로 나아가고, 병자년에는 문강공을 따라갔으나 얼마 뒤 그만두고 돌아왔다. 부자형제, 숙질 조손이 전후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모두 10명이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온 고을 전체에서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하북(河北)의 열읍(列邑)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다126) 하였다. 이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와 같이 성대한 시대에도 그러한데, 지금 정씨(鄭氏) 한 집안 안에 어찌 충신(忠信)과 의사가 이와 같이 성대하단 말인가. 아, 상(庠)ㆍ서(序)와 학(學)ㆍ교(校)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127)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 성스러운 임금이 잇달아 일어나 유현(儒賢)이 성대하게 일어나고 예의의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기풍이 가득하여 막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그렇다면 정씨(鄭氏)의 열 충신이 어찌 다만 한 집안과 한 고을의 광택이 될 뿐이겠는가. 鄭公悅。字懼南。號慕庵。高祖汝諧。與一蠹先生爲從昆季。號遯齋。官持平。公志尙高潔。文章該洽。早年上庠。聲望藹蔚。壬辰亂。赴崔忠毅公慶會幕。多贊畫。甲子與同郡梁渭南裵慶生等。赴賊适之變。丁卯又募義赴難。至完山。聞賊退還鄕。事載節義錄。恜字忠甫。號愚叟。悅之從父弟也。事親至孝。文學華贍。以孝廉薦除順陵參奉。壬辰從李忠武公舜臣。遊軍覘候。爲賊所執。抗節不屈。旣而爲郡守金得光襲破賊奴。遂得脫。力戰于曳橋尖山露梁鴈峙等地。多所斬獲。甲子及丁卯。與從兄共赴難。仁紀字遠期。悅之四從弟也。英邁雄偉。忠義二字。銘佩腰劒。登武科。甲子之變。以宣傳官赴都元帥張晩幕。三日連捷。忽中丸而死。贈濟用監正。文翔字一卿。號華隱。恜之子也。慷慨有節。丁卯侍親﨣義。丙子從安文康公。多贊方略。文熊字虞卿。號晦隱。悅之子也。有至行。擧孝廉。文鯉悅之從子也。好氣義有膽略。甲子赴義。丙子從文康公。尋罷還。父子兄弟。叔姪祖孫。前後起義。凡十人。外史氏曰。闔郡大都。不擧忠信一人。河北列邑。未有一人義士。此在漢唐之盛而猶然。今鄭氏一家之內。何忠信義士若是彬彬耶。嗚乎。庠序學校。所以明人倫也。恭惟我朝聖聖繼作。儒賢蔚興。禮義之敎浹骨淪膚。而親上死長之風。有藹然不可遏者。然則鄭氏十忠。豈徒爲一家一鄕之光澤哉。 일두 선생(一蠹先生) 일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오현(五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선생유집(一蠹先生遺集)》이 있다. 양위남(梁渭南) 1574~1633.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호는 구봉(九峯)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괄의 난에 격문을 돌리고 정열(鄭悅)·배경생(裵慶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에도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전주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배경생(裵慶生)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유선(由善), 호는 후송(後松)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의리(義理)를 강구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양위남(梁渭南)·정열(鄭悅)·홍덕임(洪德任)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거의(擧義)하였다. 정읍에 이르렀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후송정(後松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장만(張晩) 1566~162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1624년 이괄의 반란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진압한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안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조익(趙翼)의 천거로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항의신편》, 《혼정편록(混定編錄)》, 《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이 있는데, 문집인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하북(河北)에……없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북 지역이 모두 항복하였다. 현종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하북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가?"라고 탄식하였으나, 나중에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크게 기뻐하였다. 《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 卷5 唐 玄宗 天寶14年》 상(庠)……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에 "상, 서, 학, 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으면 소민들이 아래에서 친해집니다.[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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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경헌 이군 행장 敬軒李君行狀 군(君)의 성은 이(李), 휘는 인환(仁煥), 자는 덕재(德哉), 호는 경헌(敬軒)이다. 공주(公州) 사람으로 철종(哲宗) 무오년(1858)에 태어났다. 개국 초기에 공숙공(恭肅公)은 휘가 명덕(明德),82) 호가 사봉(沙峯)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목은(牧隱)83)의 고제(高弟)로 태조의 명신이 되었으니 바로 군(君)의 17대조이다. 16대조 휘 효근(孝根)은 참판을 지냈고, 15대조 휘 종림(宗琳)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4대조 휘 공필(公弼)은 철산 부사(鐵山府使)를 지냈고, 13대조 휘 교맹(嶠孟)은 현감을 지냈으며, 12대조 휘 시돈(時敦)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11대조 휘 경운(慶雲)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10대조 휘 영숙(靈肅)은 공조참의를 지냈다. 9대조는 휘가 위(韡)84), 호가 혁회재(衋悔齋)이고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우산(牛山)85)의 고제(高弟)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으니, 사림이 제사를 지냈다. 8대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를 지냈고, 7대조 휘가 만시(萬蒔)이며 호가 석련(石蓮)은 진사를 지냈으며, 6대조는 휘 계제(桂齊), 5대조는 휘 재후(載厚), 고조는 휘 기형(基馨), 증조는 휘 문갑(文甲), 조부는 휘 택무(擇茂), 아버지는 휘 민채(敏采)이며 문행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돈후하고 품성이 인자하였다. 어려서부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였으며, 말하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는 자들이 칭찬하였다. 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나 위기(爲己)의 학문86)을 알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스스로 손수 베꼈다. 남의 선을 보기를 자기가 지닌 것처럼 하고, 남의 악을 보기를 자기 몸의 병처럼 여기니 원근의 붕우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밤낮으로 책상을 대하였는데, 만약 의아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장덕(長德, 나이 많고 덕행이 있음)인 계남(溪南)87)과 애산(艾山) 및 최면암(崔勉庵)과 기송사(奇松沙)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제대로 알지 못하면 놓아두지 않는88) 뜻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어버이가 연로한 날에 곁에 형제가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몸에 병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 유람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봄날 날씨가 따뜻할 때나 가을바람이 쓸쓸할 때마다 번번이 벗을 맞이하여 술을 싣고서 높은 곳에 올라 소요(逍遙)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으니, 그 드넓은 흉금과 표일한 자취가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초월한 기상이 있었다. 평소의 몸가짐은 법도가 있고 말을 냄에 문장이 있었으며, 자상한 뜻은 가정에 넘쳐나고 화락한 풍모는 고을에 두루 미쳤다. 남이 곤경에 처함을 보면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 줄 모르고 반드시 구휼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흉년을 만나면 의식을 절약하여 그 남은 것을 미루어 친족과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이르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난리 때 마을이 흉흉하였는데, 군(君)은 태연히 스스로의 지조를 잘 지키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산으로 골짜기로 피난가는 매우 험난한 상황에 처하여도 자정(自靖)하려는 뜻이 더욱 확고하였다. 을미년(1895) 단발의 변란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89)은 한강 북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송사 기우만은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나는 군(君) 및 여러 벗들과 약속하여 송사에게 가서 원수를 함께 치려고 하였는데90) 그 울분과 강개함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소에 권문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고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세속의 명성이나 이로움,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친척의 무리가 혹여 당시에 등용되어도 돕지 않았으며, 수령의 관원이 혹 세력을 이용해 불러도 가지 않기도 하였으니, 남의 권세를 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임인년(1902) 5월 18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도장면(道莊面) 정천촌(淨川村) 뒤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해남 윤씨(海南尹氏) 주봉(柱琫)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일(基一)과 기복(基福)이며, 딸은 하동(河東) 정귀채(鄭貴采)와 제주(濟州) 양모(梁某)에게 시집갔다. 아, 이같이 순후한 자질과 화통한 재주로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며 종유하고 강마(講磨)하여 안목이 점차 열리고 기세가 한창 올랐으니, 누가 천 리를 가는 수레를 중도에 그치고 백 번 단련한 금을 중간에 훼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군보다 나이가 좀 더 많고 교분을 맺음이 조금 늦었지만 서로 뜻이 맞아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서로 종유하며 세한(歲寒)91)에도 서로 지키려는 생각을 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지금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났단 말인가. 종유했던 오랜 벗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없으니 군을 아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고 난 뒤에 사적을 길이 전할 책임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는가. 그 대강을 간략히 서술하여 그의 아들에게 주어 그가 조금 자라거든 이 글을 보고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고 계술(繼述)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노라. 君姓李。諱仁煥字德哉。號敬軒。公州人。以哲宗戊午生。國初恭肅公諱明德號沙峯贈右議政。以牧隱高弟爲太祖名臣。卽君之十七世祖也。十六世諱孝根參判。十五世諱宗琳吏曹參議。十四世諱公弼鐵山府使。十三世諱嶠孟山縣監。十二世諱時敦戶曹參判。十一世諱慶雲同知敦寧府事。十世諱靈肅工曹參議。九世諱韡號衋悔齋中生員。以牛山高弟。倡丙子義旅。士林俎豆之。八世諱東鳴進士。七世諱萬蒔號石蓮進士。六世諱桂齊。五世諱載厚。高祖諱基馨。曾祖諱文甲。祖諱擇茂。考諱敏采。以文行著世。君天姿敦厚。稟性仁慈。自幼入孝出恭。語輒驚人。見者稱之。君早孤靡依。知爲己之學。心經近思錄等書。自手謄書。見人之善。若已有之。聞人之惡。若已之病。朋友遠近。莫不心悅誠服。日夕對案。若有疑訝。則必走書於諸長德溪南艾山及崔勉庵奇松沙而咨決之。其不得不措之意如此。然親老之日。傍無兄弟。親沒之後。身有疾病。是以未得遠遊以造其門。常以爲恨。每當春日和煦。秋風蕭散之時。輒邀友載酒。登臨徜徉。竟日而歸。其曠襟逸躅。悠然有出俗超塵之象。平日持身有法。出言有章。慈詳之意。溢於家庭。愷悌之風。遍於鄕閭。見人在阨。不知己力之不逮。而必周恤之無已。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及族戚隣里之貧者。甲午之亂。閭里汹汹。君晏然自持。少不爲撓。至於奔山竄谷。備極艱險。而一端自靖之志。愈益確如也。乙未薙削之變。柳毅庵麟錫擧義漢北。奇松沙擧義湖南。余約君及諸友。擬赴松沙同仇。見其忿憤慷慨。終始不渝也。平日不入要門。不見要人。於聲利芬華。漠然若無所好。親表之屬。或爲時用而不援之。守宰之官。或以勢邀而不往之。其忘人之勢如此。壬寅五月十八日。以疾終於家。葬道莊面淨川村後庚坐原。配海南尹氏柱琫女。生二男二女。男基一基福。女適河東鄭貴采濟州梁某。嗚乎。以若醇厚之質。開爽之才。立心爲己。遊從講磨。眼目漸滑。步趨方張。誰爲千里之駕。止於中途。百鍊之金。毁於半功哉。余於君。雖年紀稍長。結交差晩。而密勿相得。間關相從。爲歲寒相守之計者。顧何如。而今乃棄我如遺耶。從遊知舊。十亡八九。知君者不可謂非我。然則身後不朽之責。豈在於他人乎。略敍其梗槪而授之遺胤。待其稍長而見之。俾知厥者之心。而思所以繼述云爾。 명덕(明德) 이명덕(李明德, 1373~ 1444)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시호는 공숙(恭肅),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1396년(태조5)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ㆍ장령(掌令)ㆍ사인(舍人)ㆍ집의(執義)ㆍ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ㆍ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시에 합격하여 대제학,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위(韡) 이위(李韡, ?~?)이다. 화순 출신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을 성취하고, 「분의편(奮義篇)」과 「계자서(戒子書)」를 저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동지들과 안방준을 도와 서기가 되고, 말을 달려 여산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1660년(현종 1)에 생원시에 올랐고, 효행으로 여러 번 도천(道薦)에 올랐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가선 대부 동지중추에 제수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충효전(忠孝傳)」을 지어 극찬하였다. 사림이 칠송리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춘추로 향사한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또 다른 호는 은봉(隱峰)이다.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효종 초에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은봉전서》ㆍ〈항의신편(抗義新編)〉ㆍ〈호남의록(湖南義錄)〉ㆍ〈혼정편록(混定編錄)〉ㆍ〈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을 남겼다 위기(爲己)의 학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제대로……않는 《중용장구》 제20장에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잘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라고 하였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星), 호는 의암(毅庵)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어받았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12월 24일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며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저서로 《의암집》이 있다. 원수를……하였는데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세한(歲寒)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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