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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처사 김공 경범전 大谷處士金公景範傳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석귀(錫龜),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며, 계파는 가락(駕洛)에서 나왔다. 6대조 재록(載祿)이 남양(南陽)에서 남원(南原)으로 와 머물렀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는 정삼(鼎三), 조부는 재곤(再坤), 아버지는 낙현(洛賢)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공은 헌종 을미년(1835, 헌종1)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처음 학교에 나아가 동학(同學)들이 《소학》을 읽는 것을 보고 곁에서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더니, 앉을 때에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행동할 때에 반드시 삼가고 찬찬히 하였으며, 쇄소(灑掃)와 정성(定省)128)을 하나하나 준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학》을 수업 받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8세에 들어가는 《소학》은 지금은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책을 끼고 집으로 돌아가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강습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때에 곡성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이곤수(李崑壽)129)라는 분이 명망이 높은 선배 대학자로 행의가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를 따랐다. 18세에 노사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고서 학문하는 방법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광주(光州)의 대곡(大谷)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문(師門)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마저 자주 걸렀으며, 직접 밭을 갈고 손수 호미질하여 어버이의 음식을 장만하였다. 학당에 들어가 독서130)하며 생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곁에서 부지런히 시중들며 안팎으로 수응(酬應)하였다. 다시 여가의 시간이 나면 시를 수창하고 정서를 함양하여 성현의 뜻을 구하였으며, 면밀히 연구하고 생각을 펼쳐서 사물의 은미한 뜻을 끝까지 궁구하였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몸소 살펴 실천하는 실상을 다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과묵하게 본원의 요체를 함양하였다. 그 일상생활의 절도는 정확한 규범이 있었으니, 마음을 세우는 것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아 비록 홀로 방구석131)의 깊고 은밀한 곳에 있을지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였고,132)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근본을 삼아 비록 평소 사사로운 자리에서 다급한 때라도 언제나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었다. 스스로 기약함은 성인으로 기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미치지 않으면 문득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고, 스스로의 임무는 천하를 자신의 법도로 삼아 한 가지라도 빠짐이 있으면 반드시 나의 기운이 관여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 뜻을 바르게 하여 따지거나 피하려는 뜻이 없었고, 남을 대할 때에는 인(仁)을 드러내어133) 시기하거나 원망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청렴하고 절개가 있어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134) 기량(氣量)은 바다가 만곡(萬斛)을 실은 배를 포용하듯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문사(文辭)로 말하자면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135) 비록 그다지 귀하지는 않아도 일상생활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았고, 출처(出處)할 때에는 궁벽한 마을에서 늙어 죽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136)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었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에서부터 일용의 전례(典禮)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고 분석[勘覈]하여 조리가 서로 이어졌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자 자잘한 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긍지(矜持)하던 것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마디 말과 행실에 이르러서는 안배(按排)하거나 조작(造作)한다든지 주저하거나 구차스러운 모양이 전혀 없었다. 노선생(老先生, 노사(蘆沙) 선생을 가리킴)의 초상 때 장례에 모인 수천 명이 공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추대하여 상례(相禮)137)로 삼았으니, 제작(制作)의 근원을 미루어 근본하고, 손익(損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의절(儀節)을 정하여 행하였다.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늙어 집으로 물러나서는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못할까, 예전의 학업이 성취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에게 관대함이 없었다. 을유년(1885, 고종21) 8월 8일 묵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벗 정의림(鄭義林)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시대가 정주(程朱)로부터 멀어져 의론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후생(後生)이 늦게 진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할 바를 모르지만, 그 대공지정(大公至正, 지극히 공변되고 올바름)하여 사람들을 모아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강토(疆土)를 예전처럼 깨끗할 수 있게138)138) 깨끗할 수 있게 : 원문의 '확청(廓淸)'은 부정(不正)ㆍ악습(惡習)ㆍ부패(腐敗) 등을 없애어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한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만약 공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에 대해 선생께서 한마음으로 홀로 터득한 신묘한 이치를 가슴속에 품어둔 채로 거의 누구에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특별한 지우(知遇)라고 할 만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으로 통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벗을 사귐에 그 뜻이 숭상하는 바를 살펴봄이 매우 많았다. 그 평생에 소소한 출사(出仕)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지적하여 논의할 수 있는데, 초연히 멀리 떠나와서 종시토록 얽매임이 없는 자는 누구이며, 갖은 고생 끝에 야유(揶揄, 남을 빈정대며 놀림)가 심한데도, 당당하게 어떠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학문을 널리 닦고 예(禮)로 자신을 검속하는 공부139)가 서로 닦여 함께 이르렀는데도,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용(體用)이 있는 자는 누구이며, 넓으면서도 잡스럽지 않고 번다하고도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를 가지고 있되 속이 좁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화락하게 절로 탄복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아, 나는 공에게서 이러한 것을 보았도다. 공의 도는 비록 그 시대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공의 풍도를 듣고 공의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말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세 뒤에도 그와 함께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신으로 사귀고자140) 하는 것임을 알리라. 옛날 채백개(蔡伯諧)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명(碑銘)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141) 나도 내가 지은 이 전(傳)에 대해 또한 그렇게 말할 뿐이다. 公姓金。名錫龜。字景範。號大谷。系出駕洛。六世祖載祿。自南陽寓南原。子孫仍居焉。曾祖鼎三祖再坤考洛賢世有隱德。公以憲宗乙未生。幼而岐嶷。初就塾。見同學有讀小學者。側聽其所受。坐必端拱。行必周折。灑掃定省。一一遵循。因以小學請業。塾師曰。八歲小學。今不可行也。遂挾冊歸家。淨掃一室。講習有程。時寓谷城地。聞同縣李崑壽。以先進宿碩。行義偉然。遂從之。十八贄謁蘆沙先生。得聞爲學之方。挈家寓光州之大谷。蓋就近師門計也。家貧甚。菽水屢空。躬耕手鋤。供給親旨。入塾行墨。課授生徒。左右服勤。內外酬應。更於暇日餘力。諷詠涵暢以求聖賢之旨。硏精覃思以極事物之蘊。鞭辟體察以盡踐履之實。恬靜澹默以養本源之要。其日用節度。的有成規。立心以忠信爲主。雖幽獨屋漏之地。而可以對越上帝。持己以端莊爲本。雖燕私造次之時。而常若卓然山立。自期以聖人爲準。以爲一毫不及。便是吾事未了。自任以天下爲度。以爲一物有闕。便是吾氣不管。處事則正其義而無計較趨避之意。接物則顯諸仁而無忌克怨尤之心。廉介則係馬千駟而不顧也。氣量則海涵萬斛而不見其涯也。文辭則菽粟布帛。雖不甚貴而日用不可無也。出處則老死窮巷而枉尺直尋。有所不屑也。自太極性命。至於日用典禮。鑽硏窮覈。倫類相次。日久月深。零碎者融會。矜持者純熟。至於一言一行。絶無安排造作依違苟且之狀。老先生之喪。會葬者數千人。推公及艾山載圭爲相禮。推本制作之源。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持服三年。退老於家懼師道之無傳。舊業之未就。刻苦激勵。不以衰且病有少恕焉。乙酉八月八日。以宿疾終。享年五十一。其友鄭義林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此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義林自少小。取友視志。非不多矣。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倂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怡然自服者何人。嗚乎。吾於公見之矣。公之道。雖不得行於一時。而聞公之風。讀公之書者。必有知斯言之非阿好。而欲與之心會神交於百世之下矣。昔蔡伯諧以郭有道碑銘爲無愧。余於此傳亦云爾。 쇄소(灑掃)와 정성(定省) 쇄소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제자(弟子)된 예의를 말하며, 정성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을 말한다. 이곤수(李崑壽) 1808∼1888. 자가 이회(而晦)이고 호가 심재(心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천품이 단아하고 효도의 마음을 극진히∨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관통하였으며. 홍매산(洪梅山)과 기노사(奇蘆沙)에게 출입하며 종유(從遊)하였다. 저서로는 《심재집(心齋集)》이 있다. 독서 원문의 '행묵(行墨)'은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고 글자만 따라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독서에 대한 겸사이다. 방구석 원문의 '옥루(屋漏)'는 고대에 실내(室內)의 서북쪽 모퉁이에 장막을 치고 신주(神主)를 모시던 곳을 이르는데, 전하여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음을 보니, 여기서도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게 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고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인(仁)을 드러내고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인에 드러나며 용에 감추어져, 만물을 고무하되 성인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성덕과 대업이 지극하도다.[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은 인자한 공덕을 발휘하여 만물에 은혜를 입히고, 그 공적을 은밀히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유능한 인재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비유한다. 말……않았으며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상탕(商湯)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 곡식이나 포백은 의식(衣食)의 주요 물품으로서, 이것은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전하여 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히 유익한 사물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에 절실한 문장을 의미한다. 한……펴는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도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다. 만일 이로써 말한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로울 경우에도 그것을 하겠는가?[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상례(相禮) 관례를 올리는 당사자를 인도하여 예를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문을……공부 박문(博文)은 학문을 널리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으로 도문학(道問學)에 속하고, 약례(約禮)는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것으로 존덕성(尊德性)에 속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이르기를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하였다. 정신으로 사귀고자 원문의 '신교(神交)'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다만 정신으로 사귄다는 말이다. 채백개(蔡伯諧)가……하였으니 사실에 입각하여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128~169)를 가리킨다. 채옹(蔡邕)이 그의 비문을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란 제목으로 짓고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모두 그 덕(德)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오직 이 사람의 비문은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8 高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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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묵재 문공전 敬默齋文公傳 문공의 휘는 영찬(永瓚), 자는 사규(士圭), 경묵(敬默)은 그이 서재 이름이다. 계파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중엽(中葉)에 단성(丹城)으로부터 능주(綾州)로 옮겨와 머물러서 대대로 유림(儒林)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증조는 휘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는 휘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아버지는 휘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형구(馨久)의 따님으로 영조 기묘년(1759, 영조35)에 능주 백암리(白巖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4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142) 지나치게 애통해하니 이웃 사람들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부지런히 일해 봉양하고 입에 맞는 음식이나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계모(繼母) 정씨(鄭氏)를 섬김에 그 순순히 받들기를 지극히 하니 조금도 흠잡는 말이 없었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 동안 바람과 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여막을 이용해 서실을 지어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니 무덤 아래 마을 사람들이 그 뜻에 감동하여 온 산 하나를 문씨의 땅이라고 하고 서로 경계하며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 아우 2명은 영권(永權)과 영국(永國)이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말 한 마디도 화순함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공이 문묘(文廟)에 예기(禮器)가 부서진 것을 보고 이에 법제를 강구해서 중수하여 한껏 새롭게 하였다. 능주의 북쪽에 개와 평전(蓋瓦坪田) 수천 이랑이 있었는데, 예부터 도랑에 물을 댈 수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공이 형세를 헤아려 둑을 쌓고 도랑을 통하게 하였으니 이에 땅이 비옥하게 되고 풍년이 들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물을 건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공이 돌을 운반하여 다리를 놓아 옷을 입거나 걷고 건너는143) 근심을 없게 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이가 많았는데, 공이 의연금을 내고 진대(賑貸, 진휼(賑恤)하여 빌려 주던 일)하여 살아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 자상하고 화락하며 넓고 단아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마음을 쏟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가친척들로부터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받고 향당으로부터 공손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붕우(朋友)는 그 믿음을 칭찬하고 사림(士林)은 그의 현명함을 칭찬하여 아녀자와 종들까지도 군자다운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2월 10일 정침(正寢,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서 향년 57세로 생을 마쳤다. 선영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100년 안팎이 되었다. 우리 조정의 문명(文明)이 전성(全盛)한 운세가 공의 대에 와서는 해가 중천에 뜰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당시의 공경대부 및 향리 사족들을 볼 때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풍류가 돈후하고 기상이 드높아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왕왕 이와 같았으니, 이는 열성(列聖)께서 배양하심이 깊고 선정(先正)이 찬조(贊助)한 두터운 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문묘(文廟)에 들어가 제사 돕는 일을 맡은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개와평(蓋瓦坪)을 지나 백암교(白巖橋)를 건넌 것도 또한 여러 번이었지만, 아직껏 뇌준(罍樽)144)과 변두(籩豆)145)를 수리하고, 관개(灌漑)와 제도(濟渡)를 설행한 것이 일찍이 공에게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이목(耳目)의 고루함이 어쩌면 이 정도란 말인가. 아, 백성들 일상생활의 중대한 일들이 그의 공로에 힘입었는데도 그 공로를 알지 못하고, 그의 덕을 누리고도 그 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일 뿐이겠는가. 불행히 문명이 전성한 날에 태어나지 못하고, 또 불행히 선진(先進)146)이 계시던 100년 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여 그 글을 읽고 그 풍성을 칭송함에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통탄스럽고 더욱 그리워하게 할뿐이다. 이에 감히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전을 짓는다. 文公諱永瓚。字士圭。敬默其齋號也。系出南平。中葉自丹城寓綾州。世爲儒林名家。曾祖諱命吾贈掌樂院正。祖諱喜孟贈戶曹參議。考諱弼鎭贈戶曹參判。妣興陽李氏馨久女。以英宗己卯。生公于州之白巖里。幼而岐嶷。異於凡兒。四歲遭內艱。孺慕過哀。隣里釀涕。家素貧甚。服勞就養。適口便身。無不周備。事繼母鄭氏。極其承順。了無間言。戊申丁外艱。廬墓三年。風雨不廢。服闋。因廬爲齋。以寓終身之慕。墓下村人感其義。環一山爲文氏地。相戒勿侵焉。弟二人。曰永權永國。友愛甚篤。自幼至老。未有一言違和也。公見文廟禮器殘缺。乃講求法制。重修而一新之。州之北。有蓋瓦坪田。可數千頃。古無溝洫可漑。民多見旱。公相度形便。築堤通渠。於是土沃而歲熟。所居濱江。人常病涉。公運石成橋。俾無揭厲之患。甲戌大無。民多餓殍。公出義賑貸。所活爲數百人。其慈祥愷悌。博雅長厚。眷眷於利人澤物者。皆此類也。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朋友稱其信。士林稱其賢。以至婦孺輿儓。莫不以君子人目之。乙亥二月十日。考終于正寢。享年五十七。葬于親塋丑坐之原。後生鄭義林曰。今去公之世爲一百內外年矣。我朝文明全盛之運。至公之世。不啻爲日中之昃。而每見當時公卿大夫及鄕里士族。治家有法。行己有恥。風流篤厚。氣像藹蔚。可以爲後世模範。往往如此。列聖培養之深。先正贊助之厚。可以推矣。余嘗入文廟而執助祭之役者累矣。過蓋瓦坪。渡白巖橋者。亦數矣。而尙未知罍樽籩豆之修。灌漑濟渡之設。曾在於公。其耳目固陋。一至於是耶嗚乎。民生日用大小大事。賴其功而不知其功。食其德而不知其德者。豈但此一事也。不幸而不生於文明全盛之日。又不幸而不生於先進百年之世。讀其書誦其風。徒使人痛歎而增懷也。玆不敢以昧劣辭。謹爲立傳云爾。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 원문의 '유모(孺慕)'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듯 깊이 사모함을 말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유약(有若)이 자유(子游)와 함께 어린애처럼 사모하는 자를 보고 자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중에 발을 구르는 의미를 전혀 몰라서 없애고자 한 지가 오래였는데, 슬퍼하는 정이 이 발 구르는 데에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옷을……건너는 원문의 '게려(揭厲)'는 《시경》〈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 "깊거든 옷 입은 대로 건너고, 얕거든 옷을 걷고 건널 것이다.[深則厲 淺則揭]"를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시경》 주(註)에 "옷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을 여,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을 게라 한다.[以衣而涉曰厲 蹇衣而涉曰揭]"라고 하였다. 뇌준(罍樽) 청동으로 만든 호형(壺形)의 술 단지이다. 양효왕에게는 뇌준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양효왕이 죽을 적에 많은 재산과 보물이 있었는데도 유독 이 뇌준을 아끼어 "이 뇌준을 잘 보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라."하였다. 그 뒤에 이 뇌준을 차지하기 위하여 친족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史記 卷58 梁孝王世家》 변두(籩豆) 변(籩)은 과일이나 포(脯)를 담기 위하여 대를 엮어서 만든 그릇이고, 두(豆)는 식해나 김치 등을 담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그릇이다. 흔히 제기(祭器)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선진(先進) 학문이나 지위가 남보다 앞서거나, 어떤 분야에서 연령, 지위, 기량 등이 앞서는 사람, 즉 선배와 같은 뜻이다. 공자가 "선진이 예악에 야인이요, 후진이 예악에 군자라고 하나니,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진의 것을 쓰리라.[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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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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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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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취곡 조공전 翠谷曺公傳 공의 휘는 여흠(汝欽)이고, 자는 사명(士明)이며, 취곡(翠谷)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계파는 창녕(昌寧)에서 나왔는데 대악서(大樂署)를 지낸 승겸(承謙)이 그의 원조(遠祖, 고조 이전의 먼 조상)가 된다. 철야군(鐵冶君)을 지낸 정통(精通)과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경식(景湜)은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부 청(淸)은 문과 급제하고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증조부 효신(孝信)은 유일(遺逸)147)로 광양 현감(光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조부 걸(傑)은 호가 묵헌(默軒)이며 은덕(隱德)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언인(彦仁)은 호가 만은(晩隱)으로 장예원(掌隷院)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의젓하고 총명하며148) 재주가 영민하였다. 3세에 육갑(六甲)을 외우고, 4세에 《효경》을 배웠으며, 5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한번 보면 외웠다. 6~7세에 글을 짓고, 9세에 《대학》을 읽어 대의(大義)를 살폈다. 이때부터 사자 육경(四子六經)을 차례로 관통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눈물을 머금고 패수를 건넌다'[含淚渡灞]'는 구절149)을 읽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15세에 율곡 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자 선생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칭찬하고 매우 아꼈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떨쳐버리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보존하여 기르고 독실히 실천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로 지물(志物)의 봉양150)에 빠뜨림이 없었다. 병환이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였으며,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한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몸으로 어버이의 병을 대신하도록 빌었다. 정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151) 대개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힌 것152)이었다. 용강(龍岡)의 기슭에 학당을 짓고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끊고 학문을 익히는 데에 마음을 다하니 원근의 사우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모인 자가 매우 많았다. 은병학규(隱屛學規)153)에 의거하여 과정(課程)을 세우고 정성껏 인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사람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남보다 낫기를 힘쓰고 처신함은 항상 남에게 낮추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시문(時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체)을 일삼는 자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덕을 지닌 자는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154) 성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끝내 문장의 오묘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55), 지천(芷川) 김공희(金公喜)156),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7), 서곡(書谷) 임분(林賁, 1501~1556) 등 명가(名家)들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석천이 공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호산의 비범한 기상에 규성이 내려와158) (湖山奇氣降奎躔)젊은 나이159)에 남두160)의 향기로운 명성 떨쳤네 (南斗香名屬妙年)문장의 이치 깨우침은 오히려 여사요 (文章契悟猶餘事)집안에서 의를 행함은 천성대로 하는구나 (行義居家素性然)만력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31세였다. 2남을 두었는데, 주부를 지낸 장일(長日)과 장두(長斗)이다. 외사씨(外史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공은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161) 학문을 연마하고 넓혀나간 것이 이처럼 성대하였지만, 멀고 외진 곳에서 재능을 감추고 수명도 또 길지 않아서, 나아가서는 그 의를 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그 도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서로 도모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아, 우리 조정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께서 다스리던 밝은 세상에 태어나 살았으며,162) 이 문성 선생(李文成先生, 이율곡)을 스승으로 삼아 수사낙민(洙泗洛閩)163)의 학문을 얻어 들었으니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수명의 길고 짧음이 어찌 경중이 되겠는가. 公諱汝欽。字士明。翠谷其號也。曺氏系出昌寧。以大樂署承謙爲遠祖。鐵冶君精通。忠淸監司景湜。皆其中葉顯祖也。高祖淸文科淸道郡守。曾祖孝信遺逸除光陽縣監。祖傑號默軒。隱德不仕。考彦仁號晩隱。以掌隷直長。歸老鄕里。以嘉靖己酉生。公體質岐嶷。才性穎悟。三歲誦六甲。四歲授孝經。五歲讀小學。一覽成誦。六七歲能綴文占句。九歲讀大學。究見大義。自是四子六經。次第淹貫。讀韓文公含淚渡灞之句。歎曰。君子自處。當勉其在我者而已。何必乃爾。成童贄謁栗谷先生。先生見而異之。稱許甚重。自是刊落擧業。專以存養踐履爲主。事親也怡色婉容。志物無闕。有疾則衣不解帶。夜不就枕。露禱稽顙。祈以身代丁卯中司馬。蓋爲親屈也。結塾於龍岡之麓。杜門絶迹。專心治學。遠近士友。聞風來集者甚衆。依隱屛學規以立課程。諄諄誘掖。多所成就。嘗戒人曰。學問則務勝於人。處己則常屈於人。又戒人之業時文者曰。有德者有言。全昧性理之學者。終不得文章之妙。與林石川金芷川白玉峯林書谷諸名勝爲道義交。石川贈公詩曰。湖山奇氣降奎纏。南斗香名屬妙年。文章契悟猶餘事。行義居家素性然。萬曆己卯終。享年三十一。二男。曰長日官主簿。曰長斗外史氏曰。公以英才偉器。早年發軔。琢磨展拓。若是其盛。而潛光遐隅。壽又不遐。使進不得行其義。退不得傳其道。豈天人之不相謀。有如是耶。嗚乎。生於我朝明宣日中之世。以李文成先生爲師而得聞洙泗洛閩之學。則不可謂不遇於世矣。亦不可謂不遇於人矣。彼位之崇卑。壽之長短。曷足爲軒輊哉。 유일(遺逸) 숨은 인재, 즉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유일로 천거되면 왕이 불러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의젓하고 총명하며 원문의 '기억(岐嶷)'은 《시경》 〈대아(大雅) 생민(生民)〉에 "실로 기어서 능히 숙성(夙成)하였다.[誕實匍匐, 克岐克嶷.]"고 한 데서 온 말로,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형용할 때 쓰는 말이다. 한문공(韓文公)의……구절 한유(韓愈)의 시 〈현재에서 생긴 감회[縣齋有懷]〉에 "서책을 품고 황도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푸른 파수 건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한유가 정원(貞元) 11년 박학굉사시(博學宏詞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경사(京師)를 떠나 낙양(洛陽)으로 간 사실을 읊은 것이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이후 보편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거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파수를 건넌다[渡灞]'라고 표현한다. 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정묘년에……합격하였으니 조여흠은 1567년(丁卯, 명종22) 당시 19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 47위로 합격하였다. 어버이의……것 한(漢) 나라 모의(毛義)가, "태수 사령장을 받고 기뻐한 것은 늙은 부모를 위해서이다[奉檄而喜爲親屈也]." 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69 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序》. 은병학규(隱屛學規)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천(石潭川)에 은거하면서,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던 것을 본떠서, 1576년(선조9)에 석담천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 《輿地圖書 黃海道 海州》 덕을……있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이 있지만,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하였다. 임억령(林億齡) 1496~1568.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태수(太樹), 호는 석천이다. 을사사화 때 아우 임백령(林百齡)이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저서에 《석천집》이 있다. 김공희(金公喜) 1540~160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지명(之明)·지천(芝川)으로 조선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1564년(명종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사관(從事官), 영광 군수를 거쳐 남원 부사를 지냈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이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 불리며 당풍의 시들을 남겼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를 즐겼다. 저서로 《옥봉집(玉峰集)》이 전한다. 규성이 내려와 규전(奎躔)은 28수(宿)의 하나인 규성(奎星)의 자리로, 그 별자리의 모양이 문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문장(文章) 혹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젊은 나이 원문의 '묘년(妙年)'은 '묘령(妙齡)'과 같은 말로 20세 전후의 젊고 꽃다운 나이를 뜻한다. 남두 이십팔수의 하나인 두수(斗宿)로, 남쪽 하늘에 여섯 별로 구성되었으며, 북두칠성같이 술구기 모양이어서 남두(南斗)라고 하였다. 벼슬을 시작하여 원문의 '발인(發軔)'은 수레바퀴의 버팀목을 빼고 수레를 출발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젊어서부터 청운의 벼슬길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조여흠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명종(明宗)과……살아 조여흠은 기유년(1549, 명종4)에 태어나 기묘년(1579, 선조12)에 세상을 떠났으니 명종과 선조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수사낙민(洙泗洛閩) 유학을 말한다. 수사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 곡부 근처를 흐르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인데, 공자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였기 때문에 대개 공자와 그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낙민은 송나라 때의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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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돈녕부사 영헌 조공전 同敦寧瀛軒曺公傳 영헌(瀛軒) 조공(曺公)의 휘는 석우(錫祐)이며, 자는 찬경(燦卿)이다. 고려조 평장사 문충공(文忠公)인 휘 용기(用奇)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휘 극인(克仁)에 이르러 우리 단종 조에 흥양(興陽)으로 은둔하였으므로 자손들이 여기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 명상(命祥)은 사헌부 장령에 증직되었고, 조부 윤승(允承)은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순진(順振)은 공조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세상에 행의가 드러났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광우(光佑)의 딸로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으며, 순조 임진년(1832, 순조32) 2월 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공손히 응대함과 나아가고 물러남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몸이 바짝 마르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끝없이 슬피 울부짖으니 이웃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친을 섬길 적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 입고 먹는 물질적인 봉양과 마음으로 뜻을 받드는 봉양에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친이 병환이 있을 때 근심을 다하였고 대변의 달고 씀을 맛보아 병세의 덜하고 더함을 징험하기까지 하였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이미 기애(耆艾)164)의 나이인데도 몸을 지나칠 정도로 훼손하였고, 여막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3년을 마쳤다. 이를 미루어서 친척과 붕우에게까지 은혜와 의리가 모두 지극하여 각각 환심을 얻었다. 고을과 도내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효성스럽고 청렴함으로 천거하니 금상(今上) 임진년(1892, 고종9)에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고, 계사년(1893)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승진하였으며, 갑오년(1894)에 돈녕부 동돈녕(敦寧府同敦寧)으로 승진하여 3대가 추증을 받았다. 경자년(1900) 10월 3일에 생을 마쳤다. 5남을 두었는데, 경수(暻洙)·흥수(興洙)·인수(仁洙)·문수(文洙)·기수(錤洙)이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상고에는 질박함165)이 흩어지지 않고 인문(人文)이 번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속이 순후(醇厚)하고 간략하며, 백성들이 오복(五福)을 누리는 것166)이 두터웠으나 속임수와 간교함이 날로 더욱 무성하여서는 재앙이 일어났다. 공의 평소 행적을 살펴보니 질박하고 성실한 천성을 온전히 하여 꾸미거나 모방하는 뜻이 있지 않았으니 또한 지금 사람이면서 옛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후대 자손이 번성하고 작위와 은총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는 선을 닦아봐야 이로울 것이 없고 악을 행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 瀛軒曺公諱錫祐。字燦卿。麗朝平章事文忠公諱用奇。其中祖也。至諱克仁。際我端宗朝。遯于興陽。子孫仍居焉。曾祖命祥贈司憲府掌令。祖允承贈戶曹參議。考順振贈工曹參判。世著行義。妣貞夫人礪山宋氏光佑女。婦德醇備以純廟壬辰二月七日生公公幼有至性唯諾進退。有異凡兒。早喪所恃。毁瘠骨立。哀號罔極。隣里莫不感涕。事嚴庭。尤盡其誠。口體之奉。心志之養。無不備至。親有疾。極其致憂。至嘗糞甛苦。以驗差劇。及遭艱。年已耆艾。而致毁過甚。廬墓泣血。以終三年。推以至於族戚朋友。恩義兼至。各得歡心。鄕道人士。薦公孝廉。今上壬辰。除司憲府監察。癸巳陞敦寧府都正。甲午陞敦寧府同敦寧。追榮三世。庚子十月三日終。五男。曰暻洙興洙仁洙文洙錤洙。外史氏曰。上古大樸未散。人文未繁。是以風俗醇厚簡質。而民所以嚮用吾福者厚矣。及其變詐巧僞。日以益繁。而灾孽作矣。迹公平日之行。有以全其質實忠慤之天。而未嘗有表襮依樣底意。亦可謂今人而古人矣。祚胤之蕃衍。爵寵之煒煌。不亦宜乎。此可爲謂善無益謂惡無傷之者戒也耳。 기애(耆艾)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60세를 기(耆)라 하고, 50세를 애(艾)라 한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질박함 원문의 '대박(大樸)'은 원시(原始) 상태의 질박한 대도(大道)를 말한다. 오복(五福)을 누리는 것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하여 지은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아홉 번째가 "향함을 오복으로써 한다[嚮用五福]"이다. 여기서 오복(五福)은 장수[壽], 부유함[富], 강녕함[康寧], 덕을 좋아하는 것[攸好德], 늙어서 편히 죽는 것[考終命]을 가리킨다. 《書經 洪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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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양씨전 烈婦梁氏傳 열부 양씨(梁氏)는 제주 사람으로 아버지는 상룡(相龍), 조부는 주진(柱震), 증조는 홍우(鴻友)이다. 기묘명현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167)의 12세손으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능주 초방리(草坊里)에서 태어났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고, 《열녀전》과 《소학》 등의 책을 읽고 대략 그 대의를 깨우쳤다. 부모를 섬김에 온화한 말과 공손한 낯빛으로 말을 듣고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18세에 사인(士人) 박서진(朴瑞鎭)에게 시집갔는데,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좌승지에 추증된 박지수(朴枝樹)168)의 후손이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서진이 병으로 위독하자 열부(烈婦)가 단지(斷指)하여169) 소생시켰으나 조금 있다 다시 숨이 끊어졌다. 열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맹서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시부모와 집안사람들이 매우 간절히 타이르고 힘써 막으니 열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혼수로 해온 장신구와 복식(服飾), 금비녀와 옥반지 등을 헐값으로 팔아 상례와 장례의 비용을 마련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170)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삼갔으며, 비린 고기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시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슬퍼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에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음을 다해 힘써 장만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힘썼다. 종자(從子, 조카) 준옥(準珏)을 후사로 삼고 가르치고 기름에 법도가 있어 마침내 이름난 선비가 되게 하였다. 하루는 병이 깊어지자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서 그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죽지 못한 것은 다만 너를 가르치고 성취시켜 너의 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할 일은 이미 다하였으니 죽은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너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침상에 드러누워 영면하였다. 고을에서 그 열효(烈孝)를 아름답게 여겨 추천하여 상사(上司, 상급 관청)에 보고함이 전후로 끊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인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일찍이 노사 선생을 모시고 문문산(文文山)171)이 죽지 않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신과 열부는 그 뜻이 하나다. 부인이 그 남편을 잃었을 적에는 그 궤전을 받들고 그 장례를 경영해야 하며, 자식이 있으면 양육하고 자식이 없으면 이어야 하며, 가르치고 성취시켜 그 후손을 전하고 그 집안을 보존해야 하니, 어찌 다만 남편을 따라 죽는 것만을 열(烈)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아,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그러한 사람을 보았도다. 훗날 삼강의 붓을 잡은 자가 마땅히 높은 행실과 훌륭한 여인의 자리에 편입한다면 그들의 아름다운 행적에 필적할 것이다. 烈婦梁氏。濟州人。考相龍。祖柱震。曾祖鴻友。己卯名賢惠康公彭孫十二世孫也。以純廟癸巳生于綾之草坊里。貞靜柔嘉。婦德純備。列女傳小學等書。略曉大義。事父母。溫言恭色。聽從女流。十八歸士人朴瑞鎭。朴氏貫密陽。壬辰忠臣贈左承旨枝樹后。歸未幾瑞鎭得劇疾。烈婦血指得蘇。俄而復絶。烈婦誓下從。絶不飮食。舅姑及家人。諭之甚懇。防之甚力。烈婦不得已而起。斥賣資裝服飾金釵玉環等物。以爲治喪營葬之費。朝夕饋奠。必誠必愼。腥臊之味。不入於口。在舅姑側。悲慘之意。不形於色辭。甘毳之供。極意營辦。務悅其心。以從子準珏爲後。敎養有法。遂成名士。一日沈疾。沐浴着新衣。招其子語曰。早失所天。而至今未亡。只爲汝敎養成就。使汝父不至乏祀也。吾事已畢。死復何恨。只願汝無負吾期汝之意也。言訖就枕而逝。鄕里嘉其烈孝。剡報上司。前後續續。鄕里人鄭義林曰。余嘗侍蘆沙先生。問文文山不死。先生曰。忠臣烈婦其義一也。婦人之喪其夫也。奉其饋奠。營其窆葬。有子則養育之。無子則繼續之。敎誨成就。以傳其後。以存其家。豈只以從夫死爲烈哉。嗚乎。余嘗聞其語而今見其人矣。後之秉三綱之筆者。宜其編入於高行令女之次。與之匹美而齊休也。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 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나아갔지만,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 죽었다. 박지수(朴枝樹) 1552~159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으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단지(斷指)하여 원문의 '혈지(血指)'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것인데, 효자가 생명이 위독한 부모에게 자신의 피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제전(祭奠) 원문의 '궤전(饋奠)'은 매장하기 전까지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음식을 올리는 예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문문산(文文山) 문산(文山)은 남송(南宋)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송 이종(宋理宗) 때 우승상(右丞相)으로 화의(和議)하러 원(元)의 궁중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밤에 도망쳐서 온주(溫州)로 돌아왔다. 익왕(益王)이 즉위하여 그를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강서(江西)의 도독(都督)으로 삼았으나 또 원군에게 패전하였다. 위왕(衛王)이 즉위하여서는 신국공(信國公)의 봉(封)을 받고 조양(潮陽)에 주둔하였다가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전하여 포로가 되어 연경에 3년 동안 억류(抑留)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忠節)을 나타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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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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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문집 중 시의 운을 쓰다 用先師集中韻 유유한 만겁에 중생들이 지나갔으니 悠悠萬劫衆生過이름과 성도 어지로워 얼마나 되던가 名姓紛紛問幾何천지를 경륜함은 누가 가장 잘하던고284) 天地經綸誰是最일성 같은 매운 절조 또한 많다 하리라 日星節烈亦云多일원285)이 끝나면 같이 사멸로 돌아가니 一元盡後同歸滅큰 안목으로 보며 홀로 노래 부르노라 大眼看來獨放歌함부로 방명 남기려함은 진정 운수에 어두운 것 妄欲遺芳眞昧數그저 백발이 되도록 직분을 닦을 뿐이네 但修分職到頭皤 悠悠萬劫衆生過, 名姓紛紛問幾何.天地經綸誰是最, 日星節烈亦云多.一元盡後同歸滅, 大眼看來獨放歌.妄欲遺芳眞昧數, 但修分職到頭皤. 천지를……하던고 후창의 스승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가리켜 한 말이다. 일원(一元) 오랜 세월을 비유한 것이다. 본래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장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설에 나오는 용어로, 이 세계가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1주기(周期)를 말한다. 《皇極經世書 卷2 纂圖指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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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 영공이 일흔두 살에 득남한 경사136)를 축하하며 갑술년(1874, 고종11) 賀河叟令公七十二歲璋慶【甲戌】 하옹은 일흔 살에도 기운이 오히려 좋으니 河翁七十氣猶佳하늘이 기린아137)를 이 집안에 내려 보냈네 天遣麟兒降此家반드시 하나의 양이 끝내 돌아올 걸 믿으니 須信一陽終有復문득 고목에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겠네 却看古木更生花활을 매달고 화살을 던져 먼 장래를 기대하고 懸弧投矢期將遠대장장이 이어 갖옷 만드니138) 이치 어긋나지 않네 繼冶爲裘理不差무왕이 성왕에게 전위한 걸 누가 늦었다 말하는가 周武傳成誰道晩한층 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139) 裕餘視彼一層加 河翁七十氣猶佳, 天遣麟兒降此家.須信一陽終有復, 却看古木更生花.懸弧投矢期將遠, 繼冶爲裘理不差.周武傳成誰道晩? 裕餘視彼一層加. 득남(得男)한 경사 원문의 '장경(璋慶)'은, 《시경》 〈사간(斯干)〉에 "이에 아들을 낳아 침상에서 재우며 바지를 입히며 구슬을 갖고 놀게 한다.〔乃生男子, 載寢之牀, 載衣之裳, 載弄之璋.〕"라는 말이 나온다. 기린아(麒麟兒)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일컫는데, 흔히 문재(文才)가 있는 남의 자제를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두보(杜甫)가 서경(徐卿)의 두 아들을 칭찬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에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주었다니, 두 아이는 모두 천상의 기린아라네.〔孔子釋氏親抱送, 竝是天上麒麟兒.〕" 한 데서 나왔다. 《杜少陵詩集 卷10》 대장장이……만드니 자식이 훌륭한 부친의 가업을 잘 잇는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하였다. 무왕(武王)이……주었는데 주(周)나라는 성왕(成王)과 그의 아들 강왕(康王) 2대 40여 년 동안 천하가 안정되고 죄수가 없어 감옥이 텅 비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주 무왕이 죽고 나서 어린 아들 성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숙부인 주공(周公)이 섭정하게 되자, 주공의 형제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을 모함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시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성왕이 주공에게 명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함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 《史記 周本紀》《史記 管蔡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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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석의 〈회여안〉 시에 차운하다 次可石懷汝安韻 세상 분위기는 천리가 시커먼데 世氛千里黑서재의 촛불이 한 창가에 붉구나 書燭一牕紅헤어져 사는 걸383) 한스러워 말고 離索不須恨간직한 바가 달라졌는지 묻는다네 所存問異同 世氛千里黑, 書燭一牕紅.離索不須恨, 所存問異同. 헤어져 사는 걸 원문의 '이삭(離索)'은 이군삭거(離群索居)의 준말로, 벗들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지낸 지가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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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8 卷之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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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7) 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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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오기 竹塢記 죽오(竹塢) 주인은 내가 만년에 사귄 벗이다. 몸을 지켜 자취를 거두어 천진에 맡기고 본분을 미루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 늙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스스로 재주와 덕을 숨기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하루는 내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그 집이 씻은 듯 깨끗하여 하나의 좋은 물건은 없고 오직 몇 그루 대나무만 뜰 사이에 푸른 것을 보았다. 이에 주인이 그 집에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았고, 또 그 학문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진보하고 몸은 때에 맞게 숨긴 것은 또한 애초에 여기에서 터득함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대나무의 무성함을 보고 학문에 절차탁마하는 아름다움을 취하고 대나무의 곧음을 보고 명절(名節)을 힘써 닦는 견고함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고인을 보고 본받아 상수(桑收)의 계획141)과 세한(歲寒)의 계책142)으로 삼아 넉넉하게 여유가 있을 것이다.오호라! 고 처사 간재옹(澗齋翁)143)은 바로 주인옹의 원방(元方)144)이다. 나와 막역한 교분이 있어 세한에도 서로 지키자는 약속을 한 것이 실로 얕지 않았는데, 옹이 죽어버리고 이 약속이 또 그 아우에게 있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고금을 두루 돌아봄에 비탄을 감당할 수 없네. 그러나 오늘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당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은 어찌 서로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평소 절차탁마하는 공부가 있지 않다면 세한에 힘써 닦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竹塢主人。余晩年友也。守身斂迹。任眞推分。非其力不食。非其義不爲。至於老而益自鞱晦。惟學是力。一日余過之。見其垣宇蕭灑。無一長物。惟有數竽竹。蒼然於庭除間。乃知主人所以名其室者。有在於此。又知其學與年進。身與時晦者。亦未始非有得於此也。瞻彼掎而取學問切磋之美。見其貞而思名節砥礪之固者。想必視法古人而爲桑收之計。歲寒之策。綽有餘地。嗚乎。故處士澗齋翁。卽主人之元方也。與余有莫逆之契。而寄歲寒相守之約。實不淺淺。豈知翁不見留而此約又在於其季難也耶。俯伂今古。不勝悲慨。然今日之不相負約。乃所以爲不負當日之約。吾兩人。盍相共勉焉。非有平日之切磋。無以爲歲寒之砥礪也。 상수(桑收)의 계획 만년에 공적을 거두는 계획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의 장수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처음 싸움에서 대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에서 깃을 접었으나 나중에는 민지에서 떨쳐 비상하니, '동우에 잃었다가 상유에 수습하였다.'라고 할 만하다.[始雖垂翅回谿, 終能奮翼黽池, 可謂失之東隅, 收之桑榆.]"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동우(東隅)'는 동쪽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인데 젊은 시절을 가리키고,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지는 해의 그림자가 이 나무의 끝에 남아 있다 하여 해가 지는 곳인데 만년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47 馮異列傳》 세한(歲寒)의 계책 세한은 해가 저물어 가는 한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르는 말인데, 노년의 지조를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간재옹(澗齋翁)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 권19 〈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원방(元方) 후한(後漢) 진기(陳紀)의 자이다. 진기와 그의 아우 진심(陳諶) 계방(季方)이 훌륭하여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데서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서는 형님인 이기백을 빗대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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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탄기 春灘記 동경(東京)149)이 어떤 때이며, 부춘(富春)150)이 어떤 땅인가? 희희양양(熙熙穰穰)151) 왕래하다 안개와 구름이 사라지고 텅 비면 아득히 넓고 큰 바다의 한 알 좁쌀 같고, 산고수장(山高水長)152)하여 위대한 운치와 빼어난 자취가 천고에 빛나는 해와 별과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완연히 마치 운산(雲山)과 강수(江水)의 사이에서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 것 같게 한다.호남(湖南)에도 또한 부춘강이 있으니 강가에 고 처사 정공(鄭公)이 장수(莊修)153)하던 곳이다. 공은 광채를 감추고 세상을 만나지 못해 남쪽 고을의 한 선비[布衣]에 불과할 뿐이다.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칭송이 자자하여 춘탄(春灘)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대개 그 지역을 기록한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그 덕을 사모하기 때문이니, 이 강과 이 산은 이미 끝날 기약이 없으니, 공이 사람들에게 사모를 받는 것은 생각건대 또한 엄 선생(嚴先生)154)과 같을 것이다. 저 고거사마(高車駟馬)155)를 많은 사람들이 창야(唱喏)156)하는 것은 바로 철새나 후충(候虫)157)이 한 때 귀를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내 비록 당시에 끊임없이 왕래하지는 못하였지만 만년에 이 강가에 우거하며 정채(精釆)를 상상하고 우러르니, 삼가 이것을 써서 뜻을 드러낸다. 東京何時。富春何地。熙往穰來。烟消雲空。渺然滄海之一粟。而山高水長。偉韻逸躅。日星於千古。得使人人。完若瞻對於雲山江水之間。湖之南。亦有富春江。上有故處士鄭公莊修之地。公潛光蘊輝。不遇於世。不過爲南州之一布衣耳。没世旣久。而稱誦藉藉。至以春灘目焉。蓋志其地。所以思其人。思其人。所以慕其德。此江此山。旣無有了期。則公之所以見慕於人者。想亦與嚴先生同矣。彼高車駟馬。千人唱喏。卽時鳥候虫一時之聒耳。余雖不能源源於當日。而晚寓此江之上。想仰精釆。謹書此而見志焉。 동경(東京) 후한(後漢)의 도성인 낙양(洛陽)으로, 곧 후한을 가리킨다. 부춘(富春) 부춘산(富春山)으로, 후한(後漢) 때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초빙을 물리치고 은거한 산이다. 희희양양(熙熙穰穰) 이익 추구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穰)과 양(壤)은 통용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은 높고 물은 유유(悠悠)히 흐른다는 뜻으로, 군자(君子)의 덕이 높고 끝없음을 산의 우뚝 솟음과 큰 냇물의 흐름에 비유했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 "구름 낀 산 푸르고 푸르듯, 저 강물 곤곤히 흐르고 흐르듯, 선생의 풍도 역시 산고수장이로세.[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장수(莊修)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로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 〈학기편(學記篇)〉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저본의 '장(莊)' 자는 '장(藏)'의 오자로 보인다. 엄 선생(嚴先生)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을 말한다. 자는 자릉(子陵)이다. 광무제(光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에 함께 공부하던 사이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성명을 고치고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광무제가 찾아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았다. 《後漢書 逸民列傳 嚴光》 고거사마(高車駟馬) 수레덮개가 높은 수레와 네 마리의 말이란 뜻으로, 부귀한 사람이 타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안(長安)으로 들어가던 중 고향인 성도(成都)를 지나다가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높은 수레와 사마를 타지 못하면 다시는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不乘高車駟馬, 不過此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57 司馬相如傳》 창야(唱喏) 남자가 읍하면서 소리를 내어 공경을 보이는 것이다. 후충(候蟲) 철따라 생기는 벌레를 뜻하는데, 예컨대 봄에는 나비, 여름에는 매미, 가을에는 귀뚜라미 등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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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기 松灘記 회옹(晦翁)의 시에 이르기를 "평생 비바람 부는 저녁이면, 매번 명절의 어려움을 생각하네.[平生風雨夕, 每念名節難.]"라고 하였으니,159) 풍우는 어느 때 불며, 명절은 어떤 일이며, 회옹이 탄식을 발한 것은 무슨 뜻인가?오호라! 천하에 선치(善治)가 없었던 것이 오래 되었다. 그러나 선치의 도를 강론하여 밝혀 사람을 선하게 하고 후세에 전하여 한 가닥 양의 기운을 천하에 보존하는 것은 선비 된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선비의 추향이 예스럽지 못한 것이 또한 이미 오래 되었다. 이름을 따르고 실상을 잊으며 이익을 보고 의를 배반하여 평소 한가로운 날에도 동서로 넘어지고 기울어 이미 능히 스스로를 부지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비바람을 예측할 수 없는 때에야 어떠하겠는가. 온갖 초목이 모두 병들고 온갖 나무가 함께 시들어 심지어 난초가 변하여 쑥대가 되고 혜초가 변하여 띠 풀이 되지만 세한(歲寒)의 기약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시냇가의 푸른 소나무뿐이다.나의 벗 송탄자(松灘子)는 평소 강개하여 어울리는 사람이 적었으니, 까닭에 지극한 뜻을 무의(無意)에 깃들이고 지극한 정을 무정(無情)에 의탁하여 조석으로 서성이며 배회할 곳으로 삼았으니, 생각건대 이것이 회옹이 탄식을 발한 뜻이 아니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장차 한 번 찾아가 물어보고 인하여 가르침에 의지하기를 마치 조라(蔦蘿)가 뻗는 듯이 할 것이다.160) 晦翁詩曰。平生風雨夕。每念名節難。夫風雨何時。名節何物。晦翁之所以發歎何意。嗚乎。天下之無善治久矣。然講明善治之道。淑諸人。傳諸後。以存一縷陽脈於天下者。其非爲士者之責耶。士趨之不古。亦已久矣。徇名而忘實見利而背義。在平常燕閒之日。而東倒西歪。已不能自持。況於風雨不測之時乎。百卉具腓。萬樹同凋。以至蘭變爲蕭。蕙化爲茅。而不失其爲歲寒之期。惟是澗畔蒼然者耳。余友松灘子。平生慷慨。寡諧於人。所以寓至意於無意。托至情於無情。以爲日夕盤桓之地者。想未必不是晦翁發歎之意也。余將一造而問焉。因以依附下風。如蔦蘿之施。 회옹(晦翁)의……하였으니 이 시는 남헌(南軒) 장식(張栻)의 시 〈양정방을 보내며[送楊廷芳]〉3수 가운데 셋째 수에 나온다. 정의림의 착오로 보인다. 조라(蔦蘿)……것이다 《시경》 〈소아(小雅) 규변(頍弁)〉에 "겨우살이와 여라가 송백에 뻗어 있네[蔦與女蘿, 施于松柏.]"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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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302)에서 제군과 함께 읊다 萬社共諸君吟 십리길 창강이 나의 거처라 十里滄江是我居두 나막신 가뿐가뿐 수레가 필요없지 輕輕雙屐不須車가증스럽게 온 세상이 금수303)로 돌아가는데 生憎擧世歸蹄跡정말 기쁘게도 제군들이 좀벌레 없애는구나304) 端喜諸君掃蠹魚늦은 국화 달게 먹으니 도굴305)의 후예요 晩菊甘餐陶屈後맑은 샘물 상쾌히 마시니 공안306)의 후학이네 淸泉爽飮孔顔餘두동의 산색은 천고토록 푸르고 斗東山色靑千古견줘 보니 흉금의 기약은 다 같구나 較看襟期一樣如 十里滄江是我居, 輕輕雙屐不須車.生憎擧世歸蹄跡, 端喜諸君掃蠹魚.晩菊甘餐陶屈後, 淸泉爽飮孔顔餘.斗東山色靑千古, 較看襟期一樣如. 만사(萬社) 만종서사(萬宗書社)를 가리키는 듯하다. 금수 원문의 '제적(蹄跡)'은 금수(禽獸)의 발자국으로 오랑캐를 뜻한다. 좀벌레 없애는구나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책을 읽기에 책종이에는 좀벌레가 슬지 않는 것이다. 도굴(陶屈) 동진(東晉)의 처사(處士)인 도잠(陶潛)과 초(楚)나라의 대부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공안(孔顔) 공자(孔子)와 그 제자 안회(顔回)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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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덕재 문공전 好德齋文公傳 호덕재(好德齋) 문공의 휘는 영국(永國), 자는 사랑(士良)으로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이 현조가 된다. 휘가 자수(自修)이며 호가 면수재(勉修齋)라는 분은 고을 사람들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고조는 세휘(世輝)로 진사를 지냈고, 증조는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부인(鄭夫人)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골격이 준수한 어떤 어르신이 엄숙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와서 스스로를 '분양거사(汾陽居士)'174)라 말하였는데, 얼마 뒤에 공을 낳았다. 또 하루는 기어가다가 우물에 떨어진 것을 집안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까치떼가 우물을 둘러싸고 지저귀니 부인이 가서 보고 건져냈다고 한다. 3세에 참판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다하여 울부짖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를 섬김에 기쁘고 화한 안색으로 효도를 다하였는데,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심어 온갖 필요로 하는 것은 몸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흉년을 당하여서 백리 밖에서 쌀을 짊어지고 올 때에 무뢰배들이 도적을 방비하고 막는다고 하면서 빼앗고자 하자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이분은 백암(白巖)의 문효자이시다." 라고 하니 마침내 보호하여 보내주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너무 슬퍼한 탓에 거의 목숨을 잃을175) 뻔하였고, 염습하는 도구와 매장하는 절차, 궤전의 의례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였다. 중년 이후로 집안의 형편이 조금 펴지고, 아래로 자제(子弟)의 봉양이 있었다. 자로(子路)가 진수성찬을 먹고 호화롭게 생활하면서도 직접 쌀을 져 올 수 없다고 탄식했던 말176)을 욀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백중(伯仲)을 섬김에 공경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을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빈곤하여 백방으로 집안 일을 맡아서177)하였는데, 매번 한가한 날이면 형제들이 모여 마주하고 경전을 토론하였다. 하루는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책장사가 지나가자 마침내 밭가는 소를 책과 바꿔 글방을 열어 책을 쌓아두고 널리 어진 사우(士友)를 맞이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평생 태만한 모습이 없었고, 빨리 말하거나 바쁜 기색이 없었다. 실질에 힘쓰고 형식적인 화려함을 제거하였으며, 의를 귀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여겼다. 무릇 오랜 벗과 친척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돌보지 않음이 없었다. 가난해서 장사하지 못한 자를 장사지내주었으며, 그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한 자를 시집 장가 보내주었다. 일찍이 자손을 경계하기를, "궁핍하게 홀로 사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화려하고 사치함을 따르지 말며, 술과 고기를 즐기지 말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 하지 말며, 선비든 농부든 간에 각자 자기의 생업에 부지런히 힘쓰고 부귀와 문장을 능사로 삼지 말고, 다만 대대로 부지런하고 삼가는 자손을 두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부인 광산 김씨는 정숙하고 온유하여 시부모 봉양하기를 효도로써 하였고, 남편 섬기기를 공경으로써 하였으며, 집안사람들 대하기를 화목함으로 하였다. 부부가 동갑으로 오래도록 해로하다가 회근례(回巹禮)178)를 행하였다. 공의 나이 95세일 때에 정상원(鄭相元, 1678~1754) 부객(府客)이 듣고 이를 가상히 여겨 천거하니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숭정대부지중추부사(崇政大夫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대개 이는 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179)이었다.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고을의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상고(上古)시대에는 질박함이 흩어지지 않은데다가 성왕(聖王)이 계속 일어나 표준을 세우고 복록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인민(人民)이 번성하고 집안이 평안하여 온 세상을 태평성대의 세상180)에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말세(末世)로 내려와서는 풍속이 경박하여 재앙의 징조가 늘 있는 듯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일찍 요절하거나 번뇌181)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이 없이 외롭거나 노쇠한 곤액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오복 중의 한두 개를 얻을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일을 살펴보니, 인가(人家)의 흥망성쇠를 겪는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순전한 길복과 완전한 아름다움은 공의 집만한 곳이 없었다. 집에는 재물을 쌓는 두터움이 있고, 가정에는 후사를 잇는 번성함이 있었으며, 몸은 백수를 누려 지위가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강녕하여 아무 탈이 없고 고상하고 아름답게 일생을 마쳐182) 자손 백여 명이 모두 박아하고 두터워 각각 한 가지 기예에 통달하였으니, 옛사람들이 이른바 제일가(第一家)라는 것에 못지않을 것이다. 아, 감천(甘泉)은 반드시 예천(醴泉)183)의 근원에서 시작하고, 찬란한 옥찬(玉瓚)은 반드시 황류(黃流)를 기다려야 하니,184) 만일 덕과 인을 쌓아 하늘을 감동시켜 화기(和氣)를 부른 자가 아니라면, 세상의 수준이 점차 낮아지는 날에 어찌 하늘이 주신 복을 이처럼 두텁게 누릴 수 있었겠는가. 동생(董生)185)의 행의(行義)는 본래 천옹(天翁, 하늘)이 굽어 살피심이 있어서였고, 최씨(崔氏) 가문이 창대함은 실로 당씨(唐氏)의 효경(孝敬)에 힘입은 것이로다.186) 好德齋文公諱永國。字士良。江城君益漸爲顯祖。有諱自修號勉修齋。鄕人祭于社。高祖世輝進士。曾祖命吾贈掌樂院正。祖喜孟贈戶曹參議。考弼鎭贈戶曹參判。妣鄭夫人嘗夢。有一丈人。風骨俊偉。儼然入室。自稱汾陽居士。己而産公。一日匍匐而落於井。家人不知也。有羣鵲擁井而噪。夫人往視而拯救之。三歲參判公違背。索呼孺啼。晝夜不輟。見者無不釀涕。事慈幃。極其怡愉。家素貧。傷無以養。漁樵耕稼。凡百所須。無不身親爲之。遇飢歲。負米百里之外。無賴輩稱以防禁。欲攘奪之。有一人知之曰。此白巖文孝子。遂護送之。遭艱。致哀毁。幾滅性。襲斂之具。掩厝之節。饋奠之儀。必誠必信。中年以後。家力稍紓。下有子弟之奉。每誦子路列鼎累茵。歎不得爲親負米之語。而不覺嗚咽沾衿。事伯仲。敬之如嚴父。出入進退。必稟而行早孤貧。幹蠱百端。而每於暇日。兄弟聚對。討論經籍。一日出耕于野。有冊商過之。遂以耕牛易之。開塾儲書。廣延賢士友。以資諸子孫肄業。平生無怠慢之容。無疾遽之色。務實而祛華。貴義而輕財。凡知舊族戚有窮乏者。無不隨力存恤葬其不能葬者。嫁娶其不能嫁娶者。嘗戒子孫不侮窮獨。不服華靡。勿嗜酒炙。勿近博奕。於士於農。各勤其業。不以富貴文章爲能事。但世世有勤勅子孫。是吾願也。齊光山金氏。貞靜柔嘉。奉舅姑以孝。事君子以敬。待家衆以和。同庚偕老。行回巹禮。公年九十有五。鄭相元府客聞而嘉賞薦。除五衛將。尋拜崇政大夫知中樞府事。蓋優老別恩典也。後三年而終。鄕里後生鄭義林曰。上古大樸未散。加以聖王繼作。建極錫福。是以生齒繁庶。家用平康。躋四海於壽域。降及叔季。俗澆數薄。咎徵恒若。人之生於其間多夭札缺漏煢獨殘悴之厄。而得有其五福之一二者。無幾人矣。余自省事。閱人家興替。不啻多矣。而其純吉全美。未有若公家也。家有居積之厚。庭有似續之蕃。身享百壽。位躋崇品。康寧無恙。高朗令終。子孫百餘人。皆博雅長厚。各通一藝。古人所謂第一家者。不爲專美矣。嗚乎。甘泉必自醴源。瑟瓚必待黃流。如非積德累仁感召和氣者。則在世級浸降之日。而豈能享此天餉若是其厚耶。董生行義自有天翁之降監。崔門昌大。實賴唐氏之孝敬。 분양거사(汾陽居士)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장수 곽자의(郭子義)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곽분양(郭汾陽)이라 부른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다. 아들 여덟에 사위 일곱 명이 모두 조정에서 귀현(貴顯)하였고, 손자 수십 명은 다 알아보지 못하여 문안 때면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상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 인신(人臣)으로서의 영화와 자손의 번성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인물이다. 목숨을 잃을 원문의 '멸성(滅性)'은 부모의 상을 당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사흘이 지나면 죽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머리를 감고, 일 년이 지나면 연제(練祭) 이후의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극히 애통해하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지 말아서,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三日而食, 三月而沐, 期而練, 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 자로(子路)가……말 자로가 일찍이 공자(孔子)를 뵙고서 "예전에 제가 두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항상 명아주와 콩잎만 먹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100리 밖에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곤 했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로 남쪽으로 초나라에 노닐 적에 따르는 수레가 100여 대요, 만종의 곡식을 쌓아 두고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먹으면서는 다시 명아주 콩잎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져 오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昔者由也事二親之時, 常食藜藿之實, 爲親負米百里之外. 親沒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願欲食藜藿, 爲親負米, 不可復得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孔子家語 致思》 가업(家業)을 계승 원문의 '간고(幹蠱)'는 간부지고(幹父之蠱)의 준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하였다. 회근례(回巹禮) 혼인(婚姻)한 지 60주년(週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회혼례(回婚禮)라고도 한다. 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 나라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官職)을 내리는 은전을 말한다. 태평성대의 세상 원문의 '수역(壽域)'은 인수지역(仁壽之域)의 준말로, 천수(天壽)를 다하며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의 "한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서 인수의 지역으로 인도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강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이 어찌 고종 때처럼 되지 않겠는가.[驅一世之民 濟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번뇌 원문의 '결루(缺漏)'는 불교 용어로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심신을 얽매므로 결(缺)이라 하고, 눈 귀 등의 6근으로부터 밤낮으로 누설하기 때문에 누(漏)라고 한다. 고상하고……마쳐 훌륭한 행실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시경》 〈기취(旣醉)〉 3장에 "광명정대함이 환히 빛나니 고명(高明)하여 마침을 잘 하리라. 마침을 잘하는 데 시작이 있으니, 제사의 시동(尸童)이 좋은 말을 고하도다.〔昭明有融 高朗令終 令終有俶 公尸嘉告〕"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천(醴泉) 감미로운 물이 솟아난다는 신비한 샘인데, 훌륭한 자손이 나는 가문에 그 조상의 근원이 있음을 말한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 하였다. 찬란한……하니 옥찬(玉瓚)은 옥 손잡이에 바닥은 금으로 된 국자로 강신제 때 쓰며, 황류(黃流)는 종묘의 제사에 쓰기 위하여 울금향을 넣어 만든 술이다. 울금의 뿌리를 넣으면 술빛이 황색으로 변하므로 황류라고 한 것인데, 모두 귀한 인재를 뜻한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아름다운 저 옥 술잔에 황류가 담겨 있도다.[瑟彼玉瓚, 黃流在中.]"라고 하였다. 동생(董生) 동생은 중국 당(唐)나라의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동소남의 모습을 그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한유가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이라는 고시를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엔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를 않으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물에 가서 고기도 잡네. 주방에는 맛난 음식 갖춰져 있고, 대청에선 평안한지 물어본다네. 부모님은 근심을 아니하시고, 처자식은 탄식을 아니 한다네.[嗟哉董生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戚戚,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韓愈集 卷2 古詩》 최씨(崔氏)……것이로다 최씨 가문에 시집온 당부인(唐夫人)이 효경(孝敬)으로 최씨 집안을 창대하게 하였다는 말로, 김씨 부인을 칭찬한 표현이다.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부인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82 崔琯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효자전 金孝子傳 김효자(金孝子)의 휘는 기원(基源), 자는 군진(君眞), 호는 심헌(心軒)으로 계파는 김해(金海)에서 나왔다. 고(故) 충신 염헌공(淡軒公) 김극검(金克儉)187)의 후손이며, 효자 참봉 김선(金銑)의 7세손이다.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집안살림이 가난하여 시서(詩書)를 공부할 방도가 없었지만, 천성이 유순하고 신중하여 홀어머니를 섬김에 매우 효성스러웠고, 산에서 나물을 캐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몸을 삼가고 집안을 잘 다스려 그 뜻을 받들었다. 어머니가 병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걷고 크게 웃지도 않으면서188) 한데에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먼저 맛보며189) 지극히 근심하였다. 하루는 병이 위독해지자 마침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이미 끊어진 목숨을 되살아나게 했다. 초상을 당해서는 애통해 하고 슬퍼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종제 중 한 사람이 일찍이 그의 땅을 몰래 팔아먹었는데, 효자는 그 어머니가 들어서 알까 두려워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들어서 알고는 밥상을 마주하고 드시지 않았다. 효자는 남몰래 스스로 돈을 빌려 값을 지불하고 땅을 돌려받았는데, 어머니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전날에 몰래 팔아먹었다고 한 것은 헛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표형(表兄)이 하루는 집에서 기르던 소를 빼앗아 가자 어머니가 또 밥상을 마주하고 드시지 않았다. 효자가 이에 쫓아가 잡고는 본래의 값만큼 형에게 주고서 소를 끌고 돌아와 어머니의 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렸는데, 또 소 값을 지불한 연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제와 표형 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얼마 뒤 종제가 의지할 곳 하나 없자 효자가 집을 경영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또 한 친척이 공포(公逋, 국가의 재물을 사사로이 소비함)를 범함이 적지 않으니 효자가 타일러 말하기를, "내가 비록 집이 가난하나 마땅히 3분의 2를 갚아줄 것이니 그 3분의 1은 네가 일찌감치 마련하여 관청의 독촉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관리가 이미 잡아간 것을 알고는 효자가 즉시 쫓아가 관가의 뜰에 이르자 바야흐로 엄중한 장형을 당하고 있었는데, 효자가 울부짖으며 간절히 빌며 말하기를, "기간을 어긴 죄는 나에게 있고 저 사람에게 있지 않으니 그 곤장을 나누어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관리가 물어서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그 기한을 늦추어 주니 효자가 힘을 다해 빌려서 그 3분의 1까지도 모두 지급하였다. 그 마음을 미루어 나가 붕우와 향당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이해를 다투지 않으며 화락하고 온화하였으므로 모두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독서하고 학문하는 근본 목적은 자신을 수양하여 행함에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인데, 겉치레만 숭상하는 폐해가 날로 많아져 진솔한 정이 날로 침체되었다. 효자처럼 가난하고 누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글을 읽고190) 종유할 방도가 없는데, 일찍이 스스로 깨달아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순한 자식이 되고, 형제들 간에 있어서는 돈독하고 화목한 사람이 되며, 향려(鄕閭)에 있어서는 충신한 선비가 된 분으로 말하자면, 어찌 지금사람이면서 옛 사람이 아니겠으며, 배우지 않고도 배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떳떳한 본성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에 향리(鄕里)의 천거와 사림(士林)의 보답이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인 것이 당연하다. 金孝子諱基源。字君眞。號心軒。系出金海。故忠臣淡軒公克儉后。孝子參奉銑七世孫也。早孤貧。居寓甚僻。無詩書遊業之方。而天性馴謹。事偏慈甚孝。採山釣水以供其旨。謹身克家以奉其志。有疾則不翔不矧。露禱嘗藥。極其致憂。一日疾劇。遂嚼指注血。以甦旣絶之命。及遭艱。哀傷慘怛。出於至誠。隣里聞之。莫不釀涕。有一從弟。嘗竊賣其土。孝子恐其母氏聞之。匿不以言。頃之母氏聞之。對案不食。孝子乃潛自稱貸。給價還土。而告于母氏曰。前日之竊賣云者是浪言也。其表兄一日攘家牛而去。母氏又對案不食。孝子乃追而得之。依價與兄。牽牛而還。以慰悅親意。而又不言給價之由。然待從弟與表兄。與平時無異。旣而從弟蕩然無依。孝子爲營室屋。使之安業。又有一族親。犯公逋不少。孝子諭之曰。吾雖貧。當報三分之二。其一汝宜早辦。毋見官督也。一日自外還。見官吏已捉去矣。孝子卽時追去至官庭。方被嚴杖。孝子號泣懇乞曰。愆期之罪。在我不在彼。願分受其杖。官問而奇之。特寬其限。孝子盡力假乞。倂其三分之一而給之。推而至於朋友鄕黨。不與之較曲直。不與之爭利害。而愷悌溫良。皆得其歡心焉。外史氏曰。讀書學問本欲修身利行。而文弊日繁。眞情日替。若孝子生長於艱難朴陋之中。寡佔畢遊從之方。而早自開悟。事父母爲孝順之子。處兄弟爲惇睦之人。在鄕閭爲忠信之上。豈非今人而古人。無學而有學耶。秉彛攸好。鄕里之薦。士林之報。宜其不一而多矣。 김극검(金克儉) 1439~1499.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렴(士廉), 호는 괴애(乖崖)이다. 문장에 능했고 성품이 청렴결백했다. 《대조실록(世祖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ㆍ《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ㆍ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조심스럽게……않으면서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 행동을 경계한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행불상 소부지신(行不翔笑不至矧)"이라 하여, "다닐 때에도 조심하여 나는 듯이 걷지 말고 웃어도 잇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즉 크게 웃지 않는다."고 하였다. 약을 맛보며 원문의 '상약(嘗藥)'은 약을 맛본다는 뜻으로 부모님이 병환이 있어 약을 드실 경우 자식이 그 약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먼저 약을 맛보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임금이 병이 들어 약을 먹을 경우에는 신하가 먼저 맛보고, 부모가 병이 들어 약을 먹을 경우에는 자식이 먼저 맛본다.[君有疾, 飲藥, 臣先嘗之, 親有疾, 飲藥, 子先嘗之.]"라고 하였다. 즉 어버이를 정성껏 효도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글을 읽고 《예기》 〈학기(學記)〉에 "오늘날 가르치는 자들은 그 글자만 보고 웅얼거릴 뿐이다.[今之敎者 呻其佔畢]" 하였다. 신(呻)은 음(吟)의 뜻이고 점(佔)은 시(視)의 뜻이고 필(畢)은 간(簡)의 뜻이니, 오늘날 경서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경서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간편(簡片)에 있는 글자만 보고 송독(誦讀)하여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대개 '점필'은 글의 내용은 모른 채 입으로만 송독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뜻인데, 후세에는 글을 송독하는 것을 범칭하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송독'의 뜻으로 쓰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열녀 설씨전 烈婦薛氏傳 설씨(薛氏)의 본관은 순창(淳昌)으로 진사 응룡(應龍)의 딸이며, 참판 옥천군(玉川君) 훈현(勳玄)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정숙하였으며, 부인의 덕행을 일찍 성취하였다. 19세에 첨정(僉正) 정진(鄭縉)191)에게 시집갔는데, 정진은 본래 나주 사람으로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의 후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현(士賢)의 아들이다. 설씨는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 적에 내칙을 준수하여 종족에게 칭찬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첨정공(僉正公)이 재종숙인 정응(鄭鷹)·정홍(鄭鴻) 두 사람과 의병을 일으켜 충렬공 고경명의 막하에 나아갔다. 한달 여 만에 금산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설씨가 말하기를, "패하였다고 하니 부군도 필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결하고자 하니 집안사람들이 힘써 만류하였다. 그날 저녁에 남몰래 후원(後園)으로 들어가 또 스스로 목을 매려고 하자 시어머니 김씨가 뒤를 밟아 구원하여 풀어주고 말하기를, "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첨정공이 과연 이르렀는데, 마침 일 때문에 밖에 있어서 죽지 않았던 것이다. 정유재란에는 첨정공과 김억추(金億秋) 등 여러 공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대동강을 방어하고 지켰다. 이때에 설씨는 늙은 시어머니 및 재종숙모 정씨와 김씨를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고, 여종 몽란(夢蘭)이 따라왔다. 하루는 적이 갑자기 이르러 먼저 그 시어머니를 해치고 또 설씨에게 향하자 설씨가 높은 바위 벼랑에 앉아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비록 견양(犬羊)과 같은 오랑캐이지만 어찌 조선의 예의의 풍속을 모른단 말이냐."하고는 마침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정씨와 김씨도 모두 가까운 곳에 있다가 또 따라 몸을 던져 죽었다. 몽란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이어 돌에 부딪혀 죽었다. 그때에 첨정공은 서북 길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충무공의 막하에 속하였는데, 노량의 전투에서 재종숙 두 사람과 동시에 순절하였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천보(天寶)의 난192)에 의사(義士)는 오직 안노공(顔魯公)193) 한 사람뿐이었으며, 오계(五季)194)의 말엽에 정녀(貞女)는 오직 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195) 한 사람 뿐이었다. 충렬(忠烈)의 어려움이 예로부터 이미 그러한데, 정씨 일문에 충신과 열부가 성대하여 끊이지 않았으며, 그 크나큰 기강과 절개, 유풍과 여운이 환하게 사람의 이목을 비추었으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 다만 구중궁궐은 깊고도 멀어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하는 일이 적막하여 비록 유감스러운 것 같지만, 만고의 강상(綱常)에 공이 있는 자는 응당 만고의 강상과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이니, 어찌 한 때에 드러나고 묻힌 것으로 낮다 높다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薛氏貫淳昌。進士應龍女。參判玉川君勳玄孫。自幼溫仁貞靖。婦行夙就。十九歸僉正鄭縉。縉本羅州人。文靖公可臣后。嘉善士賢子。薛氏事舅姑。奉君子。克遵內則。見稱宗族。壬辰之亂。僉正公與再從叔二人鷹鴻倡義。赴忠烈公幕。月餘錦山敗報至。薛氏曰。一陳敗北。夫君亦必不免。遽欲自處。家衆挽之甚力。其夕潛入後園。又欲自經。姑金氏跟至救解曰。汝夫生死不可知。未晩也。居數日。僉正公果至。適以事在外而得不死也。丁酉再亂。僉正公與金億秋諸公。復起義旅。防守大同江。是時薛氏奉老姑及再從叔母鄭氏金氏。逃難于山峽。婢夢蘭隨之。一日賊猝至。先害其姑。又向薛氏。薛氏據危巖而坐。大聲責之曰。汝雖犬羊。豈不知朝鮮禮義之俗乎。遂投巖下而死。鄭氏金氏俱在傍近。又從而投死。夢蘭抱尸痛哭。因觸石而死。時僉正公自西北路。轉戰南下。隸李忠武幕。露梁之戰與再從叔二人。同時殉節。外史氏曰。天寶之亂。義士惟顔魯公一人。五季之衰。貞女惟王凝妻一人。忠烈之難。自古已然。鄭氏一門。忠臣烈婦。磊落相望。而其宏綱大節。遺風餘韻。炳炳然照人耳目。吁可敬也。但九閽深遠。旌褒寥寥。雖若可憾。然有功於萬古綱常者。當與萬古綱常同其始終。豈一時顯晦所能低昂也耶。 정진(鄭縉) 미상~1598.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의(子儀)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삼종형제인 정응(鄭鷹)·정홍(鄭鴻)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합세하였다.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묘막에 잠시 피하였다가, 정부에서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진(陣)에 보내는 문서를 전달하는 데 공을 세워 훈련원첨정에 임명되었다. 그 뒤 1598년 노량해전에 참가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천보(天寶)의 난 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이다. 즉 당시에 일어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가리킨다. 안노공(顔魯公)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진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이른다. 자가 청신(淸臣)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우자, 현종(玄宗)이 하북 초토사(河北招討使)로 삼아 북방 일대의 의병(義兵)을 이끌게 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고 대종(代宗) 때에 노군공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에 태자 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초유(招諭)하러 갔다가 구금되어 3년간 온갖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오계(五季)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까지의 다섯 나라를 말하는데,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이다. 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 왕응은 당(唐)나라 때 학자로,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을 만나 끝까지 성(城)을 지켰다.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유해(遺骸)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팔을 잘라 버렸던 고사(故事)가 있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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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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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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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自警 知非欽伯玉。覺是慕淵明。所以古人學。戰兢保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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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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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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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永錫齋偶吟 短髮千莖白。晩花百日紅。平生辛苦地。畵柱愧成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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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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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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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獨坐 獨處寬無事。柴扉盡日關。閒中心似水。靜裏意如山。當戶鳥啼下。隔籬人往還。仙鄕不離室。忘却損宋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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