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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一. 土地賣買代金은拾円也一. 賣買金額을右人前領고所權을囙渡홈一. 保証人賣買契約成立을見고左에保証으로暑名捺印홈大正六年十二月二十日賣渡人 扶安郡東津面堂上里百貳拾壹番地地主代理人 孫雨琓[署押]保証人堂上里壹百貳拾六番地孫炳泰[印]土地表示扶安郡東津面堂石里西坪泰字一五三号田壹斗結五負五束金洛坤 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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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려신서》100)를 읽다 讀《律呂新書》 율학이 오래도록 잔결되어 한탄했는데 律學堪歎久缺殘서산101)이 한 번에 이것을 정리하였네 一番整理得西山5성과 2변102)은 선후를 나누었고 五聲二變分先後대려와 황종103)은 본원을 궁구하였네 大呂黃鍾究本原꾸준히 쌓은 공부는 가업을 따른 것이요 積累工夫從世業넓고 정밀한 견식은 스승에게 인정받았네 博精見識許師門언제나 근역에서 태평한 날에 那當槿域昇平日이 책을 가져다 써서 악관을 거느릴거나 擧用斯書領樂官 律學堪歎久缺殘, 一番整理得西山.五聲、二變分先後, 大呂、黃鍾究本原.積累工夫從世業, 博精見識許師門.那當槿域昇平日, 擧用斯書領樂官? 율려신서(律呂新書) 송(宋)나라 채원정(蔡元定)이 1187년에 지은 악서(樂書)이다. 13개 항목으로 구성된 〈율려본원(律呂本元)〉과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율려증변(律呂證辨)〉으로 나뉘어 있다.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의 호이다. 5성(五聲)과 2변(二變) 5성은 음악의 다섯 음계로,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를 말한다. 2변은 5성에 변궁(變宮)과 변치(變徵)를 더한 7음을 가리킨다. 《통전(通典)》에 "상(商)나라 이전에는 5음(五音)만 있었는데 주(周)나라 때에 여기에 문(文), 무(武) 2성(聲)이 추가되었으니, 이것을 2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事物紀原 卷2 樂舞聲歌部11》 대려(大呂)와 황종(黃鍾) 12율의 성음(聲音) 중 하나로, 황종은 홀수에 해당하는 양률(陽律)에 속하고 대려는 짝수에 해당하는 음려(陰呂)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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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속체. 유병산76)을 본받다 十二屬軆 效劉屛山 곤궁하게 칩거함은 쥐구멍에 사는 것 같아 窮蟄同於鼠穴居평생 그저 우거 신세77)를 면하고 싶었네 生平但欲免牛裾영원히 남을 이름은 바란 적 없고 虎皮名字曾無望교묘하게 생계 꾸리는 방법도 엉성하였네 兎窟謀生亦所疏앉아서 용의 간78) 말한들 끝내 무슨 이익이랴 坐說龍肝竟何益화사첨족하는 것도 되려 허사가 되고 말았네 畵添蛇足反歸虛늙은 말이 길을 가는 날에 지혜를 오로지하고79) 智專老馬行途日뭇 양이 막 나무를 해칠 때 경계를 두어야 하네80) 戒在羣羊害木初원숭이 새는 봄 저물 제 놀라지 않고 猿鳥不驚春暮際닭과 술은 곡식 여문 뒤에 익어간다오 鷄醪方熟歲登餘세간에 개처럼 구차한 분분한 무리81) 世間狗苟紛紜輩다투어 요동 돼지 자랑하니 가소롭구나 競詑遼猪可笑渠 窮蟄同於鼠穴居, 生平但欲免牛裾.虎皮名字曾無望, 兎窟謀生亦所疏.坐說龍肝竟何益? 畵添蛇足反歸虛.智專老馬行途日, 戒在羣羊害木初.猿鳥不驚春暮際, 鷄醪方熟歲登餘.世間狗苟紛紜輩, 競詑遼猪可笑渠. 유병산(劉屛山) 송(宋)나라 사람 유자휘(劉子翬)로, 병산은 그의 호이다. 주희(朱熹)의 스승이다. 주희가 유병산에게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차례를 묻자, 병산이 기뻐하며 "나는 《주역》에서 덕에 들어가는 문을 얻었다. 이른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不遠復]'는 것이 나의 삼자부(三字符)이다. 그대는 항상 이것을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心經 卷1》 우거(牛裾) 신세 소에 옷을 입혔다는 뜻으로, 무지함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사람이 고금의 도리를 통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 사람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다.[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6》 용의 간 여덟 가지의 진미(珍味) 중 하나이다. 늙은……오로지하고 춘추 시대 제(齊)나라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환공(桓公)을 수행하여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했는데, 봄에 갔다가 겨울에야 돌아오면서 옛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자, 관중이 말하기를 "늙은 말의 지혜를 쓸 만하다.[老馬之智可用也.]" 하고, 이에 늙은 말을 풀어놓아 말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가 마침내 옛길을 찾게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韓非子 說林上》 뭇……하네 인의(仁義)의 선한 양심을 잘 보존하여 기르고 욕망이 이를 해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서 온 말이다. 개처럼……무리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데 몰두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으며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고 비굴하게 처신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아침에 그러한 행동을 후회했다가 저녁이면 또다시 그러하여, 파리 떼가 윙윙거리고 개가 구차하게 자꾸 덤벼들 듯해서 쫓아버려도 다시 돌아오곤 한다.[朝悔其行, 暮已復然, 蠅營狗苟, 驅去復還.]"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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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께서 신축년(1901, 고종38) 동짓날에 봉서사에서 회옹의 운에 차운한 시117)에 삼가 차운하다 소서를 아울러 기록한다. 謹次先師辛丑南至鳳棲寺所次晦翁韻【幷小序】 이때 선사께서 시를 지어 제생에게 보이셨는데 모인 자가 70여 명이었다. 각자 차운시를 짓게 하고 직접 우열을 매기셨는데 나이가 어려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나에게 윤색하게 하셨으니 그 가르치는 뜻이 하나같이 어찌 그리 정성스러우셨던가. 이제 어느덧 42년이나 지났고 스승께서 돌아가신 지도 또 그중에 반이 지났다. 옛날과 지금을 돌아보매 성취한 것 없는 나를 생각하니 감개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겠다.학문의 요체는 마음 밭에 있으니 學要心田中훈과 유118)를 잘 취사해야 하네 去取薰與蕕만약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如不辨得此어디에 수오지심이 있겠는가 安所有惡羞아 내가 일찍 스승께 배웠는데 嗟余早從學백발에도 이 문제로 근심한다네 白首以是憂봉서사의 모임은 옛날 언제였나 鳳寺昔何日스승과 제자 유명을 달리하였네 師生隔明幽이제 또 동짓날이 되었는데 今又逢南至학업은 퇴보하고 세월만 흘러갔네 業退歲不留어떻게 하면 크게 분발하여 安能大奮發선철의 자취를 뒤따를거나 追及曩哲輈 是時, 先師作詩以示諸生, 會者七十餘人, 令各次作.親自考批, 其年少不嫺者, 命澤述修潤, 其敎意一何勤也? 今忽忽爲四十二年之久, 而山頹之年, 又居半其數矣.俯仰今昔, 念余無成, 不勝感慨之意.學要心田中, 去取薰與蕕.如不辨得此, 安所有惡羞?嗟余早從學, 白首以是憂.鳳寺昔何日? 師生隔明幽.今又逢南至, 業退歲不留,安能大奮發, 追及曩哲輈? 선사께서……시 이 시는 전우(田愚)의 《간재집(艮齋集))》에는 보이지 않고, 이와 같은 운을 쓴 것은 《간재집 후편》 권18에 〈병진년 동짓날에 회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丙辰南至 敬次晦翁韻]〉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훈(薰)과 유(蕕) 훈은 향기로운 풀을, 유는 악취 나는 풀을 가리킨다. 비유하여 선악(善惡), 현우(賢愚) 등을 의미하고, 또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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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황극》104)을 읽다 讀《洪範皇極》 서산을 계승한 구봉105) 繼述西山又九峰범주의 학문에 진실로 정통하였네 範疇之學儘精通낙서가 상을 보여주었으니106) 깊은 뜻 알았고 洛書示象知深意기자가 경을 진달하였으니107) 큰 공로 우러렀네 箕聖陳經仰大功천인의 이치에 감응하여 상하의 구분이 없고 理感天人無上下팔십 개로 장을 나누어 시종을 갖추었네 章分八十備初終한 편의 요점은 어디로 귀결되나 一篇樞紐歸何處오직 군주가 준칙을 세운 데 있다오108) 只在惟皇建極中 繼述西山又九峰, 範疇之學儘精通.洛書示象知深意, 箕聖陳經仰大功.理感天人無上下, 章分八十備初終.一篇樞紐歸何處? 只在惟皇建極中. 홍범황극(洪範皇極) 채침(蔡沈)이 그의 부친 채원정(蔡元定)과 스승 주희(朱熹)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저술한 책이다. 《주역(周易)》의 수리(數理)를 《서경》의 〈홍범(洪範)〉에 맞추어 놓은 책으로, 3편의 논(論)과 〈구구원수도(九九圓數圖)〉,〈범수지도(範數之圖)〉 등 15도(圖)가 수록되어 있다. 서산(西山)을 계승한 구봉(九峰) 서산은 채원정(蔡元定)의 호이고, 구봉은 그의 아들 채침(蔡沈)의 호이다. 낙서(洛書)가 상(象)을 보여주었으니 낙서는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이〔神龜〕 등에 있었던 마흔다섯 점의 글씨로서,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의 원본(原本)이 되었다. 기자(箕子)가 경(經)을 진달하였으니 무왕(武王)이 기자에게 천도(天道)를 물었을 때 기자가 이 〈홍범〉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설명하였다고 한다. 오직……있다오 《서경》 〈홍범〉에 "황극은 군주가 그 준칙을 세움이니, 이 오복을 거두어서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면 백성들도 너의 준칙에 대해 네가 준칙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皇極, 皇建其有極, 斂是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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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129)에게 화답하다 2수 和汝重【二首】 유유히 흐르는 세월은 골짝의 뱀 같은데 歲行冉冉壑蛇如큰 눈이 초가집 하나를 깊이 덮었네 大雪深封一土廬경내는 하늘이 세상을 연 뒤와 같고 境若天皇開世後몸은 화상이 단교한 처음130)과 같네 身同和尙斷橋初어찌 왔는가 친한 벗에게서 좋은 소식이여 何來好信從親契또 새 시 부쳐 쓸쓸한 나를 위로하는구나 更寄新詩慰索居도의를 지니고서 진중하게 처한다면 道義相將珍重處분분한 진세의 생각 멀어지리라 紛紛塵念覺稀疏사람으로 태어나 경서 공부함이 가장 좋으니 戴髮擔經莫所如죽음 기다리며 궁려에서 칩거함이 제격이라오 待符端合蟄窮廬좋지 못한 때에 태어났다고 어찌 한탄하랴 不辰何恨生身際여생에 외려 성의 처음 회복하길131) 구한다오 餘日猶求復性初고기 비단의 태평 시절은 어떤 세계인가 肉帛昇平何世界골짜기에서 전전함이 곧 집에서 사는거지 壑溝輾轉卽家居반찬을 멀리서 보내주니 참으로 감사하네만 饌需遠送雖珍感은혜 손상시켰으니 아 그대 계산 틀렸구려 傷惠嗟君一算疏 歲行冉冉壑蛇如, 大雪深封一土廬.境若天皇開世後, 身同和尙斷橋初.何來好信從親契, 更寄新詩慰索居?道義相將珍重處, 紛紛塵念覺稀疏.戴髮擔經莫所如, 待符端合蟄窮廬.不辰何恨生身際? 餘日猶求復性初.肉帛昇平何世界? 壑溝輾轉卽家居.饌需遠送雖珍感, 傷惠嗟君一算疏. 여중(汝重) 김택술의 문인인 최태일(崔泰鎰, 1899~?)의 자이다. 화상(和尙)이 단교(斷橋)한 처음 중이 참선을 부지런히 한다는 말이다. 《송자대전》 권4 〈수차(隨箚)〉에 "옛날에 어떤 승려가 다리를 끊고 참선하였기에 단교 화상(和尙)이라 칭하였다.[古有僧斷橋而修禪, 謂之斷橋和尙.]"라고 하였다. 성(性)의 처음 회복하길 본연의 성(性)이 선함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본연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논어》 〈학이(學而)〉의 《집주(集註)》에 "선을 밝게 알아서 그 처음을 회복한다.[明善而復其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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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119)에서 눈으로 길이 막히다. 두남120)의 시에 차운하다 阻雪壽洞 次斗南韻 객지에서 열흘 넘게 괴롭게 쓸쓸히 지내다가 旅食兼旬苦索居돌아오는 길에 신선 소매를 잡아 기뻤네 歸程喜得接仙裾벗의 도리는 삼익121)을 따를 줄 알아야 하니 須知友道從三益인의 공이 이여122)에 있다 어찌 믿지 않으랴 盍信仁功在二如책 상자는 그야말로 함께 좀 잡기에 좋지만 芸篋端宜同掃蠹매화 핀 다리에는 함께 나귀 탈 겨를 없다오123) 梅橋未暇伴騎驢하물며 천시가 회복됨은 인사와 관계 있으니 天時況復關人事미약한 양기가 막 점차 자라는 때를 보노라 看取微陽漸長初 旅食兼旬苦索居, 歸程喜得接仙裾.須知友道從三益, 盍信仁功在二如.芸篋端宜同掃蠹, 梅橋未暇伴騎驢.天時況復關人事, 看取微陽漸長初. 수동(壽洞)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두남(斗南) 오해겸(吳海謙)의 호이다. 삼익(三益) 세 가지 유익함을 주는 벗이라는 뜻이다. 《논어》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손해 되는 벗이 셋이 있으니, 벗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矣.]"라고 하였다. 이여(二如) 여오악취(如惡惡臭)와 여호호색(如好好色)을 가리키는 것으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함을 이른다. 《대학장구》 전 6장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라고 하였다. 매화……없다오 당(唐)나라 맹호연(孟浩然)이 매화를 찾으러 나귀를 타고 눈발이 휘날리는 중에 장안(長安)의 파교(灞橋)를 지나다 그럴듯한 시상(詩想)이 떠올랐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全唐詩話 卷5 鄭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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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149)을 생각하다 憶敬山 그리움에 며칠 밤 꿈에서 나타나니 相思連夜夢相成갈동에 있는 선장이 매번 기억나네 每記仙庄葛洞名눈썹 찌푸려 소락150)의 부끄러움 되지 말고 不作皺眉慙邵樂응당 실지로 유성151)을 힘써야 하리라 應從實地勉劉誠적적한 창가에서 구름과 함께 묵고 一牕寂寂雲同宿멀고 먼 백 리에 달만 홀로 밝겠지 百里迢迢月獨明가을 흥취에 옛 유람을 어찌 다시 계속할까 秋興舊遊那復續기약에 앞서 내 군평152)처럼 점치고 싶네 前期我欲同君平 相思連夜夢相成, 每記仙庄葛洞名.不作皺眉慙邵樂, 應從實地勉劉誠.一牕寂寂雲同宿, 百里迢迢月獨明.秋興舊遊那復續, 前期我欲同君平. 경산(敬山) 정기성(鄭基聲, 1890∼1968)의 호이다. 또 다른 호는 담재(淡齋)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출신이다. 저서에 《담재유고(淡齋遺稿)》 25권 25책이 전한다. 소락(邵樂) 소옹(邵雍)의 즐거움을 말한다. 송(宋)나라 소옹이 사마광(司馬光) 등 낙양(洛陽)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안락와(安樂窩)라는 집을 짓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누린 고사가 있다. 《聞見錄 卷18》 유성(劉誠) 유안세(劉安世)의 성(誠)을 말한다. 송(宋)나라 유안세가 사마광(司馬光)에게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닦는 요체로서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사마광이 "그것은 성(誠)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시 유안세가 "그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군평(君平) 한(前漢) 성제(成帝) 때의 은사 엄준(嚴遵)의 자이다. 그는 촉(蜀) 땅에 은거하여 성도(成都)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쳐주며 먹고 살았다. 《漢書 王貢兩龔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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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의 임씨 병사에 쓰다 題眞洞林氏丙舍 날 듯한 누각은 어느 해에 일으켰나 翼然樓閣起何年평택의 집안 명성이 대대로 전해졌네 平澤家聲世世傳명승지 봉래는 신비한 땅이요 名勝蓬萊神秘地곧은 충정의 감정은 마점의 언덕이라143) 貞忠監正馬粘阡진정에 편액 걺은 선조를 생각해서이고144) 甄亭揭號思先祖이사에 서책 보관함은 후현을 기다려서지145) 李舍藏書待後賢벽옹이 열심히 공부한 곳임을 알겠으니 認是碧翁攻苦處옛 자취 뒤미쳐 생각하며 새 시편 읊노라 追憶舊蹟賦新篇 翼然樓閣起何年, 平澤家聲世世傳.名勝蓬萊神秘地, 貞忠監正馬粘阡.亭揭號思先祖李, 李舍藏書待後賢.認是碧翁攻苦處, 追憶舊蹟賦新篇. 곧은……언덕이라 임씨(林氏) 병사(丙舍)의 터를 임득춘(林得春)이 잡았다는 말이다. 감정(監正)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추증된 임득춘으로, 병자호란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로 인해 군자감 정에 추증되었다. 《後滄集 卷23 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林公墓碣銘》 진정(甄亭)에……생각해서이고 진정은 진씨(甄氏)의 정자로, 사정(思亭)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때 서주(徐州)의 부호였던 진씨 집안이 진군(甄君)의 대(代)에 이르러 빈한해졌다. 그래서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여러 영구(靈柩)를 함께 장사지내고 무덤 가에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은 사정을 지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思亭記》 이사(李舍)에……기다려서지 이사는 이씨 산방(李氏山房)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이상(李常)은 젊었을 때 여산(廬山)의 백석승사(白石僧舍)에서 공부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장서(藏書) 1만 권을 뽑아서 공부하던 집에다 기증하고, 그곳을 '이씨 산방'이라 명명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9 李君山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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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산 족형 양식 을 애도하다 悼晦山族兄【亮植】 용성157)에서 고아한 명망 공보다 앞선 이 없는데 龍城雅望莫公先하물며 우리 일가에서 노전158)처럼 숭상받음에랴 矧在吾宗魯殿崇칠절의 이름난 가문은 대대로 내려온 덕을 전하였고 七節名門傳世德팔순의 오랜 수명은 인의 공을 보답받은 것이네159) 八旬遐壽報仁功뭇 신선들 천상에서 자리를 비워 두겠지만 列仙天上應虛座인간 세상 경박한 세태 누가 풍속 바로잡을까 薄俗人間孰矯風서리 이슬 내릴 제 봉산160) 길에서 3년 전 헤어졌는데 霜露蓬阡三載別결국 이날 되니 한이 끝이 없구나 竟成此日恨無窮 龍城雅望莫公先, 矧在吾宗魯殿崇.七節名門傳世德, 八旬遐壽報仁功.列仙天上應虛座, 薄俗人間孰矯風?霜露蓬阡三載別, 竟成此日恨無窮. 용성(龍城) 전라북도 남원(南原)의 고호이다. 김양식(金亮植)은 지금의 전북 남원시 산동면 목동리에 거주하였다. 노전(魯殿) 서한(西漢) 경제(景帝)의 아들 노공왕(魯恭王)이 세운 영광전(靈光殿)을 가리킨다. 뒷날 많은 궁전들이 모두 없어지고 영광전만 홀로 남았기에, 후한(後漢)의 왕연수(王延壽)는 〈노영광전부서(魯靈光殿賦序)〉에서 "영광전만 우뚝 홀로 서 있었다.[靈光巋然獨存.]"라고 읊었다. 이후로는 홀로 남은 인물이나 건물 등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인(仁)의……것이네 《논어》 〈옹야(雍也)〉에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인한 자는 장수한다.[ 知者樂, 仁者壽.]"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 봉산(蓬山) 전라북도 변산면 중계리에 소재한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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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황군 욱 에게 주다 贈石田黃君【旭】 석전의 고아한 흥취가 문단을 뒤흔들었고 石田雅致動詞林게다가 서법에 뛰어나 촌음을 아꼈지 亦復工書惜寸陰조적의 고문163)은 응당 궁구할 수 있고 鳥跡古文應可究마제의 묘법164)은 어찌 찾기 어려우랴 馬蹄妙法豈難尋섬등165)에 붓을 휘두르니 바람이 일려 하고 剡藤落筆風將起단석166)에 못을 뚫으니 물이 얼마나 깊은가 端石穿池水幾深장욱167)은 천추의 명필이요 황욱도 그러하니 張旭千秋黃旭又사람으로 하여금 〈팔선가〉168)를 짓게 하네 令人堪作八仙吟 石田雅致動詞林, 亦復工書惜寸陰.鳥跡古文應可究, 馬蹄妙法豈難尋.剡藤落筆風將起, 端石穿池水幾深.張旭千秋黃旭又, 令人堪作八仙吟. 조적(鳥跡)의 고문(古文) 새 발자국 모양의 서체를 이르는 말로서, 중국 황제 때 창힐(蒼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조전(鳥篆)이라고도 한다. 마제(馬蹄)의 묘법(妙法) 말발굽 모양의 필법(筆法)을 이르는 말로, 글자의 가로획을 긋는데 왼쪽 끝은 말굽 형상으로, 오른쪽 끝은 누에의 대가리 형상으로 하였다. 섬등(剡藤) 섬계(剡溪)에서 나는 등(藤)으로 만든 종이를 말하는데, 이 종이가 가장 좋기로 유명하다. 단석(端石) 단계(端溪)의 돌로 만든 벼루인 단계연(端溪硯)을 말한다. 중국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단계에서 생산되는 자석연(紫石硯)으로 만드는데, 먹이 진하게 잘 갈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욱(張旭) 당(唐)나라 때의 서가(書家)로, 초서(草書)에 능하여 세칭 초성(草聖)이라고 한다. 팔선가(八仙歌) 당(唐)나라 때 술을 즐겨 마시며 풍류를 만끽하여 음중팔선(飮中八仙)이라 불렸던 이백(李白), 하지장(賀知章), 이적지(李適之),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晉), 장욱(張旭), 초수(焦遂)에 대해 읊은 노래로,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말한다. 《杜少陵詩集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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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군에게 주다 贈盧君 옥천자171)는 이미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지만 玉川子已鬢霜明여전히 소년의 호기로운 정이 있다오 猶有少年豪氣情통쾌하게 마시니 묵은 병을 잊을 수 있고 快飮可能忘舊病크게 읊조리니 다시 새로운 소리 나오구나 高哦亦復發新聲오늘 막다른 길에서 완적(阮籍)172)을 가엾게 여기지 말고 窮途此日休憐籍훗날 고상한 자취로 정히 군평(君平)173)을 배우게나 遐躅他時定學平무엇보다 황량한 방장산174) 북쪽에서 除是荒間方丈北일신 편하게 하고 명예 구하지 말게 一身安處不求名 玉川子已鬢霜明, 猶有少年豪氣情.快飮可能忘舊病, 高哦亦復發新聲.窮途此日休憐籍, 遐躅他時定學平.除是荒間方丈北, 一身安處不求名. 옥천자(玉川子) 당대(唐代)의 시인 노동(盧仝)의 자호(自號)이다.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했는데 간의(諫議)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유(韓愈)가 그를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하였다. 여기서는 상대가 노(盧)씨이기 때문에 노동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완적(阮籍)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수시로 혼자 무작정 수레를 타고 큰길을 마냥 가다가 막다른 길을 만나면 매양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阮籍列傳》 군평(君平) 전한(前漢)의 술사(術士) 엄준(嚴遵)의 자이다. 그는 촉 땅 성도(成都) 시내에서 점을 쳐서 생활하였는데, 늘 충효와 신의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였고, 하루에 100전(錢)만 벌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앉아 《노자(老子)》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방장산(方丈山) 지리산(智異山)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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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옥40) 【순진】에게 답함 答鄭士玉【淳珍】 일전에 보내준 편지는 족히 한 번 만나 얼굴을 보는 것을 대신할 수 있었는데, 더구나 그 내용이 지향한 것이 섬실(贍悉) 명백(明白)하니 더욱 이 때문에 사랑스러웠네. 대저 그대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진실하며 잡아 지키는 것이 삼가고 신칙하지만 궁구하여 탐색하는 공에 있어서는 오히려 조창(條暢)함이 모자라니, 이것은 덕을 진보시키는 데는 또한 작은 일이 아니네. 그러나 또한 어찌 별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단지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여 조금이라고 방일함이 있지 않게 하여 날마다 일마다 도리를 궁구하여 명료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네. 이와 같이 쌓아가서 오래 되면 마땅히 공효를 볼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집의 서숙을 깨끗이 청소하고 부모를 섬기면서 남는 힘으로 책을 보는 것 이것이 좋은 계책이네. 장엄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붙잡아 기르고 조용히 침잠하는 것은 나의 집에서 어수선하게 있을 때 보다 좋을 것이니, 한 번 그렇게 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오직 두려워하는 것이 가깝다.[惟畏近之]"41)라고 한 이 '외(畏)' 자는 경(敬)의 뜻을 말한 것이고, "천명을 두려워한다.[畏天命]"42)라고 한 이 '외' 자는 경의 일을 말한 것이니, 혼용하여 전혀 차별이 없어서는 불가할 듯하네. 의림(義林)은 그대가 떠남으로부터 갑절이나 쓸쓸하여 더불어 회포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매번 바라보며 그리워할 뿐이네. 오직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 노력하여 나의 뜻을 위로해 주시게. 日者惠幅。足替一番顔面。況其辭義去處。膽悉明白。尤庸愛仰。大抵吾友姿稟淳實。指守謹勑。而於窮索之功。尙欠條暢。此於進德。亦非細事。然亦豈有別法。只得常存此心。勿令少有放逸。逐日逐事。窮究道理。使之了了分明。如此積累。久當見功。如何如何。淨掃家塾。餘力看書。此是良筭。莊敬持養。從容沈潛。未必不勝於在敝室撓撓時也。試爲之如何。惟畏近之。此畏字。言敬之義。畏天命。此畏字。言敬之事。恐不可混之而全無差別也。義林自賢之去。一倍踽凉。無與爲懷。每瞻望依然而已惟望夙夜勉力以慰區區之意。 정사옥(鄭士玉) 정순진(鄭淳珍, 1878~?)을 말한다. 자는 사옥, 호는 극성재(克省齋),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오직……가깝다 《심경부주(心經附註)》 경이직내장(敬以直內章)에, "선사의 경 자의 뜻은 오직 두려워함이 이에 가깝다.〔先師敬字之義, 惟畏爲近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천명을 두려워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군자는 세 가지 두려워함이 있으니, 천명을 두려워하며 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라고 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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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내가 지은 〈양성당명(養性堂銘)〉12)은 지금 기억도 못하겠는데, 그대는 어디에서 얻어 보았는가? 대개 명(銘)에서 말한 부곽(郛郭)은 윤곽[匡郭], 지반(地盤)의 뜻이네. 심(心)을 성(性)의 주재(主宰)로 여긴 것은 이(理)의 주재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심을 성의 부곽으로 여긴 것은 기(氣)의 정상(精爽)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정상과 기질은 비록 정추(精粗)가 있지만 기질은 또한 정상의 부곽이 아닌가? 그 사이에 한 겹의 꺼풀이 있는 것 같지만 부곽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네. 기질과 정상이 부곽이 되지 않으면 다시 어떤 물건이 있어 이 성을 갖추어 실을 수 있겠는가? 부곽을 주재로 삼은 것은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아마 크게 옳지 않은 듯하네. 그대가 평소 기꺼이 정령(精靈)을 주재(主宰)로 간주하려고 않으면서 지금 이에 부곽을 주재로 여기는가? 또 상문(上文)에 비록 본심을 말하였으나 중간에 '기질(氣質)' 두 글자로 섞어서 말하였으니, 하단에 방일(放逸)의 마음을 말한 것은 아마 불가함이 없을 것 같네. 내가 간장(澗丈)에게 준 편지에서 분수처(分殊處)를 말한 것은 과연 주자의 본의가 아니네. 그러나 천하의 물(物)은 뒤섞여 만 가지로 변함에 단지 '곧바로 이루는 것[直遂]'과 '곧바로 이루지 못한 것[不直遂]'일 뿐이니, 직수를 정통(正通)으로 여기고 불직수를 편색(偏塞)으로 여기는 것 또한 하나의 설이 되는데 해롭지 않네. 하문의 장단 비척(長短肥瘠)은 형기의 나뉨이 이른바 원습(原濕)에 사는 사람은 풍성하고 두텁고 사토(沙土)에 사는 사람은 파리하고 가늘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지 물류(物類) 상에 나아가 그 분수(分殊)의 본연이 아닌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네. 교구(矯捄) 변화(變化)와 사람이 사람 되는 연유의 여부에 대해서는 애초에 자주 언급할 겨를이 없었네. 더구나 거처가 기상을 바꾸고 봉양이 체질을 변화시키니 체질 또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있고, 기질을 변화시키니 질(質) 또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음에야 어떠하겠는가? 이런 등은 활간(活看)13)하는 데 달려 있으니, 어떻게 여기는가? "작용(作用)……"이라 하였는데, 근래 《주자대전》을 보니 설명해 놓은 곳이 많이 있었네. 대서 석씨(釋氏)가 작용을 성(性)으로 여긴 것은 고자(告子)의 "생리적인 본능을 성(性)이라고 한다."는 것과 같네. 그러나 그 작용이 삼연(森然)히 이미 갖추고 찬연(粲然)한 조리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끝내 스스로 사사롭게 한 것을 면하지 못하네. 그대가 이른바 "작용을 성이라 하는 것은 실로 불가하고 작용을 심이라 하는 것 또한 불가하다."라고 한 것은 매우 옳네.근래 주자의 글 약간 편을 보니, 간간이 나를 감발시키는 곳이 있었네. 다만 한스럽게도 나의 쇠퇴함이 이와 같아 힘을 기울여도 전날의 허물을 만분의 일도 보완할 수 없네. 鄙所述養性堂銘。今不可記憶。未知賢於何處得見耶。蓋郛郭是匡郭地盤之義也。以心爲性之主宰者。是指理之主宰而言。以心爲性之郛郭者。是指氣之精爽而言。精爽氣質。雖有精粗。而氣質亦非精爽之郛郭耶。其間若有一重膜子。而其爲郛郭則一也。氣質精爽。不爲郛郭。則更有何物可以該載是性也。以郛郭作主宰者。以愚料之。恐大不是。賢平日不肯以精靈作主宰看。而今乃以郛郭作主宰耶。且上文雖言本心。而中間以氣質二字。措以爲語。則下段言放逸之心。恐無不可也。鄙與澗丈書言分殊處。果非朱夫子之本意。然天下之物。參錯萬變。只是直遂與不直遂而已。以直遂爲正通。以不直遂爲偏塞。亦不害爲一說也。下文長短肥瘠。其非形氣之分。如所謂原濕之人豊而厚。沙土之人瘦而細者耶。此特就物類上。指其分殊之非本然者而言。至於矯捄變化。與夫人之爲人關由與否。初不數數暇及也。況居移氣。養移體。則體亦有可移者。變化氣質。則質亦有可變者乎。此等在所活看。未知何如耶。作用云云。近看大全。多有說起處。大抵釋氏以作用爲性。如告子生之謂性。然其作用。不自森然已具。粲然有條中出來。則終不免於自私而已。賢所謂以作用謂性。固不可。而以作用謂心。亦不可者。極是極是。近閱朱書若而編。間間有感發人處。但恨衰頹如此。無以致力以補前愆之萬一也。 양성당명(養性堂銘) 《일신재집》권9에 실려 있다. 활간(活看) 글을 볼 때에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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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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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보내온 편지의 제1단락에서 "령(靈)은 심의 당체(當體, 실체)이니, 그 가운데 나아가면 절로 주재(主宰)와 묘용(妙用)의 신(神)이 있기 때문에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체용이 있음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주자가 《대학》명덕(明德)의 주에서 어찌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가운데 절로 주재와 묘용의 신이 있어 중리를 갖추었다.……"라고 하지 않고, 단지 "허령불매"하다고만 하였겠는가? 단지 이 령은 문득 주재하기도 하고 문득 묘용이 되게 하기도 하니, 이 령을 제거하면 완연(頑然)한 하나의 흙과 나무일뿐이니, 다시 어떤 물이 있어 주재할 수 있으며, 묘용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仁)하기 때문에 령(靈)하니 인이 아니면 어찌 이 령이 있겠으며, 인하기 때문에 각(覺)하니 인이 아니면 어찌 이 각이 있겠는가? 이로써 능히 깨닫는 것은 령(靈)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성(性)이며, 능히 주재하는 것은 령이고 주재하게 하는 것은 성이며, 능히 묘용하는 것은 령이고 묘용하게 하는 것은 성이라, 능(能)이라는 것은 부려지는 것이고 소(所)라는 것은 장수이며, 자자(者者)라는 것은 종이 되고 저저(底底)라는 것은 주인이 되니, 이른바 령이라는 것은 바로 이(理)가 주재 묘용하는 것임을 알겠네. 지금 이것을 모르고 바로 령의 밖에서 별도로 하나의 현현(玄玄)하고 망망(茫茫)한 영상(影象)을 찾아 주재와 묘용으로 삼으려하니, 이 물이 어떤 물인지 모르겠네. 이(理)인가, 기(氣)인가? 기라고 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주재를 기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성이라고 한다면 성이 성을 점검하니 심이 성을 점검한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고, 성이 성을 통솔하니 심이 성을 통솔한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네. 마음에는 령이 있고 또 신이 있어 각자 점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 사리에 과연 온당하겠는가? 근래 애산(艾山)의 심설(心說)은 진실로 과당한 곳이 있는 줄 깨달았으니, 이른바 "진실로 이 기가 없으면 정(靜)은 붙을 것이 없고 동(動)은 탈 것이 없기 때문에 합(合)이라고 한다."라는 것과 같은 것이네. 이것은 성(性) 자의 본 뜻을 완곡하게 설명한 것이고 심을 말한 것은 아니네. 선사(先師)께서 일찍이 애산의 물음에 답한 것에 "성(性)을 말하는 데로 차츰차츰 흘러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14) 잘못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이러했음을 생각한 말임을 알 수 있네. 제2단락에서 말한 것은, 당체(當體)의 원두(源頭)에 어찌 일찍이 각각 지분(地分)이 있었던가? 음양은 시작이 없고 동정은 실마리가 없어 천지에 원두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물건이 없네. 이른바 원두는 또한 당체(當體)에서 보아야 하네. 이 이가 있기 때문에 이 심이 있으니 이것이 원두이고, 이 심이 있기 때문에 이 이를 갖추니 이것이 당체인데, 어찌 위의 반과 아래의 반이 층으로 나뉘어 서로 현격함이 있겠는가? 제3단락에서 말한 것은, 태극(太極)·성(性)·신(神)·심(心)은 하나의 이(理)일 뿐이니, 그 주재와 묘용이 되는 것은 실로 두 가지가 없네. 심은 주재아 묘용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실로 나의 뜻이 아니니, 당시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겠는가? 제4단락의 주재와 묘용이 절로 심의 진면목과 본지(本旨)라는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네. 그러나 이것은 그대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알고 있으니, 교왕과직(矯枉過直)은 여기에 있지 않네. 다만 령을 심으로 인식하는 것은 주기(主氣)에 혐의스럽기 때문에 령의 밖에서 별도로 한 개 주재 묘용을 취하여 심의 본지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귀결[着落]할 곳이 없고 의거하여 지킬 것이 없게 하는 것이 마치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매어두려는 것 같으니, 이것이 교왕과직이 아니겠는가? 제5단락에서 말한 것은, '심통성정(心統性情)'의 '통' 자는 성정의 위에 있으니, '심' 자가 주제(主制)한다는 뜻이 절로 드러나네. 심이라는 것은 성정의 총명(總名)이고 '총' 자는 성정의 아래에 있으니, 성정의 밖에 다시 별도로 심이 없는 것이 마치 '성의(誠意)'와 '의성(意誠)'을 말함에 공(功)과 효(效)가 나누어지고, '경이(敬以)'와 '이경(以敬)'을 말함에 직(直)과 부직(不直)이 판별되는 것과 같네. 제6단락에서 "겨우 성(性)을 말하면 성이 아니기 때문에 도(道)는 깨닫는 이치는 있지만 깨닫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 설과 같다면 겨우 성을 말하기 이전에 도는 깨닫는 것이 있고 성을 말한 뒤에는 깨닫는 것이 없네. 또 말하기를 "심은 주재의 이(理)이고 묘용의 신(神)인데 그 돕는 것을 말하면 정령(精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심과 정령을 나누어 두 가지 물로 여기는 것이네.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령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주재와 묘용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령과 주재 묘용을 나누어 두 조각으로 만든 것이네. 이물(二物)과 양편(兩片) 이것이 어찌 일본(一本)과 주재(主宰)의 뜻이겠는가? 나는 실로 "기는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능히 성을 점검한다."라고 하였지, 어찌 일찍이 곧장 "기가 능히 성을 점검한다."라고 하였던가? 술이 보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리를 마신다고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한갓 기가 성을 점검하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제어하는 것 같음만을 알고, 이가 성을 점검하는 것은 임금이 임금을 제어하는 것이 되는 줄 모르는가? 또 심이 성을 점검하는 것은 성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을 따르는 것이니, 마치 장군이 바깥에서 제어하는 것은 임금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임금의 명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과 같네. 만약 장군이 바깥에서 제어하는 것을 가지고 참람되고 핍박하는 혐의가 있다고 여겨 금지하여 간여할 수 없게 하고, 음식을 전달하고 북을 울리는 등 해야 할 모든 일을 임금 스스로 한다면, 임금의 권세가 높다고 하겠는가, 없다고 하겠는가? 지금 의론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겠는가? 제7단락에서 "준로(峻露)……"라고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령(靈)이라는 물(物)은 비록 기를 떠나지 않지만 그것을 곧장 기라고 한다면 정추(精粗)의 구분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에 준로(峻露)라고 했을 뿐이네. 무릇 심이라는 것은 오행(五行)의 정영(精英)이고 일신(一身)의 신명(神明)이니, 이른바 주재가 이로 말미암아 서고 이른바 묘용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어찌 정령을 버리고 별도로 주재와 묘용의 신을 구하여 심의 본지(本旨)로 삼는 것이 가하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성과 심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맹자가 이른바 "인은 인심이다.[仁人心]"라고 한 것과 소옹(邵雍)이 이른바 "심은 택극이 이것이다.[心太極是也]"라고 한 것은 하나이면서 둘인 것으로 말한 것이고, 공자가 이른바 "그 마음이 인을 어기지 않는다.[其心不違仁]"라는 것과 주자가 이른바 "심은 음양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心猶陰陽是也]"라고 한 것은 합하여 하나로 하려고 하되 반드시 먼저 나누어 정밀하게 해서 피차의 경계가 실로 구차해서는 불가하다는 것과 같네. 주자가 또 말하기를 "신령한 곳은 단지 심이다.[靈處只是心]"라고 하였으니, 주자는 어찌 주재와 묘용을 말하지 않고 단지 령으로 말한 것인가? 대개 령은 주재와 묘용이 되는 소이(所以)이기 때문이네. 《대학》의 주에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한 것으로……"라고 하였는데, 덕(德)은 득(得)이니, '소득(所得)' 두 글자로 '허령(虛靈)……'이라는 위에 두었으니, 허령은 명덕(明德) 가운데의 일이 됨을 알 수 있네. 세상 사람들은 '소득' 두 글자가 윗부분에 있는 줄 모르고 단지 하단의 '허령……'이라고 한 사이에서 명덕을 찾고 심지어 명덕이 형이하(形而下)가 된다고 하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는가? 이로서 령은 이(理) 가운데의 일이고 령이 주재묘용이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재 묘용 하는 것임을 알겠네. 어떻게 여기는가? 부곽(郛郭)의 설은 편지를 통해서와 만나서 이야기 한 것이 상세히 다했을 뿐 아닌데, 이에 다시 이렇게 제기하는가? 선입견은 옮기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 줄 알 수 있겠네. 비록 답하려고 하여도 앞에서 말한 것 이외에 다시 남은 말이 없으니,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이단의 학문이 침범하는 날을 당하여 이런 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네. 이런 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또 모두 주기(主氣)의 오류를 주장하여 각자 서로 배격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우리 유학의 도가 고약(孤弱)함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노쇠하고 궁하여 침체되어 있어 외롭고 무료한데, 오직 그대가 있어 서로 바라봄에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보거(輔車)15)처럼 의지하고 공거(蛩蚷)16)처럼 도움을 받는다면,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는 사이에 입술이 들어맞듯 회통(會通)하여 한 곳으로 함께 귀결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컨대 그대는 선입견을 주장하지 말고 공정하게 듣고 나란히 관찰하여 지당한데 돌아가기를 바라네. 來書第一段。謂靈是心之當體。就其中。自有主宰妙用之神。故有是具衆理應萬事之體用如此。則朱子於大學明德註。何不曰虛靈不昧之中。自有主宰妙用之神。以具衆理云云。而止曰虛靈不昧耶。只此靈也。便能主宰。便能妙用。除却此靈。則頑然一土木而已。更有何物可以主宰。可以妙用。但仁故靈。非仁安有此靈。仁故覺。非仁安有此覺。是知能覺者是靈。而所覺底是性。能主宰者是靈。而所主宰底是性。能妙用者是靈而所妙用底是性。能者爲役而所者爲帥。者者爲僕而底底爲主。則所謂靈者。卽理之所以主宰妙用也。今不知此。而乃於靈之外。別討一箇玄玄茫茫底影象。以爲主宰妙用。未知此物何物。是理耶氣耶。以爲氣也。則賢必不以主宰爲氣。以爲性也則是性檢性。不當曰心檢性。是性統性。不當曰心統性也。方寸之間。有靈又有神。各自占據。此於事理果穩當耶。近覺得艾山心說。誠有過當處。如所謂苟無是氣。則靜無所榙。動無所乘。故謂之合。此是完轉說性字本旨出來。非所以言心。先師嘗答艾山問有曰。駸駸流入說性去。可知誤入者。想未始非此之謂也。第二段云云。當體源頭。何嘗各有地分。陰陽無始。動靜無端。上天下地。無一物可以喚做源頭。所謂源頭。亦只於當體上見之。有此理故有此心。此源頭也有此心故具此理。此當體也。豈有上一半下一半層節之相懸耶。第三段云云。太極也性也神也心也。一理而已。則其爲主宰妙用。固無二致也。心不可以主宰妙用言者。實非愚意。當時緣何而云爾耶。第四段主宰妙用。自是心之眞面本旨。誠如來喩。然此非但賢知之。愚亦知之。矯枉過直。不在於此。但認靈爲心。嫌於主氣。故於靈之外。別取一箇主宰妙用。以爲心之本旨。使人沒着落無据守。如捕風繫影。此其非矯枉過直者耶。第五段云云。心統性情。統字在性情之上。則心字主制之義自著。心者性情之總名。總字在性情之下。則性情之外。更別無心。如曰誠意意誠。而功與效分焉。敬以以敬。而直不直判焉。第六段才說性。不是性。故道有覺之理。而無覺之事。若如此說。才說性以前。道有覺。而說性而後。無覺也。又曰心是主宰之理。妙用之神。而言其資助則精靈也。此以心與精靈。分爲二物也。又曰覺者靈也。覺之者主宰妙用也。此又以靈與主宰妙用。分爲兩片也。二物兩片。此豈一本主宰之義耶。愚固曰氣有爲。故心能檢性。何嘗直曰氣能檢性耶。以酒醴之出於來牟。而謂之飮來牟可乎。徒知氣檢性之如以臣制君。而不知理檢性之爲以君制君乎。且心之檢性。非制性乃循性也。如將軍之制於外。非制君。乃所以行君之命也。若以將之制外。而謂有僭逼之嫌。禁之使不得干預。而傳餐鳴鼓。凡百執事之役。君自爲之。則君之勢可謂尊乎貶乎。今之論何以異於是。第七段峻露云云。非他也。靈之爲物。雖不離氣而直謂之氣。則於精粗之分。有未愜者。故謂峻露耳。夫心者。五行之精英。一身之神明。所謂主宰。由此而立。所謂妙用。由此而生。豈可捨精靈而別求主宰妙用之神。以爲心之本旨乎。朱子曰性與心一而二。二而一。以二而一者言之。孟子所謂仁人心。邵子所謂心太極是也。以一而二者言之。孔子所謂其心不違仁。朱子所謂心猶陰陽是也。如欲合而一之。必先有以分而精之。而彼疆此界。固不可苟也。朱子又曰靈處只是心。朱子何不言主宰妙用。而只以靈言耶。蓋靈所以爲主宰妙用也。大學註曰。明德者。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云云。德得也。以所得二字。冠之於虛靈云云之上。可知處靈之爲明德中事也。世人不知所得二字在上頭。只於下段虛靈云云之間。尋求明德。至以明德爲形而下。豈不誤哉。是知靈是理中事。而靈之爲主宰妙用乃理之所主宰妙用也。如何如何。郛郭之說。以書以面。不啻詳悉。而乃復提起如此耶。可知先入之難移。有如是矣。雖欲奉答。而前說之外。更無餘言。奈何奈何。當此異學侵畔之日。而知有此事者。無幾人焉。知有此事者。又皆爲主氣所誤。各相排抑。去而愈甚。吾道之孤弱。爲何如耶況此衰窮淟渧。煢煢無聊。而惟有吾友相望。在不遠地。倚之如輔車。資之如蛩蚷。則其於講討問辨之間。可不脗然會通。思所以同歸一轍乎。願吾友不以先見爲主。公聽倂觀。歸於至當是望。 선사(先師)께서……있으니 《노사집(蘆沙集)》권12〈정후윤의 문목에 답함[答鄭厚允問目]〉에 나온다. 보거(輔車) 보(輔)는 협보(頰輔)로 뺨에 붙은 뼈를 가리키고, 거(車)는 아거(牙車)로 어금니 아래 뼈이다.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5년에 "속담에 이른바,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은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거(蛩蚷) 공공(蛩蛩)과 거허(蚷虛)를 말하는데, 전설상의 두 짐승의 이름이다. 공공은 북해 가운데 있다는 말 비슷한 짐승이고 거허는 수말과 암나귀 사이에서 난 짐승인데, 늘 같이 따라 다닌다고 한다. 항상 함께 지내며 서로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앞의 설이 자못 상세하여 이로부터 거의 하나로 귀결될 희망이 있다고 스스로 여겼더니, 보내온 편지를 받아봄에 하나로 귀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다시 가지에서 가지가 생겨나고 덩굴에서 덩굴이 생겨나 얽히고설킨 것이 또 심하였네. 모르겠으나 나의 설이 통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인가, 그대의 견해가 가려진 것이 있는 것인가? 반드시 여기에 하나는 있을 것이네. 지금 구절마다 답장을 하려고 하여도 잡다한 일로 여가가 없고, 비록 답장을 해도 또한 신뢰를 받을 리가 없으니,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우선 그 큰 요체 가운데 서로 합하지 않는 곳을 들어서 말하니, 여기에 합하면 합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라, 또 어찌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허령(虛靈)과 신명(神明)은 절로 하나의 물이네. 령(靈)은 실로 이(理)의 령이고 신(神) 또한 기(氣)의 신이며, 신은 실로 이의 묘(妙)이고 령 또한 이의 묘이네. 이른바 묘용을 신으로 여긴 것은 그 뜻이 대개 신은 이의 묘용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요, 곧장 신을 이로 여긴 것은 아니네. 그러므로 주자의 글에 신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긴 곳이 하나가 아니니, 예를 들면 후씨(侯氏)17)는 신명(神明)을 이(理)로 여기고 만정순(萬正淳)18)은 신명을 물(物)로 여겼는데, 주자는 만정순의 설을 따랐으니, 여기에서 볼 수 있네. 지금 그대는 신을 이로 여기고 명은 령으로 여기며, 령을 지반(地盤)으로 여기고 신을 주재(主宰)로 여기며, 령을 당체(當體)로 여기고 신을 본지(本旨)로 여기네.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령이고 깨닫게 하는 것은 신(神)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령은 기가 발한 것이고 신은 이의 작용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은 류가 한둘이 아니라 매우 많네. 이와 같다면 령과 신은 머리를 나란히 하여 병립해서 각각 점거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돌고 돌아 나오는 것이 각각 시절이 있는 것인가? 기를 이로 인식하고 성을 작용으로 인식해서 명의와 위치가 어긋나지 않음이 없네. 신령하게 하는 것을 주재와 묘용으로 여기고 작용의 권한을 한결같이 령에 돌리면 반드시 석씨(釋氏)처럼 작용을 성으로 여긴 뒤에야 권한을 이에 돌린다고 하겠는가? 령의 전권을 신에 돌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숙장(宿將)이 병권을 담당하는 것을 싫어하여 병권을 총신(寵臣)에게 돌린 것과 같네. 고인이 임금에게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도에 대해 말하기를 "오직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쓰지 않아야 비로소 사람을 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19) 이가 스스로 쓰지 않아도 주재가 되는 데 해롭지 않은 것은 그 상이 또한 이와 같네. 남당(南塘)이 이른바 "천리를 밝히는 주재의 오묘함은 그 말이 작용에 빠져들기 쉽다."라고 한 것20)은 애초에 까닭이 있어서 발한 것임을 비로소 알았네. 뒤에 그대 편지에서 인용한 한주(寒洲)의 "심이 성과 다른 것은 정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21)은 앞에서 이른바 "성과 정을 합하여야 심이라는 이름이 있다."라는 것과 "심은 성정의 총명(總名)이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권투(圈套)이니, 그대가 명백하고 공평하다고 인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네. 이미 이와 같이 인정해 놓고 또 의논할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또 한주의 설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음을 아니, 자신의 설 또한 의논할 것이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지난날 송복재(宋復齋)22)의 문집을 교정할 때 문집 가운데 "정상(精爽)은 기의 령인데 심이 타고 있다."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이 말은 또한 어떠한가? 나의 뜻에는 좋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대는 반드시 매우 좋다고 여길 것이네. 세상의 유자들은 대부분 태극(太極)은 기를 띠고 있고, 오성(五性)은 기를 인하는 것이고, 명덕(明德)은 형이하(形而下)라고 여기니, 이것은 실로 이를 해치는 심한 것이네. 간혹 그 폐단을 보고 돌이킬 수 있기를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또 교왕과직을 면치 못하여 작용이 성이라는 설을 하기에 이르니, 이와 같은데 어찌 그 일변(一邊)이 나에게 복종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前說頗詳。自謂自此而庶有歸一之望。得來書。不惟不一。而更於枝上生枝。蔓上生蔓。紕繆轇轕。抑又甚焉。未知鄙說有未暢歟。賢見有所蔽歟。必居一於斯矣。今欲逐節奉答。而冗撓未暇。雖奉答而亦恐無見信之理。柰何奈何。姑擧其大要之不相合處言之。於此合則無不合矣。又何必煩爲哉。夫虛靈也神明也。自是一物靈固理之靈。神亦氣之神。神固理之妙。靈亦理之妙。所謂以妙用爲神者。其意蓋曰神是理之妙用云爾。非直以神爲理也。故朱書以神爲形而下者。非一。如侯氏以神明爲理。萬正淳以神明爲物。朱子從正淳之說。此可見矣。今賢以神爲理。以明爲靈。以靈爲地盤。以神爲主宰。以靈爲當體。以神爲本旨。又曰覺者靈也。覺之者神也。又曰靈者氣之發。神者理之用。如此類。不一而足。如此則靈與神。是齊頭竝立。各有占據耶。抑旋旋出來。各有時節耶。認氣爲理。認性爲用。而名義位置。無不乖戾矣。以靈之爲主宰妙用。而作用之權一歸於靈。則必如釋氏之作用爲性然後。可謂權歸於理乎。惡靈之專權於神。猶唐德宗惡宿將典兵。而歸柄於寵臣也。古人語人君任下之道曰。惟不自用。乃能用人。理之不自用。而不害爲主宰者。其象亦猶是也。始知南塘所謂明天理主宰之妙。則其言易涉於作用者。未始非有爲而發也。後惠書所引。寒洲心之異於性。以其兼情故也之語。與前所謂合性與情。有心之名。及心者性情之總名。同一圈奪。賢以明白公平許之。固矣。旣許之如此。而又以爲有可議何耶。且知寒洲之有可議。而安知已說之亦無可議耶。曩日校澄宋復齋集。集中有曰精爽。氣之靈也而心乘焉。此語亦何如耶。於鄙意有不好。而賢必以爲大好矣。世之儒。多以太極爲帶氣。五性爲因氣。明德爲形而下。此固害理之甚者。間或有見其敝而思有以反之者。又不免矯枉過直。至爲作用是性之說。如此而安望其一邊之服於我耶。 후씨(侯氏) 후중량(侯仲良)을 말한다. 자는 사성(師聖)ㆍ희성(希聖), 호는 형문(荊門)이다. 송나라 때 경학가로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호안국(胡安國)에게 배웠다. 저서로는 《논어설(論語說)》,《후자아언(侯子雅言)》등이 있다. 만정순(萬正淳) 만인걸(萬人傑)을 말한다. 자는 정순·정순(正純), 호는 지재(止齋)이다. 송(宋)나라 흥국군(興國軍) 대야(大冶) 사람이다. 처음에 육구령(陸九齡)에게 배우다가 후에 육구연(陸九淵)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에 남강(南康)에 가서 주희(朱熹)를 만난 뒤로 주희의 제자가 되었다. 《宋元學案 卷69》 고인이……하였으니 육지(陸贄)가 당나라 덕종(德宗)에게 한 말인데, 《통감절요》권45〈당기(唐紀) 덕종황제 하(德宗皇帝下)〉에 나온다. 남당(南塘)이……것 《남당집(南塘集)》권34〈한수재 권 선생 행장(寒水齋權先生行狀)〉에 나오는 말이다. 남당은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호이다. 자는 덕소(德昭),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일어나자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洛論)에 맞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며 호론(湖論)을 이끌었다. 저서로는 《남당집》,《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역학답문(易學答問)》 등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한주(寒洲)의……말 《한주집(寒洲集)》권32〈심즉리설(心卽理說)〉에 나오는 말이다. 한주는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호이다. 자는 여뢰(汝雷),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숙부 이원조(李源祚, 1792~1871)에게 배웠다. 저서로는 《한주집》이 있다. 송복재(宋復齋) 송진봉(宋鎭鳳, 1840~1898)을 말한다. 자는 치승(致承). 호는 사복재(思復齋),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김평묵(金平默)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사복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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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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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황경함에게 보냄 與黃景涵 신령설(神靈說)은 지난번 인편에 답하여 보냈는데 받아보았는가? 무릇 그대가 령(靈)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고 신(神)을 형이상(形而上)으로 여기니, 이 설은 아마 분개(分開)가 너무 과한 듯하네. 만약 신을 이(理)로 여기고 령을 이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령은 이로 말미암지 않고 절로 령한 것인가? 만약 령을 기(氣)로 여기고 신을 기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면 신은 기를 기다리지 않고 절로 신한 것인가? 또 령이 아니면 중리(衆理)를 갖춘 것은 어떤 물이며 만사에 응하는 것은 어떤 물인가? 나는 이 때문에 "신은 실로 이의 묘함이고 령 또한 이의 묘함인데, 단지 이 령은 문득 능히 중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 다만 령은 체에 가깝고 신은 용에 가까우니, 령은 비교적 실하고 신은 비교적 허하다."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나의 설을 그렇게 여기지 않고 인하여 "정자와 주자가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설을 한 곳이 있었던가?……"라고 하니, 정자와 주자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허령 통철하여 만 가지 이가 모두 갖추어졌다."라고 한 것이 있고, 또 말하기를 "허령불매하여 중리(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기질(氣質)은 실한 것이고, 혼백(魂魄)은 반은 허하고 반은 실한 것이고, 귀신(鬼神)은 허의 분수가 많고 실의 분수가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대저 그대는 신(神)은 너무 무겁고 령(靈)은 너무 가볍다는 것을 보고서, 이(理)를 정의(情意)가 있고 물사(物事)를 조작함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령(靈)을 일개 구속되어 무용(無用)한 장물(長物)로 여기니, 이 생각이 이미 익숙하여 비록 주자의 설이 있어도 살피지 않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곽설(郛郭說)은 지난번 장흥(長興)의 한 사우(士友) 집에서 《주자어류》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소요부(邵堯夫)의 부곽설은 매우 좋으니, 만약 이 심(心)이 없다면 도리어 성(性)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곳의 서너 조목은 다 기억할 수 없네. 진북계(陳北溪)의 말에 "대개 부곽 가운데 허다한 인가의 연기는 문득 심중에 갖춘 이와 비슷하다.……"라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한 곳도 부곽으로 주재를 설명한 곳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네. 무릇 부곽은 거친 부분의 설인데도 오히려 또 지난(持難)24)이 이와 같이 심하니, 더구나 신령의 설은 어떠하겠는가? 답답하고 답답하네. 또 보건대 《주자어류》가운데 "동하는 곳은 심(心)이고 동하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깨닫는 것은 심의 이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의 령이다."라는 두 조목이 있었는데, 이른바 "주재하는 자[主宰者]는 심이고, 주재하는 것[主宰底]은 성이다."라는 한 조목은 보지 못했네. 그러나 위의 두 조목으로 미루어보면 아래 한 조목의 설은 또한 해가 없을 듯하니, 어떻게 여기는가? 이 말은 또한 실로 신뢰를 받지 못할 줄 알겠으나 근래 본 《주자어류》의 설은 서로 보여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대략 이렇게 언급하였네. 神靈說。向便奉答。未知入照否。大抵賢以靈爲形而下。神爲形而上。此說恐分開太過矣。若以神爲理。而以靈爲非理。則靈是不由理而自靈者耶。若以靈爲氣。而以神爲非氣。則神是不待氣而自神者耶。且非靈則且衆理者何物。應萬事者何物。愚故曰。神固理之妙。靈亦理之妙。而只此靈也。便能具衆理應萬事。但靈近體神近用。靈較實。神較虛。賢以鄙說爲不然。而因曰程朱何嘗有如此說處云云。程朱如此說不一。而賢其未之見耶。有曰虛靈洞澈。萬理處備。又曰虛靈不昧。以具衆理應萬事。又曰氣質是實底。魂魄是半虛半實底。鬼神是虛分數多實分數少底。此言皆何謂耶。大抵賢看得神太重靈太輕。以理作有情意有造作物事。以靈作一箇局束無用之長物。此念已熟。雖有朱子說而莫之省。奈何奈何。郛郭說。向於長興一士友家。得見語類。其中有曰邵堯夫郛郭說。甚好。若無箇心。却將性在甚處云云。如此處三四條。不可殫記。至陳北溪語曰。蓋郛郭中許多人烟。便是心中所具之理相似云云。未見有一處以郛郭說主宰處。夫郛郭是粗底說。而猶且持難如是之甚。況神靈之說乎。可菀可菀。且看語類中有曰。動處是心。動底是性。又曰。所覺者心之理。能覺者氣之靈二條。而至於所謂主宰者心。主宰底性一條。則未之見矣。然以上二條推之。下一條說。亦似無害矣。如何如何。此言亦固知其不見信。而近見語類云云之說。有可相示者。故略此及之。 지난(持難) 어렵게 여겨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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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보냄 與黃景涵 신령(神靈) 등의 설은 돌아가 찾아봄에 더욱 친절함을 보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진한 생각이 있어 이에 감해 대략 말하네. 무릇 사람이 천지의 기를 얻어 형체가 되고, 천지의 이를 얻어 성(性)이 되고, 이와 기가 합하여 허령의 오묘함이 있으니, 《대학》의 명덕(明德) 주에 이른바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한 것"이라 한 것이 이것이네. 기를 떠나지 않지만 기에 얽매이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구구한 혈기가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사람이 오직 령하기 때문에 만물의 주가 되고 심이 오직 령하기 때문에 일신의 주가 되는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흙이나 나무로 만든 일개의 인형에 불과하니, 어떤 말할 만한 주재(主宰)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심을 말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반드시 "지허지령(至虛至靈)"이라 하고, "허령불매(虛靈不昧)"라 하고, "허령통철(虛靈洞澈)"이라 하고, "허령지각(虛靈知覺)"이라 하고, "기지정상(氣之精爽)"이라 하고, "인지신명(人之神明)"이라 하고 이어서 "구중리 응만사(具衆理應萬事)"라 하고, "묘중리 재만물(妙衆理宰萬物)"이라 하였으니, 령이 심이 되고 심이 주가 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네. 심지어 면재(勉齋)25)의 말에 "심이 능히 성정의 주재가 되는 것은 허령지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북계(北溪)26)의 말에 "단지 허령지각이 있으니, 바로 심이 주재가 되는 바의 곳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모두 살펴 볼 수 있네. 동정적감(動靜寂感)에 운용(運用)이 갖추어 실려 있는 것은 령이 하는 것이 아님이 없고, 이른바 신(神)은 그 가운데 묘용 불측의 이름이니, 어찌 일찍이 령의 밖에 별도로 한 개의 신이 각각 지두(地頭)를 차지하여 대치하고 병립하는 것이 있겠는가? 지금 그대는 신을 이로 여기고 령을 기로 여기며, 신을 주재로 여기고 령을 자조(資助)로 여겨 허령불매 아래에 하나의 신 자를 첨가하여 중리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주(主)로 삼기에 이르렀네. 그렇다면 령은 밥만 축내는 게으른 일꾼이 되는 것에 불과하니, 또 어찌 자조(資助)하는 것이 있겠는가? 또 자조는 사람을 돕는 것이 마치 손을 맞잡고 힘을 함께하여 좌우에서 이끌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모시고 함께 밥만 먹는 재상이 되는 것에 불과하니, 또 어찌 주재하는 것이 있겠는가? 저기든 여기든 그 가한 것을 보지 못하겠네. 무릇 천하의 이는 한 때의 견해로 능히 다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진실로 한 때의 선입견을 고집하여 옆 사람의 말을 돌아보아 참정(參訂)하고 절충하지 않는다면 물결 속의 달을 완상하다가 하늘 위의 달을 잊어버리는데 이르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들 몇 사람은 함께 적막한 곳에서 서로 종유하고 있으니, 마땅히 충분히 토론하여 함께 귀결하는 곳이 있어야 할 것이고 모호하여 결정하지 못한 채 각자 이동(異同)의 견해를 세우는 것은 불가할 것이네. 어떻게 여기는가? 神靈等說。歸而求之。益見親切否。竊有未盡之懷。玆敢略布焉。夫人得天地之氣。而爲形。得天地之理而爲性。理與氣合而有虛靈之妙。大學明德註所謂。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者此也。不離乎氣。而不囿乎氣。此豈區區血氣之爲而已哉。入惟靈也。故爲萬物之主。心惟靈也。故爲一身之主。不然不過爲一箇土木偶而已。有何主宰之可言哉。是以朱子言心處不一。而必曰至虛至靈。曰虛靈不昧。曰虛靈洞澈。曰虛靈知覺。曰氣之精爽曰人之神明而繼之曰具衆理應萬事曰妙衆理宰萬物。靈之爲心。心之爲主。此可見矣。至若勉齋之語曰。心之能爲性情之主宰者。以其虛靈知覺也。北溪之語曰。只有虛靈知覺。便是心之所以爲主宰處。此皆可考也。動靜寂感。該載運用。莫非靈之爲也。而所謂神。特其中妙用不測之名。曷嘗於靈之外。別有一箇神。各占地頭而對峙倂立哉。今賢以神爲理。以靈爲氣。以神爲主宰。以靈爲資助。至於虛靈不昧下。添一神字。以爲具應之主。然則靈不過爲素餐之懶傭。又何資助之有哉。且資助是資人之助。如交手竝力。左提右挈之謂歟。然則神不過爲伴食之宰相。又何主宰之有哉。於彼於此。未見其可也。夫天下之理。非一時之見所能可了也。苟執一時先入之見。而不顧傍人之言。以爲參訂而折衷之。則幾何其不至於玩浪裏之月。而忘天上之月乎。吾儕若而人。與之寂寞相從。宜有爛漫同歸。切不可含糊依違。各立異同之見也。如何如何。 면재(勉齋) 황간(黃幹, 1152~1221)의 호이다. 자는 직경(直卿)이다. 주자(朱子)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면재집》, 《경해(經解)》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북계(北溪) 진순(陳淳, 1159~1223)의 호이다. 자는 안경(安卿)이다. 황간(黃榦)과 함께 주희의 고제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북계집》,《북계자의(北溪字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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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 如黃景涵 논한 여러 설은 지난 인편이 매우 바빠 언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 혹시 다시 생각하여 혹 새로운 견해가 있기를 기다린 것이네. 지금 며칠이 지났지만 오히려 깜깜하기는 여전하니, 도리어 한갓 답장을 못한 허물만 지고 있을까 두렵네. 이에 옛날 견해를 대략 펼치니,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주자가 말하기를 "기는 용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기라고 말하고 또 용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기는 실로 있지만 다만 용사하지 않는다."라는 것일 뿐이요, 어찌 일찍이 갑자기 바꾸어 성인의 기질이라 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 같이 하였던가? 비유하자면, 더러운 그릇에 물을 담았는데 물이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그 맑음은 깨끗한 그릇에 담았던 것과 다름이 없지만 그 그릇은 깨끗한 그릇과 같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네. 그렇다면 "미발일 때 기는 청탁이 없다."라고 한다면 가하지만 "미발일 때의 기질은 이발일 때의 기질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불가하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미발과 이발의 두 가지 경우의 기질이 있다가 잠깐 사이에 미치광이가 변하여 성인이 되고 순임금이 변하여 도척(盜跖)이 되니, 이것이 과연 의체(義諦)인가? 출입에 때가 없다는 것은 이것은 실로 심을 이른 것이니, 일찍이 기질 또한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다고 말했던가? 갔다면 어느 곳으로 갔으며, 왔다면 어느 곳에서 왔는가? 만약 기질이 성인 같지 않다고 해서 천하에 대본(大本)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또한 말이 되지 않네. 대본은 성에서 말한 것이니, 어찌 일찍이 기질 쪽에서 말한 적이 있던가? 기는 용사하지 않고 한 성(性)을 온전히 갖추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하의 대본이 되는데 해롭겠는가? 정자가 이른바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를 품부 받으면 이치상 선악이 있게 마련이고, 성 가운데는 원래 선악의 상대가 없다."라고 하였고, 주자가 이른바 "기질을 품부 받음에 비록 불선이 있지만 성의 본선에는 해롭지 않다."라고 한 것은 모두 이 뜻이네. 또 이치상에 선악이 있다는 것은 기품(氣稟) 상에서 말한 것이고, 악 또한 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유행하는 쪽에서 말한 것이니, 이것은 실로 평탄한 말인데 어찌 이와 같이 지난(持難)하는가? 나는 "이와 같다면 정자는 어찌 '기품(氣稟)' 두 글자를 '이유선악(理有善惡)'의 위에 말하였겠는가?"라고 하고, 그대는 또한 "이와 같다면 정자는 어찌 '유행(流行)' 두 글자를 하단에서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여, 말에 따라 답을 하여 마치 말 잘하는 것으로 서로 막는 듯한 것이 있네. 만약 능히 천천히 생각하고 정밀히 살펴 남이 말한 뜻을 다하기를 힘쓰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 '기품선악(氣稟善惡)'과 '성무선악(性無善惡)'을 상대해서 거론하여 설명하니, 이것은 최초로 무릅쓰는 큰 감투와 같은 말이 되네. 그 아래에 이른바 "어려서부터 선함이 있고 어려서부터 악함이 있다."라는 것은 하문의 "이어가는 것이 선이고, 물이 흘러 내려간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유행하는 의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 소주(小註)에 정자의 과불급(過不及)이라는 말이 있고, 주자의 악에 흐른다는 설이 있으니, 이것은 또한 유행의 의가 아니겠는가? 다시 상세히 살펴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所論諸說。向便。不惟悤甚未及。而且容更思。以待或有新見矣。今此數日。而猶懵然如前。還恐徒負逋答之過。玆以略申舊見。更諒之如何。朱子曰。氣不用事。旣曰氣。又曰不用事。其意蓋曰氣固在矣。而但不用事云爾。何嘗是忽然變化。爲聖人氣質。如賢者所喩耶。比如以汚器貯水。水止而不動。則其淸與淨器所貯者。無異。而其器則不可謂與淨器同也。然則謂未發時。氣無淸濁則可。謂未發時氣質。非已發時氣質則不可。若如賢喩。則未發已發。有兩般氣質。而俄忽之頃。狂變爲聖。舜變爲跖。此果義諦乎。出入無時。此固心之謂矣。而會謂氣質亦能忽然而來。忽然而去乎。去則去在何處。來則來自何處。若以氣質不如聖人。而謂天下終無大本。此亦不成說。大本是性上說。曷嘗是氣質邊說乎。氣不用事一性全具。此何害爲天下之大本乎。程子所謂人生氣稟。理有善惡。而性中元無善惡相對。朱子所謂氣質之稟。雖有不善。而不害於性之本善者。皆此意也。且理有善惡。以氣稟上說。惡亦不可不謂之性。以流行邊說。此固平坦語。而何持難若是耶。愚曰。如此則程子何以說氣稟二字於理有善惡之上耶。賢亦曰。如此則程子何不言流行二字於下段乎其隨語隨答有若以口給相禦者然。若能徐思精察。務盡人言之意。則不其可矣乎。氣稟善惡。與性無善惡。對擧說來。此爲最初頭大㔶頭語也。其下所謂有自幼而善。自幼而惡。卽下文繼之者善。水流而下之謂也。此非流行之義耶。況其小註。程子有過不及之語。朱子有流於惡之說。此亦非流行之義耶。更詳之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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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함에게 답함 答黃景涵 주자의 시27)에 "허령 묘용이 여기에서 나오기에, 내 몸의 주인 되어 성정을 통솔하네.[虛靈妙用由斯出 故主吾身統性情]"라고 하였는데, '사(斯)' 자는 심(心)을 가리켜 말하니, 제목을 심이라 했기 때문이네. 허령묘용은 단지 하나로 연결하여 설명하면서 능히 내 몸의 주인이 되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허령하기 때문에 능히 묘용하고 묘용하기 때문에 능히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은 뜻이 있었던가? 령이 통솔을 주관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고문(古文)을 배척함이 이와 같이 하면서 지금 감히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충막무짐(冲漠無眹)'은 나의 뜻은 처음에 또한 정일(精一) 쪽으로 알았는데, 지금 남당(南塘)의 말이 이와 같고 주자의 말 또한 이와 같은 곳이 있음을 보았네. 대개 충막무짐은 동정을 통괄하여 이의 면목이 본래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네. 그러나 정자가 "충막……"라고 한 아래에 '미응(未應)'과 '이응(已應)'으로 말한 것이 있으니, 또한 일괄 정(靜) 일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네. '비은(費隱)'에 이르러서는 더욱 동정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하네. 물이 동하는 것은 실로 비(費)이지만 정(靜)한 것은 유독 비가 아닌가? 동하고 정하는 것 같은 것은 비가 아님이 없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은(隱)이네. 남당의 설은 아마 가볍게 의논해서는 불가할 듯하네. 어떻게 여기는가? 면우(俛宇)28)가 논한 '신(神)' 자의 설은 집의 상자에 두고 아직 부쳐드리지 못했으니, 남겨두고 뒤의 인편의 기다릴 뿐이네. 고부(姑夫)를 고부라 칭하면서 스스로 부질(婦姪)이라 칭하고, 존고부(尊姑夫)를 존고부라 칭하면서 스스로 부종손(婦從孫)이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근거를 보지 못했으니, 다시 생각해 보시게."미발(未發)……"이라 한 것은 단안(斷案)을 얻지 못한 지 오래되었네. 그러나 그대의 말은 오직 성인인 이후에 미발의 중이 있고, 나의 말은 비록 보통사람이라도 또한 미발의 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네. 잘 관찰하면 두 가지의 말은 각각 마땅한 것이 있음이 되는 것에 해롭지 않아 폐해서는 불가하니, 만일 하나를 폐하고 하나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혹 한 쪽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할 듯하네. 또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탁박(濁駁)한 것은 장차 때로 용사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은 이것은 그렇지 않을 듯하네. 사람이 기를 품부 받은 것은 비록 같지 않음이 있지만 대개 우연히 순후함에 돌아갈 때가 있고 개연(介然)히 깨달을 때가 있으니, 어찌 일괄 때로 탁박하지 않음이 없다고 이르겠는가? 그렇다면 맹자의 야기(夜氣)와 평명(平明)의 기에 대한 설은 유독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이미 '미발(未發)'이라고 하였다면 저 탁박한 것은 또한 어떻게 유독 용사하겠는가? 다시 상세히 살펴보시게. 《춘추》를 읽는 것은 매우 좋네. 모름지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아울러 읽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이 책에 대해 만년에야 비로소 한 번 섭렵하였지만 능히 정밀하고 익숙하게 보지 못하였으니 모름지기 항상 한스러워 하고 있네. 지금 의의(疑義)에 대해 또한 감히 쉽게 대답할 수 없고, 다만 마땅히 조만간에 생각해서 가부를 질정하겠네.심설(心說)을 매번 이렇게 제기하니,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뜻이 지극히 독실하고 지극할 뿐 아니라 남의 혼몽함을 근심하여 열어서 구원해 줄 수 있기를 생각하는 것이니, 그 의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지난 편지는 실로 소소하게 맹렬한 단서가 없지 않았는데 개의치 않고 오히려 또 이렇게 말하니, 그 넓게 포용한 장후(長厚)함은 실로 보통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매우 공경하고 감사하네. 만약 다시 심기를 내리고 평안히 하여 반복하여 논변해서 황연히 하나로 귀결되는 데 이른다면 그 다행함은 또 어떠하겠는가? 지금 멀리 다른 설을 인용할 필요가 없고 단지 그대 편지 속의 몇 조목 말로 말해보겠네.주자가 말하기를 "성이 유행함에 심이 그것의 주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심(心)' 자는 과연 오로지 이로서 말한 것인가? 선사께서 말하기를 "사람에 있어서는 동작과 운용이 주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주(主)' 자는 과연 이로서 말한 것인가? 이미 오로지 그 이를 말한 것이 아니라면 능(能)과 소(所)의 구분이 없을 수 없음이 주자가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말한 것과 같으니, 또 무엇이 방해이겠는가? 군(君)이 주재가 되지만 부여받은 직분이 아니라면 주재가 될 수 없고, 심이 주재가 되지만 부여받은 성이 아니라면 능히 주재가 될 수 없으니, 어떻게 여기는가? 하늘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이가 주가 되고, 사람은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주가 되네. 그러나 심이 주가 되는 것이 바로 이가 주가 되는 까닭이네.효건(孝巾) 이것은 시속의 제도인데 그 제도는 예문에 보이지 않으니, 봉합(縫合)이 앞에 있고 뒤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한지 모르겠네. 그러나 길관(吉冠)은 왼쪽으로 향하고 흉관(凶冠)은 오른쪽으로 향한다는 설로 미루어보면 뒤에 있어야 마땅할 듯하니, 오른쪽이 음이 되고 뒤가 또한 음이기 때문이네. 또 모든 관의 봉합이 뒤에 있으니, 그 마땅함을 얻은 듯하네. 신(神)이 태원(太元)으로 돌아간다는 설은 나의 뜻 또한 그대의 말과 같네. 미리 신주[祠板]를 적는 것은 그 가함을 모르겠으니, 비록 심하게 눈 내리고 춥더라도 어찌 한 줄이나 반줄을 쓸 수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만일 심한 이유가 아니라면 문득 고례(古禮)를 고쳐 편리함에 나아가는 것은 불가하니,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예를 제 마음대로 남에게 허여 한다29)는 꾸지람이 없겠는가? 이것은 남의 이런 질문에 답할 때 살펴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불가하네. 집안의 걱정이 평상을 회복하면 바라건대 혹 한 번 찾아와 주겠는가?들으니 그대는 근래 초서와 예서 같은 기예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것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실로 좋지만 그대에게는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어떠한데 이런 등의 기예에 구구하게 날을 허비한단 말인가? 애장(艾丈)30)이 '소이(所以)' 두 글자로 이단에 가깝다고 한 것은 이것은 한 때 우연히 말함에 지나치게 통쾌하게 한 말인데 그대는 "만약 주재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은 이단이 아닌가?……"라고 여기니, 애장은 이미 우연히 실수한 것인데 그대는 이에 이것을 끌어들여 증명하여 그 설에 일일이 나아가려고 하는가? 어찌 너무 지나치게 믿고 너무 예리하게 꺾는 것을 이와 같이 하는가? 그대는 혹 이런 기상이 없지는 않을 것이네. 이것은 비록 작은 흠이지만 또한 온전히 아름다운 도는 아니니, 만약 단칼로 베어 내지 않는다면 또 어찌 작은 흠에 그치지 않을 줄 보장하겠는가? 우리들이 서로 향하는 마음에 만약 말을 다하여 서로 규계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른바 남을 위하여 도모함에 충심을 다한다는 뜻이겠는가? 더구나 그대가 나에게 간절하게 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지극한데 내가 보답할 것은 과연 어떤 일이겠는가? 항상 부족하고 부끄럽던 차에 삼가 이 일전어(一轉語)31)를 드려 그대가 혹 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니, 어떻게 여기는가? 보여준 용계(龍溪)32)의 설 제1조목에 대해 심은 실로 형기(形氣)와 신리(神理)를 겸하였다고 여기고 능히 주재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신리에 있다고 하니, 이 설은 실로 좋네. 그러나 이 '신(神)' 자를 그대는 이(理)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 인식하지 않는가? 제2조목에 대해 군(君)과 신(臣)을 합하여 한 나라의 주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는데, 이것은 비긴 것이 정밀하지 못한 듯하네. 심은 성과 지각을 합한 이름이니, 성과 지각을 나누면 심이 될 수 없네. 군과 신을 합하면 군이 될 수 없고 이와 기를 합하면 실로 주재라 이를 수 없지만 성과 지각을 합하는 것 또한 주재라 이를 수 없는가? 주자는 오히려 지각을 주재라고 하였네. 제3조목에 대해 물칙(物則)의 칙은 이(理)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그 물은 이를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이니, 하나라도 빠뜨리면 물을 이루지 못한다고 여긴 것은 또한 옳네. 내가 일찍이 "이를 말하면 기를 섞을 수 없고 기를 말하면 이와 떠날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이러한 것이네. 그대는 이미 이것을 알았다면 유독 령(靈)이 주가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가 되는 소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심이 음양과 같은 것을 태극이라 여기면서 유독 심의 령을 주재로 여기지 않는가? 또 심이 음양과 같은 것을 이기를 겸하였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곧장 음양을 바로 가리켜 태극이라 하는 것이 가한가? 령을 주재로 여기면 령은 이 가운데의 일이니, 이가 주재가 되는 것은 실로 여전하네. 지금 령을 주재로 여기면 이가 주재를 잃을까 두렵고 이를 주재라 하면 령이 쓸데없는 곳으로 돌아갈까 두렵기 때문에 곧 령을 일러 이라고 하였네. 이는 절로 하나의 령이 있고 기는 절로 하나의 령이 있으며, 이는 절로 하나의 신이 있고 기는 절로 하나의 신이 있으며, 령은 능히 주재하는 것이 있고 능히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신은 능히 묘용하는 것이 있고 능히 묘용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무슨 의체(義諦)인가? 그대의 견해로 천착하는 것이 여기에 이를 줄 생각하지 못하였네. 정자가 말하기를 "심은 이와 하나이지만, 사람이 합하여 하나로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이 바로 주재하는 곳이네. 심과 이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가하고, 심이 문득 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고, 령이 문득 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니, 앞에서 이른바 "령(靈)이 주가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가 되는 소이이다."라는 것은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또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이 바로 주재하는 곳인데, 지금 이에 나누어 둘로 하여 하나의 심 안에 두 개의 신과 두 개의 령과 능주(能主)와 불능주(不能主)의 구분이 있다고 여기니, 가하겠는가, 불가하겠는가? 보내온 편지에서 내가 겨우 이 이가 있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이 령이 있는 것이 마치 세상 사람이 기는 이에 근본하기 때문에 이가 주가 된다는 설과 같다고 기롱하면서 그 진체(眞體)와 묘용(妙用)은 지극히 신령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여전하다고 하였네. 무릇 이가 주재가 되는 것은 그 근원에 이 이가 있기 때문이고 기가 복역(僕役)이 되는 것은 그 뿌리가 이에 근본하기 때문이니, 어찌 이것 밖에 별도로 주재하는 것이 있음이 마치 호령을 행하고 기세를 부리는 것 같이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에 작용이 있는 것이 분명하네. 그대가 이른바 "신(臣)이 그 수고로움을 맡고 군(君)이 그 공을 차지한다."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 폐단이 오직 군이 그 수고로움을 맡을 뿐만 아니라, 전날의 여위(輿衛)들로 하여금 승진하여 오늘의 주재가 되게 하니, 그 명위(名位)가 도치되는 것이 과연 어떠한가? 피차간에 모두 정견(定見)이 없네. 다만 구구한 밝음으로 억지로 더듬고 괴롭게 찾는다면 비록 혹 다행히 하나를 터득함이 있더라도 도리어 도에 이반되고 참을 어지럽히는데 귀결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 생각건대 적지 않을 것이네. 지금 이후로 더욱 존양(存養)에 힘써 서서히 궁리 격물의 공부를 더하여 날로 달로 매진한다면 환연(渙然)히 회합(會合)하는 날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장재(張載)가 말한 "형이 있은 다음에 기질의 성이 있다.[形而後有氣質之性]"라는 것의 이 '형' 자는 '형생(形生)'의 형인가, '형현(形見)'의 형인가? 맹자가 말한 "뜻이 한결같으면 기를 움직이고, 기가 한결같으면 뜻을 움직인다.[志一則動氣 氣一則動志]"라는 것의 이 '동' 자는 단지 지기(志氣)의 경중이 서로 도움이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겠는가? 아니면 윗 문장에서 부동심(不動心)을 설명해 오면서 동심(動心)의 동을 위한 것이겠는가? 앞의 말대로 본다면 뜻이 기를 움직이는 것은 선이고 기가 뜻을 움직이는 것은 불선이며, 뒤의 말대로 본다면 뜻이 기를 움직이는 것과 기가 뜻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불선이니, 어느 설이 옳은지 모르겠네. 원컨대 그대는 이 상하의 두 조목에 대해 시험삼아 한 마디 해주기를 바라네.지동(志動) 기동(氣動)의 설은 추후에 생각해 보니, 한주(寒洲)가 지동(志動)을 좋게 여긴 것은 실로 불가하고, 애산(艾山)이 말한 것은 과연 이치가 있는 듯하고, 지금 선사의 말을 보니 맹자의 본 뜻을 얻었다고 할 만하겠네. 朱子詩。虛靈妙用由斯出。故主吾身統性情。斯字指心而言。其命題以心故也。虛靈妙用。只是一串說來。而能主吾身統性情者也。何嘗有虛靈故能妙用。妙用故能統性情。如賢者云云之意耶。不欲許靈以主統。故强排拶古文如此。而今曰不敢排拶云耶。冲漠無眹。愚意初亦以精一邊知之。今見南塘之言如此。朱子之言。亦有如此處。蓋冲漠無眹。統動靜而言理之面目。本來如此也。然程子於冲漠云云之下。以未應已應言之者。有之則亦恐不可槪謂之非靜一邊也。至於費隱。尤不可以動靜言。物之動者。固費。而靜者。獨非費耶。若動若靜。無非費也。而其不可見不可聞者。乃其隱也。南塘說。恐不可輕議之也。如何如何。俛宇論神字說。置之家篋。未得付呈。留待後便耳。姑夫稱姑夫。而自稱婦姪。尊姑夫稱尊姑夫。而自稱婦從孫如何耶。未見的據。更思之。未發云云。未得斷案久矣。然以賢之言。則惟聖人而後。有未發之中。以愚之言。則雖常人。亦不無未發之性。善觀之。則兩言。不害爲各有攸當而不可廢。如欲廢一而存一。則恐或不免爲一偏之歸。且來喩所謂濁駁者。將無時而不用事。此恐不然人之氣稟。雖有不同。而槪有偶然回淳時。有介然覺悟時。豈可槩謂無不濁駁耶。然則郊聖夜氣平明之氣之說。獨何謂耶。旣曰未發。則彼獨駁者。亦何以獨用其事耶。更詳之也。春秋讀之甚善。須併胡氏傳而讀之如何。愚於此書。晚始一番涉獵。而未能精熟。尋常竊恨之。今於疑義。亦未敢容易仰對。第當早晩入思。以質可否也。心說每此提起。不惟其不得不措之意。極爲篤至。而悶人之昏蒙。思有以啓援之者。其義豈偶然哉。 前書固不無小小凌厲之端。而不以介慮。猶且云爾。其含洪長厚。實非常調人可算也。欽感萬萬。若復降心平氣。反復論辨。以至於怳然歸一。則其爲幸。又何如哉。今不必遠引他說。只以賢書中數條語。言之。朱子曰性之流行。心爲之主。此心字。果專以理言之耶。先師曰。在人則動作運用爲主。此主字。果專以理言之耶。旣不是專言其理。則不容無能。所之分。如朱子能覺所覺之云。又何妨也。君爲主宰。而非所賦之職。不得爲主宰。心爲主宰。而非所賦之性。不能爲主宰。如何如何。天無爲。故理爲之主。人有爲故。心爲之主。然心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也。孝巾此是俗制。而其制度不見於禮文。縫合之在前在後。未知其如何爲可也。然以吉冠向左。凶冠向右之說。推之。似當在後。有爲陰。後亦陰故也。且凡冠之縫在後。似得其冝。神返太元之說。鄙意亦如賢言。預書祠板。未知其可。雖甚雪寒。豈有不得書一行半行之理乎。如非甚故不可輒改古禮以就其便。不然。豈無以禮許人之誚乎。此於答人此等之問。不可不審愼也。庭憂復常。幸。或一顧否。聞賢近來。頗能用功於草肄之藝。果然耶。此在他人固善。而在吾友所期望爲何如。而乃區區費日於此等伎倆耶。艾丈以所以二字。謂近於異端者。是一時偶然發之太快之語也。而賢以爲。若云有所以主宰。則是非異端耶云云。艾丈旣偶失之矣。而賢乃援以證之。曲就其說耶。何信之太過。折之太鋭乃爾也。賢者或不無此等氣象。此雖小疵。亦非全美之道。若不斷下則又安知不止爲小疵耶。吾輩相向。若不盡言相規。豈所謂謀忠之意哉。况賢之所以惓惓於我者。愈益勤至。而我之所以報答者。果何事耶。尋常斂愧之餘。謹貢此一轉語。以企賢者之或有取焉。如何如何。所示龍溪說第一條以爲。心固兼形氣神理。而至其所以能主宰者。則在於神理。此說固好。然此神字。賢其不認以理之自爲耶。第二條以爲。不可合君與臣爲主於一國。此其比擬。恐不精。心是合性與知覺之名。分性與知覺。不得爲心。合君與臣不可爲君。合理與氣。固不可謂主宰。合性與知覺。亦不可謂主宰乎。朱子猶以知覺而謂之主宰也。第三條以爲。物則之則。單指理言之。而其物兼指理言之。闕一不成物者。亦是。愚嘗曰。言理則不可混氣。言氣則不可離理者此也。賢旣知此。則獨不知靈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何耶。以心猶陰陽爲太極。而獨不以心之靈爲主宰耶。且以心猶陰陽。謂兼理氣則可。直以陰陽謂正指太極可乎。以靈爲主宰。則靈是理中事。理之爲主宰。固自若也。今以靈爲主宰。則恐理失主宰。以理謂主宰。則恐靈歸無用。故乃喚靈爲理。至於理自有一靈。氣自有一靈。理自有一神。氣自有一神。靈有能主宰者。有不能主宰者。神有能妙用者。有不能妙用者。此何義諦。以吾友之見。而不意穿鑿至此也。程子曰心與理一人不能會之爲一。心與理一。正是主宰處也。謂心與理一則可。謂心便是性則不可。謂靈便是理則不可。向所謂靈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者。非心與理一之謂耶。且心與理一。正是主宰處。而今乃分而二之。以爲一心之內。有二神兩靈能主不能主之分。可乎不可乎。來喩譏我僅見其有是理。故有此靈。如世人之氣本於理。故理爲主之說。而其無眞體妙用。至神而不測者。自如也。夫理之爲主宰。以其原有是理故也。氣之爲僕役。以其根本於理故也。豈外此而別有所主宰。如行號令作氣勢之爲耶。然則理之有作用。決矣。賢所謂臣任其勞。君居其功者。果安在也。其敝不惟君任其勞。而使前日之輿衛。升爲今日之主宰。其名位之倒置。果何如耶。彼此俱無定見。但以區區之明。强探苦索。雖或幸有一得。而反不兔於畔道亂眞之歸。想不少矣。自今以往。益務存養。徐加窮格。日邁月征。不無渙然會合之日。如何如何。形而後有氣質之性。此形字是形生之形耶。是形見之形耶。孟子志一則動氣。氣一則動志。此動字。是特言志氣輕重互相資助之義耶。抑自上文不動心說下來。而爲動心之動耶。以前言。則志動氣是善。氣動志是不善。以後言。則志動氣。氣動志。皆是不善。未知何說爲得。願吾友於此上下二條。試下一言爲望。志動氣動之說。追後思之。寒洲以志動爲好底。固不可而。艾山所言。果似有理。今見先師之言。可謂得孟子本意矣。 주자의 시 〈성리음(性理吟)〉가운데 마음을 읊은〈심(心)〉에 나오는 구절이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자는 명원(鳴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한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면우집》이 있다. 예를……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에게 사사분(司士賁)이 묻기를, "시신을 침상 위에 두고 습(襲)을 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자유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는데, 현자(縣子)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분에 넘치는 짓을 하도다, 자유여. 예를 제 마음대로 남에게 허여하도다.〔汰哉叔氏專以禮許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애장(艾丈)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애산(艾山)' 참조. 일전어(一轉語) 선가(禪家)에서 유래한 말로,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마디 어구를 말한다. 용계(龍溪) 류기일(柳基一, 1845~1904)의 호이다. 자는 성존(聖存), 또 다른 호는 용서(龍西),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용서고(龍西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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